선교사열전 ㉙ 3·1운동의 34번째 민족대표 캐나다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선교사〔Frank William Schofield: 석호필(石虎弼) 1889~1970〕
수의사·세균학자·위생학자, 외국인 최초 국립현충원 안장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대한문 앞에서 만세를 외치는 민중들’ 사진 스코필드, 일러스트 조미연. 2016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석호필(石虎弼) 1889~1970〕 선교사는 영국 태생의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이자 수의사, 세균학자, 위생학자이며, 외국인 최초로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대한민국 독립유공자이기도 하다. 스코필드는 ‘3·1운동의 34번째 민족대표’라고 불리는 선교사다.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선교사(캐나다)
프랭크 스코필드는 1889년 영국 워릭셔(Warwickshire) 주 럭비(Rugby)시에서 4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19살에 캐나다에 이민했다. 그는 농장에서 가축을 돌보며 수의학에 관심을 두었고, 토론토대학교 온타리오 수의과대학에 입학해 1914년 졸업했다.
그러나 스코필드는 21살에 소아마비를 앓아 왼팔과 다리가 불편했다. 그래서 그는 평생 힘든 몸을 지니고 살았다.
에비슨에게 한국선교 요청받다
스코필드는 18살 때, 아버지가 근무하는 영국 클리퍼 대학(Cliffe College)에서 한국 유학생 여병현을 만나 한국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접했다. 이후 그는 토론토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세균학 강사로 일할 때 한국에서 사역하던 에비슨에게서 한국선교를 요청받았다.
에비슨과 스코필드는 토론토대학교에서 이미 친분이 있었기에 에비슨은 신앙과 전문성을 갖춘 스코필드에게 세브란스 행을 적극적으로 요청했다.
1916년 한국에 온 스코필드는 세브란스 의학교에서 세균학과 위생학을 가르쳤고, 영어 성경반을 조직해 학생들에게 틈틈이 성경 말씀을 가르쳤다.
1919년 3·1운동 이후 일본의 압력으로 1920년 캐나다로 귀국하기까지 4년간 한국에 머물면서 3·1운동에 대한 일본의 비인도적인 만행을 세계에 알리고 조선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도와 이후 ‘민족대표 34인’으로 불렸다.
세브란스의학교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는 스코필드(1918)
스코필드는 캐나다로 귀국한 뒤에도 캐나다와 미국에 한국을 소개하며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심지어 이승만이 머물던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서 자신의 3·1운동 견문록인 ‘끌 수 없는 불꽃’(The Unquenchable Fire)을 출판하려 했지만, 재정적인 문제로 실패했다. 이것은 한국을 위해 그토록 헌신한 사람의 책 한 권을 내줄 수 없었던 한국교회의 자화상일 수 있다. 그는 모교 토론토대학교에서 봉직하다가 1958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스코필드 기금’을 마련해 고아들을 도우며 학생들을 가르쳤고, 언론 활동으로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3·1운동 만세와 고난의 현장을 카메라에 담다
1919년 2월 5일 저녁 3·1운동이 있기 직전에 스코필드는 자신의 연구실에서 이갑성과 비밀리에 만났다. 세브란스 학교의 직원인 이갑성은 스코필드를 찾아 두 가지를 부탁했다. 그는 스코필드에게 독립 선언문 사본을 보여주면서 3월 1일 현장에서 사진을 촬영할 것을 요청했다. 평화시위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사진을 찍어달라는 것이다.
민족대표 33명 중 하나인 이갑성은 3·1운동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외국 선교사들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조심스럽게 선교사들을 방문한 것이다. 이갑성은 또 독립 선언문을 영어로 번역해 미국 백악관에 보내 달라고 당부했다. 1919년 3월 1일, 이갑성의 요청을 흔쾌히 수락한 스코필드는 한 손에 사진기를, 다른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파고다 공원에 갔다. 약속 시각이 되자 사람들이 태극기를 꺼내 들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스코필드는 1919년 3월 1일 생생한 현장의 모습을 사진에 담기 위해 군중을 잘 내다볼 수 있는 곳을 물색했다. 그러던 중 일본인 구역의 상점을 발견하고 2층 베란다로 올라가 사진을 찍었다. 이러한 사정을 알지 못한 일본인 여주인이 낯선 침입자가 들어온 것을 알고, 빗자루를 들고 그를 막무가내로 때렸다. 스코필드는 안 통하는 언어와 몸짓으로 이리저리 변명하다가 카메라를 들고 줄행랑을 쳤다.
스코필드는 총칼을 들고 진압하는 일제의 모습과 거기에 굴하지 않고 독립 만세를 외치는 조선인들의 모습을 고스란히 사진기에 담았다. 3·1운동 사진 대부분은 스코필드 박사가 촬영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만세운동과 독립운동가들이 감옥에서 당한 고문을 사진과 글로 세계 언론에 알렸다. 스코필드가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 때문으로 알려졌다.
3·1운동 만세시위가 시간이 흐르면서 몇몇 지역에서 과격하게 전개됐고, 일부 일본인 순사들이 죽고 다치는 등 일본의 피해가 생기자 일본은 시위 마을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하기 시작했다.
제암리 사건
경기도 화성 제암리와 수촌리 지역에서 행해진 일본의 무차별적인 살육과 마을과 교회에 대한 방화는 이러한 상황을 가장 비극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다.
경기도 화성시 향남면 제암리(두렁 바위)는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전체 31가구 가운데 2가구를 제외하고는 순흥 안씨들이 모여 사는 평화로운 집성촌이기도 하다. 그러나 1919년 4월 15일, 이곳은 죽음의 마을로 바뀌었다. 1919년 봄 제암리의 기독교와 천도 교인들이 수원·화성 지역의 다른 민중들과 힘을 합쳐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이에 일제는 이 지역 독립운동의 중심을 이루는 기독교와 천도교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제암리 감리교회에 이들을 가두고 무자비한 학살을 저질렀다. 15일 오후 2시 아리타 중위가 이끄는 11명의 헌병이 마을의 15살 이상 된 남자들을 예배당에 모으고 문에 못질한 후 불을 지르고 총을 난사하는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수촌리 사건
일본은 이런 만행을 은폐하려 했지만, 당시 조선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스코필드를 비롯한 선교사들이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폭로해 세계에 알려지게 됐다.
감리교의 노블과 장로교의 언더우드(Horace H. Underwood)도 화성을 답사해 보고서를 영사관에 제출했다. 스코필드도 제암리와 수촌리 소식을 듣고 4월 17일 사건 현장을 방문해 사진으로 담아 고향과 세계에 보냈고, 캐나다 선교부에 ‘제암리 학살 만행 보고서’와 ‘수촌리 학살 만행 보고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어느 국가에서도 외교적 조치를 진지하게 취하지 않았고, 일본은 오히려 배후에 선교사들이 있다고 판단해 그들을 조사하고 체포했다.
가장 과격한 선동가, 독립운동 수감자들에게 고약까지 넣어주다
스코필드는 1919년 5월 11일 자 ‘서울프레스’(The Seoul Press)에 ‘서대문 감옥’을 ‘서대문 요양소’ 혹은 ‘서대문 직업학교’라고 쓴 기사를 보고 분노를 참을 수 없어 다음 날 기고문을 작성해 일본의 야만적인 처우와 감방의 상황을 비판했다. 이에 스코필드는 역설적으로 서대문 감옥을 방문해 야만적인 행위의 진실성을 확인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1930년대 서대문 형무소 전경
특히 그는 서대문 감옥에서 ‘여자 감방 8호실’을 방문했을 때, 노순경 유관순 어윤희 이애주 등을 만나 심한 고문과 야만적인 매질을 당했다는 것을 확인하고 여성 지도자들을 위로했다. 스코필드는 또한 하세가와(長谷川好道) 총독과 야마가타(山縣伊三郞) 정무총감을 찾아가 이에 강력하게 항의하기도 했다.
1919년 11월에는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사건이 일어나 회장 김마리아를 비롯한 여성들이 대구 감옥에 수감됐다. 이때도 스코필드는 직접 그곳을 방문해 성경 말씀을 전하며, 고문당한 이들에게 미국제 고약을 넣어주는 등 그들을 위로했다. 감히 다른 선교사들이 따라올 수 없는 용맹스러운 행동이다. 일본에 의해 ‘가장 과격한 선동가’(Arch Agitator)로 낙인찍힌 스코필드는 1920년 강제로 출국당했다.
수의학자로서의 스코필드
세계적으로 저명한 수의학자인 스코필드는 평생 140편이 넘는 논문과 저술을 발표했다. 수의병리학, 수의세균학 관계 문헌 여러 곳에서 스코필드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고, 미국 수의학회에서 12번째로 ‘국제수의학회상’을 받는 영예를 차지하기도 했다.
특히 스코필드는 온타리오주 농장에서 자란 소의 질병의 원인을 입증하는 데 큰 공헌을 했는데, 이 연구는 수의학을 넘어 의학 분야까지 영향을 끼쳤다. 그 연구 덕분에 수백만 명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으며, 그 결과 질병 치료에 요즘도 사용되는 중요한 약품인 와피린(Warfarin)이 만들어졌다.
한국 현대사에 3·1운동 정신을 일깨우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세계적인 수학자로 우뚝 선 스코필드는 은퇴한 후에도 한국을 잊을 수 없어 1958년 다시 한국을 찾았다. 이제 나이가 들었지만, 불의와 부패를 지적하고 정의를 추구하는 스코필드의 삶의 자세만은 여전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서울대학교 수의학과에서 가르치며 고아들을 돕고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장학 사업에 힘을 쏟았다.
할아버지 스코필드는 이승만 정권의 부패와 독재를 신랄하게 비판했고, 4·19혁명 속에서 1919년 3·1운동 독립 만세 기개를 확인했다. 한국사회의 혼란과 부패 가운데 박정희의 쿠데타를 옹호했지만, 그가 민선 이양 약속을 어기자 호랑이 스코필드의 펜은 이내 무서워졌다. 여느 한국인보다 한국인의 기개와 정신을 더 사랑한 스코필드는 1970년 4월 별세했다.
※ 선교사 열전 이야기는 한국고등신학연구원(KIATS) 김재현 박사의 ‘한반도에 새겨진 십자가의 길’(KIATS) 자료 등을 참고문헌으로 편집했습니다.
출처 : 고신 뉴스 KN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