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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 생활이 익숙해질 무렵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좋지 못한 소문이 귀에 먼저 들어왔다. 알아서 좋을 게 없는 소문은 마음의 갈등을 일으켰다. 소문은 주로 여직공들로부터 많이 들려왔다. 서로 일하는 분야도 틀려 직접적으로 마주치는 일이 거의 없었고, 얼굴이 익숙한 여공도 없었다. 여공들은 하얀 무명 저고리에 까만 치마, 그리고 머리에 하얀 두건을 쓴 한결 같은 복장이어서 다 똑같은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소문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전파되었다. 좋지 못한 소문은 물살보다 더 빠르게 흘러 다녔다. 벽을 타고 담장을 넘어 문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불륜과 치정, 폭력과 악행이 오랫동안 수면 아래에서 생명을 유지했다.
공장은 일본의 유수한 재벌기업 마쓰이의 하청 공장이었다. 공장장을 비롯한 사무직 간부들은 다 조선인이었다. 가끔 일본 본사의 고급 간부가 시찰을 나올 때면 마치 왕이 행차하는 것처럼 온 공장이 긴장했다. 공장장을 비롯한 조선인 간부들은 비굴한 웃음을 흘리며 눈치 보기 바빴다. 그 모습이 눈꼴 사나움을 넘어서 가련할 정도였다.
일본인이 가고 나면 공장장이 왕이었다. 아니 폭군이었다. 얼마 전 그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은 사라지고, 기세등등한 눈초리와 행동이 하늘을 찌르는 듯했다. 이 조그만 왕국의 폭군은 주성열이라는 공장장이었다.
50줄이 넘은 이자는 행동부터가 거만했다. 배가 불룩하고 살이 뒤룩뒤룩해서 걷는 것부터 건들건들했다. 조선인 누구를 만나도 존대가 없을 뿐더러 조금만 언짢은 일이 생기면 쌍욕을 입에 달고 살았다. 아무 이유 없이 화를 내는 건 예사였고 시도 때도 없이 아랫사람에게 따귀를 올리거나 정강이를 걷어차는 일이 다반사였다.
권위 의식도 강해서 조선인 누구도 그를 공장장이라 호칭하지 않고 사장님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뒤에서 그를 ‘연산’이라 불렀다. 주성열을 대하는 자신들의 이중적 태도보다, 주성열의 일본인 상관을 대할 때와 조선인 부하를 대할 때의 그 표리부동함에 사람들은 치를 떨었다.
그는 공장에서 십여 리 떨어진 읍내에 살았다. 경찰 오토바이 옆에 승합 좌석이 달린 기묘한 모양의 오토바이로 출퇴근했다. 처음에는 오토바이 기사를 두고 자신은 옆에 달린 승차석에 앉아 다녔다. 출퇴근 길이 달구지 달리는 시골길이라 곳곳에 승차감이 좋지 않은 길들이 많았다. 그는 틈나는 대로 공장 노동자를 동원해 길을 보수하게 했다.
그래도 육중한 몸으로 그 길을 오가는 게 편할 리 없었다. 출근하면 짜증이 났고, 퇴근하면 온몸이 힘들어 기진맥진했으니, 그 신경질이 말이 아니었다. 한 번은 울퉁불퉁한 시골길을 돌다 길바닥에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다리에 석고붕대를 감고 나타난 그를 사람들은 들키지 않게 키득거리며 즐거워했다. 결국 오토바이 기사를 쫓아내고 자신이 손수 운전하고 다녔다.
일주일에 한두 번은 공장 내에 있는 숙소에 기거했다. 공장 내에 기거할 때는 대체로 얼굴이 반반한 여직공과 음탕의 밤을 지새우기 일쑤였다. 공공연한 비밀이었지만, 아무도 내색하지 않았다. 특히 상대한 여자가 발설하는 경우는 연산군을 능가하는 폭력이 가해진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군말이 새어나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은밀한 곳에서 연산을 조롱하고 성토했다.
“뭔 저런 씨부럴놈이 있디야. 어린 처녀들이 지 노리갯감도 아니고… 저 어린 순이를 반병신이 되게하여 쫓아뿌리고. 저놈은 조병갑의 현신이여, 악귀 같은 놈…”
저 옛날 동학농민운동을 일으키게 한 탐관오리 조병갑 고부군수를 빗댄 말이었다.
길동이 한달 쯤 지나니 이런 소문들을 좀 더 자세히 알게 되었다. 가슴에 뜨거운 것이 불끈거렸다. 추수 때가 되면 외상 곡물을 이자까지 쳐서 가져가는 지주보다 더 나쁜 인간이 있다는 사실에 치를 떨었다. 멀리서 그를 보면 눈에 안 띄는 게 상책이어서 몸을 피하곤 했다. 몸도 힘들지만 그런 악인의 눈치를 보며 살아가는 마음도 힘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어나서는 안 될 사건이 터졌다. 바람이 몹시 불고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 밤이었다. 공장 제일 높은 곳에서 추락사한 사고가 일어났다. 그 추락사 당사자는 공장장과 공공연한 관계를 갖고 있는 김숙자였다. 그녀는 정구 처의 고향 친구였다. 그런 까닭에 길상은 정구 처로부터 김숙자에 대한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끔찍한 친구의 죽음을 확인한 정구 처 경실은 놀라움에 못 이겨 친구와의 지난 얘기를 털어놓았다. 고향에서부터 여기 오기까지 주마간산식으로 이야기하다 끝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대신, 마치 자기한테 일어난 일처럼 정구와 길상이 옆에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린애처럼 꺼이꺼이 목놓아 울었다.
5년 전 숙자는 정구 처 경실과 함께 공장에 들어왔다. 직업을 알선하는 거간꾼들은 시골마을을 돌아다니며 갖은 감언이설로 젊은 애들을 부추겼다. 3년만 참고 일하면 논 서너 마지기는 장만할 수 있다고 선전했다. 지원에 응한 사람에게는 부모들에게 다소간의 선금을 건넸다. 소학교도 다니는 둥 마는 둥 하며 지내던 경실과 숙자는 의기투합해 고향을 떠났다.
하지만 둘도 없는 친구 사이였던 그들은 어느 때부턴가 소원한 관계가 되었다. 얼굴이 반반한 친구 숙자는 베틀에서 하는 일은 작파하고, 어느새 공장장의 주변에서 일하게 되었다. 주로 사무실 주변을 청소하고 여러 가지 잔무를 처리하는, 그야말로 남들이 부러워하는 업무를 맡게 되었다. 숙소도 독방에서 생활해서 자연히 동료들과 멀어지게 되었다. 숙자는 자신의 출세를 은근히 과시했다. 그럴수록 동료들과 점점 멀어지게 되었다.
그녀가 다른 동료와 소원해진 연유는 그녀의 보직 때문도, 그녀의 과시욕 때문도 아니었다. 그녀는 공장장과 은밀한 사이란 소문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녀의 은밀한 관계가 공공연한 사실로 알려질 무렵이었다. 두 친구는 같은 자리에 있을 기회가 있었다.
“경실아, 나도 다 안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지. 근데 나도 호락호락 안 넘어갈 것이여. 그 짐승 같은 놈, 내가 그만 둘 것 같나?”
숙자의 입에서 거친 언사가 튀어나오는 바람에 경실은 깜짝 놀랐다.
“숙자 너 무슨 소리하는 거여… 정 힘들면 고향으로 돌아가라. 니가 싫은데 어쩔 것이여.”
<계속>
첫댓글 건들건들...
소설속 악인에게서 보이는 누군가의 그림자 ^^
어느 선배님께서 달아주신..'천형'이라는 댓이 떠오릅니다
'남자는 기능이 다해 고철이 된 육체를 끌면서도 천형처럼 '성'을 버리지 못한다'
어떤 작가의 단언에 필적되는 댓글에
고개를 끄덕인 기억 있습니다.
한층 진흙속으로 빠져들어가는 이야기
주인공의 분노에 공감하며..
오늘도 고맙습니다
화이팅!!
19세기까지 인류의 평균 수명은 40살 정도. 이동 속도도 로마 시대에 도달한 속도를 넘어가지 못했다.
먹고 사는데 해방되지 못한 서민들의 애닯음은 "곡물의 열매가 포도 송이 만하게 포도 송이는 포도잔 만하게 열림"을 간구하는 고대인들의 기도문에 남아있다.
이렇게 스사한 먹고 사는 험한 세상을 어떻게 나같은 정신 무장을 가진 사람이 건나왔는지 아슬한 마음으로 돌아보는 이즈음,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는, 강화도 전등사에 적혀있는 한시구절 같다.
"온종일 바쁜 일 없이 한가로이 향사르며 일생 보내리라.
새소리 들으며 꽃보고 색과 공을 깨치네."
한국의 물가가 원체 저렴합니다.
삶의 체제가 자리 잡히면서, 또한 폭염으로 사회생활의 운신이 줄면서
돈을 쓰는 것이 거의 0로 근접합니다.
먹는 것 외엔 쓸 곳이 전혀 없어서 엥겔지수는 거의 100에 육박할듯합니다.
70%를 먹는 것에 쓰면 극빈이라고 하는데 나는 거의 100%인 듯.
집에서 책만 읽고 있다면 200만원 이하로 충분히 살 수 있을 듯 함.
이 곳 김해가 사람들이 찾아오기 교통이 불편해서 더욱 더 고립되어 있으니 오지의 섬에 살고 있는 듯함. 그래서 더욱 돈 쓸일없슴.
엥겔계수가 높지만 그렇다고 많이 먹느냐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이번 역이민 모임에서 한끼 먹는 다는 분들을 만나고 영향을 받아서 1.5끼 정도 먹으니 먹는데서 확연히 해방된 것 같고
아울러 삶의 세속적인 부분에서 아주 자유스러운 기분. 먹는 숫자를 줄이니까 하루도 너무 빨리 지나가 유일하게 차려 먹는 저녁이 돌아오는 속도가 너무 빠름. 그리고 벌써 저녁 그 성스러운 먹는 다는 의식을 치룰 의미있는 시간이 닥아오고 있습니다. 막걸리도 한 잔 할 수 있고.
보통 저녁 먹기 전에 한시간 정도 달립니다.
아무생각없이 천천히 달리면 육체적 평온함에서 떠오르는 가장 본질적인 긍정적인 생각의 행복감으로 저녁의 달리기를 지속하는데
내 나이에 매일 달린다는 것이 굳이 건강에 좋으리리고 생각하지 않는데 안 달리기가 쉽지 않슴. 달리면 너무 행복함으로.
오죽하면 생존을위해 성씨조차 갈아버렸을까...
독자(자칭 열린마음을 갖고있다고 생각하는 태생적 찐보수^)로서 주인공이 어떻게아픔과 분노를 넘어 자연스럽게 불의에 맞서 저항과 개혁을 뼈속깊이 가지게되는 과정을 숨죽이며 지켜봅니다...
권위에서 나오는 성착취는 시대를 불문하고 있었으나 보고 들을때 마다 마음속 분노와 저주를 불러 일으키는것은 어쩔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