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진목사/승리를 위한 준비 (수 5:1-15)
=영적무장론=
요 약
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할례와 유월절을 시행하고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는다. 할례는 세례의 예표요, 유월절은 구속의 예표이며, 무교병은 말씀과 성례의 상징이며, 볶은 곡식은 성령의 능력을 상징한다. 이처럼 승리를 위해서 할 일은 먼저 그리스도와 연합함과, 보혈로 말미암는 양심의 평화와, 말씀으로 무장하여 진리에 섬,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무장함이다. 이 예식들은 적지에서 목숨을 걸고 시행한 것으로 이 분야에 있어서 목숨 걸고 행해야 함을 시사한다. 이 예식이 끝난 직후에 승리의 검을 들고 나타난 군대장관 미가엘은 이상의 준비를 한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승리의 보장을 상징한다.
설 명
<승리의 원칙>
⇒ 이 네 가지는 목숨 걸고 해야 할 사항이다.
1. 복음에 서라
2절 "부싯돌 칼을 만들어 - 다시 할례를 행하라"
⇒ 생명 걸고 애굽 수치를 버림
2. 보혈 공로에 서라
10절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다"
⇒ 어린양의 피로서 절기를 지킴
3. 생각을 진리로 복음화시키라
11절 "무교병과"
⇒ 무교병은 예수님과 성경의 상징
4.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11절 "볶은 곡식을 먹었더니"
⇒ 뜨거움은 성령의 충만의 상징
(강해)
오늘은 "승리를 위한 준비"라는 제목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완전한 적지에 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기서 먼저 행할 중요한 일을 명령하셨습니다. 그것은 전 국민의 할례 시행, 유월절 준수, 그리고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이 말씀대로 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명령대로 준행한 결과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돕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인 미가엘이 이스라엘을 위해서 나타난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이제 승리를 위한 만반의 준비가 갖추어진 것입니다. 이는 놀라운 축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 성도들이 반드시 구비해야 할 아주 중요한 것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그 네 가지의 명령이 과연 무엇이기에 이 같은 놀라운 승리의 보장이 주어졌는가? 여러분, 궁금하지 않습니까? 한 마디로 그것은 우리 신앙의 기초를 견고히 하는 것입니다.
그럼, 신앙의 기초란 무엇입니까?
1. 예수 복음에 견고히 서야 합니다.
본문 2절에 "그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하셨습니다.
여기 할례를 시행하라는 여호와의 명령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말씀에 순종하여 부싯돌로 돌칼을 만들어 할례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할례의 대상은 광야에서 태어난 모든 2세 국민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약 40년 동안 할례를 시행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목숨을 건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왜냐하면 할례의 장소가 가나안 땅 적지였기 때문입니다. 할례를 시행하게 되면 그 따르는 통증으로 말미암아 군대의 전투력은 거의 제로상태에 이릅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는 당시에 이미 사용되던 철재 칼이 아닌 부싯돌로 만든 돌칼로 할례를 시행하라 명하셨으니 그 고통이 얼마나 더 하겠습니까? 또 치유력이 느린 장정들까지 모두 시행했으므로 시간이 지연됨은 물론 대단히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금도 의심하거나 불평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줄을 믿고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하였습니다.
여기 할례가 우리에게 주는 승리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할례는 신약의 세례와 같습니다. 할례는 이스라엘 공동체에 가입하는 언약적인 의식이요 더러움을 제거하는 정결 예식입니다. 이처럼 소요리문답 94문에 "세례는 물을 가지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씻는 성례인데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접합(接合)됨과 은약(恩約)의 모든 유익에 참여함과 주님의 사람이 되기로 약조함을 표시하여 인치는 것이다" 했습니다. 즉 세례는 죄 씻음과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은혜에 참여함 그리고 신앙고백의 약 네 종류의 의미가 있다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승리를 위한 첫 조건은 구원의 확신입니다. 이 확신은 앞으로 싸워야 할 죄와 세상과 육신과 사단 등 모든 것을 이기는 원천입니다.
그런데 할례란 부싯돌로 행하라고 했습니다. 부싯돌은 돌을 쳐서 불을 일으키는 돌이니까 불칼입니다. 이 돌칼은 쇠칼에 비해 매우 아픕니다. 그러므로 이 부싯돌의 의미는 불같은 연단을 뜻합니다. 연단은 행동으로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부싯돌로 할례를 행했으니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그러나 연단을 통한 믿음이라야 확실합니다. 이 불로 연단함이 없는 믿음은 견고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철저히 죄를 떨어버려야 합니다. 위험한 적지에서 부싯돌로 할례를 베푸는 것은 순교적인 신앙의 자세를 암시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승리의 원리만 알 뿐 범죄와 회개의 반복일 뿐입니다.
그 동안 말씀을 듣고도 옥토 밭처럼 견고히 서지 못한 것을 회개합시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복음의 개념을 알지 못하거나 복음은 알지만 견고히 서지 못한 것을 마음 아파해야 합니다. 골2:6-7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했습니다. 마술사 시몬은 이런 아픔과 노래가 없었기에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세례까지 받았어도 타락하고 만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재 세례는 있을 수 없지만 세례의 의미만은 견고히 해야 합니다. 즉 나는 예수를 믿음으로 죄 사람을 받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지금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 안에 영광스럽게 존재하여 있다는 확신입니다. 이 말씀은 성경의 요약이요 복음의 핵심이므로 결코 망각해서는 안됩니다.
또 롬8:29-30에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셨습니다. 이 확신을 우리는 구원의 확신이라고 부릅니다. 이 기초에 견고히 설 때 우리는 모든 악의 세력을 이길 뿐 아니라 풍성한 은총 속에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보혈 공로에 굳게 서야 합니다.
10절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 쳤고 그 달 십 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다"고 했습니다.
여기 유월절은 애굽에서 처음 시행한 후 시내 광야에서 다시 한 번(민9:1-5), 그리고 가나안에서는 처음 지키는 세 번째 유월절이었습니다. 본래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탈출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장자 죽음의 재앙으로부터 구원해 주신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영원토록 이 절기를 지키면서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구원해 주신 것을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40년 전 애굽에서와 같이 양을 잡아 그 피를 여호와께 드리며 유월절은 준수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유월절에서 가장 중심은 어린양의 피입니다. 애굽에서 여호와께서 애굽인들을 벌하실 때 마지막 재앙으로 장자를 치는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이때 이스라엘에게는 피할 길을 주셨는데 그것은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인방과 문설주에 바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믿고 피를 바른 집에는 죽음의 사자가 넘어가 죽음의 재앙이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이 양의 피는 예표적으로 대단히 귀중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만민의 죄를 사하시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예표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성도가 영적으로 승리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보혈공로를 믿는 것입니다. 이미 구원의 확신에 있는 성도들이라 할지라도 세상을 사는 동안 자범죄를 범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보혈은 원천적으로는 모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입니다. 그러나 자범죄의 순간마다 우리는 범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흘리신 사죄의 확신에 서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양심의 평안과 양심의 건강함이 중요한 승리의 조건입니다.
보혈은 하나님 편에서는 사죄의 근거와 인간 편에서는 양심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히9:22에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을 때 하나님의 법정에서는 이 보혈의 공로를 근거로 죄 없음이 선고됩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명칭으로 칭의입니다. 이 사실은 단회적이며 영구불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의 양심입니다. 겔18:4에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 했습니다. 범죄하거나 사죄의 확신이 없으면 양심의 가책으로 영혼에는 죽음의 재앙이 임합니다. 물론 그루터기마저 죽는 완전한 죽음은 아닙니다. 거듭난 영혼은 원리상 영생이 취소될 수 없고 타락이 불가능합니다. 회개하면 다시 소생하는 죽음입니다. 그런데 양심이 더러워지면 그 넘치던 은혜의 샘물도 그쳐버립니다. 심령이 답답하여 견딜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안의 이기는 생명은 약화 내지는 침체됩니다. 그래서 히9:14에 "양심으로 죽은 행실"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비밀을 가지려면 깨끗하고 건강한 양심을 소유해야 합니다.
그러나 죽지 않을 방법이 있습니다. 마음의 문에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음으로 바르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그리스도의 보혈 공로를 믿어 양심의 가책을 잠재우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자에게는 죽음이 결코 틈타지 못합니다. 그러나 회개는 빠를수록 좋습니다. 은혜 떨어진 후에야 영력을 회복하려면 힘이 듭니다. 물론 이 죽음이란 완전한 죽음이라기보다 비유하자면 그루터기만은 남은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회복이 가능합니다. 율법의 정죄는 사망입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이 양심과 율법의 정죄를 처리하지 못하여 사단에게 눌리는 신세를 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보혈의 확신을 소유하면 사단도 우리의 영혼을 넘어뜨리지 못합니다. 또한 평안한 양심 속에 성령이 충만하여 온갖 아름다운 열매와 능력이 맺혀져 하나님을 섬기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히9:14에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시겠느뇨" 했습니다. 그리고 보혈의 확신을 가지고 양심의 건강한 상태에서 기쁨으로 살아가면 온갖 저주의 세력들이 물러갑니다. 그러므로 성화는 철저한 칭의의 확신에서 꽃피우게 됩니다. 이 보혈의 기초가 견고하지 않으면 승리는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8:33) 외쳤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보혈공로 믿고 양심의 자유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마음의 문설주와 인방에 그리스도의 보혈을 바르는 일입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여 생각을 진리로 복음화시켜야 합니다.
11절에 "무교병과" 라고 했습니다.
여기 무교병은 누룩을 넣지 않는 떡을 가리킵니다. 본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상생활에서는 효모를 넣어 알맞게 부풀린 것을 구워 유교병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그러나 7일간의 유월절 행사 기간에는 율법에 의하여 무교병 만을 먹었으므로 그 기간을 무교절이라고 부릅니다. 그 외에도 무교병은 여호와께 소제를 드릴 때와(레2:4) 시간이 없을 때에 사용하였습니다(창19:3, 삿6:19, 삼상28:24).
그럼 무교병의 복음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객관적으로는 무교병은 죄도 없고 흠도 없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레2:4에 누룩을 넣지 않은 소제를 제단에 드렸는데 이 제물은 그리스도를 예표한 것이었습니다(요6:55). 또한 무교병은 조금도 하나님의 뜻과 틀림이 없는 성경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무교병 먹을 것을 우리에게 적용시키면 성경 말씀을 매일 말씀을 묵상하여 내 인간의 생각이라는 누룩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무교병은 특히 누룩이 없음이 강조된 떡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과 의식을 말씀으로 복음화시켜야 합니다. 이것이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분부한 율법책을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입으로는 주님을 불러도 생각이 복음화되지 않고 생각이 유교적 불교적 샤마니즘적 세속적이면 이미 그는 성공자가 아닙니다. 낙심하는 이유가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지 않고 다른 것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가장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려면 성경을 매일 읽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으면 믿음도 생기고 기도할 의욕도 생기고 회개하게 되며 주의 뜻을 깨닫고 방황하지 않으며 곁길로 가지 않고 말씀대로 실행하게 되어집니다. 말씀은 영혼의 완전식품입니다. 진정한 승리는 말씀을 날마다 묵상하는 자의 것입니다. 이런 신자는 시냇가의 심긴 나무처럼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는 것입니다.
4.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다시 11절에 "볶은 곡식을 먹었더니 그 땅 소산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라고 했습니다.
여기 볶은 곡식은 불에 볶은 것으로 이삭을 비벼서 알곡을 가려낸 것으로 지금도 아랍인들 사이에는 행해지고 있는 풍습 중의 하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이 볶은 곡식을 먹은 것입니다. 그랬더니 40년 동안 내리던 만나는 그쳐지고 이젠 그 땅의 곡식이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해에 가나안 땅에서 난 곡식으로 배불리 먹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럼 불에 볶은 곡식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성령의 능력 혹은 능력의 말씀을 상징합니다. 눅12:49에 예수님께서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다"고 하셨고, 행2:3의 오순절 성령강림의 표적도 불의 혀 같이 갈라진 것이 보였으며, 세례요한도 눅3:16에서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라고 외쳤습니다. 이처럼 성도가 영적으로 승리하려면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지 않으면 결코 환난을 이길 수 없습니다. 가나안 땅의 양식은 만나가 아닙니다. 이제는 볶은 곡식 즉 능력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제자들도 이 성령의 능력을 받기 전에는 날마다 말씀을 배웠지만 연약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의 능력을 받고는 죽음도 두렵지 않는 강한 자가 되었습니다.
왜 성도의 삶이 그토록 무력합니까? 왜 세상을 변화시키기는커녕 세상에 물들어 넘어집니까? 성령의 능력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복음을 알고 복음에 섰다고 하면서도 풍성한 영적 생활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신앙이란 신학에 그치지 않습니다. 신앙은 말이 아니라 능력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공로를 적용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부흥되는 교회들의 공통점은 모두 성령의 능력에 관심 갖습니다. 왜 이교도들을 개종시키지 못합니까? 왜 무속인들을 굴복시키지 못합니까? 왜 세상을 기쁘게 살지 못합니까? 성령의 능력 받음에 게으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분부하셨던 것입니다. 지금 한국에 제자교육에 열중하시던 분들이 점차 성령 방향을 보완하고 있습니다. 지식적인 교육만으로는 한계성을 느낀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 자체의 교훈이 그것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그 방향으로 선회한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지식과 아울러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승리의 귀한 조건입니다.
<결론>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네 가지의 승리의 조건을 가집시다. 믿음, 보혈, 말씀 그리고 기도는 생명처럼 중요한 필승의 요소들입니다. 이루신 복음에 섭시다. 보혈공로를 힘입읍시다. 생각을 복음화합시다. 성령충만하십시다. 이상의 조건을 실행한 이스라엘 앞에 빛나는 칼을 뽑아든 하나님의 천군장이 서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승리 보장입니다. 우리 모두 이 네 가지의 신앙의 기초를 잘 닦아 천군과 천사로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나타나 언제나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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