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man, no woman이 뭐냐고?
Evergreen의 두번째 아침
아침 일찍 혼자 일어나 Evergreen의 부설 식당에 왔다. 오늘은 발코니에 있는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늘 푸른’ 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숙소에는 정원에다 곳곳에 나무도 많아서 마치 자연 속에 있는 느낌. 아까 오는 복도에서 원숭이 모자와 마주쳤는데 공교롭게도 슬금슬금 도망치는(?) 길이 내가 식당으로 가는 길이라, 내가 뒤에서 쫓아가는 듯한 형국이 되었다. 앞서 걸어가는 원숭이 두 마리의 엉덩이를 보면서 아침을 먹으러 가자니 기분이 좀 묘하더라. 지금은 테이블 옆의 땅 바닥에 15마리는 족히 되어 보이는 참새들이 열심히 무엇인가를 쪼아 먹고 있다. 참새도 아침을 먹고 나도 아침을 먹는다. 이렇게 홀로 맞는 아침은 여유롭기 이를 데 없다. 나는 밥을 아주 천천히 먹는 편이라, 다른 사람이랑 먹으면 먹는 속도에 신경을 써야 하는데, 혼자 먹으면 그럴 필요가 없어서 좋다. 어제 시켰던 breakfast set를 시켜, 일기를 쓰고 어제 일을 정리하며 천천히 맛을 음미하면서 먹는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참 신기하다. 여행을 하면서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들은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나와는 전혀 상관 없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외국에서 살다가 인도에 까지 와서 나를 만나기도 하고, 우리 일행들만 해도 인도에 까지 와서 이렇게 만났으니 어찌 인연 깊은 사이가 아니겠는가. 사실 나를 포함해서 일행들 중에는 여행하면서 ‘데자뷰’ 현상을 가끔 겪고 있다.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그런 말을 꺼내자 저마다 ‘나도 그랬다’고 하더라고. 인도에 와 보니 문자 그대로 ‘꿈을 꾸는 듯한’ 느낌이다.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났을 때, 행복했던 꿈의 기억이 아련하게 남아서 다시 그 꿈 속으로 들어가고 싶을 때가 있지 않은가. 지금 나는 그런 꿈을 꾸고 있는 느낌이다. 지금 이게 전부 꿈이고, 갑자기 정신을 차려서 벌떡 일어나 보니 기숙사 침대에 누워 있는 나를 발견하더라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에구. 벌써 8시 반이다. 9시까지 투어 버스 타러 가야 하는데. 너무 여유를 부리면서 먹었나. 들어가서 짐 챙기고 나오자.
자이뿌르 시티 투어
아침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하루 종일 하는 라자스탄 주정부국의 자이뿌르 시티투어는 사진에 있는 것 처럼 자이뿌르에 있는 여러 주요 유적들을 가이드와 함께 둘러보는 프로그램이다. 릭샤 왈라와 실갱이 해가면서 일일이 찾아 다닐 필요 없이 150Rs 라는 비교적 싼 가격에 편하게 다니는 것이 좋기는 하지만, 역시 단체로 움직이다 보니 시간 제약이 있고, 몇몇 건물들은 사진만 찍고 타거나 차 안에서 보고 지나치는 등의 단점이 있다. 투어라는 것이 늘 그렇듯이 말이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투어 중에 들르는 이런 유적지들을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인도의 역사를 잘 알지도 못하고, 가이드 북 수준의 배경 지식 밖에 가지지 못한 나로 서는 이렇게 수명을 다 하고 ‘죽어 있는’ 유물들은 크게 의미를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투어 버스를 타고 보니 어제 밤에 우리를 안내했던 그 느끼한 가이드가 또 투어를 맡았다. 그 친구도 우리를 알아 보고 반갑게 인사한다. 이것도 인연일는지. 투어를 시작 했는데, 역시나 발음이 별로인지라 알아듣기가 힘들다. 투어에 대한 정보를 많이 가지지 않고 시작했기 때문에 투어 하는 도중에는 지나치는 몇몇 건물들의 이름도 모르고 구경만 하기도 한다. 전쟁 위령탑과 Laxminrayan temple등은 론니와 백배 어디에도 나오지 않아서 현지인에게 물어보고서야 대충 어떤 곳인지 감을 잡을 수가 있었다. 투어는 Laxminarayan temple, 고대 천문대인 잔따르 만따르, 지금도 마하라자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궁전인 시티 팰리스, 바람의 궁전이라 불리는 하와마할 그리고 어제 야경으로만 보았던 암베르 포트 등을 차례로 거쳐가게 된다.
투어 버스 안. 역시 운전석은 오른 쪽에 있다.
버스 타고 가다가 본 인도 가족들. 꼬마 애들이 손을 흔들어준다.
투어는 재미 없다
Laxminaryayan temple은 힌두교의 신을 모신 사원 같다. 흰 대리석으로 정교하게 조각 된 장식이 인상 깊은 곳이다. 신발을 한 곳에 모아 두고 맨발로 들어가야 하는데, 가이드는 신발을 지키고 있겠단다. 여기는 가이드 북에도 없어서 뭐 하는 곳인지도 잘 모르는데 설명을 좀 해줘야 하지 않나. 실내에서는 사진을 못 찍게 되어 있는데, 그것도 모른 채 기둥의 예쁜 조각을 하나 찍었다. 본의 아니게 도둑촬영이 되어 버렸다. 사원 정면에서 사진을 찍으려고 하니 경비원인지 경찰인지 모를 사람이 저지를 한다. 여기서는 안되고, 바로 앞에 내려가는 계단부터는 찍어도 된단다. 몇 미터 되지도 않았는데, 여기는 되고 저기는 되다니. 손해 볼 것도 없기에 몇 발짝 움직여서 사진 한 컷을 찍는다. 가이드가 겨우 사진 찍을 시간 밖에 주지 않아서 그냥 대충 둘러보고 나오고 말았다.
다음으로 간 잔따르 만따르는 고대 천문대가 있는 곳이다. 마하라자 제씽이 세운 이 고대 천문대는 인도 전역에 다섯 군데 정도가 있는데, 여기 자이뿌르의 것이 가장 보존이 잘 되어 있다고 한다. 말이 천문대지 실제로 들어가보면 무슨 조각 공원 같다는 느낌이 먼저 든다. 해시계, 달시계, 천체관측 도구 등등이 있는데, 현재까지도 상당히 정확한 관측을 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당연히 원래의 목적으로 쓰이고 있지는 않을 터, 왠지 수명을 다해서 단체로 공동묘지에 안치된 기구들을 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가이드가 관측 기구들의 원리를 구구절절 설명을 해주는데, 알아 듣기도 힘들고 별로 관심도 생기지 않는다. 사진을 찍으려면 따로 돈을 내어야 하는데, 솔직히 별로 볼 것도 없어서 그냥 안 찍고 말았다.
그 다음은 바로 옆에 있는 시티 팰리스. 마하라자들의 궁전이며, 지금도 마하라자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는 곳. 관광객들에게 개방되는 곳은 일부일 뿐이다. 대부분 박물관으로 개조된 곳들을 둘러보는 형식인데, 예전 왕족들이 입었던 옷과 갑옷, 인도의 옛날 그림들 등등을 볼 수 있다. 인도 고대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역시 배경 지식이 없어서 그냥 둘러보는 정도 밖에 없다. 눈에 띄는 것은 각종 무기들을 전시해놓은 곳이었는데, 온갖 종류의 칼, 총 등등 옛날에 썼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무기들이 살벌하게 전시되어 있다. 저것들이 전부 다 다른 사람들을 헤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니 인간이란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칼과 총을 이어서 WELCOME 이라고 글자를 만들어 놓은 것도 참으로 아이러니다. 환영할게 없어서 총칼로 환영을 한단 말인가. 박물관 밖으로 나가서 둘러보면 단연 눈에 띄는 은색 항아리 하나. 쌩뚱맞게 항아리가 여기 왜 전시되어 있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마하라자 마도 씽 2세가 영국을 방문할 때, 신성한 겅가(겐지스)강의 물을 담아갔던 항아리라고 한다. 바다를 건너가면 카스트를 잃어버린다는 믿음 때문이었다나. 항아리가 아무리 크다고 해도, 저기 물을 담아가서 며칠이나 먹었을까. 지금도 단일 은 항아리로는 세계 최대로 기네스북에 올라있단다.
가이드 북에도 안 나오는 Laxminaryayan temple
몰래 찍은 Laxminaryayan temple의 기둥. 정교한 여신상이 아름답다.
Laxminaryayan temple 앞에서.
계단 아래 부터만 촬영할 수 있다고 했다. 옆에 서 있는 인도인들ㅋㅋ
저 담 안으로 보이는 것이 잔따르 만따르
더운 날씨에 개팔자가 상팔자
지금은 박물관으로 개조된 시티팰리스 내의 건물
시티 팰리스 역시 핑크색 벽으로 되어 있다.
시티 팰리스 내의 기둥
마하라자 마도 씽 2세가 영국에 갈 때 겅가의 물을 담아갔다는 은 항아리
시티 팰리스
인도의 전통 인형들. 하나 사올 껄 그랬나-_-;
지금도 마하라자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건물.
암베르 포트에서
이렇게 수동적으로 따라다니면서 구경을 하다 보니 참으로 재미가 없다. 아마 인도에 온 날들 중에 가장 재미가 없는 날인 것 같다.(여행을 모두 끝낸 지금 생각해보아도 그렇다.) 휴… 그렇게 버스를 타고 다음으로 이동한 곳은 투어의 하이라이트인 암베르 포트. 어제 밤에 봤던 그 멋진 야경 때문에 일행들 모두 잔뜩 기대를 하고 간다. 하지만 도착해보니 어제밤의 그 위풍당당함은 어디로 가고, 산 위에 다 낡아서 빛이 바랜 늙은 성 하나가 서 있을 뿐이다. ‘어제 그 모습은 밤에만 나오는구나’ 하고 안타까워한다. 암베르 포트에 올라가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지프를 타거나 아니면 돈을 좀 비싸게 주고 코끼리를 타는 방법이 있다. 지프는 편도에 25Rs, 코끼리는 450Rs. (우리가 갈 때는 2인에 450Rs 였는데, 06년 5월부로 550Rs로 올랐단다.) 코끼리를 타볼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냥 싼 지프를 타기로 결정. 가난한 배낭여행자에게 그 정도 호사까지 필요하겠냐는 생각에서.
현지인들과 함께 지프를 타고 성으로 올라간다. 자리가 맞지 않아 일행들과 떨어져서 나 혼자 현지인들과 타고 가는데, 인도인 가족이 하나같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힐끔힐끔 쳐다본다. 암베르 포트에는 사진을 찍으려면 돈을 내고 가지고 갈 수 있지만, 그 외에는 사물함에 맡겨두고 들어가야 한다. 나중에 사진은 공유하기로 하고, 일행 중에 나를 포함한 몇 명만 카메라를 가지고 들어간다.
성 위로 올라가니 산 중턱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눈 맛이 정말 시원하다. 산세를 보아하니 우리로 치자면 여기도 틀림없이 명당인 것 같다. 군사적으로도 삼면이 산으로 둘러 쌓여 있는 천연의 요새로, 그 당시에도 역시 난공불락이었다 한다. 가이드를 졸졸 따라 여기저기 구경을 한다. 생각보다 성이 굉장히 넓고, 구조 자체도 복잡하다. 이정도 규모라면 하루를 따로 잡아서 종일 봐도 괜찮을 듯하다. 첩첩이 쌓여있는 벽도 지나고, 비밀통로 느낌이 나는 굴 같은 통로도 지난다. 인도 관련 서적 중에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떠나는 자만이 인도를 꿈꿀 수 있다’의 임헌갑 씨는 암베르 포트 안의 미로 같은 곳에서 길을 잃어버렸다고 했는데 전혀 무리가 아니라는 생각이다.
암베르 포트의 전경
역시 어제 그 야경의 포스는 느낄 수 없었다.
암베르 포트의 입구
암베르 포트의 시원한 전망. 말 그대로 난공불락의 요새.
이 성을 공격하려면 꽤나 고생 좀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No man, No woman?
재미있었던 것은 후궁들의 거처인 저나나(zenana)가 뜰을 둘러싸는 형태로 배치되어 있는데, 마하라자의 방에서 모두 복도로 연결되어 있어서 다른 사람 모르게 밤일(?)을 위해 출입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왕이 그렇게 만들라고 지시를 했을까, 아니면 아랫사람들이 알아서 이런 식으로 만들어줬을까. 가이드가 이런 구조의 건축의 목적을 직접적으로 설명하기가 곤란하니까, ‘no man, no woman’, 즉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다’라는 표현을 썼는데, 상진이가 이걸 못 알아들은 건지 장난치는 건지 자꾸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물어본다. 우리는 옆에서 막 웃고. 큭큭. 몇 번 더 ‘no man, no women’ 이라고 말해주다가 난처해진 가이드, 은주 누나보고 이해했냐고 물어보더니 결국 ‘Ask her’ (이 분에게 물어봐요) 라고 대답을 피하고 도망가버린다. 그 후로 이 ‘no man, no woman’, ‘ask her’는 우리 일행의 최고 유행어가 되었다. 흐흣.
암베르 포트의 식당에서 밥을 시켜서 허겁지겁 먹는다. 오늘은 다행히 채식 뷔페가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 돈 내고 사먹으려니 좀 아까웠는데, 주문 착오인지 계란 밥을 하나 더 가져다 준다. 돌려줄까 말까 하다가 그냥 모른 척 하고 내가 한 접시를 더 먹어버렸다. 양심에 좀 찔리긴 하지만, 고생해서 살이 쏙 다 빠져버린 가난한 배낭 여행자라구요. 다시 지프를 타고 내려와, 버스를 타고 돌아간다. 돌아가는 길에 ‘워터 팰리스’라고 불리는 호수 중간에 있는 궁전이 보이는데, 아쉽게도 저곳에는 들르지 않는다. 들어갈 수 없는 것인가? 마치 꿈속에나 나오는 궁전 같이 생겼다.
어쩐 일로 기념품 가게에는 안 들르나 했더니, 역시나 직물 가게에 차를 세우고 내리란다. 자이뿌르는 염색으로 유명한데, 염색 과정과 원리에 대해서 설명해줄 것이라고 하지만 가게에 몰아넣으려는 수작인 것이 뻔히 보인다. 귀찮아서 그냥 버스에 앉아서, 창 밖으로 지나가는 사람 구경을 한다. 어스름 저녁 무렵에 조용히 길을 가는 인도인들의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니 많은 생각이 든다. 초라한 구멍 가게 앞에 앉아서 여유롭게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 구부정한 허리로 지나가는 노인들. 얼굴을 가린 여인들. 저들에게도 저마다의 삶과 인생이 있겠지. 내 곁을 지나는 여러 삶의 모습들을 보면서 가만히 생각에 잠긴다.
암베르 포트의 식당에서 밥을 사 먹는다.
계란 밥 한 접시가 더 나왔는데 그냥 모른척 먹어버렸다ㅜ_ㅜ
버스에서 앉아 있다가 창밖으로 본 멧돼지 가족.
멧돼지가 아닌가-_-?
짝퉁 라씨왈라도 나쁘지 않군
가이드가 친절하게도 우리 숙소에 가까운 곳에 버스를 대어준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숙소로 돌아온다. Evergreen Guest House 골목의 주얼리 샵들에는 괜찮은 가격에 액세서리들을 살 수 있다고 하는데, 벌써 다 문을 닫아버렸다. 론니에 ‘자이뿌르는 지쳐 쓰러질 때까지 쇼핑해야 하는 곳이다’ 라고 나오던데. 우리는 내일 새벽에 이 곳을 떠나야 하니, 자이뿌르의 보석들은 구경도 못해보고 떠나는구나. 특히 누나들이 아쉬워한다.
저녁을 Evergreen의 부설식당에서 탄두리 치킨을 먹고, 후식으로는 유명한 라씨왈라를 찾아가보기로 했다. 검증된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속칭 ‘인도의 3대 라씨집’이 있다고 하는데 자이뿌르의 Lassiwala가 그 중의 하나라고 할 정도로 잘 알려진 라씨 집. 그런데 문제는 워낙 유명하다보니 짝퉁이 여러 군데 있다는 것이다. 어제 시내 구경을 하고 걸어올 때 봤지만, Evergreen 앞의 큰 길에 있는 라씨왈라만 해도 서너개는 되어 보였다. 큰 차이가 있겠나 싶어 그냥 큰길에 나가자마자 보이는 첫 라씨왈라에서 사먹는다. 흙으로 만든 질그릇에 담아주는데 작은 건 10Rs, 큰 건 20Rs 하고, 맛은 딱 하나 플레인 라씨 뿐이다. 이왕 먹는 거 많이 먹어보자 해서 나는 큰 것을 먹는데, 우와 꽤나 맛있다. 질그릇에 있는 것을 먹으니 더 맛있는 것 같기도 하고. 다 마시고 나서는 나도 인도인들처럼 길가 쓰레기 더미에 휙 던져버리니 시원하게 깨져버린다. (나중에야 확인했지만 론니에 ‘먹을만한 곳’에 Lassiwala가 아주 짧게 나오는데, Niro’s (역시 여행자들에게 유명한 식당) 맞은편에 있는 것이 진짜라고 한다. 그러니까 Evergreen에서 가자면, 맥도날드를 지나서 좀 더 가야 한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2005년도의 마지막 날이다. 이런 날을 그냥 보낼 수 있나 싶어서 맥주라도 한 병 마시려고 하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맥주를 파는 곳이 없다. 내가 총대를 매고 이리저리 찾아보지만 물어보는 사람마다 가르쳐주는 방향이 다르다. 여기 가니 저기 가라고 하고, 저기로 가니 다시 여기로 가라 한다. 한참을 헤매다가 결국 (evergreen에서 출발했을 때) RTDC 지나서 있는 사거리 쪽에서 liquor 간판이 붙어 있는 작은 주류상을 찾아낸다. 그렇게 사온 시원한 킹피셔 몇병을 숙소 한 방에 옹기 종기 모여서 마신다. 우리 나라에 있을 때는 별로 술을 즐기지 않는 편이지만, 인도에서는 여유롭게 마시는 맥주 한 모금이 이렇게 맛있을 수가 없다. 여유가 있고 없고의 차이가 아닐까. 이럴 때면 나는 항상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모건 프리먼이 감옥 지붕 위에서 차가운 맥주를 조심스레 마시던 그 장면을 떠올리곤 한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면서 맥주를 마시고 있는데, 갑자기 창 밖으로 ‘펑’ 하고 무엇인가 폭발하는 소리가 난다. 깜짝 놀라서 ‘뭐 하는 거지? 혹시 폭탄 테러라도 난 거 아냐?’ 하고 있으니 계속해서 ‘펑, 펑’ 하는 소리가 난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이 올해의 마지막 날이라, 불꽃 놀이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다 같이 옥상으로 뛰어 올라가 어두운 밤 하는 아래 불꽃이 터지는 것을 본다. 주위에 Evergreen 보다 더 높은 건물이 거의 없어서, 사방으로 전망이 탁 트여 있다. 도시 곳곳에서 터지는 크고 작은 불꽃들. 우리 나라에 비해서 별로 화려하지는 않지만, 이렇게 보는 불꽃 놀이도 나쁘지 않구나.
내일이면 2006년이 밝아오는구나. 새해라는 것을 실감하기도 전에, 우리는 또 다시 길을 떠나야 한다. 새벽에 일어나기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