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채씨 소개문
인천채씨는 주지하는 대로 고려중기 贈同知事를 하신 先茂를 시조로 한다.
이후 10世 多義堂 貴河에 이르면서 비로소 본인의 충절의 행적과 네 아들로부터 이어지는 세계가 분명하고 자세하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나라를 창업하고 고려 유신들을 유인할 목적으로 태조의 잠저였던 송도 경덕궁에서 특별히 과장을 설치하였으나 아무도 응하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고려의 유신들은 不朝峴[개성 동남쪽 소재 고개]에 의관을 벗어 걸고 광덕산 속에 들어가 나오지 않으니 이들을 세칭 杜門洞 72賢이라 부른다.
多義堂[시호] 선조는 맏이가 泳, 둘째가 浮, 셋째가 東陽, 넷째가 明陽인데, 다의당은 장남 泳은 대구 고향에 돌아가 선조의 제사를 받들라하고, 둘째인 浮는 평양에 가서 어버이와 스승의 가르침을 공경히 따르라하고, 셋째, 넷째에게는 두문동으로 들어가는 자신을 따르라고 하였다. 그래서 현재 남한의 인천 채씨는 모두가 다의당과 그 장남 泳의 후손 아닌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인천 채씨는 충신의 후예임을 자부하고 있다. 평양으로 돌아간 浮의 후손은 북한에서 이어져 내려온 것 같다. 간혹 북한 인명에도 채씨가 더러 나오니 통일이 되면 적어도 남한만한 양의 蔡氏 족보가 보태질 것으로 보인다.
11世 泳(군자소감)에게 耆와 倫 두 아들이 있었으며, 耆의 후손으로 16世에 泓과 澄 두 아들이 있다. 泓의 장손이 先覺(東湖)이며, 泓의 셋째 아들이 응린(松潭)이다. 應麟의 아들이 일곱인데, 6자인 先謹(大谷)이 澄의 아들 應鯤에게 출계하였다.
11世 泳의 차남 倫의 후손으로 18世에 夢硯(投巖)이 있어 또한 達城儒賢17位에 이름이 올라 있다.
인천채씨 문중에서 가장 빛나는 인물로 倫의 후손인, 연산군 때 과거에서 삼장 장원을 하고 도승지 등을 지낸 懶齋 蔡壽를 들기도 한다. 蔡壽의 사위가 金安老로서, 채수는 사위 김안로의 인물됨을 진작 간파하고 絶緣하였으며, 집안에서도 김안로와 친한 자는 나의 黨與가 아니다고 절교함으로서 후일 金安老 일파가 역적으로 몰려 죽을 때 무사하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 채문이 가장 자랑할 인물은 일제시 독립 운동을 하다가 형을 받고 죽음을 당한 蔡基中이 아닐까 한다. 그러한 충효의 정신은 고려 말 多義堂 선조로부터 이어지고 있다고 할 것이다. 아래 내용은 인터넷 다음 백과에 나오는 그분의 생평이다.
본관은 인천. 자는 極五, 호는 素夢. 1913년 庾昌淳· 柳璋烈· 한훈· 鄭萬敎· 金相玉 등 의병출신자들과 함께 풍기광복단을 결성하고, 독립군양성을 위한 무기구입과 군자금 모집에 노력했다. 군자금 모집을 위해 姜順弼과 함께 일본인이 경영하는 영월의 중석광산에 잠입, 자금 탈취를 기도했다.
1915년초 대구에서 결성된 조선국권회복단과도 협의하여 같은 해 7월 1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朴尙鎭· 우재룡· 權寧萬· 嚴正燮 등과 함께 대한광복회를 조직해 경상도 책임자를 맡았다. 대한광복회는 군자금 모금을 위해 부호들에게 特定配當金記를 먼저 우편으로 발송하고 추후 회원들을 보내어 수합하는 방법을 취하고 고발하거나 거부하는 경우 처단했으며, 부일 반역자와 악질 관공리를 처형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1916년 盧伯麟· 金佐鎭· 申鉉大· 奇明燮 등을 규합하여 조직을 확대했고, 1917년 11월 친일부호 張承遠을 직접 처단했다. 1918년 1월 李鍾國의 밀고로 조직이 파괴되고 회원 다수가 붙잡히게 되자 上海 망명을 시도하던 중 전라남도 목포에서 체포되었다. 공주 감옥에서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된 뒤 총살당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그리고 松潭의 6자 先謹의 자손이며 進士 元儉의 손자 憲植(後潭)의 문집 後潭集에 ‘獲蟹說’이란 제목의 글이 있어 언젠가 내가 이 글을 중심으로 글을 하나 써둔 것이 있어 여기 소개한다.
게 잡은 이야기 / 채종근
전 시대의 문집을 보면 효자 충신 열녀의 이야기도 많고 곳곳에 효자각 열녀비도 보인다. 그러나 1894년 갑오경장 이래 사회의 급격한 서구로 충효의 개념은 쇠퇴해 온 것이 사실이다. 이제 어떤 지도자도 忠孝나 貞烈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아니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목하 페미니즘이 극성하고, 심지어 성까지 부인의 성을 따르는 것을 보다 용이하게 하려고 하고 있다. 지금은 처음 결혼할 때 부부 합의했을 때만이 자식의 모성 취득이 가능하나, 여성가족부에서는 앞으로 아이를 낳아 출생 신고할 때 모성을 따른다고 신고만 하면 자동으로 결정되도록 하겠다고 발표하는 것을 보았다. 우리 역사는 몇 번의 큰 분수령이 있었지만 아마도 가장 큰 고비는 갑오경장이었으리라. 그때 과거제가 폐지되고 신분제가 철폐되어 사민평등이 되었다. 모든 사람이 성을 취득하고, 모든 사람이 평등한 사회를 의미하는 갑오경장의 앞과 뒤란 그 얼마나한 변화인가. 그러나 자식의 모성 취득은 갑오경장 이전 이후 보다 더 심각한 사회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모성 취득이 공공연해 진다면 형제가 각각 다른 성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려니와, 심지어는 재혼한 어느 부부의 아들 하나가 A성에서 B으로 바뀐 경우, B성의 이 남자가 족보에 올라간다고 할 때 그 족보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 자손으로 이어지는 누군가 또 다른 성으로 바뀔 경우 성 자체의 의미가 없어지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고, 성의 의미가 없어진다는 것은 전 시대 문화 자체의 의미가 없어진다는 것이 아닌가. 어쩌면 미얀마처럼 성 자체를 없애버리자고 하는 사람들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우리 사회가 현금 세계 7위의 경제 대국이라고 하고, 잘 사는 정도가 북한에 비해 40배, 캄보디아에 비해 80배라고 한다. 그러나 물질적 풍요의 이면에 정신적인 빈곤은 날이 갈수록 심화하고 있다. 이제 부자간에 소송을 벌이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고, 맞벌이 하는 부부는 갈라설 때 재산상의 분쟁을 피하기 위하여 각자의 재산은 각자가 관리하고 대신 두 사람이 공평하게 돈을 내어 공동의 재산으로 가정을 영위한다고 한다. 그러니 이혼이 쉽기도 하여 점점 많아지는 추세에 있다. 부부 상방 합의하여 갈라선다면 그 두 당사자야 유불리를 이미 각오한 사람들이니 그렇다 쳐도 그 자식들이 감내해야할 정신적인 상처는 어떻게 할 것인가.
가장 위기의 때가 가장 기회의 때라는 말도 있듯이, 어쩌면 정신이 가장 바닥세를 치는 지금이 사실은 충효나 정열의 전시대 덕목을 일으킬 최고의 적기가 아닐까. 내가 말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정작 나 같은 70대의 사람들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있다. 시대가 그런 걸 어찌하겠느냐며 시대 탓으로 돌린다. 부모의 기제사를 안 지내는 집도 하루가 다르게 많아져 가고 있다.
청개구리 어머니가 끝까지 자식에게 올바르게 교육하였더라면, 아들 청개구리가 어머니 무덤을 물가에 묻는 우를 범하지 않았으리라. 어머니를 물가에 묻은 것은 아들의 잘못이 아니라, 어머니가 죽어가면서 아들의 행태에 타협하여 물가에 묻어달라고 한 때문이었다. 그래서 청개구리 어머니는 아들의 마지막 개과천선할 기회를 빼앗아 버린 것이 아닌가. 아무리 자식들이 제사를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 해도 당사자가 중심을 잡고 끝까지 올바른 길을 이야기하고, 너희들이 정 제사를 없애고 싶다면 너희들 대에 가서 너희들 판단대로 해라, 나는 그렇게 못한다고 단호하게 처신한다면 어떻게 제사가 하루가 다르게 줄어들까.
“선조는 나무의 뿌리와 같고 자손은 나무의 가지와 같다. 가지가 무성하자면 뿌리를 튼튼하게 해야 한다.”
“산 사람에겐 생일이 가장 중요하고, 고인에겐 기일이 가장 중요하다. 자식이 내 생일을 잊어먹으면 얼마나 서운할 것인가. 그와 꼭 마찬가지도 돌아가신 분의 기일을 챙겨야 할 것이야.”
“冠이 아무리 낡아도 발에 걸칠 수는 없고 신발이 아무리 고와도 머리에 쓸 수는 없다. 시대가 아무리 흘러가도 바뀔 수 없는 것이 있다.”
내가 간혹 이러한 논리를 피력하면 그 당장에는 받아들이지 않아도, 뒤에 그 사람이 자기 자식에게 그 말을 하였다는 말을 듣고, 백번 생각하여도 그게 올바른 일이라면 보다 굳세게 나아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그래서 나는 젊은 사람들을 설득하기에 앞서 나 같은 노인들부터 먼저 청개구리 어머니처럼 되지 말아야 하리라 싶다.
“그래. 시대가 바뀌었다. 아무개의 말이 맞다. 우리도 그렇게 하자. 정월 초하루에 전 식구대로 함께 여행 가서 모든 제사를 한 번에 지내는 거야.”
죽었다 깨어나도 이런 말을 내 입으로 해서는 안 된다. 나의 꼰대 기질이 발동하여 횡설수설이 길어졌다. 아래 이야기 하나를 올린다. 최근에 읽은 <後潭文集>[*27세 蔡憲植 문집] 4권에 ‘獲蟹說’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획해설’이란 ‘게 잡은 이야기’라는 뜻이다.
- 사람의 품성은 애당초 선하지 않음이 없으니 본성은 곧 하늘이다. 효자의 성품이란 천품의 본연지성을 잃지 않음이니 그것으로 부모를 섬기는 것은 부모가 곧 나를 낳으신 하늘인 때문이다. 하늘로서 하늘을 섬기면 저절로 하늘이 그 정성에 감동할 것이니, 당연히 비상한 일이 있게 되고, 비상한 징조가 있게 된다. 옛날 효자들의 고사에서 얼음 구멍에서 잉어가 튀어 올랐다든가, 눈 속에서 죽순을 얻었다든가의 일이 이런 유이다.
우리 집안의 손자뻘 아이 文基는 곧 岡梧 처사의 둘 째 아들이다. 천성이 온아하고 재질이 영민하여 일찍부터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으며 爲己之學에 종사하였다. 자라서 효도로서 부모를 봉양하지 아니함이 없으니 화락하고 부드러운 태도로 조심조심하여 좋은 행실을 잘 갖추지 아니함이 없었다.
어느 해 여름에 강옹이 우연히 머리에 종기가 발하여 석 달을 신음하며 괴로워하였으나 백약이 무효였다.
문기가 그 종기를 입으로 빨아 입이 온통 그 독기로 상하는 지경이 되었으나 조금도 게으름을 부리는 법이 없었으며, 종기 치료에 게장이 가장 좋고 미꾸라지가 그 다음이 된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게란 산간의 개울에서 나는 것이 아니므로 구하기 어려운 물건이었다. 문기가 통발을 가지고 산간의 개울에 가서 미꾸라지를 잡으려고 할 때, 마침 한 마리 게가 꾸물꾸물 물가 모래 바닥으로 나오니 그것을 거두어 돌아와 장에 담갔다가 환부에 붙이자 며칠 안가서 종기가 나았다.
그 개울에 게가 있었으며, 그 게가 약이 되니 이 어찌 효성이 감응한 소치가 아니겠는가? 게라는 물건은 미물로서 어찌 효의 효 됨을 알겠는가마는 그러나 그 게를 나오게 한 것은 하늘이 한 것이다. 그래서 효자는 반드시 하늘이 낸다고 하는 것이다.
강옹은 병이 나은 뒤 율시를 지어 그 일을 노래하며 나에게 화답을 부탁한다. 내가 唱和하는 데 익숙하지 못하여 이에 ‘獲蟹說’(게 잡은 이야기)를 짓는다.
나는 바라노니, 문기가 종기를 빤 그 마음으로서 마음을 삼고, 게를 구하던 그 정성으로 정성을 삼으면, 어찌 게 한 마리를 잡는 정도에 그치겠는가? 안으로 부모를 드러나게 하고, 밖으로 종족을 화합하게 하며, 멀리 고을과 나라와 천하를 감동하게 하고 화평하게 하는 데 미칠 것이다. 시에서 말하였다. ‘언제나 효도 다하시니 효도는 선왕들 본 받으신 걸세.’ 나는 이 말로서 힘쓰게 하여 더욱 큰 공효 있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人之禀性, 初無不善, 而性即天也. 孝子之爲性, 不失天禀之本然, 而以事父母 則父母即生我之天也. 以天事天 則自有上天必感其誠, 當有非常之物, 非常瑞. 古之氷鯉雪筍是己. 吾族孫文基, 迺岡梧處士之第二子也. 天性溫雅, 才質穎敏, 早服庭訓, 從事於爲已之學. 及長, 養父母以孝, 和愉戰競, 無不備. 至是歲之夏, 岡翁偶嬰髮疽, 三朔叫苦, 百藥無效. 文基吮其疽, 口為毒汁所傷, 而少不懈隋, 聞蟹醬最好, 而鰍魚次之, 然蟹非峽澗所產, 則是難求之物也. 佩筌出澗方漁鰍之際, 適有一蟹蜿蜿出沙渚, 即收而取醬, 付于患處, 不幾日差. 此澗之有蟹, 此蟹之為藥, 豈非孝感所致者也歟. 蓋物是微物, 安知孝之孝, 而使之出者天也. 是以, 孝子必謂之天出也. 岡翁病既愈, 拈四律歌其事, 因囑余以和之, 余既不嫺難可唱和, 玆述獲蟹說, 吾願, 文基以吮疽之心爲心, 以求蟹之誠爲誠, 則豈獲一蟹而止耳? 内以父母顯, 外以宗族和遠, 及鄕而國而天下感和矣. 詩曰, 永言孝思, 孝思維則. 余以是勗且待焉.) -
산간의 물가에 민물 게가 있다고는 하나, 우리 고향이나, 이야기의 당사자가 살았던 대구 동구 지묘동 일대에 민물 게가 나온 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그런데 아이가 나가 게를 잡아 왔으니 참으로 기적 같고 소설 같은 일이다. 그러나 그건 기적이긴 해도 소설은 아니며, 글을 지은 이는 아이의 이름과 아버지를 분명하게 밝혀놓고 있다. 나 또한 이 글을 읽으며 이런 이야기가 발굴되어 화제가 되면 참으로 좋을 것이라 싶고 당사자의 자손이 이 글을 읽는다면 그 감회는 더욱 색다르리라 싶었다.
이렇게 대강 위와 같이 우리 인천 채씨와 관련하여 내가 들은 것과 가까이 자료를 접할 수 있는 것을 추려서 적어보았다.
우리 가문은 3대 대제학을 냈다든가, 양대 相臣을 낸 가문 등에 비하면 내세울 官人이 많지 않다. 또한 문인이나 학덕의 면에서도 아이들의 교과서에 오를 정도의 인물은 안 보인다. 그러나 전해오는 이야기들이나 남긴 문집 들을 읽다보면 면면히 이어지는 충효나 유풍을 읽을 수 있다.
그렇게 많지 않는 문중의 인물 중에 드러난 인물이 없는 반면 흉악한 인물 또한 없다는 것이 채씨 문중의 특징이라면 특징이었으나 그러한 금기가 2008년 2월에 깨어졌다고나할까. 남대문 방화사건이 그것이다. 남대문이 2008년 2월 10일부터 2월 11일에 걸쳐 방화로 인해 전소되었다. 그 방화범 채종기(당시 69세, 경북 칠곡 출신)로 밝혀져 구속 수감되었다.
2008년 2월 10일 20시 40분경, 채종기가 시너를 부은 다음 라이터로 불을 붙여서 일어난 불이 흰 연기와 함께 숭례문 2층에서 발생하여 소방 당국은 신고를 받고 소방차 32대, 소방관 128명을 현장에 출동시켜 불씨를 제거하고자 건물 일부를 잘라내고 물과 소화 약제를 뿌리며 화재 진압에 총력을 기울였으나 2월 11일, 0시 25분경, 2층 누각 전체가 불에 휩싸이고 화재 4시간 만에 0시 58분경 지붕 뒷면이 붕괴되기 시작했고 곧 2층이 붕괴되었다. 이어 바로 1층에 불이 붙어 새벽 1시 55분 누각를 받치고 있던 석반만 남긴 채 모두 붕괴되어 발화 5시간 만에 2층 문루는 90%, 1층 문루는 10%가 소실되었다.
나의 지인들은 말하고 있다. 내가 항렬이 ‘鍾’이니 네의 형님이 남대문 태워 먹었다고. 그러면 나는 궁여지책으로 그렇게 이야기한다.
“적어도 불을 지른다면 남대문 정도는 태울 일 아닌가. 안한다면 몰라도 한다면 하는 게 우리 채가다.”
그렇게 말은 하고 있지만 그것은 우리 채씨로 보면 옥의 티라고 할 것이다. 어쨌든 우리 집안은 남대문을 방화한 돌발사건 하나를 제외 하면 온건하고 조용한 군자풍의 문중이 아닐까 한다.
첫댓글 인천 채씨는 산림처사의 풍모를 지켜온 것으로 압니다. 그러므로 덕조당님 처럼 고고한 분이 계시겠지요. ㅎㅎㅎ
그런데 충지 지씨가 또 그렇습니다. 전주 이씨의 3분지 2가 충주지씨의 외손이라 들었습니다.
정종(이방과)의 부인을 비롯하여 대군들의 어머니들인 지씨가 전주이씨 6개 대군파의 할머니가 되었으니까요.
문경의 주암정을 매년 갑니다. 올해도 갈 것입니다. 채익하 선생의 유적으로....
대구에 '달성유현 숭모회'라고 하여, 임진왜란 전후한 기간에 대구에 살았던 훌륭한 인물 17위의 자손들의 모임이 있습니다. 날 보고 2월 20일 모임에서 인천채씨에 대해 간개를 해설하라고 하여, 급한대로 몇 자 얽은 것입니다. 대학자, 대관, 유명 문인등이 조상 중에 죽죽 보이면 글을 쓰기도 쉽겠으나 그렇지 못하기도 하고, 또 발표시에 듣는 사람들이 지루하지 않아야 할 듯하여, 대충 재미삼아 만든 것입니다. 인천채씨를 지나치게 과장해도 안되겠거니와 또한 지나치게 비하해도 안되겠으므로, 대강 위와 같이 적은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