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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인테리어 리모델링 및 DIY 스크랩 한국 전통 건축에 대한 감성적 접근 6.
wf845 추천 0 조회 23 07.06.30 10:2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한국문화감성기행 - 06. 쪽창에 기댄 여심-추사고택  
  내포땅의 지리적 혜택   


천안에서 온양 온천을 지나 예산으로 들어오는 길은 시야에 거스름이 없는 낮은 구릉과 산들로 평온한 여유를 제공하고 
있다. 옛부터 충절의 인물이 많다는 이 곳 예산은 가야산 연봉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광할한 평야에 자리잡아 산과 바다에
동시에 접하는 천혜의 지리적 여건을 지니고 있다. 東으로는 차령산맥, 西로는 가야산맥에 둘러싸인 이곳은 낮은 
구릉지대를 배경으로 평야를 형성하고 있어 농작물이 풍족하였으며, 서해 바다와도 접해있어 해산물이 넉넉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이중환의 택리지에서도 ‘‘충청도는 산천이 평평하고 아름다우며 서울에 가까워 서울의 권문 세족들이 모두
집을 도내에 두어 근본의 땅으로 삼고 있으므로 풍속도 서울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 가장 살만한 곳이며, 그 중에서도 
‘내포는 최상의 지역이라 하겠다. 가야산 앞뒤로 10개의 고을이 있으니, 이를 모두 일컬어 ‘내포라 하는데, 이곳은 지세가
한 귀퉁이로 불쑥 솟아있고 또한 큰길에 해당하지 않으므로 임진렉느?두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은 곳이기도 하였다. 
땅은 기름지고 구릉이 끝없이 이어져 있으며 평야는 넓은데 물고기와 소금이 지천으로 나서 부자가 많고 또 주거하는 
사대부들이 많았다.라고 전하고 있다. 이것은 이곳 예산 땅이 명당의 4가지 조건인 지리, 생리, 인심, 산수를 모두 갖춘 
살기 좋은 곳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서울과는 하루 뱃길에 불과한 작은 바다를 두고 떨어져 있어 
화물의 수송이 자유로웠다. 초기 일제 시대까지만 해도 ‘‘예산가서 옷 잘입는 체 말고, 홍성가서 말 잘하는 체 하지 말라는
말이 있을 만큼 예산은 경제의 중심지였다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해동제일통유(海東第一通儒) 김정희   



[ 추사 김정희의 묘 ]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는 정조 10년 (1786년) 한여름 유월 초사흘(6月 3日)에 월궁(月宮)의 막내 아들 노경(魯敬)의 
장자로 태어나 그의 백부 노영(魯永)에게 양자로 보내져 월성위(月城威)의 봉사손(奉祀孫)으로 경주 김문(慶州 金門)의 
종손이 되었다. 어머니 되시는 유씨 부인이 임신한지 24개월만에 추사를 낳았으며, 추사가 태어나던 날 집안의 뒤뜰에 
있는 우물이 갑자기 마르고 뒷산인 팔봉산의 초목이 모두 시들었다가 추사가 태어나자 생기를 되찾았다고 하는 전설같은
일화가 민규호의 ‘완당김공소전(阮堂金公小傳)에 전해지고 있다. 내용의 사실 여부를 떠나 추사 김정희의 탄생은 탄생 
그 자체 만으로도 손이 귀한 월성 위씨 가문의 큰 경사였을 것으로 짐작되는 일이다. 
그는 당대 실학의 거두 박제가(朴濟家)에게 수학 하였으며 그의 나이 25세에, 생부가 동부지사로서 청나라에 가게 
되었을때에 함께 수행하여 체류하면서 당대 석학인 옹방강(翁方綱)과 완원(阮元) 등과 교분을 맺어 고증학과 실사구시를 
배웠으며, 청으로 부터의 귀국 후에는 금석학 연구에 몰두하여 조선금석학파를 성립시키기도 하였다. 또한 용산 향저(鄕邸)
에 있는 화암사에서 승려들과 교류하며 불전을 공부하는 등 모든 학문ㆍ예술 분야에 일가를 이룬 지성인이며 뛰어난 
시인으로도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그는 헌종 즉위 후 ‘윤상도 옥사에 연루되어 9년간의 제주도 귀양살이를 하게되고, 
이 귀양생활에서 그는 추사체라는 독특한 글씨체를 완성시킴으로써 문화적, 예술적인 승화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불교에도 일가견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대둔사 의 초의 선사와는 매우 가까운 사이였으며, 제주도 귀양길에 해남 
대둔사에 들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 때 그는 대둔사에 걸린 원교 이광사의 ‘대웅보전 현판 글씨를 보고 촌스럽다하며 
손수 글씨를 써주어 바꿔달게 하였다. 원교 이광사는 동국진체(東國眞體)의 대가로서 글씨에서 겸재 정선과 같은 존재라 
할 수 있으니, 향색(鄕色)나는 글씨가 추사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9년간의 유배 생활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다시 대둔사에 들른 추사는 자신의 잘못을 깨달아 다시 원교의 글씨를 걸어두도록 하였다 한다. 유배 
생활이 주는 삶의 깊이가 그에게 성찰을 통한 새로운 시야를 갖게하여, 일정한 법도에 구애됨 없는 고도의 이념미를 
표출하게 한 원동력이 된 것이다. 추사의 경우도 그러하지만 다산 정약용, 고산 윤선도, 회재 이언적 등의 경우에도 그들의
학풍과 예술성이 유배나 은둔을 통해 더욱 성숙되어질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라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유배나 은둔은 한 개인에게는 극단적인 절망일 수 있지만 그러한 절망 끝에서의 내적 고독과 성찰을 통해 새로운 전환이자
성숙의 기회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원근법에 의한 액자 구성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안채 쪽문에서 우물로의 이동이 용이하게 구성되어 있다]

  유교사상과 생활 양식의 반영   


조선의 개국과 더불어 성리학을 학문적 기반으로 하는 신흥 사대부 계층이 새로운 지배계층으로 등장하였다. 고려말 
권문 세족에 대항하여 조선건국 과정을 주도한 신진사대부들은 개혁적인 성격을 띄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그들의 세력과 정권교체에 대한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하여 새로운 정치이념을 필요로 하게 되는데 이때 성리학은 중요한
이념적 지주로 작용하게 되었다. 조선의 숭유억불(崇儒抑佛)정책으로 유교는 사회와 가정생활 전반의 규범을 형성하는데,
조선시대 양반들의 주거는 가정 생활속에서 유교적 이념과 생활양식의 실천장소이자 권위 표현의 유일한 장소였다. 
따라서 유교가 주거 공간의 건축에 미친 영향은 조선시대 반가(班家)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양반은 자신들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가족의 일상생활을 밖으로 노출하는 것을 꺼리게 되는데 이로 인해 주택은 강한 폐쇄성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솟을대문이나 화려한 담장, 높은 기단 등을 사용하여 이들의 권위를 표현하기도 하였으며, 주택을 좀더 고급스럽게 
보이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들을 사용하였다. 풍부한 경제력을 기반으로 더 큰 부재를 사용하고, 오량 가구법<1>이나 
겹도리로 튼튼한 구조를 만든다든지 부연<2>을 달거나 기둥을 장식하기도 하며 화려한 무늬로 장식된 창호를 사용하는 
등 가사규제의 범위내에서 가능한 크고 화려한 집을 지으려 시도한 흔적들을 많이 엿볼 수 있다. 각 생활 영역을 담장과
문으로 구획하는 엄격한 채분리를 통해 엄격한 남녀구별과 상하위계를 이루어 놓았다. 숭유정책에 의한 내외법(內外法)은
남자와 여자의 생활공간을 분리하여 남성을 위한 사랑채와 여성을 위한 안채로 공간을 분리시켰을 뿐 아니라, 신분제도의
영향은 동일주택 안에서도 上下 구별에 의한 공간분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즉 안채와 사랑채는 上의 공간이고, 행랑채는 
下의 공간이다. 이들 상하의 공간을 연결하는 중문간 행랑채는 中의 공간이 된다. 여기에 거처하는 청지기같은 사람은 
행랑인의 상위권에 속하나 주인보다 아래인 중간계층인 것이다. 유교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을 생활의 근본으로 여겼던
조선시대 양반들은 유교의 가르침에 따라 부모에게 효도하고 조상을 숭배하는 것을 원칙으로 여겼다. 따라서 반가(班家) 
특히 종가집에서는 입구에서 가장 먼곳에 조상의 위폐를 모시는 제실을 배치 하였다. 조선시대 양반계층의 주거는 풍부한
경제력을 바탕으로하여 크고 화려한 주거를 지향하였으므로 지역적인 특성보다는 계층적인 특성이 뚜렷하게 나타났던 
것 같다. 따라서 서울 세도가들의 가옥을 모방한 주거의 형태가 나타나며 여기에 지방적인 특색과 개인적인 취향이 
곁들어진 독특한 형태의 주거가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 여인네들이 애환을 털어놓는 유일한 통로였던 우물가는 다행히 사랑채와 멀리 떨어져 위치해 있다 ]

  조선시대 주택의 공간 특성   


조선시대 주택의 외부 공간 구성은 선적 구성을 이루고 있다. 기둥, 도리<3>, 안방 등 구조재의 선적인 구성 뿐 아니라 
처마의 서까래<4>들이 갖고 있는 가공되지 않은 선들의 아름다움과 반복에 의한 리듬, 허공을 향해 줄달음치는 처마의 
선과 지붕골의 조화 그리고 입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창호의 살짜임 등은 주택 입면의 선적 구성을 잘 대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외부적인 성격이 내부 공간에서는 면적 구성을 보여주고 있는데 기둥, 도리, 보 등의 대부분은 벽지나 
천장지로 가려지고 설사 노출된다하여도 그 부재들은 벽체와 하나의 면을 구성한다. 뿐만 아니라 벽면에 설치된 창호 또한
안으로 창호지를 바르기 때문에 창살과 역광이 비치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면적인 구성을 하고 있다.또한 조선시대 
주택은 담장과 행랑으로 둘러싸여져 외적으로는 강한 폐쇄성을 가지나 각 채들은 대부분 벽체가 창호로 구성되어 
담장안에서는 극히 개방적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주택의 기밀성과도 직결되는 문제인데 개인의 사적 영역유지를 위한 
몇몇 장치들로 해결해 놓고 있다. 필요에 따라 덧문속에 쌍창<5>, 쌍창속에 맹장지<6>, 그리고 무렴자나 방장<7>에 
병풍까지 둘러침으로써 외부와 차단시켜 사적 영역을 확보하는가 하면 이러한 물리적인 영역 외에 도덕적 영역을 확보하고
있다. 예를 들어 ‘남의 집을 방문할 때에는 방문앞에 두 사람의 신발이 놓여 있으면 들어오라 하기 전에 들어가지 말고, 
말이 없으면 절대 들어가서는 안된다. 문으로 들어갈 때에는 본시 문이 열렸거든 들어가서도 문을 닫지 말고, 닫혔거든 
들어가서도 문을 닫는다.…고 하여 물리적 차폐물이 없다하여도 이미 도덕적인 사적 공간을 확보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개방적인 내부 공간은 자연과 융합하고자 하는 한국인의 옛 정서의 한 표현으로 창호에 스민 
달빛과 은은한 음영, 처마끝 낙수소리와 창 앞을 스치는 바람의 속삭임 등 자연을 내부로 끌어들여 함께 하고 싶어하는 
한국인의 자연관이 자연스레 담겨진 것이라 할 수 있다. 



[ 그 집의 권세와 경제력을 뒷받침하는 추사고택의 솟을 대문과 높은 기단 ]

  추사고택의 공간 개념과 조형의 의미   


한국의 공간은 흐르는 물과 같이 하나의 연속된 공간 체계를 이루고 있다. 외부에서 내부로 들어오는 과정은 어떤 연속된
체계에 의해 유도되는데, 추사 고택의 경우 바깥 행랑채의 높은 솟을 대문은 자연스런 진입을 유도하고 대문 사이로 
행랑마당과 이어 연속된 사랑마당을 예감케 하고 있다. 사랑마당으로 들어서면 사랑채가 오른쪽으로 비켜서 있고 왼쪽으로
빈 공간은 자칫 무게중심을 잃을까 뒷산 정경과 사랑채 너머 안채의 일광이 삐죽히 고개를 들이민다. 사랑 마당에 서면 
안채의 일곽이 보이기는 하지만 안채로 들어서는 문을 발견할 수 없어 순간 갈 방향을 잃게도 된다. 
하지만 그것도 일순간, 시선이 아래로 옮겨지면 사랑채 옆으로 2∼3단의 돌계단이 가려진 중문을 대신해 갈 곳을 
이야기한다. 이는 여성 공간인 안채를 적절히 폐쇄시켜 독립성을 유지시킴과 동시에 갈 곳을 자연스럽게 안내하는 
이정표를 세움으로써 각 공간을 기능에 따라 적절하게 분산시키면서도 자연스럽게 연결시켜 공간으로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장치라 할 수 있다.안채의 중문을 거쳐 안마당에 다다르면 비로소 공간의 중심에 있음을 지각하게 되고, 또 이들 공간은 
행랑채와 중문으로 이어진 담장에 의해 채와 칸의 분화를 이루면서도 앞으로는 사랑채와 행랑채, 뒤로는 사당채와 
나지막한 뒷산까지 연속되어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렇듯 하나의 담장안에 여러개의 채를 채우고 또 이들 사이를 담장이나
행랑으로 구획함으로써 한 공간 한 공간 접근할 때마다 상이한 공간의 정서를 느끼게 하는 반면, 목구조와 목재료의 
한정성은 비슷한 질감과 색채로 이어지며 이것은 동질의 외장을 형성하게 되어 통일된 공간 정서를 지각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곳에서 개방성과 폐쇄성의 조화를 찾아 볼 수 있다. 의도를 가지고 만든 
안채의 방은 적극적인 공간이고 이들 방들이 모여서 된 안채는 더욱 적극적인 공간이 된다. 이러한 채 주위의 무의도적인
소극적 공간들은 이 주위를 둘러싼 담장이나 행랑들로 적극적인 공간으로 확장되고 이 공간은 주위에 더 큰 소극적 공간을
형성하고 사랑채와 바깥 행랑채에 의해 다시 적극적인 공간으로 확장된다. 따라서 주위에 있는 화순 옹주묘와 추사의 묘에
이르기까지 이 집의 영역은 확장되고 변증법적 결합에 의한 반복과 교차는 무한한 대자연의 세계로 까지 공간을 
확장시키게 된다. 이는 막혀있지만 열려있는 우리의 공간 개념이자 우리 생활에 뿌리 깊은 음양의 원리이기도 하다.



  사랑채의 사회적 기능과 구성   


추사고택은 대문채, 사랑채, 안채, 사당채로 이루어져 있다. 본래는 곳간채가 있었다고 하며 대문채와 사당채는 1977년 
이 집을 복원 할 때에 다시 세운 것이라 한다. 장대석으로 단정하게 쌓아 올린 높은 기단위의 솟을 대문은 마치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대신해서 세도를 자랑하듯 세워져 있다. 이런 대문채를 지나면 오른쪽으로 비켜 세워진 ㄱ자형 
사랑채가 나지막한 기단위에 높은 초석을 놓고 네모난 기둥을 세워 마치 누마루같은 모양새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전퇴<8>를 둔 전형적인 모습이며, 한쪽은 팔작지붕, 다른 한쪽은 맞배지붕으로 처리하였고, 사랑채의 함실<9> 
부분에도 맞배 지붕을 이어 붙여 아궁이에 빗물이 들이치지 않도록 기능적으로 처리되어 있다. 사랑채는 대청을 사이에 
두고 큰사랑과 작은 사랑이 떨어져 있으며 이는 젊은 사람이 어른을 공경해야 한다는 유교적 윤리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큰사랑 옆으로는 청지기방을 두어 사랑채의 뒷시중을 담당하게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랑채의 구성에서도 유교의
경로효친사상과 신분제도에 의한 상하위계를 느낄 수 있다.
대청쪽으로 난 문짝들은 필요에 따라 개폐조절이 가능하도록 했을 뿐 아니라 문에 맹장지를 달아 문짝을 내렸을 때는 
보온과 폐쇄를 유지시켜주며 중간에는 빛이 통하도록 창호지를 바른 불발기창<10>을 두었다. 개방과 폐쇄를 고려한 공간의
가변성은 비교적 개방적이며 외부와의 접촉 및 손님접대의 기능을 가진 사랑채의 특성을 잘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특히 그 당시 월성위가의 권세로 보아 손님들의 왕래가 많았으리라 짐작되며 이 곳 사랑채는 접대와 문학적 유희의 
장소이었으리라 추측된다. 이렇게 사랑채는 주택에서 사회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으며 그런 만큼 추사고택에서도 가장 
개방적이고 권위있는 공간으로 표현되어 있다.



[ 선적인 구성 요소를 나타내는 담장, 처마선 그리고 수로 ]

  완벽한 여성 공간, 안채 사랑채   


뒷편으로 난 중문을 통해 안마당으로 들어오면 6칸의 넓은 대청이 안마당의 공간임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이 대청의 
오른쪽으로는 안방과 부엌, 왼쪽으로는 건넌방과 작은 부엌이 배치되며, 대청의 맞은편으로는 광(창고)을 가진 중행랑채가
배치되어 안채를 폐쇄적인 공간으로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게다가 지금은 없어졌으나 본래 중문으로 
들어오는 곳에 내외벽이라는 낮은 벽이 문간에 있어 안채가 바로 들여다 보이지 않게 되어 있었다고 하니 과히 그 
폐쇄성의 정도를 짐작 할 수 있다. 안채는 여성들의 생활 공간으로 가정 생활의 중추가 되는 공간으로서 주택에서 가장 
폐쇄적인 성격을 갖게 되는 곳이 된다. 주거 공간안에서 살림을 맡아하고 바깥출입을 삼가야 하는 유교윤리로 인해 
대부분 ㅁ자형이나 ㄷ자형의 폐쇄적인 형태를 가지며 대문에서 가장 먼 곳에 위치하고 있다. 특히 이곳 추사고택은 
남자들의 사회적 기능이 강조된 사랑채로 인하여 더욱 폐쇄적이고 닫혀진 형태로 구성되지 않았나 추측된다. 하지만 
이러한 폐쇄적인 공간구성속에서도 여성을 위한 세심한 배려를 느낄 수 있는 몇몇 장치들을 발견할 수 있다. 대청 뒤쪽은
칸마다 문짝과 창이 달렸는데 중앙칸 분합문짝을 열면 사당으로 통하는 계단이 이어져 있다. 중정의 공간감은 6칸 
대청으로 확장되며 열린 분합문<11>을 통해 운치있는 돌계단과 뒷뜰로 이어지는데 이곳에는 닫힌 공간을 조금은 여유있게
만들어 주는 넉넉함이 배여있는 듯하다. 안방은 어머니나 시어머니가 주로 사용하며, 웃방은 안방의 윗쪽에 두어 나이어린
자녀가 거처하는 경우가 많다. 건넌방은 딸이나 며느리가 주로 사용하는데 바깥 마당쪽으로 툇마루를 달아 안방쪽에 
인기척을 내지않고 드나들기 편하게 했다. 또한 작은 부엌에 난 쪽문은 바깥마당을 통하여 우물로 이어지도록 구성되어 
있으며 행랑채의 방과 마루가 쪽문 옆으로 배치되며 중문과 접해 있다. 우물과 행랑채 마루가 인접해 있어 식사 준비나 
손님 접대를 위한 음식 장만은 주로 이곳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처럼 곳곳에 세심한 배려가 느껴지는 것 
이외에도 안채의 다양한 창호는 강하게 닫혀진 여성의 생활 공간에 또다른 활력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추사고택의 
안채에는 약 20여개에 달하는 창호가 있는데 이처럼 다양한 창호는 구조적 폐쇄성을 심리적 개방성으로 전이시켜 시각적,
공간적 확장감 외에 심리적, 정서적 개방감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또한 주거 공간내에 폐쇄성과 개방성의 
적절한 조화를 가져오는 기능까지도 훌륭히 해내고 있다. 예로부터 창과 살무늬는 그 집안을 나타내는 표정이라하여 
반가에서는 창을 다양한 형태로 표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옛 며느리들은 호된 시집살이와 친정 생각에 눈물지으며 
들창가에 앉아 시름을 달래기도 하였는데, 그 후 들창 밖에 머리 그늘이 보여서는 안된다는 법도가 생겼다고 하니 창이 
여성에게 주는 심리적인 역할은 과히 크다고 할 수 있다. 이곳 추사고택의 안채에는 들창의 위안마저 마음대로 누릴 수 
없었던 조선 여인네들의 애잔한 슬픔과 안타까움이 곳곳에 배여 세부 구성 요소들이 작가의 의도된 장치임을 염두에 두고
안채와 사랑채를 찬찬히 둘러보면 미처 깨닫지 못한 또 다른 사실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곳 추사고택에서의 채분리는 
안채와 사랑채라는 생활 공간의 분리에 그치지 않고 기능과 장식적인 부분에까지도 차별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예를들면 장식용 기와로 사용되는 망새<13>의 문양이 안채와 사랑채가 다르며, 문고리의 크기 또한 문의 크기에 비례하여
달리 달았다. 문지방의 높이를 안채에는 낮게 설치하여 넘나들기 편하도록 하였으며, 지대돌 또한 규모에 비해 안채에 
그 수가 더 많아 여성의 행동거지를 조심스럽게 유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안채에 비교되는 가벼움과 개방감이 느껴지는 사랑채 ]




[뒤로 보이는 것이 추사의 영정을 모시는 사당.
사당이나 제실은 여러채의 가옥 중 가장 높은 위치에 두는 것이 상례로서 사당으로 들어가는
문이 좁고 낮은 것은 머리를 숙여 조심스럽게 예를 갖추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 안채에서 우물로 연결된 통로. 부엌의 광창은 무병장수를 가져다 주는 것을 의미한다 ]

  여필종부(女必從夫)   


나 안에 나 여필종부(女必從夫) 삼종지도(三從之道)의 유교적 윤리 안에서 자신만의 완전한 세계를 꿈꾸어온 조선 여인의
삶과 그들의 여심이 어느덧 화순옹주의 묘와 열녀문이 있는 나지막한 언덕에 놓여 있다. 
영조의 장녀인 화순옹주는 남편인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이 38세의 젊은 나이로 죽자, 식음을 전폐하여 부왕인 
영조의 지극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부군을 따라 죽고 말았다. 영조는 옹주의 정절을 귀히 여기면서도 부왕의 뜻을 저버린
아쉬움 때문에 열녀문을 내리지 않았으나, 후에 정조가 이 열녀문을 하사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는 조선 왕실 유일의
열녀문이라 하는데, 그 애뜻한 연정은 시대를 초월하여 아름답게 여겨지는 듯하다.
조선시대에는 효자나 열녀, 충신 등의 행적을 높이 기리기 위해 그들이 살던 집이나 마을 입구에 문을 세워 기념하였는데
이를 ‘정려(旌閭)라 한다. 정려에 대한 기록은 신라때부터 보이며 고려 시대에도 상당수의 정려 사실이 있었던 것으로 
성리학적 이념을 바탕으로 하는 조선 시대에 이르러 전국적으로 상당수의 정려가 세워졌다고 한다. 이는 충(忠), 효(孝), 
열(烈)의 유교적 지배 윤리를 보급하기 위한 조선 왕조의 정책과도 유관하다 하겠다. 따라서 정려를 받는 것은 개인이나 
가문의 대단한 명예로서 여기기도 하였다. 이것 또한 집은 삶을 담는 그릇이라 여긴 우리 옛 선조들의 생활 철학의 
일부였으리라.
아래의 글귀는 추사가 아내를 여윈 슬픔을 싯구로 옮겨놓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어떻게 월로에게 하소를하여 (那將月老冥司)
서로가 내승에 바꿔 태어나 (來世夫妻易地爲)
천리에 나 죽고 그대 살아서 (我死君生千里外)
이 마음 이 설움 알게 했으면. (使君知我此心悲) 



[ 화순옹주의 열녀문 ]

  주석 용어 정리   


1.오량가구법:지붕 전후면에 처마도리와 중도리를 걸고 중앙에 용마루 도리를 걸어 지붕틀을 꾸민 집 
2.부연:처마 서까래 끝 위에 얹은 짧은 서까래  
3.도리:보와 직각방향으로 걸어 서까래를 받는 수평재로 지붕을 꾸미는 뼈대가 됨 
4.서까래:지붕경사에 따라 처마도리, 중도리, 마룻대위에 경사지게 걸쳐대어 지붕을 덮거나 산자를 엮어대는 경사재 
5.쌍창:한쌍의 창을 형성하는 근접하게 배치한 창 
6.맹장지:종이로 두껍게 안팎을 싸바른 문 
7.방장:방안에 치는 휘장 
8.전퇴:건물의 전면에 붙인 툇간 
9.함실:부뚜막을 두지 않고 방바닥 밑에 직접 불을 때게 만든 방
10.불발기 창:종이를 두껍게 바른 장지문의 한가운데에 교살 또는 완자살을 짜대고 창호지를 바른 문
11.분합문:대청앞에 드리우는 네쪽으로 된 긴 창살문
12.들창:들어올려 여닫게 된 작은창
13.망새:전각이나 문루 등 큰 기와집의 지붕 마루 양 끝에 얹은 장식용 기와 

  참 고 문 헌   


집의 사회화, 강영환저, 웅진출판사
추사살기. 그 파란의 생애와 예술, 최완수 저
한옥의 재발견, 주택문화사, 1995
한국 건축의 외부공간, 안영배, 보진재, 1996
답사여행의 길잡이4.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돌베게, 1996
정려건축연구, 김지민, 대한건축학회 논문집, 1996
출처:인테리어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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