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현실의 반영이다. 남북 대치의 냉전 논리가 묽어지고 대신 화해, 공조 분위기가 대세를 이루는 시대다. 영화계가 이런 흐름을 놓칠 리 없다. 바야흐로 2002년 가을의 남북관계는 12년 만에 남북통일축구가 재개되고 북한의 부산 아시안게임 참가로 더없이 따뜻한 상황.
영화도 바뀌었다. 이젠 다시는 <쉬리>처럼 남북 대치 상황을 배경으로 한 영화는 보기 힘들지도 모른다. <쉬리>의 대치 상황은 2000년 <공동경비구역 JSA>의 화해 분위기를 징검다리 삼아 2002년 <휘파람공주>(마로픽쳐스ㆍ마로이엔티, 이정황 감독)를 탄생시켰다.
■남북이 공조해 미국과 싸운다
<휘파람공주>는 남북이 힘을 합쳐 한반도를 위협하는 영화 속 공동의 적 미국과 한판 대결을 벌인다는 내용이다. <휘파람 공주>엔 외국 테러 조직이 등장한다. 그런데 그 주인공이 바로 미국 CIA다. 그리고 이들의 테러를 격퇴하는 ‘정의의 사도’는 더욱 놀랍게도 남한과 북한의 특수요원이다.
CIA 테러조직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철없는 막내 딸 지은(김현수 분)을 서울 락페스티벌에서 제거해 남북한 대립을 다시 유발하려 시도한다. 하지만 남한의 특수요원 박석진(박상민 분)과 북한의 특수 요원 오상철(성지루 분)이 합심해 이를 격퇴하는 것이 <휘파람공주>의 기둥 줄거리다.
최근의 북한 포용정책과 남북한 화해 무드가 없었다면 영화 관계자 모두가 쇠고랑을 찼을 작품이다.
현실의 미국은 우리의 맹방. 그런 미국을 가상의 적으로 정하고 무력행동까지 펼친다는 점에서 기존의 남북관계를 다룬 영화와는 차원이 다르다. 최근 동두천 여중생 미군 탱크 사건, 만취 미군의 시민 폭행 등 국민들의 대미감정이 예전과 같지 않은 상황이어서 호소력을 더한다. 때문에 개봉 즈음해 현실속의 미국과 한바탕 소동도 일어날 전망이다.
■통일을 꿈꾸는 통쾌한 휴먼 코미디
그 동안 남북 및 주변 열강의 이데올로기가 개입된 영화는 도식처럼 무겁고 진지하게 다뤄졌다. 하지만 <휘파람공주>는 가볍게 몰입하고 웃을 수 있는 휴먼 코미디 영화를 표방했다. 대규모 총격전, 폭파 장면 등 다양한 액션이 등장하지만 극중에서 남북한 인물들이 펼치는 행동과 대사는 현실을 망각할 정도로 유쾌하다.
■나리타 공항의 여자수행원이 모티브
2001년 일본 나리타공항에는 김정일의 아들 김정남이 나타났다. 당시 김정남보다 더 관심을 끈 사람은 옆에 있던 여자수행원. 선글라스와 옷 등 패션이 모두 명품으로 치장된 그에 대해 국내에서는 ‘부인이냐, 수행원이냐’의 논란이 일었다.
변화된 시대의 남북관계에 대해 아이디어를 짜고 있고, 평소 명품에 관심이 많은 이정황 감독은 북한의 로얄 패밀리를 소재로 한 영화를 착상했다. ‘서울에 온 김정일의 막내 딸’을 가상의 현실로 만들어내며 <휘파람공주>의 골격 갖추기는 탄력을 받았다.
루이뷔통 핸드백과 페라가모 구두, 테크노마린 시계까지 온통 명품으로 치장한 북한의 명품 마니아 지은이 평양예술단의 수석 무용수로 서울에 온 뒤 살해 위협, 실종, 록밴드 드러머 준호(지성 분)와의 애틋하고도 발랄한 로맨스를 펼치는 이 영화는 현재 60%정도 촬영했고 11월 중순 개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