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한다……6.
어쨌든 카알은 다시 성벽 바깥을 바라보며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 지혜로워보이고 근엄해 보이는 중년 독서가 옆에서는 작지만
다부진 드워프의 노커가 허연 수염을 흩날리며 도끼를 짚은 채 서 있었
다. 그리고 총명해보이는 이마를 가진 젊은 프리스트와 젊은 얼굴에 어
울리지 않는 깊은 그림자를 가진 마법사가 그 옆으로 벌려서서 묵묵히
아래를 노려보고 있었으며 그 옆으로는 건장한 두 명의 전사 샌슨과 길
시언이 도열해 있었다. 꽤나 멋진장면이었다. 이스트 그레이드의 새벽,
높은 성벽 위에 지금 전설적인 장면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 같군 그래.
괴물 초장이가 끼어들만한 자리를 찾아보다가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의 병사들은 그들의 대장이 놀라서 목뼈를 부러뜨릴 정도로 고귀한
인물들과 같은 성벽 위에 있다는 것이 몹시 부담된다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운차이는 그 모든 사람들과 조금씩 떨어져서는 흉벽 위에 걸터
앉은 채 아래를 바라보았다. 적어도 여기서 가장 긴장을 하지 않고 있는
사람을 찾아보라면 운차이가 바로 그 사람일 것이다. 병사들은 모두 흉
벽 뒤에 웅크리고 있었고 다른 일행들은 굳은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운차이는 태평하게 앉아서는 잔치 구경이라도 하듯이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그 때 레니가 조그맣게 기침을 했다. 엣취. 그러자 운차이는 눈살을 찌
푸리더니 내게 말했다.
"네리아와 레니에게 여관에 돌아가서 기다리라고 전해줘."
"라는군요."
그러자 네리아는 방긋 웃고서는 언제나 그러하듯 운차이를 똑바로 바라
보며 말했다.
"흐음. 네가 나 걱정해주니?"
그러자 운차이는 여전히 흉벽 위의 조각이라도 된 것처럼 딱딱하게 앉
아서 바깥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리아가 아니라 레니를 걱정하는 거라고 전해줘, 후치."
"라는군요."
네리아는 의외로 별 대답을 하지 않고는 대신 생긋 웃으며 레니를 이끌
었다.
"가자. 레니. 피가 튀고 비명이 울려퍼지고 하는 일은 남자들 몫이라고
생각들 하라지, 뭐."
레니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그건 남자들 일 맞는 거 같은데요."
"그런가? 흐음. 그러고보니 나도 좀 조신하게 행동해야 되겠네. 이 여
행이 끝나면 곧 멋진 남편과 아들이 생길 테니까…"
샌슨은 의아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아까는 왜 굴러떨어질 뻔한 거냐?"
"몰라도 돼!"
난 그렇게 고함질러주고나서는 다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카알은 관자
놀이를 짚은 채 말했다.
"골치 아프군. 아까의 그 편지는 결국 이런 말이잖아. 우리가 더 달아
나면 대신 이 도시를 공격하겠다. 규모가 좀 큰 인질극이군."
카알은 그렇게 머리 아픈 표정을 짓더니 샌슨에게 고개를 돌렸다.
"퍼시발군. 저들의 인원이 얼마쯤 되지?"
"예. 어두워서 정확히 판단하긴 어렵습니다만 적어도 250에서 270 마리
정도인 것 같습니다."
"그 정도면 썩 정확하네, 퍼시발군. 고맙네. 휴우… 300 여마리의 오크
라. 록크로스 해변에서 루트에리노 대왕과 대적했던 오크와 같은 숫자로
군."
카알은 그런 식으로 샌슨의 계산을 간단히 확대해버렸다. 샌슨은 어깨
를 으쓱이며 말했다.
"이 도시의 경비대와 협조하여 모두 물리치면 어떨까요?"
샌슨의 씩씩무쌍한 제안은 카알의 한숨을 이끌어내었다.
"보게, 퍼시발군. 우린 지금 전쟁 놀이를 할 시간이 없네. 그리고 아까
의 경비대장의 모습이라든지 저 경비대원들의 모습을 봐선… 이 도시 전
체를 샅샅이 둘러봐도 저기 아넨드씨보다 더 우수한 전력은 기대하기 어
려울 듯하이. 이 친구들이 우리 영지의 경비대원들의 반만큼이나 활약할
수 있다면 아무 걱정이 없겠네만."
하긴 그렇다. 내 눈으로 보기에도 지금 성벽 위에 몰려있는 병사들은
활을 들고 있는 허수아비에 비해 딱 한 가지 점에서만 나아보였다. 그들
은 허수아비와는 달리 웅성거릴 수 있는 재주가 있었다. 그것도 불안스
럽게. 길시언은 성벽을 주욱 둘러보고는 말했다.
"이 도시는 황량한 이스트 그레이드에 위치하니까요. 전쟁이나 재난에
서 떨어져 있는 도시입니다. 따라서 경비대원들의 허리가 굵다고 해서
그 바지가 흘러내리지… 미안합니다. 임마! 에, 하지만 성 자체는 그런
대로 견고해보입니다."
"예. 그리고 저 오크들이 공성작전을 제대로 수행할 능력이 있을 것 같
지도 않고. 하지만 오래가지는 못할 겁니다. 시민들의 불안도 문제고 경
비대원들의 수준도… 튼튼한 성을 만드는 것은 성벽의 두꺼움이 아니라
그 성벽을 지키는 자들의 굳건한 마음이라든가요."
"예, 허즐릿의 말이군요. 물론 그 굳건한 마음보다 더 중요한 요소가
있었지요."
카알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꽉꽉 들어찬 식량창고와 병기고라지요."
길시언과 그렇게 농담 비슷한 말을 주고받은 다음, 카알은 아프나이델
을 바라보았다.
"뭔가 해볼만한 것이 있겠습니까?"
"예?"
"대단한 것을 원하지는 않습니다. 저 이빨이 멋진 친구들의 주의를 좀
끌어보고 싶습니다. 효과는 없어도 좋습니다."
"주의를… 끌면 됩니까?"
"예. 회담을 좀 가지고 싶습니다."
아프나이델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성벽 위의 병사들에게 미리 놀라지 말라고 주의를
주고 싶은데요."
그러자 길시언이 곧장 고개를 돌려 외쳤다.
"보시오. 그룬씨라고 했소?"
그러자 크레블린 대장에게 지휘권을 인계받았던 그 병사가 경례를 붙이
며 말했다.
"그룬 크라이첵 상병입니다."
"난 길시언입니다. 지금부터 여기 마법사께서 마법을 쓰실 테니 병사들
로 하여금 당황하지 말도록 지시해주시겠습니까?"
"마법이오? 아,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룬 크라이첵은 즉시 명령을 옆으로 전달하기 시작했다. '모두
들 무슨 일이 일어나도 꼼짝도 하지 말고 엉덩이를 단단히 고정시켜랏!'
그 명령이 빠르게 옆으로 전달되고나자 아프나이델은 고개를 숙이고 캐
스팅을 시작했다. 우리 가까이에 있던 병사들 중 일부는 활을 내려놓을
만큼 놀라서 아프나이델을 바라보았다. 음. 내가 언제부터 마법을 별 경
이감없이 바라보게 되었지? 아프나이델은 갑자기 두 손을 하늘로 들어올
리며 외쳤다.
"환타스멀 포스(Phantasmal force)!"
잠시 동안 우리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새벽 하늘은 여전히 푸르
스름한 공허로서 존재하였고 쥐죽은 듯 조용한 성벽 위의 침묵도 여전했
다. 우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아프나이델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아프나이델은 얼굴이 벌겋게 된 채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도대체 뭐
지? 그 때였다.
"크롸라라라라!"
거의 뽑을 뻔했다. 거의 바스타드를 뽑아들 뻔했단 말이다. 새벽 하늘
그 어두컴컴한 구름 저 위에서 하늘을 울리게 하는 포효 소리가 울려왔
다. 병사 하나가 겁에 질린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
"입 닥 Ф! 존!"
그룬 상병은 이를 악물고 외쳤지만 그 역시 다리가 덜덜 떨리고 있었
다. 그리고 잠시 후, 높은 성벽 위에서 바라보느라 훨씬 가깝게 느껴지
는 구름들 사이로 길다랗고 거대한 입(?) 하나가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
했다. 그리고 그 뒤로 길게 이어지는 콧등과, 마침내 눈, 그리고 그 위
의 뿔… 그리고 탄탄하면서도 우아하게 휘어진 목이 서서히 내려오기 시
작했다.
"드, 드, 드…!"
병사들은 거의 혼란 상태에 빠졌고 그래서 그룬 상병은 목이 터져라 고
함을 지르며 병사들을 진정시켜야 되었다. 성벽 이곳저곳만이 아니라 우
리 등 뒤의 도시에서도 비명 소리들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꺄아아!"
하늘로부터 내려온 그것은 마치 신의 머리가 내려와 지상의 버러지들을
굽어보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 목은 계속 내려오기 시작했고 그 주위의
구름들은 갈갈이 쓺겨져 흩어졌다. 천천히 갈라지던 구름들은 마침내 무
서운 속도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맹렬한 구름의 소용돌이. 그리고
황야에서는 거친 바람소리. 구름의 소용돌이 가운데에서 그 목은 계속해
서 내려왔고 마침내 그 목 뒤로 강인한 어깨, 거대한 날개 등이 내려오
기 시작했다. 날개가 나올 때 구름들은 폭발하듯이 파악 쓺겨져 흩어졌
고 소용돌이 자체가 하늘의 모든 공간으로 흩어져버렸다. 구름들이 하늘
의 모든 방향을 향해 날아가버리자 그 거대한 몸이 전부 드러나게 되었
다.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 위용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크롸라라라라!"
그것은 마침내 구름 아래로 내려온 블루 드래곤의 모습이었다. 운차이
는 피식 웃었다.
"기억력이 좋군. 지골레이드잖아."
자신도 모르게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나 롱소드의 칼자루를 꽉 쥐고 있던
샌슨은 그제서야 이마를 닦았다. 그래. 저것은 지골레이드의 모습이었
다. 다만 아프나이델의 상상력이 보태어져서 터무니없이, 거의 산덩어리
만큼이나 과장되게 표현된 블루 드래곤이었다. 제레인트는 좀 더 잘 보
기 위해 성벽 위로 몸을 불쑥 내밀다가 중심을 잃을 뻔했고 그룬 상병이
그를 붙잡았다.
"아, 고맙습니다. 상병님."
"처, 천만에요. 프리스트님. 그, 그런데 저것은 환상, 환상 맞습니까?"
"물론입니다."
"오, 테페리여…"
그러자 제레인트는 반색했다.
"테페리를 믿으십니까?"
그룬 상병은 이 시점에서 자신의 신앙이 그렇게도 중요한 문제인가 하
는 눈으로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나는 앞으로 좀 나아가서 황야를 바
라보았다.
황야에서는 난리가 일어나고 있었다. 오크들은 미친듯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지거나 무기를 집어던지고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았다. 하늘을 향해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는 용감한 오크들도 몇 마리 보였지만 대개의 경
우 달아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주저앉는 놈들이 대부분이었다. 가슴 저
깊은 곳에서 참을 수 없는 함성이 쏟아지는 광경이었다.
"최고에요! 나의 탑메이지!"
아프나이델은 겸연쩍게 웃으며 손을 내렸다. 그는 카알을 바라보았다.
"주의를 끈 것 같습니다만. 어떻게 할까요?"
카알도 저 굉장한 광경에 매혹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잠시 멍한
눈으로 아프나이델을 바라보더니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굉장하군요. 아프나이델."
"천만에요. 그런데 어떻게 할까요? 아, 물론 저것은 환상이므로 브레스
를 뿜어 오크들을 태우거나 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그런 환상을 만들
수는 있지만 그랬다가는 들킬 확률이 높습니다."
카알과 아프나이델이 침착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가운데에도 그룬 상
병은 미친듯이 뛰어다니며 병사들을 안정시켜야 했다. '이 자식아! 정신
차려! 저건 환상이야! 어서 일어나지 못해? 헤이! 너희들 사귀나? 남자
들끼리 껴안고 뭐하는 거야? 어… 자넨 돌아가서 갈아입고 오는 것이 좋
겠군. 괜찮아! 소문내진 않겠네. 이봐! 명령이다! 성벽경비대원 지크가
바지를 적셨다는 이야기는 지금부터 말 머리에 뿔이 날 때까지 군기밀이
야! 괜찮아! 환상이라고. 저기 마법사님께서 만든 환상이야. 오! 정말로
저게 환상일까? 누가 나에게 저건 환상이라고 말해줘!' 길시언과 샌슨도
성벽을 따라 달리며 그를 도와 병사들을 진정시켰다.
카알은 그 모습을 바라보더니 입술을 적시고는 말했다.
"음. 내가 말하는대로 말하게 할 수 있습니까?"
"예. 그의 목소리는 잊혀지지 않는 것이니까요. 얼마든지 그 목소리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잠시 후 황야를 온통 뒤덮은 그 지골레이드의 환상은 폭풍 같은 목소리
로 외치게 되었다.
"이 쓰레기같은 조그만 놈들!"
"으아아아!"
비명 소리가 엉뚱한 곳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성탑에서 갤러
리로 나오는 계단에서 무릎을 꿇거나 혹은 엎드려 있는 사람들 몇 명이
보였다. 그 중에는 시장님을 모시러 간다고 달려간 크레블린 대장의 모
습도 보였는데 크레블린 대장은 자신의 검을 성벽 아래로 팽개치고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고 엎드려있었다. 우리가 놀란 눈으로 그들을 바라
보자 그들은 고개를 들더니 황급히 손짓을 하기 시작했다.
"뭐, 뭣들 하는 겁니까! 어서 숨어요!"
음. 황당스럽군. 제레인트는 키들거리기 시작하더니 자신의 눈 앞에 손
가락을 세워서는 익살스럽게 좌우로 흔들었다. 그러자 계단에 넘어져 있
던 사람들은 놀란 눈으로 제레인트를 보았다.
"마법입니다. 걱정 마시고 올라오세요."
그러자 계단에 있던 사람들은 의혹에 쌓인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그 때
다시 한 번 천공의 지골레이드가 벽력 같은 고함을 질렀다.
"기특한 녀석들! 크핫하하! 불까지 준비했구나! 그 질긴 고기를 씹기
좋게 구워야겠군!"
아이고, 맙소사.난 못마땅한 눈으로 카알을 바라보았다. 카알은 어깨
를 으쓱이면서 날 바라보았다.
"이봐, 네드발군. 너무 세련된 협박을 사용하면 저 친구들이 못알아들
을까봐 그런 거야."
"그래도 너무 조야해요."
"그럼 어떻게 할까?"
옆에선 아프나이델이 웃으며 날 쳐다보았다. 잠시 후 지골레이드는 이
렇게 외치게 되었다.
"그 냄새나는 몸이 귀하다고 생각되면 즉시 땅에 쓰러져라, 버러지들아
아!"
"그것도 별로 세련되진 않아."
길시언은 이렇게 평했지만 어쨌든 오크들 대부분은 그 몸을 땅으로 날
리기 시작했다. 놈들이 모두 쓰러져 누운 모습은 마치 거대한 전쟁터를
방불케했다. 쓰러진 오크들이 모두 아무런 상처도 없다는 점이 전쟁터와
는 달랐지만. 그 동안에 계단에 쓰러져있던 사람들은 쭈뼛거리며 올라왔
다. 그들 중 허연 턱수염과 허연 백발이 허연 구렛나룻으로 멋지게 연결
되어 마치 늑대의 갈기처럼 보이는 할아버지 하나가 앞으로 나서서 지골
레이드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저거 진짜 가짜입니까?"
진짜 가짜? 가짜 가짜도 있나? 카알은 너그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
다.
"예. 진짜 가짜입니다. 그리고 저는 카알 헬턴트입니다."
"아, 보, 본인은 칸 아디움의 시장 카를로스 안티고어입니다."
"반갑습니다. 시장님."
시장님은 우리들 모두가 평온한 얼굴인 것을 보고는 안심하면서 카알과
악수를 나누었다. 카알은 안티고어 시장의 손을 흔들며 말했다.
"시장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만 지금은 저 오크들부터 먼저 처
리해야 되겠군요."
"아, 예, 부디."
그러자 카알은 다시 아프나이델에게 몸을 돌려서 조용히 속삭였다. 카
알의 속삭임은 지골레이드의 우렁찬 목소리로 증폭되어 황야 곳곳에 울
려퍼졌다.
"지금 당장 이 도시에서 떠나라!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마라! 이 도시는
내가 차지할 것이다! 드래곤의 침소에 접근하는 녀석은 두 발 달린 녀석
이든 네 발 달린 녀석이든 가리지 않고 죽이리라!"
그 때 나는 루트에리노 대왕의 전설은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오크들 가운데서도 완전히 미친 오크가 한둘은 나
오는 법이다. 그리고 그런 오크는 많은 세월이 지나면 영웅의 이름으로
불리워질지 모르는 것이고.
어쨌든 그것은 먼 훗날의 일이고 지금 당장의 현실은 왠 정신나간 오크
하나가 육중한 글레이브를 들어올리며 고함을 지르는 모습으로 나타났
다. 그 오크는 다른 오크들보다 월등히 커다란 덩치를 가지고 있어 거의
사람만한 녀석이었고 머리엔 새카만 투구를 쓰고 있었다. 그 오크는 온
들판이 올리도록 고함을 질렀다.
"취이이익! 새빨간 거짓말! 넌 드래곤이 아니야앗! 취이이익!"
농담이 아니다. 비록 가느다랗긴 했지만 성벽 위에 있는 우리들에게까
지 충분히 들려왔다. 저 오크가 서있는 장소와 성벽까지는 직선 거리로
1,200 큐빗 정도 되는 것 같으며, 따라서 저 오크 녀석은 의심할 여지없
이 괴물이다. 곧이어 그 정신나간 오크의 어깨는 부풀어 터져버릴 듯이
팽창했다.
"맙소사!"
엑셀핸드의 탄성이 들렸다. 그리고 그 오크는 온힘을 모아서 공중의 지
골레이드를 향해 글레이브를 투척했다. 그 어떤 영웅이라도, 설령 루트
에리노 대왕의 여덟 별 중의 라인버그가 내 OPG를 끼고 던지더라도 저
높이의 드래곤에게 던질 수 있는 의문이다. 높이는 둘째치고 눈 앞을 완
전히 가로막아버리는 저 위용에 짓눌려서라도 그렇게는 못할 것이다. 하
지만 저 검은 투구의 오크는 그렇게 했다! 글레이브의 쇠창날이 검은 들
판을 배경으로 번뜩였다.
쐐애애애액!
섬광처럼 날아간 글레이브는 그대로 지골레이드의 몸을 뚫고 지나갔다.
물론 지골레이드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글레이브는 허공을 날아서는 요
란한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졌다. 쟁그렁!
잠시 후 공중에 떠있는 지골레이드의 모습은 아무런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다. 아무도 믿지 않는 환상은 사라지는 법. 땅에 쓰러져있던 오크들
은 천천히, 하지만 맹렬한 동작으로 일어났다. 황야에서 지진이 일어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거센 환성이 들려왔다. 거리가 너무 떨어져서
무슨 말인지는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모두들 대단히 즐거워하고 있
는 것은 확실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취이이익! 취익, 취이익!" 하는
소리는 확실히 구분할 수 있었다. 카알은 씁쓸한 얼굴이 되어 아래를 내
려다보았고 아프나이델 역시 마땅찮은 얼굴이었다. 그 소란스러운 환성
이 소용돌이 가운데서 검은 투구의 오크는 하늘을 향해 포효했다.
"크우우우우! 크아아아아!"
"녀석들, 기분 좋겠군."
제레인트는 아주 단순한 즐거움으로 그렇게 말했다. 마치 오크가 기분
좋으니 자신도 기분좋다는 식으로. 그래서 샌슨은 제레인트를 바라보며
입매를 씰룩거렸다. 그런데 그 검은 투구의 오크가 다시 고함을 지른 순
간 샌슨의 입술은 쩍 벌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우리들 역시 아프나이델
의 마법이 깨진 것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 검은 투구의 오크의 고함소
리는 퍽 작았지만 여전히 확실히 들렸다.
"취잇취이이익! 화렌차와! 오크의 친구인 성자 핸드레이크가 나를 돌보
신다! 취익! 지저분한 속임수 따위, 치워랏! 취이이이익! 내려와서 칼과
칼로써, 피와 피로써 싸우자앗! 취이이익!"
11.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한다……7.
"샌슨."
"응?"
"내가 들은 말을 샌슨도 들었다는 식으로 말하지 마. 정신이 이상한 사
람은 나 하나로 족해."
"…미안해. 나도 들었어."
"그럼 우리 둘 다 정신이 이상한 거로군?"
"그런 것 같아. 사실 늘 그런 생각을 하고 있긴 했지만."
샌슨과 내가 이런 넋빠진 소리를 하고 있는 가운데 카알은 성벽 바깥으
로 투신자살이라도 하려는 사람처럼 맹렬히 앞으로 달려갔다. 카알은 성
벽 위로 상빈신을 거의 다 내밀고는 오크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앞으로 달려갔던 것과 거의 같은 속도로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아프나이델! 내 목소리가 저기까지 울리게 만들어 줄 수 있습니까?"
"아니오. 지금 그런 마법은 없습니다."
"이런! 어디 보자. 저 친구를 여기로 불러들이려면…"
그 때 운차이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조용한 목소리로 카알에게 말했
다.
"할 말이 있습니까?"
"예? 아, 예. 저 오크 친구가 지금 핸드레이크의 이름을 거론…"
운차이는 카알의 이야기를 무시하면서 말했다.
"그럼 내가 전해주지요. 뭐라고 물어볼까요."
"예? 아, 그래주시겠습니까? 그럼, 저 친구가 말한 오크의 친구, 성자
핸드레이크가 무슨 뜻인지 좀 물어봐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리고 운차이는 가볍게 날아오르더니 곧 흉벽 위에 섰다. 운차이는 크
게 숨을 들이키면서 두 팔을 머리 옆으로 들어올려 공격 의사가 없음을
밝히는 자세를 취했다. 안티고어 시장은 불편한 얼굴이 되어 카알에게
말했다.
"보십시오. 헬턴트공. 이곳의 책임자는 나인 줄 알았는데."
흐음. 조금전 지골레이드가 있을 때만 해도 카알에게 모든 책임을 넘긴
다는 식으로 행동하시더니. 난 불쾌한 시선으로 시장을 바라보았지만 카
알은 점잖게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안티고어 시장님. 이 질문만 좀 하도록 허락해 주십
시오. 부탁입니다. 전 다른 병사들이나 이 도시의 지휘체계에 대해 간섭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저 전사는 제 동료이고 제 부탁에 의해 오크들에
게 질문하는 것이니…"
"하지만 당신은 우리 도시의 손님이고 주인의 지시에 따르는 것은 당연
하지 않소! 더우기 전시상황인 도시 내에서라면 말이오."
안티고어 시장은 굳은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운차이는 안티고
어 시장의 이야기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심호흡을 하
더니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이봐아! 오크들아아아!"
머리가 울리는 기분이었다. 안티고어 시장은 뭐라고 말하려던 입을 그
대로 벌리며 신음을 흘렸다.
"허, 허어어…억."
"아이고, 내 귀!"
엑셀핸드는 비명을 지르며 귀를 막고서 물러났다. 엑셀핸드는 귀가 퍽
민감한 모양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러났다. 시장과 다른 수행원들, 그리고 라스 대장 역시 얼굴을 찡그리
며 좌우로 물러났다. 성벽 위라서 뒤로는 물러날 수 없었으니까. 두 손
으로 귀를 막으며 물러나면서도 미소를 떠올리는 카알의 얼굴이 보였다.
운차이가 그렇게 성벽이 울릴 정도로 고함을 지르자 저 아래에서 오크
들의 소란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검은 투구의 오크는
이쪽을 올려다보았다. 놈이 고함을 질렀다.
"취이엑! 노린내나는 인간! 무슨 말을 하고싶은 거냐아앗!"
미약하지만 정확한 목소리. 샌슨은 기막힌 얼굴로 말했다.
"웃기는 일이군. 1200 큐빗 거리에서 대화를 나눌 생각을 하다니. 게다
가 더 웃기는 것은,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진다는 것이야."
샌슨은 투덜거렸지만 난 이것이 좋은 노래의 소재가 될 것이라고 생각
했다. 짙푸른 새벽 하늘, 광막한 이스트 그레이드의 황야. 그리고 운차
이는 푸른 새벽 하늘을 머리에 이고 흉벽 위에 당당히 서서 고함을 지르
고 있는 것이다. 안티고어 시장은 고개를 휘휘 젖더니 다시 뭐라고 말하
려 했지만 그 때 운차이는 다시 외쳤다.
"오크의 친구, 성자 핸드레이크가 무슨 뜻이냐아아!"
"네 이놈! 취이이익! 그 분의 이름을 함부로 거론하는 것이냐아앗!"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내 마음대로다! 대답햇! 네가 말하는…"
그 때였다. 안티고어 시장은 자꾸 자신의 말이 가로막히는 것에 대해
짜증이 난 것처럼 운차이의 허리를 붙잡아 아래로 잡아당겼다. 운차이는
비틀거리다가 간신히 안전하게 뛰어내렸지만 노한 얼굴이 되어 거칠게
시장의 팔을 뿌리쳤다. 그러자 시장 역시 몸을 긴장시키며 방어자세를
취했고 그의 수행원들이 재빨리 시장의 주위를 둘러쌌다. 운차이는 손을
칼자루로 가져갈 듯했지만 다시 손을 내리며 험악하게 말했다.
"무슨 짓이오?"
시장은 잠시 숨이 막히는 표정을 지었다. 아이고, 시장님. 운차이의 눈
을 똑바로 들여보았군요? 시장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다가 얼굴
을 떨구었다. 그는 헛기침을 하더니 카알에게 말했다.
"이보시오. 헬턴트공."
"예. 시장님?"
"당신도 지각이 있다면 이런 이야기를 계속해야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
을 것이오. 저 목청 좋은 작자가 이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
록 저런 이야기를 해대는 것 말이오!"
"예? 아니, 무슨 이야기 말씀입니까?"
"이런, 제기랄! 루트에리노 대왕과 핸드레이크의 이야기는 우리 나라의
가장 소중한 뿌리이자 긍지요! 그의 이야기에 오크 따위가 끼어들어서는
곤란하다는 말이오. 아시겠소? 지금까지 오간 이야기만 해도 도대체 무
슨 소문이 퍼질지 모르겠구만 그래."
카알은 잠시 얼떨떨한 표정이 되어 안티고어 시장을 바라보았다. 마치
아주 희귀한 종류의 인간을 본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 딱
딱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그 두 분의 이야기는 모든 종류의 의혹과 불쾌한 시선에 대해 보호받
아야 된다, 이 말씀입니까?"
"당연하지 않소! 이 나라는 지금 전시오. 온국민이 단결해야 되는 시점
이고 루트에리노 대왕과 핸드레이크의 전설은 그러한 단결의 근간이오.
도대체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루트에리노 대왕과 핸드레이크를 존경하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이오? 그런데 저 오크 따위가 오크의
친구 핸드레이크니 어쩌니 하는 소리를 했다는 말이 퍼져보시오. 어처구
니없는 말이지만 어쩌면 핸드레이크가 오크들과 뒷거래를 했다는 식의
이야기가 나올지도 모르겠구먼 그래."
"그게 사실이라면 어쩌시겠습니까?"
"뭐요? 웃기지 마시오!"
"웃기는지 아닌지 묻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정말 핸드레이크가 오크의
친구였다면 어쩌시겠습니까? 시장님도 아시겠지만 핸드레이크에 대한 믿
을만한 기록은 드물지요. 그리고 감히 말씀드립니다만 전 여기 있는 누
구보다도 핸드레이크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 알고 있습니다. 저희들
의 여행에서는 그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나왔습니다. 그런 저도 저 이야
기는 믿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그게 사실이면 어쩌시겠습니
까?"
"그런 사실은 필요없소!"
"예?"
"사실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소. 알아야할 사실과 알 필요가 없는 사
실, 아는 것이 오히려 해가 되는 사실 말이오! 어린 아이에게 독극물의
지식을 가르치면 안된다는 것쯤은 당신도 알 것 아니오?"
주위의 사람들은모두 입을 다물고 두 사람을 바라보았고 그러자 저 멀
리 오크들이 내는 소음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다른 사람들은 지금 카알
과 안티고어 시장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내 눈에는 그것은
두 가지 종류의 서로 다른 인간형의 대립처럼 보였다. 한쪽은 국가나 역
사 따위에 연연하지 않고 진실에만 관심이 있는 인간. 카알은 수많은 인
간들이 살아가는 바이서스라는 나라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신을 만
족시킬 차가운 진실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나머지 하나는 과거의 모
든 것을, 설령 거짓과 가식을 동원해서라도 소중히 지키려는 사람. 안티
고어 시장은 수많은 인간들이 살아가는 바이서스에 커다란 애정이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그 애정을 위해서라면 진실을 부정하고 무시해도 상관
없다고 할지 모르겠다.
누가 올바른 거지?
그러나 카알은 곧 침착하게 말했다.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제가 지나쳤습니다. 안티고어 시장님.
사죄하겠습니다."
그러자 안티고어 시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설전을 주고받느라 상
당히 긴장했던 모양인지 어깨를 주무르기까지 했다. 그는 헛기침을 좀
하고나서 말했다.
"여러분들이 이 도시에 들러주신 이상 나는 이곳의 주인으로서 여러분
들이 이곳에 머무는 동안 여러분들의 안전에 대해 모든 책임을 다하겠
소. 여러분들이 위험한 이곳에 계실 필요는 없으니 시청으로 가시지요."
"저 오크들은 저희들의 뒤를 쫓아온 것입니다. 저희들도 책임을 져야겠
지요."
"걱정마시오. 칸 아디움의 성벽을 믿으시고 그 경비대의 힘을 믿으십시
오. 우리들이 친구이자 동포로서 여러분들의 어려움을 돕도록 해주시
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시장님."
카알이 그렇게 말하자 다른 사람들도 별 의견이 없었다. 제레인트는 이
곳에서 오크들을 더 구경하고 싶다고 말했기 때문에 성벽에 남게 되었고
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안티고어 시장의 뒤를 따라 성벽을 내려갔다.
흐음. 시청에서의 아침 식사와 식후의 차 한 잔이 기대되는군.
국왕 전하를 친견하고 거기에 덧붙여 직접 훈장을 수여받았다는 사실이
이렇게 대단한 것인 줄은 몰랐어. 음. 그게 그렇게 대단한 건가? 엑셀핸
드의 말마따나 후치 네드발이란 인물에 대한 존경심은 날 오랫동안 사귀
어보고 난 다음에 표현해주면 좋을 텐데.
어쨌든 지금 우리들은 따스한 아침 식사를 대접받고 거기에 덧붙여 시
청의 시장님 사무실에 모여 앉아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사무실은 대단
한 특징은 없이 그저 공무원의 사무실이라는 분위기를 풍겼다. 그리고
테이블 상석에 앉은 안티고어 시장께서는 자못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우
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참 곤혹스러운 질문을 던졌다.
"그래, 네드발군. 전하를 친견했을 때의 기분이 어땠나?"
뭐라고 대답하지? 훈장수역식의 기억이라고는 장엄의 홀인지 뭔지, 가
운데 걸어가는 사람 무진장 애먹이는 그런 장소, 지독하게 졸리는 문서
봉독자의 화려취미의 미사여구, 훈장을 받게 되었을 때는 정말 기뻤지.
이제야 끝나는구나! 하면서.
"어, 서툰 표현으로 그 감동을 함부로 표현하고 싶지 않군요."
이 정도면 내 혀에 대한 칭찬도 아깝지 않지. 핫하하! 엑셀핸드는 너
그 때 반쯤 졸고 있지 않았느냐는 시선으로 날 바라보았지만 난 뻔뻔스
럽게 무시했다. 길시언은 그런 나를 보며 빙긋이 웃었다.
카알은 커피 - 그렇다, 커피! 그것이 이 도시에도 있었던 것이다. 안티
고어 시장의 기호품인 모양인데 그는 카알이 커피를 마신다고 하자 퍽
좋아했다. 음. 나라도 내가 저런 괴상한 음식을 좋아한다면 같은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기쁠 거야. - 를 한 모금 삼킨 다음 찻잔을
내려놓고서 말했다.
"시장님. 어떻게 생각하실진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커피맛은 퍽 좋군
요. 하지만 전운이 감도는 도시에서 마시는 커피라 그런지 그 향취에 깊
이 빠져들 수가 없군요."
성 밖에선 충만한 살의를 불태우는 오크들이 도사리고 있는데 한가하게
커피나 마시고 있어서야 시장이라고 할 수 있느냐? 이런 속뜻이 담겨있
지요, 카알? 그러나 안티고어 시장은 카알과의 언외언 문답에 능숙하지
못했다. 그는 푸근한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이다.
"아, 불안을 떨치십시오, 헬턴트공. (카알은 어깨를 조금 늘어트렸다.)
여러분들이 저 흉악한 오크들에게 쫓기면서 심신이 많이 피로해지셨을
줄은 익히 짐작합니다. 이제 나의 도시에서 그 피로를 잊으시고 심신의
활력을 되찾으시오. 그리하여 여러분들이 보다 충만한 여행이 되도록 대
비할 수 있도록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소."
"더없이 감사한 말씀입니다. 시장님."
높은 의자 위에서 체면 떨어지게시리 다리를 흔들고 있던 엑셀핸드가
말했다.
"그런데, 이보시오. 시장. 여기 계속 있어도 되겠소?"
엑셀핸드의 보다 직접적인 말에 안티고어 시장은 당황했다. 그러자 아
프나이델이 재빨리 말했다.
"아, 엑셀핸드님께서는 시장님께서 저희들 때문에 귀중한 시간을 낭비
하시지 않으실까 걱정하시는 것입니다. 밖에선 병사들이 시장님의 지휘
를 기다리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안티고어 시장은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는 하얀 턱수염을 쓸어
내리면서 말했다.
"염려마시오. 오크들이 하늘을 날지 못하는 바에야 저 단단한 성벽을
어떻게 하겠소?"
길시언은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그는 그렇게 눈을 감
은 채 말했다.
"루트에리노 대왕과 록크로스 해변의 이야기가 생각나는군요."
"뭐라고?"
안티고어 시장은 다시 당황해서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길시언은 팔짱을
끼고 있느라 프림 블레이드의 방해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여유있게 말했
다. 눈은 계속 감은 채로.
"록크로스 해변에서 300여 마리의 오크들을 대적했던 루트에리노 대왕
의 이야기 말입니다. 그곳은 황량한 해변이지요. 성벽같은 것은 눈을 씻
고 찾아보아도 찾을 수 없는. 그 때 루트에리노 대왕이 의지했던 것은
굳건한 성벽이 아니라 핸드레이크라는 인간, 그리고 그 인간과 자신의
굳건한 우정이었습니다."
안티고어 시장은 경계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 물론 그렇지. 길시언군. 그리고 우리는 거기에 덧붙여 굳건한 성
벽까지 갖추고 있지 않은가."
길시언은 김빠진 웃음을 지어보였다. 나는 문득 길시언이 바로 길시언
바이서스, 국왕 전하의 형이라는 사실을 밝히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떠
올렸다. 그런데 길시언은 왜 그 사실을 밝히지 않는 거지? 길시언이 자
신의 입으로 그 사실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일행들도 모두 암묵
적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하긴 우리가 국왕전하께 칭호를 받은 명예
의 기사라는 이야기만 듣고도 라스 대장은 심장마비를 일으킬 정도로 놀
랐었다. 만일 길시언이 왕자라는 사실까지 밝힌다면? 음. 귀찮은 일이
되겠군.
결국 샌슨이 더 참지 못하고 말했다.
"저, 시장님. 그럼 우리들은 이 도시에 대해선 아무 걱정을 하지 않아
도 되는 겁니까?"
"어? 어. 그렇소, 퍼시발공."
난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왕자인 길시언 바이서스는 길시언군이고 우
리 고향의 경비대장, 성밖 물레방앗간의 처녀에게 코를 꿰인 샌슨 퍼시
발은 퍼시발공인가? 길시언을 훔쳐보자 그는 신비한 미소를 짓고 있었
다. 샌슨 역시 우스꽝스러운 얼굴이 되었지만 꾹 참고서 말했다.
"그럼 친절한 대접에 감사를 표한 다음 이만 떠나고 싶군요. 저희들의
여정이 몹시 바빠서요."
샌슨은 그렇게 막무가내로 말해버렸다. 카알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이미
늦었다. 안티고어 시장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아, 그런가? 이런. 여러분들의 급한 여정이 나때문에 방해받아서는 안
되겠지. 헬턴트공. 혹시 여정에 필요한 물자나 기타 등등이 있으면 말씀
해보시오. 내 손 닿는 것이면 모두 다 준비해드리리다."
카알은 한숨을 쉬고나서 말했다.
"아니오.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저희의 여정이 그렇게 급하지는
않습니다. 퍼시발군. 우리 때문에 곤경에 처한 도시를 뒤로 하고 우리가
어떻게 달려갈 수 있단 말인가."
"시장님이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이 도시에 대해선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퍼시발군."
샌슨은 입을 다물었지만 여전히 불평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러자 안티고
어 시장은 다시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이런. 퍼시발공의 말씀이옳소, 헬턴트공. 칸 아디움에 대해서
는 전혀 걱정하실 필요가 없소. 아니, 여러분들의 여정에 방해가 될지도
모르는 저 오크들은 우리가 처리해드리지요."
아이고 맙소사. 그거 정말 감사한 말씀이군요. 더이상 우리들을 쫓지
못하게 해주신다고? 저 녀석들이 얼마나 질긴지 몰라서 하시는 말씀이에
요, 시장 나으리. 헷!
카알은 안티고어 시장에게 목례를 하며 감사를 표했다.
"고마운 말씀입니다만 도의상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저 오크들에
대해서는 저희들이 책임을 져야지요."
"오, 천만에요. 저희들에게 맡겨주시고 아무런 걱정을 하지 마십시오.
하하하."
안티고어 시장은 그렇게 웃었고 카알은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참 이상
한 시장님이군. 밖에 300 마리 쯤 되는 오크들이 진을 치고 있는 상황이
라면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것이 당연할 텐데 외려 도와주겠다는
사람을 거절하다니. 호탕하게 보이고 싶은가 보지? 샌슨은 입맛을 다시
고는 말했다.
"시장님이 저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저 호의를 받아들이시지요, 카알?"
카알은 샌슨을 노려보았지만 샌슨은 그 눈길을 회피하며 유유히 천장을
쳐다보았다. 카알이 다시 안티고어 시장에게 뭐라고 말하려 했을 때였
다. 사무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11.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한다……8.
잠시 후 병사 하나가 달려들어와서는 시장에게 경례를 붙이고 잠시 우
리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안티고어 시장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우리들
에게 실례한다고 말한 다음 밖으로 나갔다.
안티고어 시장이 밖으로 나가자 카알은 곧장 샌슨을 노려보기 시작했
다. 샌슨은 그 눈길을 회피하려다가 그냥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말했다.
"시장은 자신이 있는 모양이더군요. 아마 루트에리노 대왕의 이야기를
재현해보고 싶은 모양인데요. 칸 아디움 성에서 안티고어 시장과 300 오
크의 혈전."
"그래서? 그냥 이 도시에 맡겨두고 달아나버리자는 말인가?"
"시장은 그러라고 권하지 않습니까?"
"난 안티고어 시장에겐 관심없네. 이 도시의 시민들에게 관심이 있을
뿐이야. 저 밖의 오크들은 바로 우리들을 쫓아온 것인데 그때문에 이 도
시의 시민들이 불행한 사건을 겪게 만들 수는 없어."
"무슨 말인지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설령 우리가 손들고 나간다고 해서
오크들이 물러날 리는 없습니다."
카알은 샌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샌슨은 담담하게 자신의 의견을 설
명해나갔다.
"저 놈들이 저만큼 조직화된 바에야 뭔가를 얻기 전에는 흩어지지 않을
거란 말입니다. 우리 이야기는 어차피 구실일 겁니다. 아마도 노리는 것
은 겨울식량일 가능성이 더 높겠지요. 정말 우리를 노리는 거라면 이런
성을 포위하는 것은 오히려 귀찮은 일입니다. 우리를 앞질러 간 다음 적
당한 곳에서 매복한 다음 기습하는 것이 낫지요."
샌슨의 날카로운 통찰력은 우리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 옳은 말일세. 퍼시발군. 아마도 우리를 쫓던 오크들이 이 근방의
오크들을 규합한 거겠지. 그렇지 않아도 겨울식량을 위해 노략질을 준비
하던 오크들이 있었을 테니까."
"그렇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나가든 말든 오크들은 여기를 공격할 거란
말입니다. 우리를 불러내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이 성에 있으면 귀찮
다고 생각한 때문이 아닐까요?"
"귀찮다고?"
샌슨은 나와 운차이를 힐끗 쳐다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괴물 초장이와 괴물 눈알의 위명은 오크들에게 잘 알려져 있으니까
요."
이거 자랑스러워 해야 되나? 카알은 쓰게 웃으며 말했다.
"난 오크들에게로 나가겠다고 말한 적 없네. 저 녀석들의 편지를 그대
로믿고 밖으로 나가면서 '우리가 나왔으니 이 도시는 공격하지 않으시
겠지요?'라고 물어볼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네. 저 친구들의 게획이 자네
가 말한대로일 거라고 확신할 순 없지만, 최소한 저만큼이나 모였으니
한 번 휩쓸어보지도 않고 해산시키는 것은 어느 부대의 지휘자라도 아쉬
울 거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네."
"됐네요! 그럼 우리는 책임감을 그렇게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이 도시
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시장은 우리들의 도움을 거절하지 않습니까? 카
알이 몇 번이나 그렇게 말했는데도 말입니다."
"도움을 줄필요가 있다면 상대가 뭐라고 하든 도와야지! 어린애들을
돕기 위해서라면 어린애가 싫어하는 약을 억지로 먹이듯이."
샌슨은 입을 다물고 다시 불평불만이 가득한 헬턴트 남자의 표정을 지
었다. 헬턴트 남자들은 스스로를 던져 스스로의 도시를 지키는 법이지.
아무래도 나 역시 불평 섞인 표정을 짓는 것이 좋을 것 같군. 하지만 카
알은 아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골레이드의 환상이 들키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자 아프나이델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워낙 재주가 없다보니."
"아니, 아프나이델씨가 사과할 일이 아니지요. 그 검은 투구의 오크는
완전히 괴물이었습니다. 그런 용맹한 오크가 있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
까."
그 때 사무실 문이 열리더니 제레인트와 네리아, 그리고 레니가 나타났
다. 제레인트는 얼굴이 발갛게 되어서는 흥분해있었다. 그는 들어오자마
자 이야기를 시작했다.
"야, 굉장하더군요."
"예?"
"녀석들이 공성추를 만들 생각인가 봅니다."
"고, 공성추요?"
제레인트는 소파에 털썩 앉더니 곧 마구 손짓을 하며 말했다.
"예. 황야 저편에서 오크들이 거대한 나무를 운반해오고 있습니다. 이
근처 어디에도 나무 같은 것은 없는데 말입니다. 아무래도 녀석들은 세
피아파인 고개에서 무리를 두 개로 나누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선두
무리는 이 도시로 진격하고 후방부대는 나무를 해서 끌고온 모양입니다.
지름이 4, 5 큐빗은 될 것 같은 아름드리 나무인데 녀석들이 거기에 십
자형으로 나무 두 개를 묶어서 바퀴축까지 만들었더군요. 아, 바퀴는 둥
근 방패 여러 장을 겹친 다음 가운데 구멍을 뚫어 만들었습니다. 오싹하
고 멋지더군요."
제레인트는 참으로 신기하고도 경이로운 일이 아니냐는 듯이 신나게 설
명했고 그러자 카알은 이마를 딱 짚으며 신음을 흘렸다.
"오, 맙소사. 퍼시발군. 자네에게 경의를 표해야 되겠군. 자네 말이 맞
았네. 아무래도 놈들은 제대로 결심하고 온 모양이군."
"예? 무슨 말입니까?"
제레인트는 그렇게 물었고 그러자 카알은 저 놈들이 우리 이야기를 하
는 것은 구실일 뿐이고, 실제 목적은 이 도시에 대한 노략질일 것이라는
점을 이야기해주었다. 그러자 제레인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크레블린 대장이나 아넨드씨도 그렇
게 이야기하더군요."
"그래요?"
"예. 후방 부대는 수레나 짐꾸러미 같은 것에다 기치 같은 것도 몇 개
들고 왔더군요. 크레블린 대장이 낙담한 어투로 설명해주길 선두를 맡은
부대는 빠른 이동을 위해 무기만 들고 돌격해온 것이며 후방부대가 식량
이나 기타 지원물품을 가지고 이제 도착한 거랍니다. 녀석들은 틀림없이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온 것이며 그렇다면 놈들의 목적은 우리 일행이
기는 어려울 거라고 말해주더군요."
"그래요. 음. 후방부대의 수는 어느 정도 되겠습니까?"
"예에. 전 숫자를 세는 데는 자신없습니다만 아무래도 선두부대와 거의
같은 숫자인 것 같습니다."
카알은 얼굴이 노랗게 바뀌었다. 샌슨은 침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조금전 시장님께 찾아온 병사가 무슨 소식을 전했는지 짐작하겠군요."
카알은 자신의 심정을 간단하게 표현했다.
"망할…"
칸 아디움의 시내는 벌집을 쑤셔놓은 듯했다. 날은 이미 밝았지만 짙은
구름 때문에 태양은 따스함이란 전혀 없는 동그란 구슬이 되어 있었다.
살갗에 닿는 바람은 흉흉한 느낌을 준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우는지 모
르면서 목이 터져라 우는 꼬마, 이리저리 부산하게 달려가는 병사와 사
내들, 왜 모두들 고함을 지르며 달리는 것일까. 그리고 집안으로 뛰어들
어가는 아낙네들과 그 아낙네들에게 귀를 붙잡힌 채 끌려가는 머리가 좀
굵은 사내아이들. 사내아이들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엄마는 항상
재미있는 것은 못하게 해!' 하는 식의 말을 외치고 있었다. 어쨌든 그런
잔칫판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즐거워하는 사람은 하나뿐인 것 같다. 제
레인트는 코를 쓱 닦으며 말했다.
"흐음. 시민들이 불안해하는 것 같군요."
"당신은 불안하지 않소? 이방인이라서?"
길시언의 질문에 제레인트는 어깨를으쓱였다.
"모든 것이 테페리의 뜻대로. 전 여기 있을 겁니다. 아무래도 떠날 필
요를 느끼기 힘들군요."
"예?"
우리 일행은 바쁜 걸음을 잠시 멈추고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샌슨은
크게 놀란 얼굴로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아니, 여기 남겠다는 말입니까?"
"예. 떠나야할 여러 가지 이유를 생각해보았습니다. 레니양의 호송은
시급한 일이다. 그리고 이 도시의 성벽은 안전하다. 그리고 내가 있어봐
야 오크들과의 전쟁에서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성벽 위에 서서 이런 이
유들을 차분히 생각해보았습니다만 아무래도 떠나고 싶지 않군요. 그리
고 저는 이런 마음이 언제 드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하하하."
"테페리의 뜻이군요."
"예! 그리고 테페리의 뜻을 따르는 것이므로, 전 불안하지 않군요."
나도 테페리의 신자가 되어볼까? 어느 때라도 불안감은 없을 것 같은
데.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한 마디만 하지요."
우리는 카알을 바라보았다. 카알은 잠시 숨을 고르면서 말했다.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는 자유로운 여행자들이며 서
로가 서로를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세레니얼양이 자의로 떠난것은잘
기억하실 겁니다. 그렇듯이 우리는 서로를 강제할 아무런 권한도 없는
집단이지요. 물론 그랜드스톰의 의뢰를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몇몇 사람
들은 그 책임에 따라 행동할 필요가 있긴 합니다만, 전 지금 그 책임을
잠시 잊고 싶습니다. 아무래도 이번 여행에서 전 다른 사람이 저에게 부
여한 임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군요."
길시언은 팔짱을 낀 채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임무를 이행하지 못한다고요? 일스 공국의 사절건 말씀입니까?"
"예. 그리고 이 도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전 지금갈색산맥을 향해
달려가야 될 책임이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이 도시의 위험을 수수
방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카알 아저씨는 멋져요! 이대로 달아나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을 텐
데. 이 도시의 시장님도 우리들보고 가라고 하는데 말이에요. 미혼이시
죠? 어떻게 아직 미혼이세요?"
네리아의 이상한 질문에 우리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카알은 머쓱한 표
정으로 말했다.
"여성분들의 안목이 정확한 때문이겠지요. 아, 그리고 지금은 다른 이
야기를 좀 하지요. 우리 책임도 분명히 중요한 일입니다. 크라드메서의
웨이크닝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으니까요. 어떻게 생각하실진 모르겠습
니다만, 갈색산맥으로 갈 인원은 그렇게 많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무리를 나누자는 말씀입니까?"
길시언의 질문에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물론 먼저 여러분들의 찬성이 있어야겠지만, 여러분들이
찬성한다면 저로선 우리 무리를 둘로 나누어 한 무리는 이 도시를 돕고
다른 무리는 레니양을 갈색산맥으로 데리고 가면 좋겠다고 생각됩니다."
"나쁜 의견처럼 들리지는 않군요."
그러자 엑셀핸드는 손바닥에 침을 퇘 뱉더니 도끼자루를 힘있게 쥐어보
였다.
"난 이곳에 남지! 오크놈들의 머리가 600 개야. 골라가면서 벨 수 있겠
군."
카알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잠시 후 그 미소는 난처한 표정으로 바
뀌었다. 엑셀핸드를 필두로 해서 모든 사람들이 이곳에 남겠다고 말해버
린 것이다. 그 각자의 이유를 들어보자.
"이미 말했죠? 테페리의 뜻대로. 제가 신의 뜻을 거부해야 될 만한 이
유가 있으면 말해보십시오."
"아, 그런 이유야 없지요."
"미력한 마법이지만 엑셀핸드님을 돕고 싶습니다. 아, 저, 물론 전 풋
내기 마법사이고 풋내기 마법사가 감히 전쟁에 어떤 도움을 줄 것이라고
는…"
"아닙니다. 누가 아프나이델씨가 풋내기 마법사라고 그러겠습니까. 아
까 지골레이드의 모습은 정말 공포스러웠지요."
"프림 블레이드는 무기가 아니라 일종의 예술품… 칵! 무기입니다. 뭐
야! 네가 무기가 아니고 그럼 뭐냔 말이다! …죄송합니다. 어, 흠! 어쨌
든 무기가 있을 곳은 적이 있는 곳입니다."
"예. 당연한 말씀입니다."
"헬턴트 전권대리인을 보호하는 것이 저의 임무입니다. 카알 곁에 있겠
습니다."
"퍼시발군. 그건…"
"어? 샌슨. 내 임무와 같네?"
"…네드발군."
"장래의 아들을 돌봐야 돼요."
"예?"
난 까무러치는 표정을 지었고 카알은 어이가 없는 얼굴로 네리아와 날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는 절망적인 얼굴이 되어 아직까지 대답을
하지 않은 운차이를 돌아보았지만 곧 시선을 되돌렸다. 운차이는 조용히
검을 뽑아들고서 햇빛에 비춰보고 있었던 것이다. 카알은 시무룩한 얼굴
로 레니를 바라보았고 그러자 레니는 토끼 같은 눈이 되어서는 말했다.
"저 혼자 가요? 길도 몰라요!"
"그렇게 말한 적 없습니다. 레니양."
카알은 두 팔을 축 늘어트렸고 우리들은 모두웃었다. 길시언은 미소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리는 모두 자유로운 여행자이며 서로가 서로를 간섭할 수 없습니다.
어쩌시겠습니까, 카알?"
카알은 체념한 얼굴로 말했다.
"600 마리의 오크들을 처리하는 가장 빠른 방법에 대해 논의해봅시다."
작전명은 그랬다. 오크 600 마리 최단시간 격파작전. 독창성이나 참신
함은 별로 찾아볼 수 없었지만 어쨌든 작전명은 그렇게 정해졌고 그 누
구에 의해서도 불리워지지 않은 채 사장되어버렸다.
그 작전의 수행인원을 보자면, 먼저 자칭 독서가, 타칭 독서가를빙자
한 독설가 카알 헬턴트가 작전을 지휘하게 되었다.
"내가 왜 독설가인가, 네드발군?"
"진짜 독설가는 독설을 내뱉을 때도 전혀 독설이 아닌 것처럼 위장하는
법이라고 전에 가르쳐줬지요?"
"별로 할 말 없네."
그리고 작전인원을 보자면, 많은 부분에서 인간과 착각될 수 있는 오우
거, 마법검에 시달리면서도 그 성능 때문에 버리지 못하는 전사, 신의
뜻에 따라 교수대에 목이 매이면서도 웃어버릴 성직자, 실제로 교수대에
걸릴 뻔했지만 다행히 풀려난 자이펀 간첩, 면도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예리한 도끼를 시도 때도 없이 휘둘러대는 드워프에, 아들 딸린 홀아비
를 노리고 있는 시집가고 싶어하는 처녀가 하나요, 그리고…
"후치. 탑메이지가 어쩌니 하는 말은 제발 하지 말아줘."
"스스로가 거부하는 칭호를 받게 될 불운한 마법사."
"…젠장."
"난 뭐니, 후치야?"
"그 모든 인원들이 애정과 헌신으로 보호하는 항구의 소녀."
"호호호."
"이렇게 화려한 인원이라고요, 카알. 도대체 어떻게 할 생각이지요? 지
금 어느 때보다 냉철한 판단이 필요할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건데요, 이
화려한 인명록은 듣기엔 좋을지 몰라도 600마리의 오크를 처리할 수 있
는 가능성을 보여주지는 못한단 말입니다."
카알은 빙글빙글 웃으면서 말했다.
"자네 어투가 갈수록 화려취미에 물드는 것 같군."
"지금 내 어투가 중요한 문제는 아니잖아요."
"그럼 중요한 문제를 풀어보세나. 그리고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해선 먼
저 작전 지휘소를 찾아야되겠군. 그런데 이 도시의 작전 지휘소는 도대
체 어디 있는 거야?"
"아직 설치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 저기 크레블린 대장이 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