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한 뿌리와 곧은 자태
드디어 가리온이 1집 앨범을 냈다. 나찰(Nachal)과 메타(Meta) 그리고 프로듀서 제이유(J.U)를 멤버로 한 가리온은 1998년에 결성되었다. 하이텔 흑인음악 동호회인 검은소리(BLEX)에서 간간이 곡 작업을 하며 한국어로 랩을 하던 메타와 1998년 1월에 오픈한 마스터플랜에서 고정적으로 프리스타일을 하던 나찰이 만난 3월을 기점으로, 그해 11월 힙합 프로듀서인 제이유(J.U)가 영입되었다. 이후 마스터플랜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1990년대 중․후반이 한국의 힙합씬이 태동하던 시기였던 걸 감안한다면 이들은 나이로 보나 연륜으로 보나 씬을 개척한 리더들이다. 2001년 마스터플랜과 결별하며 약 1년간 고전을 거듭한 가리온은 2002년 알레스 뮤직과 계약을 하며 본격적으로 앨범 작업에 박차를 가한다. 마스터플랜과의 결별 후, 2003년 다 크루(Da Crew)가 설립한 가라사대 프로덕션의 킵루츠(Keeproots)의 앨범에도 참여하였고 2002년부터 메타를 중심으로 주변에 친분 있는 사람들과 "절충 프로젝트"이라는 타이틀로 EP를 내는 등 나름의 바쁜 걸음을 걸어왔다.
두껍고 음침한 베이스가 규칙적인 코드를 만들어 내고 이 사이를 날쌘 동작으로 헤집고 다니는 스크래칭이 강력한 첫인상을 남기는 "가리온"은 마치 그들이 신인이라도 되는 양 자신들의 의지를 드러낸다. 이 곡은 제이유가 들어와 지금의 라인업을 완성한지 한 달 만인 1998년 12월에 만들어진 곡으로, 이제서야 자신들만의 음반을 출시하게 된 그들의 첫 번째 곡으로 간택되었다. "언더그라운드"는 심연에서 물결이 번져 나가는 듯한 영상이 그려지는 샘플이 특징적인데 이러한 특징은 [MP Hip-Hop Project 2000]에서 하이 톤으로 억양 없이 흘러가는 나찰의 래핑과 함께 다른 MC들의 곡들 사이에서도 보석처럼 빛났던 기억이 난다.
"마르지않는 펜(Brainstormin')"은 적정한 위치에서 불거져 나오는 베이스 핑거링과 예측하지 못하는 곳에서 한 타 씩을 더 치는 비트 덕분에 매우 다이나믹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각각의 재료들이 불협화음처럼 서로 엇갈리지만 이렇게 맞지 않는 듯한 박자를 교묘하게 타는 래핑이 탄탄하게 중심을 잡아 준다. 가리온 특유의 일제시대 내지는 1950~1960년대로 추정되는 노래나 영화 대사 샘플을 사용하는 '장기'가 살려진 "엉터리 학생"은 다른 언더그라운드 MC들의 참여로 약간의 다채로움을 선사한다. 이 곡은 사실 소스가 꽤 다양하다 할 수 있으나 비트를 극도로 단순하게 꾸미고 피처링을 한 각각의 래퍼들이 뚝뚝 끊는 식의 일정한 패턴으로 랩을 하여 조금의 기름기도 찾아 볼 수가 없도록 만들었다. 사실 화려해지려면 얼마든지 화려하게 부풀릴 수 도 있는 곡인데 말이다.
나찰 같은 경우 목소리가 특징적인데다가 억양의 변화를 거의 주지 않기 때문에 특이하기는 할지언정 지루하게 느껴 질 수도 있다. 하지만 다년간의 프리 스타일을 통해 다져진 (현란하진 않지만 무게 있는 비트 위를) 무심한 듯 흘러내리는 래핑은 매우 수려하며 썩 훌륭하다. 게다가 그들이 만들어내는 음침한 분위기와 귀 끝을 잡아당기는 베이스 라인은 잡다한 소스를 쓰지 않고도 음악에 집중하도록 만들었다. 이번 앨범은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꺼내 들어도 전혀 떨어지지 않은 음반을 만들고 싶다는 그들의 바램이 투영되었으며 7년여 동안 쌓였을 그들의 내공을 집약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들은 순 한국어로 된 힙합 가사에 항상 심혈을 기울여 왔던지라, 순 한국어를 모태로 자의식이 강한 내용을 가사로 담고자 노력해 왔다. 예를 들어 “마르지않는 펜”에서는 ‘가식의 나열보다/ 정확히 심장을 저격시킬 의미를 뱉어 보라/ 이름 없는 언더그라운드 MC라도/ 밖에 널린 썩은 앵무새보다는 높은 곳을 날 수 있다’ 같은 가사로 힙합 가사가 갖는 의미와 이에 대한 끝없는 연구를 독려하였고, “뿌리깊은 나무”에서는 ’썩은 가지만 친다, 문제가 해결되나?/ 뿌리에 물을 줘라!/ 밝은 태양 아래 뻗어 나간 저 잎새들의 푸르름보다/ 땅 속 암흑에서 희생으로 승화되는 니 얼굴 그을음 보라‘같은 가사로 근본 없이 힙합을 하는 이들을 비꼬았다. “옛 이야기” 같은 경우에서는 힘들었던 과거를 회상하지만 그 또한 자신들에겐 소중하며 이를 딛고 일어선 자신들은 결국 마르지 않는 펜이며 뿌리깊은 나무임을 천명하였다. 그들의 앨범에 실린 가사는 이렇듯 일관된 자세를 유지하며 거대하고 묵직한 흐름을 가진다. 게다가 이 곡들이 제각기 1~2년의 터울을 가진 곡들인 것을 가만하면 그들의 자세가 얼마나 한결같은 지를 알 수 있다.
그들이 내 놓은 첫 번째 정규 앨범은 그들이 힙합을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만들어왔던 곡들을 차곡차곡 쌓아서 정리하는 것으로 컨셉을 잡았다. 이 앨범을 위해 새롭게 만들어진 곡은 없지만 보다 정교한 사운드를 위해 뉴욕에서 마스터링을 하였다. 새로운 결과물을 바랬던 팬들이라면 다소 실망스럽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가리온의 입장에서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던 그간의 결과물들을 한 앨범에 취합하는 것이 우선 시급했을 것이다. 그리고 오히려 앨범의 꽤 많은 곡들이 2000년 이전의 작업물이라는 점은 그들을 더욱 신뢰하게 만든다. 요즘 만들어진 다른 팀들의 사운드에 비해 떨어진다거나 촌스럽지 않다는 점만으로도 일단 충분히 만족스럽고, 시류에 편승하지 않는 진지한 힙합을 하겠다는 그들의 다짐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도 믿음직스럽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