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쓰는 오늘은 5월 17일, 한때 내가 자주 비밀번호로 쓰던 네 자리 숫자 ‘0517’의 풀버전은 ‘040517’이다. 그건 바로 정식으로 직장인 신분을 가졌던 회사 입사일이다. 그래서인지 오랜 시간이 지나도 내게 그날은 특별하다. 오늘이 230517이니, 쉼 없이 일해왔다면 근속 20년이 되는 날이었겠다. 나는 어쩌다 이 회사로 와 이리도 긴 시간을 보내게 되었을까?
학창 시절 나는 체육 시간을 가장 좋아했다. 키 순서로 번호를 정하던 그 시절 나는 종종 5번을 넘지 못했는데도 운동 신경은 꽤 좋은 편이었다. 체력장은 늘 상위 급수였고, 톰보이 같은 성격에 숏커트의 나는 체육대회만 끝나면 ‘피구왕 통키’라는 별명을 얻곤 했다. 그래서 꼭 체육학과에나 진학했을 법한 나는 어쩌다 중문과에 입학하게 된다.
그것은 아마도 학창 시절 내가 너무나 좋아했던 중드 ‘판관 포청천’의 영향이리라. 신분 고하 막론하고 정의로운 판결을 내리는 중국 북송시대 실존 인물이었던 ‘포청천’이 정말 존경스럽기도 했지만, 실은 사춘기 소녀가 되었어도 여전히 무술을 사랑하던 내게 포청천을 돕는 협객 ‘전조’역인 ‘하가경’은 너무 멋졌다. 그것이 바로 내가 중국과 중국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 당시 하굣길에 내 손으로 직접 사온 기초 중국어 회화 테이프는 나의 첫 중국어 학습 도구였고, 혼자 ‘뽀포모포(영어의 ABCD 같은)’ 발음 공부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물론 당시 중국어 공부 목적은 단 하나, 하가경의 노래를 잘 따라 부르고 싶어서였지만.
어릴 적 엄마는 뭔가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한 번씩 철학관에 다녀오셨는데, 그런 날엔 늘 내가 선생님 사주를 갖고 있다더라며 나중에 크면 선생님이 되면 좋겠다고 하셨다. 어려운 형편에 정규 교육을 많이 받지 못한 부모님께서는 내가 선생님이 되어 당신들께서 못 배운 것에 대한 한풀이라도 하고 싶은 기대가 내심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대학을 갈 즈음은 IMF가 휩쓸고 간 뒤라 비교적 안정적인 직업이 보장되는 교육대학과 사범대학 인기가 꽤 높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도 나는 한 번도 교대나 사대로 진학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당시의 나는 아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도 했고 (그러나 지금 내 아이가 셋이라니!), 내게 교사라는 직업을 선택한 순간, 매시간 각 반 들어가 같은 수업을 되풀이해야 하는 앵무새 같은 삶을 살아야 할 것 같아 답답하게 느껴졌으며, 한편으론 나의 모습들이 학생들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생각에 지레 겁이 나기도 했다.
그래서 선생님으로의 진로는 생각지도 않았고, 운동을 좋아하고 남들과 다른 길을 가보고 싶은 마음에 지원했던 육군사관학교는 결국 작은 키 때문에 포기했어야 했다. 그러자 어디를 지원해야 하나 고민하다 그나마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중문과였다. 마침 수능 점수까지 딱 맞았으니 내가 중문과를 가게 된 건 운명 같았다. 이후 중국과 우리나라의 교류가 활발해지고 중국어 열풍이 불자, 누군가는 그 시절 어떻게 중문과를 선택했냐고 대단하다고 했지만 사실 나는 포청천, 아니 전조 때문에 선택했던 것이라 말할 수밖에 없었고 들은 사람들은 대체로 어이없어 했다. 고작 그 이유로 대학 전공을 선택했다고? (사실 내게 건 기대가 있었을 텐데 내 소신껏 전공을 선택할 수 있게 해 주신 부모님께 참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당시 졸업 전 취업이 대세였던 그 시절 나는 그런 것도 잘 모르고 취업을 못한 채 졸업했지만, 친구 따라 했던 복수 전공 덕분에 졸업 후 3개월이 지나서는 지금 회사 인사팀에 입사하게 된다. 지원 자격이 법 또는 상경 계열 전공이었는데, 복수 전공 덕분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렇게 채용 업무로 시작해 인사팀에서 2년 반쯤 지났을 땐 반복적인 행정업무가 너무 지겹게 느껴졌다. 게다가 열심히 익혀 놓은 중국어는 한마디도 내뱉을 기회가 없어 아쉬웠다. 그러다 중국에 공장이 있는 터라 현지 채용인력 대상 교육이 많으니 교육부서로 가면 좋겠다 생각해서 로테이션을 신청해서 성공, 이후에는 줄곧 교육부서에서 근무하게 된다. 중국어 활용 능력은 생각만큼 많이는 아니었지만 적시에 요긴하게 활용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그 덕분에 교육부서로 이동하여 업무 중 더 큰 보람을 느꼈으니 이 역시 감사한 일이었다.
정말 사람의 운명이라는 것이 있을까? 엄마가 어릴 때 내게 자주 했던 선생님이 될 사주는 내게 진짜 있는 것인가? 뭔가 돌고 돌아왔지만 결국 사람의 성장과 변화를 돕는 것이 목적인 교육부서에 몸담게 된 내가 신기하긴 하다.
사실 나는 한 회사에서의 근속 20년이 된 오늘, 내 이후 삶과 우리 아이들의 진로를 고민하고 있다. 단체 소책자의 <찾았다 진로!, p.13>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이제 평생 ‘직장’의 시대는 끝나고 평생 ‘직업’의 시대가 도래했다. 나 역시 한 회사에서 거의 20년을 있었으니 충분히 오래 있지 않았나 싶다. 회사 역시 여러 방면으로 발전하고 변화했지만, 또 내겐 여러 가지가 익숙하다. 회사에 뼈를 묻을 것 같은 내가 문득 이 곳과 이별을 고해야겠다 고민할 때, 남들이 모두 그 좋은 직장을 왜 제 발로 걸어 나오냐 이해되지 않는다고 했다. 또 혼자서 세 아이 데리고 제주 가는 건 너무 힘들지 않냐고 말렸다. 그렇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이젠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내게 변화가 필요한 때라는 것을. 앉은 자리를 바꾸지 않으면 풍경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계획했던 제주살이 2년의 시간 중 1년 반이 지나고 있다. 어느새 복귀를 고민해야할 때, 첫째 아이가 내년 중학교 진학을 앞두고 있어 더 고민이 크다. 첫째 아이의 경우 선행학습을 위해 늦은 시간까지 학원에 머무르던 일산 친구들을 떠올리며, 아무래도 학업의 양과 스트레스가 상대적으로 적은 이곳 제주도 싫지 않은 모양이다. 내가 회사로 복귀할 수 있고 여러 인프라가 갖춰진 일산으로 복귀할 것인가, 늘 아껴주시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계시는 대구로 갈 것인가, 아니면 학업 스트레스도 상대적으로 적고 아름다운 이곳 제주에 좀 더 머무를 것인가, 곧 선택해야 할 시간이 다가온다.
힘든 고민이지만 내게 조금이라도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에 감사해야할 것이다. 산 좋고, 물 좋고, 정자 좋은 곳이야 없겠지만, ‘나는 언제,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한가? 아이들은 어디서 누구와 가장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는 것일까? 를 떠올리며, 이제 불과 몇 분 남지 않은 230517을 그렇게 마저 채워가고 있다. 남들을 향한 시선은 이제 거두고, 내 마음의 소리에 더 귀 기울여 보려한다. 그러면 또 길이 보이겠지.
문득 궁금하다. 내년 이맘때 나는 과연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때도 사람들은 내 선택에 물음표를 붙일텐가?
#사걱세 #노워리기자단 #진로
첫댓글 오, 마지막 문장. 임팩트 있어요!
https://blog.naver.com/noworry21/223118614646
이렇게 수정해 보았으니 참고해주세요😉
유미 샘께서 글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상황을 상세하게 설명하려다 보니 앞에 상황을 인과적으로 연결해주는 설명을 꼭 밝혀 쓰시는 게 종종 보여요. 그런 취지에서 접속사나 부사도 여러 번 쓰시고요. 필자가 굳이 쓰지 않아도 독자가 읽으면서 저절로 흐름을 느끼게 되니, 그 부분은 일부러 표현하지 않아도 될 거 같아요. 글이 오히려 간결해지고요. 사실, 이런 문제는 저도 쓰면서 늘 고민 되는 지점이에요.
이 글의 가장 큰 장점은 '재미있다'는 점이예요! 피구왕 통키와 판관 포청천, 중문과 전공과 채용 및 교육 업무로 20년째 이어지는 직업, 제주살이와 앞으로 살 곳을 고민하는 현재까지. 한 사람의 삶에 그대로 쏙 빠져들게 됩니다. 제목을 어떻게든 구체적으로 뽑아야 클릭률이 높아지니... 이 제목이 정말 딱인데 고쳐야 해서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