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대구시 수성구 성동에 위치한 고산서당에 대한 이야기를 한번 해 볼까 합니다.. 안심지역에서 안심교를 넘어 경산방면으로 1km정도 달리면 우회전 신호가 있는 삼거리를 만납니다.. 여기서 우회전을 하면 또 다시 작은 다리를 하나 만나는데 이 다리를 건너자마자 우회전을 하여 하천둑방을 따라난 길을 다시 1km정도 들어가면 멀리 좌측으로 야트막한 산자락 아래에 작지만 모양새 좋아 보이는 고산서당이 보인 답니다..
그 옛날 퇴계선생께서 멀리 안동에서 이 곳 고산서당까지 왕림하시어 강학을 하셨다는 사실을 기록한 ‘퇴도이선생우복정선생강학유허비’ 가 현재 서당 뒤편에 서 있고,, 또한 고산孤山이라는 재호齋號와 구도求道라는 문호門號를 퇴계선생께서 직접 수필로 내려 주셨다는 기록이 남아 있죠.. 고산서당 강당마루에는 퇴계선생 친필의 “求道” 편액이 아직 걸려 있죠..
서당 옆에는 수령 약 300년정도 된 느티나무 노거수 두 그루가 사이 좋게 서 있는데 각각 이황나무, 정경세나무로 불리고 있습니다..
대구와 경산의 접경지대인 고산이라는 지명의 유래가 바로 퇴계선생께서 내려주신 고산서당이란 재호齋號에서 유래 되었죠..
두서없이 몇 자 적어 봅니다...
그럼...
2007년 1월 3일 고산서당에 잠시 들렀다 찍은 사진입니다..
서당 바로 뒤편 야산자락에 밝은 빛을 띠고 있는 터가 보입니다.. 바로 ‘퇴도이선생우복정선생강학유허비’ 가 서 있는 공간으로 예전 고산서원 시절 퇴계선생과 우복선생을 배향했던 사당이 서 있던 자리라고 합니다. 사진 속 좌측아래에 보이는 전봇대 뒤편의 암벽은 단애로서 과거에는 서당 바로 앞으로 물이 흘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회화나무 노거수와 팽나무 한 그루가 바로 그 단애에 아슬아슬하게 뿌리를 내리고 서로 의지하며 비스듬이 서 있답니다. 고산서당은 북쪽을 보고 앉아 있는데 서당 남동쪽에는 수령 약 300년 정도 되어 보이는 두 그루의 느티나무 노거수가 뿌리를 내려 터를 잡고 있죠.. 하나는 퇴계 이황 나무라 칭하고,, 또 하나는 우복 정경세 나무라고 불린답니다..
2007년 10월에 찍은 고산서당의 모습입니다.. 동쪽이 되는 서당 좌측 담장 안의 나무가 은행 암나무이고 우측은 은행 수나무입니다.. 사찰이나 서원 등에서는 가을철 은행알의 고약한 냄새를 꺼려 암나무는 잘 심지 않는다는데 이 곳 고산서당에는 암,수 은행나무가 보기좋게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2007년 1월의 사진입니다..
지금은 시지時至라는 지명을 많이 사용하지만 불과 몇해 전까지만 해도 고산孤山이라고 불렀었죠.. 고산이라... 홀로 서 있는 독산獨山의 형태를 띠고 있는 산들은 대체로 고산이라는 이름이 많이 붙습니다. 대구,경산 사이 지역을 고산이라 칭한 것은 바로 퇴계선생께서 내려 주신 고산서당의 재호齋號인 ‘孤山’ 두 글자에서 유래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참 드물죠..
경산읍지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 선조 초(명종 때라는 기록도 있음,재위기간으로 보아 명종 때가 아닐까? )에 윤희염이 향유鄕儒들과 함께 城山(지금의 고산) 북쪽에 서당을 짓고 퇴계선생에게 재호齋號를 지어달라 청하니 재는 ‘고산’으로 문은 ‘구도’로 하는 수필手筆을 받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이 지역의 지명이 성산에서 고산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지역 마을 뒤산에 해당하는 고산이 예전에 성산城山이라 불린 것은 이 산 정상부에는 삼국시대 때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토성과 봉대烽臺가 있기 때문에 성城이 있는 산이란 의미에서 성산이라 불린 것입니다..
사진은 경산 성암산 정상에서 안심방향의 초례봉쪽을 바라본 전경인데 붉은 원안에 보이는 산이 바로 앞에 설명드린 성산 또는 고산으로 불리는 산이죠.. 산의 맥이 이어져 있지 않고 넓은 평지에 홀로 서 있는 듯한 모습이 확연히 드러나죠.. 그래서 외로울 고자를 써서 孤山이라 한 것일 겁니다..
이 사진은 반대로 안심쪽에서 시지 쪽의 대덕산을 바라보고 찍은 사진입니다.. 붉은 원안에 고산서당이 자리하고 있죠..
도산서당이 최초 세워진 연대는 불확실하나(명종 또는 선조 초로 추정) 여하튼 1500년대에 최초로 세워질 때는 서당의 형태였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05년(선조38)에 중건하였고 1690년(숙종16)에 고산서원을 창건하여 퇴계,우복 두 선생을 사당에 배향하였으며, 이후 1734년(영조10) 강당 및 동서재를 세웠다고 합니다. 1789년(정조13년)에는 문루門樓까지 세웠으나 1864년(고종5) 대원군의 그 고약한 서원철폐령으로 그만 훼철되고 말았죠.. 1879년(고종16)에 이르러 서원 터에 강당 건물만을 중건하여 고산서당이라 편액하였고 이어 1964년에 다시 중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답니다.. 참고로 1822년(순조22)에는 퇴계선생과 우복선생의 위폐를 잃어버려 개조 봉안한 적이 있다는 군요..
사진에서처럼 현재의 고산서당은 강당 건물만 한 채 덩그러니 터를 차지 하고 있을 뿐입니다.. 사당이나 동,서재 등의 부속건물들은 없죠.. 매번 아쉬움과 함께 분노를 느끼게 하는 그 놈의 임진왜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의 폐해가 여긴들 피해갈 순 없었는가 봅니다..
퇴계선생의 글씨 ‘求道’ 라는 편액이 보입니다..
07년 10월 초의 모습,,, 그리고 07년 1월 초의 모습,,,
좌측이 퇴계 이황 나무,, 우측이 우복 정경세 나무입니다..
07년 10월의 이황 나무 밑 둥치...
07년 1월의 이황 나무 밑 둥치...
정경세 나무 밑 둥치...
좌측 정경세 나무,, 우측 이황 나무...
07년 1월 3일... 벌거벗은 모습의 퇴계 느티나무...
‘ 나무의 모든 氣가 뿌리로 뿌리로.... 모여 있는 모습이다’
이황나무 아래에서 바라본 안심지역의 가장 높은 산인 초례봉(635.7)
서원 바로 뒤 편 옛 고산서원의 사당 터에 자리한 ‘퇴도이선생우복정선생강학유허비退陶李先生愚伏鄭先生講學遺墟碑’ 의 07년 1월과 10월의 모습입니다..
퇴도이선생우복정선생강학유허비退陶李先生愚伏鄭先生講學遺墟碑
1607년 우복 정경세(1563-1633)선생이 대구부사로 있을 때 이 곳 고산서당에서 퇴계선생의 뒤를 이어 강회를 열었는데 이때 당唐의 도독이였던 이성삼이 참강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 유허비는 1872년(고종9년)에 이 곳 현령으로 부임한 이헌소李憲昭가 세운 것입니다.
07년 10월...서원 뒤 유허비에서 북쪽을 향해 바라본 모습입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법..
여기 고산지역은 넓은 고산들이 있고,,산이 있고,, 또한 물이 넘쳐 나는데,, 당연히 풍수에 얽힌 이야기들이 없을 리 만무하겠죠..
익히 알려진 두 가지의 사실을 기초자료로 하여 이 곳 고산의 고산서당일대의 풍수를 觀하여 보기로 하죠..
사실 1 : 이 곳 고산서당 자리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 제독 이여송의 풍수참모로 조선 땅에 원군으로 들어왔다가 조선인으로 귀화한 뒤 명풍수로 이름을 떨친 모명 두사충 장군이 생전에 자신의 신후지지身後之地로 눈여겨 봐두었던 터였다.
사실 2 : 고산을 중심으로한 시지일대는 기원전 1세기 무렵부터 존재했던 소국小國 압독국의 중심지역이였다.
지난 06년 연말 대구 지하철 2호선 대공원역 전시실에서 ‘압독국의 마을 고대 시지로의 여행’이라는 의미있는 전시회가 열렸었죠.. 1990년대 초부터 본격적으로 도시계발이 시작된 시지일대에서 도시계발과 동시에 진행된 유적,유물 발굴작업을 통해 이 지역이 청동기시대 때부터 사람이 거주한 지역이며 약 1500년 전 삼국시대 때는 대규모의 고대 마을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이 엄청난 양의 발굴유적,유물들이 출토됨으로 인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같은 문헌기록에도 압독국이란 소국에 대한 언급은 있지만 그 실체는 분명하지 않았는데 최근의 유적발굴을 통해 그 실체를 알게 된 것이죠.. 참고로 지금까지 알려져 있는 대구 인근에서 사람이 최초로 살았다고 추정되는 지역은 경산 임당,시지,자인 북사리,진량 신상리 그리고 무태,불로동지구 등입니다..
아래 사진을 한번 보세요..
사진은 전시회 때 안내책자에 실려 있던 것으로 아마도 택지계발이 시작되기 전이였던 80년 후반 또는 90년초에 경산 성암산 쪽에서 안심방향을 보고 찍은 사진인 것 같습니다..
‘불과 십수년 전의 사진인데 현재와 비교해볼 때 이렇듯 다를 수가 있는가 !!!!.... ’
그 옛날의 모습인들.. 지금 있는 산이 당시에는 없었다거나 반대로 당시에 없었던 산이 새로 생기진 않았겠죠.. 그렇다면,, 과연 사진 중앙에 보이는 야트막한 고산은 이 일대에서 어떤 역할을 했을까요?? 이미 앞에서 언급을 했습니다만 이 고산에는 삼국시대 때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토성과 봉수대가 있다고 했습니다.
과거 대구읍성이였던 현 달성공원과 한번 연관시켜 사진을 살펴보세요.. 달성공원 역시 대구분지라는 평지에 자연적으로 약간 돌출되어 있는 야산에 토성을 세워 대구읍성으로 삼은 경우죠.. 힘센 놈이 장땡이던 시절.. 고산의 이러한 지리적 특성은 아마도 거대한 고대마을이 존재했던 이 지역에서 군사적 요충지 등의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으로 추측해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아래의 다른 사진을 또 한 장 봅니다...
역시... 07년 1월...서원 뒤 유허비에서 북쪽을 향해 바라본 모습입니다..
이는 최근의 시지지역 모습입니다.. 아래쪽에 대구 월드컵경기장이 보이고 사진 속에는 고산과 천을산이 표시되어 있죠.. 천을산은 현재의 고산초등학교 바로 뒷산에 해당합니다.. 이 천을산은 현재의 영남공고 뒷산인 두리봉 맥이 북쪽으로 내달려 담티고개를 넘어서면서 서쪽과 동쪽으로 다시 갈라지는데 서쪽으로 갈라진 맥은 대구시 화장장의 모봉을 지나 남부정류장 바로 뒤 형제봉으로 이어지고 동쪽으로 갈라진 맥은 끊긴 듯 이어지다가 현재의 고산초등 뒷산인 천을산을 만들어 냅니다..
난데없이 왜?? 천을산을 등장시켰을까요??
사진을 다시 한번 보시되 사진 좌측 천을산은 먹이사냥에 나서 눈 앞의 개구리를 덮치기 바로 직전의 뱀으로 보시고.. 고산은 뱀의 공격에 놀라 꼼짝달싹 하지 못하고 쫄고 있는 개구리로 한 번 보시란 말씀입니다..
그럴싸하지 않습니까?? (제 눈엔 영락없이 그러합니다만... 하하~~)
숲 속에서 소리없이 기어나와 먹이를 향해 무습게 대가리를 내미는 뱀.. 그리고 그 대가리 앞의 불쌍한 개구리 한 마리...
이러한 형국을 두고 풍수지리학 ‘형기론’의 금수정혈법에서는 생사출림형生蛇出林形이라고 하여 혈穴(일반적 의미의 명당이라고 생각하시면 됨)은 뱀 대가리 쪽에 맺히는 것으로 본 답니다.. 이처럼 뱀이 먹이 사냥을 하는 듯한 형국의 지형에서는 반드시 먹이에 해당하는 산이 뱀 대가리 앞에 있어야 성국成局이 된다고 하죠..
뱀대가리 바로 앞의 개구리 신세...
쯧쯧쯧....
아마도 개구리는 불안,초조의 극도의 경계심을 넘어 될대로 되라는 식의 자포자기의 심정이겠죠..
외로운 산 고산의 옛 이름은 성이 있어 성산이라 했습니다.. 현재의 행정동명 역시 성이 있는 동네란 뜻으로 대구시 수성구 성동城洞입니다.. 넓은 들의 중앙에 난데없이 평지돌출한 형국의 고산은 시지일대의 넓은 들판을 가까이 자신의 세력권 안에 두고 있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시야를 좀 더 넓혀보면 이렇듯 천을산의 위협에 늘 시달리는 산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죠..
뱀과 개구리의 형국에서는 반드시 뱀대가리 쪽에 진혈이 맺힌다고 했습니다.. 형기론적인 시각으로 접근해본다면 개구리격인 고산에는 진혈이 맺힐 수 없다는 얘기죠..
여기서... 한가지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를 만나게 됩니다..
‘왜?? 풍수의 대가였던 모명 두사충 장군은 개구리격인 고산자락의 고산서당 터를 자신의 신후지지로 미리 점지해 두었을까?? ’ 하는 의문이 들 수 밖에요....
예로부터 고산서당 자리가 그렇게 소문난 명당터였다면 어떠한 형태로든지 간에 반드시 그에 합당한 증거가 있었을 것이고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죠..
그래서,,,
고산서당의 퇴계선생강학비 뒤쪽으로 해서 고산 북쪽자락의 용맥을 한 번 타 올라 가 보았습니다...
길이 나 있지 않은 산을 정상부를 향해 직선으로 올라가면서 내심 세 번에 걸쳐 적잖이 놀랐습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일단 정상부에 다달으니.. 빽빽하게 둘러쳐진 탱자나무 울타리에 막혀 더 이상은 전진을 할 수가 없었는데(반바지에 샌들차림이여서 도저히 탱자나무 울타리를 넘을 수가 없는 상황) 울타리 너머 산정을 바라보니 평평하게 다듬어진 평지형태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토성이 있었다 하였으니 이미 예상한 바였죠...
탱자 울타리에서 시작하여 다시 천천히 산아래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정신을 한 곳으로 모으고 발 밑으로부터 전해지는 땅의 기운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산을 오르면서 세 번을 놀랐다고 했는데 이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넓은 혈자리(그냥 명당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를 만났기 때문인데....
(실은 진혈이 아니고 허혈입니다만 여하튼 그 부근에 국한해서 살핀다면 진혈이라 속기 쉬운 형국)
첫 번째 놀람은 산을 오르면서 처음 만난 혈자리로 마치 인공적으로 터를 다듬어 놓았다고 보아도 손색이 없을만큼 완벽한 혈자리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였고,,,
두 번째 놀람은 바로 그 혈자리에 아직까지도 음택이 조성되어 있지 않고 비어 있다는 점 때문이였고,,
세 번째 놀람은 첫 번째 혈자리 바로 위쪽에 또 다른 혈자리가 만들어져 있는데 이 곳에는 이미 누군가의 음택이 조성되어 있었다는 점이였죠..
등산을 하다보면 능선을 타고 산을 내리거나 오를 때 좁은 산능선길이 이유없이 넓게,평평하게 벌어졌다가는 다시 원상태로 돌아오는 경우를 가끔씩 만날 수가 있죠...
사진이 바로 그러한 모습의 지형인데.. 약 50여평 정도의 터가 평지에 가까운 모습으로 약간 봉긋하게 솟아 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이 자리에는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망실된 묘소가 1기 나타났습니다.. 이미 봉분은 내려 앉아 유심히 살피지 않으면 묘소인지조차 알 수 없는 상태였는데..누구의 묘인지 알 길은 없지만.. 확실한 것은 오랜 기간 관리되지 않은 묘소라는 것입니다..
‘혈자리의 모습이 이렇게 그럴 듯 한 명당인데 왜 망실되어 버렸을까??’
이름 모를 묘소를 뒤로 하고... 다시 산 아래로 20여미터 내려가다보면 더 기가막힌 형국의 터가 드러납니다.. 좀 과장을 한다면 마치 산중에 축구장을 닦아 놓은 듯한 착각이 들 정도의 평탄하고 바른 땅인데.. 사방을 둘러보니 거의 100여평은 될 듯한 규모입니다.. 다소 어려운 풍수용어지만 ‘결인속기처,입수도두,선익,순전,혈운,혈토’ 등이 이 곳이 진혈임을 너무나 분명하게 증거해 주고 있었습니다.. (역시 진혈은 아닙니다..허혈이죠)
이 터는 아직 주인이 없군요... 어쩌면 앞으로도 영영 주인이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겠죠..
우연일까요?? 신기하게도 위쪽에서 약간 떨어져서 혈자리 안을 살펴보니 중앙부분이 유달리 밝은 빛을 띠고 있습니다.. 사람이 다닌 흔적도 전혀 발견할 수 없는 산속인데 여하튼 밝은 빛의 흙이 시선을 끌어 당깁니다..
일반적인 경우로 보자면,, 동네 뒷산자락에 이러한 터(이 보다 훨씬 못한 터라도)가 있다면 십중 팔구는 분명히 묘소가 들어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곳에는 두 곳의 그럴싸한 혈자리 중 한 곳은 이미 음택으로 사용되었으나 무슨 연유인지 오래전에 망실된 듯하고,,, 또 하나의 더 격이 높아 보이는 혈장은 그냥 자연스런 소나무 산으로 되어 있습니다..
산중에 마치 거대한 솥뚜껑을 덮어 놓은 듯한 형국의 보기 좋은 혈자리입니다..
바로 저기 퇴계선생강학비 바로 뒤 산 중에 그림 같은 명당이 두 곳 자리 잡고 있는데...
고산서당 자리까지 포함한다면 세 곳이 되는군요.. 아마 그 옛날 모명 두사충 장군께서 점지를 했다는 터 역시 이 세 곳 중에 하나였으리라..
‘왜 이 곳 이였을까?? 전설처럼 조선팔도를 다 누비고 다니며 사대부양반가의 이름난 묘자리를 잡았다던 두사충 장군은 결국엔 다른 곳에 눕게 되었지만(남부정류장 뒤 형제봉 아래) 생전에 왜 이 곳을 자신의 음택지로 점지했던 것일까?? ’
멀리보이는 산이 안심지역의 主人山격인 主山 초례봉(635.7)입니다.. 산정상부가 마치 송곳모양을 하고 있어 서너 명의 사람이 동시에 서기 힘들다는 군요.. 그리고 정상부에는 두개의 바위가 나란히 서 있고 그 아래에 평평한 바위가 하나 있어 마치 초례청을 연상케 한다하여 초례봉이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설과 고려태조 왕건이 이 지역 토호세력의 딸과 결혼식을 올릴 때 이 곳에서 치뤘다고 하여 초례봉이라 이름 하였다는 설들이 있다는군요...
서원 앞쪽으로 두개의 고가도로가 보이는데.. 하나는 신대구부산간고속도로이며 또 하나는 고속철도선이죠..
서원 바로 앞쪽에는 과거에 물길이 있었다는 흔적이 있고,, 또 그 너머에는 지방하천 남천이 동에서 서로 도산서당을 안으로 안으면서 유정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장풍득수藏風得水라 분명 得水는 한 형국인데...
장풍藏風이 문제로다.... 바람을 갈무리해야하는데... 도산서당은 동,서,북방이 횡하니 열려 있죠..사진에서처럼 서당 앞쪽과 좌우측에는 오직 넓은 들판만 있을 뿐 아무 것도 보이질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명당이란 곳은 서서 전면을 바라보았을 때 다소 답답한 감이 들 정도로 산들로 겹겹이 둘러싸여 있는 곳들이죠.. 이곳처럼 이렇게 아무런 대책 없이 혈 주변이 열려 있으면 좋은 生氣는 가두어 갈무리하지 못하고 나쁜 殺風에는 직접적으로 노출된다고 보는 것이죠..
내청룡에 해당하는 산자락인데 소규모의 마을이 터를 잡고 있습니다..
앞 이황나무,, 뒤 정경세나무
07년 1월 3일의 도산서당과 퇴계,정경세 나무 그리고 강학유허비
서원 앞 빈 공터 절벽에는 팽나무와 회화나무 각각 한 그루가 서로 살을 섞어 의지하면서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서원 앞 빈 공터 바로 아래는 낮지만 절벽을 이루고 있죠.. 단애라고 볼 수 있는데 물이 흘렀다는 증거죠... 물이 이 지역을 안고 흘러 나가는 것으로 보아 지금의 남천이 그 옛날에는 바로 이 단애 아래로 흘렀던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봅니다..
절벽에 비스듬히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이 나무가 회화나무입니다....
다시 한번 이 사진들을 들여다봅니다...
두사충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명 제독 이여송의 풍수참모로 참전을 했던 분입니다..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그 옛날 삼국시대 때부터 이 곳 고산엔 토성 있었다고 했습니다.. 고산 바로 곁으로 이 지역 최대 물길인 남천이 고산서당을 안으로 유정하게 감으면서 금호강을 향해 흘러 나가죠.. 가까이 물을 얻을 수 있고.. 넓은 들판의 한 복판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일자형一字形 토체土體의 산이다보니 자연지형을 이용해 토성을 쌓는 등 군사적 요충지의 역할을 하기엔 안성맞춤이라 할 수 있겠네요.. 두사충은 전쟁터를 주 활동무대로 한 삶을 살았던 군인이였죠.. 특히 주특기가 군대의 진영과 진법을 연구한 풍수전문가였고....... 그렇다면 그런 그에게 있어 이 곳 고산서당의 풍수지리적 특징은 이곳을 자신의 신후지지身後之地로 점지했을 만큼 인상적이였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그는 풍수 이전에 장군이였죠.. 그렇다면 고산일대를 두고 풍수지리적 특징 보다는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특징에 좀 더 무게를 실지 않았겠는가?? 하는 추측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앞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고산이라는 산은 마치 초병이 경계근무를 서 듯.. 언제나 외부를 경계하고 외롭고 두려움에 떨 수 밖에 없는 뱀 앞의 개구리격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뱀대가리에 해당하는 천을산을 제외하고 시각을 고산에만 국한 한다면 현 고산서당 자리가 고산 최고의 명당자리라는 사실에는 아무도 토를 달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앞에서 만났던 두 곳의 혈자리와 고산서당 터는 결국 보기엔 그럴싸해 보이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혈자리가 될 수 없는 것이죠..
그 이유인즉슨,,
고산은 풍수서의 바이블로 통하는 청오경의 7불가장지不可葬地 중 혈은 반드시 여러 산들이 만나 생기가 취합했을 때 결지 하는 것이므로 홀로 떨어져 있는 독산(고산)에는 혈을 맺지 않으므로 자리를 써서는 안 된다는 독산불가장지獨山不可葬地에 해당하며,,
다음으로는 청오선靑烏仙 10不相 중 신당 앞,절 뒤는 고음과양孤陰寡陽하여 음기가 너무 강하기 때문에 음택,양택을 써서는 안 된다는 신전불후상神前佛後相에 해당하며,,
생사출림형국生蛇出林形局으로 본다면 개구리쪽 아닌 뱀대가리쪽에 진혈을 맺는다고 했으며
무엇보다도 풍수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 즉 장풍득수藏風得水 중 득수는 하였으되 살풍을 막는 방풍防風과 生氣를 가두는 장풍藏風이 전혀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점을 들 수 있죠..
여하튼,,
현재 두사충 장군이 누워 있는 형제봉 아래 음택 역시 용맥은 이 곳 고산과 같은 용맥으로 볼 수가 있죠.. 언급한 바 있지만 두리봉을 넘은 용맥이 담티재에서 동,서 두 방향으로 갈라지는데 서쪽 용맥 끝이 형제봉이요... 동쪽 용맥 끝이 이 곳 고산이니 말입니다... 무슨 연유인지 두사충은 몇 번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담티고개를 넘지 못하고 결국은 서쪽 용맥인 현재의 형제봉 아래에 묻힌 것인데....
혹시나
도산서당 가실 일이 있으시면 반드시 유허비 뒷산에 있는 두 곳의 허혈처虛穴處를 찾아 보십시오.. 허술하기 짝이 없는 이런 야산 중턱에 과연 이러한 터도 있었나 싶을 만큼 정말 그림 같은 명당(결국은 허혈이지만)입니다..
그곳이 허혈임은 이미 그 곳에 자리 잡았다가 지금은 관리되지 않고 봉분마저 다 내려 앉아 버린 이름 모를 1기의 묘소가 반증을 하고 있죠..
만약 벗님께서 이 글을 찬찬히 읽어 보셨다면,,,
이젠 안심 초례봉이나 월드컵경기장 뒤의 대덕산,안산,성암산에 오르셔야 합니다.. 그리곤 눈을 크게 뜨고 시지지역을 내려다보십시오.. 성냥갑 아파트, 도로, 월드컵경기장 등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 올겁니다...
이번엔 마음의 눈을 열고 다시 한번 내려다보십시오..
넓은 들이 눈에 보이고,, 천을산이 눈에 들어 올 것입니다,,아스라이 외로운 산 고산이 눈에 들어 올 것이며,,
눈 밝은 이는 두사충 장군도 보일 것이고,,
공산전투에서 견훤에게 패해 자신의 심복들을 모두 잃고 혈혈단신 홀로 저 멀리 보이는 팔공산 자락의 불로동, 독좌암,평광동,실왕리, 해안, 안심, 반야월을 거쳐 벗님께서 서 있을 이 곳 시지 월드컵 경기장 뒤산자락을 타고 앞산 쪽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야반도주를 하고 있는 고려태조 왕건도 보일 겁니다...
외로워 고산孤山이였는데...
지금은 시지時至가 되었습니다...
끝없는 시간의 흐름...
아롱거리며 그려지는 역사 속의 옛 사람들이 만약 눈에 보인다면....
벗님이나 저나 서울의 대치동격인 대구의 수성구 시지에 살 자격이 있습니다..
천을산엔 올라 가지 마십시오... 능선에도 큰 키의 리기다 소나무들이 너무 많아 전혀 전망이 나오질 않거든요...
전 북구 침산동에 삽니다... 하하하~~
이만... 줄입니다...
좋은 인연 많이 지으세요...
풍경 송은석 두손모음...
첫댓글 너무 재미있네요^^. 흠.. 대구에 팔공산 말고 뭐가 있을까..라고 주로 생각했었는데..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많은 역사적 사실들과 일상을 함께했다는 것이..참.. 재미있습니다. ^^
음... 팔공산 말고 뭐가 있을까?? 글쎄.... 일주일에 한번 팔공산과 비슬산 안쪽 대구분지 지역만 뒤진다고해도 아마 1년은 더 걸릴 듯.... 아는만큼 보인다고..... 자넨 경주에 있을 동안... 열심히 경주를 한번 파보게.... 대구는 경주에 비하면,,, 근처에 가지도 못하지... 먼데서 찾지 말고... 가까운 곳,,기회 닿는 곳에서 작고 소박하게 한번 시작해보게나... 은석선배가..
제가 뭐 알아야 보이죠 ㅡㅜ 역사적인 부분을 탐방한다기 보다는.. 일상적인 경주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두고 싶다..라는 생각은 많이 합니다. 하루종일 경주를 도보로 걸어다니면서.. 사진도 찍..고 ㅎㅎㅎ 조만간 시도해 보고 보고드릴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