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 기업이 반 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큰 흔들림 없이 지속 성장할 수 있었던 데는 그 뿌리가 튼튼해서일 것이다. 月刊朝鮮은 한국의 근대화는 물론 경제발전의 축이 된 기업들의 뿌리인 창업주들의 生家(생가)를 탐방해 보기로 했다. 다만 주요 기업 중 창업주 생가가 이북에 있는 현대자동차는 어쩔 수 없이 제외시켰다. 대신 11위에 랭크된 GS와 21위(공기업 제외)에 오른 효성을 추가했다.
이 두 기업은 태생이 삼성·LG와 깊이 연관돼 있는 데다 창업주의 생가 또한 인접해 있다. 공교롭게도 SK를 제외한 5개 기업 창업주의 생가는 행정구역상 모두 경상남도에 위치해 있었다.
■ 삼성 창업주 호암 李秉喆 생가 ■
경남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
‘부자 되게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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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 생가 안채에 있는 안방. |
湖巖(호암) 李秉喆(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생가가 있는 경남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 723번지를 찾아갔다. 2007년 11월 19일부터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있는 호암 생가는 의령 읍내에서부터 길목마다 안내판이 잘 갖춰져 있어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커다란 느티나무가 반겼다. 면 소재지인 이곳에는 ‘삼성 정미소’ ‘부자 한우촌’ 식으로 ‘삼성’이나 ‘부자’를 상호로 내건 가게가 눈에 많이 띄었다. 생가에서 200m 거리에는 주차장도 마련돼 있었다. 생가 개방으로 이 지역 경제가 활기를 띠고 있었다.
생가는 긴 골목 끝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른 아침이어서인지 아직 관람객은 없고, 李武炯(이무형) 관리소장과 아주머니 한 분이 오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소장은 “개방 후 평일에는 200~300명, 주말에는 600~700명의 방문객이 찾는다”며 “사업을 하거나 영업에서 뛰는 젊은 분들, 수험생, 신혼부부 등이 富者(부자) 기운을 받겠다고 많이 찾는다”고 설명했다.
지금까지 이곳을 다녀간 누적 방문객은 16만명. 이들이 남긴 방명록에도 역시 ‘부자 되게 해 주세요’라는 문구가 가장 많았다.
생가는 1907㎡(570여 평)의 대지에 사랑채와 안채가 비스듬히 지어져 있고, 토담으로 구획된 양 옆에도 기와집이 한두 채씩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소장은 “호암 선생의 둘째 조부와 셋째 조부가 分家(분가)해 살던 집”이라고 설명했다.
안채 대들보에 적힌 기록대로라면 이 집은 1851년에 지어졌다. 160년 가까이 된 집인데, 집을 지은 이는 호암의 祖父(조부)인 문산 이홍석 공이다. 조부는 대지주에 대학자로 후학 양성을 위해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문산정이라는 서당을 세웠다. 이 소장은 “그동안 기와를 새로 이고, 서까래를 교체하는 등 개보수는 여러 차례 했지만 전체 틀은 바꾸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집안에선 온기가 느껴졌다. 마당은 정갈하게 비질이 되어 있었고, 마루며 내부 공간은 윤기가 났다. 사랑채에서는 주로 남자들이, 안채에서는 여자들이 생활했다고 한다. 안채 옆으로는 커다란 장독대와 곳간이 있었다. 한때 노비가 서른 명에 이르렀다는 大家(대가)에 어울리는 규모였다.
명당 중의 명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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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물이 쌓여 있는 형상의 암벽. 사랑채와 안채 사이, 뒷산과 이어지는 부근에 있다. |
마당에는 감나무와 모과 등 유실수와 호암이 좋아했다는 백일홍과 벽오동이 심어져 있었다. 안채 뒤란과 옆에는 아름드리 회화나무를 베어낸 그루터기가 남아 있었다. 회화나무는 ‘복을 부르는 나무’로 알려져 있다. 호암이 회화나무를 좋아했는데 너무 크게 자라 집안에 음영을 드리워 잘라냈다고 한다.
화단 안쪽 뒷산과 연결된 곳에는 기이한 모양의 암벽이 있었다. 이 소장은 “사람들이 부자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곳”이라며 “자세히 보면 거북이, 자라, 두꺼비 등이 모두 안채를 향해 고개를 내밀고 있고, 재물을 쌓아 놓은 모습과 ‘田’자 형상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고 말했다.
풍수 전문가들은 이 암벽 외에도 호암의 생가는 명당으로서의 조건을 다 갖췄다고 평한다. 우선 남서향으로 앉은 집 뒤로 야트막한 산이 둘러서 있고, 멀리 10리 밖으로 남강이 흐르니 전형적인 背山臨水(배산임수)형이라는 분석이다. 게다가 露積峯(노적봉) 형상을 하고 있는 주변 산의 氣(기)가 산자락 끝에 위치한 생가 터에 穴(혈)로 맺혀 그 地勢(지세)가 융성할 뿐만 아니라, 멀리 흐르는 남강의 물이 생가를 돌아보며 천천히 흐르는 逆水(역수)를 이루고 있어 명당 중의 명당이라는 것이다.
1910년 아버지 이찬우 공과 어머니 안동 權(권)씨 사이의 4남6녀 중 막내로 태어난 호암은 이곳에서 결혼하기 직전까지 살았다. 아버지 이찬우 공은 경주 李(이)씨 집성촌인 이 마을에서 4대째 내려오는 천석꾼 지주였다.
호암은 조부 이홍석 공이 세운 서당에서 漢學(한학)을 배우다 1922년 11세 때 진주 지수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그가 지수면으로 간 것은 그곳 허씨 집안에 시집간 누이 때문이었다고 한다.
경남 진주시 지수면 승산리 마을 중앙에 위치한 지수초등학교는 호암 이병철 삼성 창업주와 LG 창업주 蓮庵(연암) 具仁會(구인회)의 모교로 유명해진 학교다. 한때는 晩愚(만우) 趙洪濟(조홍제) 효성 창업주 역시 이 학교 출신으로 알려졌으나 근거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지수초등학교(당시 지수보통학교)는 1921년 許(허)씨 가문의 만석꾼 許準(허준)이 땅을 기증해 설립된 학교다. 당시 허준의 땅은 서부 경남 일대를 뒤덮을 정도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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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 이병철 삼성 창업주와 연암 구인회 LG 창업주가 다녔던 경남 진주시 지수면의 지수초등학교. |
李秉喆과 具仁會, 초등학교 동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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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지수초등학교 재학생 명부. |
학교는 작고 아담했다. 교무실로 들어가는 입구에 잘생긴 소나무 두 그루가 다정히 서 있었다. 鄭永兆(정영조) 교장은 “校木(교목)이 소나무”라며 “이병철 회장과 구인회 회장이 편입학할 때 심었다고 해서 이곳 사람들은 재벌송이라 부른다”고 설명했다.
서당에 다니며 한학을 배우던 두 창업주는 각각 1921년과 1922년에 편입학한 동창생이다. 자리도 앞뒤로 나란히 앉았다고 한다. 하지만 둘 다 1년여 안팎만 다니다 서울로 전학을 가서 엄밀히 말해 이 학교 졸업생은 아니다. 정 교장은 붓으로 쓴 오래된 학생 名簿(명부)를 보여줬다. 3학년 전체 56명 중 호암은 26번, 연암은 6번으로 기록돼 있었다.
동문 회보에는 오늘날 LG와 GS의 CEO급 인사들의 이름이 줄줄이 나열돼 있었다. 具哲會(구철회·전 LG 부회장·3회), 許鼎九(허정구·전 삼양통상 사장·5회), 구정회(前 금성사 사장·11회), 許準九(허준구·전 LG전선 명예회장·13회), 具滋暻(구자경·LG그룹 명예회장·14회), 具平會(구평회·전 호남정유 사장·15회), 具斗會(구두회·전 LG그룹 창업고문·17회), 許愼九(허신구·LG석유화학 창업고문·18회) 등이다.
이 중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은 진주사범학교 수료 후 이곳에서 몇 년 동안 교편 생활도 했다. 그 까닭에 모교에 대한 애정이 남달라 2000년 학생 수 100명 미만의 농촌학교 통폐합으로 廢校(폐교) 위기에 처한 학교를 살려냈다. 학교에 체육관을 건립해 주고, 전학 오는 학생에게 30만원씩 장학금을 줘 학생 수를 늘린 것이다.
1999년 당시 일간지에는 ‘전학만 오면 30만원씩 드려요’라는 제하의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당시 학교 운동장 끝에 건설된 체육관에는 구 명예회장의 아호를 따 ‘上南館(상남관)’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필자는 졸업생 명부에서 뜻밖에도 許京寧(허경영)이란 이름을 발견했다. 同名異人(동명이인)인가 싶었는데 정 교장은 “지난 대선 때 후보로 출마한 민주공화당 총재 허경영이 맞다”고 말했다. 나중에 동네 주민에게 들으니 허씨의 유년 시절은 불행했다. 부친이 6·25 때 부역을 한 관계로 돌봐주는 이 하나 없이 천덕꾸러기로 자라다 일찌감치 마을을 떠났다는 것이다.
호암은 서울 중동중학교 재학 중이던 17세에 사육신 朴彭年(박팽년)의 후손인 朴斗乙(박두을) 여사와 결혼했다. 둘 사이에 3남5녀를 두었는데, 李仁熙(이인희) 한솔그룹 고문, 李孟熙(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 故 李昌熙(이창희) 새한미디어 회장 등은 결혼 후 분가해서 살았던 호암 생가 앞 기와집에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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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이 결혼 후 분가해서 살았던 한옥. 이 집은 아직 일반인에게 공개하지 않고 있다. |
호암은 연암과 사돈지간
호암 생가 못지않은 규모의 이 집은 굳게 잠겨 있었다. 바깥채에 살며 이 집을 관리하고 있는 마을 주민 申鉉壽(신현수)씨는 “이병철 회장 내외가 신혼을 보낸 집은 6·25 때 인민군들이 본부를 차려 폭격으로 없어지고, 지금 집은 그 후에 새로 지은 것”이라고 말했다. 신씨의 말이다.
“장남 맹희씨 내외와 셋째딸 공자(이순희)씨가 종종 와서 묵곤 하지요. 맹희씨는 이곳에서 태어나 학교도 다니고 했으니까 힘들 때면 고향 찾아 오는 것이고, 공자씨는 친정이니까 다니러 오곤 했지요. 근래에는 통 오지 않았습니다.”
호암은 일본 와세다대학을 중퇴한 후 귀향, 1936년 부친으로부터 쌀 300석을 받아 마산에 협동정미소를 차렸다. 이때 그의 나이 28세였다. 오늘날 삼성의 모체는 1938년 자본금 3만원으로 설립한 삼성상회다.
1951년 부산에 설립한 삼성물산은 호암 외에 조홍제(효성 창업주), 허정구(삼양통상 명예회장) 등 이 지역이 배출한 세 명의 기업인이 공동 창업했다. 허정구 명예회장은 LG 공동 창업주 허만정의 장남, 조홍제 효성 창업주는 호암의 형 이병각의 친구였다고 한다.
호암은 연암과 사돈지간이다. 호암의 차녀 이숙희씨가 연암의 3남 具滋學(구자학) 아워홈 사장과 결혼했기 때문이다.
■ LG 공동 창업주 연암 具仁會와 효주 許萬正 생가 ■
경남 진주시 지수면 승산리
만석꾼 둘, 천석꾼 열 명이 난 동네
LG 창업주 연암 구인회의 생가가 있는 곳은 경남 진주시 지수면 승산리다. 이곳은 LG 공동 창업자였던 曉洲(효주) 許萬正(허만정)의 생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2005년 LG가 GS와 LS 등 3개 기업으로 분리되기 전까지 무려 57년 동안 綾城(능성) 具(구)씨 가문과 金海(김해) 許(허)씨 가문의 아름다운 동행이 시작된 곳이다.
LG 창업주 연암 구인회 생가로 가는 길에 향나무와 은목서 등 고급 樹種(수종)들이 식수된 3300㎡(1000평) 규모의 공원을 만났다. 정영조 지수초등학교 교장에 따르면 “2006년 허씨 집안에서 빈 집들을 구입해 조성한 공원”이라고 한다.
공원 중앙에 ‘부모님 생전의 뜻을 받들어 이 공원을 만들었습니다. 항상 고향을 사랑하셨던 마음을 담아 한 그루의 감나무를 심습니다’라는 안내문만 있을 뿐 누가 어느 때 조성했는지는 나와 있지 않았다. 정 교장은 “뜻있는 일일수록 드러내지 않는 것이 허씨 가문의 전통이라 일부러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
공원 옆에는 주황색 벽돌로 잘 지어진 경로당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이 역시 허씨 집안에서 지어 준 것이라고 했다.
경로당을 지나자 작은 개천이 하나 나오고, 그 너머로 민속촌을 방불케 할 정도의 한옥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연암의 생가 오른쪽에는 부인 許乙壽(허을수) 여사의 생가가, 그 옆으로 허준구 전 LG전선(현 LS전선) 명예회장의 생가가 자리 잡고 있었다.
또 연암의 생가 왼쪽에는 연암의 첫째 동생인 구철회 전 LG 부회장이 養子(양자)로 들어가 살던 집이, 그 옆에는 具滋信(구자신) 쿠쿠홈시스 회장의 생가가 도열해 있었다. 5채의 古屋(고옥)이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한옥 뒤편으로는 구릉처럼 야트막한 산이 몽글몽글 펼쳐져 있었다. 마을 주민들은 이 산봉우리들이 구슬을 닮았다 해서 구슬봉이라 불렀다. 土城(토성)처럼 키가 작은 산이 한옥 단지를 안온하게 감싸고 있는 형국이었다.
마을에서 좀 떨어진 동쪽에는 괘방산(해발 450m)과 방어산(해발 530m)이 펼쳐져 있었다. 풍수 전문가들은 40여 채의 한옥이 모여 있는 상동 마을을 ‘부자가 많이 날 명당’이라고 입을 모은다. 낮은 산이 옹기종기 모인 집들을 에워싸고 있어 부화를 기다리는 새 둥지 형상인 데다, 동남쪽으로 길게 뻗은 방어산이 먹이를 물고 둥지로 날아드는 봉황과 같아 지형상 發福(발복)이 되는 곳이라는 분석이다.
풍수 덕분인지 이 지역에서는 만석꾼 둘에 천석꾼 열이 날 정도로 큰 부자가 많았다. 자손도 번창해 연암은 아들 여섯을 두었고, 효주는 여덟을 두었다. 효주의 3남이 허준구 전 LG전선 명예회장이다.
세 명의 國富가 예언된 솥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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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진주시 지수면 승산리에는 LG그룹과 GS그룹 창업주 생가가 사이좋게 자리 잡고 있다(사진 맨 위). 연암의 생가. 구자경 LG 명예회장도 이곳에서 출생했다(사진 가운데). 농산 구철회의 생가. 연암 생가 왼편에 위치해 있다(사진 아래). |
방어산은 진주와 함안, 의령의 경계 지점에 뻗어 있다. 남강 역시 이 세 지역을 휘감아 돌며 경계를 짓는다. 의령 읍내 앞을 흐르는 남강에는 솥을 닮아 鼎岩(정암)이라 부르는 바위가 하나 솟아 있다.
이 지역에는 정암을 중심으로 반경 20리(8km) 내에서 큰 부자가 난다는 전설이 예부터 전해져 오고 있다. 일부러 짜맞춘 것처럼 이 바위로부터 8km 거리에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생가가, 7km 거리에 구인회 LG 창업주의 생가가, 5km 거리에 조홍제 효성 창업주의 생가가 위치하고 있다.
승산리에서 승용차로 호암 이병철 생가까지는 30여 분, 조홍제 생가까지는 20여 분 소요된다. 마을 주민은 “저기 저 방어산만 넘으면 바로 조홍제 생가가 있는 함안군 군북면”이라고 일러주었다.
한낮의 마을에는 주민이 별로 없었고, 생가 대문은 대부분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었다. 연암의 생가는 문이 열려 있었다. 대문을 들어서자 현대식으로 지어진 바깥채 앞뜰에서 70대 초반의 노파가 고추를 말리고 있었다. 노파는 자신을 “구인회 회장의 먼 친척”이라며 “울산에 사는 아들이 한 달에 한 번씩 들러 집을 관리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안쪽에 있는 솟을대문을 지나니 잔디가 깔린 넓은 정원과 두 채의 한옥이 나타났다. 대지가 3300㎡(1000평)는 족히 되는 것 같았다. 동남향으로 앉은 네 칸짜리 고옥이 100년은 됐음 직했다. 이 집이 생가이고, 서남향으로 앉은 한옥은 후에 연암이 지은 것이라고 한다. 대들보에 축성 연대가 적혀 있는데, 이 집에는 단기 4289년(서기 1956년)이라고 씌어 있었다.
생가는 잘 보존돼 있었으나 사람이 살지 않는 까닭에 박제된 공간처럼 느껴졌다. 방안을 구경하려고 문고리를 당겨 보았으나 문을 안에서 걸어 잠근 듯 열리지 않았다. 노파에게 이것저것 물었으나 “내는 암것도 모릅니데이”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을의 한 주민은 “장남인 구자경은 어린 시절을 이곳에서 보낸 까닭에 자주 내려와 생가 관리에도 신경 쓰고 동네 주민들과도 인사를 나누곤 했지만, 그 아랫대로 갈수록 발길이 뜸하다”고 말했다. 최근 들어서는 이 집안 사람들 얼굴 구경하기가 힘들다고 했다.
구씨·허씨 집안의 반복된 겹사돈
연암은 1907년 아버지 具再書(구재서) 公(공)과 어머니 진양 河(하)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조부 晩悔(만회) 具然鎬(구연호) 공은 조선 철종 때 대과에 급제해 고종 때 임금 앞에서 經書(경서)를 강론하는 홍문관 교리를 지냈다. 학문이 깊어 당대 선비·유림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지만 고종이 폐위되면서 홍문관이 문을 닫자 낙향해 은거했다.
어린 시절 연암은 조부에게 한학을 배우며 유교학풍에 젖어들었다. 연암은 14세 때 담 하나를 사이에 둔 옆집 許萬寔(허만식)의 맏딸 허을수 여사와 혼인했다. 이미 허만식의 차남이 연암의 고모와 혼례를 치른 후라 양가는 겹사돈이 됐다. 이때부터 양가의 婚脈(혼맥)은 누구든 일가친척이요 사돈 관계라 할 정도로 복잡해졌다.
마을에서 만난 연암의 12촌 具昌會(구창회)씨는 “구씨 허씨만 살던 동네라 서로 촌수를 따질 수 없을 정도로 양가의 혼맥은 복잡하다”고 말했다. 자신의 아내도 허씨 집안의 딸이었다고 했다. 올해 93세로 연암과 동갑내기인 그는 연암의 어린 시절에 대해 “똑똑하고 어른스러워서 동갑이었지만 형처럼 느껴졌던 친구”라고 회고했다.
1931년 연암은 선비 집안의 관례를 깨고 진주 중앙시장에 ‘구인회 상회’라는 간판을 걸고 포목점을 시작했다. 사업은 번창했다. 이때 번 돈을 투자해 부산에 靑果(청과)·魚物(어물) 상회를 열었다. 1945년에는 장인 허만식의 6촌이자 만석꾼인 許萬正(허만정)의 자금 출자로 부산 국제시장에 조선흥업사를 설립했다.
이때 허만정의 3남 許準九(허준구)가 경영 수업 겸 사업 파트너로 참여하게 됐다. 두 집안의 아름다운 동행이 시작된 셈이다. 허준구는 훗날 연암의 첫째 동생인 구철회의 맏딸과 결혼해 양가는 또 한 번 겹사돈을 맺었다.
오늘날 LG와 GS의 모태는 조선흥업사를 기반으로 1947년 부산 서대신동에 설립한 락희화학이다. 허준구의 장남은 許昌秀(허창수) 현 GS홀딩스 회장이다.
만석꾼으로서 LG 창업 당시 자본을 댔던 효주 허만정의 생가는 연암의 처가인 허만식 생가 바로 옆에 있었다. 6촌지간이었던 두 집은 대문을 통하지 않고도 왕래할 수 있도록 연결돼 있었다. 효주의 생가는 촌수로는 허창수 회장의 손자뻘이지만 연배는 10여 살 더 위인 許成鎬(허성호)씨가 관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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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공동 창업주인 효주 허만정의 동생인 허만옥의 생가. 허창수 GS홀딩스 회장의 부친 허준구 전 LG전선 명예회장도 이곳에서 태어났다. |
生家 훼손하는 도굴꾼
만석꾼이었다는 효주의 생가는 전통적인 ‘ㄷ’자형 한옥으로 소박하고 아담했다. 관리인 허성호씨는 “허씨 가문은 대대로 천석꾼 만석꾼이 많았지만 소금도 아껴 먹을 정도로 생활이 검소했다”며 이렇게 말했다.
“집안 살림에는 검소했지만 베푸는 데는 후했어요. 흉년이 들거나 춘곤기 때는 곳간을 열어 양식을 나누었고, 밭이나 논을 절대 사들이지 않는 게 이 집안의 가풍이었지요.”
마당 한편의 헛간에는 아직도 괭이와 쇠스랑 같은 농기구들이 잘 구비돼 있었다. 허성호씨에게 “일반인들도 관람할 수 있도록 대문을 열어 놓으면 좋을 텐데 왜 그렇게 잠가 놓느냐”고 물으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저도 마음은 그렇게 하고 싶은데, 도굴꾼들이 극성이어서 어쩔 수 없이 닫아 놓고 있습니다. 순진한 구경꾼들처럼 왔다가 문짝이며 엽전궤 같은 물건들을 훔쳐가 훼손이 많이 됐어요. 시골인 데다 사람이 많지 않으니까 대낮에 훔쳐 싣고 간다니까요.”
이곳 역시 후손의 왕래가 잦지는 않다. 허광수 회장이 생가에서 멀지 않은 선영에 자주 다녀간다고 한다. 허성호씨의 말이다.
“허 회장님은 굉장한 효자예요. 추석 때 온 가족이 성묘하러 왔다 갔는데, 며칠 전에도 부인과 함께 예고 없이 다녀갔어요. 그날 아침 일찍 ‘조용히 다녀가고 싶으니 소문내지 말고 선영으로 오라’고 해서 갔더니 부인과 단 둘이 음식을 준비해 왔더군요. 간밤에 어머니 아버지 생각이 너무 많이 나서 달려왔대요. 부인이 준비해 온 음식들을 차리고 과일을 깎으며 회장님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당신 어젯밤에 그렇게 그리워하던 부모님 뵈러 왔으니 과일 깎는 동안 마음껏 대화 나누라고’요.”
어느덧 고가에 밤안개가 몰려 왔다. 허성호씨는 “오늘 모시는 제사만 없으면 꼭 저녁을 대접하고 싶은데, 제 집에 오신 손님을 그냥 보내 죄송하다”라며 몇 번이고 인사를 했다.
■ 효성 창업주 만우 趙洪濟 생가 ■
경남 함안군 군북면 동촌리
思父曲으로 지은 亭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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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홍제 생가에서 200여m 거리의 논 가운데 있는 세 채의 정자. |
만우 조홍제 효성 창업주의 생가는 호암 생가에서 20여 분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경남 함안군 군북면 동촌리 1148번지. 넓은 들을 보며 2차선 도로를 달리는데 논 가운데 섬처럼 형성된 한옥과 高齡(고령)의 느티나무 숲이 시야에 들어왔다. 가 보니 사랑채 개념의 亭子(정자)였다.
養心亭(양심정), 修德齊(수덕재), 三省齊(삼성재)라는 현판이 걸린 세 채의 정자는 동쪽을 보며 ‘ㄷ’자형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각 정자에는 넓은 방이 하나씩 딸려 있어 저택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규모가 컸고, 화려하게 지어져 있었다.
동네 주민은 “양심정은 조홍제 부친이 자신의 아버지를 위해 지었고, 수덕재는 만우가 부친을 위해 지었으며, 삼성재는 趙錫來(조석래) 회장이 부친인 조홍제를 위해 지은 것”이라고 말했다.
정자는 누구나 드나들 수 있도록 열려 있었다. 먼지가 쌓인 마루에는 쥐똥도 있고, 누군가 마시고 치우지 않은 맥주병이 나뒹굴고 있었다.
정자 왼편에 齋室(재실)이 눈에 띄었다. 주민은 “西川(서천) 趙貞奎(조정규) 선생을 기리는 재실 川上齋(천상재)”라고 일러준다. 서천은 서산서당을 세운 조선 말기 대학자이자 文豪(문호). 조홍제 효성 창업주의 宗祖父(종조부)라고 한다.
생가는 천상재에서 200여m 떨어진 신창 마을(옛 지명 창리) 안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왼편에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고옥은 서천의 생가라고 한다. 마을 주민은 “따지자면 저 집이 큰댁인데 서천 선생이 理財(이재)에 관심이 없고, 학문에만 매진해 家勢(가세)가 기울었다”고 전했다. 서천의 후손은 부산에서 조그만 사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만우의 생가 대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담 너머로 보니 바깥채는 西向(서향)이고, 사랑채와 안채는 南向(남향)이었다. 이웃 주민에게 물으니 바깥채에서 조석래 회장의 8촌 누이가 살고 있다고 한다.
마을에서 수퍼를 운영하고 있는 趙京來(조경래)씨를 만났다. 조씨는 조석래 회장의 8촌 동생이자 생가 바깥채에 살고 있는 조봉양씨의 남동생이었다. 조씨가 어딘가로 전화를 하자 마실 나가 있던 조봉양씨가 돌아와 대문을 열어 주었다. 올해 86세라는 조봉양씨는 “석래가 어렸을 때 늘 내가 업어 주었고, 그 누이인 명숙씨와는 친자매처럼 지냈다”고 말했다.
생가 마당은 잔디로 뒤덮여 있고, 정기적으로 손질을 한 듯 잘 다듬어져 있었다. 생가 관리는 효성 창원공단 직원들이 맡고 있다고 한다. 부엌, 안방, 대청, 건넌방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네 칸 한옥이었다. 사랑채건 안채건 1650㎡(500평)는 족히 되어 보이는 대지에 비하면 소박하고 아담했다.
안채를 마주보며 마당에 서니 넓은 들판 끝으로 부드러운 능선의 안산이 보였고, 마루에 앉으니 남쪽으로 길게 뻗은 백이산(해발 368m)이 한눈에 들어왔다.
고향 주민에게 인심 잃은 효성 회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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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함안군 군북면 동촌리에 있는 조홍제 효성 창업주의 생가. |
안채는 사람이 살지 않아 거미줄이 많았고, 문짝이 떨어질 듯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곳도 있었다. 필자가 조경래씨에게 “정자나 생가가 제대로 관리되고 있지 않은 것 같다”고 하자 “전담해서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렇다”며 이렇게 말했다.
“전에는 종가에 딸린 전답을 지어 먹을 요량으로 생가를 관리하겠다는 일가친척이 많았는데 요새는 없어요. 촌에 사람이 적어 갖고 있는 땅도 놀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장손인 조석래 회장이 갖고 있는 전답 20여 마지기를 내놓아도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어 관리가 안되고 있지요.”
조경래씨는 조석래 회장에 대한 마을 주민들의 서운함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생가가 있는 신창 마을 일대는 거의 조 회장 소유의 땅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마을 주민들은 집을 새로 짓거나 증축하고 싶을 때마다 토지 주인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그 절차가 복잡하고 까다로워 조석래 회장에게 토지 소유권에 대한 등기부 이전을 부탁하려 회장실에 전화한 사람이 많았지만 번번이 비서실에서 차단됐다고 한다. 조경래씨의 말이다.
“대대로 수십 년에서 100년 가까이 살아온 집들인데도 법적 토지 소유권은 조 회장님 앞으로 돼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과거 조 회장님 댁에서 노비로 있거나 머슴 살았던 이들이 분가하는 과정에 토지 명의를 변경하지 않아서인 것 같아요. 말하자면 그 댁 어른들께서 부리던 노비와 머슴들에게 집 짓고 살 땅을 준 것인데, 배운 게 없는 사람들이다 보니 소유권 이전 방법을 몰라 그냥 살았던 거지요.”
마을 주민들은 “조 회장 같은 대기업 회장이 시골 땅에 욕심이 있을 리는 없고, 토지 소유권 문제를 아예 모르고 있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주민들은 “조 회장이 고향에 내려와 주민들을 만나면 이런 정황을 파악하고 벌써 조처했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는 것에 서운해했다.
온 마을의 토지 대부분이 이 집안 소유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만우는 3000석이 넘는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1906년생인 그는 16세까지 종조부가 세운 서당에 다니다 17세가 되어서야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이 때문에 고등학교, 대학교 졸업은 물론 창업도 56세가 되어서야 할 정도로 늦었다. 모든 것이 늦어 아호도 ‘만우’라 지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빠른 것이 하나 있으니, 결혼이었다. 그는 15세 되던 해 진주 부호의 딸인 하정옥씨와 결혼했다. 조석래 회장을 비롯해 趙洋來(조양래) 한국타이어 회장, 趙旭來(조욱래) 동성개발 회장 등 슬하에 3남2녀를 두었다.
만우는 30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 있는 호세이대에 유학을 했다. 그가 호암을 만난 것은 1945년 귀국했을 때다. 호암은 절친했던 친구 이병각의 친동생으로 어렸을 때부터 알고 있었지만 사업 때문에 만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당시 호암은 대구에서 삼성상회를 운영하는 한편 조선양조를 인수하는 등 사업을 키워 가고 있었지만 자금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이런 호암에게 돈을 빌려준 이가 만우였다.
3년 후인 1948년 두 사람은 1700만원을 공동 출자해 삼성물산을 설립했다. 출자는 만우가 더 많이 했지만 사회 경험이 많은 호암이 사장, 그가 부사장을 맡았다. 이후 17년 동안 의기투합해 삼성을 키운 두 사람은 1962년 동업 관계를 청산하고 각자의 길을 가게 된다.
당시 만우는 출자한 비율대로 나누자고 했고, 호암은 30%만 주겠다며 승강이를 벌였다. 두 사람 사이에 감정의 골이 패자 나이 많은 만우가 양보하여 화해를 했다. 그리고 삼성보다 더 빛나는 회사를 만들겠다는 포부로 효성물산을 설립했다. 당시 만우의 나이 56세였다.
조석래 회장의 8촌 조양봉씨에 따르면 만우는 자식들에게 엄격한 사람이었다. 자식들이 넉넉한 집안에서 자라 돈 귀한지 모를 것을 염려해 어렸을 때부터 근검절약이 몸에 배도록 가르쳤다고 한다.
만우는 용돈을 쓴 자녀들에게 결산 보고를 하게 해 불필요한 낭비와 계획 없는 소비를 하지 않도록 했다. 또 자녀들이 해외 유학 중에는 스스로 일을 해서 부족한 용돈을 융통하도록 최소한의 경비만 지급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떠난 후 효성 일가는 지금 거액의 외화 밀반출, 해외 재산 도피 의혹을 받고 있다. 그래서인지 텅 빈 고옥이 장군의 녹슨 칼처럼 처연해 보였다.
■ 롯데 창업주 辛格浩 생가 ■
울산시 삼남면 둔기리
댐 건설로 잠긴 고향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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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시 삼남면 둔기리에 있는 신격호 롯데 회장의 생가. |
국내 10대 기업 중 창업주가 생존해 있는 곳은 롯데가 유일하다. 국내 최장수 현역 회장인 辛格浩(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의 생가는 울산시 삼남면 둔기리에 있다.
울산에서 승용차로 20여 분 달리자 경치가 수려한 대암호와 함께 지중해 연안의 고급 주택을 연상케 하는 대저택이 나타났다. 신격호 회장의 별장이다. 생가는 이 별장 건너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원래 별장 아래 마을에 있었는데, 1969년 대암댐 건설로 마을이 수몰되자 현재의 위치로 옮겨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신 회장의 생가는 이제까지 봐온 생가와 달리 초가삼간이었다. 대지 규모도 330㎡(100평)가 될까 말까 할 정도로 작았다. 생가는 별장지기인 鄭賢基(정현기)씨 부부가 관리하고 있었다. 생가 옆 텃밭에서 채소를 뽑고 있던 정씨의 부인이 대나무로 엮은 사립문을 열어 주었다.
생가는 안채와 별채 및 헛간으로 구성돼 있었다. 앞마당과 뒤뜰의 감나무에는 감이 주렁주렁 열려 있었다. 정씨의 부인은 “감을 따야 할 시기인데, 일손이 부족해 못 따고 있다”며 “서리 내리기 전에 따서 서울로 올려 보내야 한다”고 말했다. 자식들이 서울에 있나 보다 했는데, 신 회장 일가에게 보내는 것이라고 한다. 그녀의 말이다.
“신 회장님께서는 고향 것이라면 뭐든 좋아하세요. 모르는 분들은 ‘백화점에 가면 널린 게 감인데 이까짓 감까지 달라고 하느냐’며 혀를 차는데, 그건 오해입니다. 그분에게는 이 감이 고향이고 배고픈 시절의 추억이거든요.”
남의 나라 일본에서 고생하며 자수성가한 탓일까. 신 회장의 고향 사랑은 유별나다. 그는 고향 마을이 수몰되자 생가를 지금의 위치로 옮기며 주민들이 살 집까지 함께 지었다. 생가 아래에 마을회관도 신축했다. 인근 도시로 떠난 이웃이 많아 규모는 줄었지만 마을을 통째로 옮긴 셈이다.
매년 5월에는 별장 옆 넓은 잔디구장에 고향 사람들을 초대해 잔치도 연다. 소와 돼지를 잡고, 막걸리와 온갖 음식들을 준비해 대접하고, 푸짐한 선물과 교통비까지 지급한다고 한다. 1971년부터 시작된 이 행사에는 마을이 수몰되면서 떠난 이들은 물론 이들의 후손까지 해마다 1000여 명이 참여한다고 한다. 정씨 부부는 “이날이 1년 중 가장 바쁘고 힘든 날”이라고 했다.
신 회장은 고향 마을뿐만 아니라 인근 文殊山(문수산·해발 599m)에 있는 사찰 文殊寺(문수사) 복원에도 많은 자금을 내놓았다. 문수산 해발 400여m의 깎아지른 절벽에 세워진 이 사찰은 신라 원성왕(789~798) 때 창건된 고찰이다. 1980년 롯데는 수십억 원을 들여 대웅전을 증축하고, 종각을 세우는 등 대대적인 복원 작업을 했다. 당시 도로가 없어서 건축 자재를 모두 헬기로 실어 날랐다고 한다.
초가삼간에서 키운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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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 앞에 있는 별장. 별장 앞은 수려한 경관의 대암호가 펼쳐져 있다. |
2차선 포장도로를 사이에 두고 있는 생가와 별장은 신 회장의 과거와 오늘을 대변하는 듯하다. 신 회장은 1922년 초가삼간인 이 집에서 5남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 신진수씨는 평범한 중농이었다. 울산농업실습학교를 졸업한 후 잠시 종축기사로 일한 신 회장은 1941년 일본에 가기 전까지 이곳에서 9명의 동생들과 함께 살았다고 한다.
19세에 마을 처녀 노순화씨와 결혼했고, 아이까지 낳았으니 10여 명의 식구가 좁은 집에서 복닥거리며 생활한 셈이다. 이 집에서 낳은 장녀가 辛英子(신영자) 롯데쇼핑 사장이다.
신 회장은 부인과 어린 딸을 이 집에 남겨둔 채 단돈 83엔을 들고 일본으로 가는 관부 연락선을 탔다. 이후 신문배달, 우유배달을 하며 고학으로 와세다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했고, 1949년 히카리화학연구소를 설립했다. 이 연구소가 오늘의 롯데를 일으킨 성장동력이 됐다.
신 회장은 와세다대 졸업 후인 1945년 현재의 부인 시게미쓰 하쓰코(重光初子) 씨와 두 번째 결혼을 했다. 둘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東主(동주)·東彬(동빈) 형제다. 장남 동주씨는 현재 일본 롯데를 맡고 있고, 동빈씨는 그룹 부회장으로 있다.
롯데가 한국에 진출한 것은 한일 국교가 정상화된 1967년 롯데제과를 설립하면서다. 당시 그가 한국에 투자한 돈은 50억 달러였다. 지난해 공정거래위원회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롯데의 자산 총액은 43조6340억원이며, 롯데쇼핑, 롯데제과, 롯데물산 등 46개의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다.
■ SK 창업주 崔種建 생가 ■
경기도 수원시 평동
수원에서 가장 낙후한 동네로 전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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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시 평동에 위치해 있는 최종건 SK 창업주의 생가. |
SK그룹 崔種建(최종건) 창업주의 생가는 경기도 수원시 평동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SK의 모태가 된 선경직물이 출범한 곳이기도 하다.
평동은 수원역에서 택시로 10여 분 거리에 있었다. 이 동네는 1970년대 시골 소읍 풍경을 간직하고 있었다. 페인트가 벗겨진 단층 슬레이트 집과 1970년대 새마을사업의 일환으로 지어졌을 법한 낡은 주택들이 띄엄띄엄 들어서 있었다. 군데군데 빈 상점들이 많아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최종건의 생가는 동사무소 바로 옆에 자리 잡고 있었다. 담장이 1m30cm 정도여서 집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진돗개 여러 마리가 마당을 거닐고 있었다. 개들이 필자를 향해 짖어댔지만 인기척이 없었고, 대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근처에서 작은 마트를 운영하는 50대 박모씨에게 알아보니 “관리인이 있는데, 봉담에 있는 선영에 간 것 같다”고 했다. 마트 역시 썰렁했다. 박씨는 “수인선 전철 공사 때문에 며칠 내로 집을 비워야 한다”고 했다.
생가 관리인이 오기를 기다리며 박씨와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아버님은 물론 나도 젊은 시절을 선경직물에서 보냈다”며 이렇게 말했다.
“1970년대만 해도 이곳은 수원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 중 하나였어요. 아침 저녁이면 출퇴근하는 2000여 명의 선경직물 직원들로 2차선 도로가 꽉꽉 차곤 했죠. 그 무렵에는 이곳에 방 두세 개짜리 집만 가지고 있어도 부자 소리를 들었습니다. 전국에서 몰려드는 선경직물 직원들 때문에 사글셋방이 태부족이었으니까요. 그때는 선경직물이 수원을 먹여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죠.”
박씨는 창업주인 최종건을 “선경직물 사번 1번이었던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회사 통근버스를 장례식용 버스로 이용하도록 편의를 봐 주신 분”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1980년대 섬유산업이 사양길로 접어들면서 이 지역 경기는 급격히 시들었다. 그런데다 인근에 있는 수원공군비행장은 이곳을 각종 규제와 제한으로 30년 가까이 묶어 놓았다. 박씨는 “30년이 흐르는 동안 이곳은 수원에서 가장 낙후된 동네가 됐다”며 “수원에서 도시가스가 공급되지 않는 곳은 이곳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수백 대의 직물기가 밤낮으로 돌아가던 선경직물 공장은 여전히 평동에 있으나 오래전에 가동을 멈춘 상태다. 직물기의 일부는 대구 섬유단지로, 일부는 중국으로, 일부는 동남아로 팔려 나갔다고 한다.
창업주 부인이 애용하던 재봉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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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건 회장 생가 안방. 부인이 사용했던 재봉틀과 자개장 등이 전시돼 있다. |
박씨와 30분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생가 관리 책임자인 SK텔레시스 관리과 소속 朴錫俊(박석준) 부장이 돌아왔다. 그는 “2004년까지는 崔信源(최신원) 회장의 8촌이 거주했고, 그 이후부터 내가 생가를 관리해 오고 있다”고 소개했다.
생가는 대지 1290㎡(390평)에 ‘ㄴ’자형 한옥 한 채였다. 박 부장에 따르면 “원래 생가 앞마당에 목조로 된 2층 양옥이 한 채 있었는데, 2005년 최신원 회장이 생가 복원 작업을 하며 헐어냈다”고 말했다. 이때 2m 가량 되었던 붉은 벽돌 담장도 헐고 야트막한 기와 담장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최신원 SKC 회장은 최종건 창업주의 차남이다.
대청마루와 안방에는 자개장 재봉틀 등 최종건 회장 부부가 사용했던 생활용품 몇 점이 전시돼 있었다. 박 부장은 “최 회장 내외는 1960년대 말까지 이곳에서 거주했다”고 말했다. 재봉틀은 부인 노순애 여사가 아이들 옷이며 커튼을 만드는 등 요긴하게 사용했던 살림살이였다고 한다.
집 뒤란에는 참나무 장작이 잔뜩 쌓여 있었다. 박 부장은 “최신원 회장께서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상하기가 쉬우니 일주일에 한두 번씩 아궁이에 불을 지피라’며 경기도 청평에서 실어 온 땔감”이라고 했다. 이곳 역시 도시가스가 들어오지 않는 까닭에 집 뒤뜰에 있는 관리사무소에서도 장작난로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참나무 타는 냄새가 생가에 퍼져 있었다.
최종건 회장은 1926년 이곳에서 아버지 崔學培(최학배) 공과 어머니 李同大(이동대) 여사의 4남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44년 경성직업학교 기계과를 졸업한 그는 그해 4월 선경직물 수원공장 견습기사로 입사했다.
선경직물은 일제 강점기인 1939년 조선의 선만주단과 일본의 경도직물이 합자해 만든 회사로, 광복 후 미군정과 한국 정부의 관리를 받았다. 이 무렵 공장 생산부장으로 근무했던 그는 6·25전쟁 후 폐허가 된 공장 부지를 매수해 1953년 (주)선경직물을 설립했다.
최종건 회장은 1973년 48세의 젊은 나이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부인 노순애 여사와의 사이에 3남4녀를 두었다. 그의 死後(사후) 경영권을 동생 崔種賢(최종현) 회장이 물려받아 통신, 에너지, 금융, 유통 등을 총망라하는 오늘의 SK그룹으로 키워냈다.출처 ; 월간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