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도읍지 남쪽에 검푸른 골기 성성한 산이 있었다. 사람들은 골짜기마다 부처를 모셔놓고 복을 빌었고 평화를 빌었지만 나라는 망했고 사람들이 죽었고 왕도 죽었다. 왕은 거대한 무덤으로 남았고 사람들은 풍화작용에 의해 먼지가 되어 흩날렸다. 그리고 세월은 하염없이 흐르고 또 흘러갔다.
동무들은 천년세월의 때가 덕지덕지 앉은 왕들의 무덤인 ‘삼릉’을 무심히 지나쳤다. 소나무의 거죽은 거북의 등껍질과 같은 무늬로 수 놓여 있고 그런 소나무군락은 하늘을 향해 구불구불 용틀임하였다. 소나무 숲 사이로 옅은 빛이 내려앉았고 그 빛은 동무들의 어깨를 두드렸다. 동무들은 어깨춤을 추며 바위산을 올랐다. 산은 가벼운 듯 가볍지 않았고 무거운 듯 무겁지 않았다. 낮은 산이었지만 높은 듯 했고, 힘들지 않은 산이었지만 동무들은 힘들어 했다. 오르는 길에는 부처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골짝 어디엔가는 부처가 자리하고 있을 것이었다.
금오봉(468m)을 정점으로 상사바위를 향해 쉬운 걸음을 옮겼다. 거대한 상사바위 아래에는 제단이 있었고 촛불이 타올랐다. 상선암으로 내려서는 길은 뺀질뺀질 닳아있었지만 경치까지 닳아 없어지진 않았다. 소나무가 그대로였고 바위가 제 자리를 지켰고 산은 위엄 있는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자애로운 어머니의 얼굴을 새겨놓은 듯한, ‘마애석가여래좌상’을 지나서 ‘상선암’으로 내려섰다. 자그마한 암자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배를 하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불심이 깊은 동무들은 참배를 하였고 나머지 동무들은 나무계단을 밟고 내려서서 너른 자리를 찾아 자유분방하게 둘러앉았다. 계란 한 판을 통째로 삶아 온 미라의 큰 손을 원망하며 동무들은 꾸역꾸역 삶은 계란을 삼키고 또 삼켰다.
보물666호‘석불좌상’은 분해되어 보수 중이어서 그 형체를 사진으로만 확인하고 다음 불상인 ‘선각육존불’이 새겨진 바위로 향했다. ‘선각육존불’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인도자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비와 바람에 씻기고 또 깎이었을 것인데도 선각은 유연하게 휘돌며 풍만한 부처의 형상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신라의 부처는 천년의 세월동안 이렇게 바위에서 살아나 있었던 것이다. 그 다음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부처는 목이 잘려 머리가 없는 ‘석조여래좌상’이었고 그 위쪽에 앙증맞게 돋을새김 되어 있는 ‘마애관음보살상’은 마치 귀여운 아기를 보는 것 같았다. ‘마애관음보살상’을 마지막으로 돌부처와의 대면은 끝이 났고 짧고도 평탄한 내림 길이 이어졌다.
‘삼릉’의 은은한 풍경을 한 번 더 음미하고, 서남산주차장으로 빠져나와서 축구로 남은 땀을 빼버리고 난 후, 감포로 향했다. 감포 ‘해송회식당’에서 올 한 해 무사산행을 자축하였다.
식당 아래 백사장으로 내려가서 소화도 시킬 겸에 금을 그어놓고 발야구를 하는데 비가 내렸다. 비는 대구로 들어오는 내내 그치지 않았다.
2007년 12월 2일 일요일
도상거리 : 약5km.
산행시간 : 2시간 40분.
날 씨 : 흐림
금오산 정상표석
(남기는 것은 발자국, 가져가는 것은 추억뿐)
금오산을 노래함
높고도 신령스런 금오산이여!
천년왕도 웅혼한 광채 품고 있구나.
주인 기다리며 보낸 세월 다시 천년 되었으니
오늘 누가 있어 능히 이 기운 받을련가?
월성원자력(月城原子力)
경주남산일원(慶州南山一圓)
사적 제311호
경주 남산은 신라의 왕도였던 경주의 남쪽에 솟아 있는 금오산(金鰲山)과 고위산(高位山) 두 봉우리를 비롯하여 도당산, 양산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를 통틀어 남산이라고 부르고 있다. 산은 그리 높은 편이 아니지만 동서로 가로지른 길이가 약 4km, 남북의 거리는 약 8km에 40여 계곡이 있고 이곳에는 수많은 불적이 산재되어 있으며 여러 전설과 설화들이 깃들어 있다.
신라 건국 전설이 깃든 나정(蘿井), 신라왕실의 애환이 서린 포석정터, 김시습이 거처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지었다고 하는 용장사터(茸長寺址)등 많은 신라시대 유적을 간직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신라가 불교를 국교로 한 이후 남산은 부처가 머무는 영산으로 신성시되어 많은 사찰과 탑이 건립되고 불상이 조성되었다. 현재까지 조사된 바에 의하면 이곳은 122여개소의 절터, 57여개소의 석불, 64여기의 석탑이 산재하고 있는 야외 박물관으로 불리고 있다. 2000년 12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삼국유사]에는 남산에서 나랏일을 의논하면 반드시 성공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런 까닭에 남산에 얽힌 전설이 많은 편이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는 남산 기슭의 나정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고 하며, 남산의 산신이 나타나 헌강왕에게 신라의 멸망을 경고하였지만 깨닫지 못하여 결국은 멸망을 하게 되었다는 전설도 전해지고 있다.
주요 문화재로는 경주 미륵곡 석불좌상(보물 제136호), 경주 포석정지(사적 제1호), 경주 남산성(사적 제22호)등이 있는데, 다양한 문화재가 곳곳에 있어 신라 천년의 역사가 펼쳐진 듯하다.
배리삼릉(拜里三陵)
사적 제219호, 경북 경주시 배동 73-1
배리삼릉은 경주 남산의 서쪽 기슭에 동서로 3개의 왕릉이 나란히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밑으로부터 신라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 등 박씨 3왕의 무덤이라 전하고 있다. 무덤은 모두 원형으로 흙을 쌓아올린 형태를 하고 있다.
신덕왕릉이라 전해오는 가운데의 무덤은 1953년과 1963년에 도굴 당하여, 내부를 조사한 결과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임을 확인하였다. 무덤에는 돌방 벽면에 병풍을 돌려 세워 놓은 것처럼 동·서 양벽의 일부에 색이 칠해져 있는데, 이것은 본격적인 벽화는 아니지만 벽화가 그려지지 않은 경주의 신라 무덤에서는 처음 발견되는 것으로 주목되는 자료이다. 색은 붉은색, 황색, 백색, 군청색, 감청색으로 되어있고, 12폭으로 되어있다.
배리삼릉의 주인공이 신라의 박씨 3왕이라 전하고 있지만 확실한 기록은 없고 신라 초기의 아달라왕과 신덕왕, 경명왕 사이에는 무려 700여년의 차이가 있어 이들의 무덤이 한곳에 모여 있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또한 신라 초기에는 이와 같은 대형무덤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었다.
삼릉계곡마애석가여래좌상(三陵溪谷磨崖石迦如來坐像)
시도유형문화재 제158호, 경북 경주시 배동 산72-6
높이 7m, 너비 5m 되는 거대한 자연 바위벽(岩壁)에 6m 높이로 새긴 이 불상은 앉은 모습의 석가여래상(釋迦如來像)이다. 불상의 전체 모습은 몸을 약간 위로 제치고 반쯤 뜬 눈으로 속세의 중생(衆生)을 바라보고 있다. 머리에서 어깨까지는 깊게 조각(彫刻)해서 돋보이게 한 반면 몸체는 아주 얕게 새겨 자연과 인공(人工)을 조화시키고 있는 독특한 조각수법(彫刻手法)을 보이고 있어 특이하며 통일신라후대(統一新羅後代)에 새겨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경주삼릉계석불좌상(慶州三陵溪石佛坐像)
보물 제666호, 경북 경주시 배동 산71
일명 ‘얼음골’이라고 부르는 삼릉계곡의 왼쪽 능선 위에 있는 이 석불좌상으로 화강암을 조각하여 만들었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 부근에는 큼직한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자리 잡고 있다. 얼굴은 풍만하고 둥글며, 두 귀는 짧게 표현되었다.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은 옷의 주름 선은 간결하고 아름답게 표현되었다. 허리는 가늘고 앉은 자세는 안정감이 있다. 대좌(臺座)는 상·중·하대로 구성되었는데, 상대에는 화려한 연꽃무늬를 조각하였으며, 8각 중대석은 각 면에 간략하게 눈모양의 안상(眼象)을 조각하였다. 하대는 단순한 8각 대석으로 되어 있다.
8각의 연화대좌에 새겨진 연꽃무늬와 안상을 비롯하여 당당하고 안정된 자세 등으로 보아 8∼9세기에 만들어진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보인다.
삼릉계곡선각육존불(三陵溪谷線刻六尊佛)
시도유형문화재 제21호, 경북 경주시 배동 산72-6
자연 암벽의 동서 양벽에 각각 마애삼존상을 선으로 조각한 6존상으로, 그 조각수법이 정교하고 우수하여 우리나라 선각마애불 중에서는 으뜸가는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오른쪽 삼존상의 본존은 석가여래좌상이며, 그 좌우의 협시보살상은 온화한 표정으로 연꽃을 밟고 본존을 향하여 서 있다. 왼쪽 삼존상의 본존 역시 석가여래로서 입상이며, 양쪽의 협시보살상은 연꽃무늬 대좌 위에 무릎을 꿇고 본존을 향해 공양하는 자세이다.
이 2구의 마애삼존상은 만들어진 시대나 조각자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대체로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되며, 오른쪽 암벽의 정상에는 당시 이들 불상을 보존하기 위해 법당을 세웠던 흔적이 남아 있다.
삼릉계곡마애관음보살상(三陵溪谷磨崖觀音菩薩像)
시도유형문화재 제19호, 경북 경주시 배동 산72-6
경주 남산의 삼릉계곡에 있는 이 불상은 돌기둥 같은 암벽에 돋을새김한 것으로 연꽃무늬 대좌(臺座)위에 서 있는 관음보살상이다.
머리에는 보관(寶冠)을 쓰고 있으며, 만면에 미소를 띤 얼굴은 부처의 자비스러움이 잘 표현되어 있다. 손에는 보병(寶甁)을 들고 있어 보관과 함께 이 불상이 현세에서 자비로써 중생을 구제한다는 관음보살임을 알 수 있다. 불상 뒷면에는 기둥 모양의 바위가 광배(光背) 역할을 하고 있는데, 자연미에 인공미를 가한 느낌이다.
이 불상은 정확한 연대와 조각자가 알려져 있지 않으나, 통일신라시대인 8∼9세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 불상의 동편에 위치하고 있는 머리 없는 불상은 남쪽으로 약 100m 떨어진 지점의 소나무 숲속에서 출토되어 이쪽으로 옮겨온 것이다.
삼릉계곡석조여래좌상(三陵溪谷石造如來坐像)
계곡 어귀에 3개의 능이 있어 삼릉계라 하는데 계곡이 깊고 여름에도 찬 기운이 돌아 냉골(冷谷)이라고 부른다. 이 계곡에는 11개소의 절터와 15구의 불상이 산재하여 남산에서 가장 많은 유적이 있으며, 금오봉 정상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찾는 사람들이 많다.
이 석조여래좌상은 1964년 8월 동국대학교 학생들에 의해 약 30m 남쪽 땅속에서 머리(佛頭)가 없는 상태로 발견되었다. 특히 이 부처님은 왼쪽 어깨에서 흘러내려 매듭진 가사 끈과 아래옷을 동여맨 끈, 그리고 무릎 아래로 드리워진 두 줄의 매듭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어, 용장사 삼륜대좌불과 함께 복식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불상은 손과 머리가 파손되었으나 몸체가 풍만하고 옷주름이 유려하여 통일신라시대의 우수한 조각품으로 평가된다.
왼쪽 산등성이 바위 벼랑에는 관세음보살상이 새져져 있고, 위쪽으로 오르다 보면 선각의 여섯부처님과 마애여래좌상, 석가여래좌상, 그리고 남산에서 좌불로는 가장 큰 상선암 마애여래좌상 등 귀중한 문화유산을 만날 수 있다.
1997년(불기 2541년) 6월 29일
청정운동추진위원회, 신라문화원이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