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올린 글은 저가 1978년부터 1982년까지 중앙기상대 기획계장, 1987년부터 1993년까지 약 10년간 중앙관상대, 중앙기상대의 기획과장을 맡아서 기획, 예산과 조직관리 등의 업무를 실무책임자로서 직접 수행하면서 알고 있었던 내용을 관련자료와 선배들의 증언, 저의 사사로운 기록에 기초하여 정리한 부분입니다.
이 글의 요지는 국립중앙관상대-중앙관상대-중앙기상대-기상청으로 변화발전하는 과정에서의 기관명칭이 변경된 내용을 다루었습니다.
자료를 정리하면서 혹, 지나친 주관에 의한 글이 되지않았을가 하는 걱정도 하였고, 혹은 내용이 왜곡되지는 않았을가하는 걱정도 있습니다. 작은 부분이지만 하나씩 정리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 출발하였으니 넓은 이해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2011년 12월 12일
남기현
관상대에서 기상청이 되기까지
남 기 현
<들어가는 말>
우리나라의 기상행정체제는 천문(天文)과 기상(氣象)을 포괄하는 기능으로서 고려시대에 서운관(書雲觀), 조선시대에 관상감(觀象監)으로 이어오다가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기상대(朝鮮總督府氣象臺)로 변천되어 왔다.
1945년 해방 이후 미군정청(美軍政廳)시대에는 문교부 관상국(觀象局), 중앙관상대(中央觀象臺)로 변천되었으며 1949년8월18일자로 국립중앙관상대(國立中央觀象臺)의 직제가 제정․공포됨으로서 대한민국정부의 정부조직으로 새롭게 출범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현대 기상행정체제는 1949년에 시작되어 60여년이 경과되면서 많은 변화가 있었으며, 기관명칭도 중앙관상대에서 중앙기상대로, 중앙기상대에서 기상청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 본인이 중앙관상대, 중앙기상대와 기상청에서 직제개편과정에 직접 참여하게 되었음으로, 당시의 상황이나 조직개편의 배경 등에 관한 내용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하는 생각에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본인은 1968년10월 당시의 중앙관상대에 기상직공무원으로 임용되어 2003년6월 정년퇴임하기까지 32년8개월간 기상청에 재직하면서 중앙관상대 총무과 기획계장, 중앙기상대 기획국 기획과장으로 재임하면서 조직과 예산관련 업무를 10년간 수행하였다.
<국립중앙관상대의 발족으로부터 중앙관상대로 명칭이 변경되기까지>
우리나라는 1945년8월15일 해방이 되고, 1945년9월7일 재조선미육군사령부군정청(在朝鮮美陸軍司令部軍政廳, 약칭 美軍政廳)이 설치되면서 우리나라의 기상업무는 일본 조선총독부기상대에서 미군정청기상과(과장 李源喆)에서 인수하였으며, 이 조직은 미군정청 관상국으로 승격되고, 중앙관상대로 이어졌다. 1948년8월15일 대한민국정부 수립되었고, 1949년8월18일 대통령령 제165호로 국립중앙관상대 직제가 제정․공포되어 문교부장관 소속하에 국립중앙관상대가 정식으로 발족하게 되었다. 초대 대장에 이원철(李源喆) 박사가 취임하였으며 초창기 조직은 총무과 기획과 예보과 관측과 통계과 천문과를 두었고, 기상과 천문업무를 함께 수행하게 되어 기관명칭이 국립중앙관상대로 명명된 것으로 생각이 된다.
1961년 5.16이 발생하면서 정부수립 후 국립중앙관상대를 설립하고 이끌어 온 초대 대장 이원철 박사가 5월30일자로 퇴임하고 1961년9월12일자로 미국유학 중이던 국채표(菊埰表) 박사가 제2대 대장으로 취임하였다. 1961년8월25일자 법률 제700호로 기상업무법이 제정되며, 이 법에는 국립중앙관상대를 중앙관상대로 명칭을 변경하고, 중앙관상대의 조직과 임무 등을 규정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서 초창기 기상업무수행에 필요한 법률적 제도적 기반이 확립된다. 1963년2월12일자 각령 제1208호로 국립중앙관상대 직제를 폐지하고 중앙관상대 직제를 제정하면서 기관 명칭이 중앙관상대로 변경이 확정되었으며 소관부처도 문교부에서 교통부로 변경되었다.
정부는 1967년3월30일자로 정부조직법을 개정하여 과학기술처를 신설하고 중앙관상대를 교통부에서 과학기술처소속으로 이관하였고, 1967년4월12일 대통령령 제3001호로 중앙관상대 직제가 개정되어 중앙관상대는 과학기술처 소속으로 이관되어 깊은 관계를 맺게 된다.
중앙관상대 제2대 대장 국채표는 1967년7월24일자 정년퇴직하게 된다. 그리고 후임대장은 조경철(趙慶喆) 박사 등 여러 사람이 물망에 올랐으나 바로 발령이 나지 않고, 1년 이상 공석으로 있다가 1968년10월10일자로 서울문리대 교수인 양인기(楊寅祺) 박사가 제3대 중앙관상대장에 취임하게 되었다.
중앙관상대는 1966년부터 1971년까지 對日請求權資金(PAC)에 의하여 전국적인 기상관측망 구축에 필요한 농업기상관측장비, 고층기상관측장비, 기상통신장비 등을 도입 설치하여 기상장비근대화를 추진하였다, 이 사업과 연계하여 1970년7월18일자 대통령령 제5202호로 중앙관상대 직제가 개편되어 본대에 국장급인 기상업무부, 연구조사부를 신설하고, 지역 기상센터격인 부산지대(釜山支臺)와 광주지대(光州支臺)를 신설하였으며, 농업기상정보지원을 위하여 전국에 농업기상분실 74개소를 신설하였다. 그리고 이에 필요한 정원 199명이 증원되어 총 정원이 516명으로 확대 보강되었다. 1978년에는 중앙기상대 본대의 부(部)를 국(局)으로 개편하고 기상연구소를 신설함으로서 기상업무를 총괄하는 중앙행정기관과 과학기술기관으로서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중앙관상대가 중앙기상대로 명칭이 변경되다>
1979년10월26일 10.26사태가 일어난 후 국정쇄신이라는 명분하에 공직사회에는 세찬 감원바람이 불어 닥쳤다. 1980년 중앙관상대는 양인기 대장을 포함하여 10여명의 직원이 타의로 퇴직하는 아픔이 있었으며 양인기 대장의 후임으로 제4대 중앙관상대장에 김진면(金鎭冕) 광주지대장이 승진 임명되었다.
김진면 대장은 취임이후 장기발전계획의 수립, 기상업무법의 정비, 기상장비의 현대화를 중점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대장 지시에 따라 중앙기상대의 독자적인 장기계획을 수립하고, 이에 필요한 소요재원확보를 위해 차관도입을 적극 검토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1983년부터 1986년까지 추진되었던 기상장비 현대화사업의 재원이 된 일본의 대외협력기금인 OECF차관 1,750만 불을 도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김진면 대장은 관상대는 기상(氣象)과 천문(天文)업무를 포괄하는 의미이며, 그간 중앙관상대가 수행하던 천문업무는 신설된 국립천문대에 이미 이관되었고, 현재의 중앙관상대는 기상업무만을 담당함으로 기관 명칭은 중앙기상대로 변경하는 것이 옳다는 주장을 하며 기관명칭 변경을 추진하라는 지시를 하였다.
1981년에는 전두환 대통령이 취임하여 행정개혁위원회와 국무총리 기획조정실 폐지, 부․처간 기능조정 등 정부조직법의 개정수요가 있었던 때로서 중앙관상대도 기관 명칭을 중앙기상대(中央氣象臺)로 변경하는 내용의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총무처에 제출하였다. 기관 명칭변경은 큰 문제없이 잘 추진되었고, 경제기획원과 예산협의까지 잘 마치고 총무처에 되돌아와 보완한 다음 법제처로 이송하는 최종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였다. 총무처 내부에서 중앙관상대 설립근거를 정부조직법에서 삭제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어 총무처 최종안에 중앙관상대 관계조항을 삭제하여 법제처로 이송되었다. 이때 중앙관상대는 법제처에 정부조직법에서 중앙관상대 관계조항 삭제의 부당함을 강력히 주장하였고, 법제처가 이에 동의함으로서 시간에 쫒긴 총무처가 이를 수용하여, 중앙관상대는 중앙기상대로 명칭을 변경하여 정부조직법에 존속하게 되었다. 기사회생이 되는 순간이었다.
중앙관상대가 중앙기상대로 변경되는 내용이 포함된 정부조직법 개정안은 국무회의를 거쳐 정기국회에 이송되어 처리되었고, 1981년12월31일자로 개정 공포되었다. 그리고 중앙관상대직제는 동일자로 중앙기상대직제로 개정되었으며, 시행일은 1982년1월1일자로 하였다. 1948년부터 34년간 불리어졌던 중앙관상대는 중앙기상대로 그 명칭을 변경하게 된 것이다.
<중앙행정기관으로 인정을 받기까지>
중앙관상대 또는 중앙기상대가 중앙행정기관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대외적으로 그렇게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중앙관상대 시절, 중앙기상대 시절 끊임없이 거론되었고, 논란이 이어져 왔다. 논란의 시작은 1961년8월25일자로 기상업무법이 제정 공포되어 기상업무를 담당하는 중앙관상대의 조직과 기능이 이 법에 규정되었다. 행정학계에서는 중앙관상대는 법률에 설립근거가 있음으로 중앙행정기관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1967년3월30일자로 정부조직법이 개정되어 “과학기술처장관 소속에 중앙관상대를 둔다.”라고 규정됨으로서 중앙행정기관이라는 주장이 더욱 힘을 얻게 되었다. 이에 대해 총무처는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하였고, 법제처에서는 긍정적인 입장이었다. 중앙관상대가 중앙행정기관이라는 논쟁은 상당기간 지속되었고, 1981년(?) 경에 중앙관상대가 법제처로 중앙관상대가 중앙행정기관이라는 유권해석을 요청하였는데, 이에 대해 법제처는 총무처와 사이에서 입장이 난처하여 이 문제를 상당기간 유보하고 있다가 중앙관상대가 자진 철회하도록 권고한 일도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한다. 1981년 여름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한창 검토하던 때이다. 지금 정확한 날자는 생각나지 않지만, 여름철 토요일 오후에 과기처 행정관리담당관이 본인에게 전화를 하여 총무처의 정부조직법개정안이 최종적으로 법제처에 넘어갔는데 정부조직법 개정안에 중앙관상대 관계조항이 모두 삭제되었다는 것이다. 토요일 오후이기 때문에 상사와 협의할 수도 없고 본인이 법제처에 달려가니 담당 법제관은 이미 퇴근하였고 담당국장(J)이 자료를 검토하고 있었다. J국장께 찾아온 연유를 설명하고 중앙관상대를 도와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였다. J국장은 정부조직법상의 내용을 검토한 후 중앙관상대의 존속이 옳다고 판단하고 총무처 담당과장을 불러 중앙관상대 관련조항을 정부조직법에 유지시키는 것이 좋고 또한 음지에서 묵묵히 일하는 중앙관상대의 사기앙양에도 도움이 된다는 논리로 담당과장을 설득하였다. 이때 매우 빠듯한 일정과 법제처의 반대에 봉착하여 총무처는 이를 포기하고 중앙기상대는 정부조직법에 존속하게 되었다.
중앙기상대는 1983년3월 제4대 김진면 대장이 정년으로 퇴임하고, 제5대 손형진 대장이 취임한다. 손형진 대장은 기상기술의 연구개발과 기상업무의 전산화를 추진하게 된다. 1985년7월에 기상기술개발을 주도할 기상개발관실(氣象開發官室)을 대장 직속에 신설하고 관리국을 기획국으로, 관측국을 기후국으로 개편하고, 기상연구소 연구실을 재편하여 중앙기상대 업무체제를 혁신하고, 국지예보 실시 등 대국민 서비스를 획기적으로 개선하였다.
1987년7월 태풍셀마의 영향으로 전국적인 피해가 발생되면서 총무처는 그간 덮어두었던 중앙기상대의 중앙행정기관화를 스스로 제시한다. 당시 장기오 총무처장관은 중앙기상대를 방문하여 기상청 승격은 1988년 정권교체이후로 미루고 우선 중앙행정기관으로 인정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이어서 10월20일에는 중앙기상대를 1987년에 중앙행정기관화하고 1988년 기상청으로 승격(정무직화) 시키겠다고 전두환 대통령께 보고하였다. 그리고 1987년12월8일자로 총무처는 중앙기상대가 중앙행정기관으로 승격되었음을 각 부처에 통보한다. 중앙행정기관의 의미는 독립적인 업무수행과 인사와 예산의 독립인데, 인사와 예산의 독립문제는 새로운 난관에 봉착하여 이루지 못하고, 중앙행정기관으로 분류되고 중앙행정기관과의 직접 문서교환이 가능한 것으로 만족하게 되었다.
<기상청으로 승격까지 20년이 소요되다>
중앙기상대의 기상청 승격은 중앙기상대 직원은 물론 기상인 모두의 오래 숙원이었다.
1977년 국회 경제과학분과위원회에서 중앙관상대의 기상청 승격문제가 대두되어 중앙관상대는 정부조직법개정안을 마련하고 1978년도 예산에 청 승격에 필요한 일부 예산을 반영하면서 상당한 진척을 보았다. 1978년4월15일자로 중앙관상대 직제가 개편되어 본대는 중앙행정기관과 같이 관리국, 예보국, 관측국으로 개편하였고 기상연구소를 신설하였으며 부산지대와 광주지대를 비롯한 79개 소속기관을 거느리는 전국적 조직으로 확대 보강되었다. 다만 자세한 배경은 알 수 없으나 이때 기상청 승격은 미루어 졌다.
그 후 10년이 지난 1987년7월 태풍 셀마(Thelma) 영향이후 10월에 총무처는 기상예보향상대책으로 1988년에 중앙기상대를 기상청으로 승격시키겠다고 전두환 대통령께 특별보고를 한바가 있다.
1988년3월에 노태우 대통령이 취임하고 6공화국이 선포한다. 중앙기상대는 손형진 대장이 퇴임하고 제6대 박용대 대장이 취임하게 된다. 박용대 대장은 88서울올림픽의 성공적 지원, 기상레이더관측망 구축, 자동기상관측장비(AWS) 도입 등 기상장비현대화, 기상시설개선, 수치예보의 도입 등에 역점을 두었다.
노태우 대통령은 취임 후 행정전반에 걸친 개혁을 위하여 행정개혁위원회를 1988년5월13일자로 설치하여 1년간 운영한다. 행정개혁위원회에서는 자연스럽게 중앙기상대의 기상청 승격문제를 다루게 되었다. 행정개혁위원회의 정부조직부문의 실무책임자는 총무처에서 파견된 과장급공무원(P과장)이 주관하였으며, 본인은 꾸준히 행정개혁위원회에 다니면서 기상청 승격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행정개혁위원회의 임무가 종료되는 1989년에 P과장은 이번 개혁안에는 청은 차관급 청과 1급 청으로 구분하고 1급 청은 기상청, 통계청, 해양경찰청, 문화재청이 거론된다고 하면서 최종보고서에 1급 청은 포함시키지 않을 계획이라고 하였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보고서에 기록되지 않으면 나중에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 같아 1급 청이라고 하더라도 최종보고서에 기관 명칭이 명시되어야 실현가능성이 높을 것이라고 믿고, P과장께 간곡히 부탁하여 기상청이 행정개혁위원회 보고서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렇게 마련된 행정개혁위원회의 연구결과를 근거로 정부조직법이 1990년12월27일자 법률 제4268호로 개정되면서 중앙기상대는 기상청(1급 청장)으로 승격되었으며 초대 기상청장에 박용대 중앙기상대장이 임명되었다. 기상청과 통계청은 청으로 승격은 되어도 중앙행정기관의 공통조직인 기획조정관 등은 인정하지 않고, 두 기관 공히 15명을 증원하는 최소한의 조직개편으로 형식상의 청으로 운영하게 되었다. 1급 청장은 인사권이 소속 장관에게 귀속되고, 공통조직도 차별화 되는 등 차관급 청과는 여러 부문에서 차등대우를 하였다. 기상청의 불완전한 조직은 2005년7월22일자로 정부조직법이 개정되어 청장은 모두 차관급으로 격상되면서 명실상부한 기상청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첫댓글 총무처에서 중앙관상대를 정부 조직법에서 삭제하겠다는 의견이 있었다는 것
→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불장난처럼 여겨지는 것부터 시작하여...
명실상부한 기상청으로 자리매김 하게 되지만, 기상청 소속 공무원의 의지와 상관없는 인사권
언젠가는 기상인의 의지가 마음껏 실현되는 기상청이 되는 꿈을 품으며...
그럼에도 오늘의 놀라운 발전을 위해 열정을 품으셨던 모든 분들에게
깊은 마음 속 감사, 찬사를 표하고 싶어 굵고 깊은 점을 꾹꾹 눌러 찍고 갑니다.
흘러간 재미있는 얘기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