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7월 27일 목요일. 맑음.
아침 7시에 기상했다. 체크 아웃을 하고 키 보증금 210원을 받은 후 택시를 타고 오광구, 우또우코우에 있는 사랑방으로 갔다. 택시비는 18원 5각이다. 아침 식사로 소꼬리 곰탕, 김치, 도라지, 밥으로 먹었다. 점심 김밥 4인분을 챙겼다. 95원을 지불하다. 가이드가 어제의 송 양에서 어찌 된 일인지 김양으로 바뀌었다. 두 아가시는 원래 가이드가 아니고 사장님의 아들들에게 중국어를 가르쳐 주는 가정교사란다. 사장님의 두 아들은 초등생인데 방학을 맞아서 한국 속초에서 이곳으로 왔단다. 아가시들은 청하대학 출신들로 선교사님이 보낸 자매들이었다. 김양은 길림성 출신으로 달 4명중 장녀이고 청하대학 환경과 3학년이다. 수재중에 수재란다. 생긴 모습으로는 좋게 말해 수수해 보이지만 시골 고등학교 1학년 정도로 보인다. 약간 우둔해 보이는데 아주 우수한 학생이란다. 약간 말이 없고 피곤한 기색이다. 돈을 주고받을 때 아주 야무지다. 김양과 함께 택시를 타고 천안문 광장으로 향했다. 인민대회당 옆에 택시를 세우고 32원을 지불했다.
우리나라 여의도 광장과 비슷했다. 길 건너편에는 TV에서 중국을 소개할 때 마다 나오는 낯익은 천안문이 눈에 들어왔다. 지하도로 건너 천안문 앞으로 갔다.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인 지하도 인 것 같다. 평일인데도 중국인 관광객이 아주 많았다. 사람이 워낙 많으니 광장이 작아 보인다. 이곳이 북경 중심이고 중국의 상징이다. 천안문 광장은 총 면적이 44만㎡로, 모스크바에 있는 붉은 광장의 3배, 우리나라 여의도 공원 면적의 2배에 달한다. 100만 명을 동시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중국 근현대사의 기원을 여는 핵심적인 일들이 이곳에서 벌어졌다. 1919년 신문화 운동인 5.4운동을 시작으로,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선포, 1966년 중국을 10년간 집단적 광기로 몰아넣었던 문화대혁명의 홍위병 집결, 1989년 6월 4일 민주화를 요구하는 천안문 사건이 일어났다. 중국인들이 자랑하는 광장이다. 북쪽에는 천안문, 남쪽에는 전문, 동쪽에는 역사박물관, 혁명 박물관, 서쪽에는 인민대회당이 광장을 둘러싸고 있다.
광장 가운데는 인민 영웅 기념비가 우뚝 솟아 있고 그 뒤로 모택동 유해가 안치된 기념 당이 자리 잡고 있다. 명 · 청대에는 천안문 광장 일대가 내성(內城)에 속해서, 자금성 바로 바깥의 궁정 광장으로 활용되었다는 걸 떠올리면 흥미롭다. 신중국의 수도를 베이징으로 정한 마오쩌둥은 구시대의 자취를 없애고자 성벽과 성문, 옛 관청 등을 허물고 천안문 광장이라는 열린 공간을 조성했다. 이로써 베이징의 중심은 과거보다 약간 남쪽으로 이동했다. 현재 광장은 남북 길이가 880m, 동서로 500m에 달한다. 광장 맨 앞에 해당하는 국기게양대(升旗台)는 이색적인 일출과 일몰을 볼 수 있는 명소이다. 해가 뜨고 지는 시각에 맞춰서 국기 게양식과 하강식을 거행하는데, 담당 군인들이 한 치의 오차 없이 내딛는 발걸음과 근엄한 표정이 인상적이다. 그 광경을 보려고 중국인들은 1~2시간 전부터 국기게양대 앞에서 장사진을 친다. 중국인이든지 북경을 찾는 사람은 누구든지 여기를 방문해서 기념사진을 찍는다. 항상 사람들로 북적댄다. 한 여름인데도 연을 날리는 사람들이 보인다.
광장에 우뚝 솟은 인민 영웅 기념비를 본다. 인민 영웅 기념비(人民英雄纪念碑), 천안문 광장 중앙에 위치한 이 기념비는 19~20세기 신 중국을 건설하기까지 희생된 이들을 추모하는 비다. 높이 37.94m에 달하는 석조 비석 정면에 ‘인민의 영웅은 영원하다(人民英雄永垂不朽)’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기단부에 조각한 8개의 부조가 매우 인상적이다. 1840년 아편전쟁, 1851년 태평천국운동, 1911년 우창봉기, 1919년 5 · 4 운동, 1925년 5 · 30 총파업, 1927년 난창봉기, 1931년 중 · 일 전쟁, 1949년 창 강(长江) 도하, 중국 근대 혁명사의 주요 장면을 담았기 때문이다.
1976년 4월 5일 청명절에 저우언라이(周恩来)가 타계했을 때는 이 기념비 앞에 추도의 화환이 산처럼 쌓였고, 그것을 저지하는 당국과의 마찰이 시위로 연결되어 4만여 명이 체포되었다. 이것이 바로 1차 천안문 사건이다. 이 사건 이후 등소평이 득세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1989년 민주화를 요구하는 2차 천안문 사건 때도 다시 시위대의 집결지가 되었다. 우리가 방문 했을 때는 모택동이 사용했다는 중학생 정도의 남녀 학생이 기를 들고 지키고 있었다. 현재는 기념비 주위를 경찰이 철저히 호위하고 있어서 멀찌감치 떨어져 볼 수밖에 없다. 인민의 영웅은 영원불멸이라는 한문이 새겨져 있다. 이 글씨를 모택동이 썼고 뒷면 글씨는 주은래가 썼다고 한다.
한참 이곳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데 끝도 없이 길게 늘어선 이상한 줄을 발견했다. 손에 든 것도 없이 대 여섯 명이 한 조를 이루어 공안들의 안내에 따라 끝도 없이 줄이 이어져 바쁘게 큰 건물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모택동 기념 당이었다. 마오 주석 기념당(毛主席纪念堂), 1976년 9월 9일에 사망한 마오쩌둥을 영구 안치한 묘소로 1977년 9월 9일에 개관했다. 높이 33.6m,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이뤄진 건물인데, 전국 각지에서 마오쩌둥을 알현하러 온 사람들로 줄이 길게 이어진다. 기다리는 시간이 무척 길고, 들어가는 절차가 까다롭고, 안에 들어가서는 고압적인 공안들 태도에 기분이 언짢아지기 십상이다. 기념 당에 들어서면 3.4m 높이의 마오쩌둥 대리석상이 먼저 보이고, 첨앙청(瞻仰厅)의 수정으로 만든 관 속에 마오쩌둥이 방부 처리되어 영면해 있다. 우리도 호기심에 줄 끝을 겨우 찾아 짐과 가방을 최군에게 맡기고 대열을 따라간다. 제법 걸릴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줄이 발리 들어간다. 30분 정도 부지런히 밀려 건물에 들어섰다. 중앙에 마오의 유해가 인형같이 유리관 속에 누워있다. 인파는 유해를 중심으로 양 옆으로 나뉘어 들어가 걸으며 얼굴을 잠깐 보고 다시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2억원( 우리 돈 300억원)을 들여 만들었단다. 이것은 흡사 종교와 비슷했다. 인간은 참 어리석고 교활함을 다시 느낀다.
미묘한 감정을 갖고 정양문과 전문을 뒤로하고 죄측으로 돌아 중국혁명박물관과 역사박물관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중국역사박물관은 1959년에 세워진 , 중국의 창립 10주년을 기념하기위해 북경에서 건설한 10대 건축물 중 하나다. 1912년 채원배가 국립역사박물관을 창립하기위해 문물을 수집하는 등 준비를 하였다. 1937년, 항일 전쟁 후 중국역사박물관은 주로 문물보호에 치중하여 관리해 왔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창립되었으며 이때부터 정식으로 역사박물관으로 이름을 고쳤다. 사회의 각 계층에서 기증한 16962건에 달하는 자료들이박물관의 풍부함을 더했다. 60년대 말, 중국역사박물관과 중국혁명 박물관이 합병되었다. 70년대부터 주은래 총리의 지시 하에 자료들이 재정비되었다. 고대 문명과 현대가지의 정보를 포함하고 있다. 무슨 이유인지 문이 닫혀 구경 못하고 돌아섰다.
홍콩 반환일과 시간이 적힌 큰 게시판을 보고 천안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구경도 본능을 거슬리지 못하는 것 같다. 목이 마르다. 갈증에 물을 4원 주고, 캔을 5원 주고 사서 마셨다. 갈증을 달래고 나니 이제 화장실이 우리를 부른다. ‘칙소’라는 글씨, 두당 3각씩 주고 속을 비우고 나니 새로운 힘이 솟아난다. 천안문을 배경으로 기록을 남기고 지하도를 통해 건너가니 천안문과 마주한다. 이곳 전체를 고궁이라고 한다. 대부분 천안문을 통해 고궁의 남문인 오문을 통해 고궁, 즉 자금성으로 입장한다.
고궁은 난징을 수도로 삼았던 명나라 영락제가 북방의 몽고족 기습에 대응하기 위해서 베이징으로 수도를 옮기고 1407~1420년에 걸쳐 궁전을 축조했다. 명나라를 멸한 청나라는 선양에 고궁을 지었으나 북방 정복을 마치자, 1644년에 입성한 베이징을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 중국에는 전통적으로 전 왕조의 자취가 남아 있는 궁전을 파괴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청나라는 명나라가 세운 궁전을 없애지 않고 복구하여 자신들의 색을 덧입혔다. 1924년 청의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溥儀)가 고궁을 떠나면서, 명 · 청대 5세기 동안 제국의 중심지였던 고궁의 역사도 막을 내렸다.
고궁은 본래 자색의 금지된 성이란 뜻으로 ‘자금성(紫禁城)’이라 불렸다. 붉은색은 중국인들 관념 속에서 행운과 행복을 상징한다. 우주관에 따르면 우주의 중심 북극성의 빛깔로, 북극성은 하늘의 아들 ‘천자(天子)’로 일컬어지는 황제를 상징한다. 즉, ‘자금성은 황제가 사는 곳’이라는 뜻이다. 지금도 베이징 도심 한가운데서 천하를 내려다보는 듯한 고궁의 자태가 위풍당당하다.
총 면적 723.633㎡, 동서 길이 760m, 남북 길이가 960m에 달한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방이 아주 많다는 의미에서 9,999칸이라고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800채 건물에 8,886칸이었다고 한다. 이 직사각형의 궁전을 보호하기 위해서 높이 10m의 담장이 둘러져 있다. 성벽을 따라서 폭 50m의 해자(도랑)를 만들어 황제와 그의 가족을 외적으로부터 철저히 보호했다.
규모만큼이나 놀라운 것은 14년에 걸친 궁전의 축조 과정이다. 주요 궁전을 받치고 있는 흰 대리석 기단,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두툼한 목재 기둥, 땅과 최고 통치자를 상징하기 위해 사용된 노란색 유리기와. 이 모든 건축 자재를 전국 각지에서 준비하고 운반하는 데만 10년이 걸렸다고 한다. 명나라 때는 궁 안에 9000명의 시녀와 1000여명의 환관이 있었다고 한다. 고궁은 크게 외조와 내정으로 구분되는데 외조는 황제가 집무하던 곳이고, 내정은 황제가 거주하는 곳이란다.
대리석 기단의 재료는 베이징에서 서쪽으로 50km 떨어진 팡산(房山)에서, 가장 많이 필요했던 목재는 강과 대운하를 통해 저장, 장시, 후베이, 쓰촨 일대에서 운반해 왔다. 실내 바닥에 사용된 벽돌은 산둥과 쑤저우에서 생산되어 역시 대운하를 통해 들여왔다. 표면에 노란색 유약을 발라 구운 유리와(琉璃瓦)는 베이징 유리창 거리에서 생산되었다. 자재가 모아지자 전문 기술자 10만 명, 노동자 수 십 만 명을 동원하여 3년 만에 완공하였다.
고궁에 들어서면 건축물들의 웅장함에 압도된다. 좀 더 재미있게 관람하려면 세세한 장식에도 주목하는 것이 좋다. 장식에 중국의 전통 관념과 상징이 담겨 있는데, 주로 황제를 상징하는 용 모양의 장식이 많다. 문에 있는 9줄의 장식, 바닥과 난간에 대리석으로 조각한 용, 기둥이며 천장에도 용이 등장한다. 황후를 상징하는 봉황도 볼 수 있다. 용은 봉황과 만나 천하무적이 된다는 전설이 담겨 있다.
추녀마루에는 봉황을 탄 선인을 필두로 용, 봉황, 사자, 천마, 해마 등이 이어지고 맨 뒤에는 어김없이 용머리가 등장한다. 화재 진압에 사용할 목적으로 거대한 동항아리를 곳곳에 배치했다. 원래는 각각 200냥의 금이 입혀진 금동항아리였는데, 1900년에 8개국 연합군이 쳐들어와 금을 모두 긁어갔다. 항아리에 물이 차 있는지, 겨울에 얼음이 얼지 않았는지 살피는 것은 환관들의 주요 임무 중 하나였다.
천안문은 TV, 신문 등에서 가끔 본 중국의 상징물이다. 모택동 사진과 중국의 붉은 깃발이 인상적이다. 1949년 10월 1일 모택동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했고, 지금도 국경일에 중국의 고위들이 국민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곳이다. 현재 고궁의 정문이다. 위치가 베이징의 남북 중심축에 해당해 자오(子午)라는 의미에서 이름이 유래되었다. 1417년에 세워져 1651년에 재건 된 중앙에 높이 37.95m의 성벽 위로 웅장한 누각이 솟아 있다. 매년 황제는 이곳에 올라서 새로운 역법을 공표하고, 군사 열병식을 하기도 했다. 오문 양 옆으로 각각 2개씩 누각이 세워져 있다. 이 4개 누각에는 대형 북과 종이 설치되어 있다. 황제가 조상을 모신 사원에 갈 때는 북을, 천단과 같은 제단에 제사를 지내러 갈 때는 종을 울렸다고 전해진다.
총 5개 누각이 설치된 오문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말발굽 같기도 하고 새가 좌우 날개를 펼친 것 같기도 하다. 오문 정면에 3개, 양옆 누각에 각각 1개씩 문이 달려 있다. 총 5개의 출입구 중에서 중앙 통로는 황제가 출입할 때만 열렸다. 예외적으로 황제의 혼례 날 황후가 이 중앙 문을 통해서 궁궐에 들어왔고, 과거에 급제한 3명의 수상자가 관직을 받은 후 퇴장할 때 사용했다. 참고로, 죄를 지은 고위관리는 오문의 동쪽 측면 문 앞에서 곤장을 맞았다. 천안문 왼쪽은 손문을 기념하기위해 세워진 중산공원, 오른쪽에는 노동인민문화궁이 있었다. 황제만이 간다는 중앙문을 통해 대문의 장식물을 만지며 인파에 밀려 안으로 들어갔다.
금수하(金水河)가 나온다. 오문을 통해 궁궐로 들어오자 넓은 뜰이 펼쳐지고, 뜰을 가로질러 금수하가 흐른다. 금수하는 인공 하천으로, 화재 발생 시 진압에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궁궐 설계 때부터 목조 건축물에 빈번히 발생하는 화재를 염두에 둔 것이다. 황제를 상징하는 용은 물이 있어야 힘을 쓴다는 전설도 반영되어 있다. 하천 위에 하얀 대리석을 아치형으로 가공해 만든 금수교(金水桥)가 우아하다. 천안문 광장 앞에 놓인 금수교와 구분해서 내금수교(内金水桥)라고 부르기도 한다. 유교에서 중시하는 5가지 덕목(검소, 겸양, 공손, 양손, 온화)을 상징화해서 5 개의 다리를 놓았다. 지금은 관광객들이 원하는 대로 다리를 선택해 건널 수 있지만, 황제가 살 던 시절 가운데 다리는 황제만이 거닐 수 있었다.
태화문을 지나면 태화전, 중화전, 보화전이 일직선에 늘어서 있다. 태화문(太和门)은 외조로 들어가는 실질적인 출입구다. 고궁이 완성된 1420년에 지어졌지만 화재로 소실되어 1888년에 재건했다. 좌우측에서 태화문을 지키고 있는 사자상은 명나라 때 것이다. 오른쪽에서 여의주를 누르고 있는 것이 수컷, 왼쪽에서 새끼에게 젖을 주고 있는 것이 암컷이다. 왼쪽의 암컷 사자상은 마치 새끼를 못살게 구는 것 같지만, 옛 중국인들은 사자의 발가락에서 젖이 나온다고 여겼다. 이 한 쌍의 사자는 황제가 지나는 가운데 통로를 바라보고 있다. 태화문 천장도 주목해야 한다. 격자 무늬로 이루어져 있는데, 여기에는 화재를 예방한다는 주술적 의미가 담겨 있다.
태화전(太和殿)은 고궁을 대표하는 첫 번째 공식 궁전이다. 태화문을 통과하면 다시 넓은 뜰이 펼쳐지고, 중앙에 자금성에서 가장 웅장하고 화려한 태화전이 나온다. 3단의 흰 대리석 기단 위에 세워졌다. 24개의 붉은 기둥이 이중으로 된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데, 건물의 정면 길이가 무려 64m, 높이 27m, 측면 너비는 37m에 달한다. 현존하는 중국 최대의 목조건물이다. 1420년 창건 이래 여러 차례 화재가 발생했고, 현재의 건물은 1696년에 재건된 것이다. 태화문과 태화전 사이에는 국가 행사 때 9만 명 정도의 인원이 한꺼번에 들어갈 수 있도록 설계된 뜰이란다.
태화전을 관람하려면 먼저 3단의 백색 대리석 기단을 올라야 한다. 기단 앞에 놓인 18개의 대형 청동 향로가 시선을 끈다. 황제가 거행하는 공식 행사가 열릴 때면 어김없이 이 향로에 향을 피웠다고 한다. 기단 맨 위 모퉁이에는 해시계의 일귀(日晷), 됫박처럼 생긴 계량 도구 가량(嘉量)이 탑처럼 생긴 작은 석조 건축물 안에 들어 있다. 해시계는 정확함을, 가량은 속임수 없이 공명정대함을 상징한다. 황제의 공명정대한 정치 실현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기단을 오를 때 주의 깊게 살펴볼 또 하나는 난간의 모서리마다 설치한 용머리 배수구다. 중앙 통로에도 하늘로 승천할 듯한 용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웅장한 외형을 감상한 후에는 내부의 화려하고 섬세한 장식에 감탄할 차례이다. 우주의 중심을 상징하듯 태화전 정중앙에 수미단을 설치하고 옥좌를 놓았다. 최고 황권을 상징하는 의미에서 금련보좌라 부르기도 한다. 황제가 옥좌에 앉으려면 7개의 계단을 올라야 한다. 중국에서 숫자 9는 황제와 관련이 깊은 숫자인데, 여기 계단은 왜 9가 아니고 7개만 있는 걸까? 정답은 천장에 있다. 황제를 상징하는 숫자 9 중에서 나머지 2는 용 2마리가 여의주를 가지고 희롱하는 모습으로 새겨져 있다. 생동감이 느껴진다. 옥좌 앞에 설치된 기둥 6개도 관람 포인트이다. 하늘로 승천하는 용을 섬세하게 조각한 후에 금을 덧입혀 무척 화려하다. 태화전은 황제 즉위식, 황제의 결혼식, 음력 정월 초하루와 동지 기념식, 출정 전날의 장군 임명식, 과거 급제자 발표, 법령 낭독식 등 중요한 공식 행사를 거행하던 곳이다. 명나라와 청나라 황제 24명이 이곳에서 등극했다.
중화전(中和殿)은 외조의 두 번째 궁전으로, 가로 세로 16m에 맞춰 정방형으로 세웠다. 태화전에 비하면 무척 소박하다. ‘극단을 멀리하고 중도를 따른다.’라는 의미로 중화전이라 이름 붙였다. 이곳은 시대별로 쓰임새가 조금 달랐다. 명나라 황제들은 태화전에서 행사가 열리면 이곳 중화전에서 예복을 갈아입고 휴식을 취했다. 청나라 때 중화전의 역할이 확대되었다. 황제가 개인적으로 대신이나 외국 사신을 만나거나, 사원에서 조상과 신들에게 제사를 지낼 때 낭독할 조서를 작성하거나, 과거의 최종 시험을 이곳에서 치렀다. 또 청나라 황제들은 10년에 한 번 이곳에서 황족 혈통 족보 기재 행사를 거창하게 벌였다.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한 장소이기도 하다. 양무운동으로 근대화를 이룩하려던 광서제의 개혁은 극 보수파의 힘을 모아서 공격한 서태후에 밀려 실패로 끝났다. 1898년 서태후는 정무를 보러 가던 광서제를 이 중화전 앞에서 붙잡아 감금했다. 이로써 그녀의 수렴청정이 다시 재개되었다. 내부에서는 4개 기둥을 주목하자. 피라미드처럼 높은 지붕을 지탱하는 4개 기둥의 위치는 힘을 분산시키는 과학적인 방법으로 고안되었다. 실내보다 외부 지붕에 시선이 끌리는데, 단순하면서도 새가 날개를 펼친 것 같은 곡선미가 우아하다.
보화전(保和殿)은 태화전과 같은 설계로 만들어 져서 쌍둥이처럼 닮았다. 크기는 약간 작은 편으로, 동서 길이가 50m에 달한다. 최초에는 근신전(谨身殿)으로 불렸으나 청나라 때 보화전으로 개명했다. 명나라 때는 황후 책봉이 이뤄졌고, 1789년 청나라 이후부터는 과거시험 마지막 단계인 구두시험을 이곳에서 치렀다.
보화전의 하이라이트는 뒤편에 위치한 ‘운룡대석조(云龙大石雕)’라는 답도다. 걸어 다니는 길을 뜻하는 답도는 황제가 가마를 타고 지나던 곳이다. 비스듬하게 경사진 이 답도의 길이는 16.65m로, 무게 250톤짜리 대리석을 사용해 만들었다. 대리석에 조각된 9 마리의 용이 구름 속에서 용틀임을 하며 당장이라도 승천할 것만 같다. 이 거대한 돌을 50km 떨어진 팡 산에서 쪼개지 않고 2만 명의 인원이 동원되어 28일 동안 통째로 옮겨 왔다는 사실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겨울철 도랑을 깊게 파서 얼음이 얼기를 기다렸다가 빙판에 끌어서 운반했다고 한다. 그 빙판을 만들기 위해서 4m마다 우물을 파고 길바닥에 물을 뿌렸다고 한다. 황제를 상징하는 이 조각에 손을 댔다가 발각된 사람은 처형당했다고 한다.
보화전 뒤쪽으로 건청문 문이다. 건청문(乾清门)은 내정의 정문이다. 청나라 강희제(康熙帝)부터 도광제(道光帝)에 이르기까지, 이곳에 옥좌를 설치해 황제들은 신하들이 아뢰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실질적인 정무를 보는 일이 많았다. 문 앞에는 황금빛으로 도금한 사자상과 화재 진압용 항아리가 늘어서 있다. 건청문 부터는 만주어와 중국어를 함께 병기한 것이 인상적이다. 건청문에서 건청궁까지 멋진 백옥 다리가 이어진다.
건청궁(乾清宫)은 명나라 황제들과 청나라 초기 황제들의 침궁이자 일상생활이 이뤄지던 곳이다. 동서 난각(暖阁)을 따라 27개의 침대가 있었는데, 이는 황제를 암살하려는 자가 침입했을 때 교란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옹정제부터는 침실을 양심전으로 옮기고, 이곳은 고관 신하들과 외국 사신을 맞이하는 접견실로 사용했다. 사망한 황제의 시신을 장례식 때까지 이곳에 안치했다는 것은 건천궁 만의 특별한 기능이다.
내부는 태화전을 축소해 놓은 모습이다. 옥좌 위에 걸린 편액 ‘정대광명(正大光明)’은 순치제의 친필이다. 옹정제는 이곳에 또 한 가지 특별한 기능을 부여했다. 차기 황제가 될 왕자의 이름을 적어서 상자에 밀봉한 후 편액 뒤에 보관토록 했다. 이를 ‘태자밀건법(太子密建法)’이라고 한다. 같은 문서를 하나 더 만들어서 황제는 평생 동안 몸에 지녔다. 황제가 죽으면 두 문서를 대조해서 다음 황제를 선포했다. 이는 황제가 급사했을 때 자손들의 왕위 찬탈을 위한 싸움을 막기 위해서였다. 강희제와 건륭제는 이곳에서 천수연을 거행했다. 1922년 거행된 푸이의 결혼식이 이 본전에서 거행된 마지막 큰 예식이었다
이어지는 교태전(交泰殿)은 외조 중화전을 축소해 놓은 모습으로 황후의 보좌가 있다는 점이 특별하다. 보좌 위로 강희제가 ‘무위(無爲)’라고 쓴 편액이 걸려 있다. 명나라 때는 황제의 정실부인 황후의 침궁으로 사용했고, 청나라 때는 황후가 주최하는 행사들이 이곳에서 개최되었다. 천정의 여의주 밑에 용과 봉황이 새겨져 있는 것에 주목하자. 봉황은 황후를 상징하며 중국 신화에서 용과 봉황의 결합은 천하무적을 의미한다. 건륭제는 청나라의 왕조가 25대까지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곳에 25개의 옥새를 보관했다. 이러한 바람과 달리 청나라는 12대 황제를 끝으로 멸망했다.
곤녕궁(坤宁宫)은 명나라와 청나라 초기 황후가 거주했던 궁전이다. 만주족이 건설한 청나라는 곤녕궁을 만주족의 풍습에 따라 개조하고, 동 · 서로 나누어 서쪽은 성소로 사용했다. 실내에 큰 솥을 설치하고 육류 제물을 준비해 하루도 빠짐없이 신들에게 봉헌했다. 동쪽에 있는 동난각은 황제가 혼례 행사를 치른 후 첫날밤을 보내던 곳이다. 강희, 동치, 광서, 선통 4명의 황제가 태화전에서 혼례를 치르고 이곳에서 첫날밤을 보냈다.
양심전(养心殿)은 황제의 침전이다. 명나라 때 지어진 이래로 1722년 청나라 때 대대적인 수리가 이뤄졌다. 역대 황제들은 건청궁에서 거주해 왔는데, 옹정제가 이곳을 침전으로 삼았다. 옹정제부터 선통제에 이르기까지 8명의 황제가 이곳에서 정무를 보고 일상 생활을 영위했다. 조정에 특별한 일이 없으면 황제들은 늘 이곳에 있었다. 어쩌면 자금성에서 태화전 다음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곳이라 할 수 있다. 나라의 대소사가 여기에서 많이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1799년 건륭제는 이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서태후는 양심전의 동쪽에 있는 동난각에서 수렴청정으로 제국을 통치했다. 실내 좌측에 금으로 대나무와 학을 주조해 만든 액자가 눈길을 끈다.
저수궁 · 장춘궁(储秀宫 · 长春宫)은 6개 궁전 중 서태후의 취향이 많이 반영된 저수궁(储秀宫)과 장춘궁(长春宫)이 유명하다. 서태후는 17세 때 함풍제의 후궁 자격으로 자금성에 입성했다. 저수궁은 서태후가 훗날 동치제가 된 아들을 배고 5~6년간 살았던 거처다. 이곳을 자신의 행운의 장소라고 여긴 서태후는 이곳에서 50세 탄생연을 성대하게 열고, 10년 가까이 기거했다. 장춘궁은 함풍제가 죽고 난 후 서태후가 머물던 곳이다. 중국을 대표하는 고대 소설 <홍루몽(红楼梦)>이 벽화로 그려져 있어 눈길을 끈다. 황실 관례에 따르면 섬기던 황제가 죽으면 황태후는 서육궁을 떠나 외궁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그러나 서태후는 그러지 않았다. 경극을 좋아했던 서태후의 취향을 반영해서 장춘궁 한쪽을 무대로 꾸몄다. 명절과 축제 때 이곳에서 공연이 열렸다.
봉선전(奉先殿)은 청대 황실의 조상신을 모시던 사당으로 자금성 내정의 동쪽에 위치했다. 지금은 종표관(钟表馆)으로 명칭을 바꾸어 청대의 호화 자명종을 전시하고 있다. 16세기경 서양의 선교사들이 천문학을 들여올 때 시계도 함께 가져왔다. 황실에서 선물 받은 것과 황실에서 직접 제작한 100여 개의 시계가 화려한 자태를 뽐낸다. 보석이 잔뜩 박힌 시계들이 탐날 정도로 아름답다.
구룡벽(九龙壁)은 구룡벽과 창음각을 보기 위해서는 진보관(珍宝馆)을 거쳐야 한다. 전시관인 진보관을 지나면 몇 개의 궁전이 이어진다. 구룡벽은 청나라 건륭제 때 세운 것으로 높이 6m, 길이 31m에 달한다. 벽면에 9마리의 용이 아름다운 유리기와로 모자이크 되어 있다. 북해 공원의 구룡벽, 산시성 다퉁의 구룡벽과 함께 중국 3대 구룡벽으로 꼽힌다. 동육궁의 동쪽에 위치해 있다. 굳이 따로 입장료를 내고 볼 만큼 멋지진 않다.
창음각(畅音阁)은 대규모 궁중 공연장으로 3층으로 되어 있다. 청더 피서산장에 있는 청음각(淸音閣), 이화원의 덕화원대희루(德和園大戱樓)와 함께 청나라 3대 공연장으로 꼽힌다. 기세가 웅장하다. 맞은편 열시루(阅是楼) 중앙에는 황제가 앉아서 공연을 감상했던 노란색 보좌가 있다. 역시 동육궁의 동쪽에 있다.
어화원(御花园)은 자금성 안에서 가장 낭만적인 장소로, 황실 정원이었다. 지금도 오래된 수목과 기암괴석이 수려하다. 고궁 중심축을 기준으로 어화원은 내정의 뒤편, 최북단에 위치했다. 과거에는 외조 태화문부터 내정의 후삼궁 주변까지 나무가 없었다. 이는 고대 건축 기법에 따라 궁전을 근엄하게 보이게 하고, 방어를 용이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황제를 암살하려는 자가 침입해도 숨을 곳을 없게 한 것이다. 사실상 나무를 심는다 해도 자랄 수 없는 구조였다. 바닥에 벽돌을 깔았기 때문인데, 그 두께가 자그마치 벽돌 40장이 포개진 것과 같았다고 한다. 지금은 자금성 곳곳에 나무가 자라고 있다.
어화원은 사가 원림의 조성기법에 황실만의 위풍당당한 기품을 더했다. 하늘에 제를 올렸던 흠안전(钦安殿), 가산으로 조성한 퇴수산(堆绣山) 정상에는 궁궐 내외의 경치를 조망할 수 있도록 세운 어경정(御景殿)이 눈에 띈다. 사철 푸른 소나무와 측백나무, 가을 낙엽이 질 때 예쁜 회화나무, 느릅나무 등이 궁궐에 고풍스런 정취를 더한다. 그중 뿌리가 서로 다른 두 나무가 허공에서 만나 하나로 합쳐진 연리지가 기념사진 촬영의 명소다. 연리지는 ‘하나 되는 사랑, 금슬 좋은 부부’를 상징한다. 어화원 주변에 매점들이 보인다. 연못 위에 있는 정자에서는 식사와 팟죽을 파는 식당으로 운영되고 있다. 방문객의 입맛을 씁쓸하게 한다.
신무문(神武门)은 오문을 통해 들어온 여행자들이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으로 고궁 여행을 마친다. 명나라 때는 현무문(玄武门)이라고 불렀는데 청나라 강희제 때 재건하면서 개명하였다. 거꾸로 신무문을 통해서도 고궁을 관람할 수 있지만, 건축물을 정면에서 바라보는 방향인 오문을 통해 보길 권장한다. 나가기 전 근처에서 준비해 간 김밥을 재빨리 먹었다. 김군이 담배를 피웠다고 식당 아줌마가 잔소리를 한다. 신무문을 나왔다.
복잡한 인파속에서 잠시 숨을 돌린 후 택시를 타고 다음 목적지인 천단을 향해 달렸다. 5km 정도를 간다. 택시비는 25원이다. 소형문 앞에서 표를 끊었다. 모두 중국인 표를 끊어 무심히 문을 들어서니 표 받는 아가씨가 중국인이냐고 묻는다. 대답을 못하고 있자 호구(주민등록증)를 제시하라고 했다. 우리는 다시 10원 씩 더 주고 표를 끊어 들어갔다. 다른데서는 선그라스, 카메라, 캠코더 등 여행객 표시를 숨기고 중국인 표를 끊어서 들어갔는데, 여기서는 무심코 그냥 들어가다가 걸린 것이다. 약간 부끄럽고 한편으로는 화가났다. 외국인 차별 정책이 맘에 들지 않았다.
천단은 1420년 자금성과 동시에 완공된 제단으로,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낸 곳이다. 중국에서는 하늘의 명을 받아 나라를 다스린다고 하여 황제를 ‘하늘의 아들(天子)’이라고 했다. 황제는 우주와 소통을 하기 위해 자금성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각각 해(일단, 日坛), 달(월단, 日坛), 하늘(천단, 天坛), 땅(지단, 地坛)의 신에게 제를 올리는 제단을 설치했다. 특히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는 일은 오직 황제만이 가진 권리이자 의무였다. 국상 기간에 조상에 대한 제사는 중지되어도 하늘과 땅에 제를 올리는 의식만은 중단하지 않았다.
여러 제사 중에서도 으뜸은 하늘에 올리는 제천의식이다. 그 중요성 때문에 천단의 부지 면적은 270만㎡, 자금성 규모의 4배에 달한다. 천단에는 설계부터 고대 중국의 우주관이 적극 반영되어 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라는 관념에 따라 천단의 주요 건축물은 원형을 띤다. 천단을 둘러싼 담장에도 그 뜻이 담겨 있다. 북쪽은 둥글고, 남쪽은 네모지다. 음양 사상도 반영되었다. 하늘은 양기를 뜻해서 고궁의 남쪽에 천단을 세웠고, 땅은 음기를 뜻하기 때문에 고궁의 북쪽에 지단이 위치한다. 이러한 음양 사상은 천단의 제단이며 난간, 계단에도 반영되었다.
동서남북에 위치한 제단 중 천단만이 유일하게 외성 안쪽에 있다. 본래 4곳 모두 도성 바깥에 설치했지만, 명나라 중엽 때 남쪽 외성을 확충하면서 천단이 안쪽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둥근 모양의 고대 건축물이 백미지만, 공원에 줄지어 늘어선 측백나무들도 중후한 기품을 더한다. 음력 정월에 풍년을 빌고, 하지에는 기우제를 지내며, 동지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황제가 천단으로 이동할 때 백성은 감히 황제를 쳐다보지 못했고, 이를 거역하는 자는 죽음이었다. 천단은 북쪽의 기곡단과 남쪽의 원구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국 5대 명승지 중 하나로 연일 국내외 관광객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이기도 하다. 1998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우리는 잘 다듬어진 돌판 길을 따라 사각형 모양의 담을 들어선다. 환구단(圜丘坛)이다. 매년 음력 동짓날에 맞춰 황제가 제를 올리던 장소이다. 3층짜리 원형 단으로 각 층마다 흰 대리석 난간이 둘러쳐져 있다. 일단 기단 맨 위로 올라가자. 정중앙에 볼록 솟은 천심석(天心石)이 황제가 서서 제천 의식을 거행하던 장소다. 여행자들이 이 천심석에 올라 고함치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데, 이는 공명에 의한 메아리를 시험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황제가 큰 소리로 제문을 읽으면 하늘이 황제의 뜻을 받아들여서 메아리가 들린다고 여겼다. 현재 천심석은 행운을 상징하고 있어, 중국인들은 꼭 올라간다.
환구단에 숨은 뜻을 찾아내는 것도 즐겁다. 곳곳에 중국에서 가장 완벽한 숫자를 상징하는 ‘9’가 숨어 있다. 천심석을 기준으로 사방에 깔린 부채꼴 모양의 돌을 주목하자. 첫 겹에는 9개의 돌이, 두 번째 겹은 18개, 세 번째 겹은 27개, 돌의 개수가 9의 배수인 것을 볼 수 있다. 마지막 아홉 번째에는 81개로 완성된다. 완벽한 숫자 9가 9×9로 만났으니 81은 ‘이상의 숫자’라 할만하다. 내려오는 계단도 각 단마다 9개씩 설치했다. 전설에 의하면 상제는 구중천에 살고 있어 하늘의 지고함을 나타내고자 했다. 또 중국은 홀수를 양수, 짝수를 음수로 보았다. 즉 하늘은 양이고, 당은 음이다. 천단은 하늘에 제사하는 곳이므로 그것을 건축하는데 양수만을 사용해야 했단다. 게다가 9는 극양수여서 최고의 숫자로 인식되었다.
원형으로 둘러친 난간에도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천심석을 오르내리는 계단은 동서남북 4곳에 설치되어, 층마다 4개의 난간으로 나뉜다. 맨 위 난간의 각 면은 9개의 난간판으로 이뤄졌다. 즉, 첫번째 단에 사용된 난간판은 9×4면=36개, 2층에 사용된 난간판은 각 면마다 18개로 18×4면=72개, 맨 하단에는 27개씩 27×4면=108개로 이뤄졌다. 모두 9의 배수인 것이다. 9는 고대 중국에서 가장 완벽한 숫자이자 황제를 상징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궁궐을 지을때도 9또는 9의 배수를 사용했다. 고궁의 우문에 박힌 둥근 징도 9의 배수다.
환구단을 내려와 황궁우로 갔다. 황궁우(皇穹宇)는 천제(天帝)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자금성에서 2,000여 명의 수행원들과 함께 천단에 도착한 황제는 먼저 이곳에 들러 조상에게 기도를 올리고 향을 피웠다. 명나라 때인 1530년에 처음 지어졌고, 지금의 모습은 1752년 청나라 건륭제가 재건한 것이다. 기단 위에 원형으로 세운 건물은 지붕이 아름답다. 고깔모자를 쓴 것처럼 생겼는데 푸른색 유리기와가 햇볕에 반짝인다.
여행자들은 황궁우를 둥글게 감싸고 있는 벽에도 관심이 많다. 동행이 있다면 두 사람이 거리를 약간 두고 떨어진 지점에서 벽에 바짝 붙어서 이야기해 보자. 어릴 적 종이컵과 실로 연결해 만들어 놀았던 전화기 놀이가 재현된다. 벽면의 연속적인 굴절로 인해 상대방의 음성이 들리는 것이다. 처음 건축할 당시 이 효과를 노린 것은 아니지만, 이벽을 가리켜 회음벽(回音壁)이라고 한다. 관광객이 너무 많을 땐 왁자지껄한 소리에 묻혀 회음벽이 제 구실을 못할 수 있다.
황궁우 아래 백옥의 기단에서 정중앙인 원심(圓心)을 찾자. 바닥에 3음석(三音石)이라고 쓰인 돌이 있다. 3음석에 서서 박수를 세 번 치면 메아리가 되어 3번 울린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사람이 하도 많아서 실제로 메아리가 들리지는 않는다. 황궁우 좌우에는 동배전(东配殿)과 서배전(西配殿)이 마주 보고 있다. 동배전에는 북극성을 비롯한 태양계의 별신들이, 서배전에는 비, 바람, 구름, 천둥을 신격화한 자연신이 모셔져 있다.
황궁우를 돌아나와 용이 몇 마리 엉켜 하늘을 오르는 듯한 나무 껍질 모양을 신기한 듯 쳐다보며 기년전을 향해 걸었다. 기년전(祈年殿)은 매년 음력 1월 15일 황제가 한 해의 풍년을 기원하며 제를 올리던 곳이다. 천단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상징적인 건축물이다. 하늘과 소통하는 제단에 걸맞게 곳곳에 하늘을 상징하는 요소들이 있다. ‘하늘은 둥글다’라는 사상에 입각해 건물을 원형으로 지었다. 3단으로 올린 원추형 지붕이 완벽한 비례를 이뤄 우아한 자태를 뽐낸다. 지붕 역시 하늘을 상징하는 ‘청색’ 유리 기와로 덮여 있다. 대리석 기단을 포함해 높이가 38m에 달한다.
풍년을 기원하는 곳인 만큼 농사와 관련된 숫자가 기년전 내부에 상징적으로 나타난다. 총 28개의 기둥이 3겹으로 나뉘어 원형의 대전을 떠받치고 있다. 가장 안쪽 건물 중앙의 4개 기둥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을 상징한다. 직경이 1.2m, 높이 19.2mdp 둘레의 길이는 보통 두 사람의 두 아름을 넘는다. 하나의 통나무로 대단하다. 그 바깥쪽 12개 기둥은 1년의 12달을, 가장 바깥쪽 12개 기둥은 하루를 12개의 시간으로 나눈 십이지(十二支)를 뜻한다. 바깥 두 쪽의 것을 합친 24개의 기둥은 다시 1년의 24절기를 상징한다. 그리고 이 모두를 합친 숫자 28은 하늘의 별자리 28수를 상징한다. 기년전을 통해서 소우주를 표현한 것이다. 천장에는 용이 그려져 있고 이 목재는 운남성에서 운반해 온 것이란다. 처음 외부의 3층 기와는 1층은 남색, 2층은 황색, 3층은 녹색으로 하늘과 황제와 백성을 상징했다고 한다. 나중 1752년 청나라 건륭황제때 모두 남색으로 칠했단다.
기년전 동쪽에 72칸의 장랑이 있었다. 동쪽에 있는 타생정(제물이 될 짐승을 잡는 곳)을 구경하고 일행을 만나기 위해 기년전으로 다시 왔다. 한국인 단체 관광객 30 여명이 보인다. 젊은이로부터 노인들까지 다양한데, 광장에서 큰 소리로 인원수를 확인하고 있다. ‘앉어 번호’를 외치며 줄을 서는 모습이 너무 재미있었다. 기년전을 나와 층계를 내려간다. 잘 가꾸어진 공원길을 따라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벤치에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앉아 여가를 즐기고 있다. 한 노인은 십자매 비슷한 새 한 마리를 기르고 있었다. 새장도 없이 가지 위에 모이통과 함께 앉아있는데 날아가지도 않는다. 왼쪽 길로 접어드니 재궁이다.
재궁(斋宫)은 ‘하늘의 아들’ 황제가 제를 올리기 전날까지 3일 동안 목욕재계하고 몸과 마음을 정결히 했던 곳이다.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에는 육식과 술을 금하고, 음악도 금하며 상을 당해도 주문하지 않으며, 죄인 재판도 하지 않는 등 금욕적인 생활을 했다. 푸른색 기와가 돋보이는데, 이는 황제가 겸손하게 하늘을 대한다는 것을 상징한다. 황제는 낮에 재궁의 무량전(无梁殿)에서 금욕을 수행하며 머물렀다. 그러나 궁중의 사치한 생활에 젖어 하루도 견디기 어려웠단다. 결국 청나라 옹정황제는 새로운 법으로 재궁을 궁궐 안에 지어 4,5시간 전에 천단의 재국에 와서 흉내만 냈단다. 이후로 잠시 머무는 휴식장소로 변했단다. 신락서(神乐署)는 제천 의식을 거행할 때 음악 연주를 담당했던 곳인데, 지금은 궁중 악기가 전시되어 있다. 종치는 곳에 올라 한 번 씩 종을 친다. 재궁은 천단 공원 입장권과 별도로 소정의 입장료를 내야 관람할 수 있다. 문 닫는 시간이 되었다고 공안이 모두를 몰아낸다. 인파에 휩쓸려 우리도 나왔다.
우리는 서천문을 통해 천단 공원을 벗어났다. 얼음물을 사서 마셨다. 저녁 먹을 곳을 찾았다. 북경 오리 고기를 먹어보기로 했다. 물가가 싸고 화폐가치를 비교해 보니 돈 쓰는 맛도 있었다. 2500명을 수용하는 세계에서 가장 큰 북경 오리 구이 식당을 찾았다. 흔히 페킹 덕(Peking Duck)이라고 불리우는 이 오리 요리는 중국에서는 베이징 카오야(北京烤鸭)라고 부른다. 해석해보면 ‘불에 구운 북경 오리’다. 원대 때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베이징의 대표적인 음식이다. 남경 오리 요리항목에서 알 수 있듯, 중국의 오리 요리는 남북조 시대에 남경에서 먼저 시작되었으나, 이후 왕조가 바뀌면서 북경이 수도가 되고, 요리사들이 북경으로 오면서부터는 명, 청대의 궁중요리 형태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껍데기는 구워져 카라멜화되어 바삭바삭하고 기름맛이 고소한 편이다. 이를 보통 통째로 내놓거나 썰어서 내 주는데, 일반적으로는 얇게 썰어서 첨면장 소스를 찍어 오이채를 비롯한 채소와 함께 '바오빙'이라는 밀전병에 싸서 먹는다. 한국의 보쌈과 비슷한 개념이다. 북경오리 구이는 다양한 음식과 함께 딸려온다. 보통 오리구이와 함께 소고기와 야채를 후추 등의 조미료와 함께 넣어 볶은 흑숙우류(黑椒物流), 궁보계정에 넣는 궁보 소스에 새우를 버무린 궁보하(宫保虾), 마늘에 콩깍지를 넣고 볶은 산룡화두(蒜龙和豆), 사천성의 야채 피클이라고 볼 수 있는 사천보채(四川泡菜) 등의 요리가 나온다.
북경 오리 구이 전문점 중 가장 유명한 곳은 1864년 개점한 베이징의 전취덕(全聚德 취안쥐더)이다. 워낙 유명한지라 중국어 교재에도 고유명사로 등장할 정도이며, 현대에는 수 십 개의 지점을 가지고 있는 일종의 프랜차이즈화가 진행된 상태이다. 우리는 평화거리에 있는 북경오리 구이 식당(北京全聚德烤鷗店)을 찾았다. 외부는 그렇게 화려하지 않았으나 실내는 깔끔했다. 방문했던 세계 유명 인사들의 사진이 걸려있다. 윌슨 대통령, 일본 수상 등 눈에 익은 인물이 많이 보였다. 만약 가이드 김양이 없었다면 말을 못해서 줌문도 못했을 것 같다. 기회를 잘 잡은 듯 했다. 3명 정도의 아가씨가 우리를 아내해서 자리를 잡았고 서빙을 했다. 오리 똥을 빼놓고 모든 부위가 메뉴 표에 있었다. 오리 발바닥은 물론이고 오리 눈 알 요리도 있다. 눈알은 15원, 심장 40원, 우리는 오리 한 마리(120원)와 오리장 4개 (8원), 간과 똥집(30원), 오리 야채(45원 오리, 버섯, 죽순과 오이)를 주문했다. 똥집과 심장은 그냥 간장에 먹고, 오리 고기는 채소와 함께 '바오빙'이라는 밀전병에 싸서 먹는다. 별 맛은 느기지 못했다. 오리 야채가 탕수육 같이 입맛에 맞았다. 오리 육수에 식사를 끝내니 먹는 시간과 기다린 시간이 비슷했다. 4명의 총 식사 경비는 250원 우리 돈으로 25,000원 정도가 들었다.
기운을 약간 챙겨서 번화가인 백화점 거리로 나섰다.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네온 불빛이 들어오고 인파도 많고 복잡하다. 북경 왕푸징 거리다. 우리와 비슷하나 자전거 주차장이 인상적이다. 엄청난 자전거가 도로변에 정렬되어있다.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가 양고기 고치구이를 하나씩 먹어보고 우리는 택시를 탔다. 구석 길을 요리조리 달려 사랑방으로 왔다. 택시비 24원이다. 숙소는 청화원 호텔이다. 사랑방과 걸어서 15분 거리다. 짐을 대충 풀었다. 사랑방에 모여 김 사장과 사업과 이곳에서의 살아가는 것에 대해 얘기를 나눈다. 취침은 새벽 한 시다. 내일은 송 자매와 함께 만리장성을 향하는 관광버스를 아침 7시 30분에 타기로 약속 했다. 각 20원이고 5코스를 방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