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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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디자인 , 産業- , industrial design]
요약
산업에 의해 대량생산되는 공산품(工産品)의 형태적인 여러 특질을 결정하기 위한 조형활동(造形活動).
본문
공업디자인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제품을 만드는 쪽과 사용하는 쪽에서 서로 불가분(不可分)의 관계를 맺고 있는 현대 산업사회의 구조로서, 산업에 의해 형성되는 인간환경의 모든 국면을 포괄하는 종합개념으로 확대되어 가고 있다. 또한, 산업디자인은
인간의 정신적인 욕망과 물질적인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한 환경을 조성하는 산업제품과 제품 시스템을 발전시키는 창조활동이다. 그러므로 산업디자인은 사회학 ·최신기술 ·경제학 ·환경공학 ·미학 ·철학 ·심리학 및 예술과 밀접하게 연관된 종합학문으로서 인접학문과의 유기적인 협조에 의한 활동으로 포괄적인 연구를 바탕으로
하는 전문분야이다.
1. 발생과 발전
산업디자인은 원래 ‘모던 무브먼트(modern movement)’로 일컬어지는 건축 ·공예의 근대화 과정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으며, 구체적으로는 19세기 중엽 영국의
W.모리스가 주창한 ‘미술공예운동(Arts and Crafts Movement)’에 바탕을 둔다.
19세기 초의 공업기술로서는 기계에 의해 양산(量産)되는 물건일지라도 조형적으로는 여전히 수공예시대의 제품을 모방한 것들이 많았다. 심지어는 고대 이집트의 조형에서 로코코 양식에 걸치는 오래된 역사적 의장(意匠)이나 동양의 의장 등이 건축이나 공예에서 많이 이용되는 가운데 조형 양식에 혼란을 빚고 있었다.
모리스는 이와 같은 경향을 타파하고 올바른 수공예의 전통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창하였다. 그는 사물을 만드는 것에서 회열을 느끼던 중세 장인(匠人)들의 세계를 칭송하고 고딕 양식을 사랑하였으며, 예술과 공작의 결합 ·일치를 제창하는 미술공예운동을 일으켰다.
이 운동은 수공 제작에 중점을 두고 기계 생산을 배제한 까닭에 결과적으로 시대역행적인 모순을 빚기도 하였으나, 올바른 재료와 공작으로 생활에 도움을 주는 좋은 품질의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근대적 조형이념을 보급한 점에서는 저속한 취미에 휩쓸려 있던 당시의 공업생산에 적지 않은 반성의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한편, 미국에서는 19세기 후반, 공업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넓은 국토의 개발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리고 노동력의 부족 등으로 사회생활 전반에 걸쳐 기술적인 합리화 내지 능률화의 문제가 절실해짐과 아울러 급격한 발달을 이룩하였다. 유럽과 같이 문화와 조형에 뿌리깊은 전통이 없는 이 나라에서는 생활의 실제적인 요구에 부응하여 기능적인 제품을 쉽사리 생산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탈것이나 농기구 또는 가구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아무런 미적(美的) 배려를 하지 않은 기능주의적인 조형이
가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미국의 제품은 공간과 시간의 변화, 근대생활의 자각 등으로 움트기 시작한 유럽의 전통적인 조형감각에 큰 영향을 미칠 수는 없었다. 그런 중에서도 미래파(未來派)의 화가들은 1910년에 이미 시각(視覺)으로부터의 해방, 대상(對象)에 대한
정적 관조(靜的觀照)의 지양, 동적 감각(動的感覺)의 표출 등을 부르짖고 나섰으며,
독일의 P.베렌스 등 근대건축가들은 명쾌 ·솔직하고 기능적인 생활환경의 조형에 새로운 길을 열었다. 그들은 모리스가 배제한 공업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함으로써 모리스가 지향한 목표를 현대적인 방법으로 달성하고자 하였다.
여기에서 미술과 산업은 서로 영향을 끼치면서 생활조형의 신기원을 이룩하려는 독일의 ‘공작연맹운동(Werkbundbewegung)’을 낳았고,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건축가 W.그로피우스가 주재하는 연구 ·교육 센터인 바우하우스(1919∼1932)로 발전하였다.
산업디자인의 이념은 이와 같은 산업 근대화운동에서 서서히 형성되어 베렌스의 베를린 전기회사에서의 활동이나, 그로피우스의 기성 조립식주택(prefabrication house)
등에 의해서 처음으로 구체화되었다. 독일공작연맹이나 바우하우스는 디자인 이념의
육성에 힘을 기울였으나, 실제로 산업디자인이 산업계의 요청으로 발달하게 된 것은
공업국인 미국에서였다.
미국에서는 1910년대에 이미 콘베이어 시스템에 의한 자동적인 연속생산방식이 완성단계에 접어들어 포드 자동차는 그 대표적인 실례를 이룩하였다. 이 생산방식은 처음부터 대량수요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포드는 공장설비를 가능한 한 기계화하면서 생산과 수요를 하나의 구성단위로 생각하여 세계적인 조직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조직에 의해 생산과 수요가 연결됨에 따라 수요자의 희망을 제품에 보다 더 강하게 반영시킬 필요가 생기게 되었다. 지금까지 거의 기술자 손에 맡겨져왔던 공업제품에 대해 새로운 색채나 형태, 기능과 쓰임새와 같은 인간적인 요소를 중시하는 경향이 나타나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특수한 기술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 기술은 공업제품의 재료 ·구조 ·가공 ·기능 ·경제성 ·심미성(審美性) ·시장성 등을
감안하면서 그 조건들을 통합, 조정하여 상품에 반영, 조형하는 일이었다. 이와 같은
활동을 산업디자인이라 일컫게 되었으며, 그것은 1919년 N.B.게디스에 의해서 처음으로 확립되었으며, 그는 미국의 산업디자인의 선구자이다.
2. 특성
산업디자이너는 용도 → 재료 → 가공 → 제품 → 시장이라는 공업생산 과정 전반에
걸쳐 기업가 ·기술자 ·유통관계자와 협력하면서 제품의 기획 및 설계에 임해야 하기 때문에 조형적인 재능은 물론, 생산이나 시장에 관한 다방면의 지식과 경험을 필요로 한다. 산업디자인(ID)은 일종의 협동작업이므로 디자이너의 소임은 종합적인 관점을 갖는 연락조정자라고 말할 수 있다.
유럽에서는 먼저 건축가들이 이와 같은 소임을 맡게 되었으나, 건축물의 계획을 주임무로 하는 건축가가 반드시 산업디자인의 적임자일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이에 대신할 만한 마땅한 기술자도 당시에는 없었던 관계로 영국에서는 한동안 ‘행방불명의 기술자(missing technician)’라고도 불렸다. 애당초 이러한 직능활동(職能活動)에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어 있던 미국에서도 1929∼1933년의 경제공황은 산업계 자체에 산업디자인의 필요성을 통감하게 하였다. 게디스, 드레이퓨즈, 로이, 반도렌과 같이 직업인으로서의 기초를 쌓은 사람들은 모두 이 공황기 전후에 등장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은 산업디자인의 공백기간이었으나, 전시중에 발달한 인간공학(人間工學)은 종전 후 인간성 회복의 사상과 더불어 디자인의 방법에 큰 영향을 끼쳤다. 기기(機器)의 인간에 대한 기능을 과학적으로 검토하여 지금까지 습관적 ·경험적으로
처리하던 대인관계(對人關係)를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치수나 형태 등을 인간의 생리와 심리에 잘 조화되도록 계획하여 조형하게 되었다. 또한 디자이너의 개인적인 취향에 빠지지 않도록 통계학과 정보이론을 도입, 폭넓은 일반대중의 생활에 알맞도록 계획하는 것이 최근의 산업디자인의 특색이다.
3. 한국
1945년의 8·15광복과 더불어 움트기 시작한 한국의 디자인 교육은 기업이 생산활동의 기반을 닦아 질서를 잡을 겨를도 없이 6·25전쟁의 발발로 중단되었으며, 휴전과
더불어 재정비의 시기에 접어들었다. 1957년 가을에 USOM의 후원으로 노만 디한이
설립한 '한국공예시범소'는 한국의 실정에 맞는 좋은 디자인 개발, 국내외 시장 개척,
산업체의 디자인 지도, 일반인에 대한 디자인 계몽, 기능공 훈련, 디자인 교육 후원 등
여러 사업을 전개하면서 1960년까지 많은 활동을 벌였다.
'공예시범소'라는 명칭으로도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당시는 산업디자인이라는 어휘
개념조차도 제대로 인식이 안 된 시기였다. 그러나 실제적인 사업은 산업디자인의 영역과 양산공예(量産工藝)에 치중한 것이었으며, 특히 디자인 교육을 지원하고자 전문
디자이너들을 미국에 파견, 수학하게 함으로써 한국디자인 교육의 새로운 시대를 열게 한 것은 큰 공적으로 평가된다.
1960년대는 한국의 산업디자인 발전에 여러 특기할 사항들이 점철된 시기이다. 또한
교육계는 응용미술시대에서 디자인의 본령(本領)을 찾는 전문교육시대로 전환, 각 대학에서 산업디자인 교육이 실현되기 시작한 때이며, 산업계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수출정책에 힘입어 활발한 생산활동을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한국디자인센터(현재 산업디자인포장개발원)가 1966년에 설립되고, 이듬해에는 제1회
대한민국상공전람회(현재 대한민국 산업디자인 전람회)가 개최되었으며, 산업디자인이라는 명칭이 공식으로 쓰이게 된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 디자인전(展)이 대내적으로는 디자이너의 의욕을 고취시키는 한편, 저변확대 및 등용문으로서의 구실을 하고,
대외적으로는 디자인 계몽, 기업이 디자인에 대해 새로이 인식하게 함으로써 제품의
질적인 향상과 수출에 크게 이바지했다.
1970년대는 한국 산업디자인계(界)가 비약적으로 성장한 시기였다. 산업계는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이후 중화학공업 분야의 육성과 수출증대를 위한 기업의 확충 등
눈부신 도약상을 보여준 시기이며, 기술인력의 양성, 해외 건설 진출 등으로 세계 속에 한국을 부각한 고도성장의 시기였다. 1972년 한국 인더스트리얼 디자이너 협회(KSID)와 한국 디자이너 협의회(KDC)가 결성되어 한국 산업미술가 협회와 더불어 디자인 활동을 조직적으로 시작하였으며, 회원전과 공모전 등을 통하여 디자이너 상호간의 교류와 협동, 자질향상, 계몽활동 및 산학협동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1979년에는 한국 디자인 학회와 한국 현대디자인 학회가 발족하여 디자인의 학술적 개발과 국제학술 교류 및 연구활동이 본격화하였다. 1970년대까지를 한국 산업디자인 발전의
과도기적 육성기간으로 본다면, 1980년대는 고도화된 산업사회로서의 2000년대를 바라보는 도약의 시대였다.
산업디자인의 궁극적 목표는 맹목적인 과학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환경과의 조화를 유지하는 테두리에서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며, 생활환경을 순화시키는
데 있음을 인식해야 할 시점에 도달하였다. 일본은 1989년을 '디자인의 해'로, 영국은
1982년 이후 수상의 '산업디자인진흥회의' 주재, 타이완은 1989년 '디자인의 세계화
선언', 싱가포르는 1988년 '디자인 지향국가'로 선언하는 등 여러 나라들은 산업디자인의 중요성을 일찍이 인식하여 국책으로 지원하였다. 반면 한국은 산업디자인 활용의 중요성을 심각하게 인식하여 1994년부터 매년 5월 2일을 '디자인의 날'로 선포하였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