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주체의식〉과 일본의 〈대상의식〉
한류드라마의 팬인 일본의 필자의 어머니가 2번째로 말한 것은 “한국남자들은 남자답다”라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남성원리사회는 향상지향이며, 경쟁사회를 이루고, 선악을 엄격히 구별하기 때문에 대립도 많고, 큰 것을 좋아함과 동시에 인간관계 속에서는 자기가 동작 주체(subject), 주는 편, 거느려 가는 편이라는 〈주체의식〉을 갖기 쉽다.
한편, 여성원리사회는 평등사회고, 화목지향, 싸움을 피하기 위해 선악을 애매하게 하고, 작은 것을 추구함과 동시에 인간관계 속에서는 자기가 동작 대상(object), 받는 편으로 반응을 잘해야 되고, 따라가는 편이라는 〈대상(객체)의식〉을 갖기 쉽다.
한국사람, 일본사람이 일반적으로 하는 말을 비교해 보면, 한국사람의 ‘나’는 기본적으로 동작이나 작용의 ‘주체’이며 일본사람의 ‘나’는 기본적으로 외부로부터 받는 동작이나 작용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다.
즉, 여기에 있어서의 양국 문화의 두 번째의 잣대의 차이는, 이른바 이 ‘주체격위(主體格位)’, ‘대상격위(對象格位)’이라고 하는 격위(格位)의식의 차이이다.
식사를 하기 전의 인사는 일본에서는 “이타다키마스(받겠습니다)”이다. 어디까지나 동작의 대상의 입장에서 요리를 해준 사람의 접대를 높이면서 그것을 받들겠다는 의미의 겸사말(겸양어)이다. 게다가 일본에서는 음식을 만든 주인 자신도 대상의 입장에서 똑같이 “이타다키마스”라고 하고 먹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막연한 생명 전체, 자연계 전체를 나에게 음식을 주고 있는 주체로서 상정한 말이라 할 수 있다.
한편 한국사람은 “잘 먹겠습니다”라고 한다. 어디까지나 자기가 동작의 주체이며 말 그대로 “내가 먹는다”는 뜻이다.
식사 후에 일본사람은 “고치소오사마 데시타”라고 한다. 역시 음식에 의하여 대단한 은혜를 받았다는 의미다. 한국사람은 “잘 먹었습니다”라고 한다. 어디까지나 “내가 먹었다”는 주체적인 선언이다.
또, 필자가 언제나 재미있게 느끼는 것은 지하철 같은 데에서 노인이나 부인이 좌석을 양보 받게 될 때의 한국인의 말이다.
한국에서는 양보하는 사람이 “앉으세요”라고 하면 양보 받는 사람도 “아니오, 앉으세요!”라고 하면서 앉는다. 양보하는 편도 양보 받는 편도 서로가 상대에 대해서는 〈주체〉의 입장인 것이다.
일본사람이라면 양보 받는 편은 매우 죄송스러운 표정으로 “감사합니다” 아니면 “죄송합니다”라고 하는 것이 보통이다.
◈“노래시켜 주심을 받들다”?
상대의 언어를 배우려는 한일 양국의 국민들이 서로 어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격위(格位)의식’의 차이이다.
기본적으로는 한국말과 일본말은 어휘도 문법도 비슷해 서로에게 세계에서 가장 공부하기 쉬운 외국어인 것은 틀림없다. 이미 이웃나라끼리 서로의 말을 배우고 있는 인구는 상당수가 되고 앞으로도 그것은 늘어날 뿐일 것이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조금 고급이 되면 서로 막히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앞에서 말한 경어의 차이 문제, 그리고 또 하나가 이 ‘격위의식’의 차이 문제이다.
일본사람은 자신을 ‘대상격위’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자기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동사가 언제나 수동태가 된다.
한국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내 수첩을 봤다”라고 할 때에 일본사람은 ‘나’를 동작 대상의 자리에 놓고 ‘미루(보다)’의 수동태를 쓰고 “(내가) 수첩을 미라레타 (봄을 당했다)”라고 한다. ‘그 사람’이 본 것은 ‘내 수첩’인데 동사를 수동태로 함으로 말미암아 그것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나의 입장까지 표현된다.
똑같이 “사람들이 웃었다”라고 할 때에는, 일본인은 ‘와라우(웃다)’의 수동태로 “와라와레타 (웃음을 당했다)”라고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라고 하지 않고, ‘시누(죽다)’의 수동태로 “아버지에게 시나레타 (돌아가심을 당했다)”라고 한다. 돌아가신 것은 아버지인데 남아진 나의 입장이 표현된다.
“비가 내렸다”라고 하지 않고, ‘후루(내리다)’의 수동태로 “비에 후라레타 (내림을 당했다)”라고 하면서 피해를 입은 입장을 표현한다.
반대로, 명확하게 자신이 뭔가를 할 때에도, 일본사람은 “시마수(합니다)”라고 하지 않고 일부로 “사세테 이타다키마스 (시켜 주심을 받들겠습니다)”라고 한다. 자신이 노래를 부를 때에도 “노래를 부르겠습니다”라고 하면 뻔뻔스럽게 느껴지므로 “노래시켜 주심을 받들겠습니다 (우타와세테 이타다키마스)”라고 한다. 자신이 주체로서 행동하는데도 억지로 수동의 입장을 만든 일본 특유의 유니크한 화법이다.
한국사람이 일본어를 말할 때에는 이 수동태를 만드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그렇다고 다 능동태로 말하면 일본인의 눈에는 아주 뻔뻔스러운 성격의 소유자로 비쳐 버린다.
한국사람으로서는 왜 그런 식으로 사물을 뒤집어서 말하는지 오직 이해하기 어려울 뿐이다. 그러나 〈대상의식〉에 서는 일본사람에게는 무엇보다도 그것이 아주 편리한 것이다.
예컨대, 자기가 어떤 피해를 받고 있는 것을 이야기할 때에, 한국말로는 “그가 이렇게 했다”라고 분명하게 ‘그’를 책망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일본말이라면 “이렇게 사레타(당했다)’라고 하는 것으로 ‘그’를 책망하는 것을 피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피해를 입은 입장을 호소할 수 있다.
불필요한 대립이 금기가 되는 섬나라의 일본인에게 실로 편리한 말이 이 일본어의 수동태이다 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한국말을 할 때에 일본사람이 가장 곤란한 것이 한국어 동사에 정해진 수동형이 없다는 것이며, 〈대상〉의 입장을 어떻게도 표현하지 못하고 자주 말이 막혀 버리는 것이 된다.
하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소개하면, 필자가 처음 한국에 왔을 무렵, 한국에서 만약에 강도라도 만나서 목숨이 위태로워지면 한국말로 뭐라고 외쳐야 되는가를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도와주세요!”라고 외치는 것은 양국 다 같지만 주위에 있는 누군가에게 한마디로 상황을 설명하려면 일본사람은 ‘고로수(죽이다)’의 수동태로 ‘고로사레루(살해당한다)!’라고 외친다. 그런데, 한국어에는 ‘죽이다’의 수동태가 없는 것이다. “강도가 나를 죽인다!”라고 하든지 “강도에게 죽는다!”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피해를 당하고 있는 수동적인 불쌍한 나의 느낌이 표현이 안 될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런 답답한 말을 외치고 있고서는 그야말로 살해를 당해 버리기 때문에, 결론은 한국사람과 똑같이 “나 죽네―!”, “사람 살려―!”라고 주체적으로 말을 할 수 밖에 없다.
“생명이 위협 받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한국사람은 〈주체〉의 입장을 역시 양보하지 않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 묘한 감동을 받은 것을 기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