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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토종의 본찰 선림사. 이곳 수장고에는 매우 소중하게 간직되고 있는 책이 한 권 있다. 그것은 800년전에 필사된 원효의 책, 무량수경정요. 일본에선 해동의 성인으로 추앙받았지만 신라에선 파계승으로 여겨졌던 원효. 그는 과연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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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루마리에는 그림이 그려져있는데 놀랍게도 신라 승려 원효대사의 일대기를 그려놓은 것이다. 역사스페셜에서 사진을 찍어 한 통의 두루마리로 만들어놓은 것이다. 원본은 모두 6통의 두루마리로 나뉘어져 있다. 어떤 그림들이 그려져 있는지 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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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은 원효가 당나라로 유학가던 중에 무덤속에서 하룻밤을 자는 장면이다. 또 무덤속에서 하룻밤을 자고난 이후에 깨달음을 얻은 원효가 함께 유학을 가던 의상과 헤어져 돌아오는 장면이다. 이 외에도 두루마리에는 많은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원효가 저잣거리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장면도 보이고 사람들에게 설법을 하는 원효의 모습도 그림으로 담겨져 있다.
그런데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신라인이 아니다. 12세기 경에 살았던 일본 사람이었다. 자기 나라 사람도 아닌 다른 나라 사람의 일대기를 이렇게 그림으로 남겨놓은 것으로 보아 원효를 굉장히 숭상했던 것 같다. 더군다나 일본은 이 그림을 국보로까지 정해놓고 있다. 원효의 일대기를 그림으로 남겨놓은 사람은 과연 누구이며 일본은 이 그림을 왜 국보로까지 지정해놓고 있는 걸까?
그런데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신라인이 아니다. 12세기 경에 살았던 일본 사람이었다. 자기 나라 사람도 아닌 다른 나라 사람의 일대기를 이렇게 그림으로 남겨놓은 것으로 보아 원효를 굉장히 숭상했던 것 같다. 더군다나 일본은 이 그림을 국보로까지 정해놓고 있다. 원효의 일대기를 그림으로 남겨놓은 사람은 과연 누구이며 일본은 이 그림을 왜 국보로까지 지정해놓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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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유서깊은 화엄사찰 고산사. 이곳이 바로 원효의 일대기를 그린 화엄연기가 있던 자리다. 천황이 하사한 액자를 받을 정도로 유서깊은 이 절에는 많은 문화재들이 보관되어 있다. 화엄연기도 바로 이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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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게마쓰 쇼텐 ㅣ 일본 보림사 주지 : 이곳이 고산사의 석수원입니다. 화엄연기 외에 원효대사의 영정도 여기 모셔져 있었지만 현재는 박물관으로 옮겨져 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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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누가 무슨 이유로 화엄연기를 만들었을까? 화엄연기가 만들어진 것은 13세기 초반, 이 절을 중건시켰던 묘에에 의해서였다. 묘에는 직접 글을 쓰고 친구인 쇼닌에게 그림을 그리도록 한다. 중세의 일본에 대표적인 고승이었던 그는 원효의 사상에 심취해있었다. 그의 저서를 보면 한페이지 안에도 여러번 원효를 인용하고 있을 정도다.
이시이 고세이 교수 ㅣ 고마자와대 불교학과 : 원효를 존경했기 때문에 그의 삶을 자신의 거울로 삼고자 하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원효가 대학자였기 때문에 일본 승려들 모두가 원효가 지은 책을 읽고 있었는데 묘에는 단순히 학문만을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사람됨까지 존경했던 것입니다.
이시이 고세이 교수 ㅣ 고마자와대 불교학과 : 원효를 존경했기 때문에 그의 삶을 자신의 거울로 삼고자 하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원효가 대학자였기 때문에 일본 승려들 모두가 원효가 지은 책을 읽고 있었는데 묘에는 단순히 학문만을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사람됨까지 존경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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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절은 초기부터 원효의 영향이 지배적이었다. 8세기 신라에 유학했던 이 절의 심상은 원효의 책들을 대량입수해 돌아온다. 그것이 원효의 학풍이 계승되는 계기가 되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모리야 고우사이 ㅣ 전 방장스님 : 원효의 학문은 매우 폭이 넓어서 어느 종파에도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배워야 할 점입니다. 동대사는 특히 화엄을 근본으로 하고 있지만 화엄뿐 아니라 여러가지 교학을 공부해 왔다는 점에서 원효의 정신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리야 고우사이 ㅣ 전 방장스님 : 원효의 학문은 매우 폭이 넓어서 어느 종파에도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배워야 할 점입니다. 동대사는 특히 화엄을 근본으로 하고 있지만 화엄뿐 아니라 여러가지 교학을 공부해 왔다는 점에서 원효의 정신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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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의 영향은 비단 화엄종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일본의 불교전문대학인 오오타니 대학. 도서관엔 오래전 필사된 원효의 책이 많이 보관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판비량론은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기무라 센쇼 교수 ㅣ 오오타니대학교 : 이것은 원래 카미쿠라 시대에 법상종의 학승이 공부하기 위해 지니고 있던 것인데 에도 시대에 다른 사람이 또 필사했고 그것이 전해져 내려오다가 우리학교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기무라 센쇼 교수 ㅣ 오오타니대학교 : 이것은 원래 카미쿠라 시대에 법상종의 학승이 공부하기 위해 지니고 있던 것인데 에도 시대에 다른 사람이 또 필사했고 그것이 전해져 내려오다가 우리학교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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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는 판본조차 없는 원효의 저술들. 일본의 거의 모든 종파가 이 책들을 교과서로 사용했다.
기무라 센쇼 교수 ㅣ 오오타니대학교 : 대부분의 저작물들이 일본에 전해졌습니다. 도중에 없어진 것도 있지만 오오타니 대학이 소장하고 있는 것처럼 여러번 필사되고 있었다고 봅니다. 그만큼 원효대사의 저작물을 당시 일본인들이 많이 읽고 공부했다는 것입니다.
기무라 센쇼 교수 ㅣ 오오타니대학교 : 대부분의 저작물들이 일본에 전해졌습니다. 도중에 없어진 것도 있지만 오오타니 대학이 소장하고 있는 것처럼 여러번 필사되고 있었다고 봅니다. 그만큼 원효대사의 저작물을 당시 일본인들이 많이 읽고 공부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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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사 창건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고승 교기. 그는 대중교화에 주력했던 원효의 삶을 존경해 원효와 비슷한 삶을 살았다.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면서 서민들을 구제하는데 힘쓴 그는 원효의 실천적 계승자였다.
이시이 고세이 교수 ㅣ 고마자와대 불교학과 : 일본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원효에 대한 호칭은 ‘효사’입니다. ‘효’ 선생님 이라는 뜻이지요. 다른 사람들은 그냥 이름을 부르면서 원효에 대해서만 ‘효사’ 즉,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매우 많았습니다.
이시이 고세이 교수 ㅣ 고마자와대 불교학과 : 일본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원효에 대한 호칭은 ‘효사’입니다. ‘효’ 선생님 이라는 뜻이지요. 다른 사람들은 그냥 이름을 부르면서 원효에 대해서만 ‘효사’ 즉,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매우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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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필을 종횡무진으로 휘둘렀고 삼학에 널리 능통하여 능히 만명을 대적할만한 사람이었다
도리에 정통하여 입신의 경지에 도달했다
원효를 존경하고 숭상한 것은 일본만이 아니다. 중국 당나라 시대부터 송나라 시대에 이르기까지 고승들의 삶을 기록하는 송고승전. 이곳엔 원효의 이야기가 별도의 전기로 수록되어 있다. 다른 전기들이 그 사람의 문제점도 함께 지적하는 것에 비해 원효의 전기는 찬양일변도다.
도리에 정통하여 입신의 경지에 도달했다
원효를 존경하고 숭상한 것은 일본만이 아니다. 중국 당나라 시대부터 송나라 시대에 이르기까지 고승들의 삶을 기록하는 송고승전. 이곳엔 원효의 이야기가 별도의 전기로 수록되어 있다. 다른 전기들이 그 사람의 문제점도 함께 지적하는 것에 비해 원효의 전기는 찬양일변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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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영 교수 ㅣ 중앙승가대 불교학과 : 별도의 전기로 중국고승전에 수록된 예가 많지 않습니다. 구법승들은 중국의 은사스님들을 지도했던 스승들의 전기 속에 일부 두세줄 정도 간단히 소개되어있을 정도인데 중국 유학을 하지도 않은 원효에게 별도의 전기를 마련했다는건 원효의 교학에 대해서 대단한 평가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카마타 시게오 ㅣ 동경대 명예교수 : 원효는 신라에 국한된 불교 학자가 아닙니다. 신라가 낳은 불교학자로 의상이 있지만 원효와 비교하면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의상은 신라 안에서의 위대한 불교인이지만 원효는 세계 속의 위대한 불교인입니다.
카마타 시게오 ㅣ 동경대 명예교수 : 원효는 신라에 국한된 불교 학자가 아닙니다. 신라가 낳은 불교학자로 의상이 있지만 원효와 비교하면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의상은 신라 안에서의 위대한 불교인이지만 원효는 세계 속의 위대한 불교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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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는 생전에 많은 책을 지은 대학자이자 저술가였다. 그가 지은 책은 100여종 24권에 달한다. 잘 알려져 있는 중국 승려 손오공의 삼장법사 현장 스님은 실제 인도에서 많은 경전을 가져다 번역작업을 한 유명한 승려다. 그런데 그가 평생 지은 책이 50여종에 불과하다고 하니 원효의 저술작업이 얼마나 엄청났는지 알 수 있다.
이 책은 그 유명한 대승기신론소다. 해동소라고 불리는 이 책은 대승불교에 관한 해설서 중 세계에서 손꼽히는 책이다. 그리고 신문화쟁론은 명성이 워낙 자자해 불교의 본산지인 인도에까지 전해졌다고 한다. 당시 동아시아권에서는 원효의 책을 읽지 않았거나 그의 사상을 모르면 부끄럽게 여길 정도였다. 원효는 질과 양 모든 측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대저술가이자 동아시아권 사상계의 최고봉이었다. 이런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 못했다. 우리가 알고있는 것은 원효가 해골물을 마시고 득도했다던가 요석공주와의 사랑같은 단편적인 설화다. 이것은 원효의 행적을 기록한 전기가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원효의 삶을 파악하는데는 삼국유사와 송고승전 두 권의 책에 의존해왔다. 그런데 삼국유사의 원효부분이나 송고승전은 본격적인 원효의 전기라고 볼 수는 없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지을 당시만 하더라도 원효의 행적을 기록한 행장, 일종의 위인전이 있었다고는 하는데 안타깝게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고 있다. 때문에 역사속에서 살아숨쉬던 한 인간으로서의 원효의 삶을 제대로 알고있지 못했다.
이런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그동안 우리에게 전해지는 사료를 중심으로 이 땅에 남아있는 원효의 발자취를 찾아가서 인간 원효의 삶을 추적해보도록 하자.
이 책은 그 유명한 대승기신론소다. 해동소라고 불리는 이 책은 대승불교에 관한 해설서 중 세계에서 손꼽히는 책이다. 그리고 신문화쟁론은 명성이 워낙 자자해 불교의 본산지인 인도에까지 전해졌다고 한다. 당시 동아시아권에서는 원효의 책을 읽지 않았거나 그의 사상을 모르면 부끄럽게 여길 정도였다. 원효는 질과 양 모든 측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대저술가이자 동아시아권 사상계의 최고봉이었다. 이런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 못했다. 우리가 알고있는 것은 원효가 해골물을 마시고 득도했다던가 요석공주와의 사랑같은 단편적인 설화다. 이것은 원효의 행적을 기록한 전기가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원효의 삶을 파악하는데는 삼국유사와 송고승전 두 권의 책에 의존해왔다. 그런데 삼국유사의 원효부분이나 송고승전은 본격적인 원효의 전기라고 볼 수는 없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지을 당시만 하더라도 원효의 행적을 기록한 행장, 일종의 위인전이 있었다고는 하는데 안타깝게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고 있다. 때문에 역사속에서 살아숨쉬던 한 인간으로서의 원효의 삶을 제대로 알고있지 못했다.
이런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그동안 우리에게 전해지는 사료를 중심으로 이 땅에 남아있는 원효의 발자취를 찾아가서 인간 원효의 삶을 추적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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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를 하기전 원효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삼국유사에 보면 원효의 성은 설씨라고 기록되어 있다. 실제 설씨족보에는 원효의 이름이 나타난다.
‘설사’가 출가해 원효가 되었다
17세기 설씨 집안에 내려진 교서, 여기서도 신라 육부장 설호진의 18세손 설사가 출가하기 이전의 원효임이 확인된다.
‘설사’가 출가해 원효가 되었다
17세기 설씨 집안에 내려진 교서, 여기서도 신라 육부장 설호진의 18세손 설사가 출가하기 이전의 원효임이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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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량군 남쪽 불지촌 북쪽에 있는 밤나무골에서 태어났다
삼국유사 원효불기 조 -
그렇다면 원효가 태어난 곳은 어디일까? 예전엔 밤나무가 우거져있었다는 북사리 일대. 이곳이 원효의 고향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의 기록과 지리적인 위치가 일치하기 때문이다. 실제 이 마을에는 원효가 태어난 곳이란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마을 가운데 있는 제석사. 원효는 그 경내의 밤나무 아래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진다.
삼국유사 원효불기 조 -
그렇다면 원효가 태어난 곳은 어디일까? 예전엔 밤나무가 우거져있었다는 북사리 일대. 이곳이 원효의 고향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의 기록과 지리적인 위치가 일치하기 때문이다. 실제 이 마을에는 원효가 태어난 곳이란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마을 가운데 있는 제석사. 원효는 그 경내의 밤나무 아래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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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스님 : 원효스님 부모님께서 해산을 하기 위해 친정집으로 가던 중에 이곳에서 아버지 겉옷을 걸고 그곳에서 원효스님을 낳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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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에 의하면 원효는 자신이 태어난 곳에 사라사를 지었다고 한다. 지금의 제석사는 조선 인조때 당시 그 일대에서 유일한 절터였던 현재의 제석사터로 옮겨왔는데 그때 이 일대에서는 불상의 좌대를 비롯해 오래된 유물들이 발굴됐다. 따라서 이곳엔 이전부터 유명한 사찰, 사라사가 있었다고 추정된다.
이봉춘 교수 ㅣ 동국대 불교학부 : 제석사로 옮겨올때 물이 부족해서 절을 옮기게 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아무데나 옮기지는 않았을 것이고 밤골터에서 유서깊은 터를 잡았을텐데 유서깊다고 하면 이미 절이 있었으나 현재는 없는 곳을 골랐을 겁니다. 그렇게 보면 제석사가 사라사였을거라 생각합니다. 이미 유물도 나왔고요.
이봉춘 교수 ㅣ 동국대 불교학부 : 제석사로 옮겨올때 물이 부족해서 절을 옮기게 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아무데나 옮기지는 않았을 것이고 밤골터에서 유서깊은 터를 잡았을텐데 유서깊다고 하면 이미 절이 있었으나 현재는 없는 곳을 골랐을 겁니다. 그렇게 보면 제석사가 사라사였을거라 생각합니다. 이미 유물도 나왔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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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에서 태어난 6두품 출신의 청년 원효. 그는 출가 후 낭제, 고덕 등 여러 스승을 찾아다니며 수행한다. 그때 머물렀던 곳 중 하나가 영추산 일대다. 지금의 반고사터가 당시 원효가 머물렀던 곳으로 추정된다.
이상도 향토소장 ㅣ 울산문화원 : 삼국유사에 영추산에서 서북쪽 방향이라고 합니다. 신라 서라벌과 울산을 연결하는 통로가 있었습니다.
이상도 향토소장 ㅣ 울산문화원 : 삼국유사에 영추산에서 서북쪽 방향이라고 합니다. 신라 서라벌과 울산을 연결하는 통로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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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계곡의 사미는 동쪽 봉우리 상덕께서 계신 높은 바위 앞에 머리 조아려 예를 올립니다
작은 먼지를 불어 영취산에 보태며 미미한 물방울을 용연(태화강)에 보탭니다
- 삼국유사 낭지승운 조 -
원효는 반고사에 머물며 당대의 고승 낭제에게 법화경을 배우고 초장경문과 안신사십론 두가지 책을 짓는다. 당시 원효가 지어 낭제에게 바친 시가 삼국유사에 전한다.
작은 먼지를 불어 영취산에 보태며 미미한 물방울을 용연(태화강)에 보탭니다
- 삼국유사 낭지승운 조 -
원효는 반고사에 머물며 당대의 고승 낭제에게 법화경을 배우고 초장경문과 안신사십론 두가지 책을 짓는다. 당시 원효가 지어 낭제에게 바친 시가 삼국유사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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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이후 원효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설화가 대부분이다. 그나마 사실을 명확하게 알려주는 것은 몇조각만이 발견된 서당화상비다.
김상현 교수 ㅣ 동국대 사학과 : 삼국유사는 13세기 기록물이고 송고승전은 10세기 중반이죠. 서당화상비는 9세기초이므로 역사적인 신빙성을 높여주는 자료입니다.
김상현 교수 ㅣ 동국대 사학과 : 삼국유사는 13세기 기록물이고 송고승전은 10세기 중반이죠. 서당화상비는 9세기초이므로 역사적인 신빙성을 높여주는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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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공 2년(686년) 3월에 돌아가시다
춘추가 70이었다
이 비석에 의해 처음 밝혀진 것은 원효가 686년 70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성대사로 불릴 정도로 고선사라는 절에 오래 머물렀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고선사에는 무엇이 남아있을까?
춘추가 70이었다
이 비석에 의해 처음 밝혀진 것은 원효가 686년 70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성대사로 불릴 정도로 고선사라는 절에 오래 머물렀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고선사에는 무엇이 남아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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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린 고선사를 찾을 수 없었다. 70년대 중반 덕동댐이 만들어지면서 수몰되어버린 것이다. 겨우 한 장의 사진으로밖에 남아있지 않은 고선사. 고선사 주변에서 일부가 발견되긴 했지만 많은 부분이 발견되지 않고 있는 서당화상비. 그러나 이젠 접근 자체가 불가능해져버렸다. 1400년이 흐르는 동안 그나마 남아있던 원효의 자취는 거의 사라져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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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원효의 영정이다. 광주 원효사에 있는 영정, 경남 양산 척판암에 있는 영정, 경주 분황사에 있는 영정이다. 분명히 같은 인물을 그린 영정인데 서로간의 느낌이 많이 다르다. 이것은 원효의 행적과 풍모를 제대로 알 수 있는 기록이나 현장이 부족하다는 사실의 반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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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우리에게는 간접적으로나마 원효의 행적을 말해주는 수많은 설화들이 있다. 사람들 사이에 입에서 입으로 오르내리는 이야기들은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꾸며낸 이야기인지 애매한 부분이 많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본다면 인간 원효에 대해서 조금은 알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이런 설화들 중 가장 대표적인 이야기 중의 하나가 바로 그림에 표현된 오도설화, 원효의 깨달음에 대한 부분이다. 과연 원효는 해골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은 것일가? 그 깨달음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원효의 깨달음에 대한 기록은 송고승전을 비롯한 중국책에 주로 실려있다. 기록에 의하면 원효는 두차례에 걸쳐 당나라 유학을 시도한다. 첫번째 육로를 통한 시도가 실패하자 10년뒤, 이번엔 해로를 통한 유학을 계획한다. 원효는 배를 타기 위해 당성을 향한다.
원효의 깨달음에 대한 기록은 송고승전을 비롯한 중국책에 주로 실려있다. 기록에 의하면 원효는 두차례에 걸쳐 당나라 유학을 시도한다. 첫번째 육로를 통한 시도가 실패하자 10년뒤, 이번엔 해로를 통한 유학을 계획한다. 원효는 배를 타기 위해 당성을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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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당성이었다고 하는 경기도 화성군 지화리 일대, 지금 이곳의 풍경은 여느 농촌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예전엔 지금과 달랐다.
김창식 ㅣ 67세 : 여기가 바다였죠. 막힌지 얼마 안됐죠. 시화지구가 대부도로 막히면서 어민들이 그 전에는 농사를 부업으로 하고 바닷일을 전업했죠.
김창식 ㅣ 67세 : 여기가 바다였죠. 막힌지 얼마 안됐죠. 시화지구가 대부도로 막히면서 어민들이 그 전에는 농사를 부업으로 하고 바닷일을 전업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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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넓은 벌판으로 보이는 이곳이 예전엔 물길이었다. 이곳의 물길은 서해안으로 이어져 중국까지 닿았고 현재 지명에도 흔적이 남아있다.
김창식 ㅣ 67세 : 들어오는 입구가 낭경구라고 하는 곳이에요. 예전부터 내려오는 말인데 남경구라는 뜻은 중국 남경으로 들어가는 입구라는 뜻이에요.
김창식 ㅣ 67세 : 들어오는 입구가 낭경구라고 하는 곳이에요. 예전부터 내려오는 말인데 남경구라는 뜻은 중국 남경으로 들어가는 입구라는 뜻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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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지화리 명칭은 화양지구. 그때까지도 이곳은 중국으로 가는 배의 출발지였다. 당성에서 배를 타면 물길은 서해로 이어지고 해류를 따라 중국 등주에까지 닿았다.
김기흥 교수 ㅣ 건국대 사학과 : 6세기 후반부터 신라에서는 중국 문물을 배우려는 흐름이 나타납니다. 그 전에는 고구려나 백제를 통해서 중국의 문물을 배우고 이용했는데 진흥태왕이 당항성을 차지하고 나서는 중국의 뱃길이 열립니다. 이제 신라사람들이 직접 중국에 가서 문물을 배우려는 풍조가 일어나서 많은 사람들이 중국 유학길에 나섭니다.
김기흥 교수 ㅣ 건국대 사학과 : 6세기 후반부터 신라에서는 중국 문물을 배우려는 흐름이 나타납니다. 그 전에는 고구려나 백제를 통해서 중국의 문물을 배우고 이용했는데 진흥태왕이 당항성을 차지하고 나서는 중국의 뱃길이 열립니다. 이제 신라사람들이 직접 중국에 가서 문물을 배우려는 풍조가 일어나서 많은 사람들이 중국 유학길에 나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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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성으로 향하던 원효와 의상은 도중에 갑자기 비를 만난다. 게다가 날까지 저물자 주변 동굴에 들어가 하룻밤을 자게 된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깨보니 무덤이었다고 전한다. 과연 무덤을 동굴로 알고 들어가서 자는 것이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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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당성일대의 무덤양식은 횡혈식 석실고분이었다. 횡혈식 석실고분은 2인 이상의 시신을 안치하기 위한 가족합장묘. 무덤의 내부를 방처럼 꾸미고 입구부터 긴 통로를 따로 만들어두었다. 무덤의 바깥모습은 봉분형태였는데 시간이 지나면 축대가 무너지기도 하고 봉문 위에 풀이 자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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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몽룡 교수 ㅣ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 다음 부인, 남편을 위해 앞의 덮개를 폐쇄시키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멀리서 보게 되면 위에는 흙으로 덮혀있고 안에는 석실이 있고 밖에는 널길의 문이 열려져 있으니 동굴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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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해골물을 마셨다는 부분은 어떨가? 시간이 흐르면 관은 썩게되고 유골이 노출된다. 유골이 여기저기 흩어지는 경우도 흔히 있었다고 한다.
최몽룡 교수 ㅣ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 시간이 지나면 시체가 유탈되고 머리나 몸체가 분리 되면서 따로 놉니다. 어떤 경우에는 동물이 들어가 설치면 머리가 떨어져서 밖으로 돌아다니는 경우도 있습니다.
최몽룡 교수 ㅣ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 시간이 지나면 시체가 유탈되고 머리나 몸체가 분리 되면서 따로 놉니다. 어떤 경우에는 동물이 들어가 설치면 머리가 떨어져서 밖으로 돌아다니는 경우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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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고분의 벽과 천정은 돌로 만들어져있다. 때문에 외부와의 온도차이로 습기가 차기도 하고 비가 오면 빗물이 새기도 한다. 그래서 무덤 내부에 배수로까지 따로 만들어두었다.
밤이 되어 황폐한 무덤 속에서 잤다
갈증이 심해 무덤 속에 고여 있는 물을 손으로 떠 마셨는데, 매우 달고 시원하였다
새벽에 보니 그것은 해골 물이었다
밤이 되어 황폐한 무덤 속에서 잤다
갈증이 심해 무덤 속에 고여 있는 물을 손으로 떠 마셨는데, 매우 달고 시원하였다
새벽에 보니 그것은 해골 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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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원효는 이 무덤에서 정말 해골물을 마신것일까? 이 부분에 대한 기록은 책마다 조금씩 다르게 나타났다. 12세기 초 해홍이 쓴 인감록.
하룻밤을 더 그 무덤 속에서 머무르게 되었는데 갑자기 귀신이 나타나서 놀라게 했다
원효가 탄식하며 말했다
‘전날 밤에는 토굴에서 잤어도 마음이 편안하더니 오늘밤은 귀신 굴에 의탁하메 근심이 많구나’
하룻밤을 더 그 무덤 속에서 머무르게 되었는데 갑자기 귀신이 나타나서 놀라게 했다
원효가 탄식하며 말했다
‘전날 밤에는 토굴에서 잤어도 마음이 편안하더니 오늘밤은 귀신 굴에 의탁하메 근심이 많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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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송고승전의 기록은 이와 다르다. 해골물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토굴인줄 알고 머물때는 하룻밤 편히 잘 잤는데 다음날 무덤인 것을 알고나니 마음이 동요되어 잠이 오지 않더라는 것이다. 두 기록의 차이는 매우 크다. 두 기록의 공통점은 단지 무덤을 토굴로 알고 하룻밤을 잤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골물 부분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고영섭 박사 ㅣ 한림대 철학과 : 원효를 다룬 기록물 전체를 봐도 해골물을 마시고 깨달았다는 내용은 전혀 없습니다. 후대편집자가 이해시키는 차원에서 무덤속의 해골을 끌어들여 각색한 것으로 보입니다.
고영섭 박사 ㅣ 한림대 철학과 : 원효를 다룬 기록물 전체를 봐도 해골물을 마시고 깨달았다는 내용은 전혀 없습니다. 후대편집자가 이해시키는 차원에서 무덤속의 해골을 끌어들여 각색한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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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생기니 온갖 법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토굴과 무덤이 다르지 않다
그러나 해골물 설화의 핵심은 원효의 깨달음 그 자체에 있다. 무덤속 하룻밤을 계기로 마음의 이치를 체득했던 것이다.
법륜 스님 ㅣ 정토회 지도법사 : 물은 똑같은 물이고 바가지는 똑같은 바가지인데 어제는 감로수같았지만 지금은 더럽다고 것이 더럽고 깨끗하다는게 물이나 바가지에 있는게 아니라 바로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일체유심자라는 것이 더럽고 깨끗하다는 분별이 우리의 인식속에 있다는 것을 자각한거죠.
모든 진리는 마음속에 있는데 굳이 당나라에까지 가서 구할 이유가 있겠는가? 원효는 단호히 발걸음을 돌린다.
그러나 해골물 설화의 핵심은 원효의 깨달음 그 자체에 있다. 무덤속 하룻밤을 계기로 마음의 이치를 체득했던 것이다.
법륜 스님 ㅣ 정토회 지도법사 : 물은 똑같은 물이고 바가지는 똑같은 바가지인데 어제는 감로수같았지만 지금은 더럽다고 것이 더럽고 깨끗하다는게 물이나 바가지에 있는게 아니라 바로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일체유심자라는 것이 더럽고 깨끗하다는 분별이 우리의 인식속에 있다는 것을 자각한거죠.
모든 진리는 마음속에 있는데 굳이 당나라에까지 가서 구할 이유가 있겠는가? 원효는 단호히 발걸음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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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가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되는 7세기경에 만들어진 횡혈식 석실고분 내부다. 관을 올려놓는 시상대이다. 세월이 흘러 관이 썩고나면 유골이 밖으로 나와서 흩어질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는 것이다. 무덤속에는 배수로가 따로 만들어져 있다. 돌로 만들어져 있어 외부와의 기온 차이때문에 습기가 차거나 빗물이 새는 경우가 종종 있다. 따라서 원효의 해골물 사건은 영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어느 역사책 속에서도 우리가 알고있는 것처럼 해골속의 물을 마셨다는 기록은 없다. 때문에 후대로 내려오면서 더욱 극적으로 각색이 되었다는 말이 설득력있다.
하지만 원효가 진짜로 해골물을 마셨든 안 마셨든 정말 중요한 것은 이 무덤속에서 하룻밤을 계기로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마음이 생기면 온갖 법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동굴과 무덤이 다르지 않다’ 이와 비슷한 구절은 대승기신론에도 나오는 말인데 어찌 보면 아주 간단하면서도 평범한 이야기다. 물론 원효도 그 이전에 알고있었을 것이다. 이전에 문자로만 알고있던 내용이 그 순간 온 몸으로 깨우쳐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대단한 결단을 내린다. 10년에 걸쳐 두차례나 시도했던 당나라 유학을 중도에 그만두는 것이다. 그렇게 원효는 신라로 되돌아온다. 그렇다면 그 뒤에 원효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하지만 원효가 진짜로 해골물을 마셨든 안 마셨든 정말 중요한 것은 이 무덤속에서 하룻밤을 계기로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마음이 생기면 온갖 법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동굴과 무덤이 다르지 않다’ 이와 비슷한 구절은 대승기신론에도 나오는 말인데 어찌 보면 아주 간단하면서도 평범한 이야기다. 물론 원효도 그 이전에 알고있었을 것이다. 이전에 문자로만 알고있던 내용이 그 순간 온 몸으로 깨우쳐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대단한 결단을 내린다. 10년에 걸쳐 두차례나 시도했던 당나라 유학을 중도에 그만두는 것이다. 그렇게 원효는 신라로 되돌아온다. 그렇다면 그 뒤에 원효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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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로 돌아온 원효는 분황사에 머문다. 당시 많은 불경이 수집되어있던 이곳에서 집필에 몰두한다. 그는 우선 여러 경전의 핵심을 요약, 정리한다. 깨달음에 도달한 그가 쓴 책은 쉽고도 명쾌했다. 원효의 책들은 당시 동아시아 불교계에서 큰 방향을 일으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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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 동아시아 불교는 발전을 거듭해가면서도 한편으로는 혼란상태에 빠져있었다. 대자은사를 중심으로 치열한 사상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논쟁의 중심에 섰던 인물은 손오공의 주인공인 삼장법사 현장, 인도에서 새로운 경전들을 가지고 돌아온 그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 이론을 전개한다. 이로 인해 동아시아 불교계 전체가 사상적인 혼란에 빠지게 된다.
기무라 센쇼 교수 ㅣ 오오타니대학교 : 현장은 새롭고 정교한 이론을 전개했는데 그것이 불교의 정신, 불교가 지향하는 근본 목적에 합당한지에 대해서는 모두들 큰 의문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해결하는 것이 과제였습니다. 당시의 불교인들은 모두 그 주제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바로 그 과제에 대해 가장 먼저 해답을 제시한 사람이 원효 대사였습니다.
기무라 센쇼 교수 ㅣ 오오타니대학교 : 현장은 새롭고 정교한 이론을 전개했는데 그것이 불교의 정신, 불교가 지향하는 근본 목적에 합당한지에 대해서는 모두들 큰 의문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해결하는 것이 과제였습니다. 당시의 불교인들은 모두 그 주제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바로 그 과제에 대해 가장 먼저 해답을 제시한 사람이 원효 대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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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원효가 제시한 것이 화쟁사상이었다. 서로 다른 종파간의 대립과 갈등도 부처의 가르침인 한마음이라는 큰 틀에서 보면 융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법륜 스님 ㅣ 정토회 지도법사 : 서울에 가는 길을 누가 물었을때 인천사람이 물으면 동으로 가라 하고 춘천사는 사람은 서로 가라고 하고 수원에 사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북으로 가라고 합니다. 이런걸 적어놓은게 불경인데 하나 하나를 가지고 종파를 만들어서 동으로 가야한다, 서로 가야한다 해서 어떤 것이 옳고 그른 것처럼 논쟁을 한거에요. 원효의 사상을 보니 그것은 다툴 일이 아니라는 거죠. 그것은 상황에 따라 쓰여진 방편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10가지 문호를 열어서 서로 다투는데 이건 다툴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십문화쟁론을 쓰신 거죠. 이것이 원효의 핵심사상이고 불교의 가장 중요한 사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법륜 스님 ㅣ 정토회 지도법사 : 서울에 가는 길을 누가 물었을때 인천사람이 물으면 동으로 가라 하고 춘천사는 사람은 서로 가라고 하고 수원에 사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북으로 가라고 합니다. 이런걸 적어놓은게 불경인데 하나 하나를 가지고 종파를 만들어서 동으로 가야한다, 서로 가야한다 해서 어떤 것이 옳고 그른 것처럼 논쟁을 한거에요. 원효의 사상을 보니 그것은 다툴 일이 아니라는 거죠. 그것은 상황에 따라 쓰여진 방편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10가지 문호를 열어서 서로 다투는데 이건 다툴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십문화쟁론을 쓰신 거죠. 이것이 원효의 핵심사상이고 불교의 가장 중요한 사상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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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사와 함께 술집과 기생집에 드나들고 사당에서 거문고를 뜯고 여염집에서 자기도하며 도무지 일정한 규범이 없었다 - 송고승전 -
그러나 한창 명성을 얻고 있던 원효는 어느날 갑자기 붓을 던진다. 화엄경서의 십회양풍, 진정한 보살인에 관해 설한 부분에서였다. 그리고 민중속으로 뛰어든다. 그들 속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불법을 전했다.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당시 승려로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파격적인 행동이었다.
법륜 스님 ㅣ 정토회 지도법사 : 전통적인 계율에는 노래하지 말고 춤추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으니 계율을 폐했다고 볼 수 있죠.
그러나 한창 명성을 얻고 있던 원효는 어느날 갑자기 붓을 던진다. 화엄경서의 십회양풍, 진정한 보살인에 관해 설한 부분에서였다. 그리고 민중속으로 뛰어든다. 그들 속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불법을 전했다.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당시 승려로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파격적인 행동이었다.
법륜 스님 ㅣ 정토회 지도법사 : 전통적인 계율에는 노래하지 말고 춤추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으니 계율을 폐했다고 볼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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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의 행동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요석공주와의 사이에서 설총을 낳은 후, 승복마저 벗어던진다. 환속한 거사로서 아무런 계율에도 구속되지 않고 자유분방한 삶을 산다.
김상현 교수 ㅣ 동국대 사학과 : 원효는 자기의 전생애를 구속되지 않는 모습으로 또 한번 초월하고 다시 초월합니다. 마치 바람에 그물이 걸리지 않듯이 자유롭게 살았던 것이죠.
김상현 교수 ㅣ 동국대 사학과 : 원효는 자기의 전생애를 구속되지 않는 모습으로 또 한번 초월하고 다시 초월합니다. 마치 바람에 그물이 걸리지 않듯이 자유롭게 살았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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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댓가로 원효는 많은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다. 전국의 유명승려 백명을 모아 열리는 백고좌법회, 원효도 이 법회의 추천을 받는다. 그러나 그의 파괴행각을 문제삼는 교단 승려들의 반대로 끝내 참석하지 못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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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연기의 한 부분이다. 7세기경 신라 저잣거리의 모습이 잘 나타나있다. 원효는 바로 이 저잣거리에서 일반 백성들과 뒤섞여 생활하면서 불법을 전했다. 이 그림 밑에는 서당에서 거문고를 타고 있는 원효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원효는 이렇게 서당에서 거문고를 타기도 하고 주막이나 기생집을 드나들면서 아무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당시 승단의 계율은 아주 엄격했다. 계율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면 교단에서 축출되기도 하고 승려로서 누릴 수 있는 많은 특권을 빼앗기기도 했다.
그렇다면 귀족출신으로서 승려로서도 상당한 명망을 가지고 있던 원효는 왜 이 모든 것을 버리고 민중속으로 뛰어들었던 것일까? 그에게는 무엇이 그토록 절실했던 것일가?
그렇다면 귀족출신으로서 승려로서도 상당한 명망을 가지고 있던 원효는 왜 이 모든 것을 버리고 민중속으로 뛰어들었던 것일까? 그에게는 무엇이 그토록 절실했던 것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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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불교가 공인된 것은 법흥왕 14년, 처음부터 왕실을 중심으로 수용된만큼 불교는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자리잡아 갔다. 원효가 활동하던 7세기 중엽엔 소위 불국토설과 진중설까지 등장했다. 불교는 왕실의 권리를 숭상하는 이데올로기 역할을 했고 승려들은 왕실과 매우 가까이 밀착되어 있었다.
불국토설 : 신라는 현재 부처와 보살이 머무르고 있는 땅이라는 설
진종설 : 신라 왕실이 석가의 종족이라는 설
불국토설 : 신라는 현재 부처와 보살이 머무르고 있는 땅이라는 설
진종설 : 신라 왕실이 석가의 종족이라는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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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표적인 인물이 자장이었다. 진골출신으로 중국 유학을 다녀온 그는 대국통으로 임명되어 불교를 장악하고 현실정치에도 깊숙히 관여했다.
왕궁 주변에도 사찰들이 지어졌고 사찰에는 국가로부터 많은 토지와 노비가 하사됐다. 대부분 귀족출신으로 중국에 유학을 다녀온 승려들은 왕궁 근처의 사찰에 머물며 왕실과 귀족들을 위한 법회에 주력했다.
김상영 교수 ㅣ 중앙승가대 불교학과 : 심지어 북한학계에서는 통치 계급으로 승려를 분류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혜택받은 신분계층으로 고대 중세 사회에서는 승려를 중시했죠. 불교가 발전할 수 있는 중요한 원동력도 되었지만 민중들과 괴리된 상태로 불교가 전개되었다는 한계를 가지기도 합니다.
왕궁 주변에도 사찰들이 지어졌고 사찰에는 국가로부터 많은 토지와 노비가 하사됐다. 대부분 귀족출신으로 중국에 유학을 다녀온 승려들은 왕궁 근처의 사찰에 머물며 왕실과 귀족들을 위한 법회에 주력했다.
김상영 교수 ㅣ 중앙승가대 불교학과 : 심지어 북한학계에서는 통치 계급으로 승려를 분류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혜택받은 신분계층으로 고대 중세 사회에서는 승려를 중시했죠. 불교가 발전할 수 있는 중요한 원동력도 되었지만 민중들과 괴리된 상태로 불교가 전개되었다는 한계를 가지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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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일반백성들의 삶의 조건은 더욱 피폐해져가고 있었다. 7세기에 접어들면서 삼국간의 전쟁은 국운을 건 싸움으로 치닫았다. 계속되는 전쟁 속에 민중들은 생활의 터전을 잃었고 정신적으로 피폐해져갔다. 그들의 삶은 거의 붕괴 직전에 있었다.
김기홍 교수 ㅣ 건국대 사학과 : 대부분의 남자 장정들은 군역에 동원되고 또는 부역에 동원되고 그러다보니 농사지을 사람도 마땅치 않고 여자, 노인들까지도 수레를 끈다는 기사가 나오고 어린아이가 농사짓기도 했습니다.
김기홍 교수 ㅣ 건국대 사학과 : 대부분의 남자 장정들은 군역에 동원되고 또는 부역에 동원되고 그러다보니 농사지을 사람도 마땅치 않고 여자, 노인들까지도 수레를 끈다는 기사가 나오고 어린아이가 농사짓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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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 저자거리를 돌아다녔다는 기이한 승려의 이야기는 당시 상황을 역설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김기홍 교수 ㅣ 건국대 사학과 : 삼국유사에 나오는 대안 대안하고 다녔다는 스님을 생각해보면 “크게 평화로워라” 한마디로 사람들에게 어필했다는 겁니다. 그만큼 그 사회가 오랜 전시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소외감, 어려움을 겪었다는 거죠.
김기홍 교수 ㅣ 건국대 사학과 : 삼국유사에 나오는 대안 대안하고 다녔다는 스님을 생각해보면 “크게 평화로워라” 한마디로 사람들에게 어필했다는 겁니다. 그만큼 그 사회가 오랜 전시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소외감, 어려움을 겪었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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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시대배경속에 서서히 민중불교의 싹이 트고 있었다. 민중불교 전파자들은 대안처럼 저자거리를 떠돌거나 당시 수도이던 경주를 떠나 지방의 절을 지었다. 오어사엔 그 중 한명인 혜공이 살았다고 전한다. 당시로선 드물게 평민 출신으로 승려가된 혜공은 기이안 행동으로 서민들에게 불교를 전파했다고 한다.
학나 스님 ㅣ 오어사 주지 : 70여군의 제자를 데리고 수행했습니다. 시주를 하고 다닐때 삼태기를 둘러쓰고 술에 취해서 춤을 추며 다니셨고 계율에 메이지 않았고 일반 서민들의 애환을 가슴속에 같이 담았던 스님입니다.
학나 스님 ㅣ 오어사 주지 : 70여군의 제자를 데리고 수행했습니다. 시주를 하고 다닐때 삼태기를 둘러쓰고 술에 취해서 춤을 추며 다니셨고 계율에 메이지 않았고 일반 서민들의 애환을 가슴속에 같이 담았던 스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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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는 이런 승려들과 뜻을 같이 했다. 이 절엔 원효의 것이라고 전해오는 삿갓과 숟가락이 소중하게 보관되어 오고 있다. 모든 사람들을 평등하게 보는 가르침과 귀족 위주인 신라 불교 사이에서 원효는 많은 고민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기홍 교수 ㅣ 건국대 사학과 : 부처님은 최하위 계층인 히드라 계층에게 파격적인 내용, 혁명적인 내용의 가르침을 하셨습니다. 원효는 그러한 부처님의 일생을 잘 알고 왜 그러한 가르침이 신라에서 다른 모습으로 변하게 되었을까를 상당히 고민하시지 않았을까...
김기홍 교수 ㅣ 건국대 사학과 : 부처님은 최하위 계층인 히드라 계층에게 파격적인 내용, 혁명적인 내용의 가르침을 하셨습니다. 원효는 그러한 부처님의 일생을 잘 알고 왜 그러한 가르침이 신라에서 다른 모습으로 변하게 되었을까를 상당히 고민하시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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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한 고민과 모순 끝에 그는 새로운 길을 찾는다. 문자를 알지 못하는 민중들에게 지극정성으로 부처님의 이름을 열번만 외면 극락왕생할 수 있다고 설파해 구원의 희망을 준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것을 일깨운다.
나는 그대들을 가벼이 여기지 않는다
그대들은 모두 부처가 될 수 있기에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그의 외침은 혁명적인 것이었다. 원효의 무행은 바로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 민중들에게 불법을 전파하기 위해 계율을 어기고 불명예를 감수하면서까지 그들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갔던 것이다.
나는 그대들을 가벼이 여기지 않는다
그대들은 모두 부처가 될 수 있기에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그의 외침은 혁명적인 것이었다. 원효의 무행은 바로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 민중들에게 불법을 전파하기 위해 계율을 어기고 불명예를 감수하면서까지 그들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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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무라 센쇼 교수 ㅣ 오오타니 대학교 : 그 유마거사가 술을 마신 것은 자신이 마시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곳에 가서 여러 사람들에게 불교의 가르침을 전파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세상사에 얽매여 있는 사람들에게 얽매여서는 안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유마거사가 그곳으로 갔던 것입니다. 불교의 공사상을 몸소 실천한 분이 유마거사인데 원효대사도 그의 생활을 보면 유마거사와 같은 삶을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종수 스님 ㅣ 분황사 주지 : 계율이라는 것은 어느 곳을 올라가기 위한 사다리에 불과합니다. 그 당시 신라사회가 원효를 용납할 수 있는 사회는 아니었습니다. 원효와 같은 과감한 사람은 계율에 얽매이지 않았어요. 더 큰 것을 위해 많은 것을 위해 그런 계율도 버릴 줄 아는 스님이었습니다.
종수 스님 ㅣ 분황사 주지 : 계율이라는 것은 어느 곳을 올라가기 위한 사다리에 불과합니다. 그 당시 신라사회가 원효를 용납할 수 있는 사회는 아니었습니다. 원효와 같은 과감한 사람은 계율에 얽매이지 않았어요. 더 큰 것을 위해 많은 것을 위해 그런 계율도 버릴 줄 아는 스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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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몽매한 사람들조차 모두 부처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원효의 교화 덕택이다
- 삼국유사 원효 불기 조 -
원효의 이런 노력은 훗날 신라의 불교가 모든 민중들에게 퍼져 황금기를 맞는 밑거름이 된다. 삼국유사는 이렇게 적고 있다. 새벽을 뜻하는 그의 이름 원효처럼 어두움에 잠긴 민중들에게 불교의 첫 새벽을 열어준 것이었다.
원효의 무행에 대한 의문이 비로소 풀린다. 원효는 이 땅에서 가장 천하고 고통받는 민중들에게 한걸음 더 다가가기 위해 승단의 계율을 어길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를 낮추어서 그들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갔던 것이다. 이런 원효의 진면목은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야 알려지기 시작했다.
원효의 교화 덕택이다
- 삼국유사 원효 불기 조 -
원효의 이런 노력은 훗날 신라의 불교가 모든 민중들에게 퍼져 황금기를 맞는 밑거름이 된다. 삼국유사는 이렇게 적고 있다. 새벽을 뜻하는 그의 이름 원효처럼 어두움에 잠긴 민중들에게 불교의 첫 새벽을 열어준 것이었다.
원효의 무행에 대한 의문이 비로소 풀린다. 원효는 이 땅에서 가장 천하고 고통받는 민중들에게 한걸음 더 다가가기 위해 승단의 계율을 어길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를 낮추어서 그들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갔던 것이다. 이런 원효의 진면목은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야 알려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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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깍으면 원효대사요, 머리를 두고 건을 쓰면 소성거사로다
온갖 몸으로 현실에도 알아보기 쉬우니 비록 두 모습 가졌으나 한바탕 연극인 것을
이 시의 제목은 소성거사찬, 고려시대 이규보가 원효를 예찬해서 지은 시다. 소성거사란 원효가 환속한 이후에 스스로를 낮추어서 부른 이름이다. 이규보가 시를 지을 당시 소성거사의 상, 즉 지금으로 치면 동상같은 것을 보고 시를 지었는데 그 동상은 우리가 현재 알고있는 것과 같은 승려의 모습이 아니라 머리를 기르고 있는 거사의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사회로부터 거사로서의 원효의 삶을 인정받고 동상까지 조성을 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원효에 대한 인식이 이렇게 바뀌게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온갖 몸으로 현실에도 알아보기 쉬우니 비록 두 모습 가졌으나 한바탕 연극인 것을
이 시의 제목은 소성거사찬, 고려시대 이규보가 원효를 예찬해서 지은 시다. 소성거사란 원효가 환속한 이후에 스스로를 낮추어서 부른 이름이다. 이규보가 시를 지을 당시 소성거사의 상, 즉 지금으로 치면 동상같은 것을 보고 시를 지었는데 그 동상은 우리가 현재 알고있는 것과 같은 승려의 모습이 아니라 머리를 기르고 있는 거사의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사회로부터 거사로서의 원효의 삶을 인정받고 동상까지 조성을 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원효에 대한 인식이 이렇게 바뀌게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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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율에 얽매이지 않는 무행으로 계단에서 축출됐던 원효, 그러나 말년에 화려하게 복귀한다. 그 계기는 금강삼매경론의 저술이었다. 이 경이 처음 발견되었을때 경에 주석을 붙이는 작업을 누구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원효만이 단 3일만에 그 일을 해냈다고 한다.
카마타 시게오 ㅣ 동경대 명예교수 : 금강삼매경소의 주석이 너무나 뛰어나서 금강삼매경론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론이라는 이름은 원래 보살이 쓴 것이 아니면 붙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모두들 원효는 보살이 환생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카마타 시게오 ㅣ 동경대 명예교수 : 금강삼매경소의 주석이 너무나 뛰어나서 금강삼매경론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론이라는 이름은 원래 보살이 쓴 것이 아니면 붙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모두들 원효는 보살이 환생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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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날 백개의 서까래를 구할때는 내 비록 참여하지 못했으나 오늘 하나의 대들보를 가로지르는 일은 나 밖에 할 수 없구나 - 송고승전 -
원효는 백고좌법회가 열리는 황룡사에서 금강삼매경론을 강론하게 된다. 그리고 백고좌법회에 참여하지 못했던 지난날을 빗대어 말한다. 교학에 관한 한 그 누구도 원효의 권위를 부인할 수 없었던 것이다.
원효는 백고좌법회가 열리는 황룡사에서 금강삼매경론을 강론하게 된다. 그리고 백고좌법회에 참여하지 못했던 지난날을 빗대어 말한다. 교학에 관한 한 그 누구도 원효의 권위를 부인할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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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원효에 대한 본격적인 인식전환의 계기는 일본으로부터 왔다. 혜공왕 15년인 779년, 원효가 선조인 설중업은 일본의 사신으로 간다. 이때 그는 오미노 미후네를 만나게 된다. 승려생활을 하다 환속한 오미노 미후네는 한문학의 대가로 일본의 고위관료를 지낸 인물이다.
시게마쓰 쇼텐 ㅣ 일본 보림사 주지 : 오미노 미후네는 동대사의 승려였는데 화엄교학에 조예가 깊었다고 합니다. 그는 흥문 천황의 증손자였습니다. 금강삼매경론이 일본에 전해졌을 때 승려였던 그는 그것을 배웠습니다. 그 후 환속해서 일생을 보냈습니다.
시게마쓰 쇼텐 ㅣ 일본 보림사 주지 : 오미노 미후네는 동대사의 승려였는데 화엄교학에 조예가 깊었다고 합니다. 그는 흥문 천황의 증손자였습니다. 금강삼매경론이 일본에 전해졌을 때 승려였던 그는 그것을 배웠습니다. 그 후 환속해서 일생을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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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찌기 원효 거사가 지은 금강삼매경론을 보고 감동을 받았으나 그를 만나지 못해 한으로 여겼다
이제 그의 후손을 보니 기꺼이 시를 써서 준다 - 삼국사기 -
금강삼매경론을 읽고 크게 감동한 오미노 미후네를 설중업을 크게 반겨주고 시까지 지어준다. 이 사건은 신라사람들로 하여금 원효를 새롭게 인식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일본에서 돌아온 사람들을 중심으로 원효를 기리는 작업이 시작된다. 이렇게 해서 세워진 것이 바로 사당화상비, 비석은 원효가 생전에 가장 오래 머물렀던 고선사에 세워졌다.
이제 그의 후손을 보니 기꺼이 시를 써서 준다 - 삼국사기 -
금강삼매경론을 읽고 크게 감동한 오미노 미후네를 설중업을 크게 반겨주고 시까지 지어준다. 이 사건은 신라사람들로 하여금 원효를 새롭게 인식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일본에서 돌아온 사람들을 중심으로 원효를 기리는 작업이 시작된다. 이렇게 해서 세워진 것이 바로 사당화상비, 비석은 원효가 생전에 가장 오래 머물렀던 고선사에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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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이 건립된 것은 원효가 죽은지 120년 뒤, 이 비가 세워짐으로서 원효는 국가적 차원에서 재평가를 받게 된 것이다.
김상현 교수 ㅣ 동국대 사학과 : 비를 세우는 일이었고 두번째는 원효의 소상을 절에 모시는 일이었는데 원효의 소상이 거사상이었다고 하는 것이 이 비편에 나타나고 있어 주목되고 더구나 훗날 왕이 되는 각관 김운승이 참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라사회 전체에서 원효를 새롭게 인식하고 재평가하는 노력이 있었던 것으로 이 비는 말해줍니다.
김상현 교수 ㅣ 동국대 사학과 : 비를 세우는 일이었고 두번째는 원효의 소상을 절에 모시는 일이었는데 원효의 소상이 거사상이었다고 하는 것이 이 비편에 나타나고 있어 주목되고 더구나 훗날 왕이 되는 각관 김운승이 참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라사회 전체에서 원효를 새롭게 인식하고 재평가하는 노력이 있었던 것으로 이 비는 말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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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에 대한 평가와 인식은 고려시대에 더욱 높아졌다. 대각국사 의천은 원효를 제2의 부처로 칭송되는 마명용수에 기려 추앙하고 화쟁국사비를 세운다. 그러나 이 비석 역시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숭유억불을 외쳤던 조선시대에 원효의 전기도 기념비도 다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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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원효가 많은 사람에게 완전히 잊혀진 것은 아니었다. 전국의 크고 작은 사찰과 암자는 원효와 관련된 설화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다소 과장되고 허황되기까지 한 설화들, 그것은 민중속에 여전히 살아있는 원효의 생명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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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0년전 이 땅을 살다간 원효, 원효는 저술을 위해서 분황사에 머물렀던 시기를 제외하고는 평생 이름있는 사찰에는 머물지도 않았다. 교단부의 핵심에도 있지 못했다. 때문에 그의 일생에 관한 기록이 거창하게 역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지는 못하다.
그러나 그 대신 원효가 얻은 것은 민중의 마음이었다. 당대의 그 누구보다도 많은 공부를 하고 많은 책을 지었던 원효, 그러나 원효는 단지 자신의 지식과 사상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는데 그친 것이 아니라 백성의 삶 속으로 뛰어들었다. 백성들과 고락을 함께 하며 구원의 희망을 제시했다. 1300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이 시대에도 원효가 살아있는 이유는 바로 이것, 항상 민중들의 편에 서서 고민을 하던 혁명적인 사상가이자 실천하는 지식인이었다는 사실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원효의 면모는 지금껏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다. 그동안 무지와 편견속에 가려졌던 원효의 본모습을 찾아내 설화속의 고승이 아니라 역사속의 인물로 살려낼 때 우리는 비로소 엄격한 계급사회 속에서 인간의 평등을 부르짖고 갈등과 분열의 시대에 진정한 화합의 길을 제시했던 위대한 사상가, 원효의 참모습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대신 원효가 얻은 것은 민중의 마음이었다. 당대의 그 누구보다도 많은 공부를 하고 많은 책을 지었던 원효, 그러나 원효는 단지 자신의 지식과 사상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는데 그친 것이 아니라 백성의 삶 속으로 뛰어들었다. 백성들과 고락을 함께 하며 구원의 희망을 제시했다. 1300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이 시대에도 원효가 살아있는 이유는 바로 이것, 항상 민중들의 편에 서서 고민을 하던 혁명적인 사상가이자 실천하는 지식인이었다는 사실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원효의 면모는 지금껏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다. 그동안 무지와 편견속에 가려졌던 원효의 본모습을 찾아내 설화속의 고승이 아니라 역사속의 인물로 살려낼 때 우리는 비로소 엄격한 계급사회 속에서 인간의 평등을 부르짖고 갈등과 분열의 시대에 진정한 화합의 길을 제시했던 위대한 사상가, 원효의 참모습을 만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