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를 다녀와서
▢ 일 시 : 2011. 7. 9 ∼ 7. 10 (1박 2일 간)
▢ 장 소 : 일본 대마도
▢ 누구와 : 읍지발간 편찬위원 13명
▢ 이용 여객선 : 씨블라워 ∥호
▢ 이용 버스 : 국 내 - 충남관광 충남 72 바 4262호
일 본 - 대마관광 장기(長崎) 227 か⋅⋅39
▢ 가이드 : 모두투어여행사 이옥분(여)
▢ 일 정
○ 제1일차 (7. 9. 토요일. 부산 비, 대마도 갬)
부산 모텔 출발(06:20) ⇒ 혜림가든 조찬(06:30∼07:00) ⇒ 국제여객터미널 도착(07:45) ⇒ 출국준
비⋅심사 ⇒ 씨풀라워호 승선(09:15) ⇒ 부산항 출발(09:30) ⇒ 대마도 이즈하라항 도착(12:40) ⇒
입국대기⋅심사(12:45∼14:15) ⇒ 시내관광 출발(14:30) ⇒ 수선사(최익현순국비) 관람(14:55∼
15:10) ⇒ 이왕조종가(덕혜옹주)결혼봉축기념비(15:25∼15:45) ⇒ 고려문⋅조선국통신사기념비
⋅역사민속자료관 관람(15:52∼16:20) ⇒ 신사(16:25∼16:45) ⇒ 디아라마트 쇼핑(16:47∼17:30)
⇒ 관월호텔 도착(17:40) ⇒ 식사 후 숙박(202∼207호)
○ 제2일차 (7. 10. 일요일. 맑음)
기상(06:30) ⇒ 아침 식사(07:00) ⇒ 호텔 출발(07:40) ⇒ 카미자카공원 전망대 (08:07∼08:30) ⇒
면세점 쇼핑(08:50∼09:30) ⇒ 만관교(10:08∼10:18) ⇒ 화다도미(와타즈미)신사 관람(10:46∼
11:03) ⇒ 에보시다케 전망대(11:10∼11:30) ⇒ 한국전망대(12:45∼13:00) ⇒ 오찬(13:20∼13:45)
⇒ 미우다해수욕장(13:55∼14:25) ⇒ 히타카츠항 이동 씨풀라워호 승선(14:20) ⇒ 대마도 출발
(15:00) ⇒ 부산국제여객터미널 도착(16:55) ⇒ 부산 출발(17:22) ⇒ 칠곡휴게소 석식(19:05∼19:45)
⇒ 공주휴게소(21:21∼21:31) ⇒ 서산요금소(22:15) ⇒ 서산 도착(22:30)
▢ 여행 후기
아침 5시에 기상하여 밖을 내다보니 중부와 남부지방에 호우경보가 내린 상태라 그런지 비가
내리고 있었다. 대마도에 가면 날씨가 좋아서 이번 여행을 무사히 끝낼 수 있게 되기를 기원 했다.
숙소를 나와 인근 식당에서 해장국을 하고 부산국제여객터미널로 이동하여 가이드를 만나
출국수속을 하였다. 출국장에는 대마도로 등산을 가는 팀들과 우리와 같이 여행을 가는
사람들로 분비였다.
출국심사대를 거처 면세점에서 쇼핑을 한 후 360여명을 태우는 씨풀라워Ⅱ 여객선에 승선하였
다. 우리 일행은 매점 앞의 C석에 자리가 배정되었다. 부산항을 빠져나오자 영도와 많은 배들이
정박해 있는 부산항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고, 영도에서 건너편으로 바다를 가로질러 다리를
놓으려고 높게 교각이 건설되고 있었다.
부산국제여객터미널에서 출국수속
출국심사 후 여객선 부두로 이동
면세점 쇼핑
씨풀라워Ⅱ여객선에 승선하여
부산이 점점 멀어지자 날씨도 좋아지고, 바람도 없는 편으로 배가 농이지 않아 멀미를 하는
사람이 없었다. 점심때가 되자 가이드가 도시락을 나누어 주어 식사를 하였는데 그런대로 먹을
만하였다. 섬이 보인다는 소리가 있어 밖을 내다보니 대마도가 시야에 들어오고, 남쪽 끝자락
전면에 작은 등대섬이 자리하고 있었다. 섬에 가까워지자 여러 척의 소형어선들이 조업을 하고
있었다.
각 여행사 가이드들은 앞으로 나오라는 안내방송이 나오더니 내리는 순서를 추첨 하였다.
입국심사를 받는데 시간이 많이 걸려 많은 승객이 한꺼번에 내리면 복잡해 순서에 의해 천천히
내린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제일 마지막으로 배에서 내려 입국심사장에 들어가니 지문과 얼굴
사진을 찍느라 시간이 많이 소요되어 심사대기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옆 의자에 앉아 한 시간
반을 기다리다 마지막으로 양쪽 검지 지문과 얼굴 사진을 찍고 세관심사대를 거처 입국 절차를
끝내고 대마도의 이즈하라에 도착하였다.
이즈하라항 도착 하선
입국심사 대기
대마도는 일본 나가사키현(長崎縣)에 딸린 섬으로 전체가 쓰시마시에 속한다. 면적은 708㎢
(제주도의 40%)이며, 인구는 15,928세대에 39,716명이 거주하고 있다. 시 아래 6개읍[이즈하라
(嚴原町), 미쯔시마(美津島町), 도요타마(豊玉町), 미네(峰町), 가미아가타(上縣町), 가미쯔시마
(上對馬町)]가 있고, 이즈하라에 쓰시마시청이 있다. 중앙부의 아소만[淺茅灣]과 인공적으로 굴착
된 만제키세토(萬關瀨戶:瀨戶는 水路)에 의해 상·하 두 섬으로 나뉜다. 섬 전체가 해발고도 500m
내외의 산지이고, 산지의 계곡들은 곡벽이 험준하다. 높은 산으로 519m의 시라다케와 558m의
아리아케가 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등산여행을 많이 가는 산이다.
이즈하라항은 조그마한 항구였다. 시내로 나와서 대기하고 있던 차에 짐을 실어 호텔로 보내고,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시내 관광에 들어갔다. 부산에서 비가 온 것과는 대조적으로 맑은 하늘에
뭉게구름이 피어오르는 쾌청한 날씨로 좀 무더운 편이었다.
시내는 쓰레기 하나 없이 청결하고, 모든 건물도 조그마하고 아담하여 산뜻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특히 놀라운 것은 잘사는 일본인들이 모두 소형차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차 전면
유리 상단 중앙에 1-12 숫자가 있는 딱지가 붙어 있었는데 검사 달을 표시한 것이라 하였다.
소형차가 주류를 이루고 있어서 그런지 도로 폭도 좀 좁은 것 같았다. 깨끗하게 단장된 자그마한
집안의 좁은 공간에도 잘 다듬어진 나무와 화분이 놓여 있어 이곳 사람들의 정서적인 면을 엿볼
수 있었다. 이러한 도시의 분위기에서 이곳 사람은 검소하게 생활하면서 주변을 청결하게 가꾸는
공동체 의식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잘 정비된 시가지 모습
시가지를 돌아보며 가이드 설명을 ---
정토종(淨土宗) 원성산(圓盛山) 구품원(九品院) 수선사(修善寺)에 들렀다. 석축을 높게 쌓아
중앙의 돌계단을 올라 들어갈 수 있었다. 계단 우측에 수선사 표지석과 안내표지판이 있었다.
절 안으로 들어가니 수선(修善)이란 현판이 걸린 본전이 있고, 우측에 화강암으로 된 비석이
있었는데 중앙에 大韓人崔益鉉先生殉國之碑라고 새겨져 있고, 측면에 순국비 건립자 명단이
기록되어 있었다.
최익현 선생 순국비
▶ 韓國側代表委員 黃壽永
委員 日海財團, 同 金基桓, 同 南碩煥, 同 鄭永鎬
▶ 日本側代表 世話人 永留久惠
世話人 津江篤朗, 世話人 淵上淸, 世話人 齊藤弘征, 世話人 橘 厚志,
世話人 孟仁在, 世話人 鄭明鎬, 世話人 長鄕嘉壽, 世話人 水松勝助
또 비석 앞쪽에 이 비석에 대한 안내표지석도 있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비석 안내 표지석 내용
勉庵 崔益鉉先生은 大韓帝國의 偉大한 儒學者요 政治家였다. 韓末의 어려운 政勢에서도
所信을 屈하지 않고 愛國抗日運動을 일으켜 日本官憲에 의해 對馬島로 護送되어 왔으며
謫舍에서 殉國하셨다.
修善寺 創建에는 百濟僧法妙尼와 關係가 있다고 전하여 韓國과는 因緣이 깊다. 先生이
殉國한 후 對馬島 有志들이 遺體를 모시고 忠節을 새기며 제사를 올렸다.
이렇듯 由緖깊은 곳에 殉國碑를 세워 先生의 愛國愛族의 뜻을 기리고자 한다.
崔益鉉先生殉國之碑建立委員會
수선사로 오르는 계단
최익현 선생 순국비
최익현(1833∼1906)선생은 경기도 포천 출생으로, 이항로의 제자이다. 1833년 12월 5일 경기도
포천군(抱川郡) 가범리(嘉范里)에서 대(岱)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
(字)는 찬겸(贊謙)이며 호(號)는 면암(勉庵)이다.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서 초명(初名)을 기남(奇男)
이라고 하였다. 면암은 집안이 가난하여 4세 때 단양(丹陽)으로 옮긴 것을 비롯하여 여러 지방으
로 옮겨 다니며 살아야 했다.
14세 때에 부친의 명에 따라 성리학의 거두인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문인이 되어, 우국애민
(憂國愛民)적인 위정척사의 사상을 이어 받아 그것을 위국여가적(爲國如家的)인 충의사상과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춘추대의론으로 승화․발전시켜 자주적인 민족사상으로 체계화하였다.
23세 때에 명경과(明經科) 갑과(甲科)에 급제하여 관직생활을 시작하였으나 재임 중 꾸준히 부정
부패와 구국항일투쟁을 끊임없이 전개하였다. 그의 정치사상은 화서 이항로 계열의 위정척사였
으며 공맹(孔孟)의 왕도정치(王道政治) 구현을 이상으로 하였다.
철종 재위 중인 1855년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과 사헌부, 사간원 등에서 근무했다. 그는 언관
벼슬에 주로 있으면서 일찌감치 조선조 사림의 최대 미덕인 강직한 성품을 드러냈다. 왕권
강화를 위해 경복궁을 중건하는 흥선대원군의 정책을 반대하여 관직을 빼앗기기도 했다.
어려서 아버지의 도움으로 즉위한 고종이 성인이 되면서 흥선대원군의 그늘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일었고, 여기에는 부인인 명성황후와 여흥 민씨 척족 세력들이 가담했다. 대원군을 비판
했던 최익현은 동부승지로 기용되어 반 흥선대원군파의 첨병에 서게 된다. 서원을 철폐한 흥선대
원군의 정책을 맹렬히 비판하는 등 그를 공격하여 결국 대원군을 실각시켰다.
그는 임금의 아버지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제주도에 위리안치 되는 형벌을 받았으나 이는 실권을
잡은 민씨 세력의 형식적인 처벌이었다. 그러나 최익현은 곧 외국과의 통상을 논의하기 시작한
민씨 정권과도 곧 마찰을 빚었다. 일본과의 통상 조약 체결을 극렬 반대하다가 이번에는 흑산도에
위리안치된 것이다.
이후로 통상 확대와 여러 외세의 유입이 계속되면서 최익현은 이에 결사 저항하는 위정척사론의
거두로 활동하게 된다. 1894년 발생한 동학농민운동과 그해 친일 정권 성립과 함께 단행된 갑오
개혁에 크게 반발했고, 이듬해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의병을 조직했다가 체포되었다.
이 당시 그가 상소를 올리며 적은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어도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라는 말은
강제적 단발령에 목숨을 걸고 반발했던 당시 유학자들의 생각을 잘 알 수 있는 구절이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을 계기로 그는 공개적으로 의병을 모집하였다. 임병찬, 임락 등과 함께
전라북도 정읍 에서 거병하였으나, 곧 관군에게 패하여 체포되었고 대마도에 유배되었다.
유배 당일, 대마도주의 일본식 단발 요구에 대한 항의의 단식을 시작하였으나, 대마도주의 사과
및 왕명으로 단식을 중단을 하였다. 하지만, 단식의 후유증으로 3개월 뒤의 발병으로 74세의 나이
로 사망하였다. 묘소는 충청남도 예산군 관음리에서 대전현충원으로 이장하였으며, 문집으로는
『면암집』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이곳을 뒤로하고 덕혜옹주 결혼 봉축기념비를 찾아 같다. 입구 좌측에 있는 이왕조종가결혼봉축
기념비 표지판을 지나 큰문을 통과하여 안으로 오르니 큰 규모의 기념비가 있었다.
비 전면 중앙에 李王家宗伯爵家御結婚奉祝記念碑라고 새겨져 있고, 하단 좌측에 對馬島支廳長 赤眞臣 謹書라 되어 있었다.
또 후면에 維時 昭和六年 五月 吉日이라 되어 있어 1931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옆에 있는 오석의 안내표지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었다.
朝鮮國 第二十六代 高宗의 王女 德惠翁主는 一九三一 年 五月 宗武志公과 結婚하여 同年
十一月에는 對馬를 訪問했다. 옛 對馬島主 宗家當主가 朝鮮의 王女를 夫人으로 맞이하여
來島하였으므로 熱烈한 歡迎을 받았다.
이 碑는 두 분의 成婚을 祝賀하여 對馬島 居住 韓國人들이 建立 했다. 한편 淸水山城에는
對馬島民들이 慶祝하여 세우고 심었던 記念碑와 철쭉이 지금도 잘 남아 있다.
結婚生活은 많은 苦難이 있었으나 딸 正惠를 낳아 서로 信賴와 愛情이 깊었다. 그러나 兩國의
關係는 갈등이 심하여 두 분은 一九五五年에 離婚하였으며 武志公은 一九八五年에, 德惠翁主
는 一九六一年 歸國 後 一九八九年에 別世하였다.
이제 歷史에 묻혀 있던 이 記念碑를 再建하여 두 분의 힘들었던 생애를 되돌아보면서 兩 國民의
진정한 和解와 永遠한 平和를 希望한다.
덕혜옹주결혼봉축기념비 앞에서
덕혜옹주결혼봉축기념비
이곳에서 조금 아래쪽에 있는 고려문과 조선통신사기념비, 대마역사민속자료관을 둘러 보았다.
진입로 우측에 고려문이 있고, 좌측에 기념비와 민속자료관이 있었다.
기념비 전면 중앙에 『朝鮮國通信使之碑』라 새겨져 있고, 후면에는 『一九九二年 二月 十二日
建立, 朝鮮國通信使之碑建立推進委員會, 大韓民國 文學博士 齊山 崔世和 書』라고 되어있었다.
오석의 안내표지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었다.
조선국통신사비
朝鮮後期의 通信使는 宣祖 四十年(1607)부터 純祖 十一年(1811) 사이에 十二回 파견되었다.
이들은 朝鮮과 日本 사이의 善隣友好를 위한 國家外交의 使節이며, 아울러 一大 文化使節
이기도 하였다. 때로 正使를 비롯한 五百名에 이르는 使行은 그 行列이 壯麗하기 이를데 없었고,
이들은 先進學問에 洗練된 藝術, 그리고 絢爛(현란)한 새 文化의 香薰을 전해주었다.
이 通信使의 有形⋅無形의 행적은 지금도 日本 各地에 역력히 남아있어 近世 日本이 鎭國時代에
도 言語와 慣習을 달리하면서도 성성과 믿음으로 交流한 이웃 나라와 그들에게 한층 尊崇의 情을
더해가고 있다. 오늘날 새로운 東아시아 國際社會 形成에 즈음하여 朝鮮通信使의 영원한 歷史
的 意義를 더욱 깊이 생각하게 된다.
후면에는 조선국통신사지비 건립위원회 명단이 새겨져 있는데 한국 측 위원은 대표 黃壽永
외 13명이고, 대마도 측 위원은 대표 永留久惠 외 6명으로 되어있었다.
민속자료관은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대마도를 통치했던 소오(宗)씨 가문의 일기와 대마도에서
발굴된 유물이 있고, 또 고려대반야경, 고려청자, 부산가마에서 생산된 다완(茶碗), 조선통신사행
렬도, 구성도 등의 우리와 관련된 사료들이 소장되어 있어 눈길을 끌었다.
조선국통신사비
민속자료관 관람
조선통신사행렬도
朝 鮮 通 信 使 構 成 圖
회 수 | 년 도 | 년 호 | 정 사 | 인 원 | 목 적 |
1 | 1607 | 宣祖 40 | 呂祐吉 | 504 | 修好. 回答兼刷還 |
2 | 1617 | 光海君9 | 吳允謙 | 428 | 大坂平定祝賀.回答兼刷還 |
3 | 1624 | 仁祖 2 | 鄭 岦 | 460 | 家光襲職祝賀.回答兼刷還 |
4 | 1636 | 〃 14 | 任 絖 | 478 | 泰平祝賀 |
5 | 1643 | 〃 21 | 尹順之 | 477 | 家綱誕生祝賀. 日光參詣 |
6 | 1655 | 孝宗 6 | 趙 珩 | 485 | 家光襲職祝賀. 日光參詣 |
7 | 1682 | 肅宗 8 | 尹趾完 | 473 | 綱吉襲職祝賀 |
8 | 1711 | 〃 37 | 趙泰億 | 500 | 家宣襲職祝賀 |
9 | 1719 | 〃 45 | 洪致中 | 475 | 吉宗襲職祝賀 |
10 | 1748 | 英祖24 | 洪啓禮 | 475 | 家重襲職祝賀 |
11 | 1764 | 〃 40 | 趙 曮 | 477 | 家治襲職祝賀 |
12 | 1811 | 純祖11 | 金履喬 | 328 | 家齊襲職祝賀 |
고려문 안으로 들어가니 우측에 큰 암반 좌대위에 자연석을 세워 건립된
『誠信之交隣 雨森芳洲先生顯彰碑』가 있었다.
이곳을 뒤로하고 어느 신사로 이동하여 오르는 계단에서 단체기념 사진을 촬영하고 신사
내부를 구경하였다, 奉祝 御大典記念碑가 있고, 신사 건립기금을 희사한 사람들의 이름
을 새긴 탑과 비석이 죽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청동색갈의 마신상도 특이 하였다.
마신상이 있는 신사
그동안 도보로 시내 관광을 하여 피로감이 있었는데 디아라 마트에서 쇼핑을 하며 휴식
을 취하도록 시간을 주어 마트내부로 들어가니 냉방이 되어 시원하였다. 잠시 땀을 식히
고 내부를 돌아보았는데 가격은 우리보다 좀 비싼 것 같았고, 식료품은 다양하게 있었는
데 소포장으로 깨끗하였다.
어린이 완구와 의류점은 규모가 작고 물건이 다양하지 못하였다. 바나나와 빵을 구입하
여 간식을 하며 쉬다 버스가 도착해 우리일행 13명과 함께 팀을 이룬 다른 팀원 14명이
차에 동승하여 숙소로 이동하였다.
관월(觀月)이란 호텔이었는데 시설은 아주 빈약하였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전망이
좋은 곳에 있어 밤에 불을 밝힌 오징어잡이 배들의 불빛이 아름다웠고, 다음날 아침
일출도 황홀하였다.
슈퍼마켓에서 쇼핑
관월 호텔 전경
호텔에서 바라본 일출
관월호텔의 식당(조식)
아침식사 후 짐을 챙겨 버스에 올라 마지막 날 첫 번째 코스로 카미자카공원을 찾았다.
차에서 내리니 上見坂園地라는 간판이 우리를 맞아 주었고, 해발 385m의 카미자카
콘크리트전망대에 오르니 눈앞의 초원 건너로 리아스식 해안인 아소만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전망대에서 내려와 울창한 숲길을 따라 걸으니 습도가 높아 나무에
이끼류가 끼어 있었고, 오래 된 것 같은 군용 폐 막사도 있었다.
카미자카공원 관람
공원에서 내려오는 길이 협소하여 차를 만나면 교차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는데 산을
훼손하지 않으려고 확장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산에는 삼나무로 조림을 하여
울창하게 숲을 이루고 있었다. 잡목조림이 많은 우리나라와 대조적이었다.
다음은 면세점에 가는데 각질 제거 화장품과 게르마늄 팔지가 유명한 상품이라고 가이
드가 설명을 하였다. 면세점에 내리니 규모가 작았다. 주로 각질제거제와 전기면도기를
구입하였다.
면세점에서 쇼핑
이어 타원형의 붉은색 골조로 이루어진 다리 앞 주차장에 내렸는데 만관교(萬關橋)였다.
만관교(만제키바시)는 아소만(浅茅湾)과 미우라만(三浦湾) 사이에 개착된 만제키세토
(万関瀬戸)라 불리는 운하에 놓여있는 다리이다. 현재의 다리는 3번째 바뀐 것으로
1996년 건설되었다.
만제키세토는 1900년 구 해군이 아소만에 있는 군함을 쓰시마(対馬) 동쪽 해상으로
빨리 이동시키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하였다. 당시는 폭 25m, 깊이 3m이었으나
1975년 폭 40m, 깊이 4.5m로 확장하였다고 한다.
만제키세토는 対馬島(쓰시마섬)를 위 아래로 나누는 경계로 북부를 上島(가미시마), 남부를
下島(시모시마)라 부른다. 다리 위에서 조류의 소용돌이를 구경할 수 있었으며 다리는
인공미가 아름다웠다.
만관교 모습
만관교에서 바라본 만제키세토 운하
다음으로 화다도미신사(和多都美紳士)를 찾아 갔다. 화다도미(와다도미)신사는 바다를
끼고 작은 계곡 사이에 자리하고 있었다. 신사는 히코호호데 미노미코토와 토요타마히메
노미코토를 기리는 해궁으로 바다 신을 모시는 가장 유서 깊은 신사로 예로부터 용궁전
설이 전해지고 있다 하였다.
본전으로 들어가는 입구 우측에 신사 표지석이 있고, 또 본전(本殿)ㆍ사전(社殿)과 일직
선으로 5개의 문이 있었는데 2개는 바다 속에 세워져 있어 밀물과 썰물에 따라 그 모습이
변하여 먼 옛날 신화시대를 연상할 수 있는 신비로운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우리가 갔을 때는 간조시간이라 문 하나는 물이 빠져 있어 그곳 까지 들어가 기념촬영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전 좌측으로 난 길을 따라 오르니 울창한 숲속에는 아름드리
나무가 빽빽이 자라고 있었다.
화다도미 신사
화다도미 신사의 문
차는 울창한 숲길을 올라 에보시다케전망대(烏帽子岳展望所)에 올랐다. 계단을 올라
전망대에 오르니 사방으로 시야가 확 트여 아름다운 풍경을 조망하면서 기념촬영을
하였다.
이곳을 뒤로하고 한국전망대(韓國展望臺)로 이동하였다. 전망대 주차장에 내리니 전방
에 2층 구조 팔각지붕의 정자가 있고, 그 옆에 朝鮮國譯官使殉難之碑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 주변에는 유명한 은 광산이 있었는데 징용되어 광산에서 일하던 우리나라 사람들
이 부모형제와 고향이 그리울 때면 이곳에 와서 한국 쪽을 바라보며 망향의 한을 달랬다
고 하는데, 우리가 갔을 때도 멀리 부산 땅의 육지가 희미하게 보였다.
순란지비 바로 앞에 있는 오석의 朝鮮國譯官並從者殉難靈位 비문에 『1703年 2月 5日
(음력) 순난한 112位의 靈諱를 알지 못하여 1991年에 112개의 靈石으로 殉難碑를 建立하
였다. 최근 「宗家文庫史料」중에서 「渡海譯官並從者姓名」이 墨書小冊子가 發見되어
오늘 殉難 三百周忌를 맞이하는 날에 朝鮮國譯官並從者殉難靈位를 새겨 길이 追悼하고
자 한다.』라고 되어 있고, 殉難者 112인의 명단이 새겨져 있는데 정역(正譯) 韓天錫,
부역(副譯) 朴世亮, 上官 28인, 中官 54인, 下官 24인, 宗家藩士 2인, 船手方 2인이고,
또 다른 오석의 안내표지석이 있는데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었다.
朝鮮 숙종 29년 癸未(1703) 2月 5日(음력) 淸明한 아침에 부산을 떠난 韓天錫 이하 108
명의 朝鮮譯官 一行은 저녁 무렵 대마도의 鰐浦(악포)入港 직전에 갑자기 불어 닥친 폭풍
우로 애석하게도 전원이 죽음을 당하였다. 당시 漢陽을 비롯한 각지에서 선임된 이 使節
은 正副兩使와 상관 28명, 중관 54명, 하관 24명으로 구성 되었는데, 이들은 대마도의 第
三代 藩主宗義眞의 죽음을 애도하고 新藩主인 第五代 宗義方의 襲封을 축하하기 위하여
파견된 국가외교 사절단이었다.
江戶時代 쇄국체제 하에서도 일본이 유일하게 정식으로 국교를 유지한 나라가 조선이
었다. 그것은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朝鮮과의 신뢰를 지켜온 선린외교였다.
이러한 외교정책을 수행함에 있어 조선에서 江戶까지 왕복했던 通信使와는 달리 대마도
의 府中이었던 嚴原까지 왕복했던 一行 百名 정도의 국가사절이 譯官이었다.
江戶 幕府가 조선과의 외교에 있어서 日本측의 권한을 對馬藩에게 일임하고 있었던
것만 보아도 진정한 선린 외교의 주축을 이루었던 것이 바로 이 譯官이라고 하겠다.
강호시대 조선의 史料를 보면 역관이 대마도를 방문한 것이 무려 51回나 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험한 풍랑 속에 묻힌 이 역관 일행의 배에는 4명의 對馬藩士도
승선하여 비운을 함께 하였다.
오늘날 점차 더해가는 한⋅일 交流의 새로운 時代를 맞아 『誠信之交隣』의 정신으로
殉死한 一行의 넋을 위로하며 양국 간의 영원한 우호증진을 돈독히 하기 위하여
여기에 112개의 靈石으로써 碑를 세워 길이 顯彰코자 한다.
이러한 표석의 내용을 읽고 순국하신 선조들의 넋이 편안히 영생하기를 빌면서 이곳
대마도에는 우리 선조들의 애환과 체취가 배어있는 곳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국전망대에 있는 조선국역관사순난지비
한국전망대를 뒤로하고
다음 여정으로 목욕코스가 있었는데 취소하고 히타카츠항 인근으로 이동하여 우동으로 오찬을
하였다. 노란색의 오리지널 닥광과 면발이 좀 굵은 우동의 맛이 좋았다.
식후경으로 1996년 일본의 해안 100선에 선정된 유명 해수욕장에 들어간다는 미우다해수욕장
을 구경하였다. 해안선의 길이는 크지 않았지만 고운입자의 모래로 이루어진 새하얀 백사장과 소
나무가 자라고 있는 바위섬이 어우러져 멋진 운치를 간직하고 있었으며 캠프장 시설도 완비되어
있었다. 신발을 벗고 에메랄드 쪽빛 물속을 거니는 일행도 있었으며, 아름다운 풍광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였다.
히타카츠항의 식당에서 오찬
백사장이 아름다운 미우다해수욕장
히타카츠항의 씨풀라워Ⅱ 여객선
미우다해수욕장 관광을 끝으로 대마도 여행을 마무리 하고 히타카츠항으로 이동하여
씨풀라워Ⅱ 여객선에 승선 하였다. 일행들은 올 때와 같은 C석의 거의 같은 위치에
자리가 배정되었다. 배안은 혼잡 하였는데 만석이 되었다고 했으며, 배안의 매점에서는
현금판매를 먼저 하고, 나중에 카드결재 판매를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양주와 담배를
구입하였다.
대마도를 출발한지 두 시간이 못되어 부산항에 도착하였는데 부산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대마도의 날씨가 좋아서 여행을 효율적으로 무사히 끝내고 돌아 온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였다.
국제여객터미널을 나온 일행은 대기하고 있던 버스에 올랐다. 칠곡휴게소에서 자유식
으로 저녁을 한 후 비 내리는 어둠속을 달린 버스는 무사히 원점으로 회귀하여 1박 2일
간의 대마도 여행을 마무리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