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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만에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3월 24일이다. 벌써 3월도 다가고 있다. 인천공항에 내린 지도 한 달하고도 열흘이 흘렀다. 지나간 시간은 이렇듯 빠르다. 빠른 시간에 반비례해 후기 마무리는 점점 늦어지고 있다. 이러다 보니 이젠 꾀가 난다. 조금만 더 집중하자고 스스로 최면을 걸었다.
각설하고, 산속은 2월 9일 목요일이고 11일차다. 여행사계획은 페리체에서 데보체까지 약 10km 내려간다. 그러나 다음날 도착지인 남체까지 12km를 더 가자는 경험자 홍 선생의 의견이 나왔다. 일행 모두가 동의하고 이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가이드가 보충 설명을 한다.
“맞는 말이다. 걷는 마지막 날 지친 상태로 24km는 무리다. 거기다 루클라까지 200m를 올라가야 한다. 지금 상태에서 남체까지 충분히 갈 수 있다.”
이래서 페리체(Pheriche, 4270) → 쇼마레(Shomare, 4010) → 팡보체(Pangboche, 3930) → 데보체(Deboche, 3710) → 텡보체(Tengboche, 3860) → 풍기 텡가(Phuki Tenga, 3250) → 사나사(Sanasa, 3600) → 캉주마(Kyanjuma, 3550) → 상보체(Shyangboche, 3720) → 남체(Namche, 3440)까지 22km다. 고도는 830m를 내린다.
고도를 올릴 땐 3000m대에 진입하면서 1차 고소적응을 한다. 보통 이틀을 머문다. 증세가 오면 이때라도 무조건 내려가야 한다. 올라와서 생겼으니 내려가면 된다. 몇 년 전 티베트 여행 때는 작은 산소통을 가지고 올랐었다. 만 원이었다. 3500m가 최고점일 때다. 이번에 보니 산소통 언급은 아예 없었다.
페리체에서 올라갈 때 2박, 내려올 때 1박을 했다. 5천m에서 4천m로 내려온 첫 날이다. 다시 와보니 편안했다. 긴 밤의 고독도 없었다. 일체유심조라고 이렇듯 사람은 마음먹기에 따라 삶의 질을 택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다. 씻지 못해 오는 갑갑함에 대한 기록이 없는 걸 보면 이런 것까지도 해소되는 모양이다.
바로 옆 침대 임 선생과 바로 옆 방 홍 선생의 코고는 소리가 조화롭고 아름답게 들렸을 정도다. 둘의 코고는 소리는 먼저보다 컸고 임 선생은 가끔 작은 신음소리를 더했다. 긴 밤을 보내며 메모장을 넘기다 보니 박범신 작가의 소설 ‘촐라체’에 대해 간략한 메모가 있었다. 당시 왜 기록했는지 기억은 없다. 아마 페리체 근처 봉우리의 얘기라 그랬었나 보다.
촐라체는 에베레스트 서남서 17km, 남체바자르 북동북 14km 지점에 위치한 6,440m 봉우리다. 전 세계 젊은 클라이머들이 오르기를 열망하는 꿈의 빙벽이기도 하다. 이 봉우리를 오른 우리의 젊은 등반가 박정헌과 최강식이 극적 생환을 한다.
서두에서 밝혔듯이 요즘 한 달 넘게 후기와 싸우고 있다. 이게 내 업보다. 계속 페이지는 늘어난다. 자료가 꼬리를 물기 때문이다. 결국 ‘촐라체’ 소설도 손에 넣었다. 그 원작이랄 수 있는 박정헌의 실화 『끈』도 지금 바로 내 옆에 있다. 이런 식으로 읽고 또 읽고 있다. 이젠 좀 마무리 하고 꽃피는 산야를 만났으면 한다.
논픽션 『끈』은 이런 얘기다.
「2005년 1월, 박정헌은 후배 최강식과 촐라체 북벽에 매달려 사흘 만에 정상을 밟았으나, 하산 도중 후배가 빙하 계곡에 빠지는 사고를 당한다. 두 사람은 갈비뼈와 다리가 부서지는 부상을 입어가며 스스로 죽음의 빙하 계곡에서 빠져나왔지만, 돌아가야 할 길은 아득하기만 했다.
물과 음식을 먹어본 지 벌써 며칠째, 손은 동상으로 검게 타들어가고 찢어진 얼굴에선 피가 흐르는 데다 부러진 발목은 자리를 이탈하여 덜렁거렸다. 중환자의 몸으로 영하 20도의 추위와 싸우며 이틀 밤을 산에서 보냈다. 성한 몸으로도 내려오기 힘든 빙벽과 사투를 벌이는 동안,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죽음을 추측했다.
촐라체를 오른 지 9일 만에 강인한 생명력과 아름다운 동지애가 부른 기적이 그들을 살게 했다. 자연은 가혹했으나 그들의 삶에의 열망은 죽음보다 강했고 두 사람의 믿음과 우정은 서로를 살렸다. 야크 할아버지와 그 딸의 헌신이 생환의 마침표를 찍는다.」
아침 6시에 어김없이 순돌이가 뜨거운 물을 가지고 방문을 두드린다. 우리는 이보다 20분 전에 일어나 출발 채비를 하고 있었다. 짐이 반으로 줄었다. 마음도 많이 편해졌다. 이젠 머릿속의 가려움은 만성이 되었으나 창피해서 밥 먹을 때도 모자를 벗지 못했다.
임 선생은 오늘도 출발 전 허벅지를 맨소래담으로 마사지를 한다. 깔끔한 짐 정리도 여전했다. 이빨도 열심히 오래 닦는다. 혈압약도 몇 번이나 그가 먹는 걸 보고야 나도 먹었다. 다음에 올 땐 맨 몸으로 올 생각이다.
아침식사로는 쌀밥에 꽁치구이가 나왔다. 깡통에 든 꽁치를 구웠다. 그동안 생각도 못한 일이다. 계란후라이, 볶음김치, 감자국이 입맛을 돋우는 데 한 몫을 했다. 김치와 깍두기에 손이 갈 틈이 없는 식단의 연속이다. 진 선생을 제외하고는 모두 밥맛이 돌아온 듯 하다. 미리 내려온 진 선생은 개인 숙식비로 27불을 추가로 계산했다.
식후 쾌변을 봤다. 가끔 먹는 청국장 가루 덕분이라고 확신한다. 생강 강정도 이번에 몸의 온도를 높이는 데 톡톡히 한 몫을 했다. 어물전 망신의 꼴뚜기는 입맛을 찾아줬다. 내가 이번 처음 여행에서 여러 번 실수도 하고 아쉬운 점도 많았지만 이러면서 험한 여행에 대한 노하우가 쌓여가고 있었다.
냇가를 걷다 작은 다리를 건너며 오르막이 시작되면서 페리체와 작별이다. 올 때 눈뭉치를 홍 선생에게 던졌던 곳이다. 언덕엔 계단식 밭이 있고 집 한 채가 있다. 사람은 없어 보인다. 겨울철에 효용에 따라 집을 비워두는 것도 고산의 특징이다. 확실한 건 한 번 지나온 길인 데도 모두가 새롭다는 거다. 아는 만큼 보고 아는 만큼 느끼려면 아직 멀었다.
“산 아래 돌담을 치고 땅을 왜 비워놓느냐.”
“풀이 자라는 곳이다. 풀이 자라면 잘라서 먹이로 판다.”
주 가이드 라나의 산길 리드는 최고였다. 그의 걸음걸이가 주말마다 산에 가는 내 눈에 당연히 포착되었다. 하루를 위한 산행과 평생을 위한 걸음에서 오는 차이가 컸다. 그동안 빨리 걷는 다는 지적을 수없이 받았다. 그러다 어느 시간이 지나면서 엄지손가락을 몇 번 펴보였다. 내가 잘 걷고 있다는 표현을 그렇게 했다.
“산에서 절대로 서두르지 마라. 잠깐 동안 KO 시킬 수 있다. 속도 조절과 업다운 두 번 정도면 된다.”
뒤 따라온 쿡하고 같이 가란다. 이러면서 4천m대도 벗어나고 3천m대로 내려온다. 쿡의 걸음도 절대 서두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앞으로 쉽게 나갔다. 그들을 따라 걸으면 힘이 들지 않았고 호흡도 편했다. 한국으로 돌아와 이런 식의 걸음 방법을 연습하고 있다. 조금만 더 몸에 익으면 별 무리 없이 산행을 즐길 수 있다고 확신한다.
쿡은 친구나 지인을 자주 만났다. 서로 반가움을 표시하고 안부를 묻는다. 고산족은 일생을 길 위에서 만나고 보낸다. 이들의 일상사 한 면을 보며 걸었다. 마니석을 만나면 오른쪽으로 돌라고 손짓을 한다. 야크나 쬬프쿄와 마주치면 돌을 들고 위협한다. 그러면 동물이 놀라 윗길로 피한다. 동물들도 그렇게 순할 수가 없었다.
맑은 하늘에 구름이 시시각각 흘러간다. 모양이 천차만별이다. 히말라야 산군과 구름 이 기막힌 장관을 연출한다. 사진기에 담기 바쁜 하산길이다. 수없이 보고 지났을 법한 쿡의 핸드폰도 자주 하늘로 향한다. 천혜의 자연이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라고, 이들에게 물질의 풍요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엄홍길 스쿨이 20분이라는 이정표를 중심으로 마을이 있다. 거울을 보며 수염을 다듬는 젊은이가 우리를 본다. 젊은 엄마와 아이의 교감도 평화롭다. 외국인들이 지나치면 어김없이 나마스테 소리가 들린다. 젊은 부부가 야크를 7마리나 몰고 간다. 날카로운 여자 목소리가 인상에 남아있다. 넝마 차림의 목재 운반 짐꾼은 어쩌다 본다. 일반 포터들은 숱하게 만나고 지난다. 그들의 거친 숨소리에 마음이 편치 못하다.
곤궁한 삶 속에서도 그들이 잃지 않는 건 미소다. 언제인지 우리 키친보이가 따라붙었다. 함께 쉬며 만져본 팔과 다리는 돌덩어리 그 자체였다. 나이는 25세고 키는 160cm 정도에 몸은 바짝 말랐다. 나는 지금 3,900m 팡보체 마을을 지난다. 대자연과 동화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흔적도 많이 담았다.
쿡이 올라갈 때 하루를 묵었던 데보체 파라다이스 롯지에 들어갔다. 잠시 뒤 밀크 티를 가지고 나온다. 그 사이 쿡의 아저씨와 보조 가이드가 와서 나까지 다섯 명이 되었다. 찻값 5불을 지불하기 위해 안으로 들었다. 당시 난롯불을 붙이던 젊은 네팔리가 반긴다. 초코파이를 맛있게 먹던 친구로 붙임성이 그만이었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산중에서 보기 드물게 안경을 쓴 여인이다.
주방 내부를 호기심 있게 보니 들어오란다. 사진을 찍자며 좁은 주방에 모두 들어왔다. 대롱으로 불붙이는 시늉도 해준다. 집기도 보여주고 심지어 양념까지도 보여준다. 엉성하기 짝이 없는 주방 내부를 숨기지 않는다. 어두컴컴하기까지도 한 주방에서 음식이 나오는 게 신기할 정도다. 여행을 통해서나 접해 볼 문화다.
랄리구라스 숲 속으로 한참 오르니 콤파가 있는 텡보체다. 쿰부지역 최고의 사원이 소재한 곳답게 돌탑 등 종교 시설물이 특히 많은 곳이다. 여기서 보는 에베레스 연봉은 다시 봐도 최고였다. 다시 한 번 손을 들었다. 나중에 보니 류 선생이 찍은 사진을 확대해 액자로 보내준 곳이기도 했다. 이제부터는 엄청나게 길고 경사진 하산길이다.
언덕 초입 수돗가엔 올라올 때 숨을 헉헉대며 보던 빨래하는 모습대신 짐꾼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쿡은 내려가면서도 올라오는 지인들을 자주 만나고 안부를 묻는다. 어디서부턴가 따라온 검은 개 한 마리가 길을 안내한다. 이젠 산속에서 낯설지가 않은 모습이다.
고산준령 사이의 깊은 계곡은 높이를 달리하더라도 구조는 비슷했다. 빙하 녹은 물소리에 느려터진 까마귀 울음소리도 여전했다. 계곡 맨 아래 마을이 손바닥 안에 들어올 정도로 작게 보인다. 설산이 바로 앞에 있어도 이곳이 3천m가 훨씬 넘는 고산지대라는 실감이 전혀 나질 않는다.
내려오니 물레방아식 마니가 저 혼자서 잘 돌아가고 있다. 오늘은 이미 한국에 돌아온 지 한 달이 훨씬 넘었다. 많은 자료를 넘기다 드디어 마니Mani-hkhor에 대해 이해를 했다. 그러나 아직도 확실하게 정리된 자료는 보지 못했다. 여기저기 발췌해 요약하면 이렇다.
「마니는 티베트어다. Om mani Padme hum(옴마니받메훔) 여섯 음의 진언을 산스크리트 문자로 내부나 외부에 새긴다. 이 진언은 티베트에서 가장 중요하고 일반적인 주문이다. 사람들은 매일 이를 큰 소리로 외며 사방의 암벽에 새겨 놓는다. 바람이나 물로 회전시키는 것, 책상용, 휴대용 등 여러 가지가 있다.
티베트에는 문맹이 많다. 그들은 불경을 읽으려 해도 읽을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마니통을 돌리는 것은 불경을 읽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믿는다. 그래서 그들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이 마니통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티베트의 사원에는 커다란 통이 나란히 진열되어 있는데, 그것은 불경을 새겨 넣은 마니차이다. 마니차 또한 손으로 돌리면 불경을 읽는 것과 같다고 한다. 티베트인들은 그것을 돌리며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마니통은 개인 소유의 불경이요, 마니차는 사원에 비치된 사원 소속의 불경이라 할 수 있다.
같은 마니통이나 마니차를 돌려도 돌리는 사람에 따라 그 행위의 의미는 다르다. 영적으로 믿는 사람들에게 마니통은 곧 불경이요 마니차는 금강경인 것이다. 진심으로 믿고 섬기는 자에게 불상은 부처님이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는 조각품인 것과 마찬가지다.
마니통과 마니차는 모두 속이 빈 원형이다. 비어 있음은 노자의 ‘무의 용’이용 장자의 ‘허의 용’이다. 통을 돌리면 바람 소리가 난다. 대지의 숨이든 인간의 숨이든 그것을 관통하거나 두드리면 자연의 소리가 나듯 비어 있을 때 세사의 소리는 가장 아름다운 음악이다.
원통의 모양 역시 처음과 끝이 없는 세상의 무궁무진함을 보여준다. 우주 전체의 모양이 그러하며, 천체의 별들이 그러하다. 그렇기 때문에 원을 그리며 원통형을 돌리는 것은 세상의 본질과 그 무한함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다.
무언으로 통을 돌리는 것 역시 불경을 읽으며 부처와 하나가 되기 위한 종교의 합일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불경을 읽는 대신 마니통과 마니차를 통해 세상의 무한함, 부처의 비움과 침묵을 만나는 것이다.」
젊은이들이 모여 한담도 하고 햇빛을 즐기던 건물도 그대로고 출렁다리도 여전히 그 자리에 매달려 있었다. 롯지 유리진열대의 콜라도 먼지를 뒤집어쓴 채 그대로다. 몇 년에 한 개나 팔릴지 그게 의문이 들 정도다. 이런 식으로 그 사이 변한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모든 것이 정지된 곳에 사람들의 움직임만 있을 뿐이다.
올라갈 때 점심 먹던 롯지에 다시 들었다. 아이들에게 초코릿을 주던 곳이다. 그 중 큰애가 나를 알아보고 미소를 보낸다. 오늘 처음 보는 애 아버지가 담배를 피우며 전화기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애 엄마는 카펫을 빨아 널고 있다. 큰마음을 먹고 시작했는지 벌써 넉 장 째다. 개는 배 깔고 누워있다 일어나며 까마귀를 보고 짖는다.
핸드폰을 한참 보던 주인 남자가 박자를 맞추며 노래를 부른다. 꿍따다꿍다 리듬이 계속 반복된다. 한참 뒤 여가수 노랫소리가 들린다. 이런 모습들을 메모하고 있는데, 음악을 다 들은 남자가 내 모습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지나간다. 푸석푸석한 얼굴에도 미소는 잃지 않는다.
해가 구름에 가리면 금방 한기가 돈다. 배낭에서 두툼한 오리털 점퍼를 꺼내 입었다. 햇빛이 나면 다시 따뜻해진다. 일행들이 오는 동안 졸면서 사람 구경을 했다. 내 나이 또래의 외국인 부부들이 여러 쌍 지났다. 이들은 개인 가이드를 앞세우고 사진도 찍어가면서 느긋하게 따라간다. 경험이 많아 보였다.
와중에 일행들이 도착했다. 점심식사는 놀랍게도 잔치국수다. 쌀밥과 숭늉도 나오고 감자전도 나왔다. 김치와 깍두기도 여전했다. 식사 후 충분히 쉴 정도로 여유도 있었다. 준비를 마친 쬬프쿄가 출발하기에 나도 배낭을 멨다. 순달이에게 싸인을 보내니 따라 가라고 손짓을 한다. 일행을 두고 먼저 나갔다. 시작부터 경사가 심한 오르막이다. 먼저 내려오면서 돌아갈 길을 걱정하던 구간이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따라 올랐다. 내릴 때 봐 두었던 지름길을 따라서도 올라가 봤다. 뚜벅뚜벅 황소걸음이 이해가 어려울 정도로 빨랐다. 한 발 한 발 내딛을 뿐인데도 어느새 나보다 몇 발 앞에 있었다. 뭔가 홀린 기분도 들었다. 산에 다니다 보면 ‘우보’라는 리본을 자주 만난다. 그 우보 리본을 이번 트레킹 중 어느 롯지에서도 보고 반가웠었다.
쬬프쿄 사장이 젊은 여성과 얘기를 나누며 간다. 점심 자리에서 왔다 갔다 해 낯이 익은 사람이다. 작은 키에 유독 다리가 튼실해 보이던 앳된 여자라 우리가 그 얘기도 했었다. 등에 진 배낭은 키에 비해 많이 컸다. 점심식사를 하던 롯지 주인도 바로 따라왔다. 외출모습도 전반적으로 푸석푸석했다. 검은 머리칼에 피부가 검붉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유난히 코가 크고 순수한 눈빛을 가졌다. 그 역시 큰 배낭을 졌다.
셋이서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며 걷는다. 급한 경사에서는 여자가 남자의 배낭 뒤를 잡고 오를 정도로 행동이 자연스럽다. 한 눈에 봐도 가까운 사이임이 분명했다. 궁금하기도 하고 지루함도 덜 겸해서 쬬프쿄 사장에게 물었다.
“식사자리에서 본 사람인데.”
“맞다. 롯지 오너다.”
“둘이 부부냐.”
“아니다. 여자는 페르체에 사는 친구 부인이다. 이 둘은 남체바자르 시장에 가는 길이다. 내일 장이 선다.”
그들은 뭔 말이 그리 많은지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이러면서 길고도 험난한 산길을 어려움 없이 줄여 나간다. 높은 산속에서 태어난 이들의 생활상의 한 단면을 또 본다. 내가 색다른 느낌을 받는 장면이 요소요소에서 나왔다. 이들은 이런 식으로 생명의 길을 이어가고 있었다. 와중에 쿡이 따라 와 나까지 다섯이 걸었다.
지나는 길 옆 작은 동네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우리 기준으로는 일을 해야 할 시간이나 남녀노소 모두가 그저 햇볕이나 쬐면서 사람구경이나 한다. 우리 일행들은만나는 사람들과 손을 흔들면서 안부를 나눴다. 루클라가 집인 쬬프쿄 사장도, 카트만두가 집인 쿡도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었다. 자주 지나는 모양이다.
한참을 가다 젊은 여자가 가게로 들어가더니 초코바를 찾는다. 내가 인원수대로 집고 계산을 하려는데, 뒤 따라온 남자가 담배 하나를 더 산다. 그것까지 12.5불이다. 그들에게는 이런 분위기가 서먹했다. 내가 손을 들어 괜찮다는 제스처를 보였다. 지금까지 그들의 사고방식을 본 것에 대한 작은 보답이었다.
이들에게 초코바는 별식이었다. 다만 이를 잘 닦지 않는 아이들에게 초콜릿을 주는 건 생각해볼 문제다. 쿡이 초코바를 반으로 나누어 준다. 나는 산에 다니며 하도 많이 먹어 보기만 해도 질린다며 거절하니 웃는다. 물론 몸짓까지 쓰면서 하는 대화다. 단순한 단어 연결만으로도 남체까지 무리 없이 왔다.
EBC 구간에서 가장 절경이라는 남체 가는 길에서도 사진을 많이 찍었다. 쿡에게 부탁을 해서 내 사진도 찍을 만큼은 찍었다. 밧데리가 다 떨어질 정도였다. 설산과 절벽 길은 여전했고 그 길은 이제 동네길 걷듯 익숙해져 있었다. 높이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고, 낭떠러지에 대한 떨림도 없어졌다.
남체가 보일 무렵 젊은 키친보이들이 무거운 짐을 이마에 걸고 따라왔다. 이젠 쬬프쿄 마저 추월했다. 쿡과 치킨보이들을 따라 속도를 냈다. 남체에 들어서며 쿡은 돼지고기를 산다며 시장 쪽으로 내려갔다. 따라가고 싶었으나 오라는 의사가 없었다. 롯지에 도착하니 오후 3시 30분이었다.
고산증으로 미리 내려와 있던 윤 선생이 뛰어나오면서 반가움을 표했다. 우리는 3일 만의 재회다. 손을 잡았다. 얼굴에 검은 수염이 첫 눈에 들어올 정도나 전반적으로는 무척이나 깔끔했다. 그동안에 샤워를 두 번이나 했단다. 샤워는 5불이고 수건까지 빌리면 5.5불이란다.
“어땠냐.”
“무척이나 지루했지만 동행한 사람이 매일 2~3시간 남체를 안내해 주었다. 5불을 주었더니 무척 고마워하더라.”
“수고했다. 후회는 없나.”
“그런 거 없다. 오늘 일본인이 고산병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남체 롯지에 함께 있던 오스트리아 여자도 헬기를 불렀다.”
“누군지 알 것 같다. 칼라파타르와 BC 어땠나.”
“가 보고서야 멀리서 이미 보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미리 내려왔다고 아쉬워 말아라. 단지 조금 더 가서 봤을 뿐이다.”
“가이드도 그렇게 말했다.”
“추가 부담은 없었나.”
“숙박비가 들어갔다. 가이드 분은 공짜 같다. 같은 음식을 주고, 같은 차를 마셨다. 아니 마시고 있었다.”
정리를 하고 윤 선생과 옷을 사러 갔다. 내가 지쳐있었고 통역도 필요했다. 남체에 유일한 정품가게로 갔다. 두 번째지만 1층에 있는 전문가용 장비는 보는 것만으로도 기가 질린다. 2층에서 셰르파 상표 바지와 티셔츠를 53불에 샀다. 바지는 36인치와 38인치를 두 번이나 번갈아 갈아입어 힘이 들었다. 결국 38인치로 정했다. 적게 만드는 상표로 이해했다.
우리나라에 비하면 가격이 너무 저렴해도 산악 국가답게 소재나 디자인과 성능은 뛰어났다. 나중에 본 임 선생도 나와 느낌이 같았다. 임 선생은 은퇴 후 장비점을 한다할 정도로 전문가 수준에 든 사람이다. 벌써 두 번이나 산행에 입고 다녔다. 고가의 외국상표 등산복으로 이 정도 만족하려면 서너 배 이상은 족히 들어간다. 그런 걸 거품이라고 한다. 한국에도 셰르파 상표가 있었으나 스펠링이 달랐다.
“3400m에서 산 옷이다. 메이드 인 히말라야다.”
방에 들어와 차분하게 입어보니 허리가 크고 허벅지도 헐렁했다. 역시 나는 아직 38인치는 아니었다. 다시 가게까지 내려갔다. 이것도 큰일이었다. 바지를 바꾸고 습관대로 빠르게 올라오다 보니 숨이 턱까지 찼다. 고개를 숙이고 숨을 골랐다. 바로 안정되는 걸 봐서는 이제 고산증세는 졸업이다. 롯지로 우회전을 하는데 젊은 친구하나가 ‘어르신’하며 다가왔다. 흰 머리에 흰 수염으로 덮은 얼굴 덕분에 이런 말도 듣게 된다. 한국말이 반가웠다.
“물어볼 게 있다”
“한국 어디서 왔나.”
“강화”
“강화라면 나도 잘 안다. 불은면에서 몇 년 있었다.”
“교육원 가기 전이 우리 집이다.”
지금은 강화가 제2의 고향일 정도로 나에겐 각별한 곳이다. 내가 근무하던 정문 옆에 집이 달랑 한 채 있던 바로 그 집이라는 말이다. 살다가 이런 식의 만남이 몇 번 있었어도 가장 극적인 순간이다. 2층 다이닝 룸에 드니 일행들이 이미 도착해 쉬고 있었다. 나보다 한 시간 가까이 늦게 도착했다.
그의 목적지도 EBC였다. 다른 점은 혼자였다. 이런 경우를 두어 번 겪다보니 이젠 어색하지가 않다. 포터 말이 미덥지 않다며 그간 경험담을 부탁한다. 바로 3~4일 일이니 어렵지 않았다. 빈 종이에 남체부터 고랍셉까지 길과 높이를 표시하고 비교적 자세히 설명을 했다.
고산병 주의 사항과 고도에 따른 대처 방법을 특히 강조했다. 마침 순돌이가 가져온 버터차를 주니 맛있게 마신다. 그는 이제부터가 실질적인 여행의 시작이다. 기왕 나선 길이고 뻔한 고생길이다. 인생살이에서 경험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없다고 본다. 내 얘기가 보약이 되길 바랄 뿐이었다.
남체에 도착하자마자 바빠지기 시작한 사람은 류 선생 부자와 그 일행 들이다. 당연히 씻기 위해서다. 나와 홍 선생과 임 선생은 버텼다. 샤워기에서 졸졸 나오는 물은 지친 상태에서 오히려 역효과고, 별 의미가 없다는 의견에서다. 이왕 여기까지 참았으니 카트만두에서 제대로 씻기로 했다.
그러나 고도를 높여가면서도 추위나 고산병의 위험을 무릅쓰고 씻기를 감행하다가 결국 고산증세를 겪었던 류 선생 부자는 달랐다. 이들은 남체에 왔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제일 먼저 물을 찾았다. 예상대로 한참 뒤 훤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전에 만난 지호 군에게 물었다.
“왜 그러고 있나.”
“아빠가 샤워 중이라 대기하고 있다.”
저녁 식사 전 나타난 김 선생도 원래 세련된 제 모습으로 나타났다. 시간이 흘러도 유독 그 모습이 오래 남아있던 사람이다. 4000m가 넘으며 고산증세로 고생하는 와중에도 물티슈로 해결하는 임 선생에게 “옆에 같이 못 있겠다”고 농담까지 했었다. 그도 한참을 씻었나 보다. 서울에서도 세련된 동네에 산다는 진 선생도 역시 처음 만날 때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저녁식사는 돼지고기 불고기가 나왔다. 모처럼 일행 모두가 모였다. 이럴 때 술 한 잔 없는 게 아쉬웠다. 쌈, 마늘, 당근, 오이가 따라 나왔고, 동그랑땡까지 나왔다. 숭늉과 깍두기, 김치는 늘 그 자리에 있었다. 열흘 동안 아니 한 번도 닦지 않은 플라스틱 식탁 받침도 매번 그대로 나왔다.
많은 자료를 볼 때 남체는 쿰부의 중심 도시답게 수많은 사연이 녹아있었다. 처음에는 숨이 막혀보이던 남체였다. 어떤 이는 남체가 수천 겹으로 겹쳐져 있고 또한 존재도 수천 겹으로 겹쳐져 있다는 표현까지도 한다.
그 중에서 프랑스인 트레커와 남체의 셰르파니가 맺은 사랑과 셰르파의 성과 사랑 그리고 생활과 사상을 그린 『히말라야의 아들』은 작가 ‘자크 린츠만’의 자전적 요소가 많이 포함되어 있는 작품이다. 이 소설은 산에 즐겨 오르는 전업 작가 ‘심산’의 『마운틴 오딧세이』에 소개되어 있다.
「『히말라야의 아들』은 히말라야의 문학이다. 이 몽환적인 소설을 읽고 있노라면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셰르파족에 대한 존경과 찬탄이 절로 인다. 히말라야의 아들을 보면 우리가 트레킹이나 등반을 함께 해온 셰르파들이 왜 그토록 온화하면서도 강건한 기상을 가지고 있는지, 대책 없는 연정을 불러일으키던 셰르파니들이 왜 그토록 신비하면서도 본원적인 흡인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속속들이 이해하게 된다.
이 소설의 숨겨진 배경이자 진정한 주인공은 결국 히말라야 그 자체라는 것이다.」
나도 이 소설을 읽고 나서야 히말라야, 고산족, 셰르파, 남체 등등의 히말라야 행간에 녹아있는 내용을 이해하는 눈을 뜨게 된다. 이번 트레킹은 나에게 이런 선물을 많이 줬다. 앞으로 몇 번을 더 카트만두 공항에 내릴 지는 물론 모른다. 그래도 앞으로도 나는 계속해서 히말라야를 알아나갈 것이다.
논어 학이편 제1장이다.
「배우고 제 때에 그것을 익히는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뜻을 같이 하는 자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부끄럽지 않으니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 3월 26일은 자유인산악회 금북정맥 마지막 구간을 내리는 졸업식이었다. 사정상 금북은 광천 오서산 구간부터 참석을 해 나머지 반을 추가해야 하는 입장도 있었지만, 25일 통영을 다녀와야 하는 부득이한 사정에 참석을 못 했다. 정상교 회장의 문자를 받아보고는 많이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 동지가 참석 못한다면 잘 다녀올 수 없을 것. 대군 대장은 다른 차에 받혀 뼈가 금가 목발 딛고 있고 액운이 겹치네요」
4월 9일부터는 한남정맥이 시작된다. 안성 칠장산에서 김포 문수산까지다. 자유인 산악회 백두대간 팀의 마지막 정맥이기도 하다. 5년여를 새벽의 어둠을 헤치고 산을 오른 이들의 마지막 장도다. 요산자로선 최고의 영예이기도 하다.
이 자리도 참석하지 못 한다. 4월 9일은 고향 수원 친구들 e325 산악회 매년 1회 무박 산행 날과 겹치기 때문이다. 정맥을 시작하면서 선향에 참석을 못해도 올 때까지 기다려주는 친구들이다. 일 년에 한 번은 남도에서 봄날을 보낸다. 무박 2일이다. 이날 하루만이라도 만사 다 제쳐두고 가야한다.
나는 이 산악회 초창기 멤버고 한동안 총무를 역임했었다. 몇 년을 불참해도 잘리지 않고 올 총무 명단에 또 들어있다. 원래 총무가 두 명이지만 숫자는 형식에 불과한 말 그대로 불알친구들 산악회다. 아래 문자를 보낸 총무는 현직 오너다. 웃자는 얘기지만 이 모임의 성격이 이렇다는 거다.
「4월은 무박 여행입니다. 4월 8일 토요일 밤11시 출발 예정이고, 장소는 남쪽 다도해 해상 국립공원으로 갈 예정이오니 모처럼 남도 여행이기에 남도 음식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2325 산악회에 나오면 술도 드리고 밥도 드리고 젊음도 드립니다. 평균 10년은 젊어 집니다. 많은 참석 기대하겠습니다. 집에서 마나님들에게 한 끼 얻어먹기 위해 핀잔 듣지 마시고 산악회로 나오면 대우 받으면서 어깨 쭈욱 펼 수 있습니다.
회비 5만원이 없어서 망설이는 회원이 혹시 있다면, 그냥 나와서 저한테 조용히 속삭이면 다 해결됩니다. 몸이 불편한 회원도 괜찮습니다. 전에 이상구도 함께 했습니다. 언제나 누구라도 돈 없어도 괜찮습니다, 없으면 없는 대로 꾸려 갑니다. 개의치 말고 참석 바랍니다. 아줌마 많이 수배해 놓았습니다. 놀라간다 생각하고 부담 없이 즐긴다 생각하고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조규성 김홍록 드림」
장소는 소설가가 특히 많이 배출되고 있는 전남 장흥의 천관산(723.1m)이다. 천관산은 우리나라 산악 문학의 개척자이자 선도자이신 ‘김장호’ 선생의 『한국백명산기』에도 실려 있다. 호남정맥에서 비켜나 있기에 멀리서 바라보기만 한 산으로 기회가 되기만 한다면 꼭 가봐야 할 산이다.
「하늘에서 내다보면 그것은 흡사 바닷가에 올라앉은 우뭇가사리, 그것도 물을 덤뿍 머금은 채 가지를 공작깃처럼 활짝 핀 형국으로, 그 하나의 오롯한 소우주로서 독립산을 형성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같은 독립산이면서 그것은 이웃하는 월출산과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 울타리 안에 이런 상반된 모습이라니, 두 산을 겹쳐 찾아나선 이면 누구나가 어리둥절할밖에 없다. 지레짐작으로 더러는 이 산이 그 월출산의 갈래가 뻗어 내린 것으로 말하지만, 2만 5천분의 1 지도를 몇 장 겹쳐놓고 눈여겨 살피면, 지리산 줄기가 남서로 흐르되, 승주 조계산을 지나 화순군의 동부 산지 언저리에서 그 쪽과는 헤어지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것도 장흥들판과 탐진강에서 일단 꺾였다가, 부용산을 발판삼아 그 저력을 과시하듯이 반도 끝에 가서 불끈 머리를 쳐들고 있는 것이다.」
25일 새벽 3시 김진원이 운전하는 하는 차를 타고 경남 통영을 갔다. 오래전 예약이었다. 근래에 경북 봉화, 강원도 양구를 다녀오고 벌써 세 번째 장거리 여행이다. 전에도 몇 번 장거리 여행을 했으나 그땐 주로 대중교통을 예약했었다. 그러다 최근엔 직접 운전을 한다. 아무리 요즘 건강 수명이 늘었다지만 그 친구 역시 올해 환갑이면서도 열정 하나는 그대로다.
새벽부터 막힘없는 경부고속도로를 달려 대전-통영 간 고속도로로 바꿔 탔다. 덕유산 휴게소에서 아침 식사를 했다. 그 시간에 손님은 뜸했다. 진원이 준비해 온 김밥은 언제 먹어도 일품이다. 내용물을 깔끔하게 배합해서 청양고추로 맛을 마무리 한다. 요즘 시중의 맛과는 차원이 다르다. 벌써 몇 번을 잘 얻어먹고 있다. 같이 준비해 온 시래기 된장국은 장소 사정으로 끓이지 못하고 산 위에서 막걸리 안주로 잘 먹었다.
경남 지방으로 들어설수록 봄비가 계속 내렸다. 진주를 지나 고성 IC로 내려 국도를 타고 통영으로 들어갔다. 이번 여행의 목적지는 통영 사량도 지리망산(398m)이다. 정상에서 지리산을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출발지인 가오치항에 7시 40분에 도착했다. 하루에 6번 들어가는 배가 주말에는 한 시간 간격으로 운행되고 있었다.
표를 끊는데 신분증을 요구했다. 지갑을 보니 없었다. 당황스러워 진원이 기다리는 차로 가서 사정을 말했다. 그가 당연히 가져올 줄 알았다며 난색을 표한다. 아닌게아니라 미안함보다도 당황스러웠다. 매번 넣고 다니는 신분증이 없는 걸 생각이나 했을까. 이제 나이를 잘 생각해 볼 때다.
40분 정도 배를 탄다. 사량도는 남해안 한려수도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청정 섬이다. 이 섬 산줄기는 섬의 아름다운 절경과 바다가 한데 어우러져 많은 사람의 찾고 있는 섬이다. 각 산악회에서 연초를 시작하면서 많이 찾는 산이기도 하다.
사량도는 한자로 蛇梁島로 표기한다. 蛇는 뱀이다. 梁은 들보, 징검다리, 다리, 교량을 말한다. 사량섬은 상도와 하도를 흐르는 물길이 가늘고 긴 뱀처럼 구불구불한 형세에서 유래하여 이 해협을 사량이라 일컬었다.
7km 남짓 능선을 4시간 이상 걷는다. 8할 이상이 바위 능선이고 봄비에 젖어 난이도가 높았다. 거기다 직각을 이룬 바위에는 철 계단이 설치되어 있어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는 없었다. 우회도로도 형식에 불과해 오히려 불편할 때가 있었다. 향봉과 연지봉을 연결한 60m에 이르는 출렁다리 앞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주춤했다. EBC에서 트레킹에서 출렁다리 공포를 극복한 나는 쉽게 건넜다. 놀라운 반전이다.
연중 60만 명 이상이 찾는 환상의 섬답게 이날도 많은 이들이 찾아왔다. 이들 대부분은 옥녀봉 단일 코스를 택해 내리막 무렵엔 산중 정체가 일어나기도 했다. 옥녀봉은 산봉우리 형상이 여인의 가슴을 닮았다고 한다. 또한 산세가 여인이 거문고를 타는 듯한 옥녀탄금형을 이루었다는 풍수지리설에서 그 이름이 유래했단다.
나가는 배를 기다리며 부둣가에서 버너을 당기고 남은 시레기 된장국을 안주로 막걸리를 마셨다. 운전을 하는 진원은 아이스바를 먹으며 아쉬워했다. 거제도를 둘러보고 나서 통영 바닷가에서 1박을 하며 회포를 풀기로 한 계획은 수정되었다. 목욕을 마치고 토박이에게 물어보니 굳이 머물 장소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새벽부터 다섯 시간을 운전한 진원도 소주 몇 잔 보다는 다시 그만큼을 운전하는 쪽을 택했다. 그 친구에게 미안했다.
싱싱한 멍게와 갑오징어 그리고 활어회를 뒤로 하고 다시 온 길을 역으로 해서 이촌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10시가 넘었다. 그 시간에 통닭을 앞에 두고 뒤풀이 할 상황이 아니었다. 진원은 막걸리 두 병을 사 가지고 집으로 들어가고, 나는 지하주차장에 세워둔 차를 몰고 집으로 왔다. 이미 몸과 마음이 지쳐 다음날 새벽 일찍 금북정맥에 참석하려고도 한 생각은 물 건너간 일이 되었다.
# 3월 마지막 주말인 25일과 26일에는 어머니를 모시고 원주에 다녀왔다. 아몬드와 미역귀 그리고 대추와 말린 감을 드렸다. 미국에 다녀온 형에게 LEE 청바지와 선인장 설탕을 받았다. 형이 가지고 온 깁슨 기타가 무척 마음에 들었으나 그걸 선물로 받는 다는 건 내 욕심이었다.
어머니와 먼젓번에 나누지 못한 잔을 나눴다. 광어회와 쭈꾸미를 안주로 소주 다섯 병을 비웠다.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꼬리곰탕을 데워 쓰린 속을 달래며 영동고속도로를 달렸다. 오전 내내 숙취로 고생했다. 저녁 무렵이 돼서야 정신이 돌아왔다. 집사람과 김포공항 근처 수산물센터에서 광어 1kg을 떠가지고 와서 딸들과 잘 먹었다.
원주에서 가지고 온 달래와 냉이와 도라지는 양서표구사와 나눴다. 고맙다며 닭곰탕을 얼큰하게 끓여준다. 소주 반병을 곁들이니 속이 돌아왔다. 요즘 이렇게 살고 있다. 이제 종점이 보인다. 남체에서 팍딩까지, 팍딩에서 루쿨라까지, 루클라에서 카트만두까지 남았다. 빨리 마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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