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에노스아이레스
부에노스아이레스(Buenos Aires)는 아르헨티나의 수도로 인구 약 300만 명, 면적은 약 200㎢로 라플라타(La Plata/ 은이라는 뜻)강 하구에 건설된 항구도시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사람들은 자신을 항구사람이라는 뜻과 세련된 도시사람(시민)이라는 의미를 합쳐서 포르테뇨(porteno)라고 부른다. 비옥한 토지에서 생산된 곡물이 세계시장으로 팔려 나갈 때마다 고국을 떠나올 때 꿈꾸던 유복한 생활이 실현되어 갔다. 석양이 라플라타강을 물들일 무렵이면 고국의 귀부인 멋을 낸 여인들과 더블버튼 양복에 단장을 든 신사가 거리로 쏟아져 나와 사치스런 저녁을 보내며 남미에 있으면서도 유럽의 고국을 꿈꾸며
유럽풍의 거리를 만들어 갔다. 그래서 이곳을 남미의 파리라고들 한다.
시는 행정상 48개 지구로 나누며 각 지구에 특색있는 거리와 센트로가 있다.
계획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길을 보면
기본적으로 대부분의 도로가 일방통행이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길이 서쪽으로 가고 있다면 다음 길은 동쪽으로 향하게 만들어져 있다.
모든 길은 100m 간격으로 구획되어 있다.
1차선의 도로를 까예(calle/가로), 5차선 정도의 넓은 길을 아베니다(Avenida/거리)라고 한다. 까예 4개마다 하나의 아베니다가 나타나도록 만들어져 있다. 아무 쪽이나 500m만 가면 앞이 확 트인 아베니다가 나오는 것이다.
도로에서 다음 도로까지의 100m가 1쿠아드라(Cuadra/블록) 라고 한다.
가예와 아베니다에는 모두 이름이 붙어 있다.
1쿠아드라마다 번지가 붙어 있는데 작은 쪽에서 큰 쪽을 향해 왼쪽이 짝수번지, 오른쪽이 홀수번지이다.
모퉁이(교차로)를 에스끼나(Esquina)라고 한다.
모든 에스끼나에는 표지판이 있고 거기에는 통행방향, 다음 에스끼나까지의 1쿠아드라가 무슨 거리의 몇 번지인지 표시되어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시 이름의 유래를 보자.
부에노스아이레스=좋은 공기다.
19세기말까지 부에노스아이레스이름은 페드로 데 멘도사와 함께 라 플라타지역에 도착한 산초 델 깜포(Sancho del Campo)의 말에서 기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상륙하자마자 대초원에서 불어오는 신선한 공기에 감격하여 “!Que buenos aires son los de este suelo!”
(이 땅은 어찌 이리 공기가 좋을까!)라고 하였다.
1810년에 독립하여 1880년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연방수도로 정하여졌을 때 인구가 27만 명으로 큰 강과 대 초원으로 둘러싸인 큰 시골동네에서는 산초 델 깜포가 외쳤다는 <좋은 공기다>설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지만 1892년 수도의 이름이 성모
뉴에스타 쎄뇨라 데 부엔 아이레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사실이 명백해진 이래 <좋은 공기다>설을 뒤집고 성모 부엔 아이레에 관한 연구가 되기 시작했다.
기적의 처녀상, 성모 부엔 아이레에게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고 한다. 1370년경 스페인에서 이탈리아로 향하던 배가 큰 풍랑을 만나게 되었다. 배와 운반을 책임진 화물만은 지키고자 결심한 선원들은 자기의 짐을 아낌없이 바다에 던졌지만 효과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운반하던 짐 중 무거운 나무상자를 바다에 내던진 순간
풍랑은 가라앉고 그 나무상자는 해안을 향해 수도원이 서 있는 언덕 근처까지 배를 인도하였다. 선원들이 나무상자를 수도원으로 가지고 가서 열어보니 상자 안에는 어린 예수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상이 들어 있었다. 선원들은 이것을 수도원이 서 있는 보나리아 언덕의 이름(스페인어로 Nuestra Senora de Buen Aire)을 따서
성모 부엔 아이레라고 불렀다. 성모 부엔 아이레의 기적에 대한 전설은 그후 지중해연안의 여러 나라에 전해졌고 특히 바다에서 일하는 사람들에 의해 많이 믿어졌다. 멘도사가 믿고 있던 것도 성모부엔 아이레라고 한다. 멘도사가 라플라타강가에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건설했을 때 그곳을 <산타마리아 데 로스 부에노스아이레스(Santa Maria de los Buenos Aires)>라고 이름 지은 것도 그와 함께 항해를 하고 그의 항해를 처음부터 끝까지 보살핀 성모 부엔 아이레상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성모 부엔 아이레를 모신 “성모 부에노스아이레스 대 성당(Basilica de Nuestra Senora de Buenos Aires)은 도시 이름이 성모 부엔 아이레스에서 기원한 것이라고 발표되고 2년 후인 1894년에 건설되어 1911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개축된 고딕양식의 성당으로 지금도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국제선이 뜨고 내리는 에세이사(Ezeiza)국제공항과 주로 국내선이 출발착하는 호르헤 뉴베리(Jorge Newbery)이 있는데 에세이사 국제공항은 부에노스아이레스시에서 15km, 센트로에서 35km 떨어진 곳에 있다.
공항에서 시내로 갈 때는 레미스(Remises), 택시, 리무진버스, 콜렉티보(Colectivo)를 이용하면 되는데
레미스는 공항과 시내를 이어주는 전세승용차로 공항카운터에 신청하고 요금을 지불한다. 요금은 좀 비싼 편이나 차가 크고 깨끗하며 바가지 쓸 염려가 없다. 시내에서 공항을 갈 때는 호텔프런트에 신청하면 된다.
택시는 짐이 많을 때 주로 이용하며 되돌아 오는 차로 예약하면 30%정도 할인도 된다.
리무진 버스는 공항터미날에서 싼마르틴 광장까지 갈 때 좋다.
콜렉티보는 시내버스로 센트로가지는 2시간정도 걸린다.
시내교통수단으로는 수브테(Subte:지하철)가 있는데 모두 5개 라인이 있다. 요금은 균일하고 운행시간은 노선에 따라 다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주요 볼거리는 1541년에 과라니족의 침입으로 페허가 된 도시를 후안 데 가라이(Juan de Garay)가 1580년에 재건하면서 5월광장(Plaza de Mayo)을 중심으로 거리를 조성하였다.
그때부터 대통령 취임식, 집회, 축구의 승패등 5월광장은 무슨 일이 있을대 마다 많은 인파가 모였다.
역사적으로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스페인인 크리오요들이 일으킨 5월 혁명을 들 수 있다.
1810년 5월 25일 독립선언도 여기에서 하였다. 이름의 유래를 보면
일찍이 요새광장(Plaza de Fuerte)이라 했고 1807년 영국군의 침략을 물리쳤을 때는 승리광장(Plaza de victoria)이라 불리우고 5월 혁명이래 지금의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다. 광장의 중심에 서있는 5월의 탑(Piramide de Mayo)은 5월 혁명 1주년을 기념하여 그 다음해인 1811년에 세워진 것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가장 오래된 탑 안에는
아르헨티나 전역에서 가져온 흙이 넣어져 있다고 하며 광장에는 아르헨티나 국기의 만든 마뉴엘 벨그라노장군의 기마상이 있고 여기서
매일 대통령궁근위병의 교대식이 이루어지는데 시간이 안 맞아 직접 볼 기회는 없었다.
대통령궁(La Casa de Gobierno)는 로코코양식의 건물로 대대로 분홍색으로 외벽을 칠하여 카사로사다(분홍색집)라고도 한다.
원래는 침략군으로부터 국토를 지키기 위한 요새였으며 지금도 옥상에는
헬리포트가 있고 건물 곳곳에 레이더 센서가 있어 무기가 없는 현대적 요새로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국회의사당(Palacio del Congreso Nacional)은 이태리인 빅토르 메아노(Vitor Meano)가 디자인한 그레코로망 스타일의 위풍당당한 건물로 폭 약 100m, 면적 9.000㎡로 대리석로 지은 중앙에는 청동으로 된 돔이 서 있다. 돔의 높이는 지상으로부터 85m이고 직경은 약 20m이다. 국회의사당 광장에는 분수,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복제), 콘도르와 천사를 조합한 기념비 등이 있다.
7월 9일 거리와 오벨리스코 부근은 레띠로지구(Barrio Retiro)는 우루과이, 브라질, 파라과이, 볼리비아, 칠레 등 남미대륙의 장대한 여행길이 시작되고 끝나는 곳으로 국경을 넘어온 장거리버스의 터미널, 그 옛날에는 팜파를 넘어 국경마을까지 가던 기차역이 있다.
특히 이곳은 남미 여러나라의 독립을 이끌었던 영웅 볼리바르와 산마르틴 장군이 이곳에서 출발했다. 넓은 길 양쪽으로 빽빽이 늘어선 마천루, 세계에서 가장 넓은 길을 질주하는 자동차, 수목과 잔디로 덮힌 광장에는 늙은이들이 햇살을 즐기고 연인들이 사랑을 속삭이고 있다.
산마르틴광장(Plaza Libertador General San Martin)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의 하나’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아름답다. 싼타페거리에서 광장으로 들어오면 붉은 대리석 위에 서 있는 청동으로 만들어진 산마르틴 장군의 기마상이 서 있다. 되 돌아보면 산마르틴장군은 1812년 아르헨티나를 찾아와서 기마대를 조직하고 남미 독립전투에 참가했다. 1816년 리오데라플라따연합국,
1818년에는 칠레독립을 달성했다. 산마르틴장군을 기리기 위하여 공원이름을 그것으로 하고 기일인 8월 17일을 공휴일로 지정하였다.
리베르따도르 거리를 사이에 두고 산마르틴광장과 마주보고 있는 아르헨티나공군광장은 영국과 포클랜드전쟁(아르헨티나에서는 말비나스전쟁이라고 함)전 까지는 영국광장(Plaza Britania)라고 불렀다.
중심에는 높이 70m의 영국탑(1916년 아르헨티나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아르헨티나에 충성을 맹세하는 의미로 영국이민자들이 세웠음)이 서 있고 직경 5.5mdls 큰 시계는 매 30분 마다 런던의 빅밴과 똑 같은 소리로 시간을 알린다. 1982년 포클랜드전쟁 때는 아르헨티나인들의 표적이 되기도 하여 상당부분 파손되고 이름도 공군광장이라고 불리웠다.
레스토랑과 바가 빽빽이 늘어서 있고 밤새도록 잠들지 않는 코리엔떼스(Correntes)거리, 아르헨티나 유행의 발상지인 플로리다(Florida)거리, 영화관 거리로 유명한 라바예거리 등은 세계에서 제일 넓은 7월 9일거리의 중심에는 새하얀 오벨리스코가 창공을 찌르고
무수한 상들리에로 물든 세계 3대극장의 하나인 콜론극장도 이 부근에 있다.
플로리다거리(Calle Florida)는 산마르틴광장에서 5월거리에 이르는 약 1km에 부티크, 레스토랑, 카페, 바, 갤러리, 서점 등이 600여 개 늘어선 거리이다. 유럽에서 유행하는 모드는 우선 플로리다의 부띠크에 진열된 후에 아르헨티나 전역으로 퍼져 나간다. 아르헨티나 민예품인 가죽제품과 은제품 상점도 이 거리에 집중되어 있으며
코리엔테스거리는 탱고에 가사를 붙여 노래하게 된 1920년대 이래
수많은 땅게리아(tangueria/ 탱고 라이브를 들을 수 있는 레스토랑)가 늘어서고 세련된 신사숙녀의 유흥가로 군림했다. 극장, 영화관, 레스토랑, 카페, 레코드점, 서점, 나이트클럽 등이 밀집해 있어 『결코 잠들지 않는 거리( La calle que nunca duerme)』라 불리는 코리엔테스는 포르테뇨의 마음을 자극하는 호화로운 네온싸인으로 밤의 시작을 알린다.
이 거리에서 단연 돋보이는 것은 이탈리아 밀라노의 스칼라좌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크며 프랑스 파리의 오페라좌와 함께 세계 3대 극장으로
손꼽히는 콜론극장(Teatro colon)이 있다. 예전에는 유럽에서 화제가 된 오페라가 채 한 달도 못되어 이곳에서 상연되었다고 한다.극장은 1908년에 지어졌고 그해 5월 25일 신축 축하공연을 하였고 그 이후 매년 5월 25일 시즌의 개막일이 되고 그날은 대통령도 일찍 공무를 마치고 보러 온다고 한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의 극장 안에는 6층까지 관람석이 있으며 입석을 포함하여 한 번에 4천명이 관람할 수 있다고 한다. 5월에서 11월의 시즌 중에는 700개의 전등으로 이루어진
샹들리에 아래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환 오페라, 발레, 오케스트라 연주 등 100개 이상의 프로그램이 연주된다. 내가 갔을 때는 11월 말로 시즌이 끝나 오페라등은 못 보고 언더그라운드 연극과 극장안을 견학할 수 있는 투어에 참가하여 영어와 스페인어로 안내하며 극장내부를 둘러보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메인홀과 살롱은 물론 지하에 있는 무대제작 현장만 보았다.
참고로 입장권은 상연 3일전부터 TUCUMAN거리 쪽의 창구에서 살 수 있다.
묘지가 있는 장소에 따라 계급을 평가받는 이 나라에서 레콜레타묘지(C )는 영원히 잠든 아르헨티나인들의 최고급 주택지라고 할 수 있다.1882년에 개설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가장 유서깊은 묘지로 여러 가지 조갂과 전통적인 장식으로 꾸며진 납골당은 묘지라고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이며 예술적인 묘지로 세계적으로도 유명하다.
묘 중에서 70개가 국가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역대대통령 13명의 묘를 비롯, 유명인의 묘도 많다. 페론 전 대통령의 영부인 에비타도 이 묘지의 주민이다. 사생아로 태어난 불우하게 자란 에비타는 배우가 되고 끝내 대통령부인까지 되었으나 33세의 꽃다운 나이에 이곳의 주민이 된 에비타의 납골당 앞에는 일년내내 꽃이 끊이질 않는다.
이밖에도 콜로니아(우루과이)로의 일일 여행, 가우초페이스타 투어체험 등을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