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0년 6월24일 압도적인 북한군의 전력에 맞서야 하는 국군의 상황은 엉망이었습니다.
6월10일에 대대적인 인사 이동이 있었습니다. 각사단의 사단장과 육본의 군수국장, 정보국장을 제외한 전 지휘관들의 인사이동으로 즉 육군은 인사이동 15일만에 대전쟁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6월24일 토요일, 그이전부터 북한의 남침 조짐은 있었고, 가끔가다 국지적 도발들이 있었던 관계로 비상령을 발동시키고 있었는데 그 비상령을 24일날 풀어버린겁니다.
전방에 병력 3분에2가 외출 휴가등을 이유로 빠져 나와버립니다.
그날 저녁 채뱡덕 육군참모총장은 육본의 고급 참모들과 함께 미군사 고문단 단원들과 함께 삼각지에 새로 오픈한 장교 클럽 개관식에 참석하여 음주가무를 즐겼습니다.
많은 장교들이 미군 클럽부터 시작해서 2차3차까지 하며 아주 놀기 바빳던 날이었습니다.
기갑 연대장이었던 유흥수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전쟁 발발 소식을 듣고 재시간에 달려온 지휘관은 이치업 대령 뿐이었으니... 그날 군 주요 지휘관들이 어찌 놀았는지 가늠해 볼만합니다.
신성모 국방장관을 비롯한 군 수뇌부들이 툭하면 "전쟁나면 아침은 개성에서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다"라는 호언장담을 했으니 이런 결과가 나왔을지도 모른다.
신성모장관, 독립운동가였지만, 과오가 너무 많아 쉴드가 안처지는 인물이다.
이범석, 지청천등에 비해 실전 경험이 전무한, 병참계통 장군이였다는게, 화를 더 키운 원인이 되기도 한다.
더우기 일이 꼬인다고 가뜩이나 부족한 공용화기의 20%와 각종 차량 절반이 부평 조병창과 후방 수리소로 보내졌다. 당연히 전방에는 적에게 응사할 기관총과 박격포가 크게 부족했다.
전방으로 보낼 차량이 없자 부랴부랴 민간차량을 징발하러 뛰어다녀야 했을 정도다.
그리고 6월25일 새벽 필자의 생일날 새벽4시 옹진반도를 시작으로 서에서 동으로 북한군의 야포와 박격포가 불을 뿜기 시작한다. 물론 그들의 1차 목표는 수도 서울이었다.
가장 먼저 공격을 받은곳은 옹진이었다. 옹진이 어디냐고? 강화도쪽입니다~~
춘천과 강릉방향 동해안쪽으로도 강력한 공격이 시작되었지만,
북한군의 주공은 서울을 목표로하는 동북축선 동두천 의정부의 동쪽 축선과
개성-파주-고양의 서부 축선이었다.
동북 축선으로는 105전차여단을 선봉으로 북한군 3.4 사단이 서북축선으로는 203전차연대를 선두로 1.6사단이 남침을 시작했다.
서북축선은 최전선을 맡은 1사단 13연대가 당일 손한번 못써보고 격파되고 임진강 도하를 허락하고 만다. 바로 구축한 2차 방어선도 돌파당했지만 27일 제3방어선인 경기도 고양일대방어전에서는 선전하며 북한의 선공을 막아낸다.... 모든 전선에서 일방적으로 밀린건 아니란 말이지 말입니다.
자 하지만 문제는 동두천 의정부 방향의 동북축선이었습니다.
그들이 막아야할 병력은 4만3천의 병력에 전차가 85대, 자주포가 60문등 사실 도저히 뭐 상대가 될수 있는 전력차가 아니었는데, 거기다 동북축선은 의정부 시내 앞까지가 폭 500~1키로의 개활지로 1열황대로 늘어서 전차 기동이 가능했다.
부족한 대전차포와 육탄 돌격으로 막아보긴 했지만 대새를 바꿀수는 없는 전력차였다.
그나마 전차 비스므리하다는 이유로 기갑연대의 M8을 이쪽 전선에 투입해봤지만
T-34에 37미리 포를 가진 M8이 어디 상대가 되겠는가?
50년 6월26일 의정부 방향으로 가는 기갑연대 소속의 M-8
26일 아침 10시 국방부 장관 신성모는 이범석 전국방부 장관등 국가 원로를 모아놓고 대책 회의를 합니다.
여기서 이범석등 국가원로들은 서울을 포기하고 후방부대를 한강이남으로 집결시켜 방어선을 구축하고 전방 부대를 빨리 한강 이남으로 철수하자는 의견을 냅니다.
자 참고로 이시기에 서울이라 함은 지금처럼 서쪽으로 강서구가 있고 동쪽으로 송파구가 있던 지금의 서울이 아니다. 종로구 동대문구 성북구와 영등포구 정도가 있었다고 보면 된다.
영등포구가 한강 이남에 걸쳐 있던 유일한 행정구역이었습니다.
암튼 국가 원로들이 한강이남에서 방어선을 치자는 의견을 냈지만 신성모와 채병덕 이 두 양반이 무슨소리? 서울을 사수해야합니다! 해버리죠 그럴거면 뭐로 회의는 소집했는지....
채병덕은 서울의 상징성과 아직도 우리가 이길수 있다며 그시간까지 호헌 장담을 합니다.
국군 2사단과 7사단의 반격이 성공해서 동두천과 포천을 탈환할것이라 생각했지만 ,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채병덕에게 돌아온 소식은…. 의정부 함락….
6월26일 오후 6시에 의정부가 넘어갑니다....
부랴부랴 채병덕은 의정부쪽으로 차를 몰아 전선 시찰을 갑니다만… 길거리에 넘치는건 피난민과 패잔병들뿐… 이때 채병덕도 서울 방어가 불가능하겠구나를 알게됩니다.
자 이러고 있을동안 서울 사람들은 뭘하고 있었을까??
25일 오전 7시에 북한군의 남침이 있었다고 일단 방송을 합니다.
다만 전전선에서 우리 군대가 북한군을 격퇴 ... 심지어 해주까지 반격해 들어갔다는 개뻥을 칩니다. 워낙 잦으 북한의 도발로 서울시민역시도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하지만 점심때쯤 북한의 야크 전투기 몇대가 용산역 일대를 폭격하고 기총 소사를 합니다.
무언가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긴합니다
그리고 거의 같은 시간 김포 비행장이 폭격을 받기 시작합니다. 비행기 몇대와 유류창고가 폭격에 맞아 불타오릅니다.
6월26일 국회의원들이 모여 밤샘회의를 하고 서울 사수 의견을 내놓지만,27일 새벽 이미
이승만 대통령은 특별 열차를 타고 대구까지 내려갑니다.
"각하 너무 많이 내려오셨습니다" 라는 말에 다시 기차를 돌려 대전까지 올라가 충남도청에 임시정부를 차린 이야기는 지금도 유명하죠..
27일 국무위원들이 서울 사수 결의서를 들고 경무대를 찾아갔지 말입니다... 빈집에....
다시 전선으로 돌아가서
6월 27일 새벽4시에 의정부 남쪽에 구축한 백석천에 방어선이 돌파 당합니다…
그날 날씨마저 흐리고 비까지 쏟아져… 후퇴하는 국군의 다리를 더욱 무겁게 합니다.
창동 미아리 방아선
의정부를 상실한 국군은 7연대를 창동-미아리 방어선에 배치를 합니다.
미아리 방어선은 미아리부터 창동 여기저기 높고 낮은 언덕들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형성됐다.
창동 방어선은 지금의 창동역 언덕에서 정의여고 뒷산과 쌍문근린공원이었고
명목상 1연대.3연대,5연대.25연대등 이름은 사단급이었지만 동두천 의정부에서 패해 밀려 내려온 부대들로 사실상 다 합쳐도 완편 1개 연대 규모에 후퇴하면서 중화기를 다 버리고 내려온지라, 사실상 어떤 반격을 기대하기는 처음부터 힘들었다.
미아리 방어선은
지금으로 치면 지하철 미아삼거리역에서 미아리역이 그 지역에 해당되고,
지금은 이곳이 서울이지만 당시에는 이 미아리고개 넘어 돈암동부터가 서울이었다.
결국 예상대로 창동 방어선이 무너지자 그에 따라 밀려 내려온 창동방어선의 잔존 부대가 합류하게 된다.
당시 지휘관은 일본군 출신의 이응준 소장으로 회기동에 사령부를 꾸리고 그나마 T-34에 대응 가능(전차궤도 공격)한 105미리 고사포 6문과 57미리대전차포 8문을 가지고 어떻게든 막아보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105mm 곡사포 대전차 관통력이....
이미 적의 포격은 동대문과 한남동 일대까지 떨어지고 있었는데, 그래도 부족한 전력으로 미아리고개 넘어오는 선두 전차를 격파하는등 27일은 잘 막아냈다.
특히 미아리 방아선 최 전방에 있던 20연대 1대대의 분전은 놀라왔다. 적의 전차부대에도 놀라지 않고 침착하게 화력을 집중해서 북한군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시간에 대전에서 녹음한 이승만 대통령의 방송이 서울시내 곳곳에 나오고 있었다.
"유엔이 우리를 도와주기로 했고 침략자를 물리치기 위해 군수물자가 날아 도우니 국민여러분들은 안심하십시요" 라는 방송은 계속나왔다.
6월 27일 육군본부가 용산을 버리고 시흥으로 내려왔는데, 내려 오는건 좋은데, 통신선과 장비들을 잘라 버렸다...............
미아리 방향에서 싸우던 7연대와 잔존부대를 고립시켜 버린것이다. 요즘말로 팀킬한거죠?
X발 같은 놈들이죠
50년 6월27일 동아일보 신문 --내용은 국군이 북진중이며 해주시를 점렴했고, 대한해협에서 북한군 선박을 격침했다는
말도 안되는 기사가로 도배되어 있습니다. 다음날 6월28일 부터는 신문이 안나옵니다...
이에 비해 돈암동 일대에 주민들이 가마솥 100여개를 걸고 주먹밥을 해 먹이며 7연대를 지원했다고 한다. 개전후 3일동안 재대로된 식사 한번 못먹었던 병사들에게 최초로 지급된 식사였다.
그사이 개성에서 밀려난 12연대가 강화군 통진으로 배편으로 철수하고, 27일 강화도에 북한군이 상륙하자 김포쪽도 전쟁터로 변해버린다, 양쪽모두 김포 비행장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기에 국군도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차츰 밀려나기 시작했다...
전차2대로 벌어진 대참사
자정이 넘어가자 28일 새벽 북한군의 전차 2대와 소대 병력을 흥릉.. 지금의 국립산립과학원의 옆길로 우회 시켰는데, 자 이 전차 2대와 소대 병력이 아무런 저항없이 동대문을 지나 종로까지 들어와 버린다. 실로 어이없는 상황이었다. 시가전 준비가 전혀 없었다는 반증이지만
위 사진속에 전차2대가 아닐까 싶다.. 주변에 별다른 병력없이 전차2대가 동대문을 등지고 달리고 있는게...
이소식이 새벽 1시 45분 채병덕에게 전달되었다. 전차2대에 소대병력이면 충분히 격퇴 가능한데, 무능의 아이콘 채병덕이 "야! 큰일났다 공병감 최창식 대령한테 한강다리 폭파하라해!!"
실로 어이없는 명령이었다.
결국 새벽 2시 45분경 한강의 유일한 다리였던 한강대교(한강인도교)가 폭파되었다.
인도교 폭퍼사진
이폭파로 차량 50대와 다리위 시민 500명이 폭사한다.
이다리의 폭파로 서울 시민들의 발을 묶었고, 더욱결정적인 것은 아직도 한강 이북에 남아있던 국군들의 퇴로를 막아버린것이다.
이사건은 결국 두고두고 이승만 정부의 발목을 잡게되고, 8월28일 공병감인 최창식 대령에게 사형을 구형함으로 희생양으로 삼아 마무리 하려했다 그해 9월 22일 최창식 대령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62년 최창식 대령은 다시 한번 무죄 판결을 받는다....
암튼 지금도 이 한강다리 폭파는 용서받지 못할 이승만 정권의 실책으로 두고두고 기록되어 지고 있다
한강다리가 끊기자 한강이북에서 싸우던 국군의 사기는 급격히 떨어졌다.
나룻배와 땟목 심지어 수영으로 많은 병력들이 넘어오는데는 성공했지만, 중화기들은 포기한채 한강을 도하해야만 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적어도 한강다리 폭파는 최소 4시간 최대 6시간 후에 했어도 충분했다는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겨우 전차2대로 벌어진 대참사였다....
오늘은 여기까지... 다음은 한강방어선과 한강 이북에 남은 국군은 어찌되었는지좀 써보겠습니다.
|
첫댓글 한강대교 폭파만은(북한애들을 제외한) 그 어떤 집단에서도 쉴드를 못칠일인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홍릉으로 저렇게 우회를 한것이군요....
지금 생각해도 정말 어이없는 일들의 연속이었지....
@유석민 아무도 작전술단위의 지휘경험이 없어서 생긴일 아닌가 합니다. ㅠㅜ
의정부쪽으로 보낸 병력들을 준비도 안된 상태에서 오는대로 계속 축차투입시켜 소모시키니 그냥 뚫려 버리지.
하여간 당시 군 수뇌부는 대가리가 없는건지 북한과 내통한건지..
인터넷 검새해보니 네티즌들이 신성모와 채병덕이야 말로 숨겨진 인민의 영웅? 이라고 평하는 글이 있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