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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오천수
1,
배꽃
댓잎이 서걱서걱
쓰르라미 울음처럼
똬리솔
솔방울도
머리숙여
생각하고
가지엔
반쯤 핀 꽃들 혼잣말로 중얼인다
누님이 이맘때쯤
시집가던 고삿길
하얗게 핀 슬픔은
오늘도 반짝이고
바람에
나부낀 꽃잎 글썽이던 눈물 같다
2,
담쟁이 벽화
여름내 고물고물 능수버들 한그루를
연 묵은 가지잡고 잎 잎의 묘책으로
광망한 하늘 자락은 여백으로 꾸민다
농목을 꼬나 잡고 점점으로 구도잡아
갈필을 가다듬어 일필휘지(一筆揮之) 한 획으로
석별의 버들가지에 머뭇거린 멧새 때
한기에 젖은 몸이 집필을 마감하고
활기찬 잎자루도 졸음증에 못 견뎌
뼈뭍이 담쟁이 벽화여원 잠을 설친다
3,
늦가을
추수 긑낸
텅 빈 들녘,
사각 사각
바람 춤에
이삭 줍는
철새들의
작은노래
아스랗다
시냇물
졸졸 소리에
깊어가는
가을나절.
4,
시詩 잔치
유달산
끝자락에 여름같은 가을날
바람결 막고 서서 시상을 차려놓고
백구(白球)는
횡서서 문장을 선회하며 읇고있다
현수막
새긴 문신 얼바람에 드리고
바닷가 석양빛에 몸 말리는 신작들
모래톱
헤집는 낮달 실눈 짓고 소작(所作) 몇점
5,
들국화
녹색 빛
뱉어낸 곳
낙엽진 아래뜸에
빈가지 산새 한 쌍
울음소리 스러지고
황량한 이내 가슴에 스산함이 깔려온다
갈물은
얼까말까
숨죽여 졸인마음
깊섶의 이파리들
이리저리 뒤척일 때
앙상한 나무사이로 밤별이 길 묻다
북서풍
성화 속에
말없는 늦가을이
서둘러 퇴각길을
철새로 날아가고
낙오된 들국화 잎은 싸라기로 다독이다.
프로필
[미당백일장] 차상
[시조시학] 등단
[시아문학] 감사
[살아있는시] 동인
시조
나관주
1,
교훈
조
용
히
평화롭게
자유롭게 종횡으로
오욕을
뿌리치신
청백리의 원조답게
만
고
의
불변색채로
가르친 듯 채우시네.
2,
상속
고
운
들
푸른 숲은
강물에 내몰리고
언덕 위 억새꽃만
삭풍에 흩날린 곳
빼
닮
은
황무지 쓸며
젖어본다 향수에.
프로필
문학공간-수필 시조 당선
시대문학-수필당선
한국문인협회 회원
시아문학 동인
누리문학 회원
강진문협 회원
광주 시조시인협회 회원
저서- 사군자(시조집)
수필
이 상석
1,
우항 포구
포구(浦口)는 구성진 사투리와 애환으로 얽힌 진솔한 삶의 풍경과 낭만이 서려있는 곳이다. 저 유명한 소래포구나 변산반도의 곰소 항처럼 성시를 이루지는 않았지만 전라남도 해남군 황산면 우항리에도 그림 같이 아름다운 포구가 있었다. 지금은 금호방조제를 막아 민물이 되어버린 담수호에서 고기 잡는 몇 척의 소형 어선과 선착장 축대만 남아 있지만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좋은 갯벌에서 잡히는 어종이 다양하였고, 고기를 사다 팔려는 장사꾼들과 숭어, 전어, 낙지, 보리새우(일명 오도리)에 소주 한잔 하려는 사람들로 붐비던 인심 좋은 포구였다.
주변 경관도 매우 아름다워 이 지역 학생들의 단골 소풍 장소였다.
바다 속까지 훤히 보이는 맑은 물에 발 담그며 작은 조약돌을 줍고, 십리 길 넘게 펼쳐지는 떡시루 같은 퇴적층에서는 파도에 밀린 수 천 년 세월의 흔적이 전설처럼 들려오곤 하였다.
점심시간이 끝나면 선생님들께서 모래며 바위틈에 숨겨 놓은 보물찾기가 그렇게도 재미있었는데 벌써 50 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우항 포구가 언제부터 형성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그 당시 방파제 주변에는 십 여체의 초가집이 있었으며 물이 많이 들어오면 바닷물이 앞마당까지 넘실되었다.
1960년대 초반에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유전이 발견되어 이 지역 살함ㄷ즐은 너나없이 희망에 부풀었고, 정부에서도 전문 기술자들을 보내 수차례 시추 작업을 하였지만 너무 소량으로 중단되는 아쉬움도 있었다.
포구는 만선이나 상봉의 기쁨도 있지만 한과 서러움도 있게 마련이다.
우항포에도 대형 참사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연호 배 침몰 사건’이다.
1952년부터 ‘연호 호’가 목포에서 해남군 화원면 별암리를 거쳐 문내면 고당, 삼덕포 그리고 황산면 우항포와 인근의 연호포(서구지)까지를 하루 한 차례씩 운행하였다. 그런데 1963년 1월 18일 설을 며칠 앞두고 해남 서남부 지역 주민(황산, 문내, 화원 등) 141명과 곡물류를 가득 싣고 출발했던 연호 호가 목포항을 2킬로미터 쯤 남겨 둔 하사도 앞 해상(지금의 삼호 조선소 부근)에서 침몰하여 1명만이 생존하고 140명이 유명을 달리하는 해상 사고가 있었다.
그날 이웃 마을의 어떤 아저씨는 배에서 쥐가 육지로 나오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여 승선하지 않았고, 또 다른 분은 시간이 조금 늦어 배를 못타 살았다니 천당과 지옥 같은 운명이었다고 할까.
사고 후 부터는 ‘삼성 호’로 바뀌어 1971년까지 운항하였으며 고등학교 시절에는 나도 이 배를 타고(약 3시간 정도소요) 다녔다.
내가 집에 다녀가는 다음 날 아침이면 우리 집은 무척 분주하였다.
아버지께서는 배 시간에 늦지 않게 새벽부터 서둘러 자취생활에 필요한 쌀이며 반찬 등을 리어카에 싣고 십 여리도 훨씬 넘는 황토 길을 따라 이곳까지 바래다 주셨다.
나는 아버지와 헤어지기가 아쉬워 얼른 배에 탔지만 아버지께서는 내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 까지 선창가에 서 계시곤 하였다.
작은 포구였기에 수심이 깊지 않아 썰물시기일 때는 바다 가운데에 여객선을 정박 해 놓고 나룻배로 옮겨 타기도 하였는데 포구 끝부분에서 작은 선박까지 놓인 긴 널판자를 건널 때는 무서워서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기도 하였다.
이제 우항포는 포구로서의 기능은 상실했지만 해남군을 상징하는 보고(寶庫)로서 국내는 물론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관광지로 거듭나고 있다. 방조제 공사로 바다에서 호수로 변한 주변에서 1990년대 후반부터 익룡.공룡 새발자국화석과 별 마크 달린 대형 초식공룡 발자국이 세계 최초(最初)로 한 지역에서 발견되었으며 , 세계 최대(最大)의 익룡 발자국과 약 8,300만 년 전에 형성된 세계 최고(最古)의 물갈퀴새 발자국 화석 등 각종 화석들이 다량으로 발견되어 그 유명세가 날로 더해가고 있다.
나 어릴 때의 추억과 서남부 지역 주민들의 낭만과 애환이 서린 우항 포구!
주변은 많이 변했지만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는 방파제에서 몸 성히 잘 다녀오라고 손 짓 하시던 젊은 날의 아버지 모습을 본다.
웅장하게 들어 선 공룡박물관 지붕 너머로 ‘뚜우, 뚜우 ’삼성호의 뱃고동 소리가 들려온다.
2,
둥 지
화단 정리를 하다가 동백나무 가지 사이에서 작은 둥지를 발견하였습니다.
정확히는 몰라도 지름이 약 2~3센티 정도 되는 걸로 보아 벌새 종류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곳에 둥지를 틀고 암수가 다정하게 지내며 알을 낳고 부화하여 다른 곳으로 이사 갈 때까지 모르고 있었다니 참으로 무심한 주인입니다. 마치 베틀로 짠 것처럼 한 올 한 올 촘촘히 엮어 놓은 새 집이 진귀한 예술품보다도 더 소중 해 보입니다.
둥지 속에 남아 있는 몇 개의 솜털에서 갓 깨어난 병아리 냄새가 납니다.
건너편 키 큰 먹구슬 나무에도 까치가 집을 지었습니다.
까치집은 대부분 나무 꼭대기에 짓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듬성듬성 지어 진 것 같지만 작은 나무 가지를 잘 얽혀 놓아 강한 비바람에도 부서지지 않으며 집을 짓는 동안 다른 새에 비해 매우 시끄럽습니다.
새 중에는 딱따구리처럼 직접 집을 짓지 않고 나무에 구멍을 파 육아 실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고, 뻐꾸기는 남의 둥지에다 알을 낳습니다.
새들은 대부분 작은 집을 짓지만 북아메리카에서만 서식하는 흰머리 독수리(bald eagle)의 집은 무려 지름이 2.6미터나 된다고 하니 새들의 집도 사람들의 집처럼 크기나 형태가 다양하나 봅니다.
그러나 어떤 새이건 사람들처럼 양심을 속이는 부실공사는 하지 않습니다.
투기의 목적으로도 사용되지 않으며 대물림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느 땐가는 애써 지은 자신의 집마저 미련 없이 버리고 떠나갑니다. 평생 살 집도 아니면서 혼신을 다해 집을 짓는 새들의 마음이 참 아름답습니다.
새들이 둥지를 트는 것이나 인간이 집을 짓는 것이나 근본의 차이는 없을 것입니다. 새들은 한 개의 둥지를 틀지만 우리 인간은 여러 개의 둥지가 있습니다.
가정이라는 둥지, 직장이라는 둥지, 사회라는 큰 둥지에서 더불어 살고 있으며 그중 가장 중요한 둥지는 가족과 함께 사는 집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다 쓰러져 가는 오막살이라도 내 집처럼 편안한 곳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집을 갖기를 원합니다.
시골에는 해마다 빈 집이 늘어가고 한때는 3대가 함께 살며 웃음꽃을 피웠던 덩그런 기와집도 인적이 끊긴지 오래이건만 도시는 내 집 마련이 어렵다고 합니다.
밤하늘의 별 만큼이나 많은 건물들이 숲을 이루고, 매 년 수 만 채의 집을 지어도 오히려 집값은 올라가고 서민들에겐 그림의 떡에 불과합니다. 마당도 없고, 풀냄새 꽃 냄새도 없이 벽과 벽으로 단절되어 있는 성냥 갑 같은 아파트들이 정말 비싸도 너무 비싸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서울이 가장 큰 문제인 것 같습니다. 시골 부잣집 재산 다 팔아도 서울에 반듯한 전셋집 한 채 얻을 수 없다는데 어떤 사람들은 몇 채씩의 집을 갖고 가만히 앉아 부채질만 하여도 1년이면 수억씩을 벌고 있다니 무엇이 잘 못 되어도 한 참 잘 못 된 것 같습니다. 도시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가난했지만 초가집에는 주인이 아늑한 보금자리를 펴고 처마 밑에서는 제비가 집을 짓던 그 시절이 새삼 그리워집니다. 직위고하 빈부귀천도 없이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마음대로 둥지를 틀고 훨훨 나는 새가 부럽습니다. 오늘따라 한 마리 새가 되어 그리운 사람 품에 살짝 안기고 싶습니다.
우리 집에 둥지를 틀었던 작은 새는 어디로 갔을까요. 흥부네 집 제비처럼 보은 표 박 씨를 물고 오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한 울타리에서 살았던 고운 인연으로 다시 찾아와 정답게 노니는 모습이 보고 싶습니다.
푸드득 푸드득 서툰 날개 짓하는 어린 새의 모습이 보고 싶습니다.
3,
첫사랑은 추억을 싣고
/이상석
가난했던 어린시절 겨울철엔 농사가 없어 동네 사랑방에서 아버진 화투를 치시고 새벽에 들어오시면 부부싸움이 일어나고 방안이 시끄러우면 자다가 깨 숨죽이고 있어야 했다 엄마가 맞고 있을땐 일어나 아버지를 말려야 하나 그대로 숨죽이고 이불속에 있어야 하나 갈등하다 어느새 싸움이 끝나도 조용해진다 . 아빠가 화날땐 엄마가 져야하는데 꼭 대들다가 한두대 맞고 조용해진다. 나는 속으로 성질급한 남자는 만나지 말아야지 다짐한다. 박작굴이라는 밭이 있었는데 여름엔 참외를 심어 노란 참외를 맛 볼수이었고 가을엔 밤고구마를 몇십가마를 캐고 그곳에서 신나게 고구마 가마니 밑으로 숨어 숨박꼭질을 하며 어린시절을 보내곤 했다 어린시절엔 그렇게도 달도 밝고 크게 보이고 보름엔 친구들하고 내더위 하고 서로 더위를 가져가라고 야단법석이고 찰밥을 해서 집앞에 나두고 깡통을 돌리고 빚자루를 훔쳐 마을 앞에서 태우고 논두렁도 태우고 긴밤을 지시우고 잠을 자면 눈썹이 화해 진다고 해서 잠을 안자고 날밤을 샐려고 땅콩도 먹고 그러다가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곤 했다. 나는 무척 부자가 되고 싶었다. 한참 하우스재배가 인기를 끌기 시작할 무렵 고추재배한신 분이 고추한봉지 포장하면 한개에 오원씩 준다고 해서 금방 부자가 될것같은 꿈에 부풀어서 열심히 고추포장을 했다 처음으로 돈을 벌었는데 얼마를 받았는지는 생각은 안나고 부자가 될것같은 착각을 하고 꿈만 꾸고 부자가 되는 상상을 많이 했었다. 결국 이십만원에 박작굴밭은 빚에 남에 손으로 넘어가고 다시는 그곳에 가지는 않았고 이제는 산밭이라는 곳으로 가서 밤고구마를 캐오곤 했다. 할아버지께서는 의원처럼 환자를 치료해 주셨는데 가정살림은 소홀하시고 남 도와주는 일만 하시니 할머니께서는 할아버지를 무척 미워하셨다고 막내아들인 아버지께 심부름을 시켰는데 "니 아버지한테 가서 밥퍼 먹어라고 해라' 철없는 아버진 그대로 전했다고 한다 "아버지 엄마가 밥퍼 먹어라고 하는데요" 할아버지께서"네 이놈"화를 내셨다고 하시는데 우리집안에 전해져 오는 일화로 그이야기를 할땐 배꼽을 잡고 웃어야했다. 말을 안들을 땐 가장 무서운말은 침논다 하면 긴장하며 조용해진다. 어렸을때부터 마당에 과일 나무며 국화를 많이 심어 놓아 가을엔 국화향기에 취해야 했고 여름엔 빨간장미 향기에 행복했었다 나름 의미를 부여하며 나무를 심었는데 88년 올림픽을 기념하며 단감나무를 심었는데 가을엔 단감나무에 감을 따며 어머닌 우리딸이 심어서 온가족이 해마다 잘먹고 대추며 앵두도 따서 먹기고 했는데 나무를 심어 놓으니 해마다 열매를 따며 마음이 풍성 해지고 행복해졌다..4남1녀 외동딸로 태어나 자매를 만들어 줄려고 내 동생을 낳셨는데 또 아들이어서 무척 서운해 하셨다. 초등학교 1학년 입학할때 외숙모가 사주신 보라색구두에 엄마가 사주신 꽃무늬원피스에 예쁜만화그림이 있는 빨간체크 무늬가방을 메고 학교에 가니 세살많은 오빠친구들이 1학년 교실을 청소해주러 와서는 도근이 동생이다 크게 외치며 좋아해주어 창피해 내얼굴이 화끈달아오르기도했다. 초등학교 4학년때 김연순선생님께서 담임을 맡으셨는데 얼굴도 이쁘고 마음씨도 고우시고 공부도 잘 가르치시고 생각이 따뜻하신분이셨다 단란한 학급분위기로 우리반은 행복했었다. 공부에 재미가 붙어 우등상을 받았고 통지표엔 예의바르고 온순하며 성적도 좋다고 평을 해주셨다.당숙모가 같은 학년 선생님으로 재직하고 계셔 공부는 잘하고 있는지 와서 머리도 쓰다듬어 주시고 담임선생님께 공부는 잘하고 있는지 묻곤하셨는데 그 무렵 가족계획 캠페인에 아들딸 구별말고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 인구 문제를 해결할 구호를 하나 만들어 오라고 해서 관혼상제를 없애 인구문제를 해결하자고 선생님께 제시했더니 결혼을 안하면 애기도 안나고 인구 문제가 해결된다고 하니 학년 선생님들이 듣고 웃음바다가 되었다.그 즈음에 친구들을 데리고와 우리집에서 잠을 잤는데 갑자기 친구들이 남자애들 누구를 좋아하는지 궁금하여서 서로 고백하자고 제안을 내가 했더니 친구들이 순순히 고백을 하기 시작했다. 순정이는 명식이를 좋아한다고 했고 은경이는 용호를 좋아한다고 했고 홍순이는 상회를 좋아한다고 했다.나는 그때까지 누구를 좋아한다는 생각을 해본적이 없었고 단지 친구들이 누구를 좋아하는지 알고 싶어서 먼저 제안을 했는데 점점 내가 말할 순서가 돌아오고 있었다. 좋아하는 남자친구가 없다고 하면 배신자가 될것 같아 우선 급한대로 4학년3반 반장인 유승재가 좋다고 고백을 했었다. 그뒤로 그애를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었다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정말 그애를 좋아하게 되었다 하얀피부에 웃는 모습도 멋있고 친절하고 마음씨도 착하고 얼굴도 잘생기고 공부도 잘하고 그애하고 결혼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신랑 신부가 되는 상상에 나래를 펼치기도 했었다. 마을길을 걸어갈땐 남자 애들이 장난을 걸어오기도 하고 못가게 길을 막을땐 우리는 친구들하고 바가지에 물을 떠다가 뿌리고 도망가기고 하고 숨박꼭질도 하고 이성에 대한 호기심을 키워나가기도 했다. 5학년땐 과수원집에서 사는 김영채라는 아이가 있었는데 남자짝궁이 되었다 나름 신사적이었고 착했다 무슨 말을 하면 올소 하고 호응을 잘해주기도 했다 우연히 어른이 되어 만나게 되었는데 부산해양대를 나와 삼호중공업에 근무하다가 디에스중공업 부사장이 되었다. 내 남편에 대해 물어보곤 하면서 행복하냐고 되묻고 했는데 속으로 나에게 관심이 있었는지 아니면 친구라서 물어보는 것인지 알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물어볼수도 없고 나 참 유승재라는 친구도 연락을 하게 되는데 4학년때 그시절이 그립다고 했더니 너도 그러니 자기도 그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단란했던 급우들이 생각난다고 전남대 수의학과를 나와 임실해서 동물병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4학년때 좋아했었다고 하니깐 그동안 말한마디도 안하고 있다가 다 늙어 마흔 넘어 이제 말하면 어떻하냐고 하면서 웃는다. 우리 는 추억을 먹고 사는것 같다. 나의 첫사랑은 스물살때 찾아왔었다. 전남대 화공학과에 다니고 있는 신영수라는 남학생 노란우산을 쓰고 노란 은행잎이 흩날리는 금남로 4가 늦가을에 만남의 광장인 우체국앞에서 친한언니 소개로 만나게 되었는데 채플린이라는 학생회관옆 카페에서 처음만나게 되었다. 그땐 좋아하는지는 잘 모르고 그냥 만남이 설레이고 기달려졌다. 화이트데이땐 사탕바구닐 한아름 선물해 주었고 시집을 선물해 주기도 하고 운전면허를 따라며 책을 사주기도 했다. 난 그 시집을 외우기도 하고 무척 그 시를 사랑했었다 밤공기가 무척 상쾌하고 밤하늘에 별이 아름다웠다. 시간가는줄 모르고 이야길 나누었고 버스를 타지 않고 걸으면서 몇정거장을 지나 막차가 오면 타고 집에 왔었다. 크리스마스땐 집으로 초대해 저녁을 준비해 대접해 주기도했다. 일기를 쓰라며 일기장을 선물해 주기도 하고 명절땐 집에서 모르게 빠져나와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곤했었다. 관객이 많아 옆에서 보호해주기도 하고 어깨가 서로 붙이치기도하며 그 느낌이 그렇게 좋을수가 없었다. 길을 걸을때 인파속에서 어깨가 서로 붙이치기도 하며 그땐 팔짱을 끼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차마 말을 할수가 없었다. 서로 바라만 보아도 좋았던것 같았다. 헤어진후에도 노란 단풍잎을 보면 "콧날이 시큰해지고 눈이 아파오네요 그것이 사랑이란걸 이제는 알아요" 노랫소리가 귓가에 맴돌 고늦가을 찬바람에 외로움이 밀려오기도한다 한번쯤 우연히라도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꿈에서라도 만나게 되면 그렇게 좋을수가 없었다. 꿈에서도 설레이게 했다. 얼굴이라도 한번쯤 보고 싶어 싸이월드에서 검색을 해보기도 했는데 사진을 올려놓지 않아 보지 못하고 말았다. 친한 언니 말에 의하면 늦게까지 장가를 안가고 노총각으로 있다가 늦장가를 들었다고 했었다. 잘 살고 있겠지 행복하게 잘살았으면 좋겠어! 충장로에 가면 영수오빠랑 자주갔던 양식전문점 유생촌에 가서 옛생각하며 함박스테이크를 먹어보기도 하고 길을 걸어 보기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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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1953년 해남군 황산면 출생
두륜문학 단편소설 당선
한울문학 수필 당선
대한민국 문예 진흥회 문학대상 수상 등 다수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울문인협회 회원
시아문학 감사
해남문학 부회장
개화 김혜자
어머니의 숨결을 찾아서
나의 어머니는 주일이 되면 한 주 동안
가족의 건강을 기도하며,
밥을 지을 때마다 수저로 가족 수만큼 성미를 떠놓고
한 손엔 성경 가방을 들고,
한 손엔 성미 주머니를 들고 교회에 가셨다.
남편이 개인택시가 나왔을 때 일이다.
어머니는 남편이 개인택시 나온 기념으로
선물해 줄 테니 말씀해 보라 했더니,
느닷없이 한삼 모시 한복을 원하셨다.
그 당시 국내산 한산 모시 한 벌에 몇십만 원이었는데.
장날 어머니를 모시고 포목점에 들려 맞추시라 했더니 손수 지어 입으신다며.
아버지 적삼도 만드신다며 넉넉히 모시를 끊으신다. 시집와서 긴 머리 잘라 재봉틀을 사셨다며
그 재봉틀에 앉아 틀어짐 없이 주름을 잡고
치마 말을 만들어 박으시더니
평소 즐겨 입으시던 저고리를 펴놓고 본을 떠서 재단하신다.
난 말없이 한복 만드시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난 주름도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데 어머니는 못하는 게 없다 했더니.
옛날엔 시집가기 전에 친정어머니가 음식.
바느질은 기본적으로 가르쳐 보냈다고 말씀하신다.
그 곱던 세월 유수와 같이 흘러가고 87세 되던 봄날 어머니는
할렐루야 찬송 부르시며 천국에 가셨다.
한복 지으신 지 20년도 더 지난 지금 무더위가 불볕더위로 변하고서야
어머니의 모시 적삼이 생각이 났다.
장롱 이곳저곳을 다 뒤져도 어디 두었는지 생각이 나질 않는다.
아들 장가보내며 입었던 한복 상자 속을 뒤져보니
구겨진 어머니 한복은 퇴색되어 누렇게 변해 있었다.
어머니 생전엔 그리도 희고 곱던 모시 한복,
입고 외출 하시면 거리가 환했는데,
어머니의 여름나기를 생각하며,
아직도 딸의 깊은 곳에 어머니의 사랑을 기억하며 멋을 한껏 부려보리라 생각하고,
미지근한 물에 담가두고 어머니 살갗을 매만지듯
살살 비벼 세탁하고 치마 단부터 조심조심 상하지 않게 실밥을 뜯어나갔다.
다시 내 몸에 맞게 재단을 하고
진주 단추를 달고 완성해 놓으니 현대식 모시 투피스가 되었다.
옷 만드는데 배우지 않았어도 어깨 넘어 눈여겨봤던 어머니의 한복 짓는 솜씨,
나도 어머니 닮아 눈대짐으로 곧잘 만들었다. 8월 둘째 주, 어머니 모시옷은 다시 부활한 듯 내 몸에 입혀져
내가 다니는 대망 교회에 나가니,
그날따라 준비 찬송으로 어머니 생전 부르시던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찬송을 부르고
이어서 내가 좋아하는 "나의 기쁨 나의 소망" 찬송이 반주 되어
난 곱게 단장한 얼굴에 눈물범벅이 되어 손수건을 다 적시고서야 눈물이 그쳤다.
이렇듯 소리 없이 세월은 지나가고,
어머니 유품 한 점 남겨두었더니 내가 할머니가 되어
어머니 발자취를 따라가고 있음을 어이 어머니 자식이 아니라 하겠는가.
어머니가 오늘 따라 유난히 그립고 보고 싶다.
거꾸로 도는 시계를 읽고
개화 김혜자
" 법정스님의 무소유의 행복"을 정독하고
독후감을 쓰라는 스승님의 권유로 집필을 시작했다.
감히 정독 몇 번으로 법정 스님의 생을 나열하겠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용기가 나지 않아"법정스님의 무소유의 행복"은
다음으로 미루고
최강용 시인의 "거꾸로 도는 시계"를 읽고 독후감을 쓰기로 했다.
첫머리를 눈에 담아 가슴에 전하기까지. 보이지 않는
진실과 사랑 그리고 행복은 가정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느끼며
무언의 지시처럼 전율이 흐르기 시작했다
젊은 날 새 농민 연제소설부터 단편 수필 시 등 고교 교사로
정년퇴임까지 최선의 삶을 다 했음에 깊이 존경할 만하다.
시다운 시 한수 읊어보고 싶다는 참다운 시인의 겸손한 말씀이다
국문학의 길을 평생 걸어오시고도 늘 겸손을 잃지 않는 스승님
어린 손자에게서 순수시를 발견하시고 옛 성인의 말씀에
할아버지가 손주에게서 배운다는 맑고 티 없는 "영혼의 대화"라고
작가는 글로써 말할 뿐이라고 말씀하신다.
학식이 부족한 나는 스승님의 가르침으로 우리글의 시작은
세종28년 1446년 자음과 모음이 시작되었음을 알았고 중학교 때
해외펜팔 위문편지 쓰던 마음으로 쉽사리 시를 쓰노라고
글을 쓰기 시작했으니 지나가는 개도 웃는다는 속담이
나에게 적합한 말이다.
"거꾸로 도는 시계"시계가 거꾸로 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거꾸로 돌아 아이도 웃고 세상도 지구도 역행한다며
우리 눈으로 보기엔 탓 할 것도 없고 자고 일어나는
알람이나 출. 퇴근 시간이나 보며 약속이나 지키는 시계로 보이는데
스승님 눈엔 냉소가 절로 터지게 보인다니 나도 웃음이 절로 난다.
"거꾸로 도는 시계"도 성경말씀을 아는가 보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했는데
스승님도 제1부 사랑시를 3/2를 나열하신걸 보면 사랑의
실천자심을 느낄 수 있다.
선생님은 부모의 효심도 지극하시다 들었다.
효행 상을 여러 번 받으시고도 늘 당연히 할일을 했을 뿐이라며.
반납해도 받아야 할 분이 받았을 뿐이라며 겸손해 하신다.
아내 사랑도 빼놓지 않고 주름진 얼굴을 보면서 노부모 섬기며
아들 딸 낳아준 감사의 마음도 잊지 않았고
정겨운 얼굴을 보며 시간이 멈춰주길 소망하는 아름다운 마음이
나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거꾸로 도는 시계"는 거꾸로 돌면서도
붉은 노을을 시간에 잡아 가두기도 하고
"노을을 밤의 시녀"라 어둠을 동경하는 창부라 일컬어 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아름다운 모습이라 무지개보다 배승하다하며
밤의 사슬에 묶여 어둠을 향할 수밖에 없는 서글픔이라.
음. 양의 이치를 명백히 밝히는 똑 떨어지는 시임에 틀림없다.
눈물이 흐르는 날엔 미끄러지는 강물을 보며 살아온 날들이
한줄기 물줄기 되어 흐른다며 비유를 제시하고
그의 여정은 살아온 날들과 살아갈 시간들이 실컷 눈물을 토하고 싶어도
삶의 역정이 역겨워 걸어온 길 다시 시작하려면 나비되어 날아가리라.
뼈저린 영혼의 소리를 글로써 나타내 주었다.
우리 삶은 어떤가.
거꾸로 도는 시계를 바라보며 내 삶이 거꾸로 돈다 해도
사랑의 아침을 목마름으로 기다리지 않는가,
피어날 상사화를 기다리듯 시련을 거꾸로 돌아가는 시간에 맞기며
서러움을 떨치며 살지 않는가.
은 ,영, 구 젖먹이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보며
기쁨의 날을 기다리며 아들이 자라 술친구가 되기까지
어미는 몸 살라 사랑을 먹이고 아비는 세월을 먹고 살고
자녀들은 꿈을 불사르기까지 생을 다하며 최선을 다해 살아감을
일깨워주는 “거꾸로 도는 시계”이다,
“거꾸로 도는 시계”는 세상의 고통과 시련을 알리기도 하지만
백모님의"염습"을 지켜보며 육신을 벗어나면 영혼의 세계는
평화롭다는 것도 시계는 알고 있었다.
파랑새 되어 날아갔지만 내년쯤 다시 온다는 위로도 잊지 않았다.
그렇다. 거꾸로 돈다하여 웃을 일만은 아니다.
사랑이 있고 이별이 있고 사계절이 있고
가을의 서정이 있는가 하면 계화 하는 봄도 있어
관악산에 가면 열녀암 이 있고 안양천의 봄은
어린 날의 시냇물의 추억이 있지 않는가.
가을을 서술하는 코스모스 .바다의 파도소리.
구구절절 거꾸로 도는 시계 속엔
우리의 인생이 들어있고 아픔과 슬픔 웃음과 기쁨도
시간 속에 들어있음에
우리는 거꾸로 도는 시계를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다
그것이 우리 사는 인생이다.
독후감을 쓰려니 문득 어린 날 생일 선물로 받은
"삶"이란 시 구절이 생각났다
문설주에 걸어놓고 읽으며 들에 나간 어머니를 기다리곤 했는데
“거꾸로 도는 시계”독후감을 마치며 어렴풋이
푸시킨의 “삶”이 생각나는 연유는 무엇일까?
프로필
개화 김혜자
전북 부안 출생
1959년 5월10일생
2007년 현대문예지 등단
현대문예지 정회원
시서문학 정회원
시아문학 정회원
나관주
지병 持病
그녀가 입원하고 있는 순천의료원(도립병원)은 해남에서 직행버스로 3시간 남짓 걸리는 거리였다. 그녀는 순천의료원 323호실에 입원하고 있었다. 그녀가 순천의료원에 입원하게된 것은 순천에서 요식업을 하고 있는 그녀의 큰 딸 의사에 따른 것이다. 2인 실에 입원하고 있다고 하니까 ‘서울 일류병원만은 못해도 중환자가 생활하기에 불편하지는 않겠거니’하고 방문을 당겨보니 대여섯 평 남짓한 방에 환자용 침대 둘, 사물 보관함 둘, TV수상기 하나, 거기에다 벽면에 세면기 하나만 달랑 붙어 있을 뿐 샤워 실이나 화장실은 보이지 않았다. 환자가 볼일을 보려거나 샤워를 하려면 밖에 나가야하는 초라한 시설이었다. 그나마 조금 다행인 것은 2인 실 이용자가 적은 탓인지 323호실에 입원하고 있는 환자는 그 사람 뿐 이어서 좁은 공간을 넓게 쓸 수는 있었다. 한 달 만에 만나본 그녀의 모습은 정말 목불인견目不忍見이었다. 초췌한 모습이려니 예상은 했지만, 피골이 상접한 사지, 움푹 패인 두 눈, 툭 튀어나온 광대뼈며 거기다 세월만 먹고 자란 머리카락이 인생무상을 말해주고 있었다. ‘문 여사’하고 불러보니 톤이 좀 낮아서 그렇지 애교 섞인 어투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할 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은 초롱초롱한 두 눈방울이 그녀의 육신을 지키는 유일한 파수꾼이었다. 그녀의 집을 가보면 언제나 이웃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이를 항상 내놓고 다닐 정도로 웃음이 헤픈 사람 남이 하자는 대로 고개를 끄덕이며 잇속을 채울 줄 모르는 사람 또래끼리 모이면 팔씨름의 왕이요 날렵하기로 이름났던 그 사람이 1년 새 왜 이지경이 됐을꼬 ! 그녀에게는 담석증이 있어서, 5년 전에 그녀의 친척이 근무하고 있는 서울 근교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 그때 위에도 또 다른 지병이 도사리고 있었던 모양인데 그걸 함께 발견 못했던 게 화근이었다. 병명은 '위암' 증세는 말기로 수술 불가 여생은 2. 3개월 시한부 인생이다. 활기 넘치고 부지런하고 재치 있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그 사람이 이렇게 무서운 고질의 늪에 빠질 줄이야 꿈엔들 예상이나 했겠는가. 그녀는 4년 전에 남편과 나는 3년 전에 아내와 사별하는 불운을 당했었다. 먼저 떠난 그녀의 남편과 나는 동갑내기 친구였고 내 아내와 그녀 역시 동갑내기 친구였기에 우리 둘은 서로를 위로하며 친구처럼 가족처럼 살아왔다. 남자가 있어야할 곳에는 내가 나아가 서주고 여자가 해야 할 일들은 그가 맡아 처리해주며 살아오기 어언 3년이 훌쩍
넘었다. 우리 두 사람은 망부亡夫와 망처亡妻로 비워진 공간을 힘을 합쳐 메우면서 열심히 세파를 넘어왔는데 천도도 무심하게 또다시
격랑에 휘말려야 한다니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 하룻밤이라도 그의 간병인이 돼보려 작정하고 그녀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을 조심스레 지켜보았다. 밥이라곤 둬 수저 뜨면 그만이다. 이래도 그녀가 지금껏 생명을 부지해온 것은 하루 2병씩 꽂은 링거액이 그의 혈맥을 유지시켜주기 때문이다. ‘왜 이 정도만 먹느냐’고 물었더니 더 이상 먹으면 위에서 거부반응이 온다고 한다. 위암덩이가 커져서 십이지장 통로를 막아버린 것 같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습관적인 미소만은 눈언저리를 감돌아 입술과 마주친다. 이젠 수험준비를 어느 정도 끝내고 수능일자 만을 기다리는 수험생처럼, 혼수 준비를 다
마치고 결혼식 날만을 기다리는 예비신부 마냥 ‘나 죽으면 가산 정리는 이리이리 하고 장지는 네 아빠 곁으로 하라’ 했다며 사뭇 말솜씨가 아주 천연덕스럽다. 눈언저리가 달아올라 울상인 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도리어 살아남을 내 걱정을 늘어놓는다. 도인도 아닌 사람인 그녀가 죽음 앞에 어떻게 이처럼 태연할 수 있단 말인가! ‘청둥오리가 먹고 싶다’ 하기에 둬 마리 가지고 갔더니 요식업을 하고 있는 그녀의 큰딸이 요리를 잘해 왔다. 식사 때가 되면 밥은 저만 밀쳐두고 이걸 대용식으로 하면서 헤픈 미소를 늘어놓는다. 밥은 금방 거부반응이 와도 이건 좀 나은 모양이다. 그러나 먹은 양은
‘쥐 소금 먹 듯’ 조금 씩 가끔 먹곤 한다. 다음날 병원 문을 나올 때 링거를 매달고 복도까지 따라 나와 손을 흔들면서 미소를 띄워
주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은 웃음이 없는 사람이다.’라고 하더니 그녀는 비록 중병은 앓고 있어도 마음만은 여유 만만한 부호인 셈이다. 우리 속담에 ‘핑계 없는 무덤 없다.’는 말이 있다. 저승 가는 길에는 누구든 하나 둘쯤 사인死因을 짊어지고 떠난다는 말 일게다. 우리인간들의 사인의 주류는 뭐니 뭐니 해도 역시 병마病魔다. 중풍 암 교통사고 기타 질병 등의 꼬리표를 붙이고 우리들은 이 세상을 떠나간다. 중풍은 그래도 어느 정도 나이가 든 늘그막에 찾아오는 병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암은 유아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시도 때도 없이 우리들 인체에 파고들어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지병이다. 우리나라 인구 사망률의 25%를 암이 차지하고 있다고 하니 역시 암은 지병중의 지병인 셈이다. 암이 이 세상에서 발견되기 전 16세기경에는 천연두가 우리인류를 괴롭혀왔다고 한다.
천연두(smallpox)는 천연두바이러스에 의한 급성 발진성전염병으로서 우리말로는 두역痘疫 두창痘瘡 또는 마마라 불리어지는 병인데 이병은 제일전염병의 칭호가 붙을 만큼 무서운 지병이었다. 면역이 되지 않은 사람들의 감염 율은 거의 !00%에 육박하였다고 하니 싹쓸이 전염병이란 이름이 붙을만했다. 16세기부터 유행성 전염병이 됐으며 20세기 전반까지 극성을 부리다가 이젠 이 지구상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춘 병이 되고 말았다. 천연두는 1796-1800년까지 4년 동안 영국의 외과의사 'E 재너'가 우두바이러스를 인체에 접종시켜 천연두를 예방하는 우두접종법을 개발하여 우리 인류를 천연두로부터 헤어나게 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구한말舊韓末 국문학자 지석영(1855-1935)이 1879년 당시 부산에 있던 일본 해군병원에서 종두법을 배우고 2개를 얻어와 충북 진천군 덕산면으로 가서 자기처가와 이웃 사람들에게 종두법을 실시한 것이 종두법 사용의 효시였다고 한다. 세계보건기구(WHO)는 1958년 천연두 근절계획을 수립하고 추진한 결과 1980년 ‘지상에서 천연두 바이러스 소멸하다’는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암 퇴치 선언’ 일은 과연 언제나 오려나------------ 우리나라 속담에 ‘손톱 밑 곪은 줄은 알아도 염통에 쉬슨 줄은 모른다.’는 말이 있다. 지금 과학문명의 발달은 별들을 정복할 만큼 극을 달리고 있다. 「암 스트롱」이 1969년 7월 20일 아폴로 11호를 타고 달에 올라가 달 표면에 성조기를 꽂고 2시간 반 동안 거닐다가 지구로 귀환하지 않았던가?
정복욕에 강한 우리인류는 달나라까지 정복하면서도 자기 뱃속에 도사리고 있는 암세포
하나 지금껏 제거하지 못하고 있다니 한심 천만이 아닌가? 언제부터인가 가능성은 내비치면서도 실용단계에는 미치지 못한 그 까마득한 암 고지! 얼마나 험준하고 얼마나 가파르기에 지금껏 쩔쩔매고만 있단 말인가! 「암 고지」를 정복하고 노벨상을 받을 인류의 공로자가 과연 누구일지 눈여겨 기대해 보자.
「이 수필은 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 위원회가 발행한 〔한국수필가창간호〕에 게재된 작품입니다.」
프로필
[문학공간] 시조,수필 등단
해남문학 회원
저서 [사군자]
시아문학 동인, 시조분과 위원장
푸른날의 기행
/ 이 순애
아홉 남매 중 딸이 일곱 명인 딸 부잣집이었던 우리 집은 읍내에선 2km거리를 둔 평범한 농촌 마을이다.
마을 뒷산 너머엔 무안 연꽃방죽이 펼쳐 있으며 동네 저 건너편엔 영산강을 휘돈 채 영암 월출산이 바라 보인다.
추석 명절 엔 뒷산으로 동무들과 산보를 가면 우리 집이 산을 중심으로 한가운데 아담하게 자리하고 있다.
내 유년시절의 우리 집 그림은 완고하신 성품을 지니신 할머니께서 여름날 사그락 거리는 말간 모시치마를 둘러
입으시고 집안 곳곳을 배회하시는...그 옆에서 딸. 딸. 딸만 낳으시고 풀 죽어 계시는 엄마의 수척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여섯번 째에 엄마는 아들을 생산 (그 시절엔 출산을 생산한다고도 했음) 하셔서 완강하셨던
할머니 팔에 안겨 드렸다.
학자 풍이셨던 할아버지께선 내가 초등학교 1학년 손녀딸 만 셋 일때 아들 손자를 못 안아보시고 돌아가셨다.
대쪽 같으신 할머니는 훗날 기여코 당신의 유일한 독신 아들에게서 아들 손자 둘을 보시고 눈을 감으셨으니
호사 하셨으리라. 첫 남동생이 태어났을때 당시 아버지는 마을 이장 직분을 맡아 하시던 때라 할머니께선
돼지 한마리를 잡게 해 동네사람들과 한바탕 잔치를 벌이셨다. 지금도 새록새록 기억나는 건 맏딸인 내가
너댓살 쯤일까.. 아버지가 군 제대를 하셨는데 그때 아버지가 갖다 준 군용 건빵 맛은 어찌나 맛있었던지..
할머니께선 외아들이었던 아들을 군대에 안보내려고 (전쟁중이였으므로) 아버지를 멀리 섬에까지 운둔 시키며
안간힘을 쓰셨지만 결국 국가의 부름에 육군하사 복무 5년 하시고 제대 하신후 고등교육까지 받으셨었지만
그렇게 평생을 전원생활에 묻고 당신의 꿈을 정작 접으신 채 살아오셨다. 유독 나의 유년시절은 딸 부잣집으로
엄격했던 층층시야 시 동기간을 뒷바라지만 하신 어머니의 고달픈 일상을 제일 많이 지켜 보며 자랐다.
어머니는 그래도 함평에 외할아버지께서 조합장으로 지내셨던 유복한 집안에 맏딸로 중등교육까지 받으셨고
어머니 또한 여덟 명의 형제 자매 중 맏딸이셨다.
나 와는 한 살 위 였던 막내 외삼촌이 있었는데 예의 바르고 공부 잘한다고 엄마는 늘 칭찬과 자랑을 하셨다.
방학 땐 큰 누나 집인 우리 집으로 애콩(완두콩) 칼국수가 맛있다고 꼭 와서 맛있게 먹곤 했다.
나도 부잣집 막내딸 이었으면 삼촌처럼 대학생이 될 수 있을텐데... 의과대학에 다닌 삼촌이 늘 부럽기만 했었던
그 막내 삼촌은 지금은 광주에서 우리이비인후과 의학박사로 열심히 의료 봉사도 하시며 병원을 운영하고 계신다.
지금은 이미 고인이 되신 외할머니, 그 시절 여름엔 보리밥을 주로 먹고 살때(지금은 웰빙건강식품이라고 즐기지만) 가끔씩 외할머니께서 외갓댁 일하는 머슴과 함께 쌀섬을 짊어지게 하고 다녀 가시곤 했다. 보리밥만 먹고 살아 갈 당신 딸이 늘 맘에 걸려서 손수 쌀을 가져다 주셨던 외할머니가 오실 땐 얼마나 좋았던지...
그런 날에는 밥그릇에 보리쌀밥 보담 흰 쌀밥이 수북하게 담아졌었다.
그 시절 유일한 경제적 소통이란 돼지가 새끼를 낳으면 열 너댓마리씩 낳곤 했는데 한달 남짓 키워서 오일 장날에
팔아 그 몫돈으로 고모들과 우리들 학비로 나가는게 경제 수단이였다. 아버지께서 마을에 이장일을 돌보실때도
어머니는 묵묵히 부녀 회장일을 맡아 하시며 내조를 잘 하셨다. 내가 단발머리 소녀 땐 서울에서 유학하는 고모가
틈틈히 안데르센 동화책을 사 보내줘서 즐겨 읽을 수 있었고 밤엔 라디오 별밤 방송을 들으며 시인의 꿈도 꾸었다.
들녘에 일 도우러 나갈때도 내 옆구리엔 늘 작은 트랜지스터가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지금 막걸리를 썩 잘 마실 수
있었음은 그때 아버지 심부름으로 동네 점방으로 새참 시간에 술 심부름하다가 삼분의 일 분량쯤 홀짝홀짝 몰래 마셔 본
술맛 때문이다. 아버지는 " 어째 술량을 자꾸 더 적게 준다냐" 하시며 점방집 아줌마를 애꿎게 나무랬었다.
지금은 영산강이 모두 개간이 돼서 논으로 변했었지만 그 땐 마을앞 영산강에서 서렁게. 맛. 낙지. 운저리. 대가니
장어. 여러 어류가 많이 잡혔는데 가끔씩 집 일하는(일년 치 품삯을 받고 일을 해주며 같이 살던 사람.) 아저씨가
강에서 잡아 와 뒷마당 헛 아궁이에 불지피고 구워먹었던 그 맛은 지금은 찾을 수 없을 것 같다. 밤이면 은모래가
사각거리는 강변을 잘 튕기지도 못하는 통기타를 메고 뛰어 노닐던 영화같은 추억들.
'딸부잣집 맏딸로 타고 났구나, 야무지게 동생들 잘 돌보고 집안일 잘하고' 동네 어르신 들께선
격려와 칭찬을 늘 해주셨다.
소녀에서 성숙한 처녀로 나래를 펴고 지낼쯤 엔 4H구락부 회장으로 마을에서 추천해 마을 4H구락부 일에
열성을 쏟으며 농촌 청소년 수련회에도 참석하는 등 이색적인 다른 농촌 문화의 견문도 넓혔었다.
매년 한가위 명절이 다가오면 인근 부락과 합류해서 콩클대회를 연례 행사로 치뤘었다. 스물두살 때 쯤일까
재치있게 말 잘한다며 콩클대회 사회를 보라고 마을 청년회에서 추천을 해 청년회 오빠들이 추겨 세운 바람에
철없이 무대위에서 마이크를 잡고 마을 사람들과 또 이웃 마을에서와 추석명절이라 타지에서
온 외부 사람들이 모인 앞에서 당당하게 무모함으로 부끄러움도 모르고 어설픈 사회자 역할에 눈빛을 날렸다.
그 시절 농촌 생활의 방송 메개체는 처마 밑에나 대들 보 기둥에 매달아 놓은 스피커 방송이 고작이었다 .
작은 네모 박스안에서 흘러나오는 스피커 방송은 농촌의 유일한 정보통이였는데 그날밤 스피커 방송을 통해 새어나온
딸 목소리를 집에서 듣고 계시다가 아버지는 급기야 무대앞 까지 쫓아 나오셨다 '조신치 못하게' 하시며 꾸짖으셨는데
청년 오빠들 만류로 못 이기신 척 되돌아 가셨다.
그래도 엄마는 4H회장 하면서 콩클대회 사회를 본다는 딸을 곱게 단장 해주고 싶으셨는지 일로 장날에 예쁜 갑사 한복도
한벌 마련해 주셔서 스물 한 살 꽃단장에 소박한 아름다움을 나름 뽐내기도 했었던..
수많은 별빛처럼 무심히 흔들고 지나가버린 젊은날의 빛 바랜 일상의 묶음들
아, 이제 팔순이 된 부모님 요즘엔 어디에서 실버노래자랑 대회가 있으시면 노래부르시는 걸 좋아하신 아버지는
열 일 제쳐두고 참여 하신다고 하셨다.
아직도 목청이 좋으셔서 읍내 노래교실에선 으뜸으로 노래를 잘 부르신다고 은근히 자랑하신다. 전국 노래자랑에 한번
출전 해보시는 게 꿈이라 하셨지만 두 세번 예선에 접수 해 나가셨지만 특별한 장기가 있지 않고 선 어려운
관문이었다. 지금은 체념하신 것 같지만 그래도 못내 늘 아쉬워 하신다. 가끔 읍내 노래자랑에 참가해 여흥을
즐기신다고 하신다. 가족들 행사가 있을 때 함께 노래방 가게 되면 유행하는 신곡 만 부르신다는~
우리 아홉남매가 아직까지 무탈하게 살아갈 수 있음도 어머니의 끝없는 사랑의 조율사 역할을 잘 해 주셨기
때문이리라. 몇년 전 에도 서울 K와 M 두 공중파 방송에 부모님을 비롯해 아홉남매 가족들 살아가는 일상을
방송작가들이 이틀씩 지내며 취재 해 전국 방송으로 나오기도 했다.
언제나 자식들에게 밑밥 지기로 살아오신 부모님께 오늘은 새삼 " 아브지 엄마 사랑해요 " 라고
무한한 감사의 전화를 쑥쓰럽지만 드려야 할까보다.
박래현
-효란 무엇일까-
효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이 될까/
모든 동물은 태어날 때 아무것도 모르면
無 의식으로 태어나면 자라면서 모든 것을 배워갔다.
사람과 동물(짐승)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면
답이 있지 않은가 생각해 본다
사람은 자라면서 윗사람 아래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
선, 후배 사이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자라면서 배워간다,
그러나 동물(짐승)은 그것을 모르기에 힘으로 싸워 이기면
장땡(대장)이기에 대들고 본다.
인간과 동물(짐승)의 차이점을 모르고 힘으로 대든 다면은
짐승과 다른 바 없지 않다고 본다.
그래서 인간은 먼저 효가 무엇인지 알고 사회에 진출해야 하는데
우리에 교육은 무엇이 먼저인지 아는지 모르는지 실추되고 있다.
아무리 지식이 많다 하여도 효 사상을 모르는 다면은 옛날에는
그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도 하지 아니하였는데
요즘은 효가 출장을 갔는지 외국에 수출하였는지 우리나라에서는
갈수록 보기가 드물고 외국인이 더 효가 무엇인지 알고 있으니
이 문제는 어디서 먼저 풀어야 하고 어디서 먼저 가르쳐야 하는지
우리 모든 국민이 생각해야 할 문제인 것 같다.
요즘 자라나는 젊은 아이들은 아는 사람도 있지만 효가 무엇인지
스승이 어떤 존재인지, 자기 상식에 맞추어 막 무가네 대들고 욕하고
한다는 소식을 접할 때 이 사람은 어떤 존재일까 생각도 해본다.
옛날 부모님은 앉잖아 서나 밥상에서까지도 윗사람 공경과 친구사이가
어떤 존재인지 교육처럼 말씀하셨는데 요즘 부모님은 자녀에게
어떤 이야기를 많이 해 주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옛날 할아버지는 무서운 분인데 요즘 할아버님은 어떤 존재로
손자에게 교육하며 살아가신지 뒤돌아 볼 시간이 되는 것 같다.
자동차도 사람이 신호체제 만들어 다니고 하지만 신호를 무시하고
막 무가네 자기 마음 가는 대로 운전하고 다닌 다면은
어떤 일이 벌어지듯이, 우리도 혼자 사는 사회가 않니 다는 것을
부모가 먼저 가르치고 학교에서 서로 존중하는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가르치기 위하여
모든 국민이 孝 사상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때가 왔다.
2013년 1월-자연 세상-
@-효 없는 세상은 질서없는 세상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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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울문학 등단
한울 광주전남문학 회원
사단법인 문학예술교류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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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고 없는 저금통
/박태순
딸아이 시집가서 손녀를 낳고 나름대로 살림을 꾸려나간다고 하지만 항상 어린애 같은 마음에 걱정이 앞선다 무심코 던진 말에 상처라도 받을까 조심스레 월급에서 저축도 하고 미래를 설계하라고 단속하자 하고 있다고 당차게 대답한다 네 살 된 손녀가 유치원에 다니고 있는데 씀씀이 너무 큰 것 같은 조바심에 저축은 얼마큼 하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손녀를 가리키며 통장 걸어 다니고 있다고 가리 컸다 얼른 알아차리지 못한 내가 어디에 얼마큼 하고 되물으니 잔액 없는 예금을 하고 있다고 대답한다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물었더니 엄마 앞에 통장이 걸어 다니고 있잖아 하고 손녀를 가리킨다 말인즉 사설유치원에다 옷값 장난감 간식 움직이는 통장 매일 입금하고 자꾸만
잔액은 비어만 가는가 보다 요즘 사교육비가 너무 커서 힘들다고 들 하지만 딸아이도 남한테 뒤질세라 있는 정성 없는 정성 쏘아가면 현상 유지를 하고 있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찡하고 가슴이 아파진다 사춘기 때 아무것도 아닌 말에 투정을 부릴 때면 이다음 꼭 너 같은 딸 낳아 키우면 엄마 마음 이해할 날 있을 거라는 말을 자주 했던 것이 말이 씨가 되면 안 되는데 걱정이 앞선다.
프로필
목포대학 펴생교육원 시창작과정 수료
시아문학 자문위원
살아있는시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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