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특별집회]
인격 회복 2019. 3. 1. 이현래 목사
오늘이 삼일절이다. 내가 지금까지 사역하면서 한 번도 절기에 대한 특별한 집회를 해 본적이 없다. 관심이 없기도 하지만 또 말씀을 연속해서 했기 때문에 따로 절기 특별 집회를 해 본적이 없다. 그런데 이번에 교회 청년부에서 주관해서 RT를 하는데 마침 삼일절이니 말씀을 해달라고 해서 한 것이다. 다 참석하니까 좋다. 삼일절은 조선 사람들이 나라를 잃어버리고 주권을 잃었다. 10년 만에 만세 운동을 일으켰다. 해석에 따라 무지하고 불복종운동이라고 할 수도 있고, 또 아주 신선한 운동이라 할 수 있다. 다른 면으로는 참 멍청한 것이었다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총칼을 가지고 지배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맨손으로 태극기만 들고 나타나서 만세를 불렀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독립국이라고 선언했다는 것이다. 이미 주권을 뺏겨 나라라고 할 수 없게 되었는데, 우리끼리 모여서 우리는 독립국이라고 선언했으니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겠는가? 우리는 우리대로 해석하고 다른 사람들은 다른 사람대로 그렇게 해석할 것이다.
아담은 왜 문제가 생겼는가?
동산을 잃었기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
왜 가시덤불만 나는가? 동산이 아니기 때문이다. 왜 허무한가? 동산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부 사람이 살아야 할 곳에
못 살게 되었으니까 문제가 된 것이다.
언제 한번 큰 수족관에서 청소하느라 물을 빼놓았는데, 그 안에 물개가 들어 있었다. 물이 많을 때는 물개가 몸이 얼마나 유연한가? 정말 매끄럽게 수영을 하는데, 물을 빼고 나니까 움직이지 못하여 구르는데 정말 불쌍하였다. 저 큰 덩치에 오도 가도 못하고 동물이니까 숨을 쉬고 사는데 몸이 움직여야지 자기 있을 영역을 빼앗기면 저렇게 되는구나. 사람도 살아야 할 영역을 잃어버린 것이다.
지금 우리는 모른다.
아예 처음에 태어날 때부터 여기에서 태어났으니 모른다. 또 다른 영역이 있었는데 다른 영역을 잃어버린 것이다. 우리 속담에 같은 쥐라도 똥통에 태어난 놈은 평생 똥통이 자기 영역인줄 알고 산다. 그런데 곳간에 태어난 쥐는 곳간이 자기 영역인줄 알고 산다고 한다. 서로 왕래가 없으니까 모른다. 한쪽은 당연히 똥통에 살아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고, 한쪽은 당연히 곳간에서 있는 양식 먹고 살아야지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지금 아프리카의 빈곤한 곳의 영상을 보면 저기서 어떻게 살까? 탈출할 방법이 없는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거기 놔두고 빈민구제 한다고 갖다 줘봐야 오죽하겠는가? 말라리아가 우글거리는데서 사는데, 차라리 저 사람들을 어디로 이주시키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에 가면 인디언 원주민들을 따로 살게 한 곳이 있다. 어떤 면으로 보면 자기들끼리 편하게 산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다른 면으로 보면 아주 비참한 일이다. 원주민을 따로 살게 하고 모든 것을 다 준다. 음식도 주고 일할 필요 없다. 그냥 먹고 살면 된다. 그러면 얼마나 좋으냐고 생각하는데, 이 사람들이 할 일이 없으니까 마약을 하게 된다. 젊은 애들도 공부를 하지 않아서 사회 나가서 살수 없어서 다시 돌아온다. 그래서 인디언들이 자멸하고 있다. 미국의 풍요한 대우를 받으면서 저절로 없어져간다. 사람이 살아야 할 곳을 잃어버리면 이렇게 된다. 미국 땅이 인디언들의 땅이었는데, 백인들에게 뺏겨 버리고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아주 편하게 산다.
그런데 자기 영역이 아니니까 비참해졌다. 인간도 마찬가지로 자기 영역을 잃어버리면 그렇게 된다. 이 경험을 아주 절실히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이스라엘이다. 애굽에 내려가서
400년 동안 종살이를 했다.
성경이 묘사해 놓은 것을 보면 비참한 광경이다. 남자 아이가 나면 다 죽이고, 여자아이가 나면 살려둔다. 그것이 자기 나라 같으면 그렇게 되겠는가? 자기 나라 같으면 더 많이 낳게 할 것인데, 남의 나라니까 아이들을 많이 낳으면 안 된다.
그 사람들이 커서 우리를 지배할 수 있다. 그래서 남자 아이들을 죽인 것이다.
또 바벨론의 포로로 갔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이스라엘 포로들에게는 유독이 이런 것을 많이 겪은 뭔가를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아담은 동산을 잃어버렸고, 이스라엘은 약속된 땅을 잃어버렸고, 조선 사람들은 나라를 잃어버렸다. 주권을 잃어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일본 사람들이 핍박을 했다고 하지만 초기에 약간 핍박했지만 다음에는 문화정책을 써서 아주 잘해주었다. 나는 해방직전에 살았으니까 아무 불편 없이 살았고, 조선 말기보다 훨씬 좋았다. 기차가 다니고 도로가 개설되어 차가 다녔다. 지금 큰 길을 보고 신작로라고 하는데 새로 만들어진 길이라서 신작로다. 차가 다니고 생활필수품이 전부 일본에서 와서 불편 없이 살았다. 지금까지 일본이 지배했으면 젊은 애들은 한국말 잘 못했을 것이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한국말을 제대로 알고 오는 학생이 없었다. 2학년에 가니까 한글 아는 아이가 없었다. 전교생이 한글 공부를 했으니까 지금까지 조선왕조가 지배했더라면 우리는 정말 우스운 사람들이 되었을 것이다. 아프리카나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도 뭐가 문제인가? 주권이 없으니까 국민으로서의 권리가 없다. 그래서 논밭은 다 빚에 가버리고 북간도로 이주했다. 북간도는 지금의 만주인데 땅이 없는 사람은 그리로 가라는 것이다. 차차 땅이 동양척식회사로 넘어갔다.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데, 그 비싼 이자를 받으니 농민들이 저절로 땅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그냥 북쪽으로 가는 것이다. 지금 만주에 사는 우리 조상들이 그때 갔던 사람들이다. 지금 3대 4대 내려간다.
주권이 없이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으면 이런 현상이 벌어진다. 만유에게는 다 위치가 있다. 하나님이 창조할 때 고기는 물에 살라고 만들어 놓았다. 그러니까 물에서는 정말 좋은데 물에 나오면 죽는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육지에서는 이렇게 좋은데 물에 빠지면 죽는다. 자기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역을 벗어나면 고생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정해주었던 땅, 약속의 땅에서 벗어나면 고생이다. 남쪽으로만 가면 고생이었다. 아브라함도 사라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창피만 당하고
결국 하나님이 말려서 못 갔다.
이삭도 마찬가지다.
야곱도 밖으로 나갔다가 고생하고 돌아왔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역력하게 체험을 가진 백성이다. 다른 나라도 그런 것이 있지만 이스라엘만큼 그렇게 된 나라가 없으니까 인류의 대표하는 위치에 있다. 땅을 잃었으니까 방황이고 남의 땅에 사니까 살아도 헛일이다.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일을 하지 않았겠는가? 일을 많이 해도 내 땅이 아니니까 자기 것이 없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이 정해주신 땅은 이렇지 않을 텐데 이 생각이 계속 떠나지 않았다. 우리가 고향을 찾는 것, 기업지를 찾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특별한 것이 있는데 기업지 문화이다.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는 지파별로 자기들이 힘써 점령해서 점령한 땅이 그 지파의 땅이다. 그러면 그 땅은 영원히 변경시키면 안 된다.
그래서 혹시 무슨 일로 뺏겼다든지 팔아먹었다든지 해도 희년이 돌아오면
다 도로 반환해야 한다. 경상북도 사람은 경상북도에서만 살아야 한다. 경상남도 사람은 남도에서만 살아야 한다. 아주 특이한 법이다. 영토분쟁이 없다. 같은 동족이니까 그런 법을 만들었던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자본주의 원칙에 따라 경상북도 사람이 경상남도 땅을 차지해 버리면 안 될 것이니까 차지하지 못하게 만들어 놓았다. 아주 특이한 기업지이다.
이 기업지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다윗왕의 할머니 룻은 기업을 찾아 왔다. 자기 남편이 죽었기 때문에 다른 남편이 있어야 자기 기업이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에게서
제일 불쌍한 사람은 고아와 과부이다.
왜 불쌍한가? 기업이 없다.
과부는 남편이 없으면 자기 땅이 없다. 그래서 대신 시집을 가야하고 장가를 들어주어야 한다. 가장 가까운 친척 중에서 대신 남편 노릇을 해주어야 한다.
그래야 이 여자는 소득이 생긴다.
아들도 마찬가지이다.
부모가 없으면 물려받을 기업이 없다. 그래서 성경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들을 고아와 과부라 한다.
이것이 우리 인간과 똑같다.
인간은 왜 문제가 생겼는가?
생각이 다 다르다. 유교권에서는 관계를 가지고 사는 세계이니까 도덕이 필요하다. 그래서 도덕을 배우지 못하면 사람은 짐승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유교에서는 배우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학이시습지면(學而時習之, 배우고 또 익히면), 불역역호와(不亦說乎?, 이 또한 기쁘지 않겠는가?) 이것이 유교사상이다. 배우는 것의 중심은 도덕이다. 그래서 사서삼경의 가장 중심적인 것은 예기이다. 예기는 모든 공부를 다 해서 사람이 사는 방식이니까 예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불교에서는 깨닫지 못해서 불행이라고 생각한다.
지혜가 없다는 것이다. 지혜만 깨달으면 사람은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들 스스로 신이 된다. 지혜가 있으면 신이나 마찬가지이니까 스스로 신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중동 유대교 문화권은 다르다. 왜 불행한가? 있을 자리를 떠났기 때문에 불행하다. 그러면 복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밖에서 오는 것이지 내가 깨달아서 오는 것이 아니다. 도덕성이 있다고 오는 것도 아니다. 구원자는 밖에서 온다. 불교나 유교와 다른 점은 구원이 밖에 있다는 것이 다른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맞는 것이다. 왜냐하면 물에 빠져 죽게 된 사람이 자기 스스로 나온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스스로 못 나오기 때문에 죽는 것이다. 구원을 받으려면 누군가 있어야 한다.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건져내 온 것이 밖에서 건져내 온 것이지 자기들 스스로 힘을 길러 나온 것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도 비슷하다. 우리가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감사를 못한 것이다. 우리는 상해 임시정부를 만들고 독립군을 만들어 훈련을 시켜서 된다고 생각했지만 어림없는 일이다. 만일 일본이 승리했으면 우리는 함께 묶여가는 것이지 우리가 힘을 길러서 일본을 대항할 형편이 아니었다. 연합군이 이겼기 때문에 미국이 이겼기 때문에 우리는 해방이 된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과 우리가 비슷하다.
고레스 왕이 승리를 했기 때문에 포로로 갔던 사람들이 풀려났다. 이스라엘은 다 그렇다. 자기들 스스로가 구원받은 역사가 아니고, 외부에서 구원자가 와서 구원을 해준 역사이다. 그래서 메시아사상이 생긴 것이다. 자기들이 망했는데 부국강병을 시켜서 자기들이 나라를 세운다는 것이 아니고 메시아가 온다는 것이다. 하늘로부터 메시아가 와서 우리를 구원해준다는 사상이 생겼다. 미국 사람들은 모르긴 몰라도 메시아사상이 맞지 않는 민족이다. 어떤 경우라도 메시아사상이 그 사람들은 필요가 없다.
만일 메시아가 오면 죽여 버린다.
왜냐하면 자기들의 주권을 없애버린다는 것이다. 미군부대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미군들은 남자와 여자가 같이 근무를 하는데 훈련할 때 우리 같으면 여자니까 봐줄 것 같지만 여자들이 불만을 한다고 한다. 왜 우리를 무시하느냐,
우리도 당당하게 하겠다는 것이다.
우리 한국 같으면 그렇게 되겠는가? 여자들은 좀 봐줘야지 같이 굴리면 되겠냐고 자타가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그것이 아니고, 여자라고 무시한다고 똑같이 뛴다고 한다. 미국은 메시아사상이 없는 나라이고 혹시 메시아 같은 사람이 나오면 죽여 버린다. 케네디 암살에 대해 너무 영웅적으로 뛰니까 용납하지 않았다는 말이 있었다. 민주국가이기 때문에 우리가 합해서 해야지 누구 한 사람이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동양은 아직도 메시아사상이 많다. 우리도 지금도 대통령이 잘해야 한다.
주석이 잘해야 한다는 것이 있다. 동양 문화와 다르다. 일본도 자기들이 외부 세력을 막기 위해서 천왕 제도를 만들었다. 천왕이 있기 때문에 일본 사람들은 누가 집권을 하든지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도 미국식 민주주의를 하고 있지만 본 의식은 동양 사람이다. 가부장적 제도에 살았기 때문에 누가 와서 해준다는 사상이 있다. 중국도 시진핑이 제 2기 집권을 했다. 잘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해야 되지 우리가 다 같이 해야 된다는 생각이 아니다.
예수님을 맞이하기는 우리가 딱이다. 미국은 예수님이 가도 안 된다. 환영 못 받는다. 우리는 우리에게 배정된 영토를 찾아가는 것이 삼일절이다. 당시에 삼일절 운동은 어떻게 생각하면 참 불쌍한 행동이다. 총칼 앞에서 태극기 들고 만세를 불렀다.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고 창피한 일이다. 그리고 33인은 종교인이다. 기독교, 천주교, 불교, 천도교, 전부 종교인들이 모여서 무저항 운동을 했다. 그런 종교적인 것으로 본다면 의미가 있지만 정치사적으로 본다면 미련한 운동이었다. 그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핍박을 당한지 모르고 얼마나 많이 죽었는지 모른다. 얻은 소득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 인생에 배정된 땅, 기업을 찾아야 되지 않겠는가?
하나님 형상을 따라 하나님 모양으로 지어져서 하나님을 표현하도록 정해졌다. 이것이 인간에게 정해준 위치이다.
이보다 더 좋은 자리가 없다. 이보다 더 적극적이고 완전한 자리가 없다. 세상에 돌아다녀 보라. 어디가 이보다 더 좋은 자리가 있는지, 직장도 이보다 좋은 직장이 없다. 하나님을 표현하고 산다면 그보다 더 좋은 위치가 어디 있는가! 예수 믿고 천당 간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사람으로 지어진 것이 얼마나 축복인데, 하나님 형상으로 지어져서 하나님만 표현하도록 만들어 놓았는데, 이보다 중요한 것이 어디 있는가? 이보다 더 귀한 것이 어디 있는가? 한번이라도 내가 하나님을 대신해서 한번만이라도 해보라. 얼마나 그것이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지 모른다. 요즘 장*영자매가 꽃이 피듯이 피어서 사방을 다니면서 하나님 형상의 노릇을 하고 있다. 말도 잘 안하고 새침때기인데 요즘은 제 정신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돌아다니고 있다. 그런데 얼굴도 예뻐지고 사람도 많이 모이고 저래야 인간이 살맛이 나지 않겠는가? 맨날 원망만 하고 앉아서 누구 때문에 누구 때문에 하고 있으면 무슨 맛으로 인생을 살겠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보다 더 행복한 일은 없다. 이것은 직업이 아니고 우리 본업이다.
인생에 배정된 기업을 찾아야 인생이 만족하게 된다. 지금 대한민국은 옛날에 비하면 정말로 지렁이가 용된 것이다. 알고 보면 너무너무 놀라운 나라가 된 것이다. 옛날에 외국에서 우리나라를 아는 것이 6.25 전쟁 때문에 전쟁의 나라, 과부의 나라, 양공주 나라, 그것밖에 몰랐다. 그나마 6.25 전쟁 전에는 이 나라가 어디 붙어있는지도 모르고 6,25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 나라가 지금 세계 10위권의 경제국가로 세계 여러 나라들이 무역을 하자고 사정한다. 세상에 이런 나라가 어떻게 되겠는가? 그냥 옳고 그른 것만 가지고 맨날 싸우니까 먹을 것이 있어야 옳고 그른 것을 따지지, 옛날에는 먹을 것이 없으니까 그런 것을 따질 수도 없었다. 먹을 것이 없으니 불만할 일이 없다. 이제 먹을 만하니까 불만 한다. 사람은 적당히 가난해야 한다. 적당히 가난해서 딴 생각을 하지 않을 정도로 가난해야지 조금 배가 부르면 너무 요구가 많아진다.
우리는 정말 잘 살고 있는 것이다.
지음 받은 만유 중에서 우리 인간은 가장 고귀한 것을 배정 받았다. 더 이상 없다. 이것을 버리고 갔으니 가시덤불 밖에 없다. 이것을 버리고 갔는데 이마에 땀이 나지 않겠는가? 이 좋은 것을 놔두고 버리고 갔는데 전쟁이 일어나지 않겠는가? 이것을 발견한 사람들이 말하기를 사람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생각지 못했던 것이라고 표현했다. 아예 우리에게 없던 것이라고 했다. 아예 우리에게 그런 개념이 없었다.
우리가 동산에 살았다는 개념도 없고 우리가 하나님 형상으로서 그를 대신한다는 개념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은혜를 입고 이 위치를 찾고 나면 눈이 있어도 못 보던 것이고, 귀가 있어도 못 듣던 것이고, 마음이 있어도 생각도 못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도 살아갈수록 그렇다. 다른 사람들보다 많이 살았는데 살아갈수록 그런 생각이 더 든다. 몰랐던 것이구나. 전에도 좀 알긴 알았던 것 같은데 전에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전에 몰랐던 것이고 이제 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인생이 아쉽다. 제 알았는데 가면 어떻게 하나? 진즉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한다. 그런데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옛날에도 이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전혀 옛날에 했다는 생각이 안 든다. 더해야 되는데 더해야 되는데 그 생각만 든다. 같은 것인데도 늘 새롭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또 다르게 보이고 또 다르게 보이고 더 깊이 보이고 더 깊이 보인다. 더 복되게 보인다. 한 가지 사건을 놓고도 사람마다 평가하는 것이 다 다르다. 그런데 하물며 하늘로부터 온 이 복된 것이 한번 봤다고 되겠는가? 안 된다.
어제 본 것과 오늘 본 것이 다르고,
어제 생각과 오늘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늘 새로운 것 같다. 그래서 책 쓴 것도
지금 생각하면 다 지워버리고 다시 썼으면 좋겠다. 그래서 진짜로 그런 사람들은 책을 안 쓰는 것 같다. 예수님도 책을 안 썼다. 어제 썼던 것이 오늘은 또 안 된다. 옛날 것을 읽어보면 고치고 싶은 생각이 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배정해 준 것은 정말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생각지 못했던 것들이다. 전혀 모르는 것들이다.
이번에도 부산에서 온 교수님이 무신론에 대한 우리의 자세에 대해 주제 발표를 했다. 창조론, 진화론이 있지만 나도 옛날부터 교회를 다녔으니까 창조론자인데 지금은 그런 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 창조론이나 진화론이나 똑같다. 아무 의미가 없다. 나를 지으신 하나님 그것만 중요하지 진화냐 창조냐 이것은 아무 관계가 없다. 창조론이나 진화론은 이론이고 공부할 사람은 그렇게 하는 것이고, 우리 같이 구원이 필요한 사람들은 그것을 해보았자 소용이 없다. 창조론을 다 알았지만 나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
내 위에 누가 있구나. 모르지만 누가 있구나. 이것을 알자마자 내 인생이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복잡한 생각이
딱 없어졌다. 나를 아는 분이 있구나. 나 이전에 누가 있구나. 나보다 먼저 있는 이가 있구나. 나는 내일도 모르고 모레도 모르고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다. 그래서 머리에 복잡한 생각이 많았는데 싹 정리가 되었다. 진화론을 주장하든지 창조론을 주장하든지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래서 나는 창조론자나 진화론자를 만나면 당신들 말이 다 옳은데 나에게 그것은 별로 도움이 안 된다고 말하려고 한다. 나는 이렇게 믿고 나니까 내 인생이 달라지더라고 말하면 안 되겠는가? 거기 가서 창조론이 옳으니 진화론이 옳으니 아무리 떠들어 봤자 소용이 없다. 아무 소용이 없다. 이기면 뭘 하고 지면 뭘 하는가? 장기판 놓고 졌다 이겼다 하는 것과 똑 같은 것이다. 내 인생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성경이 얼마나 복된 말씀인지 옛날에 미처 알지 못했던 성경을 보면 다시 알게 되고, 또 다시 알게 된다. 이것을 써놓지 않았으면 큰 일 날 뻔 했다. 이 사람들은 자기 후손들이 헤어져서 모를까봐 써 놓은 것이 아닌가? 유대인 자손들이 흩어지게 되었으니까 이것을 전할 사람이 없다.
그래서 만들어 놓은 것이 성경이다.
자기 자손들을 위해서 만들어 놓았다. 우리를 위해서 만들어 놓았다.
그래서 이 책은 다른 책과는 다르다.
우리 인생을 말한 것이지 진화론이니 창조론이니 이런 것을 말한 것이 아니다. 전혀 관계가 없는 책이다. 쫄지 마시라. 진화론을 모른다고 쫄 필요도 없고, 창조론을 모른다고 쫄 필요가 하나도 없다. 전혀 관계가 없다. 우리 인생은 그런 것과 전혀 관계가 없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 있다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때 거기에는 가나안 땅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가 본 일도 없고 소문만 들었다. 더군다나 지금 가나안 땅에 들어갈 사람들은 애굽에서 난 사람들이 아니고, 전부 광야에서 태어난 사람들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래도 거기 갔다 온 사람들의 기록을 보면 포도 한 송이를 둘이 메고 왔다고 한다. 포도가 얼마나 크면 둘이서 메고 오겠는가? 좀 과장해서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다. 과장한 이유는 풍성한 땅에 소산물을 소개하느라고 그렇게 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온갖 과일들이 다 열거 되어 있다. 우리가 먹어 본 것은 석류 이런 것이다. 우리의 석류는 시고 조그맣다. 그런데 거기 것은 이렇게 주먹만큼 크고 쪼개 놓으면 얼마나 풍성하게 들어있는지 모른다.
그 땅의 소산물이 그렇게 좋다는 것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것은 회복된 땅은 이런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 인생이 회복되면 이렇게 풍성한 것이라는 뜻이다. 석류가 알알이 박혀 있는 것을 보라. 그 안에 빈 공간이 하나도 없다. 그리스도의 풍성을 표현하고 있다. 그 땅의 풍성을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의 예표이다. 이렇게 과일이 풍성한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는 이렇게 풍성한 것이 있다는 것이다.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이것이 그때 말했던 그 석류이고 그때 말했던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가 살아보면 그리스도는 너무나 풍성하다. 그것을 짧은 말로 표현한 것이 성육신이고,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이며 임마누엘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한다고 하면 너무 풍성하다는 말이다. 여자가 혼자 산다는 것이나 남자가 혼자 산다는 것은 다 초라하다. 홀아비 집에 가면 냄새가 난다. 홀아비가 사는 집에는 왜 냄새가 나는지 모르겠다. 들어가면 다 냄새가 난다고 한다. 왕년에 별난 사람이라도 마찬가지이다. 좌우간 여자와 함께 살아야 집안에 냄새도 안 난다. 함께 사는 것과 홀로 사는 것은 너무 다르다.
임마누엘! 그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하나님과 함께 산다. 이것이 보통 일인가? 임금과 같이 살아도 얼마나 달라지겠는가? 그런데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말씀이 육신이 된다? 말씀을 어디 속에 새기겠는가? 말씀이신 하나님과 하나라는 말이 아닌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말씀이신 하나님이 내 안에 있다는 말이다.
말씀이신 하나님, 기록된 말씀이 내 안에 있다는 말이 아니다. 말씀이 되신 그 하나님이 내 안에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자기가 하나님 말을 하게 된다. 그런데 거기다 더 보이려고 하나님 보좌우편에 앉으셨다고 표현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연합을 의미한다. 땅이 아무리 좋아도 씨가 안 좋으면 땅이 좋은 가치가 나오지 않는다. 좋은 땅에는 좋은 씨가 뿌려져야 한다.
내 인생이 땅이라면 좋은 씨가 심겨져야 한다. 아무리 미인이라도 남자를 잘못 만나면 만날 두드려 맞고 그렇다. 좀 못났어도 남편을 잘 만나야 되는 것이다. 옛날 말에 의하면 제일 좋은 남편은 아침 먹고 산에 가서 나무 한 짐 해서 점심 때 돌아와서 점심 먹고 오후에 나가서 또 한 짐 해 오는 남편이 제일 좋다고 한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여자이다. 아무리 똑똑해도 남편을 잘못 만나면 똑 같아진다. 아무리 무수리라도 임금과 살면 왕비가 되는 것이 아닌가? 여자 팔자가 뒤웅박 팔자이다. 그것이 우리 인생이다. 왜 우리가 가난했던가? 남편이 가난했으니까 가난했다. 왜 우리는 지위가 가난했던가? 남편이 지위가 가난했으니까 그랬다.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것보다도 더 큰 축복이 없다. 그분이 우리의 신랑이 된다면 나는 저절로 품위도 상승이 되고, 지위도 상승이 되고, 소유도 상승이 되고, 모든 것이 부유해진다. 신랑이 부자이니까 우리는 아무 것도 준비할 것이 없다. 신랑이 부자니까 아무 것도 할 것이 없다. 너무 많으니까 내가 가지고 가면 짐만 된다. 나는 그래도 보따리 또 보따리 싸 가지고 갔지만 부잣집에서는 귀찮아한다. 쓰레기로 버려야 하니까 맨 손으로 가는 것이 최고이다. 임금에게 시집가는 사람이 무엇을 가지고 가는 것은 임금을 모욕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풍성하시다는 말이 그 말이다. 우리가 하나님이 풍성하시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그리스도가 내 신랑이 되면 그분이 풍성한 것처럼 나도 풍성해진다.
그래서 그분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여자는 남편이 좋으면 남편만 있으면 된다고 한다. 그런데 남편이 싫으면 모든 것이 다 싫어지고 인생이 불행하다고 한다. 자매님들과 결혼생활을 해보신 분들은 다 잘 아실 것이다. 우리가 잃어버렸던 것을 다시 찾는 유일한 길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찾는 것이다. 내 남편 될 신랑을 찾는 것이다. 내 아버지 될 사람을 찾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어머니라고 하기도 한다. 그것도 재미있는 말이다. 어떤 사람은 가부장적 사회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했다고 한다. 여부장적 사회에 오면 하나님은 어머니라고 한다. 아버지 하나님보다 어머니 하나님이 훨씬 더 부드럽다. 아버지 하나님은 무섭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어머니 하나님은 무섭다는 사람이 없다. 어떤 사람들이 돌아다니면서 어머니 하나님이라고 한다. 그것도 좋은 생각이다. 어머니 아버지라는 말이 그런 개념이다. 이스라엘은 가부장적 사회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그런데 여권 시대가 돌아오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고 어머니라고도 불러야 한다. 재미있다. ‘엄마, 엄마’ 하듯이 하나님을 그렇게 부를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예레미야 31장 34절에 보면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앎이니라)(렘31:34)”고 했다. 그것이 어머니 하나님이 아니겠는가? 이제 아버지 하나님은 사표내고 어머니 하나님 위주로 돌아가도 되겠다.
어떻게 예수를 만날 것이고,
어떻게 그 예수와 내가 결혼을 해서
인생을 함께 살 것인가? 이것이 인생의 문제다. 기독교의 숙제가 바로 이것이다. 다른 것이 없다. 그분을 만나서 결혼하면 그냥 끝난 것이다. 교회생활을 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분을 만나려고 얼마나 노력했던가? 특별히 여기에 교역자로 오신 분들은 만나려고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하는가? 안 만나진다.
기도를 해보니까 못 만나겠다. 오셔야 만나지 내가 어떻게 만나겠는가? 그런데 지금 생각하니까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그분이 와야 내가 만나지 그분이 안 오는데 어디 가서 내가 만나겠는가? 한번 생각해 보라. 하늘에 가서 그분을 찾겠는가? 어떻게 하겠는가?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다 자기들이 찾아가서 만난 적이 없다. 다 찾아 오셨다. 우리에게 찾아오신다. 그런데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찾아오신다. 찾아다닐 필요가 없다. 찾아오신다. 늘 찾아오시는 분이고, 밖에 계신 분이다.
자기가 찾아가서 만났던 하나님은
지금 점점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고 한다.
유럽이나 기독교 국가에서 그 하나님과 그 예수는 점점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내가 중심이 되어 내가 찾았기 때문이다. 내가 필요하지 않으니까 자리가 없어지는 것이다.
다 인간 중심으로, 자기중심으로 필요를 찾았으니까 이제는 필요가 없어진다. 우리도 사회가 달라지니까 필요가 없어진다. 필요가 없으니까 하나님은 떠나야 한다. 예배당에 와야 아무도 없는데 하나님이 무엇하러 오시겠는가?
어떤 예배당은 캬바레로 쓴다고 한다. 하나님이 거기에 왔다가는 기절초풍하지 않겠는가? 사람이 찾는 하나님은 지금 점점 없어져 간다. 우리나라도 얼마 있지 않아 사람이 찾는 하나님은 없어질 것이다.
70년대는 한국에서 기독교 인구가 굉장히 늘어나는 시기였다. 엑스폴로74도 그때 했다. 왜냐하면 그때 한참 우리 사회가 잘살아 보자고 하던 때였기 때문이다. 5.16 혁명의 영향을 받아서 잘 살겠다는 의욕이 넘치던 시기였다. 그래서 기독교 인구도 확 늘어났다. 그런데 3만 불이 넘어가면 하나님을 찾을 일이 별로 없다.
그러면 하나님은 자기가 있을 곳이 없으니까 가셔야 하고 떠나야 한다. 찾아오시는 하나님은 여전히 마찬가지이다. 우리 필요 때문에 온 것이 아니고, 그분의 필요 때문에 온 것이니까 그분이 나를 찾고 있다는 것이니까 얼마나 안전한가! 그분이 나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가! 내 필요는 인간이 어지간하면 다 해결할 수 있다.
죽고 사는 것은 해결하기 어렵지만 그 외에 대부분의 것은 다 해결된다. 내가 찾는 하나님을 만났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다. 나를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나서 좋아해야 된다. 예수를 만나는 일이 너무 쉬운 것을 가지고 너무 어렵게 생각했다. 나도 기도하면 되는 줄 알고 삼각산을 몇 번 가 봤다. 나는 안 되었다. 어떤 사람은 만났다고 좋다 하는데 나는 안 되었다. 안 되는 나를 보면서 나는 버려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버려진 것이 아니고, 그것이 나를 딱 제쳐 놓았던 것 같다. 가만히 있어라, 내가 찾아갈 텐데 무엇하러 여기까지 왔느냐? 이랬던 것 같다.
그분이 오시면 아주 쉽다.
오시는 하나님을 만나야지 쫓아가서 예수님이나 하나님을 만나려면 다른 예수 다른 하나님이 되고 만다. 왜 이렇게 교회들이 다 갈라지고 갈라지는가? 다 쫓아가기 때문이다. 자기가 믿는 하나님이 다 다르니까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찾아오신 하나님은 찾아오시는 분이
같기 때문에 갈라지고 말고 할 것이 없다. 찾아오신 분은 같은 분이다.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분이 나를 찾아왔다. 아브라함과 내가 연대가 얼마인가?
그런데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그분이 나를 찾아 왔다. 이것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이다.
이삭을 찾아 왔던 분이 나를 찾아왔다.
똑 같다. 한국에 찾아오신 분과 미국에 찾아오신 분이 다른 분이 아니다.
그분은 한 분이다. 언제든지 같은 분이다. 찾아온 방법을 보면 안다.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방식으로
나를 찾아왔으니까 내가 안다.
그리고 내가 성경을 그렇게 믿게 되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분이 이럴 때 찾아오셨는데 나에게도 그렇게 찾아오셨다는 것을 내가 믿게 된다. 신
기한 나라이다.
야곱이 누구인가? 언제 적 사람인가? 야곱을 쫓아다녔던 하나님이 나도 쫓아다녔다. 어떻게 나를 알고 쫓아다녔겠는가? 꼭 같은 방식으로 쫓아다닌다. 여러분도 잘 생각해 보라.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하나님이
여러분을 찾아왔을 것이다.
그리고 야곱을 쫓아다닌 하나님이 여러분을 쫓아다니고 있다.
염려 걱정하고 쫓아다닐 필요가 없다.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들으면 그분이 그분이고 그분이 그분이다. 그분이 있어야 우리가 연합이 가능하고, 그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신랑으로 맞이할 수 있다. 내가 무슨 수로 쫓아가서 신랑을 만나겠는가? 무수리가 무슨 수로 임금님을 자기의 남편으로 만들겠는가? 불가능하다.
임금이 찾아와야 한다. 하나님이 그렇게 옹색하고 인색하신 분이겠는가? 넉넉하시고 풍성하시고 그렇게 하시려고 만들어 놓은 것이 사람이다. 언제든지 찾아오려고 말이다. 찾아 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것이 사람이다. 우리가 염려할 일은 절대 아니다.
그리스도 예수와의 연합은 우리의 계획대로 된 것이 아니고, 우리의 힘으로 된 것도 아니고, 그분이 우리를 찾아온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만민이 다 보라고 찾아왔다. 장대에 구리 뱀을 매달아 놓고
다 보라고 했다. 나는 못 봤다고 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 장대에 매달아 놓았는데 어떻게 못 봤다고 할 수 있는가?
그분을 보면 그분이 내가 잘 아는 분이라고 알게 될 것이다. 어디서 많이 본 분이다.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예수를 보면 내가 어디서 많이 본 분으로 알아지지 않겠는가? 우리가 많이 본 분이다. 그분을 알면 나는 그분과 모든 관계가 달라진다. 내가 저기 있었구나. 왜 그렇게 친근하고 가까운가했더니 저 사람과 내가 하나였기 때문이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고전1:30).” 그렇게 만들어 놓았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고전1:30).”라고 했다.
우리가 뭘 했는가?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다. 우리는 한 일이 아무 것도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 안에 넣어 놓았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넣어 놓았으니까 내가 그 안에 있다. 내가 거기에 들어가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가? 내가 거기에 있는데 어디로 들어가는가? 거기에 있는 그 사람이 나다. 나는 다른 길로 엉뚱한 길로 그분을 찾아다니고, 엉뚱한 방법으로 그분 속에 들어가려고 하고, 엉뚱한 방법으로 그분을 내가 모시고 있으려고 했다. 내가 얼마나 헛된 일을 많이 했던가? 목사일 때는 목사 할 때대로, C.C.C.에서 전도할 때는 전도할 때대로, 이 양반을 상대하기는 얼마나 어려운지 몰랐다. 여러분은 그렇지 않은가? 예수님을 상대하기 쉬운가? 아주 어렵다. 하나님을 만나기도 쉽지 않다. 오시는 그분을 놓아두고 안 오시는 분만 쫓아다니니까 그렇다.
우리는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길이 서로 다르다. 그분은 오시고 나는 가니까 만나게 되겠는가? 그런데 딱 만날 지점을 정해 놓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나마 되는 것이다. 어느 도시에 가든 길을 안 잊어먹으려거든 표시를 해놓아야 된다. 대부분의 도시는 중간에 강이 있다. 흔히 찾을 수 있는 방법은 강을 알아 놓는 것이다. 어디 가서 길을 잃어버리면 일단은 강으로 나가서 봐야 한다. 그래야 내가 잃었던 곳을 찾게 된다. 표시가 있다. 내가 예수를 만난 표시가 있다. 정해 놓은 지역이 있다. 그분은 아무 데나 무소부재하신 분이 아니다. 정해 놓은 자리가 딱 있다. 그분도 나사렛에 갔다가 예루살렘에 갔다가 하면 내가 어떻게 만나겠는가? 갈보리 산에 딱 못 박혀 있으니까 우리가 언제라도 보면 된다. 언제라도 보면 만날 수 있다. 그 안에 내가 있다. 다른 데서는 나를 찾을 수 없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된다. 노력을 많이 하면 할수록 더 사기를 당하는 것이다. 그런 것을 가지고 그런 것 같기 때문에 속아서 엉터리 삶을 사는 것이다. 찾아오신 분은 일정한 곳에 계신다. 원래부터 우리가 배정받은 위치, 예수 안에 그 사람이 들어 있다. 내 원형이 거기에 들어 있다. 나는 거기밖에 갈 데가 없다. 다른 데 가서는 나를 찾을 수 없다. 부처님을 찾아간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힘이 있으면 고생해 보라. 힘이 많으니까 고생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만나는 길은 너무 쉽고 간단하다. 이것을 사탄이 못 만나게 하려고 많은 것으로 가려 놓았다. 수없이 쳐놓았다. 하나님도 함부로 받아들이면 안 되니까 못 들어오게 휘장을 쳐 놓았다. 성막에 가서 지성소에 들어가려면 문이 세 개나 된다. 그 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못 가게 되어 있다.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이다. 그 문이 모두 선악과를 토해내고 걸러내는 것이다. 회복의 길은 간단하다. 마찬가지로 상실의 길도 간단하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마다하고 다른 길로 가 본다. 어떻게 보면 간단한 문제이다. 회복도 역시 간단하다. 교리가 모두 복잡하게 만들어 놓았다. 신학이고 교리고 철학이고 모든 것이 복잡하게 만들어놓았다. 인간을 너무 복잡하게 만들어놓았다. 헛일만 하도록 만들어놓은 것이다. 워치만니를 중국 공산당이 잡아다가 복음을 못 전하게 하려고 영문으로 된 공산당 서적을 번역하라고 시켰다고 한다. 30년 동안 서적을 번역하였다. 지독한 놈들이다. 노동을 시킨 것이 아니고 책을 번역하라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번역해야 할 사람을 잡아다 놓고 공산당 서적을 번역하라고 했다. 사탄은 사람을 잡아다가 헛일을 시키는 것이다. 복되지 않을 일을 시킨 것이다.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사55:2)”는 말이 그 말이다.
배부르지 못할 것을 위해서 돈을 쓰게 만든다. 주님이 우리에게 함께 하시길 빈다. 삼일절! 우리의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는 절기이다. 그때는 우리가 지혜롭지 못한 일을 했지만 이제는 예수 찾는 일을 또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태극기를 들고 가서 만세나 부르면 될 일이 아니었다. 찾아오시는 분을 정통으로 만나는 길이 정통의 길이다. 우리가 예수를 만나고 좋은 신랑을 만나서, 좋은 아버지를 만나고 좋은 하나님을 만나서, 임마누엘로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가자. 금년 삼일절은 내 일생에서 처음 삼일절 예배를 한 것이다.
우리의 국권을 되찾아야 되고, 인권을 되찾아야 되고, 우리의 영역을 되찾아야 하나님 나라가 될 것이다. 밖에 나가서 예수 정신을 아무리 전파해 봐야 그것이 되겠는가? 안 된다. 세상이 얼마나 큰데 그것이 되겠는가? 우리가 덩치를 크게 영역을 차지해야 된다. 인격을 찾아야 된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