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작가의 통기타 이야기
이인규/소설가
소설가, 시인 그러니까 소위 작가라고 불리는 자들이 무대에서 통기타로 노래 부른 사진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러니까 그 사건은 내가 소설로 등단하기 전, 2006년 겨울 무렵에 일어났다. 한국작가회의 송별회 때 소속 작가 둘이 듀엣으로 노래하는 장면이 당시 사무실로 배달되는 신문 한 면에 버젓이 나온 거다. 당시만 하더라도 유튜브 등 영상이 활발하지 않았으니 그들의 노래 실력은 가늠할 수가 없었지만, 나는 그들에 관한 시샘과 부러움으로 한동안 술이 넘어가지 않았다. 글도 잘 쓰는 데 통기타, 노래까지 잘하니 말이다.
아마 그때부터 나는 더욱 치열하게 소설을 쓰고 준비한 거 같다. 반드시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어 나도 그들처럼 소속 문학회 행사 때 통기타로 노래해야지, 하는 야무진 꿈 때문이었다. 하긴 그때만 하더라도 나는 등단 방법에 있어서 무지하였다. 주위에 문학 하는 사람들이 적어 오로지 신문사 신춘문예가 유일한 방법인 줄 알았다. 어쨌든 그로부터 이 년이 지난 후, 무려 10년 만에 모 지방신문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어 나도 그들처럼 지역 문학회에 들어갈 수 있었다. 당연히 그때부터 나는 오랫동안 먼지만 쌓여가던 통기타 연습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사실, 내가 처음으로 기타를 잡은 건 중2 때였다. 당시 고등학생이던 형이 허름한 기타로 김민기의 ‘아침이슬’, 이장희의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하는 노래를 부를 때 어깨너머로 보았고, 일찍 학교에서 파하면 나는 독학으로 기타를 배웠다. 나와 비슷하게 기타를 배우던 친구들은 코드 잡는 게 어려워 중도에서 포기하였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코드 잡기는 물론, 어려운 주법도 그냥 감당할만했다. 그런데 그때 내게 통기타 가수의 꿈을 안겨준 게 있는데 그건 바로 MBC 대학가요제였다. 대학생 형들이 기성곡 혹은 창작곡으로 노래 부르는 게 당시 나훈아, 남진밖에 모르던 철부지 중2인 나로선 너무도 신비롭고 매혹적이었다. 거기에다가 한국의 ‘비틀즈’라고 해도 손색없는 산울림이 등장한 거다. 아아, 그러니 그동안 동네 우물가에서 노래자랑이 열릴 때면 ‘가슴 아프게’, ‘물레방아 도는데’만 열창하던 내가 새로운 통기타 음악에 완전히 빠질 수밖에.
이후에 기타 치는 수준이 오르자 나는 엉겁결에 노래도 하나 만들었다. 그 노래로 중3 봄 소풍 때 학우들이 보는 앞에서 평소 산울림을 신으로 추앙하던 친구와 함께 듀엣으로 ‘아니 벌써’와 창작곡 ‘봄밤(지금 생각하니 거의 표절 수준)’을 기타로 불렀다. 당연히 공연을 보던 학우들과 선생님들은 이런 우리의 시대를 앞서가는 재기발랄함에 열광했고 나는 학우들에게 연예인급 대우를 받았다. 현재 그 친구는 울산에서 교편을 잡다가 은퇴하고 전업 화가(가수가 아님)로 살고 있다고 한다.
마침내 나는 고3이 되어 대학을 선택할 때가 되었다. 친구들은 성적에 따라 대학을 결정하였지만, 그때까지 통기타 음악에 빠져 있던 나는 제3 회 MBC 대학가요제 대상(‘내가’)을 차지한 명지대학의 김학래, 임철우를 보고 그 학교를 선택하였다. 그리하여 1학년 축제 때 나는 창작곡으로 교내 가요제에 참가하여 대상을 놓고 2학년 선배와 겨루었는데, 아쉽게도 그가 대상을 받았고 내가 우수상을 받았다. 그런데 그 선배가 불렀던 노래가 후에 엄청난 인기몰이를 하였는데 그 곡이 바로 가수 이용이 부른 ‘바람 이려오’이었다. 그 노래는 당시 그 선배의 지인(황풀잎)이 준 곡으로 원곡의 제목은 ‘그대 잠든 머리맡에’ 였고 이용이 부른 노래보다 빠른 발라드풍이었다. 지금도 그 선배와 학교 앞 단골 음악다방에서 둘이 경쟁하듯 노래 연습한 게 떠오른다.
그런데도 나는 그 학교를 중도에 포기하였다. 시대가 시대인만큼, 81년 서울 모든 대학가는 시위로 학교 수업은 파행되었고, 거기에다 향수병까지 겹쳐 하차하고 만 것이다. 이후 나는 군에 갔다 와서 다시 고향의 모 대학에 입학하여 통기타 동아리에 가입하였다. 그때부터 매년 강변가요제, 대학가요제 예선 탈락을 밥 먹듯 하였지만, 포기하지 않고 꾸준하게 작곡, 작사를 반복한 끝에, 제1회 해변 가요제(89년 부·울·경에서 주최한 가요제)에 금상을 받았다, 그리곤 당시 부산에서 예술 공연장으로서 가장 훌륭하다던 교내 ‘콘서트홀’을 개인적으로 빌려 창작곡으로 라이브 콘서트도 개최하였다. 지금 생각하니 너무도 부끄럽고 치기 어린 도전이었으나, 당시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리고 세월이 퍽 흘렀다. 치열했던 도시의 직장과 결혼 생활을 청산한 나는 시골에서 13년째 살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여전히 통기타 가수의 꿈을 버리지 못한 나는 2018년에 대학 다닐 때 그리고 직장 생활하며 만든 노래를 모아 디지털 앨범(‘비와 그대’ 등 8곡)을 제작, 발표했다. 그리곤 지역 문학 행사나 주민 모임 때 간간이 통기타로 노래 부른다.
이제야 돌이켜 보니 통기타는 젊은 날, 소설 쓰기와 함께 내성적이고 말주변 없던 나를 타인과 연결해 주는 유일한 도구이자, 팍팍한 삶에 윤활유가 되어 주는 좋은 친구였다. 비록 자칭 B급 통기타 가수이지만 나는 언제든 나를, 필요로 하는 자리에 기꺼이 노래할 준비가 되어 있다. 마침 얼마 전, 요산 문학제 폐회식에서 듀엣으로 노래해 달라는 서정원 준비 위원장의 요청이 있었다. 함께 통기타로 노래할 대상은 그 옛날, 같은 동아리에서 치열하게 노래를 만들고 불렀던 현 부산 소설가 협회의 신호철 소설가이다. 현재 그는 현역 때와는 달리 높은음이 올라가지 않아(고음 불가), 목하 고민 중인 모양이다. 그래도 어쩌랴. 이 글을 쓰는 내내 나는 수십 년 전, 한국작가회의 송별회 때 통기타로 노래하던 두 명의 작가 모습이 자꾸 오버랩되면서 웃음이 슬슬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