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호］반역4-9

[수수1]

그것은 호라칸의 의심 때문으로 서쪽 국경의 수비를 맡았던 아르바쿠는
몽골과 내통하고 있다는 모함을 받아 서부군 총사령의 직위를 박탈당하고
하마터면 목이 잘릴 뻔 했다.

아르바쿠가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말고삐를 잡은 집사가 소리 죽여 말했
다.

"나리， 사랑채에 손님이 오셨소이다."

머리만 끄덕인 아르바쿠가 중문을 지나 안채 옆쪽의 사랑채 앞에 섰을 때
인기척을 들은 사랑채 문이 열렸다.

"나리， 기다리고 있었소이다."

늑대 털가죽 저고리에 바지를 입은 장 한이 아르바쿠를 향해 허리를 숙였
다.

주위를 둘러본 아르바쿠는 방으로 들어가 사내와 마주앉았다.

"어제는 금국 황제가 보낸 밀사가 다녀가더니 오늘은 쿤두스가 보낸 네가
왔구나."

아르바쿠가 질책하듯 말하자 사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금국 황제께서 보낸 밀사는 베어 죽이셨습니까?"
"살려 돌려보냈다."
"베셨어야지요， 그래야 후환이 없습니다."
"그럼 너도 베어주랴?"
"예， 소장도 목숨을 걸고 왔습니다."

거침없이 말한 사내는 쿤두스의 심복부장인 야라구니였다.

야라구니가 정색하고 아르바쿠를 보았다.

"나리， 왕이 나리를 신뢰하고 있는 줄 아십니까? 틀림없이 이번 싸움이
끝나면 다시 견제하고 감시할 것입니다."
"그건 나도 안다."
"대금황제는 영웅입니다， 투항한 장수는 요직에 등용하여 정사를 맡깁니
다， 금의 요동왕 황문기는 투항한 명의 선봉장이었고 황제의 휘하에 모인
왜인， 조선인， 여진인， 한족까지 모두 차별 없이 대우를 받습니다."
"그건 어제 금의 밀사한테서도 들었다."
"나리， 타타르는 대원제국의 정통을 이어받았으나 몽골이라고 자처하는
오이라트족의 쟈이르칸에게 밀려 왔소이다， 이 기회에 대금과 결맹하여 원
제국의 영화를 되찾아야 합니다."
"돌아가라."

머리를 저은 아르바쿠가 쓴웃음을 지었다.

"다 헛된 꿈이다. 나는 그저 침입자를 맞아 싸우다가 전장의 이슬이 되어
사라지련다."
"나리의 기백은 어디로 갔습니까?"

눈을 치켜 떴던 야라구니가 이윽고 길게 숨을 뱉았다.

"그러시다면 나리， 저하고 함께 온 사람을 한번만 만나 주시지요."
"누굴 만나건 내 결심은 변하지 않는다."
"잠시면 됩니다， 나리."

야라구니의 눈빛을 본 아르바쿠가 이윽고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 데려오너라."

자리에서 일어선 야라구니가 방을 나가더니 곧 같은 사냥꾼 차림의 사내
와 둘이서 들어섰다.

그리고는 아르바쿠의 앞에 둘이서 나란히 앉았다. 아르바쿠가 시선을 들
어 사내를 보았다.

젊다， 그리고 장대한 체격에 눈빛이 맑고 강했다.

그러나 아르바쿠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사내가 똑바로 자신을 바라본 채 머리 숙여 예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
다.

"그대는 누군가?"

참다못한 아르바쿠가 조금 거친 목소리로 물었을 때 사내가 얼굴을 펴고
웃었다.

"나는 대 금 황제 이반이다."

숨을 들이켠 아르바쿠가 눈을 치켜 뜨고는 옆에 앉은 야라구니를 보았다.
그러자 야라구니가 머리를 끄덕였다. 정색한 표정이다.

"그렇습니다， 황제께서 친히 이곳으로 오셨습니다."
"아， 아니， 그렇다면."

놀란 아르바쿠의 시선이 다시 사내에게로 옮겨졌다. 역전의 용장 아르바
쿠의 40여 년 일생 중에서 이처럼 놀란 일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그， 그대가， 아니."
"내가 대 금 황제라니 믿기 지가 않는가?"

부드럽게 물은 이반이 똑바로 아르바쿠를 보았다.

"타타르의 용장 아르바쿠를 설득시키기 위해서라면 이보다 더한 위험도
감수했을 것이다."
"황제 폐하께서는 변복한 친위대를 이끌고 사흘 낮 밤을 달려 왕도에 잠
입해 오셨소이다."

아라구니가 말했을 때 그때까지 눈만 부릅뜨고있던 아르바쿠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폐하， 아르바쿠가 뵈옵니다."
"그만 앉으라."

이반이 손을 들어 제지했으나 아르바쿠는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일 국의
황제가 목숨을 걸고 찾아온 것이다. 가슴이 무섭게 고동 쳤으며 입안이 바
짝 마른 아르바쿠는 침을 끌어 모아 삼켰다. 그때 이반이 두 손으로 방바닥
을 짚더니 아르바쿠를 보았다.

"아르바쿠， 그대는 타타르 국 제일의 용장이다， 나는 그대를 내 오른팔
로 삼아 타타르 백성들을 다스리고 싶다， 그리하여 대 원의 뒤를 이은 대
제국을 건설하고 풍요와 자랑을 남겨주고자 한다， 부디 내 청을 들어주겠
는가?"

그러자 이반을 쏘아보던 아르바쿠의 황소 눈에 서서히 물기가 번지더니
마침내 굵은 눈물 줄기가 흘러 떨어졌다.

"폐하， 소인을 찾아 이렇게 적지로 찾아와 주시다니요."

목이 멘 아르바쿠가 숨을 돌리고는 말을 이었다.

"소인이 폐하의 충복이 되어 폐하의 말고삐를 쥐게 해 주신다면 기꺼이
목숨을 바치겠소이다."
"고맙다."

이반이 손을 뻗어 아르바쿠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밝은 표정이다.

"그대는 쿤두스와 더불어 대 금의 대장군이며 남 타타르의 왕이다， 나는
그대들에게 타타르의 정사를 맡길 것이다."
"폐하， 소인은 무장이올시다."

아르바쿠가 황급히 사양했으나 이반은 다시 얼굴을 펴고 웃었다.

"나 또한 대 금 황제이나 정사는 재상에게 맡겨 놓았다， 그대는 타타르
왕으로 나와 더불어 대군을 이끌고 서진하는 것이다."
"폐하를 따릅지요."

말뜻을 알아차린 아르바쿠의 얼굴도 환해졌다.

"몽골은 옛 영화를 되찾을 것입니다， 폐하."

이미 아르바쿠에게는 호라칸에 대한 미련은 눈 녹은 듯이 사라졌다. 몽골
의 영화를 되찾는 터에 호라칸 따위에게 집착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마른
풀에 불길이 번져 가는 듯 한 대 금의 기세를 호라칸은 당해낼 수 없을 뿐
만 아니라 군주의 자질도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난다.

눈앞에 앉은 대 금 황제 이반의 모습을 보면서 아르바쿠는 가쁜 숨을 억
눌렀다. 황제로부터 어깨를 안기는 영예는 처음이다.

호라칸은 한번도 이런 적이 없었던 것이다.

타타르의 완도에 잠입한 이반의 일행은 200여 인에 불과했으나 모두 고르
고 고른 정예 무사들이었다. 참모로는 대장군 임기춘과 역시 대장군으로 요
동 왕 황문기의 휘하인 복전이 수행했고 위사장 손대복은 일당백의 용자들
만을 추려 장사꾼이나 백성차림으로 성안에 잠입했다.

왕도에는 수 십만 백성에다 모여든 군사들로 들끓었으나 기찰이 엄해서
신시만 되면 성안 출입이 금지 되었다. 광안성이나 산해관이 어떻게 함락되
었는가를 타타르 군 지휘부는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이곳은 요동 땅보다 더 춥군."

곰 털 바지저고리를 입은 데다 머리도 털모자로 감쌌으나 어깨를 둥그렇
게 움츠린 마청이 혀를 두드렸다. 그는 아르바쿠의 저택 사랑채의 벽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는데 칼끝 같은 바람을 피해 얼굴을 옆쪽으로 돌리고 있
다. 그가 옆에 앉은 사내에게 물었다.

"조선 땅은 살기가 풍족한가?"
"굶지 않으면 풍족한 것이지요."

조선 출신인 500인 장이 투덜대듯 말했다. 그는 충청도 옥천에서 백정 노
릇을 하다가 금 국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북상하여 금 군 병사로 자원
했다. 그리고는 타고난 용력을 발휘하여 전장 터에서 마다 적을 개나 소 잡
듯이 가볍게 죽였는데 지난번 광안성 싸움에서는 타타르의 부장을 베었다.
그래서 반년만에 일개 병사에서 500인 장으로까지 승진했으니 조선 땅에 있
었다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마청이 불쑥 물었다.

"그대 이름이 뭣이여?"
"이두산이오."
"두산이?"
"예， 지가 둘째이기 때문에， 지 형님 이름이 첫산이오."
"이씨라면 황제 폐하하고 종씨인가?"
"아니오， 하지만."

웅크리고 앉았던 이두산이 어깨를 펴고 마청을 보았다.

"지가 본래 성이 없었소， 그런데 지난번에 공을 세운 후에 황제 폐하께
서 성씨를 내려 주셨소."
"어허， 그렇구나."

둘은 같은 조선 말을 썼다. 마청은 왜국의 백제 유민 출신이었기 때문이
다.

"그렇다면 나도 폐하께 성씨를 내려 달라고 해야겠다， 이마청으로 이름
을 고쳐야지."

그때 위사장 손대복이 어둠 속에서 다가왔다. 그도 털옷으로 몸을 감싼
사냥꾼 차림이다.

"추위에 장수들이 초병처럼 고생 많으시네， 자， 모두 방으로 들어가세."
"그래도 좋습니까?"

언 몸을 일으키며 마청이 묻자 손대복이 얼굴을 펴고 웃었다.

"아르바쿠님이 폐하께 투항해 왔어， 이제 이 저택은 우리 금 국의 진지
일세."

사랑채에서는 이반을 중심으로 측근들과 아르바쿠의 심복 장수들까지 모
여 앉아 있었는데 모두 10여 명이었다. 아르바쿠의 수하들은 한사람도 빠짐
없이 이반에게 충성을 맹세한 것이다. 아르바쿠가 입을 열었다.

"폐하， 소장은 호라칸으로부터 주력군 7만을 이끌고 천우산에 매복해 있
도록 명을 받았소이다， 호라칸은 그 너머의 자한벌에 다시 3만 군사를 매
복시켜 이중 삼중의 덫을 놓을 계획입니다， 소장이 7만 군사를 돌려 호라
칸을 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호라칸은 전황을 확인하려고 친위대와 함께
3만 군사를 지휘할 것입니다."

좌중의 모든 시선이 이반에게로 모여졌고 방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이반이 입을 열었다.

"그러면 군사들의 피해가 커지는 데다 호라칸의 감시에 노출될 수가 있다，
다른 방법을 쓰도록 한다." 　

대 금은 두만강 이북의 광대한 여진 땅에서 서쪽의 요동 땅까지 영토를
확장시킨데다 남으로는 산해관을 함락시켜 장성이 명과의 경계가 되었다.

그리고는 서진하여 타타르의 중심부에 이르렀으니 발해 국 전성기 보다도
더 넓었다.

인력은 곧 국력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대 금의 조정은 적극적으로 유민을
장려하였는데 기름진 땅이 많고 5년 간 조세를 걷지 않는다는 포고가 퍼지
고 나서 하루에도 수천 명의 유민이 흘러들었다. 그 중 제일 많이 유입된
백성이 조선인들이다.

이징옥과 이시애의 난을 연거푸 치른 조선 조정은 충청， 전라， 경상의
하삼도(下三道)에 비하여 북도를 차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반란이 모두 북도인 함경， 평안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북도의
조선 백성들이 무리를 지어 대 금에 복속해왔다.

또한 왜 국의 백제 유민들도 배를 타고 건너왔으며 환관과 탐관오리에 시
달린 명의 한족들도 장성을 넘어 대 금의 백성이 되었다.

그야말로 대 금 국의 기세는 떠오르는 태양처럼 빛났으며 그만큼 명에게
는 위협적이 된 것이다.

정월 초엿새 날， 명의 황제 헌종은 자양 궁에서 조선의 새 임금 예종이
보낸 사신을 맞았다. 예를 마친 안제학이 예종이 보낸 국서를 환관에게 건
네 주었을 때 헌종이 직접 물었다.

"조선 왕이 병약하다던데 고단한 국사를 견디어 내겠느냐?"
"황공하오나 매일 국사를 살피고 계십니다."

당황한 안제학이 한어에 유창했음에도 말을 더듬었다. 왕이 병약하면 대
국의 황제는 능히 갈아치울 수도 있는 것이다. 헌종이 눈을 가늘게 뜨고 안
제학을 보았다. 안제학은 왕의 밀서를 품고 달려 온 것인데 헌종은 아직 밀
서를 거들 떠도 보지 않았다.

"조선 백성은 물론이고 관리들까지 금에 투항한다던데 조선 왕은 내버려
두고 있는가?"
"아， 아니옵니다."

엎드린 안제학의 이마에 땀방울이 배어났다.

"국경을 철저히 봉쇄하고 있사오며 붙잡힌 투항자는 목을 베고 있소이다."

거짓말이다. 압록강과 두만강 쪽 사군 육진의 초소는 이미 텅 비어서 국
경은 없어졌다. 백성들은 그저 강만 건너면 되는 것이다. 입술을 비튼 헌종
이 옆에 선 환관 왕직을 보았다.

"조선왕의 긴 글은 듣기에 귀찮다， 읽고 요약해서 말하라."
"예， 폐하."

비단 주머니에 싼 밀서를 펴든 왕직이 주욱 훑어보더니 머리를 들었다.

"폐하의 건강을 축원했소이다."
"흥."
"조선은 대 명의 신하로서 천년 만년 복속할 것을 맹세 했소이다."
"흥."

그 때 궁 밖이 어수선해지더니 곧 명의 병부상서 우경이 입을 열었다.

"폐하， 산해관에 주둔했던 금 군이 남하했다고 합니다."
"무엇이?"

늘어져 있던 헌종이 놀라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눈이 크게 뜨여져 있다.

"남， 남하하다니? 도원수는 어디 있는가?"
"군사를 정비하여 대응하겠다는 전령이 왔소이다."
"어허."

헌종이 마른 침을 삼키더니 그때서야 조선 사신을 의식한 듯 손을 저었
다.

"조선 사신들은 물러가라."

퍼뜩 머리를 든 안제학은 헌종의 두 눈에 초점이 잡혀있지 않은 것을 보
았다.

객사로 돌아온 안제학이 기운 없이 방에 앉았을 때 부사 박시윤이 따라
들어섰다. 박시윤도 안재학과 함께 황제를 배알하고 나온 참이다.

"명의 조정이 발칵 뒤집혔소이다."

털썩 앞에 앉은 박시윤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도 예조 참판이니 당상관이
다.

"황제가 벌벌 떨지 않았습니까?"

안재학이 시선을 돌렸으나 박시윤은 정색했다.

"조선왕의 서신을 환관에게 읽혀 대충 요약해서 말하라고 하다니요， 이
런 수모를 앞으로도 당해야 합니까?"

그리고는 박시윤이 뱉듯이 말을 이었다.

"금의 군사가 남하했다는 말에 황제가 벌벌 떠는 꼴을 보니 오장에 막혀
있던 체증이 시원하게 뚫리는 것 같았소이다， 대감께선 그렇지 않으셨습니
까?"

그때 머리를 든 안재학이 박시윤을 보았다.

"동쪽 끝에 박혀 대국에 조공이나 바치던 우리 핏줄에서 대금 황제가 일
어난 것은 자랑이오."

놀란 박시윤이 눈을 크게 떴다.

이 말이 밖으로 새어 나간다면 조선에 돌아가자마자 당장에 역모에 걸려
삼족이 몰살당할 것이었다.

그러나 안재학의 목소리는 더 굵어졌다.

"대금은 이미 여진과 요동， 거기에다 타타르의 영지에까지 영토를 넓혀
명 황제가 대금 군의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벌벌 떨 정도로 국세를 일으켰
소， 그런데도 조선왕은 명 황제의 발이나 핥고 있으니 혀를 깨물고 죽고싶
소."
"대감， 목소리를 낮추시기를."

제가 먼저 시작했으면서도 박시윤이 질색을 하고 안재학을 보았다.

"누가 들을까 두렵소이다."
"들으면 어떻소?"
"조선의 운세가 그런걸 어쩌란 말씀이오? 고정하십시오."
"조선은 대금과 합병을 해야되오， 선왕께서는 그 기회를 버리셨지만 지
금이라도 서두르면 늦지 않소."
"아니， 대감."

박시윤의 얼굴은 이제 새파랗게 되었다.

"대감， 큰일나실 말씀을 하시오."
"그래서 나는 이 길로 북상하여 산해관으로 밀행하겠소， 거기에서 대금
황제를 뵙고 조선과의 합병을 요청할 작정이오."
"대감， 그렇다면 대금의 군사가 다시 내려오도록 만들겠단 말씀이시오?"
"내가 그 선두에 서겠소， 아마 기마 군 1만이면 조선 땅은 함락될 것이
오."
"어허， 이런."

어깨를 늘어뜨린 박시윤이 긴 숨을 여러 번 뱉더니 이윽고 머리를 들었
다.

그도 40대 후반으로 갖은 풍상을 겪은 터라 물정을 모를 리가 없다.

"좋소이다， 그럼 저도 따릅지요."

박시윤이 결심한 듯 다부진 표정으로 안재학을 보았다.

"대금과 조선이 한 몸으로 된다면 천하는 조선인의 차지가 될 것입니다，
조선인이 서역에까지 뻗쳐나가 원처럼 대제국의 주인이 될 것이오."

그 시각에 이반은 아르바쿠의 저택에서 10여 명의 장수들과 둘러앉아 있
었는데 그것은 아르바쿠의 출정 일이 내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호라칸의 친위대는 1만으로 모두 정예군입니다， 그리고 호라칸이 태어
난 바이타트 부족으로만 편성되어서 충성심이 강합니다."

아르바쿠가 정색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더우기 친위대장 예신은 통솔력이 뛰어난 용장입니다， 폐하."
"나도 예신에 대해서 들었다."

머리를 끄덕인 이반이 둘러앉은 장수들의 얼굴을 차례로 훑어보았다.

"대금국에도 예신과 같은 용장이 많다."

"음， 미색이다."

만족한 듯 얼굴을 펴고 웃은 예신이 손끝으로 무희로 불렀다. 넓은 겔 안
은 10여 명의 부하들과 둘러앉아 주연을 벌리는 중이어서 떠들썩했다. 무희
가 주춤대며 다가와 섰을 때 예신은 팔목을 잡아 옆에 앉혔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오향입니다."

더듬거리는 몽고말로 말한 무희의 눈동자가 불안한 듯 흔들렸다. 여자는
명에서 포로로 잡아온 한족이다. 다시 음악이 시작되었는데 악사들도 한족
인 때문인 지 곡조가 서글펐다.

무희의 허리를 당겨 안은 예신이 손을 뻗어 치마 속을 더듬었다. 30대 후
반의 예신은 신장이 6척이었으나 체중은 서른 관이 넘었다. 그러나 몸이 날
렵해서 한 길 담장은 힘도 들이지 않고 뛰어 오른다. 무희의 은밀한 부분에
손끝을 넣은 예신이 다시 웃었다.

"넌 언제 잡혀왔느냐?"
"반년 되었습니다."

겁이 난 무희가 몸을 틀지도 못하고 말했다. 예신은 난폭해서 성의 없이
춤을 추는 무희에게 칼을 던져 죽인 적도 있는 것이다. 겔 안은 음악소리에
어울리지 않게 웃음과 떠들썩한 소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오늘은 출정하는
군사들에게 왕이 술과 고기를 하사했기 때문에 성 안팎은 축제 분위기였다.

그래서 친위대장 예신도 성안 보급 창 마당에 마련해 놓은 가장 큰 겔을
차지하고 심복들을 모아 즐기는 것이다. 구슬픈 음악에 맞춰 하느적 거리며
춤을 추던 무희 셋은 음악이 끝나기도 전에 부하들이 가로채 갔다. 이미 예
신이 여자를 고른 터라 사양할 필요도 없어서 부하 둘은 무희를 가운데 두
고 다투기까지 했다.

"술을 따라라."

커다란 술잔을 내밀며 예신이 말하자 무희는 황급히 술병을 들었다.

"넌 오늘 밤에 내 시중을 들라."

예신이 이제는 한 손으로 무희의 젖가슴을 주무르며 말했다.

"네 방중술이 좋으면 호강을 시켜주마."

정력도 뛰어난 예신은 보통 여자 둘을 끼고 침실로 갔는데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는 여자는 드물었다. 그래서 늘어진 여자를 호위 군사가 들고 나오는
것이 구경꺼리가 되기도 했던 것이다.

그 때 군관 하나가 뒤쪽에서 다가와 예신의 귀에 대고 소리치듯 말했다.
그만큼 소란했기 때문이다.

"나리， 아르바쿠 대장군께서 출정 인사차 오셨습니다."
"허어， 대장군께서?"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예신이 그때서야 여자의 젖가슴에서 손을 떼었다.
아르바쿠의 서열은 예신 보다 높았지만 위세는 오히려 예신이 높았다.

왕의 친위대장은 곧 왕의 분신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아르바쿠는 부하
셋과 같이 들어섰는데 겔 안의 소란은 그대로였다.

모두 술에 취한 데다 친위대 간부들의 안하무인격인 기질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예신은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 아르바쿠를 맞았다.

"대장군께서 오시다니 영광입니다."
"창고에 들렀다가 오는 길이오."
"잘 오셨습니다， 아직 술이 많습니다."
"그대와 작별 인사를 하려고."
"소장도 며칠 후에 전하를 모시고 출정을 합니다， 금 국왕의 목을 베고
나서 다시 축배를 들지요."
"과연 그럴까? 아마도 더 이상 술이 들어갈 수 없을 걸세"

아르바쿠의 말에 예신이 퍼뜩 눈을 크게 떴을 때였다. 아르바쿠는 허리에
찬 칼을 뽑으면서 예신의 목을 쳤다. 천하에 이름을 떨쳤던 예신이었으나
방심한데다 무기도 들지 않은 상태였다. 예신은 날아오는 칼날을 막으려고
몸만 비틀었다.

"으윽!"

아르바쿠의 칼은 예신의 팔을 어깨 밑에서부터 일자로 잘랐고 이내 선홍
빛 피가 뿌려졌다.

"아앗!"

고함소리와 함께 예신의 부하들이 뛰쳐 일어났으나 이미 한 걸음 늦었다.
아르바쿠의 수행원 둘이 이미 칼을 빼어 예신의 부하 둘을 베었고 그 순간
겔 안으로 7，8명의 사내가 뛰쳐 들어왔다. 모두 아르바쿠의 부하들이었다.

그때 아르바쿠가 두 번째 날린 칼이 예신의 등을 뚫고 가슴으로 빠져나왔
다. 예신이 등을 보이며 도망치려고 했던 것이다. 겔 안의 살육은 순식간에
끝이 났다. 친위대장 예신을 포함한 간부들이 모두 몰살당한 것이다.

"궁으로 가자."

칼날에 묻은 피를 엎어진 예신의 옷에 문질러 닦은 아르바쿠가 눈을 부릅
떴다. 그리고는 온몸을 떨며 웅크리고 있는 악사와 여자들을 보았다.

"너희들은 숙사로 돌아가라， 내일 아침이면 타타르의 호라칸 왕조는 없
어져 있을 것이다."

그 시각에 궁성의 대문 앞에서 수문장 우드릭은 눈을 가늘게 뜨고 다가오
는 일단의 기마 군을 보았다. 우드릭 또한 바이타트족 출신으로 예신의 심
복이다. 어둠 속에서 다가온 기마 군은 모두 아르바쿠의 기마 군 복장을 하
고 있었는데 대략 30명쯤은 되었고 앞장 선 대장은 낯익은 부장이다.

"아니. 바이산이 아닌가? 이 시각에 여긴 웬일이야?"

우드릭이 반가운 듯 얼굴을 펴고 묻자 바이산도 따라 웃었다.

"곧 아르바쿠 님께서 대왕을 뵈러 오실 걸세， 그래서 먼저 온 것이지."
"내일 출정 인사 때문인가?"
"급히 뵐 일이 있다고 하셨어."
"그럼 저쪽에서 기다리게."

우드릭이 눈으로 대문 옆쪽의 대기소를 가리켰을 때였다. 마상에서 칼을
뽑은 바이산은 놀란 우드릭이 눈을 치켜 뜬 순간에 내려쳐 머리를 두 쪽으
로 갈랐다.

"앞으로!"

칼을 치켜 든 바이산이 말에 박차를 넣어 돌진했고 수하 기마 군이 질풍
처럼 뒤를 따랐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어둠 속에서 200여 명의 기마 군이
나타났다. 그 선두에 선 장수가 대 금 황제 이반이다. 바이산은 앞쪽 소동
에 황급히 대문을 닫으려는 수문장 휘하의 친위군을 베고 왕궁 안으로 쳐들
어가는 중이었다. 이반은 가죽 갑옷 차림에 손에는 장검을 뽑아 쥐었는데
아무런 장식도 붙이지 않아서 100인 장쯤으로 보였다.

"와앗!"

앞쪽에서 내 지른 고함소리는 내성 안에 잠복해 있는 아군들에게 알리는
신호였다. 왕궁은 도성의 심장부에 다시 두 겹의 성벽을 쌓아 성안의 성처
럼 만들어 놓았지만 출정 전날이어서 온통 성안이 축제 분위기인데다 이미
저녁 무렵에 아르바쿠의 부하들이 침투해 있었다. 고함소리를 신호로 두 번
째 성문을 지키던 친위대는 안에 잠복해 있던 아르바쿠 부하들의 기습을 받
았고 성문이 안쪽에서 열려 젖혀졌다.

"성공이다!"

바이산의 뒤를 따라 두 번째 성문 안으로 달려들어간 이반의 가슴은 뛰었
다.

"폐하 옆에 붙어라!"

고려 말로 외친 마청이 벽력같이 소리치며 말을 이반의 옆으로 바짝 붙였
을 때 반대쪽에서 500인 장 이두산이 따라 붙었다. 내성 안의 친위대는 5，
600명 정도였으나 이 기세면 일당백이다. 이반은 어둠 속에서 허둥대는 호
라칸의 친위대 하나를 칼을 날려 베었다. 호라칸의 내전은 이제 바로 앞이
다.

술시가 지난 시각이어서 후궁과 함께 침전에 있던 호라칸은 문득 몸을 굳
혔다. 밖에서 얼핏 함성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자리에 드시지요."

침구를 깔아놓은 후궁이 요염한 시선으로 호라칸을 보았다. 가는 몸매에
얼굴도 갸름해서 나약하게 보였으나 방사가 뛰어나 요즘 들어 호라칸의 총
애를 받고있는 후궁이었다. 그때 복도를 쿵쿵대며 달려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 왔으므로 호라칸은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이제까지 왕의 침전 복도를
저렇게 거침없이 달리는 경우는 없었기 때문이다.

"대왕!"

침전의 밖에서 소리치듯 말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내전태감 왕사였다.

"대왕! 적의 침입이오!"

왕사가 다시 소리쳤을 때 호라칸은 벗어놓았던 저고리를 꿰는 참이었다.

"누구란 말이냐?"

호라칸이 버럭 되물었을 때 다시 복도에서 여럿의 발자국 소리가 울렸다.
그들도 이쪽으로 달려온다. 그리고 이제 밖의 함성은 더 굵고 가까워졌다.

"예， 아， 아직 모릅니다， 허나 적은 이미 내궁에 까지 들어왔소이다."
"내 칼을!"

호라칸이 버럭 소리치자 기겁을 한 후궁이 벽에 걸어놓은 칼을 떼다가 떨
어뜨렸다.

"대왕! 어서 피하시옵소서!"

달려온 누군가가 밖에서 다시 소리쳤을 때 칼을 쥔 호라칸이 와락 문을
열어 젖혔다.

"미련한 놈들! 예신은 어디 있느냐?"
"예， 내성에는 없소이다， 주연에 간다고 했으니."

친위대 장수 하나가 더듬대며 대답했을 때 복도 끝 쪽에서 칼날 부딪치는
소리가 섬뜩하게 들리더니 곧 비명소리가 났다.

"예신을 부르라! 그리고."

이를 악문 호라칸이 힐끗 복도 끝 쪽을 보았다. 그 쪽이 더 소란스러워져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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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즐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