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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극 처 安極妻李氏 1694 ~ 1767 광지. 행장 –아들 안정복
선비 공인 이씨 광지(先妣恭人李氏壙誌) 정해년
부친 익령(益齡)은 효령대군 보(補)의 후예이고, 모친은 청송심씨(靑松沈氏)이다.
숙종 갑술년(1694)에 태어나고, 17세에 고 통덕랑 광주 안공(安公) 극(極)에게 시집왔다. 효성과 자애가 지극하고 총명하고 사리에 밝아 부도(婦道)가 능히 갖추어졌다.
74세인 정해년(1767, 영조 43) 8월에 돌아가셨는데, 10월 정묘에 광주 영장산(靈長山) 통덕공의 묘소 동쪽에 안장하였다. 2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감찰 정복(鼎福)과 정록(鼎祿)이고, 딸은 오석신(吳錫信)에게 출가했다. 손자는 진사 경증(景曾)이다. 내외의 손자ㆍ증손 남녀가 모두 열네 명이다.
先妣恭人李氏壙誌 丁亥
考益齡。孝寧大君𥙷之後。妣靑松沈氏。肅廟甲戌生。年十七。歸于故通德郞廣州安公極。孝慈聦達。婦道克備。七十四歲丁亥八月卒。十月丁卯。葬廣州靈長山通德公壙東。生二男。監察鼎福,鼎祿。一女吳錫信。孫進士景曾。內外孫曾男女凡十四人。
선비 공인 이씨 행장(先妣恭人李氏行狀)경인년
선비(先妣) 이씨의 세계(世系)는 선원(璿源)에서 나왔으니, 헌릉(獻陵 태조의 능호)의 별자(別子) 효령 대군 정효공(孝寧大君靖孝公) 휘 보(補)의 후손이다. 대군이 보성군(寶城君) 휘 합(㝓)을 낳았고, 보성군은 율원군 적개공신 환양공(栗原君敵慨功臣桓襄公) 휘 종(徖)을 낳았고, 율원군은 여양군(呂陽君) 휘 자겸(子謙)을 낳았고, 여양군은 용강 현령 증 이조 판서 전성군(龍岡縣令贈吏曹判書全城君) 휘 대(薱)를 낳았고, 전성군은 충훈경력 증 공조 참의(忠勳經歷贈工曺參議) 휘 박(樸)을 낳았다. 참의는 아들을 두지 못하여 형님 수안 군수(遂安郡守) 휘 노(櫓)의 아들 규빈(奎賓)을 입후하였는데, 이분은 창녕 현감(昌寧縣監)을 지냈고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참판은 죽산 부사 동지중추부사(竹山府使同知中樞府事) 휘 척(滌)을 낳았는데, 이분은 무용(武勇)으로 출세하였다. 성품이 강직하고 큰 지조를 지녔으나, 훈상(勳相) 김류(金瑬)의 비위에 거슬려 관직이 승진되지 못했다. 정축년(1637, 인조 15) 이후 집안에서 세상 일을 끊고 지내다가 별세하였는데, 선비에게 고조가 된다. 증조의 휘는 상원(尙元)인데 금부 도사(禁府都事)이다. 조부의 휘는 영한(榮漢)이며 성균 진사(成均進士)이다. 문장을 잘하고 글씨를 잘 썼으며 고상한 품행이 있었다. 선고의 휘는 익령(益齡)이니, 성품이 너그럽고 온화하며 베풀기를 좋아하였는데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다. 어머니 청송심씨(淸松沈氏)는 첨추(僉樞) 휘 유준(儒俊)의 따님이고 동돈녕(同敦寧) 휘 봉원(逢源)의 후손인데, 사리에 환히 통달하고 성품이 심후하여 부덕(婦德)을 겸비하신 분이다. 선비(先妣)께서는 숙묘(肅廟) 갑술년(1694, 숙종 20) 윤 5월 6일 진시(辰時)에 한성(漢城)에서 태어나셨다.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영리하여 첫돌이 지났을때 말을 잘하였다. 여종 둘이 마주 서서 절구질할 때 숫자를 세며 서로 놀이하는 것을 보고 선비께서 그대로 따라하되 하나에서 열까지 차례로 틀리지 않게 세었으므로, 옆에 있던 사람이 우연한 일로 여겨 여러 번시켜 보았으나 처음과 똑같이 하였다. 6세 때에 우리 나라의 말을 적는 언문(諺文)을 환히 알았고, 7, 8세때에 어른을 대신하여 편지를 썼는데, 안부 말 이외에 심정을 말하고 일을 서술한 것이 각기 격식에 맞았다. 그리고 여자들이 하는 일[女工]도 다른 사람들보다 배나 정교하고 민첩하게 하였다. 9세 때에 외조부님의 상을 당하셨는데 정도에 지나치게 슬퍼하였고, 호상(護喪)하는 자가 선비의 나이가 어리다 하여 상복을 짓지 않았더니 선비께서 상복을 지어주기를 간절히 청하여 입고 조석곡(朝夕哭)에 참여하기를 예(禮)대로 하였으므로, 보는 이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17세 때에 우리 선군(先君)에게 시집오셨는데, 가문에 들어오신 이후로 시부모님을 섬기시는 데에 조금도 잘못하시는 일이 없었다. 동틀 무렵에 세수하고 머리를 빗으시고 반드시 새벽참의 음식을 올렸다. 그리고 편찮으신 때를 당하면 약을 손수 달이시고 음식을 직접 지으시며 밤낮으로 곁에서 시병하시어 병이 나으신 뒤에야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셨다. 조부님께서 선비의 재기(才器)를 훌륭하게 여기시어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모두 상의하셨고,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일 같은 것은 부인들이 알 만한 일이 아닌데도 반드시 물으셨다. 조모님은 성격이 본시 준엄하시어 좀처럼 사람을 칭찬하시지 않았는데 선비께서는 효성과 공경에 매우 힘쓰시어 시종 게을리 하시지 않았다. 조모님께서 만년에 병석에 누워 계시며 대소변을 받아 내게 하셨는데, 선비께서 속옷을 직접 빨기까지 하시어 추한 것을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았다. 조모님께서 선비의 성의에 감동하여 말씀하기를,
“나는 너의 효성이 이러한 경지에까지 이를 줄은 몰랐다.”
하였다.
가업이 본시 넉넉하지 못한데다가 선군께서 손님을 좋아하시고 남에게 베푸는 것을 좋아하셨는데도 반드시 뜻을 받들어 따르시고 난색을 보이지 않으셨다. 그리고 불초자(不肖子)의 동류들이 찾아왔을 때에도 반드시 음식을 대접하시며 말씀하시기를,
“옛날에 어떤 부인은 머리털을 잘라 술과 안주를 마련하고 앉는 풀자리를 썰어 말에게 먹이기까지 하면서 아들의 벗을 대접한 사람이 있었으니, 나는 이 부인을 흠모한다.”
하셨다.
자녀들을 기르는 데 있어서는 자녀들을 매우 사랑하시고 소중하게 여기셨지만 올바른 도리로 엄격하게 교육하시어 어릴 때부터 법도로써 가르치셨다. 그 중에서도 더욱더 의리와 이익의 분계(分界)에 삼가도록 하시며 이르시기를,
“대체로 이기심은 가르치지 않아도 사람들이 모두 잘 아는 것인데, 더구나 부모된 사람이 이익으로 유도하여 단지 욕심만 키워 준다면 그 폐단이 어떠한 경지에 이를 것이겠는가.”
하셨으므로, 불초의 형제들에게는 자기 몫으로 저축한 재물이 없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접대하시는 데 있어서는 서먹서먹한 간격을 버리시고 자랑하려는 겉치레를 일삼지 아니하셨으며, 자신을 해치려는 자에게도 반드시 성의를 다해 대우하셨다. 조모님의 친정 얼속(孼屬) 가운데 과부로 지내며 의탁할 데 없는 여자가 있어서 우리 집에 와서 살았는데, 그녀는 본시 수다스러웠으므로 선비께서 곤란스러운 일을 여러 번 당하셨다. 그러나 훗날 또 왔을 때 선비께서 그녀를 대우하심에 아무런 기색을 보이지 않았으므로 그녀는 감복하였다. 그리고 무주(茂朱)에서 이사 올 때에는 마을의 할머니 몇 분이 떠나오는 선비의 손을 부여잡고 차마 이별을 하지 못해 하며 눈물을 한없이 흘렸다. 또 노복(奴僕)들을 거느리심에 은정과 위엄을 병행하시어 그들의 굶주림과 추위를 염려해 주셨으므로, 모두가 두려워하며 복종하였다. 이웃에 양식이 떨어져 매우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힘이 닿는 데까지 구제해 주셨는데, 저녁 지을 쌀을 모두 털어 주시면서도 섭섭한 마음을 갖지 않으셨다. 그러나 성품이 청렴 결백하시어 어떠한 것도 남에게 요구하신 적이 없으셨으니, 채소 과일 등의 하찮은 물건 조차도 함부로 받지 않으셨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불의의 재물을 가지고 와서 간청하는 일이 없었다. 이익을 탐내어 의리를 잊어버린 채 시세에 붙쫓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으시게 되면 마치 자신이 더럽혀진 듯이 부끄러워하셨다. 그리고 어느 집 여자가 이자놀이를 하여 10분의 1의 이식을 받는 것을 보시고 공척하여 경계하시기를,
“부녀자의 행실에는 잘못하는 것도 없고 잘하는 것도 없으니 단지 술과 음식 만드는 것만 일삼아야 하는데, 재물을 잘 증식시킨다는 것으로 명성이 난다면 이것이 어찌 규중 부녀자의 좋은 명성이겠는가.”
하셨다.
우리 나라 풍속은 본시 부녀자들에게 학문을 배우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에 선비께서도 문자를 학습하시지 않았다. 그러나 총명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시어 어릴 때부터 옛날 사적 보시기를 좋아하셨으므로, 중국의 상고 시대부터 황명(皇明) 시대까지와 우리 나라의 고려말부터 근대까지 나라의 치란(治亂)과 사람의 현부(賢否)에 대해서 모두 환히 아셨다. 그리고 언문 소설은 그 종류가 무려 수백 사람이 지은 것이지만 한번 보시기만 하면 모두 기억하시어 종신토록 잊지 않으셨다. 그러나 만년에 늘 말씀하시기를,
“소설은 모두가 거짓으로 꾸며내어 이야기를 만든 것이어서 한 가지도 진실이 없는 것이고, 또한 사람들의 심술을 사악한 데에 빠지게 할 만한 것이니, 볼 만한 것이 아니다.”
하셨다. 그리고 늘 며느리와 딸들에게 경계하시를,
“부인의 나쁜 덕은 질투와 시기가 으뜸인 것이다. 질투와 시기의 마음을 가지면 못하는 짓이 없게 되어 끝내 남편에게 누를 끼치게 되니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셨다. 검소한 것을 편안하게 여기시어 의복을 입으시는 데 있어서는 언제나 성한 것과 깨끗한 것만을 취택하시며 말씀하시기를,
“지금 시대의 여인들의 의복은 좁은 소매에 천록색(淺綠色)인데, 시대의 유행이라고 하지만 이러한 옷은 좋지 못한 옷에 가까우니 따를 만한 것이 아니다.”
하셨다. 그리고 평소에 앞일을 미리 아시는 식견을 가지고 계시어서 어떠한 일의 시비를 말씀하셨을 경우 나중에 모두 그대로 맞았다.
우리 외조모님 산소가 금천(衿川)에 있는데 외숙께서 영광(靈光)에 사시는 탓에 제때에 성묘도 못하고 묘제(墓祭)도 대부분 지내지 못했으므로, 선비께서 늘 애통해하시며 말씀하시기를,
“여자가 출가했다 하더라도 자신을 낳아 주신 부모의 은혜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하셨다. 그리고 절사(節祀 절기에 따라 지내는 제사)를 지내는 날을 당할 때마다 눈물을 흘리시며 슬퍼하셨고, 우리 형제들로 하여금 수시로 성묘하게 하셨다. 송파(松坡)에 사시는 이모님은 선비에게 아우가 되는데 일찍 과수가 되시어 매우 가난하게 사셨으므로, 선비께서 때때로 구제해 주시되 집에 재물이 있고 없는 것을 따지지 않으시며 마음을 다하셨다. 이에 이모님이 감격하시어 말씀하시기를,
“언니의 대단한 우애는 다른 사람이 따라갈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외숙께서 약간의 토지를 분배해 주시려고 하자, 선비께서 말씀하시기를,
“다른 사람에게는 괜찮지만 나에게는 분배하지 말라. 기어이 나누어 주고자 한다면 그 몫을 금천(衿川)의 묘위전(墓位田)으로 떼어놓는 것이 좋겠다.”
하시고, 끝내 받지 않았다.
선비께서 기품이 본시 강건하시어 질병이 없으신 분인데, 여러 차례의 출산 때 조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시어 중년 이후에 질병의 증세가 늘 나타났다. 그리고 무진년(1718, 숙종 44) 겨울에 풍허증(風虛症)이 발생하여 약으로 치료하였으나 효험이 없었고 20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런데 정해년(1767, 영조 43) 윤7월 1일에 우연히 돌림병 이질(痢疾)에 감염되시어 8월 5일 묘시(卯時)에 돌아가셨는데, 수는 74세이다.
선비께서 14세 때인 정해년(1707, 숙종 33)에 마진(麻疹)을 앓으시어 열이 솟아 혼절하셨는데, 그 때 마치 어떤 사람이 큰 소리로 “이 아이는 다음의 정해년에 죽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듯하였고 얼마 안 되어 깨어나셨다. 그리고 무신년(1728, 영조 4) 겨울에는 꿈 속에서 귀신이 사람 수명의 길고 짧음을 말하는 것을 보시고 선비께서 “나의 수명은 얼마인가?”라고 물으시자, 귀신이 74세라고 답하였는데, 선비께서 깨시어 그 꿈을 말씀해 주셨다. 당시 선비의 연세가 젊으시어 앞날이 매우 먼데다가 세상 사람들이 70세를 희수(稀壽)라 하기 때문에 나는 그 말씀을 듣고 매우 기뻐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물 흐르듯 하여 정해년이 점점 다가오자 걱정스럽고 두려운 마음이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는데 끝내 이 해에 돌아가셨으니 사람의 수명이 과연 미리 정해진 것이어서 그러한 것이던가. 병이 위독하실 때 약을 올리자 손을 저어 말리시며 말씀하시기를,
“수명은 약으로 연장시킬 수 없는 것이다. 나의 수명이 이미 만족스러운데 어찌 약을 먹을 필요가 있겠는가.”
하셨다. 이 때 송파(松坡)의 이모님이 오셔서 병을 보살폈는데, 선비께서 기력은 매우 약했지만 정신은 맑으시어 간혹 이야기하며 웃으시고 농담도 곁들여 하셨으니, 조금도 죽음을 슬퍼하시는 뜻을 갖지 않으셨다. 대개 선비께서는 어릴 때부터 천성이 초매(超邁)하시어 세속 부녀자들의 잗달고 좁은 습성이 없으셨는데다 고명한 식견과 정직한 품행에 실로 옛날 여사(女士)의 기풍이 있었기 때문에 죽음을 당한 때에 이처럼 조용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선비께서는 자매들 중에 셋째이신데, 외조부께서 여러 딸들 중에서 선비를 가장 사랑하셨다. 외조부께서 일찍이 네 개의 달이 함께 떠오른 꿈을 꾸셨는데, 세 번째 달은 매우 밝게 빛나는 반면 다른 달은 모두 구름에 가려져 빛이 흐릿하였다. 꿈을 깨고나서 외조모에게 말씀하시기를,
“달은 여자의 상(象)이다. 우리가 네 명의 딸을 두었고 꿈이 또한 이러하니, 이것은 셋째 딸이 필시 귀하게 될 징조이다.”
하셨는데, 그 후 다른 따님들은 모두 운수가 막히었거나 과수가 되었다. 그리고 외조모께서 만년에 선비께 말씀하시기를,
“옛날 너의 아버님의 꿈은 아마도 너의 심덕(心德)이 달과 같기 때문인 듯하다.”
하였다.
이 해 10월 7일에 선군(先君)의 묘소에 부장(祔葬)하려고 하였더니 옛 광중에 물이 찬 폐단이 있었으므로, 선영(先瑩) 국내의 자좌(子坐)의 자리에 옮겨 합장하였다. 급작스럽게 상사를 치르느라 자리를 고를 여가도 갖지 못하여 임시로 장례를 모신 것과 다름없기에 애통하고 박절한 마음이 더욱 간절하다.
선비께서는 3남 4녀를 두셨으니, 장남은 바로 불초자 정복(鼎福)인 나로서 감찰(監察)이고 창녕(昌寧) 성순(成純)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며, 둘째는 딸인데 어려서 죽었고, 셋째는 딸로서 동복(同福) 오석신(吳錫信)에게 출가하였으며, 차남 재득(再得)은 어려서 영특하고 총명했었으나 5세에 죽었고, 그 다음의 두 딸도 모두 요절하였으며, 막내 아들 정록(鼎祿)은 무안(務安) 박사정(朴思正)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불초자인 나는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 경증(景曾)은 생원(生員)으로 파평(坡平) 윤동열(尹東說)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3녀를 낳았고, 후취는 밀양(密陽) 박지종(朴志宗)의 딸인데 1녀를 낳았다. 나의 딸은 영가(永嘉) 권일신(權日身)에게 출가하여 3남을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정록은 2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 경연(景淵)은 광주(廣州) 이명복(李命復)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그 밑의 자녀는 모두 어리다. 오석신은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 순(珣)은 연안(延安) 이세연(李世延)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나는 어려서 질병을 많이 앓았으므로 선비께서 애써 길러주심을 받아 성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형편없는 인물로서 일을 부지런히 하여 잘 봉양하지 못했기 때문에 선비께서 일생 동안 곤궁하게 사시게 하였고, 선비의 마음을 위안시켜 드릴 만한 일이라고는 한 가지도 한 것이 없었다. 요행으로 음사(蔭仕)를 차지하여 몇 말의 녹봉을 받게 되었으므로 영광의 녹봉으로 봉양해 드리려는 기대를 가졌었는데, 곧바로 또 병으로 직임을 그만두게 되어 줄곧 자식의 병에 대한 걱정만을 끼쳐 드린 채 지극한 심정을 펴지 못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그지없이 애통한 일을 당했으니 아, 어떻게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지금 나의 병세가 한창 심해지고 있는데 만약에 갑자기 죽어 선비의 훌륭한 덕행을 기록할 수 없게 된다면, 이것은 나의 불효를 거듭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이상과 같이 사실을 대략 기술함으로써 후세에 말을 전하는 군자(君子)에게 고하여 알려 주고 채택하기를 기다린다. 경인년(1770, 영조 46) 4월 26일 불초자 정복은 삼가 행장을 쓴다.
先妣恭人李氏行狀 庚寅
先妣李氏。系出璿源。獻陵別子孝寧大君靖孝公諱𥙷之後。大君生寶城君諱㝓。寶城生栗原君敵愾功臣桓襄公諱悰。栗原生呂陽君諱子謙。呂陽生龍岡縣令贈吏曹判書全城君諱薱。全城生忠勳經歷贈工曹參議諱樸。參議無子。以兄遂安郡守諱櫓子奎賓爲後。官昌寧縣監。贈戶曹參判。參判生竹山府使同知中樞府事諱滌。以武勇顯。剛毅有大節。忤勳相金瑬。宦不達。丁丑後。杜門謝世以卒。於先妣爲高祖。曾祖諱尙元。禁府都事。祖諱榮漢。成均進士。能文善書。有高行。考諱益齡。性寬和好施與。隱德不仕。妣靑松沈氏。僉樞諱儒俊之女。同敦寧諱逢源之後。通達沉厚。婦德克備。先妣以肅廟甲戌閏五月初六日壬申辰時。生于漢城。禀質明秀聦悟。甫晬能言。見僮婢對杵。計數以相戱。先妣效之。自一至十。歷數不差。傍人以爲偶然。累試如初。六歲。通國音諺文。七八歲。代長者爲書。寒暄外叙情論事。各得其宜。女工精巧贍敏兼人。九歲。丁外王考憂。哀毁踰節。護喪者以其年幼不製衰。先妣懇乞製服。朝夕哭參如禮。觀者無不感歎。年十七。歸于我先君。入門以後。承事舅姑。罔或有違。昧爽盥櫛。必供晨羞。如値不安節。藥必手煎。食必親餁。晝夜侍候。疾已復初。王考器重之。事無大小。無不與議。至如仕宦進退之節。有非婦人所可知者。必詢問之。祖妣素嚴峻。不少假人。先妣務隆孝敬。終始不怠。祖妣暮境寢疾。便旋須人。先妣至親濯裙牏。不以褻穢示人。祖妣感其誠意曰。予不知汝誠孝之至此也。家業素狹。先君喜客好施。必奉承無難意。不肖儕類若至。則亦必具羞曰。古有截髮剉坐薦而待子友者。吾竊慕之。鞠養子女。雖甚愛重。義方斬然。自幼稺敎以法度。尤令致謹於義利之分曰。凡利己之心。人皆不敎而能。况爲父母者導之以利。徒長慾心。弊將奈何。是以不肖輩不敢有私蓄。待人接物。絶去畦畛。不事表襮。雖欲害我者。必盡誠遇之。祖妣私親孽屬。有孀居無依者。來住我家。其人素多口。先妣累値難安之端。而後日復來。先妣遇之不以色。其人感服。自茂朱遷居時。里媼數人。攀行不忍別。涕泣不已。御奴僕。恩威兼行。必軫其飢寒。故莫不畏服。鄰里有急難者。隨力周救。雖傾夕貯而與之。不以爲懷。然而性廉潔淸介。未嘗一事求人。至如蔬果微物。不輕受焉。是以人不敢以非義干之。聞人有嗜利忘義。趨勢附時。耻若凂己。見人家婦女有取利逐什一者。必斥之以爲戒曰。婦女之行。無非無儀。惟酒食是事。如以殖貨名。豈閨閫美聲耶。東俗雅不使婦女學文。故先妣雖不學習文字。而聦明絶人。自幼好觀古事。中國自上古至皇明。東方自麗末至近世。國之治亂。人之賢邪。無不淹貫。至於諺傳小說。無慮累百家。一覽輒記。終身不忘。晩來常曰。小說家流。皆假做立說。無一眞者。亦足以溺人心術。不可觀也。常誡婦女輩曰。婦人悖德。妬忌爲首。妬忌之至。至於無所不爲。而終使貽累於丈夫。可不愼哉。安於儉素。衣服必取完潔曰。今世衣度。狹袖淺綠色。稱曰時體。此近服妖。不可效也。雅有鑑識。論事是非。後皆有驗。我外祖妣墓在衿川。舅氏居靈光。不能以時省墓。而墓祀多闕。先妣每痛之曰。女子雖出嫁。生我之恩。豈可忘也。每當節祀。必掩泣懷痛。使不肖輩隨時省掃。姨母於先妣爲季。而居松坡。早寡貧甚。先妣以時周急。不計家之有無而盡心焉。姨母感之曰。姊氏友愛之篤。人所難及。舅氏欲分若干田業。先妣曰。他則可矣。無以我爲也。若必欲分。斥此爲衿川墓田可也。終不受焉。先妣氣禀素強無疾病。而累産失攝。中年以後。疾症常見。自戊辰冬。得風虛之疾。藥治無驗。彌留至二十年。而丁亥閏七月朔。偶感輪行下墜之疾。八月初五日丙寅卯時卒逝。壽七十四。先妣年十四歲丁亥。患麻疹。熱盛昏窒。若有人高聲言是兒當以後丁亥死。未幾而甦。戊申冬。夢有鬼物能言人壽夭。先妣試問余壽幾何。答云七十四。先妣覺而言之。其時先妣年少。前塗甚遠。而世人以七十爲稀壽。故不肖聞甚喜之。歲月如流。漸迫此歲。憂懼之懷。夙宵不已。竟以是年而卒。人之壽命。果有前定而然耶。疾革。進藥則搖手止之曰。命不可以藥延。壽已足矣。何必爲也。時松坡姨母來視疾。雖氣力綿綴。而神識不昧。間與談笑。雜以詼諧。少無怛化之意。盖其自幼天性超邁。無世俗婦女瑣細隘陋之習。而見識之高。志行之正。實有古女士之風。故正終之際。能從容如此。先妣於行居三。外王考諸女中最愛之。嘗夢四月並出。而居第三者光明輝耀。餘皆昏翳。覺而語外王母曰。月女象也。我有四女。而夢又如是。是三女必貴也。後諸女皆窮寡。外王母晩來甞謂先妣曰。昔歲之夢。盖以汝心德似之也。以是年十月初七日。將祔先君墓。舊壙水患。移奉合窆于先塋局內子坐之原。臨喪倉卒。未暇擇地。殆同權厝。痛迫尤切。有三男四女。男長卽不肖鼎福監察。娶昌寧成純女。次女幼亡。次適同福吳錫信。次男再得幼穎慧。五歲而歿。次二女幷夭。季鼎祿娶務安朴思正女。不肖有一子一女。子景曾生貟。娶坡平尹東說女。生一男三女。後娶密陽朴志宗女。生一女。女適永嘉權日身。生三子幷幼。鼎祿生二子三女。子景淵娶廣州李命復女。餘幷幼。吳錫信生一男一女。男珣娶延安李世延女。鼎福幼多疾病。被先妣辛勤鞠養。至于成立。而不肖無狀。不能服勤致養。使先妣一生窮窘。無一事可以慰安。倖窃蔭仕。沾得斗祿。庶有榮養之望。旋又癃廢。長貽惟疾之憂。至情未伸。遽罹終天之慟。嗚呼尙忍言哉。鼎福病症方劇。若致奄忽。使先妣懿德無紀。是重吾不孝也。玆敢畧述事實如右。以告于立言之君子。聽其採擇焉。庚寅四月二十六日。不肖子鼎福泣血謹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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