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9시 뉴스
검은 비닐봉지를 풀자
온통 푸른곰팡이로 덮인 귤 몇 개
완벽하게 썩어 물컹하게 고여있다
어느 모임에서
누군가 쥐어 준 귤 봉지
부엌 한쪽에 두곤
하루 이틀 ...일주일
검은 봉지는
가구처럼 늘 거기 있었고
보이면서도 보이지 않는 후회처럼
까마득히 잊혀져 갔다
귤빛 생애에도 긴 편지를 쓰던 시간 있었겠지
흰 꽃 피우며 둥근 희망 밀어 올리던 절정도 있었겠지
왁자했던 우리 모임의 웃음소리도
온몸으로 기억했겠지
뭉그러져 다시 물로 돌아가는 순간까지
둥근 몸 지키려고 기도도 했겠지
햇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지하 단칸방
밀린 고지서와 빈 약봉지들이 흩어져 있는
발견 당시 무관심으로 완성된
이웃 할아버지의 마지막 페이지
9시 뉴스가 끝나가고 있었다
<2>술 취한 날
나 다시 태어나면 절대 시는 안 쓸거야
하늘과 바다와 별 따위 쳐다도 안 볼거야
하늘 바다 별 몽땅 팔아서 돈 모을거야
아니 몸을 팔아서라도
얼굴 모두 뜯어 고칠거야
그리고 대가리 텅텅 빈 돈 많은 놈이나
권력 있는 놈들 옆구리에 끼고
기생처럼 한바탕 놀아볼거야
낯짝만 반반하면 모두 흐물흐물해지는
골 빈 사내들 몇 놈쯤 무릎 꿇리는 거
누워 떡 먹기지
그 쉬운 걸 왜 여태 모르고 살았나 몰라
힘 있는 놈 치마폭에 감추고
그 힘 복사하며 사는 것도 능력이지
착하고 바르게 살면 바보 취급 당하는
개 같은 세상에
사람들한테 욕 좀 먹으면 어때?
그거 다 부러워서 그러는거라고
과거 있는 여자는 용서해도
못생긴 여자는 용서할 수 없다는 웃기는 세상
이제 시 쓴다고 밤늦게까지 앉아
쉰 밥처럼 하품하는 일 따위 안 할 거야
나 다시 태어나면 몇 번이고 세숫대야 갈아엎어
뻔뻔한 마네킹 같은 면상 튕기면서
겁대가리 없이 살아볼 거야
딸꾹,
이모, 여기 처음처럼 한 병 추가요
<3>*너와집
김 서린 거울 앞에서 옷을 벗는다
누덕누덕 빈 집으로 서 있는 여자 하나
전성기의 젖줄은 몰락하고
마른 껍질로 덮인 너와집 한 채
쓸쓸히 보듬어보는 육체라는 집
문틈마다 헐거워져 조금씩 흔들리는
미안하다
너를 팔아 남자를 얻고
새끼를 품어 여자가 되었으나
남은 것은 밑진 장사처럼 온몸이 적자다
아무리 생각해도
순한 너를 앞세워 한 생을 망쳤으니
어찌하랴
목젖이 보이도록 웃었던 날도 있었다만
네 노동에 배만 채웠던 나는 누구인지
지금이라도 시간을 수리할 수 있다면
전셋집이라도 빼서 네게 바치고 싶다
어떤가 몸이여
*김사인의 <노숙>을 차용함
<4>콩나물을 다듬다가
신문을 펼치고 콩나물을 다듬다가
우연히 신춘문예 당선작 시를 본다
막 새 차를 뽑아
설레는 마음으로 차 문을 열 때처럼
시의 길을 천천히 따라가 본다
낯선 곳을 여행하는 마음이 금세 불편하다
곳곳에 이해 할 수 없는 모국어에
길을 잃고
오후는 구겨진다
그들만의 파티처럼 새 차는 반짝거리기만 할 뿐
나를 태워주지 않는다
쓸데없이 앞 유리창을 한 번 닦거나
신차 설명서 같은 심사평을 읽어보기도 하지만
이미 초라해진 나는
어디쯤에서 이 난해한 차를 세울까
두리번거리다
시든 콩나물 사이를 빠져나온다
어느새
당선 소감으로 웃고 있는 얼굴 위에
콩나물 대가리 뚝뚝 떨어진다
<5>퇴행성 관절염
드디어 떠돌이별 하나
무릎에 품고
나 절룩거리며 가네
퇴행성이라는 말
어쩐지 기분 나쁘네
하늘의 어느 별 이름 같은
천왕성이나 해왕성 닮은
태행성으로 부르고 싶네
내게서 까마득히 떨어져 있던
별 하나
반세기를 걸어 내 무릎에 당도한
눈물겨운 행성이네
나도 반세기를 걸어
답장처럼 만난 별이었네
가난하게 부은 무릎 속에
닳고 닳은 빛 잃은 별 하나로 앉혀 주고 싶네
앉았다 일어나는 밤하늘에서
아프게 부스러지는 별빛들
그래도 퇴행성이라는 말은
어쩐지 기분 나빠
태행성이라는 우주별로 안고 걸어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