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라는 말이 있다. 나는 형편이 된다면 아내와 둘이 배낭을 메고 전국 방방곡곡을
여행하고 싶었다. 올 초부터 서울둘레길에 이어 강화나들길을 단 둘이서 완주하고 세 부부가 팀을 이루어
경기둘레길 850km를 걷는 도중에 그간 인연이 닿은 둘레길 동행자로 부터 "2022 dmz 250km 통일걸기"
소식을 들었고 바로 신청을 했다.
나는 하사관으로 현역에서 근무를 하던 중에 부대장의 추천과 시험에 합격하여 장교 교육을 받고 임관하여
첫 임지로 비부장지대에서 근무를 했다. 1968년 1월 21일 북한의 김신조 일당이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하기
위하여 공비 31명이 내려올 때 북한의 GP가 내가 근무하던 대한민국 GP의 정면으로 담당이었다.
또한 현역으로 근무 시 도라산과 JSA를 연결하는 진지 공사의 현장에서 바로 광주 보병학교로 장교 교육을
받으러 갔기에 DMZ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애착이 많이 있었다
또한 2004년도에 "백두에서 한라까지" 라는 리본을 매달며 단독으로 백두대간의 종주를 꿈꾸며
지리산에서 출발하여 소백산까지 왔으나 (사이트-한국의 산하-백두대간 종주기-은행정박경훈) 역부족으로
중단했다가 2017년도에 고교 동문 산악회의 일원으로 이기령까지 동행을 하다 발목이 부러지고 이어 허리의
통증으로 1년 반 이상 치료를 받았고 서울둘레길 100인 원정대 11기로 재활을 하였었다.
이어 강화나들길을 카페인들과 동행을 하였으나 도중에 코로나 사태로 중단이 되어 홀로 강화나들길을
완주하고 계속 북한산둘레길 한양도성길 경기평화누리길 고양누리길 등을 홀로 걸었고 카페인 몇몇이 또는
둘 셋이 양평물소리길 의주길 삼남길 군포수리길 성남누비길 인천둘레길 시흥늠내길 등등 서울 경기 일원의
웬만한 둘레길은 걸었고 50대 초반에 동아마라톤 풀코스를 제한시간 이내에 완주를 한 바도 있다.
40~50대는 동네 산악회의 대장으로 아즘씨들을 이끌고 전국의 산들을 매월 1~2회씩 올랐으니 나름
걷는 데에 대한 지식과 체력은 자신이 있었다. 아울러 누구보다도 내 나라 내 땅에 대한 애착과 관심이
커서 이런 행사에 꼭 참여를 하고 싶었다. 이제는 젊었을 때 품은 꿈을 펼칠 시기이기도 했다.
헌데 이제나 저제나 기다림은 포기한 상태로 한 달 가까이 되었을 때 드디어 선발되었다는 문자가 왔다.
정권이 바뀌었다. 선발이 되었다고 하나 정권이 바뀌어 행사 자체가 취소될 수도 있다는 생각도 했다.
이런 프로젝트는 주변 정세에 민감하고 더우기 막 정권이 바뀌었으니 불안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 홀로
하루에 30KM 이상의 백두대간을 걸어본 사람으로 정말 절실히 걷고 싶고 보고 싶은 내 나라 내 땅이다.
한 달 십여일 만에 선발된 인원에 의한 카카오 단톡방이 개설되었고 단톡방으로 비대면 ot를 거쳐 각종
준비사항이 통보되었다. 회비는 선발을 통보 받으며 즉시 10만원을 계좌에 입금하였고 그 이후 단 일원도
공식적인 지출은 없었다. 준비물이 많았다. 백두대간을 걸었고 마라톤을 완주 했었고 전국의 웬만한 산은
다 올랐을 정도로 체력은 자신하나 250KM를 매일20KM로 13일간 걷는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로 생각였다.
준비물이 많았다. 13일간 생활을 해야 하고 매일 20KM를 걸어야 하는데 준비물이 당연히 많을수 밖에 없다.
헌데 그것을 어떻게 배낭에 담아 걷느냐는 게 문제였다. 정보가 없었다. 내가 이글을 졸린 눈을 비비며 억지로 참으며 쓰는 것도 다음을 위한 정보의 제공이다. 단편적인 글은 있으나 13일의 기록은 없는것 같았다. 기실
이글을 매일 휴대폰으로 써서 경기평화누리길 카페에 게시를 하며 괜히 시작했다고 후회를 많이 했다.
남들은 9시쯤이면 모두가 모든 정비를 끝내고 일과를 끝내고 잠을 자는데 홀로 잠자리 밖으로 나와 모기를
피해 침침한 눈으로 조그만 휴대폰에 글을 쓴다는 게 결코 쉬운일은 아니다. 나도 매일 20KM를 걸었으니
남들처럼 정비를 해야하고 나이도 더 먹었으니 피곤함도 덜하지는 않았다. 더우기 사진을 올리고 설명하는
식이 아닌 거의 기억에 의한 기행문이었으니 내가 지금에사 생각해도 바보 미련 곰탱이 같은 일이다.
보편적으로 먹는 것은 집보다 낫다. 물론 군대보다 낫다. 때로는 메뉴가 열 세 가지나 나왔고 최소라고 해도
대여섯 가지 이상이다. 양도 얼마던지 배불리 먹을 수 있고 반찬도 넉넉했다. 후식도 끼니마다는 아니지만
수박 자두 참외 팥빙수 옥수수 감자 등등 잘 나왔으니 먹는 것만큼은 그리 불편불만은 없겠다는 생각이다.
잠은 네 명 다섯 명이 하나의 방을 사용하였으나 어디에나 그런 사람은 꼭 있듯이 자기만 편하자는 한 사람
때문에 간혹 얼굴 찌프리나 양보하고 단합만 잘 되면 에어컨 가동되는 시원한 방에서 모기 걱정 없이
얼마든지 편안한 잠을 잘 수 있다. 때로는 10명이 이상이 한 방에 배정을 받기는 하였으나 그렇게 잔 적은
없었고 코로나 이후 폐쇄된 시설을 새로 사용하며 작은 시행착오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걸는 도중에 휴식 시간이면 운영팀에서 일반 편의점에서 파는 얼음이 담긴 통에 아메리카노나
복숭아 애이드 등 각종 냉 음료나 설레임 등 찬 음료를 매일 1회 이상 제공했다. 설레임을 그렇게 시원하게
맛있게 먹은 적이 있었나 싶고 아이스크림도 정말 꿀맛이었고 시원함이 배가 되어 핥고 빨고 또 핥았다.
보온병에 냉장고에서 얼음을 넣고 걷는 내내 찬 물을 먹거나 냉커피를 준비하여 마시는 여성분들도 있다.
걷는 일과가 끝나고 비를 맞고 걸은 날이면 신발 말리기에 여념이 없다. 대개는 가벼운 등산화를 신었거나
트레킹화를 신었기에 머리 손질하는 드라이기로 신발을 말렸다. 나는 등산용 샌달 하나로 해결했다.
일과가 끝나면 식사를 하러 가고 세탁실에 다녀야 하는 등 슬리퍼도 필요하다. 반바지나 두 개에 팬티
두 개로 13일을 보낸 동료도 있으나 절대로 면으로 된 드렁크 팬티는 쏠림에 대비해 사용 불가다.
바지는 취향에 따라 반바지 긴바지 포함 셋이면 족하고 여자들은 일과가 끝난 후 입을 평상복이 필요하다.
바지로 해도 되고 원피스 등 치마도 좋다. 티는 바지와 비례하면 되고 양말은 두툼한 면양말 속에 얇은 발가락 양말이 괜찮다. 망사로 된 기능성 발가락 양말을 속에 신고 겉에 등산 양말을 신은 것도보았다. 팬티형 바지
하나로 보낸 동료도 있었다. 모자와 티 하나를 제공받았다. 빨랫줄을 챙기지 않아 챙긴 내가 우월했다.
의료진 두 명이 앰브런스와 같이 대열의 뒤를 따르며 교통 정리를 도우며 매일 석식 후에 시간을 정하여
치료를 하여 준다. 45인승 대형 관광버스가 모든 일정에 동행을 한다. 매일 걸을려면 매일 정비를 해야한다.
하루 세 끼는 먹어야 하고 세탁을 하고 샤워를 하고 휴식을 취하고 잠을 자야하고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일이기에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이동수단인 버스는 절대 필수적인 요소이다. 모든 짐을 배낭에 넣으면
10kg 가까이 되는데 젊은 청춘도 버거운데 노년층이 어찌 매일 20km를 버틸 수 있겠는가 없다. 숙소 이동시 버스에 짐을 두고 배낭은 최소한의 필요 물품만 챙긴다. 우산을 사용하지 않으나 우산은 매우 필요하다.
돈이 많아도 돈을 아무리 쓴들 dmz 250km 통일걷기를 할 수 없다. 이런 행사를 만들고 기회를 준 통일부가 고맙고 행사를 진행해준 (사)길만사에게 감사함을 표한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논하기 전에 휴전의 해에 태어난 휴전동이로 아직 이런 여름휴가는 없었다.
친구들에게 가끔 말을 한다. 비록 동족상잔의 비극이 끝나지 않은 휴전상태이지만 죽는 날까지 또 다시 그런 비극이 없다면 우리 세대는 진정 세계 속에 대한민국을 빛낸 복받은 세대로 긍지를 지니고 살 수 있다.
12박13일정의 통일걷기를 끝나고 나의 만보기는 353,000보 259km가 표시되어 있었다.
감사!
첫댓글 박선생님 잘지내죠? 룸메이트 6조 김윤호입니다 ㆍ 선생님 덕분에 빨래 잘 건조했습니다 ㆍ 이번 2기 참가자중에는 예비 장교분들이 많아 보입니다 ㆍ격려 ㆍ응원해 주세요 ㆍ 날씨가 무더우니 너무 무리하게 걷지 마시고 늘 건강하세요 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