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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5:1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를 하되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 여기 "내가"라는 것은 선지자 이사야 자신을 가리키고, "나의 사랑하는 자"라는 말은 하나님을 가리킨다. 선지자가 하나님을 가리켜 "나의 사랑하는 자"라고 한 이유는, 그가 교회를 대표하여하는 말이니 교회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부부 관계 같음을 표시하는 말씀이다. 아 2:16에 말하기를,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라고 하였다. 엡 5:25-33 참조. 이렇게 교회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그 사랑 안에 있지 아니하므로 열매를 못 맺는다. 교회로서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함과 같다. 예수님께서 포도나무로 교회를 비유하여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라고 하셨다(요 15:7-10).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라고 하셨다(요 14:21). 이 모든 말씀을 보면, 교회가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면 그를 사랑하는 것이고 그 결과로 열매를 맺는다(요 15:5).
여기 "포도원"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 곧, 교회를 가리킨다. 포도원을 재배하는 목적은, 재목을 얻기 위함이 아니고 열매를 거두기 위함이다. 포도나무는 집을 짖는 재료로서는 적합하지 않고 그 열매만이 소용된다. 신자들은 포도 넝쿨과 같아서 인품(人品)으로는 세상 앞에 자랑할 바 되지 못하여도 주인이 원하는 열매를 포도송이 처럼 가득하게 맺힌다면 그 목적을 다 이룬다. 과실 중에 포도처럼 열매를 가득히 맺히는 것은 많지 않다. 시 80:8-11;마 21:33;요 15:1-2 참조. "기름진 산"은 가나안 땅을 비유한다.
사 5:2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 그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혔도다 - "돌을 제하고"라 한 것은 하나님께서 가나안 민족들을 제거하셨다는 의미이고, "그중에 망대를 세웠다"함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표현된 구약의 종교 제도를 가리킨다. "그 안에 술틀을 팠다"는 것은, 칼빈(Calvin)에 의하면 교리(敎理)를 제정(制定)했다는 의미이고, 빤스(Barnes)에 의하면 제단을 의미한다고 한다. 특별히 히브리 원문에는,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라는 문구에 뒤이어 "또한"(웨감)이란 말이 있다. 이와 같은 표현이 나온 목적은, 그 포도원이 건설되기까지 공력이 많이 든 사실을 보여주려는 것이다(Delitzsch).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부터 구출하여 가나안땅으로 인도하여 양육하시기에 많은 공력을 드리신 것이다(시 80:8,9).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그의 기대에 어긋나서 의(義)의 열매를 맺히지 못했으니 이는 들포도를 맺은 것과 같다. 여기 이른바 "들포도를 맺혔"다는 것은 얼핏 보면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다. 참포도나무가 들포도로 맺힐 리가 있을까?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시적 표현(詩的表現)인 것을 기억해야 된다. 참포도의 열매로서도 잘 익지 못하였든지 혹 병들어서 들포도처럼 무가치하게 된 것을 가리킨 것뿐이겠다.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와 같은 탄식을 많이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많은 공력을 들여서 그의 백성을 양육하셨지만 그들이 그의 기대에 맞는 열매를 맺지 못한 사실에 대한 탄식이다. 요 1:5를 보면,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하였고, 11절에는 말하기를,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다"라고 하였으며, 요 3:32에는 말하기를,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 하였으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라고 하였다. 또한 마태복음에서 볼 수 있는 대로, 종교적 특권을 받은 층계의 사람들을 비유할 수 있는 맏아들이 포도원에 가 일하라는 아버지의 부탁을 받고 대답하기를,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한" 사실도 같은 내용을 보여준다(마 21:28,29).
이제 우리는 생각하여 보자! 은혜를 많이 입은 자들이 어찌하여 열매를 못 맺는 일도 있는가? 그것은, (1) 인간이 은혜를 많이 받는 때에 교만하여지기 쉬운 근성이 있는 까닭이고, (2) 은혜를 많이 받으면 은혜를 심상 시(尋常視)하여 은혜와 화합(和合)할 줄은 모르고 자기대로 굳어지는 강퍅 성이 있는 까닭이다. 이와 같이 되는 사실은 인간의 부패가 어떻게 심각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 5:3,4
여기서는 여호와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으로 나타나 자기의 포도원에 대하여 심판하시되 유대인 자신들(포도원)더러 심판해 보라고 하신다. 그때의 유대인들(포도원)의 죄악은, 너무도 명백하고 사무쳤기 때문에 자신들이 그것을 자백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자정죄(自定罪) 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다. 하나님이 주시는 벌은 언제나 이와 같이, 벌 받는 자들 측에서 억울하다고 할 것이 없을만한 처지에 임하는 것이다.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라고 한 말씀은, 하나님으로서 그 포도원에 대하여 더할 나위 없이 최선을 다하셔서 재배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택한 백성의 각자 처지(各自處地)를 따라 좋은 열매를 맺을 만큼 은혜를 베푸시는 법이다.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힘은 어쩜인고". 여기 "들포도"라는 말은, 히브리 원어로 뻬우쉼이니 히브리어 바아쉬라는 말(냄새가 나쁘다는 뜻)에서 유래(由來)되었다. 이것은, 열매가 작을 뿐 아니라 냄새가 좋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최선을 다 하셔서 크신 은혜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저희가 열매를 맺지 못했으니 그 책임은 저희 자신에게만 있다. 그들이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한 원인은 그들이 그 받은 은혜를 멸시한 사실에만 있다.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멸시하면, 필경 하나님께서는 은혜 주시기를 계속하시지 아니하실 것이다. 그것은 다음에 나오는 5,6절이 보여준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도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사실을 몰라보고 그 받은 은혜대로 살지 않는 자는, 한 달란트 받았던 자가 주님을 굳은 사람으로 오해하고 그 받았던 한 달란트를 땅속에 감추어 두었던 것과 같다. 그런 자는 무익한 종이니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김이 된다(마 25:24-30). 한 달란트 받았던 자가 언필칭 그 주인을 두려워하여 그 달란트를 땅 속에 감추어 두었다가 가져왔다고 하지만(마 25:25), 그것은 핑계뿐이고 사실상 그가 그 주인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그것은 그 주인이 지적한 사실이다(마 25:26,27). 그러므로 그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실상 주인이 주신 은혜를 멸시한 자임에 틀림없다.
사 5:3
서로 창화 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 여기 "창화"라는 것은 서로서로 노래를 맞추어 부른다는 뜻이다. 세 번씩이나 "거룩하다"(* =카도쉬)고 말한 것은 삼위일체(三位一體) 되신 하나님에게 해당시키는 의미를 가진다고 한다. 이것이 정확한 해석인지 아닌지는 불문하고 생각되는 것은, 세 번 말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대하여 "말할 수 있는 힘"을 다하여 말한 것을 가리킨다. 거룩한 하나님이란 말이 이사야서에 도합 29번 나오는데 이것이 소위 제2 이사야 부분(40장-66장까지를, 그릇된 학설에서 이렇게 부름)에 17번 나오고 있으니 그 부분이 역시 첫 부분(1장-39장)을 쓴 동일한 저자(著者)로 말미암아 기록되었다는 것이 알려진다. "거룩하다"는 것은, 그가 피조 세계에 속하시지 않고 초월하여 계심을 가리키는 동시에 죄를 전연 용납지 않으시는 성품을 의미한다.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다"함은, 이렇게 거룩된 하나님을 땅에 있는 만물이 칭송한다는 의미이다. 범죄 한 인간들은 그를 모르나 만물은 피조 성격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을 보여주고 있다. 보이는 만물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거룩하신(초자연적이신) 권능으로 말미암아 나타나게 된 것이다(히 11:3). 스랍들은 이 말로써 은근히 유대인들의 좁은 생각을 꾸짖는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자기들에게 전속(專屬)시켜 교만하여졌으므로 도리어 하나님 말씀에 대하여 생명 있는 반응(反應)을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9,10). 거룩하신 하나님에게 대하여 사람들은 잘못 생각하기를 어떤 지역(地域)에 갇힌 분으로 생각하고, 또 혹은 자기들에게만 전속(專屬)된 분인 듯이 그릇되어 생각한다. 하나님을 이렇게 생각하는 교회는 온 땅에 그 영광을 충만케 하신 하나님을 오해한 것이 분명하다. 그런 오해 속에서 교만이 나옴에 따라 하나님 말씀의 섭취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런 무생 명한 교회는 결국 성결을 보존하지도 못하고 도리어 세상에게 삼 키우고 만다.
사 5:5,6
5절 초두에, "내 포도원"(카르미)은, 곧, 선지자의 포도원을 의미하는데 5:1의 사상(사랑하는 자 곧, 하나님의 포도원이라고 함)에 비추어 너무 돌연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선지자와 하나님과의 신비적 연합(unio mystica) 때문에 나온 말씀이다. 이는 마치 창세기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자기를 여호와 자신인 듯이 지칭(指稱)함과 같다(창 18장 참조).
이 구절들(5,6)은 하나님의 은혜를 배척한 이스라엘에 대하여 그의 온갖 은혜를 거두시겠다는 경고이다. 이 사실을 두 가지로 진술하였으니 곧, (1)"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케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시 80:12,13 참조). 이것은 외국 군대가 와서 유대를 망하게 할 것을 가리킨다. 그때의 유대 나라는 오늘날 교회와 같아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때마다 세상 세력의 침해를 당하였다.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대로 신앙생활을 파수하지 않으면 무서운 속화(俗化)의 화(禍)를 받게 된다. (2) 그 나라가 "황무케"됨. 곧, 하나님의 배양(培養) 하시는 도움을 받지 못하여 "질려와 형극"(가시)이 나며 우로(雨露)의 은택을 받지 못함이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그 나라가 내부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운 간섭을 받지 못하여 내어 버리운 땅과 같이 적막(寂寞)하게 될 것을 가리키나니, 은혜가 떠난 적막한 교회와 같은 것이다.
사 5:7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사람이라 그들에게 공평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의로움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 여기 "대저"라는 말은, 히브리 원어로 키이니 윗구절에 말한 대로 유대가 황무케 될 이유를 보여준다. 이 말씀에 있어서 먼저 밝혀진 것은 포도원의 비유가 무엇임을 보여준다. 곧, 그것은 이스라엘 족속이고 그 안에 있는 나무들 곧, 포도나무들은 유대 사람이라는 것이다. 여기 있는, "여호와의"라는 말과 "그의 기뻐하시는"이란 말은, 이스라엘 족속과 그 각 개인들에게 대한 하나님과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준다. 그렇게 밀접한 처지에서도 범죄 하면, 하나님의 징벌을 받게 된다는 것이 여기 암시되어 있다. 하나님은 지공 무사(至公無私)하시어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 채찍을 아끼시지 않는다. 히 12:7-13 참조.
"그들에게 공평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의로움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서 요구하시는 것이 종교적 의식(儀式)보다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뜻에서 나오는 인간관계의 옳은 행실이라는 것이 알려진다. 하나님 경외(敬畏)에 열중한다고 표방하며 그 예배 의식은 잘 지키지만 인간관계의 도덕을 등한히 하는 일은 신자들 가운데 흔히 있다. 그것은 바리새 교인의 고르반 죄와 같은 것이다. 마 15:3-16 참조.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을 향하여 기대하시는 것이 그들 사이에서 서로 끼리(일반 사람들에게도) 공정한 판단을 가짐이다. 여기 이른바 "공평"이란 것은 그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포학"이라는 것은, 히브리 원어로 미스파크이니 피를 흘린다는 뜻이다. "부르짖음"이란 말은, 체아카이니 이는 억울함을 당하여 토하는 처량한 호소를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사회에 대하여 의로운 일을 기대하셨지만 도리어 불의가 있었으므로 거기에서 억울함을 당한 자가 많았다. 그러므로 그때에 하나님께서 유대 민족에게 대하여심판을 내리시게 된 이유는, 저희의 잔인한 죄 때문이었다.
사 5:8
가옥에 가옥을 연하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서홀로 거하려 하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 - 여기서부터 23절까지에 이사야는 여섯 가지화를 지적한다. 본절은, 탐심으로 행하는 자들에게 대하여 화를 선포함이다. 그들은 개인의 끝없는 욕심을 채우려고 가옥과 토지를 매점(買占)하며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였다. 암 2:6 이하 참조. 여기 이른바, "빈 틈이 없도록"이라고 한 말은, 그들이 얼마나 욕심을 끝까지 채우면서 만족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탐심은 만족을 주지 못하며 도리어 불만의 불을 일으키는 것뿐이다. 알렉산더 대왕이 많은 나라를 점령하고 나중에는 통곡하였다고 한다. 그가 그렇게 한 이유는, 그 이상 더 점령할 곳이 없었던 까닭이라고 한다.
사 5:9,10
만군의 여호와께서 내 귀에 말씀하시되 정녕히 허다한 가옥이 황폐하리니 크고 아름다울지라도 거할 자가 없을 것이며 열흘갈이 포도원에 겨우 포도주 한 바트가 나겠고 한 호멜지기에는 간신히 한 에바가 나리라 하시도다 - "내게 말씀하시되"(*=뻬오즈나이)라는 말은, 오해 없이 잘 알아듣도록 말씀하신다는 뜻이다. 그뿐 아니라 선지자 이사야는, 그의 들은 말씀이 자기의 사상과는 아주 다른 것으로서 자기 옆에임접(臨接)한 타자(他者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이렇게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당할 환난이 확실함을 경고하였으니 곧, 가옥과 전토에 대하여탐심을 부리는 자들의 경영이 헛되다는 것을 보여준다. 장차 바벨론의 침략으로 인하여 유대 땅은 황폐하게 될지니 크고 아름다운 가옥들도 소용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흉년까지 들었으므로 밭의 소산이 핍절(乏絶)하여질 것이라고 한다. "정녕히"라는 말은, 히브리 원어로 임로이니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라는 맹세를 줄인 말이다(Delitzsch). "거할 자가 없을 것이며". 이 말씀에서 "없을 것이며"(메에인)란 말은, 아주 강한 부정(否定)이다.
"열흘갈이 포도원에 겨우 포도주 한 바트가 나"는 것은 말할 수 없는 흉작이다."열흘갈이"(아세레드 씨멜데)는 소(牛)로 열흘 동안 갈 수 있는 땅의 면적(面積)이다. 이와 같이 넓은 땅에서 겨우 "한 바트"(40斗) 밖에 생산되지 못한다는 것은, 얼마나 큰 흉작(凶作)인가? 그리고 "한 호멜(10바트=400斗) 지기에는 간신히 한 에바(40斗)가 나리라"라고 하였으니 뿌렸던 종자도 못걷우는 형편이다.
탐심으로 불의하게 재물을 모으는 자는, 필경 하나님의 벌을 받아 망하게 된다는 말 씀이 성경에 많이 있다.
"무릇 이를 탐하는 자의 길은 다 이러하여 자기의 생명을 잃게 하느니라"(잠 1:19). "불의의 재물은 무익하여도 의리는 죽음에서 건지느니라"(잠 10:2).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패망하려니와 의인은 푸른 잎사귀 같아서 번성하리라"(잠 11:28).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잠 23:4,5).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망령되어 얻은 재물은 줄어가고 손으로 모은 것은 늘어가느니라"(잠 13:11). "처음에 속히 잡은 산업은 마침내 복이 되지 아니하느니라"(잠 20:21).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이라 곧 불려 다니는 안 개니라"(잠 21:6).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필경은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렘 17:11).
사 5:11,12
둘째로, 언제든지 연락(宴樂)에만 빠져 있는 자에게 임할 화에 대하여 말한다. 그들은 일하지 아니하고 술만 먹으며, 음악 소리만 즐기는 자들인데, 그들은, "여호와의 행하심을 관심치 아니하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생각지 아니"한다. 연락을 즐기는 자는 그 매력 있는 쾌락에 이끌려 하나님보다도 그것을 더 사랑하는(딤후 3:4) 자리에 까지 이른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런 치지에서 하나님을(하나님의 소행을) 생각할 리는 만무할 것이다. 쾌락을 사랑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으니(딤전 5:6), 영적으로 죽은 자가 어떻게 영적으로 살아 계신 이를 생각할 수 있을까? 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과 원수 되는 법이다(약 4:4).
사 5:13-16
이 구절들은, 위에 말한 연락을 즐기면서 하나님을 생각지 아니하는 자들이 받을 화가 어떠한 것임을 보여준다. 그들이 화를 받게 되는 원인은 그들의 무지이다. "나의 백성이 무지"하다고 한 것은(13절 상반), 그윗절 하반절 말씀 곧, "여호와의 행하심을 관심치 아니"한다는 말씀과 같은 내용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무지"는 하나님에게 대한 무지를 가리킨다. 하나님에게 대한 사람의 무지는 모든 죄악의 근원이다(롬 3:11-18). 그와 반면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지식의 근본이다(잠 1:7). 그러므로, 시 14:4에 말하기를,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뇨 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하였다.
위에 말한 것과 같이 타락한 유대인들이 받을 징벌에 대하여 선지자는 아래와 같이 진술한다. 곧, (1) 지도자나 지도를 받는 자나 다 함께 주림(13절 하반). 죄인들이 받는 벌은 그들이 일찍이 행한 일과 관련성을 가진 불행이다. 그들이 일찍이 잘 먹고 잘 썼으니(11,12) 이제는 그와 정 반대로 극도의 기근에 빠진다. 눅 16:25 참조.
(2) 14절에서는 좀 더 자세히 앞절에 말한 멸망에 대하여 진술하였는데 곧, 그들이 잔인한 음부에 빠지듯이 멸망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특별히 그들의 자랑거리와 자신(自信)하던 것과 무엇보다 제일로 알고 즐기던 것들이 별 수 없이 멸절되는 것을 말한다. 곧, 세상에서는 그 이상 없다고 할만한 영화로운 것과 자랑할만한 많은 수와 떠들만한 세력과 하나님을 무시하고 즐기던 교만의 연락의 처지가 이제는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이 말씀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자랑거리들 때문에, 교만할 것 없다는 경고를 암시한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어서 그 공의로운 심판대로 세상 것으로 인하여 교만한 자들을 멸절시키는 심판의 때를 가지신다.
(3) 유대인들이 당할 동일한 멸망을 취급하면서 또 한 가지 방면을 말하여 주었으니 곧 그들이 그 교만하던 처지에서 낮추 떨어지는 광경이 있는 반면에 그런 심판을 하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그의 살아 계신 위엄을 보여주시는 날이 온다는 것이다. 곧, 은연(隱然) 중에, 그의 참된 높으심을 드러내시는 시기가 온다는 것이다(15,16). 교만한 죄인들이 떠드는 시기에는 하나님의 살아 계신 자취가 보이지 않는 듯하나 그들이 그와 같이 가장 높아졌던 자리에서 떨어지게 되는 심판의 날이 이른다. 그날이 바로 오래 참으시던 여호와 하나님의 일어나시는 날이다. 그날은 저 교만한 죄인들이 두려워 떠는 날이다(시 14:5).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인들의 악행을 보시고 언제든지 고요히 계신 것은 아니고, 그의 의로우신 심판으로 죄인들의 잘못을 꾸짖으시나니 그때에 사람들이 그의 거룩하심을 한번 다시 깨닫는다.
(4) 17절의 말씀이 유대인들의 당할 멸망 형편을 또 한 방면 보여준다. 곧, 바벨론침략으로 인하여 그들의 국토는 황무지가 되었으므로 거기서 양 떼들이 풀을 먹고, "유리하는 자들"(이방인들)이 거기 와서 거주하게 된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자기들 의사는 땅이 하나님의 것인 줄 모르고 언제든지 거기서 살 것처럼 범죄 하며 교만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죄인들의 교만을 깨뜨리기 위하여 그들의 애착하던 거처까지도 빼앗아 짐승에게도 주고 혹 전연 알지도 못하던 낯 선 사람에게 붙인다. 이런 일들은 유대 사람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세계만방의 어떤 나라나 단체에든지 적용시키는 심판의 벌이다. "무릇 이를 탐하는 자의 길은 다 이러하여 자기의 생명을 잃게 하느니라"(잠 1:19).
사 5:18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 이것은 셋째 화니, 이사야는 여기서 그때의 범죄자들이 범죄 하는 광경을 마치 무거운 짐짝을 끈으로 운반하는 것으로 비유하였다. 곧,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고 스스로 속아 힘 있게 죄를 범하였다. 그것은 마치 짐승이 수레 줄로 무거운 수레를 끄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것들이 줄에 의지하여 무거운 짐짝을 끄는데 전력하는 것처럼 거짓을 힘껏 믿고 죄를 범하는 자들은 그 범죄에 전력한다. 그들은 자기들 자신을 거짓에게 내어 맡긴다. 사람의 모든 범죄는 사실상 스스로 속아서 하는 일들이다. 죗값이 사망인 줄 알고야 누가 범죄 하랴? 거짓이란 것은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데, (1) 무식에서 오는 거짓이 있음. 그것은 사람이 죄악에 대한 심판이 그 얼마나 무서운 줄 모르고 범죄 함이니 스스로 속는 거짓이다. 여름날 밤중에 불을 피우면 나비들이 그것을 꽃인 줄 알고 가까이 날아왔다가 타서 죽는다. (2) 정치적인 거짓이 있음. 이것은 사람이 일시적으로 자기 죄의 정체를 보이지 않으려고 가리키는 말(詭詐)을 이름이다. 이런 사람은, 남을 속이며 거짓말로써 죄악을 잘 발달시키나니 자기도 스스로 속아서 거짓말로 형통할 줄 알고 계속 죄악을 쌓아 나아간다. 그러나 그 같이 죄를 쌓는 결국은 멸망이다. 이런 사람은 옛날에 "걸"(桀)이라는 임금과 같이 불의(不義)를 정당화시키는(言足以飾非) 말을 잘한다. 그는 필경 죄를 예사로 범하게 된다.
사 5:19
여기 있는 말씀은 윗절에 관설된 "거짓으로 끈을 삼아" 범죄 하는 자가 가지는 사상을 보여준다. 그의 거짓은 다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는 사상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조롱하기까지 하여 말하기를, "그는(하나님은) 그 일을 속속히 이루어 우리로 보게 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는 그 도모를 속히 임하게 하여 우리로 알게 할 것이라"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무시한다. 그들이 하나님더러, "그일(그 심판)을 속속히 이루"라고 조롱하기까지 하니 심판에 대한 그들의 불신앙은 알지 못하는 정도의 것이 아니고 훨씬 패역하여 업신여기는 정도에까지 이르렀으니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징벌이 당장 내릴만하다.
사 5:20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 - 이것은 넷째 화이다. 여기 선악 문제, 어두움과 밝음의 문제, 쓴 것과 단 것의 문제에 대하여바로 말하지 않고 정반대로 말하는 것을 정죄한다. 이런 잘못된 말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다. (1) 아직 빛을 받지 못한 어두움에 속한,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 옳은 분별을 하지 못하고 선을 악이라 하고 악을 선이라 한다. 곧, 그들은 하나님 본위에서 선악을 분별하지 못한다. 하나님 본위로 생각되지 않은 선은 참된 선이 아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은 선악을 바로 분변 하지 못한다. (2) 범죄 하고도 회개하지 않는 자들은 자기들의 위신을 세우기 위하여 자기들의 악을 선이라고 우겨댄다.(3) 뇌물에 팔려 타락한 재판장들이 민중에게 선악을 바로 말해 주지 않고 도리어 그릇되이 가르쳐 주는 것을 말한다. (4)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패역한 비루(卑陋)들이 당돌하게 선을 악이라고 한다.
이사야 시대에 이런 네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듯도 하다. 특별히 이 본문에서는 윗구절의 문맥을 받아 넷째 종류 곧, 패역한 비루들을 가리켰을 것이다.
"흑암과 광명"의 문제, "쓴 것"과 "단 것"의 문제는 비유적으로 말하는 것이니 결국 선악 문제를 가리키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대하여는 별다른 해석이 필요치 않다. 다만 한 가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선악의 구분은 흑암의 구분과 쓴 것과 단 것의 구분과 같이 명확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선악에 대하여 그런 구별 의식(區別意識)을 가지지 않고 막연하게 태도를 취하여 깨끗이 악을 미워할 줄도 모르고 철저히 선(善)을 사랑할 줄도 모른다.
사 5:21
여기서는 다섯째 화를 선언한다. 여기 "스스로"라는 말이 두 번 나오는데 이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기 마음을 믿는 자율주의 자들을 가리킨다. 자기 마음을 믿는다는 것은 곧, 인간 정도의 사상을 믿는다는 것이니 그것은 하나님께서 극히 미워하신다. 그러므로 렘 17:5에 말하기를, "나 여호와가 이 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권력을 삼고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라고 하였다. 잠 3:7,26:12 참조. 렘 17:9에는 말하기를,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라고 하였다.
사 5:22,23
여기서는 여섯째 화를 선언한다. 곧, 술에 취하여 가지고 불의를 감행하고 재판을불공정하게 하는 자들이 받을 화이다. 그들은 "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하며 독주를 빚기에 유력한"자라고 하였으니, 그들이 그렇게 술을 마시므로 정의감(正義感)을 떠나 방종스러워지며 따라서 뇌물을 받고 재판을 불의하게 하도록 된다. 불의를 행하는 자들은 악을 행할 준비로 술을 마시는 일이 많다. "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하다는 뜻이 그렇게 고의적(故意的)으로 술을 마심에 대하여 말하였을 것이다.
"그 의를 빼앗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의(義)를 변호해 주지 않고 도리어 허물을 씌우는 그릇된 재판을 가리킨다.
사 5:24-27
여기서는, 위의 여섯 가지 화를 받을 만한 유대인들이 바벨론의 침략으로 인하여 징벌받을 것을 가리킨다. 바벨론 침략은, 하나님이 유대인을 벌하시기 위하여 채찍으로 사용하신 것이기 때문에 이 부분에 묘사된 전화(戰禍)가 불가항적(不可抗的)의 것으로 되어 있다.
(1) 그루터기가 불에 소멸됨 같이, 또는 마른 풀이 불에 타짐 같이 유대나라는 그 멸망을 막을 수 없다고 한다. 그 이유는, 그것이 여호와의 징벌이기 때문이다(24절 하반-25).
(2) 멀리서 나라들을 불러 유다를 치게 함(26절). 멀리서 침략국이 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게 하시기 때문이다.
(3) 그 군대는 피곤을 모르고 힘 있게 싸운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그렇게 시키시기 때문이다(27절). 시 18:32-34,39-42 참조.
(4) 그들의 무력과 군력은 비상함(28-30). 선지자가 이와 같이 바벨론 군대의 강함에 대하여 말하는 목적은, 저희를 칭찬하려는데 있지 않고 저희를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깨닫게 하려는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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