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시 | 행 선 지 | 소요시간/ 거리 | 비 고 |
2013. 2.16. 09:50 | 안양전철역 | 개찰구 앞 역TV로비에서 만나서 1번출구 지하상가로 이동. | |
10:00 | 안양4동 우체국버스정류장 | 15분 / 0.5km | 10번. 11-3번. 15번. 15-2번 |
10:25 | 병목안 삼거리 정류장 | 25분 / 4km | 버스로 이동 |
10:50 | 성지도착 | 20분 / 1km | 도보 |
11:00 | 미사참례 | 10분 / 05km | |
12:00 ~13:00 | 점심식사 | ||
13:00 ~14:30 | 성지참관 | 20분 / 1.2km | |
14:30 | 약수터 | ||
15:00 | 제3전망대 | 10분 / 0.6km | |
15:30 | 출렁다리 | 30분 / 1.8km | |
16:00 | 제1전망대 | 15분 / 0.8km | |
16:30 | 병목안삼거리 | 20분 / 1.2km | |
17:00 | 안양역 | 20분 / 1.2km | |
18:00 | 용산역 |
충청도 홍주(洪州) 땅 누곡(樓谷, 지금의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의 다락골)에서 부친 최인주(崔仁住)와 모친 경주이씨(慶州李氏)의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집안이 원래 교회창설 시대 때부터 천주교를 믿어 온 집안이라 어려서부터 열심히 신앙 생활을 했고, 성장해서 '내포(內浦)지방의 사도' 이존창(李尊昌)의 후손인 이성례(李聖禮, 마리아)와 혼인한 뒤, 가족들과 상의하여 교우들이 많이 살고 있는 서울의 벙거지골(笠洞) 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박해와 외교인들의 탄압 때문에 가산을 버리고 서울을 떠나 강원도 금성(金星), 경기도 부평(富平)을 거쳐 과천(果川)의 수리산(현재의 안양시 만안구 안양9동 수리산)에 정착하였다. 여기에서 회장으로 신자들과 교우촌을 돌보며 오직 신앙생활에만 전념하였다. 그리고 1836년에 큰 아들 최양업(토마스)를 모방(Maubant, 羅) 신부에게 신학생으로 맡겨 마카오로 유학보냈다.
이곳에서 그는 자기의 본분을 지키며 종교서적을 자주 읽고 가난 중에도 애긍시사를 하니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여 그의 권고를 즐겨 듣고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려고 멀리서도 찾아오곤 하였다. 최 토마스 신부는 훗날 다음과 같이 회고 하였다. “저의 부친은 자주 묵상하고 신심서적을 대하셨으며, 언제나 종교와 신심외의 것은 말하지 아니하셨으며, 아버지의 말씀은 힘 있고 설복시키는 능력이 있어 모든 이에게 천주의 사랑을 심어 주셨다.”
기해박해가 엄습하고 또 서울과 인근 지방이 기아에 시달리고 있을 때, 회장으로 임명된 그는 많은 의연금을 모아 옥에 갇힌 사람들을 돌보아 주었고, 순교자의 시체를 매장하였다. 그리고 집안사람들에게 순교토록 준비시킬 때가 된 것을 알고 성패와 성물을 감추었으나 서적은 감추지 아니하였다. 이것을 보고 조카 최 요한이 놀라서 “다른 교우들은 혐의를 받을만한 것을 모두 감추는데 이 책을 그렇게 내어 두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성물은 불경한 무리들이 더럽히지 못하게 감추는 것이지만, 서적이야 어디 강복한 물건이냐? 군사가 전쟁 때에 병서를 참고하지 않고 언제 하겠느냐?” 하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1839년 7월 31일 밤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이 수리산에 이르러 고함을 치며 최 프란치스코의 집으로 달려들었다. 그는 조금도 놀라지 않고 마치 가장 친한 친구를 대하듯 포졸들을 친절한 태도로 맞이하였고, 그의 이러한 태도에 포졸들은 안심하고 누워 잠을 잤다. 해뜰 무렵에 포졸들을 깨워 음식을 대접하고는 프란치스코와 남자들과 큰 아이들이 앞장서고, 그 뒤로는 부인들과 젖먹이들이 따라가고, 맨 뒤에는 포졸들이 따라왔다. 때는 7월이라 찌는 듯한 더위로 빨리 걷지를 못하였고 어린 아이들은 피곤하여 울부짖었다. 행인들은 악담과 저주를 퍼붓는 사람도 있고 불쌍하게 보는 사람도 있었다. 이에 그는 “형제들아 용기를 분발하라. 너희 앞을 서서 갈바리아로 올라가시는 오 주 예수를 보라!”고 하며 격려하였다. 일행은 날이 저물어서야 옥에 당도하여 밤을 지냈다.
포장은 프란치스코를 두 차례나 주리를 틀게 하고, 뾰족한 몽둥이로 살을 찌르게 하여 배교한다고 할 때까지 고문을 하게 하였다. 프란치스코의 아들 하나가 나라 밖으로 나갔다는 것을 안 포장은 더욱 분이 치밀어서 무지하게 매질을 하여 그의 팔과 다리의 뼈가 어그러졌다. 그는 태형 340도와 곤장 110도를 맞았다. 다른 많은 교우들은 석방되었으나 끝까지 신앙을 증거한 이는 프란치스코와 그의 아내와 일가 부인 3명뿐이었다. 그 후 프란치스코는 포장대리 앞에 끌려 나가 치도곤 50대를 맞으니 그것이 최후의 출두요 형벌이요 신앙고백이었다. 옥으로 돌아온 그는 “예수께 내 목숨을 바치고 도끼날에 목을 잘리는 것이 소원이었으나 옥중에서 죽는 것을 천주께서 원하시니 천주의 성의가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한 후 몇 시간 뒤에 숨을 거두었다. 때는 1839년 9월 12일이요, 그의 나이는 35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이성례李聖禮 마리아 (1801~1840년)
이성례(李聖禮 마리아 1800-1840) 최경환 성인의 부인이며 최양업(토마) 신부님의 어머니이다.
본래 부모와 함께 어린이를 투옥시키는 일은 국법에도 없었으나 큰 아들을 유학 보낸 이 집에 대해서는 예외였다. 옥에 갇힌 다섯 아들은 희정(羲鼎 당시 15세) 선정(善鼎 당시 12세) 우정(禹鼎 당시 9세) 신정(信鼎 당시 6세) 그리고 젖먹이였던 세 살짜리였다. 한데 갇힌 최씨 일가의 비극은 그때부터 절정으로 치달았다. 우선 굶주림이 닥쳐왔다. 이들 어린이를 옥에 가두긴 했어도 국법에도 없는 일이라 밥이 나오지 않았다. 어쩌다 밥 한덩이가 나오면 어린아이들에게 나누어주고 어른들은 굶었다. 세 살짜리 막내는 그나마도 얻어먹지 못해 어머니의 빈 젖을 빨다가 첫 옥사자가 되었다.
젖먹이가 죽자 어머니 이성례는 실성을 했다. 그대로 가다가는 아이들을 모두 굶겨 죽이겠다는 모성애에서였을 것이다. 짐짓 배교하겠노라고 말하고 네 아들을 데리고 풀려 나왔다. 이때부터 어린아이들은 서울의 골몰골목을 누비며 걸식을 다녔다. 어느 집에서나 이들을 불쌍히 여겼으나 배교를 아는 교우들은 밥을 주지 않았다. 옥에 갇힌 남편 생각에 순간적으로 정신을 차린 이성례는 아이들을 동냥 보낸 사이 남편 곁으로 돌아갔다. 다시 갇힌 몸이 된 것이다. 그러자 15세부터 6세까지의 4형제가 부모를 가둔 옥을 찾아왔다. 그들 어린 형제들은 창살을 붙들고 어머니를 목메어 불렀다. 그러나 어머니는 또 한번의 배교를 겁냈다. 돌아앉아 어린 아이들이 울며 부르짖는 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려고 '엄마'를 부르는 아이들에게 등을 보인 채 미동도 할 수 없었던 어머니… 그래도 일찍 철이 난 15살짜리 희정은 어머니가 다시 배교할 것이라고 생각되자 울부짖는 어린 동생들을 달래서 발길을 돌렸다. 그리하여 4형제 거지는 다시 장안의 떠돌이가 되었다.
이제는 어느 집을 가도 쌀과 음식을 한아름씩 안겨주었다. 이들 4형제는 동냥한 음식을 틈틈이 부모에게 사식으로 넣었다. 한번은 어느 부자집에서 먹으라고 준 인절미를 가슴에 품고 옥리를 찾아가 얼마를 떼어준 후 사식을 넣는데 성공했다. 그 인절미에는 어린 아들의 손가락 자국이 아들의 체온과 함께 남아 있었다. 그 인절미를 메이는 목으로 어떻게 넘겼을 것이랴. 이 눈물겨운 정경이야말로 백육십년이 넘은 세월을 뛰어넘어 우리의 가슴을 적시며 뜨거운 감동을 준다.
최경환의 부인 이성례가 당고개, 지금의 서울 용산구 신계동 언덕에서 참수 치명한 날은 음력 1839년 12월 27일(양력 1840년 1월 31일)이었다. 15살 난 둘째 아들 희정은 가끔 옥사장에게 사정하여 푼푼이 모은 돈을 신바닥에 숨겼다가 어머니에게 갖다주곤 하였다. 이성례는 아들의 머리를 빗겨주면서 "아무쪼록 어린 동생들을 각별한 사랑으로 보호하고 친척집에 각각 데려다 주고 지내자면 중국 마카오에 가 있는 너희 형이 나와 자연히 안배할 것이다" 라고 말하면서 며칠 동안은 오지 말라고 일렀다. 치명하는 날에 아들을 보면 미진한 육정에 끌릴까 보아서였다. 희정은 어머니가 오지 말라는 뜻을 알고 가슴이 막히고 슬픔을 억제할 길이 없었다.
나이 어린 4형제는 온종일 동냥한 돈 몇 푼과 쌀자루를 메고 이리저리 수소문한 끝에 희광이를 찾아갔다. 그리고는 "우리 어머니가 아프지 않게 단칼에 하늘나라로 가도록 해 주십시오" 하며 가지고 온 돈 몇 닢과 쌀자루를 통째 내밀었다.
4형제의 눈물겨운 '청탁'은 희광이들의 가슴을 움직였다. 희광이들은 밤새 칼을 갈아 달빛에 비춰 보았고 이튿날 당고개에서 그 약속을 지켜 주었다. 그날 구경꾼들은 더 못 나가게 막아 놓은 삼줄을 헤치고 앞으로 나와 어머니 이성례가 단칼에 치명하고 희광이들이 약속을 지키는 모습을 먼발치로 바라본 어린 4형제는 동저고리를 벗어 하늘에 던지며 용감한 어머니의 순교를 기뻐했다고 전해온다. 당시 장안에서의 순교자들은 모두 시구문으로 불렸던 광희문 밖에 내버렸다고 하는데 그날 하루만도 당고개 아래로는 너무 많은 시신이 굴러떨어져 시구문 밖에 문자 그대로 시산(屍山)을 이루어 어린 형제들은 어머니의 시신을 찾지 못했다. 다만 옥리들의 배려로 아버지 최경환의 시신은 친척들이 거두어 그들 가족이 마지막 살던 수리산에 안장하였다.
땀의 순교자 최양업(崔良業) 토마스(1821-1861년) 신부는 두 번째 한국인 사제로서, 세례명은 토마스. 양업(良業)은 아명(兒名)이고 관명(冠名)은 정구(鼎九), 본관은 경주, 충청도 다락골[일명 대래골, 현 靑陽郡 化成面 禮岩里]에서 출생하였다. 후에 부친을 따라, 경기도 부평을 거쳐 안양의 수리산으로 이주하였다. 그는 1835년 말, 조선에 입국한 모방 신부의 눈에 띄어 15세의 나이로 한국의 첫 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최 토마스는 동료 신학생인 최방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김대건 안드레아와 함께 1836년 12월 마카오 유학길에 올라, 1837년 6월에 파리 외방 전교회 극동 대표부에 도착하여, 그곳에 설립된 임시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였고, 마카오에 민란이 일어나자, 마닐라로 피난 가서 수업을 받기도 하였다. 최 토마스는 1842년 마카오를 떠나, 입국로를 탐색하고자 남경을 거쳐 요동으로 갔다. 그는 1843년 프랑스 파리의 무염 성모 성심회에 가입하였고, 이 무렵 조국에 일어난 박해와 부모님과 다른 신자들의 순교 소식을 들었다. 그는 자신의 편지에 이렇게 쓰고 있다. “저는 우리 부모님과 형제들을 따라서 공을 세우지 못하였으니, 저의 신세가 참으로 딱합니다. 그리스도 용사들의 그처럼 장열한 전쟁에 저는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말입니다.” 1844년 12월 최 토마스는 신학 수업을 마치고 김 안드레아와 함께 부제품을 받았다. 이후 1848년까지 입국을 준비하고 있던 최 토마스 부제는 1849년 4월 서가회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고, 요동 지방으로 가서 본격적인 귀국을 시도하였다. 그해 12월 최 토마스 신부는 조선의 밀사 신자들을 만나 귀국하게 되었다.
최 토마스 신부가 귀국하였을 때,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후에, 주교가 됨)는 병이 나, 사목 방문을 할 수 없는 처지에 있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각처에 숨어 있는 신자들을 순방하기 시작하였다. 최 토마스 신부는 1850년 초부터 6개월 동안 5천여 리를 걸어 3,815명의 신자를 방문하였다. 이러한 형태의 사목 활동은 11년 6개월여 동안 꾸준히 계속되었으며, 그 외에도 최 신부는 휴식 기간을 이용, 한문 교리서와 주요 기도서를 한글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한글로 된 천주 가사를 작성하거나 기존에 있던 가사들을 정리하여 신자들에게 보급하였다. 그 이유는 성가 형태로 된 천주 가사들이 신부의 강론을 대신하기도 하고, 신자들의 신앙심을 돈독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최 신부는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을 도왔으며, 방인 사제 양성을 위해 다블뤼 신부가 세운 충북 진천의 배티 신학교에서 세 명의 소년을 가르치다가, 말레이 반도에 있는 페낭 신학교로 보냈다.
최양업 신부는 사목 순방 도중, 많은 어려움과 박해에 직면하여 목숨이 위태로웠다. 한 번은 서양인으로 오인을 받아 마을에서 쫓겨나기도 했고, 포졸들의 습격으로 체포되어 죽을 위험에 놓이기도 하였다. 특히 1859년 겨울에는 순방 도중에 발각되어 포졸과 외교인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반쯤 나체가 된 채 눈길을 헤매기도 하였다. 1860년 경상도 지역에서 경신박해를 만난 최 신부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며, 이렇게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편지를 썼다. “이것이 저의 마지막 하직 인사가 될 듯합니다. 저는 어디를 가든지, 계속 추적하는 포위망을 빠져나갈 수 있는 희망이 없습니다.” 드디어 육신의 힘이 고갈된 최 신부는 과로에다 장티푸스까지 겹쳐, 1861년 6월 문경읍(진천 배티 교우촌)에서 40세의 나이로 선종했고, 그해 11월 초, 그의 유해는 제천 배론 신학교에 모셔졌다.
되새기기 - 베르뇌 주교 성인은 최양업 신부에 대하여 이렇게 평가하였다. “최 토마스 신부는 신심, 영혼의 구원을 위한 불과 같은 열심, 그리고 훌륭한 분별력으로 우리에게 그렇게 귀중한 존재가 되었다.” 최양업 신부를 닮은 착한 목자와 선교사들이 많아지도록 기도하자.
양지 바른 산비탈 여기저기에 드문드문 집을 짓고, 담배밭을 일구고, 옹기를 구워가며 살아가던 이 마을은 20여호 밖에 안되는 작은 마을이었지만, 기해박해(1839년) 때 천주교인들이 들어와 신앙 공동체를 이룬 오래된 교우촌이다.
신도들이 조정의 천주교 박해로 인하여 이곳에 정착 이주하면서 생계를 이어가기 위하여 담배를 경작했다고 하여 담배촌이라 칭한다. 이 마을을 유서깊은 교우촌으로 개척한 사람이 바로 최경환 프란치스꼬 성인이다.
수리산 유래
빼어난 산봉의 바위가 마치 독수리와 같아 수리산이라 했다는 설이 있고 신라 진흥왕때 (539∼575) 창건한 절이 심신을 닦는 성지라 하여 수리사라 하였는데 그후 산명을 수리산이라 칭하였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조선조때 어느 왕손이 수도하였다 하여 수본산이라 부르기도 한다는 등 3설이 있는데 그 중에서 산봉의 바위가 독수리와 같아 수리산이라 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2013년 성지순례 계획 | |||||
분기 |
월 일 |
성 지 |
트레킹 |
비 고 |
Km / 인원 |
1 |
1 / 01 |
풍수원 |
대관령 – 선자령 |
일출. 트레킹 |
10.04/20 |
1 / 19 |
삼성산 |
관악산 둘레길1.2 |
성지순례와 트레킹 |
10.36/21 | |
2 / 16 |
담배골(수리산) |
수리산,-성지 |
최양업신부님 |
| |
3/ 16 |
수원성지 |
화성 종주 |
신앙심과 다산의지 |
| |
2 |
4 /20 |
남양성지 |
십자가의 길 |
최방제신학생 |
|
5/ 18 |
요당리 성지 |
앵베루주교피난처 |
경기- 내포 천주깃점 |
| |
6/ 01 |
용소막 |
태백- 유일사 |
철쭉맞이 트레킹 |
| |
6/ 15 |
은이- 미리내 |
삼덕고개 |
김대건신부 |
| |
3 |
7/ 20 |
양평 글라라의 집 |
유명산계곡트레킹 |
여름계곡 돋자리 |
|
8/ 03 |
성심원 |
지리산 둘레길 |
포르치운쿨라 |
| |
8 /17 |
갑곶돈대,진무영,일만위 순교자현양동산 |
함헌동천 |
박바오로, 박순집 |
| |
9/ 21 |
금강공소 |
대관령 옛길 |
강릉지역 천주교거점 |
| |
4 |
10/ 19 |
배론성지- 묘재- |
박달재 –배론 |
최양업신부,황사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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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02 |
인월-금계-동강/향적봉 |
지리산 또는 덕유. |
단풍 |
| |
11/ 16 |
배티성지 |
배티-서운산- 성지 |
최양업신부 |
| |
12/ 21 |
교육회관 성당 |
숙정문-인왕산-경교장 |
결산, 송년모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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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색 칸 내용은 번개입니다. 일기 또는 사정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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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바 트레커들은!
“걸으면서 자연의 세계를 보고 순교 성인들의 거룩하고 겸양된 삶을 본받으며 그것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성지참례와 창조적 질서를 통하여 하느님께 감사 드린다.
걸음의 속도를 늦추며 그릇된 생각을 침묵시키고 영성적 수련과 헌신적 삶과 사물의 아름다움을 더 많이 만나려 노력하고 오감을 통하여 대자연과 호흡하며 대자연속에서 진정한 마음으로 하느님과 형제들, 이 세상과 소통하기 위하여 새로운 눈으로 세상 보기 결심을 선언한다."
1. 항상 자신의 마음을 열고 신중하며 겸손한 자세로 소통에 임하며 인간과 인간이 아닌 생명체들의 번영은 그 자체로 고유의 가치를 갖으며 평화를 지향한다.
2. 성프란치스코의 영성적 수련을 통하여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고 지속적인 헌신을 결심하며, 지구상 생명 형태들의 풍요로움과 다양성은 고유한 가치를 가진다. 인간의 문화 형태도 여기에 포함된다.
3. 인간은
4. 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