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十二章 회빈루의 괴변
"정말 잘된 일이오…"
회의문사는 잠시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계동평을 보며 말을 이었다.
"계 대협, 백장청과 신천토는 그때 어떤 말을 주고받았지요?"
"그때 그들은 관림진(關林鎮) 양가 규수들의 실종 사건을 의논했었소. 처음 신천토는 나를 그 흉수로 지목했다가 관제묘의 중들이 도망을 치고 그 여인이 몇 마디 한 말을 듣고 나에 대한 의심을 풀었소."
"백장청은 신천토에게 가까이 접근하려고 하지 않던가요?"
계동평은 담담하게 웃었다.
"왜 안 그랬겠소? 헤어질 때 백장청이 암시를 주었지만 신천토는 원래가 괴물인지라 결국 백장청이 무안만 당했소. 신천토는 무림인들과 잘 사귀지 않는 괴벽이 있는 것은 귀하도 잘 알지 않소?"
회의문사는 팔짱을 끼고 생각하다가 다시 물었다.
"도망하지 못한 몇몇 화상들은 어떻게 처리했소?"
"뒷처리를 깨끗이 하기 위해 신천토가 남아…"
말을 중단한 계동평은 놀란 듯이 반문했다.
"왜 그러시오? 혹시 그 화상들이 실종된 게 아니오?"
회의문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간단히 답했다.
"그렇소."
계동평은 탄식을 불어냈다.
"으음, 그 괴물은 역시 악독하군."
회의문사는 팔장을 끼고 담담하게 웃었다.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오. 소생의 추측으로는 신천토, 그 괴물이 은밀히 그 화상들을 극비의 장소로 데려 가서 추궁하는 것 같소."
"오… 그럴 가능성도 있겠군."
회의문사는 걸음을 멈추고 웃으며 말했다.
"자, 이제 할 말은 다 한 것 같으니 계 대협, 우리 되돌아 가 낙양성에서 제일 화려한 회빈루의 술맛이나 좀 봅시다."
한편, 계동평이 객잔을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한 점원이 다반(茶盤)을 들고 백장청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 점원은 계속 헤픈 웃음을 흘리며 허리를 굽실거렸다.
"상공, 차를 드시오. 이 차는 서호(西湖)의 유명한 용정차(龍井茶)입니다요. 네…"
백장청은 무슨 생각이 그리 심각한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알았어!"
그 점원의 태도가 싹 변했다.
"오만한 태도가 그럴 듯하구려."
백장청은 어리둥절해졌다.
급히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대는…"
점원은 손가락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키며 전음입밀로 말했다.
"자세히 봐요. 내가 누군가…"
백장청은 놀란 눈으로 상대방의 아래위를 세심히 훑어보았다.
"봉 사자요?"
"흥! 남은 자기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하녀로 가장을 했는데 고작 생각하는 것이 봉매 뿐인가요?"
백장청은 겸연쩍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연 사자였군요. 두 분의 몸매가 하도 흡사해서 얼른 알아보지 못했으니 너무 허물하지 마시오."
그 점원은 바로 동행여비위 냉한매의 유일한 제자 진소연이었다.
그녀는 가벼이 탄식을 하며 대답했다.
"음, 그래요…"
백장청은 급히 의자를 당기며 말했다.
"연 사자, 이리 앉으시오."
"필요 없어요. 내가 무엇 때문에 여기 왔는지 알기나 하세요?"
"무슨 일인지 가르쳐 주시오."
진소연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흥! 가르쳐 달라구요? 역시 책을 읽은 사람이라 다르군요."
백장청은 씁쓸히 웃었다.
"하하… 그건 예의입니다."
"으음, 그래요. 모두가 예절이죠. 역시 내가 잘못했어요."
백장청은 계속 쓴웃음을 지우지 못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막 그녀를 달래 주려는데 진소연이 먼저 생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총독찰, 들어봐요. 금 언니는 이미 낙양으로 돌아왔어요."
"나는 가사와 우 할머니 그리고 신 선배 또 사제의 봉 사자 등을 만났어요. 여기 온 것은 총독찰의 지시를 받기 위해서 명을 받고 왔어요."
"하하… 더 이상 소제를 비꼬지 마시오."
"천만에요."
백장청은 정중하게 말했다.
"연 사자, 할머니께 전하시오. 내 뜻은 이미 신 선배가 전달한 바와 같고 우선 천축의 적을 제거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말이오."
"그 문제는 이미 우 할머니도 알고 계세요. 지금 할머니가 알고 싶어 하는 것은 사제가 얼마나 적의 사정을 파악하고 있느냐는 거예요."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이미 냉 사숙과 신 선배가 전달했소. 그 위에 새로운 발견은 아직 없소."
진소연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할머니는 사제의 처사에 무척 탄복하고 계세요… 그러나…"
그녀는 고운 눈동자로 백장청의 신색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그분과 봉매는 나에게 신신당부를 했어요."
"사제는 지금 호혈에 들어와 있으니 매사에 각별히 조심하라고 말이에요."
백장청은 그 말에 감격되어 그녀의 눈길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
"고맙소. 두 분께 전해 주시오. 그렇지 않아도 매사에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고 말이오."
그는 다시 시선을 그녀에게 돌려 말을 계속했다.
"또한 연 사자에게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진소연은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사양했다.
"무엇 때문에 나에게 사의를 표하죠?"
"하하…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까지 찾아와 연락해 주었고…"
"그래요. 또 뭐예요?"
"사자의 눈빛엔 나를 걱정해 주는 마음이 절절이 나타나 있소."
진소연은 가슴이 울렁거렸으나 짐짓 토라진 음성으로 쏘아붙였다.
"그런 말 말아요. 누가 사제를 걱정해 주겠대요?"
백장청은 다정스럽게 그녀를 바라보며 계속 능청을 부리며 말했다.
"또 있소. 객잔의 하녀로 가장까지 해서 왔으니 그것도 사례해야 할 일이오. 한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가장했소?"
진소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왜냐구요? 지금 나는 사해표국 동방 부총국주와 그의 부인의 시녀예요. 무슨 소린지 알아요?"
백장청은 머뭇거렸다.
"그건…"
진소연이 그의 말을 가로챘다.
"그건 이미 금 언니와 묵약이 되어 있어요. 우 할머니와 가사께서도 동의하셨어요."
"사제는 무슨 말을 하려는 거예요?"
백장청이 미간을 찌푸리며 답했다.
"금 누이는 이미 특수한 수법에 금제되었기 때문에 호혈로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수 없는 고충이 있소. 그러나 사자는 무엇 때문이오?"
진소연은 백장청의 얼굴을 손가락질하며 토라진 소리로 대답했다.
"어쨌든 사제 때문이에요."
백장청은 쓸쓸히 웃었다.
"연 사자의 호의는 고맙지만 나에게 정신적인 부담을 주진 마시오. 그리고 모든 행동에 주의하시오."
진소연은 입을 가리고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말아요."
그들은 줄곧 전음술로 대화를 나누다가 다시 육성으로 돌아왔다. 진소연이 다시 점원으로 돌아온 것이다.
"상공, 저녁을 가져 올까요?"
백장청도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필요 없어. 잠시 후 나가서 사 먹겠어."
진소연은 히쭉 웃으며 말했다.
"그럼 소인은 물러가겠습니다."
이날 밤 초경, 낙양성에서 소문난 요리집 회빈루에는 수많은 손님들로 붐비고 있었다. 주루의 안팎엔 손님들이 떠드는 소리가 왁자지껄했다.
그때 회빈루 문전에 쌍두마차가 굉음을 내며 달려와 천천히 멈춰 섰다.
호화로운 마차가 주루의 문 앞에 멈추어 서자, 거리의 행인들이 속속 그 마차를 피해 어디론가 숨어 버렸다.
사실 이런 호화로운 마차가 회빈루 문전에서 멈추는 일은 늘상 있는 예사로운 일이었다.
행인들이 이렇게 분분히 피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유독 이 마차를 보고 앞을 다투어 피해 버린 이유는 상당한 곡절이 있었다.
그 곡절이란 다름이 아니고 그 마차의 뒤를 송아지만한 늑대가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흉맹한 야수가 눈에서 시퍼런 불꽃을 발하며 번화가로 들어왔으니 어찌 행인들이 놀라지 않으랴.
그것도 그것이려니와 마차를 모는 마부의 행동은 더욱 놀라웠다.
흉악한 면모에 어울리지 않게 화려한 복장을 걸치고 있으니 늑대에 못지않게 행인들의 마음을 놀라게 한 것이었다.
그는 다름 아닌 당대 무림의 팔대 고수 중 첫손을 꼽는 신천토 그 사람이었다.
그가 강호에서 부르는 명성이 어느 누구와도 사귀지 않은 괴벽으로 보아 남의 마차를 탈 만한 사람은 더욱 아니었기에 중인들은 더 놀란 것이었다.
그러니 그가 끄는 마차에 탄 사람은 얼마나 존엄한 사람일 것이냐는 의문이 당연히 생길 만한 것이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면 온 강호는 발칵 뒤집힐 것이다.
마차는 초록색으로 채색되었고 몹시 반들거려 사람의 얼굴이 비칠 것 같았다.
양쪽 문은 녹색의 휘장이 쳐져 있었다. 또 진주로 된 주렴이 마차의 진동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겹겹이 쳐진 녹색의 사포는 더욱 그 마차의 주인을 신비스럽게 했다.
마차를 끄는 두 필의 말도 역시 천만 마리 중에서 고르고 고른 천리준마였다.
건장한 체구에 기름이 반지르르 흐르고 있어 한눈에 좋은 말임을 알 수 있었다.
마차 양쪽엔 노란색의 삼각기(旗)가 꽂혀 있었는데 그 기의 가운데엔 철판과 비파가 새겨 있었다, 바람에 간간이 나부낄 때마다 그 마차의 풍모를 더욱 고귀하게 해 주고 있었다.
지금 낙양성은 온통 천하의 영웅호걸들로 들어차 있었다. 각양각색의 인간들이 제각기 웅지를 품고 몰려들어 사뭇 위세를 보이고 있었다.
회빈루에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라도 거리의 행인들 속엔 수많은 무림의 고수들이 섞여 있는 것이다. 스스로 무림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이 삼각기 하나만 보아도 그 마차의 주인이 어떤 인물이라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으리라.
마차가 완전히 멈췄을 때, 거리 맞은편에서 누군가 놀란 소리로 외쳤다.
"참으로 괴이한 일이군…"
그 옆에서 다른 한 사람이 물었다.
"당신은 저 마차의 주인이 누군지 알고 있습니까?"
"저 기를 보시오."
"그게 어쨌단 말이오?"
먼저 소리친 사람이 음성을 낮추어 설명했다.
"저건 철판동파의 표지요."
"그럼 저 마차에 바로 철판영주가 타고 있단 말이오?"
"그렇소. 천하를 호령하는 철판영주가 아니라면 저 북막랑인 신천토가 마부노릇을 하겠소?"
"흐흠, 그렇군요. 철판영주는 수년 간 종적이 묘연했다는데 느닷없이 낙양성에 나타났으니 곧 낙양성에 볼 만한 구경거리가 생기겠구려."
잠시 그들의 대화가 끓겼다.
뒤이어 먼저의 목소리가 가볍게 신음을 발하며 중얼거렸다.
"으음, 철판영주는 여자구나…"
"아… 퍽 젊은데요…"
맞은편 거리에 붙어 있는 집 옆에는 몇 명의 인물들은 이 화려한 마차에 대해 격론을 벌이고 있었다.
그 순간, 마차의 문이 열리며 홍의와 청의를 입은 아리따운 아가씨들이 얼굴을 비단으로 가린 채 사뿐사뿐 뛰어내렸다.
홍의여인은 손에 비파를 들고 있는 모습이 필경 동해여비위 냉한매 같았다.
그리고 다른 청의여인은 불로쌍선의 손녀 서단봉이었다.
두 아가씨가 유삼자락을 휘날리며 마차에서 내리자 구상문이 정중히 마중을 하였다.
"아가씨, 자리가 이미 준비되어 있으니 어서 안으로 드십시오."
냉한매와 서단봉은 머리를 가볍게 끄덕인 후, 구상문의 인도를 받으며 계단 위로 올라갔다.
신천토는 점원을 향해 천천히 설명을 하였다.
"이 늑대는 보통 집에서 기르는 개보다 온순하니 자네는 두려워하지 말게나."
"자네는 우선 쇠고기를 좀 갖다 먹이기나 하게. 좀 있다 한꺼번에 계산해 줄 테니."
점원은 계속 읍을 하였다.
"예예… 소인이 가져 오겠습니다."
신천토는 늑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낮은 목소리로 뭐라 분부를 하더니 계단으로 올라갔다.
이 회빈루는 이 층 건물인데 아래층은 보통 객석이었고, 이층은 전부 특별석이었다.
이 특별석은 모두 푸른 비단으로 칸막이를 해서 여러 개의 칸을 만들어 놓은 호화판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칸막이를 했을지언정 일어서기만 하면 부근 객석의 광경이 모두 시야에 들어오는 아주 허술한 형식상의 칸막이였다.
실내 장식에 약간 신경을 써놓은 정도라고 하는 편이 아마 좋을 것이다.
주루에 올라온 신천토는 사방을 두루 훑어보았다.
그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바로 구상문이 계약해 놓은 객석이었다.
그곳은 바로 창가에 위치한 객석으로서 거리의 야경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이 주루의 가장 좋은 자리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때에는 냉한매의 일행이 벌써 자리를 잡고 음식을 차려놓은 후였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젓가락을 움직일 생각이 없다는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물론 그들은 신천토가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때 신천토는 계동평이 주루 안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는 냉한매 등이 앉아 있는 자리로부터 불과 이 장의 거리밖에 안 되는 곳에 앉아 있었는데 그의 맞은편에는 웬 회의문사가 앉아 있었다.
그 두 사람은 술잔을 주거니받거니 하며 매우 유쾌한 듯이 담소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천토는 순간적으로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냥 유유히 냉한매 등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때 갑자기 냉소가 들리더니 백광이 번쩍하며 신천토를 향해 느닷없이 전진해 오지 않는가!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릇이 깨지는 것 같은 목소리도 들려왔다.
"허허, 이거 너무 실례가 많습니다. 대협은 널리 용서하시길…"
이 소리를 듣고 보니 이 자는 분명히 상대방이 누구라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장난을 친 것이었다. 이 얼마나 가증스러운 일인가!
그러나 수양이 깊은 신천토는 빙그레 웃으며 오른손을 슬쩍 들어 올렸다.
그 순간 그의 손가락에는 하나의 생선 지느러미가 파르르 격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지느러미에는 상당한 내가 진력이 곁들어져 있었는지 아니면 그가 미리 예기치 못했었는지 그의 눈까풀이 가볍게 떨렸다.
그 뒤 신천토는 한광이 번쩍이는 눈을 치켜뜨며 고개를 돌려 소리 나는 쪽을 응시하였다.
신천토의 오른쪽 약 삼 장쯤 되는 곳에 사남일녀가 둘러앉아 있었는데 사나이들은 모두 흑의의 차림이었고, 모두 오십 전후였으며 여자들은 모두 분홍색 궁장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들은 대략 이십칠팔 세 정도였고 용모는 보통이었으나 모두 한결같이 음탕한 기색을 풍기고 있는 요부형이었다.
신천토의 형형한 시선을 의식한 여자는 활짝 웃으며 애교를 부렸다.
"신 대협께선 그동안 별고 없으셨습니까?"
그러자 그녀의 왼편에 앉아 있는 얌체같이 생긴 늙은이도 웃으며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사람은 정말 언젠가는 만나게 되는구려. 신 대협, 당신은 나더러 세상이 너무 좁은 것 같지 않느냐고 물은 적이 있지 않소?"
그 순간 신천토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반갑소. 만나지 못한 지가 벌써 십 년이나 되었는 데도 여러분의 용모는 예나 다름없구려. 이건 정말 뜻밖입니다. 으핫핫핫…"
그러자 여자도 살포시 웃음을 머금고,
"그건 피차 마찬가지예요. 신 대협께서도 옛날과 조금도 변함이 없으신 것 같은데요…"
하더니 그 염소수염을 한 늙은이를 바라보며 계속 수다를 떨었다.
"대가, 나는 여태껏 십 년 전의 계산을 잊지 않고 있었는데 오늘에야 그 걱정을 덜어 버리게 됐군요."
그 말을 듣고 난 신천토는 그들을 한 번 훑어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십 년 전의 빚을 치르러 이 신모를 찾아왔단 말이오?"
염소 수염을 기른 사나이는 신천토의 침중한 말이 끝나자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 아니오. 그런 것은 아니오. 우리는 오늘 밤 우연히 만나게 되었소이다."
"그러나 노부의 오 형제는 다 모였습니다만, 신 대협 당신은 홀몸이오?"
이 늙은이의 말로는 그야말로 호전적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신천토가 냉한매 등과 일행이라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신천토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처하자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사람을 죽였으면 피의 빚도 갚아야 하는 법이오. 내가 당신들에게 베푼 너그러운 용서를 죄악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아무래도… 그러나 나는 결코 책임을 회피할 생각은 없소."
신천토의 말을 듣고 난 염소수염을 기른 늙은이는 음험한 미소를 지으며 슬슬 빈정거리기 시작했다.
"자네의 말은 언제나 시원스러울 뿐만 아니라 매우 그럴듯하단 말이야. 역시 당금 무림의 팔대 고수 서열에 낀 인물로서 손색이 없다."
신천토는 그의 조롱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침착하게 대꾸하였다.
"그러나 오늘 밤 신천토는 시간이 없소. 그러니 따로 시간과 장소를 정하는 것이 어떻겠소?"
그 늙은이는 신천토의 말에 냉소를 터뜨렸다.
"흥! 유감스럽지만 그렇게 될 것 같지 않으니 이거…"
그 순간 옆에 있는 여자도 동시에 끼어들었다.
"신 대협, 쇠뿔은 단김에 빼랬다고 우리 지금 이 자리에서 결말을 짓도록 합시다."
이 말에 안색이 돌변한 신천토가 응답을 하려 하는데, 그 순간 서단봉의 가냘픈 목소리가 들려 왔다.
"신노, 저 다섯 사람의 내력은?"
그러자 신천토는 엄숙한 표정으로,
"영주께 아뢰오. 저 다섯 사람들은 음산의 문하이며, 아호는 색혼오마(索魂五魔)라고 합니다."
또다시 서단봉의 물음이 들려 왔다.
"저들의 평소 행실은 어떻소?"
신천토는 여전히 정중하게 대답을 하였다.
"그들은 매우 음흉하고 잔인하여 나쁜 짓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서단봉은 그래도 의아한지 또 질문을 하였다.
"신노는 그들과 어떠한 감정이 있길래 옥신각신하고 있지요?"
"예,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십 년 전, 오마 중의 노요(老夭)가 나이 젊은 서생을 박해하고 있는 것을 내가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소인은 상대방이 여자이기 때문에 약간 훈계를 했을 뿐 놓아 보냈습니다."
그의 말투에 의하면 궁장 부인이 어느 서생을 강제로 음행하려다 발각이 되었던 모양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신천토는 서단봉의 면전에서 대답하기가 좀 곤란하여 한참을 머뭇거렸던 것이다.
더욱이 서단봉은 아직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신천토가 설명한 박해라는 말의 진의를 몰랐다.
그녀는 냉한매와 속말로 몇 마디 주고받더니 곧 차갑게 입을 열었다.
"신노, 좋을 대로 처리하시오."
그러자 신천토는 허리를 굽히며 머리를 조아렸다. 사실 그는 추궁이 두려웠는데 여기서 매듭을 짓자 안도의 숨을 내쉬게 된 것이다.
"영주! 감사하오."
원래 신천토는 자존심이 강하고 성질이 깐깐하여 그 누구와도 접촉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북막랑인이라는 별호를 갖게 되었다.
그런데 나이 어린 일개의 소녀에게 이처럼 깍듯이 대하니 보는 사람들은 모두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였다.
또 이와 같은 광경은 색혼오마에게도 크게 충격을 주었기 때문에 그들의 심사에도 절로 그녀에 대한 두려움이 앞서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여태껏 큰소리를 쳤었기 때문에 이미 시위에 매겨진 화살이나 다름이 없었다.
더구나 그들은 다섯 형제들이 운집해 있고, 또다른 조력자가 곧 오게 되었기 때문에 발출을 하려는 것이었다.
하나 만약 이 하잘것없어 보이는 나이 어린 소녀가 무림을 동요할 수 있는 철판영주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이처럼 설치지는 못할 것이었다.
이들이 서단봉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그들 다섯 형제의 견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그들이 미처 생각지 못하고 있는 까닭은 철판영주가 이미 오랫동안 종적을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에 설마하니 그런 일이 면전에서 재현될 줄은 정말 모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까닭에 신천토의 정중한 태도에 그들은 겁이 나기도 하였지만 그것은 일순간이었다.
그래서 그 수다장이 궁장 부인은 별안간 간드러지게 웃었다.
"호호… 영주라니요? 그거 아주 굉장한 호칭인데요."
궁장 부인이 이처럼 신천토를 조롱하였으나 그는 오히려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더니 별안간 손가락 사이에 끼여 있는 생선 지느러미를 들어 올리며 차갑게 일갈하였다.
"이 생선 지느러미는 누가 던진 것이오?"
그러자 궁장 부인은 빙긋이 웃으며 조롱을 퍼부었다.
"그건 소인이 진상한 것인데요… 신 대협께서 저에게 답례라도 해 주시겠다는 말씀인가요?"
하지만 신천토는 허술한 인물이 아니었다.
"역시… 정말 잘 알아맞혔소."
신천토는 손가락을 튕겨내며 무겁게 소리쳤다.
"요부야! 받아랏…"
그 순간 흰 빛이 번쩍이며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궁장 부인의 면전을 향해 휙! 날아갔다.
그러자 그 부인의 옆에 서 있던 염소수염의 늙은이가 냉소를 하더니 손을 펼쳐 내어 비스듬히 그 지느러미를 낚아채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신천토의 내력이 매우 견뎌내기 힘들었던지 그는 잠시 몸을 부르르 떠는 것이었다.
그 순간 그 늙은이를 주시하던 신천토의 입에서 우레같은 말소리가 터져 나왔다.
"염립금(冉立金)! 노부는 네가 이 몇 해 동안에 큰 진전이 있는 줄 알았는데 겨우 그 정도밖에 미치지 못하다니 정말 세월이 아깝구나"
신천토의 말소리가 떨어지기도 전에 색혼오마들은 일제히 일어서며 곧 싸움을 벌일 듯이 눈을 부라렸다.
그러자 신천토는 그들을 제지하려는 듯이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아… 너무 그렇게 조급하게 굴 필요는 없소이다. 이왕에 우리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났으니 끝장을 봐야 되지 않겠소. 그러니 좀…"
색혼오마의 안색을 훑어보다가 시선을 탁자 위의 수저에 고정시켜 놓고는 그것 보라는 듯이 그들을 향해 말했다.
"보아 하니 여러분들은 아직까지 오지 않은 한 사람의 조력자를 기다리는 모양이구려. 그러니 천천히 합시다."
염립금은 신천토가 한눈에 자기들의 속셈을 간파하자 얼굴을 붉히며 음험하게 소리쳤다.
"흐흐… 뭐 그럴 필요는 없네. 너 하나 처치하는 일이라면 우리 형제들만으로도 충분하니까…"
허황된 꿈을 꾸고 있는 듯한 염립금의 말이 끝나자 신천토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침중하게,
"노부는 어디까지나 좋은 뜻에서 너희들이 조력자를 기다릴 수 있는 여유를 주는데도 받아들이지 않다니… 그렇다면 할 수 없지."
하더니 그들을 어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듣자 하니 너희들은 금(金), 목(木), 수(水), 화(火), 토(土)의 순서대로 이름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오행의 원리를 이용하여 오마색혼진을 연성했다는데 그 위력이 어떤지 매우 궁금하구나…"
염립금은 이 말을 듣자 매우 득의한 표정으로 대답을 하였다.
"흥! 그래도 들은 풍월은 있었던 모양이군. 네 말이 맞았다. 우리 형제들이 오마색혼진을 연성한 후부터는 여태껏 적수를 만나보지 못하였는데 오늘에야 빛을 보게 되었구나. 그렇지만 네가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우리에게 사죄를 한다면 너그럽게 용서해 줄 수도 있다. 어떠냐, 내 말에 응할 뜻이 없는가?"
이 얼마나 몰상식하고 파렴치한 소리인가!
그러나 신천토는 이럴 때일수록 흔들리지 않고 대가다운 위풍을 발휘하였다.
"으핫핫핫… 노부는 네가 이처럼 인자할 줄은 꿈에도 몰랐구나. 아니 네가 언제부터…"
신촌토가 정색을 하며 구상문에게 제의를 하였다.
"구형, 수고스럽지만 곧 지배인에게 말해서 상관없는 손님들을 좀 물러나게 하여 주시오. 그리고 손실은 내가 배상을 해 주겠다고 전하시오."
구상문은 신천토의 말이 떨어지자 큰소리로 대답하였다.
"소제는 명을 따르겠소."
구상문이 계산대 쪽으로 향하는 동안에 이미 눈치를 챈 손님들은 슬금슬금 자리를 피해 버렸다.
그러나 계동평과 마주앉은 회의청년은 그대로 앉아 있자 신천토는 그들을 향해 정중히 제의를 하였다.
"두 분은 여행을 하는 사람들 같으니 색혼오마와 별다른 관련이 없다면 이 자리를 물러나 주시는 것이 좋을 것 같소이다."
그러자 그들도 정중하게 답례를 하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만일 여차할 경우 우리는 창문으로 뛰어내릴 테니까요."
이때 지배인은 매우 당황한 얼굴로 점원들을 지휘하여 탁자와 의자들을 치우고 있었다.
순식간에 사방 이십 장 정도의 공지가 만들어지자 신천토는 담담하게 웃으며 임전태세를 취했다.
"됐다. 이제는 맘대로 덤벼 보시지."
말을 끝내고 공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색혼오마들은 서로 얼굴을 돌아보며 눈짓을 교환하더니 순식간에 신천토를 포위하여 그를 중앙으로 몰아넣는 것이었다.
그들이 뽑아든 병기는 모두 각자의 닦은 무공을 표시하는 듯 전부 모양이 틀렸다.
즉 노대는 낭아봉(狼牙棒)을 쥐었고, 노이는 판관필(判官筆)을, 노삼은 자모금권(子母金圈), 노사는 상문검(喪門劍)을 그리고 노오는 한 조각의 붉은 비단을 들고 신천토를 포위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위치가 정해지자 염립금은 신천토를 노려보며 냉소를 퍼부었다.
"흥! 너는 어찌하여 병기를 뽑지 않느냐?"
그러자 신천토는 그들의 자세를 쭈욱 훑어보며 결연하게 응수하였다.
"노부는 생사의 관두에 이르지 않는 한 병기를 뽑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만은 너희들 색혼오마의 이름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한 벌의 장갑을 끼겠도다."
신천토는 재빠르게 품속에서 꺼낸 장갑을 손에 끼었다.
신천토가 낀 장갑은 무슨 재료를 써서 만들었는지 매우 검은 윤기가 흘렀으며, 마치 잠자리의 날개처럼 얇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 길이는 매우 길어 신천토의 팔꿈치까지 덮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가 이처럼 신중한 태도를 취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장갑은 분명히 어떤 내력이 있는 것 같았다.
장갑을 완전히 낀 신천토는 상대방을 바라보며 힘차게 일갈을 하였다.
"자, 덤벼랏!"
그러자 색혼오마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점점 포위망을 압축하여 들어가자 노대가 먼저 선공을 취하였다.
그러더니 신천토를 둘러싼 다섯 사람은 마치 이것이 신호인 양 규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신천토가 아무리 무공에 조예가 깊고 훌륭하다 할지라도 흉명이 드높은 색혼오마와의 대전은 경시할 수가 없게 되었다.
더구나 그들이 음산의 문하이기 때문에 술수가 매우 악독하였다.
그리고 음산노괴 사마인은 공력이 매우 높을 뿐만 아니라, 배분도 당대 무림의 팔대 기인보다 높은 처지였다. 또한 그의 성질은 너무도 괴팍스러워 어느 누구도 상대를 꺼리는 노괴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천토는 엄숙한 마음으로 그들의 신법을 주시하여 허점을 노리고 있었다.
그들이 지금 시전하고 있는 오마색혼진은 오묘한 오행의 이치를 이용하여 만든 진법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 속에는 무한한 변화를 갖추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신천토는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바로 이 순간, 색혼오마 중의 노이(老二) 염립토가 힘차게 부르짖었다.
"노적(老賊)은 초를 받아라!"
그가 손 안의 비단을 흔들어 대자 마치 영사가 춤을 추듯 서서히 흐느적거리며 곧장 신천토의 대혈을 향해 전진해 왔다.
즉 신천토의 두 발을 휘감으려고 붉은 비단을 사용하는 순간, 왼편으로 신천토의 묘혈을 낚아채려고 공격하였던 것이다.
그녀의 맹렬한 일 초에 접한 신천토는 냉소를 하며 몸을 빙그르 돌렸다.
일진의 강경강풍(强勁强風)이 흉맹하게 덮쳐 오는 붉은 비단의 공세를 밀어내며 곧 이어서 밀어낸 쌍장과 함께 염립토와 염립금에게 부딪쳐 갔다.
신천토가 순식간에 수세에서 벽공장력으로 공세를 취하자 상대방의 행동은 더욱 민첩하게 움직였다.
낭아봉, 자모금권, 상문검… 등 그들의 병기가 일제히 신천토의 전신을 향해 공격을 퍼붓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천토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더욱 경각심을 높이며 천랑팔식(天狼八式)을 펼쳐내어 그들을 유인하기 시작했다.
이 천랑팔식은 정말 흉맹한 것이어서 실로 그 위력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정도였다.
상대가 워낙 강력한 색혼오마의 오마색혼진이니 뜻대로 잘 되지 않았다. 번번히 상대방의 병기를 움켜잡으려는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던 것이다.
그러니 오히려 상대방에게 몇 번씩이나 허점을 드러내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 만일 그가 온몸의 공력을 두 팔에 모아 놓지 않았다면 또 두 팔에 특수한 장갑을 끼고 있지 않았다면 그의 이름은 벌써 염라대왕의 책 속에 적혔으리라.
이렇듯 위험한 정세에 처한 신천토는 상대방의 진세가 너무도 현묘하다는 것을 간파하자 다시 수세를 취하였다.
그리고는 오행의 상생상극과 상반되는 변화로 진식을 피하려 하였으나 또다시 털끝만한 차이로 실패하고 마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그의 마음은 점점 초조해졌고 국면은 점점 불리하게 전개되어 갔다.
이때 염립금의 낭아봉이 번득이며 신천토의 머리통을 향해 맹렬하게 덮쳐 왔다.
순식간에 당한 위기에 간신히 몸을 사린 신천토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그러자 염립금이 냉소를 하며 빈정거리기 시작하였다.
"신 대협! 우리의 오마색혼진이 당신 눈에 드시오?"
신천토는 가슴에서 혈기가 끓어올랐으나 꾹 참으며 담담하게 대꾸하였다.
"그저 그런 것 같아…"
그러자 염립금은 더욱 의기양양해져서 슬쩍 말을 돌려 버렸다.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자네가 우리의 진식을 깨뜨릴 수 있느냐는 말일세."
신천토는 난생 처음 겪는 수모에 미칠 것 같았으나 더욱 마음을 억제하며,
"너무 으스대지 말고 좀 기다려도 늦지는 않을…"
하고는 미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력을 다해 벽공장력을 시출하였다.
그러나 염립금은 몸을 사려 슬쩍 피하며 파안대소를 하는 것이었다.
"으핫핫핫… 신 대협, 그럼 이 염모는 당신의 출수를 기다리고 있겠소."
노기충천한 신천토는 이판사판이라는 생각에 무작정 뛰어들려고 잠시 한 모금의 진기를 들이마셨다.
그 순간 신천토의 귓속에 서단봉의 진기전음(眞氣傳音)이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신노! 그들의 요사스런 진식은 오행의 원리뿐만 아니라, 소주천 육합진법(小週天六合陣法)이 첨가되어 있으니 내 말을 주의하여 들으시오."
서단봉의 깨우침을 들은 신천토는 일순간 부끄러움에 진저리를 쳤다.
'아! 이건 정말 부끄러운 일이로구나. 이처럼 나이를 먹고도 나이 어린 계집애만도 못하다니…'
그의 이런 심리를 아는지 모르는지 서단봉의 전음은 계속 그의 귀에 박혔다.
"신노, 이궁(離宮)으로 물러난 다음 곤위(坤位)로 들어가시어…"
이 일련의 일들은 매우 순간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색혼오마들은 조금도 눈치를 채지 못하였다.
그런데 신천토가 시키는 대로 몸을 움직이자 갑자기 신음 소리가 나며 제일 먼저 염립금이 일 장 밖으로 물러나는 것이 아닌가!
정말 믿기 어려운 괴상한 일이었다.
신바람이 난 신천토는 계속 우장을 들어 올려 염립화의 상문검을 낚아채고는 좌장으로 연립수의 앞가슴을 재빨리 움켜쥐어 버렸다.
이 순식간에 벌어진 촌극은 그야말로 색혼오마의 진식을 수라장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원래 진법이라는 것은 어느 쪽이라도 구멍이 났다 하면 걷잡을 수가 없는 것이지만 너무도 급변한 정세였기 때문에 모두들 아연하고 말았다.
어쨌든 신천토가 두서너 걸음 옮겨 놓은 사이에 상대방의 우두머리를 일 장 밖으로 날려 보냈을 뿐만 아니라, 거의 동시에 다른 사람들을 제압해 버리니 그렇게도 기세등등하던 오마색혼진도 그만 붕괴되고 만 것이었다.
신천토가 염립수의 앞가슴을 움켜잡은 후, 그의 목숨을 취하려는데 갑자기 굵은 소리가 들려 왔다.
"신노형, 그를 죽이지 마시오."
그러나 신천토는 움찔하는 순간에 그의 몸을 일 장 밖으로 날려 버리고 말았다.
비록 신천토가 사정을 봐주었지만 염립수는 붉은 선혈을 토하고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바로 이때 신천토의 면전에 인영이 번쩍이더니 육십 세 가량의 노인이 나타났다. 그는 수염이 배를 덮고 있는 아주 기괴한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안색이 어찌도 차디찬지 마치 송장의 얼굴 같았다.
그 흑포노인이 나타나자 색혼오마 중에 살아남은 세 마두들은 그를 향해 가볍게 머리를 숙여 예를 취하였다.
그리고는 곧 부상을 입고 있는 염립금과 염립수에게로 달려갔다.
신천토는 흑포노인과 구면인 듯 빙긋이 웃으며 말을 걸었다.
"독고(獨孤) 노형, 자네는 언제 음산문하에 귀의하였는가?"
신천토의 말을 듣고 난 독고옥은 알 수 없다는 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반문을 하였다.
"아니, 누가 그런 소리를 하던가?"
"노형, 자네가 만일 사마노괴에게 몸을 의탁하지 않았다면 어찌하여 사마노괴의 제자들을 옹호하고 있나?"
그러자 독고옥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으핫핫핫… 그건 자네의 오해야. 그들은 지금 나의 손님으로 와 있는 중이란 말이야."
그 말에 신천토는 머리를 끄덕이며,
"아! 그래서 탁자에 한 벌의 수저가 남아 있었구먼…"
독고옥은 알았다는 듯이 수긍을 하였다.
"틀림없네! 설사 그들이 나의 손님이 아니라 하더라도 나는 내 앞에서 사람을 죽게 하지는 않을 거야."
신천토는 독고옥의 말이 좀 거북했는지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아니, 자네도 그런 소리를 할 줄 아는가? 자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착한 마음씨를 갖게 됐나?"
그러나 독고옥은 신천토의 비꼬는 말을 못 들은 척하며, 눈길을 돌려 서단봉의 좌석을 돌아다보았다.
그러더니 신천토를 향해 넌지시 물었다.
"신노형! 자네는 철판영주를 만나보았나?"
신천토는 빙그레 웃었다.
"내가 바로 영주의 좌전우시(座前右侍)일세…"
독고옥은 깜짝 놀라며 이상하다는 이 신천토를 바라보며 넋두리를 하였다.
"허허… 그것 참 신기한 일이로군! 여태껏 남과 교분이라고는 없는 자네가 철판영주의 하인노릇을 감수하다니 말이야…"
그러자 신천토는 낯빛을 엄숙하게 돌변하며 큰소리로 호령을 하는 것이었다.
"아니, 자네는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고 있나? 철판영주의 위력은 온 세상이 다 숭배하고 있는 바인데 이 신모가 어찌 무례할 수 있는가?"
그러나 독고옥은 빙긋이 웃으며 천연덕스럽게 대꾸를 하였다.
"아아… 틀림없네. 지금 세상에는 쌍둥이를 숭배한다는 노래도 있으니 자네가 한 일을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 그러나…"
독고옥은 그의 얼굴을 주시하며 말을 이었다.
"나는 누각 밑에서 영주의 수레만을 보았을 뿐 세상이 다 숭배한다는 영주는 보지 못했네…"
그러자 신천토는 안색을 펴며 능청을 떨었다.
"그건 자네의 눈이 썩었기 때문이지. 영주께서는 바로 저 자리에 앉아 계신데 자네가 보질 못했다니 자네의 눈을 탓할 수밖에 더 있나…"
신천토가 손을 들어 서단봉이 앉아 있는 좌석을 가리켰다.
독고옥은 눈이 빠져라고 서단봉을 쳐다본 후에 마치 경멸하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흥! 겨우 나이 어린 계집애를 말하는 것인가?"
신천토는 이 말을 듣자 깜짝 놀라며 크게 꾸짖었다.
"네가 감히 그런 소리를 하다니… 정말 무엄하구나."
그러자 독고옥은 미친 듯이 폭소를 하며 약을 올렸다.
"으하핫… 그래… 그래… 말이란 물과 같아서 한 번 하면 그만이다. 그러니 나를 어쩔 테냐?"
독고옥의 신랄한 비평에 신천토는 안색을 싸늘하게 돌변하며 어쩔 줄을 몰랐다.
독고옥은 신천토가 말없이 끙끙 앓고 있자 부채질을 하려다가 멈추고 다시 자신의 생각을 떠벌렸다.
"하기야 사람들을 존경하고 안하고는 다 각자의 자유이니 누구도 뭐라고 할 수 없는 것이네. 그러니 뭐 그렇게 낙담하지 말게…"
독고옥의 능청스런 화술에 꼼짝 못하고 얻어맞은 신천토는 정말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한데 마치 구세주같은 서단봉의 가냘픈 음성이 들려오지 않는가.
"신노, 그 노인의 말이 옳아요. 그런데 그 노인은 누구지요?"
이 말은 서단봉이 몰라서 묻는 말이 아니라 신노의 궁색을 도와주려는 의도에서 물어본 말이었다.
돌파구를 찾게 된 신천토는 서단봉의 부드러운 질문에 미소를 지으며 공손하게 대꾸하였다.
"영주께 아뢰오."
"저 늙은이는 당대의 팔대 고수 중에 한 사람인 남황독고옹 독고옥입니다."
그러자 서단봉은 일부러 놀라는 척하였다.
"오라! 어쩐지 큰소리를 치더니만 바로 독고 노인이었구려."
서단봉이 고개를 돌려 독고옥을 바라보았다.
면사를 뚫고 나오는 형형한 눈빛으로 독고옥을 훑어보면서 단봉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독고 노인, 그만한 나이로도 본 영주의 내력을 모른단 말이오?"
서단봉이 묻자 독고옥은 퉁명스럽게 딴청을 부렸다.
"알면 어떻고, 모르면 어떻소?"
서단봉은 너무도 당돌하고 무례한 그의 언사였지만 오히려 담담하게 웃는 것 같았다.
"만약 모르고 그랬다면 용서할 여지가 있겠으나 일부러 그랬다면 매를 쳐야지."
독고옥은 서단봉의 말이 떨어지자 냉소를 터뜨렸다.
"흥! 그 말이야말로…"
그 순간 서단봉의 호통 소리가 실내에 울려 퍼졌다.
"독고옥… 너는 정말 하늘 높은 줄 모르는구나."
그러자 독고옥의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지며 침통하게 부르짖었다.
"네가… 감히 노부를 그렇게 부를 수 있단 말이냐?"
서단봉도 매우 격동하고 있는 듯이 면사가 가볍게 흔들거렸다.
"독고옥! 네가 이 서단봉을 업신여기는 것은 용서할 수 있으나 철판영주를 무시한 죄는 용서할 수가 없다. 하지만 본 영주는 너의 체면을 생각하여 지나치게 괴롭힐 생각은 없다. 그러니 너는 스스로 너의 그 못된 입을 네 번만 때려 속죄를…"
독고옥은 더 듣지 못하겠다는 이 얼굴을 찡그리며 일갈했다.
"너는 지금 노부가 신천토인줄 아는 모양이로구나… 얘야, 잠꼬대는 이 할애비 앞에서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순간 독고옥의 면전에 인영이 번득이며 서단봉의 일갈이 들렸다.
"미친 늙은이 같으니라고… 아주 간덩이가 부은 모양이로구나!"
독고옥이 미처 피할 겨를도 없이 딱딱딱! 하며 뺨을 때리는 것이 아닌가!
너무도 순식간이라서 정신을 못 차렸던 독고옥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서단봉은 이미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 단정히 앉아 있었으며 마치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던 것처럼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원래 독고옥과 서단봉의 거리는 십 장이 넘었다.
그런데 독고옥과 같은 공력의 소유자도 그녀가 언제 무슨 신법으로 자기에게 다가왔는지를 모르니 이거 정말 환장할 지경이었다.
만일에 이런 일을 자신이 직접 체험하지 않았더라면 도저히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독고옥이란 인물이 어떤 인물인데 이런 수모를 당했을까? 아까와 같은 장면은 물론 서단봉의 공력이 지극히 높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지만, 또 다른 이유는 분명히 방심을 하고 있었던 탓일 것이다.
영문도 모른 체 네 대의 따귀를 얻어맞은 독고옥은 놀라움, 두려움, 수치감, 분노 등이 엇갈린 착잡한 심정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두 눈에서는 흉광이 번득였고 막 발작을 할 것 같은 모양이었다.
이때 서단봉은 갑자기 머리를 치켜올리며 지붕을 향해 소리쳤다.
"귀하는 필시 통천교의 고수같소만 자신이 있거든 내려오시고, 그렇지 못하면 어서 멀리 꺼지시지."
서단봉의 이 몇 마디는 독고옥의 머리에 마치 찬물이라도 끼얹는 듯 여태껏 활활 불타오르던 살기가 깨끗하게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뿐만 아니라 아직까지 팔대 고수 중의 일인자로 자처하던 신천토까지 넋을 빠지게 만들어 놓았다.
그 이유는 너무도 간단하였다. 그들은 그동안 아무 기척도 느끼지 못하고 있는데 나이 어린 서단봉이 간파해 냈으니 그들이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또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서단봉의 공력은 이미 신천토나 독고옥보다 훨씬 앞서 있다는 것을 암암리에 명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지붕 위에서 그들을 엿보고 있던 인물의 공력도 매우 고강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서단봉의 말소리가 떨어지자 왼쪽 지붕 위에서 우사랑의 일갈 소리가 들려 왔다.
"필부(匹夫)야! 비겁하게 어디로 도망을 가려고 하느냐?"
곧 이어 꽝! 하는 폭음 소리와 함께 건물이 진동을 하며 기왓장과 천장을 댄 판자가 우수수 밑으로 떨어졌다.
그러자 서단봉이 성급하게 신천토와 구상문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신노와 구 대협은 빨리 올라가 보시오."
신천토와 구상문이 서단봉의 명령이 떨어지자 신속하게 이미 뚫어진 구멍을 통하여 지붕 위로 솟구쳐 올라갔다.
이 순간 독고옥의 눈빛이 기이하게 번쩍였다. 아마 도망을 하려는 속셈으로 기회를 보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