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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형우가 사라진 지 며칠 지났을 무렵, 하북팽가에 마차 안대가 도착했다.
조설연과 우문혜가 탄 마차였다. 마차는 팽가 정문 앞에 멈췄고, 즉시 팽가에서 무사 몇이 나와 그들을 맞이했다.
"어디에서 온 누구시오!"
무사들 중 하나가 외치자, 종칠이 그 무사를 알아보고 마차에서 내려 다가갔다.
"하남표국에서 왔소이다."
하남표국이라는 말에 무사가 퍼뜩 놀라 종칠을 쳐다봤다. 이내 무사의 기억 속에서 종칠이라는 사내가 떠올랐다. 그 무사는 종칠에게 뼈아픈 패배를 당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오랜만에 뵙소이다."
무사는 정중하게 종칠에게 포권을 취했다. 종칠은 의외라는 눈으로 마주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반갑소. 혼례 이야기를 듣고 부리나케 달려왔소."
종칠의 말에 무사가 쓴웃음을 지었다. 최근 무림맹 분위기가 상당히 좋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지금 종칠이 말한 그 혼례 때문이었다.
"그것은...... 일단 안으로 드시는 것이 좋겠소."
무사는 그렇게 대답한 후, 옆에 있는 다른 무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마차가 들어갈 수 있게 문을 열어라."
팽가의 정문이 활짝 열렸다. 팽가 무사들은 마차를 끄는 말을 조심스럽게 다루며 마차를 팽가 안으로 들였다. 이내 팽가의 정문이 다시 굳게 닫혔다.
단형우가 무림맹에 몰려든 서른 개 문파를 돌려보낸 이후, 무림의 혼란은 조금씩 잦아들었다.
제갈중천과 취월이 펼치는 계략까지 맞물려 혈마회의 영향력이 조금 줄어든 것이다. 하지만 혈마회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그들의 힘을 하나로 모으기 시작했다.
혈마회가 문파들의 힘을 집중하고 있다는 정보가 무림맹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원래 조용하던 문파들이 그렇게 했다면 혈마회의 힘으로 그 정보를 차단할 수 있었겠지만 한창 소란을 피우던 문파들이라 정보를 차단하기가 상당히 어려웠다.
혈마회가 문파들의 힘을 모은다는 정보를 얻은 무림맹은 그 대비책으로 구대문파를 움직이기로 결정했다.
아직까지 무림맹의 영향력이 남아 있긴 했지만 구대문파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영향력만으로 부족했다. 명분이 반드시 필요했다.
혈마회의 존재만 확인된다면 그 명분으로 충분할 것이다. 혈마회는 목적 자체가 무림의 말살이니 온 무림의 공적이다. 문제는 그 증거가 아직 미약하다는 점이었다.
독고운은 심각한 표정으로 제갈중천과 취월을 쳐다봤다.
"구대문파로부터 연락이 아직 없었나?"
"조금 더 기다려 보면 답이 있을 것입니다."
제갈중천의 말에 독고운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움직이려면 벌써 움직였어야 했어. 구대문파는 움직일 생각이 없는 걸세."'
제갈중천도 독고운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냥 포기할 수는 없었다. 힘을 하나로 합해도 불리한 싸움인데 구대문파가 빠지면 해보나마나 진 싸움이 될 것이다.
"그 사람이 있었으면 해볼 만했을 텐데......"
독고운은 아직도 당형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제갈중천으로부터 받은 보고는 독고운의 눈을 뒤집어 놓기에 충분했다.
단지 한 번의 기세만으로 수백 명의 단전을 박살낼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단형우는 한 명으로 천 명을 대신할 수 있는 자였다.
취월은 독고운의 말에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중요한 시기에 단형우가 도움을 준다면 정말로 큰 힘이 될 것이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단형우를 거부했다. 단형우와 함께하면 안 된다는 경고를 계속해서 보내오고 있었다. 취월은 자신의 직감을 믿었다.
"이미 떠난 사람은 이제 잊으십시오. 그 사람은 아마 다시 오지 않을 것입니다."
취월의 말에 독고운이 입맛을 다셨다. 음양고만 제대로 기능을 다했다면 단형우라는 괴물을 하나 얻을 수 있었는데 너무나 아쉬웠다.
하지만 음양고를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해졌다. 음양고가 사라지지 않았다면 독고운은 단형우의 수족이 되어 충실하게 움직였을 것이다.
“설마 음양고에 힘의 논리가 적용될 줄이야. 그나저나 단형우 그자는 대체 어떻게 음고의 힘을 그렇게 키웠단 말인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군.'
단형우의 음고가 독고운의 양고를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은 힘이 훨씬 더 강했기 때문이다.
만일 힘이 비슷하기만 했어도 음고가 양고를 이길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차이가 너무 심했다.
생가하면 할수록 무서웠다. 단형우도, 음양고도.
"그나저나 하남표국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나?"
"일단 머물 곳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오늘은 쉬고 내일 다시 돌아간다고 합니다."
하남표국의 마차가 도착했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설마 독고운이 그렇게 빨리 움직일 줄은 몰랐다.
제갈중천과 취월도 그들이 도착하고 나서야, 독고운이 하남표국에 전서구를 보냈음을 알았으니, 두 사람의 놀람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남표국에서는 검왕과 검마가 함께 왔다. 두 사람의 능력은 소문 이상이었다.
양고 덕분에 엄청나게 강해진 독고운조차 두 사람의 능력을 쉽게 알아챌 수 없을 정도였다.
"그것도 아쉽군."
독고운은 검왕과 검마가 아까웠다. 둘만으로 북해빙궁을 물리칠 정도의 고수가 무림맹을 도와준다면 훨씬 편한 싸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하남표국으로 돌아가려는 두 사람을 막을 수는 없었다.
"대체 하남표국이 무엇이기에......"
독고운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얼굴을 찌푸렸다. 하남표국의 실질적 주인인 조설연이 떠올랐다. 그와 함께 자연스럽게 그녀 옆에 있던 우문혜도 떠올랐다.
우문혜의 미모는 대단하다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얼마나 아름다웠느냐 하면, 독고영령이 우문혜의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아 방에 틀어박혀서 밖으로 나오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독고영령은 지금까지 미모로 자신을 앞서는 사람은 없을 거라 자신해 왔다. 더구나 매력까지 합하면 그 누구도 자신을 넘어설 수 없다고 믿어왔다.
하지만 그 믿음은 우문혜 덕분에 완벽하게 부서져 버렸다.
우문혜는 독고영령의 사소한 아름다움이나 특이한 매력으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것을 독고영령 스스로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충격이 컸다.
더구나 우문혜 옆에 나란히 서 있으면서도 전혀 초라해 보이지 않는 조설연의 모습도 그녀에게는 충격적이었다.
조설연의 미모는 우문혜보다 못했지만 그녀에게는 우문혜에게 없는 뭔가가 있었다. 기품이 넘쳤고 따뜻함이 넘쳤다.
기이하게도 그런 느낌들이 우문혜의 미모에 그녀를 주눅 들지 않게 했다.
독고영령은 감히 그녀들 옆에 설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방에 틀어박혀서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이미 단형우나 제갈린에 대한 시기나 질투는 깨끗이 사라져 버렸다. 그 자리에 우문혜와 조설연에 대한 열등감이 차곡차곡 채워졌다.
독고운은 딸의 그런 상태를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하남표국이 못마땅했다.
"쯧, 가려면 그냥 오늘 출발하면 좋을 것을."
독고운의 중얼거림에 제갈중천과 취월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가려는 것을 말이 너무 지친 것 같아 하루 쉬었다 가라고 두 사람이 나서서 만류했던 것이다.
그렇게 회의가 지지부진하게 이어지고 있을 때, 무사 하나가 집무실 앞으로 다가왔다.
"맹주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무사의 말에 독고운은 물론이고 제갈중천과 취월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은 손님이 찾아오기에 너무 늦은 시각이었다.
"누구라 하더냐?"
"일단 뵙고 말씀드리고 싶다 하셨습니다."
독고운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것도 제대로 듣지 않고 왔단 말인가?"
무사는 고개를 조아리며 급히 대꾸했다.
"그분이 한사코 그렇게 말씀하셔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기도가 대단히 출중한 것이 구대문파 중 어딘가의 장로님이 아닌가 합니다."
무사의 말에 독고운과 제갈중천이 눈을 마주쳤다. 구대문파 사라이라면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을 리 없었다.
한데 구대문파의 장로 정도 되어 보인다면 정말로 기도가 출중하다는 뜻이다. 그 정도 고수는 아무데서나 함부로 만들어낼 수 없다.
'혈마회!'
세 사람의 뇌리에 한 가지 단어가 동시에 스쳐지나갔다.
"일단 현무단을 근처에 배치하라. 청룡단과 백호단은 비상체계를 유지하도록 하고, 그런 후에 그 사람을 이리로 데려오라."
독고운의 지시는 막힘이 없었다. 가장 적합한 대처였다. 상대가 아무리 혈마회에서 온 고수라 하더라도 현무단 전원이 지키는 곳에서 난동을 피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무사단이 준비하는 공간에서 빠져나갈 수도 없을 것이다.
무사가 읍을 하고 급히 사라졌다. 잠시 후, 무사가 한 사람을 대동하고 맹주의 집무실로 다시 찾아왔다.
"이분입니다."
무사는 그렇게 손님을 맹주에게 소개한 후,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지금은 비상시기였다.
독고운은 다가오는 사람을 보며 놀란 눈을 감추지 못했다. 그 사람은 독고운이 익히 알고 있는 자였다.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환마......"
독고운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환마라는 말에 제갈중천과 취월이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이내 얼마 전 제갈린이 그들에게 전음으로 했던 말이 떠올랐다. 천마신교와 손을 잡을 수 있게 해주겠다던 그 말이.
"서, 설마......"
제갈중천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정말로 이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환마는 한 발 앞으로 다가와 독고운을 향해 공손히 포권을 취했다.
"천마신교의 환마가 인사드립니다."
환마의 인사는 정중했고, 독고운은 그 인사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천마신교와 싸울 때가 아니라는 것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니까.
"어서 오시오. 그래, 무슨 일로 예까지 오셨소? 아니,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일단 들어갑시다."
독고운의 말에 환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어느새 네 사람이 집무실 탁자를 둘러싸고 앉았다. 한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제갈중천이었다.
"설마 우리와 손을 잡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까?"
환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이미 알고 계시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군요."
환마의 말에 제갈중천이 고개를 저었다.
"예상을 하긴 했는데 설마 정말로 이리 될 줄은......."
제갈중천의 말에 독고운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아직 독고운은 제갈린이 했던 말을 듣지 못했다. 당연히 이런 일을 예상할 수 없었다.
취월은 급히 독고운에게 전음을 보내 제갈린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려줬다. 독고운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너무나 궁금해졌다. 대체 제갈린이 무슨 수를 썼기에 천마신교가 알아서 무림맹으로 찾아왔는지 말이다.
그것은 독고운뿐이 아니라 제갈중천과 취월도 마찬가지로 궁금했다. 아무리 생각하고 머리를 굴려도 그 방법을 알 수가 없었다.
"시간을 끌 것 없이 간단히 끝내는 게 좋을 듯합니다. 일단 저희 교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전해드리겠습니다.
혈마회라는 곳과의 싸움이 끝날 때까지 잠정적으로 무림맹과의 분쟁을 끝내고 손을 잡고 싶다 하셨습니다. 다른 조건은 일제 걸지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환마의 말은 그야말로 무림맹에서 원하고 또 원하던 바로 그것이었다. 독고운은 그 말을 완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천마신교가 무엇인가. 바로 마인들이 모여서 만든 종교집단이다. 그들은 모조리 마인들로 이루어져 있다. 마인들을 어찌 믿는단 말인가.
하지만 지금은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혈마회의 힘이 강했다.
“그렇게 하겠소. 다만 이것을 외부적으로 공표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합시다."
독고운은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대답해 버렸다. 제갈중천도 취월도 지금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저 가만히 있었다.
환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저희도 원하는 바입니다. 외부적으로 공표되어 좋을 일이 없겠지요."
그렇게 무림맹과 천마신교가 너무도 간단하게 손을 잡았다.
독고운도 제갈중천도 취월도 천마신교가 이렇게 쉽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절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환마가 대표로 이곳에 온 이유가 금마공에서 벗어난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것도 그들은 알 수가 없었다.
"교주께서는 일단 정천맹을 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정천맹도 혈마회라던데, 맞습니까?"
"그렇소. 그리 해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소이다."
독고운은 정말로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천마신교가 정천맹을 친다면 천마신교는 물론이고 혈마회의 힘도 약화된다.
무림맹 역시 혈마회와 싸우게 되면 많은 힘을 소진하겠지만 나중의 걱정을 덜 수 있으니 다행이었다.
"그럼 전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이곳에서 오래 있어봐야 좋을 것이 없으니까요."
"그렇게 하시오."
"참, 그리고 오늘 절 이곳까지 안내한 무사의 입도 단속해 두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환마의 말에 방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말이었다.
환마를 돌려보내고 난 후, 독고운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앉아서 생각에 잠겼다. 제갈중천도 취월도 거의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세 사람은 천마신교도 혈마회에 뭔가 핍박을 받고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것 외에는 상식적으로 이번 일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나니 혈마회가 더더욱 무서워졌다. 천하의 천마신교가 무림맹에 손을 내밀 정도로 대단한 곳이니 무서울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무서운 곳이군. 혈마회......"
독고운의 독백이 집무실 바닥에 나직이 깔렸다.
환마는 팽가에서 나와 은밀하게 움직임으로 하북의 비밀 거점으로 향했다.
사실 환마가 이렇게 빨리 무림맹으로 올 수 있었던 것은 천마신교의 정보조직을 정비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하북에 정보조직을 구성하는 중에 교주로부터 날아온 전서구를 받고 움직였던 것이다.
비밀거점에 도착한 환마는 교주에게 전서구를 날렸다. 무림맹과 협의한 내용을 보고하기 위함이었다.
"정천맹이라...... 터지기 일보 직전의 천마신교로서는 참으로 좋은 기회지."
무림맹과 협의 하에 정천맹을 치는 거니 구대문파나 무림맹의 견제를 고려할 필요 없이 그냥 힘을 분출하기만 하면 된다.
사실 지금 천마신교는 마인들의 급격한 유입으로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자연스럽게 힘을 쏟을 기회를 만들어 주지 않으면 곤란한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단형우로부터 온 명령은 그야말로 가뭄에 단비였다. 물론 제갈린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긴 하겠지만 그런 것은 상관없었다.
단형우는 천마신교의 신이었고, 단형우의 말이라면 무조건 이행해야 한다. 물론 그 사실을 아는 교도는 많지 않겠지만 말이다.
환마의 머릿속에서 수많은 계획들이 명멸했다.
일단 천마신교에서 마성이 너무 짙어 다루기 힘든 마인들을 중심으로 정천맹을 치고, 그 틈을 타서 중원 전역에 치밀한 정보망을 구성할 것이다.
그것은 차후 천마신교의 거대한 힘이 되어 줄 것이 분명했다. 환마는 모든 것이 잘 될 거라 자신했다.
혈마자는 인상을 찌푸렸다. 요즘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점점 분노가 치밀었지만 꾹 눌러 참았다.
"또 실패한 것이냐."
혈마자의 나직한 말에 무영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찌되었건 실패는 실패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지금까지 무영이 실패한 것이 몇 번인가.
"죄송합니다. 설마 무림맹으로 몰려간 서른 개 문파가 단번에 당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아무리 서른 개나 되는 문파가 몰려갔다 하더라도 무림맹이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막을 수 있다.
하지만 무영은 무림맹이 섣불리 대응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섣부른 대응은 너무 큰 피를 흘리게 될 테니까. 그렇게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전혀 계획한 대로 되지 않았다. 서른 개 문파가 맥없이 당하고 물러난 것이다.
그로인해 무림맹에 돌아간 피해는 전무했다. 더구나 그 일로 인해 무림맹이 다른 문파들에게 거는 공작이 훨씬 큰 효과를 보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실패를 했다는 거다. 그리고 그 이유가 바로 단형우라는 놈 때문이라는 사실이지."
혈마자는 이를 갈았다. 단형우, 단형우. 최근 혈마회의 일이 실패할 때마다 얽혀 있는 이름이 단형우였다. 더 이상 이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그놈 지금 어디 있는지 확인했느냐?"
"지금은 하남표국에 있습니다. 조금 전 확인한 사람이니 확실합니다."
무영의 대답에 혈마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덥지 못했지만 혈영이 없는 지금 이나마 믿을 만한 수하는 무영뿐이다.
"그럼 우선 무림맹을 정리하는 게 낫겠군. 어차피 대계는 틀어졌다. 조금 더 강하게 나갈 필요가 있어. 오늘 밤 당장 움직일 수 있는 모든 인원을 끌고 무림맹을 정리해라."
"하지만 무림맹에는 월영이......"
무림맹, 정확히는 무림맹이 있는 하북팽가는 취월이 설치한 진법으로 보호되고 있다. 아무리 강력한 고수들을 모아도 진을 뚫지 못하면 말짱 헛일이다.
"인원을 최대한 끌어 모아. 그래서 포위해라. 한 놈도 빠져 나오지 못하도록."
무영이 얼굴이 그제야 조금 밝아졌다.
"그리고 독강시를 데리고 가라. 남아 있는 철강시도 모조리 끌고 가. 철영대를 움직이면 인원은 대충 맞출 수 있겠군. 깨끗이 쓸어버리도록."
혈마자의 말에 무영이 깊이 고개를 조아렸다.
"존명."
무영은 대답과 동시에 사라졌다. 이번에는 정말로 자신 있었다. 단형우도 없는 무림맹 따위, 상대가 될 리 없었다.
이번에는 진 안에 숨을 수도 없다. 계속 그렇게 있다가는 굶어 죽을 테니까.
무영은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철영대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팽가를 포위하려면 많은 인원이 필요하다.
현재 혈마회에서 가장 많은 인원을 보유한 곳이 바로 철영대다. 철영대와 강시들을 합해서 적어도 천 명은 가야 제대로 작전을 펼 수 있을 것이다.
그날, 천 명에 이르는 인원을 이끌고 무영이 팽가를 향해 떠났다.
"드디어 연락이 왔군. 준비해라."
천마의 명에 앞에 공손히 서 있던 사내들이 동시에 읍을 했다.
"명을 받듭니다."
혈도객을 중심으로 하는 천마신교의 강력한 무사들은 언제라도 달려 나갈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
천마는 끓어 넘치는 천마신교의 힘을 발산한 곳을 찾았다는 사실에 적지 않게 안도했다.
이대로라면 교를 안정시키기도 전에 터져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물론 단형우가 조금만 도와준다면 어떻게든 할 수 있었겠지만 천마는 단형우가 나서는 것이 싫었다. 아니, 두려웠다.
"하늘에서 내려온 마신께서 지켜보고 계신다. 이것은 성전(聖戰)이다."
"와아아!"
천마의 말에 교도들이 함성으로 화답했다. 사실 그들에게는 성전이고 뭐고 중요치 않았다.
그저 힘을 터트리는 것이 더 급했다. 그간 마인들은 너무 억눌러 있었다.
덕분에 이렇게 쉽게 하나로 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젠 모았던 것을 잠시 풀어줘야 할 때다.
"개전(開戰)!"
웅혼한 내력을 가득 담은 천마의 외침이 하늘에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천마신교의 무사들이 쏜살같이 몸을 날렸다. 중원을 향해. 정천맹이 있는 곳을 향해.
일단의 무리가 하북에 스며들었다. 그들은 밤의 어둠을 틈타 팽가로 향했다. 적어도 천 명이 넘는 인원이 팽가를 둘러싸고 있었다.
밤의 팽가는 진법으로 철저히 보호된다. 아무도 그 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
당연히 팽가를 둘러싼 그들도 침입은 불가능했다. 대신 그들은 팽가를 완벽하게 포위했다. 물 샐 틈 없이.
그렇게 아침이 되었다.
팽가 가주 팽진평은 아침 일찍 일어나 평소와 다름없이 경계 무사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아침에 일어나 하는 진의 해체만은 언제나 팽진평이 직접 했다.
팽가 주변을 일차적으로 감싸는 진의 중심이 되는 곳은 정문에 있었다.
정문 근처에 무사들이 모여 담장을 돌며 밤새 경계를 서고, 담장 밖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확인을 했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팽진평이 그들의 보고를 받은 후 진을 해제한다.
팽진평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무사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한데 오늘은 왠지 평소와 분위기가 달랐다. 무사들이 크게 긴장하고 있었다.
무사들은 팽진평이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자신들까지 심각한 표정으로 뭔가를 의논하는 중이었다.
"밤새 별 일 없었는가?"
팽진평의 말이 들리자 그제야 무사들이 팽진평을 바라봤다. 무사들의 표정에는 긴장이 가득했다. 팽진평은 직감적으로 뭔가 일이 터졌다는 것을 눈치 챘다.
얼마 전에도 수백의 무사들이 팽가에 몰려온 적이 있었기 때문에 무사들도 크게 당황하지는 않은 듯했다.
"가주님, 장원이 완벽하게 포위됐습니다."
"포위? 그게 무슨 말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일단의 무리가 나타난 갑자기 장원을 포위했습니다. 저희도 날이 밝고서야 그것을 발견했습니다. 밤에는 달이 뜨지 않아 워낙 어두워서......"
밤이 어두운 것도 문제가 있었지만 사실 그들이 제대로 발견하지 못한 것은 팽가를 포위한 자들이 간단한 진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어둠과 함께하면 훨씬 효과적인 진법이었기 때문에 밤에는 발견하지 못하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간신히 발견한 것이다.
팽진평은 무사의 보고를 듣고 심각한 표정을 말했다.
"두 번째 방어진을 발동시키게."
팽진평의 명에 무사들이 포권을 취하며 대답했다.
"즉시 시행하겠습니다."
무사들이 두 번째 진을 발동시키자 팽진평은 무림맹으로 향했다. 무림맹을 받아들인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이후로 너무 일이 크게 벌어지니 기분이 좋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 일을 해결하려면 무림맹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다.
팽가를 완벽하게 포위할 정도라면 그 인원이 대체 몇이나 된단 말인가.
적어도 천 명은 되어야 그렇게 할 수 있다. 그 천명이 그저 그런 무사인지 아니면 고수인지에 따라 팽가가 무사할지 아니면 그렇지 않을지가 결정될 것이다.
"후우......"
팽진평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밖이 소란스럽네요."
조설연의 차분한 말에 검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구나."
검왕은 그렇게 대꾸한 후 종칠을 쳐다봤다. 종칠은 왜 자신을 쳐다보느냐는 듯한 눈으로 검왕을 마주보다가 결국 뒤통수에 혹을 하나 달아야 했다.
쾅!
"커억! 이게 대체 무슨 만행입니까!"
종칠이 바락바락 대들자 검왕이 인상을 팍 썼다.
"가서 알아봐."
검왕의 말에 종칠은 더 대드는 것을 포기하고 숨을 씩씩대며 밖으로 나갔다.
종칠 역시 지금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럴 때는 정보가 생명이라는 것도.
잠시 후, 나갔던 종칠이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한 마디를 던졌다.
"팽가가 포위되었다는데요?"
종칠의 말에 검왕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포위? 대체 누가? 왜?"
"그걸 제가 어찌 압니까."
종칠은 갑자기 올라가는 검왕의 주먹을 쳐다보며 급히 말을 덧붙였다.
"팽가에서도 모르는 것을."
"팽가에서도 모른다고?"
"그렇다니까요. 정체를 몰라서 안절부절못하던데요? 뭐 진법으로 막고 있으니 걱정할 건 없다고 하지만......"
종칠의 말에 검마가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진으로 막았으면 우리도 여기서 나갈 수가 없겠군."
검마의 말에 일행의 표정이 굳었다. 그들은 지금 팽가를 떠날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그럼 어쩌지요?"
"어쩌긴. 그냥 여기서 좀 더 기다려야지."'
일단 그렇게 결론을 내리긴 했지만 뭔가 큰일이 터진 것 같아서 불안했다.
조설연과 우문혜의 불안한 표정을 본 검마가 중얼거렸다.
"불안해할 필요 없다. 위험하면 알아서 올 거다. 보통 사람이 아니니."
검마의 말에 조설연과 우문혜는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 단형우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그들의 태도가 변하자 검왕과 검마가 슬쩍 웃었다.
사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팽가를 완전히 포위했다는 것은 물자의 유입이 막혔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사람은 먹지 않으면 절대 살 수 없다.
독고운은 암담한 표정으로 앞에 앉아 있는 제갈중천과 취월, 그리고 팽가주 팽진평을 바라봤다. 사태가 너무 심각했다.
"그러니까, 비축해 놓은 식량이 거의 없다는 뜻이오?"
"그렇습니다."
당연했다. 천하에 누가 팽가를 둘러싸서 포위할 생각을 하겠는가. 팽가처럼 거대한 장원을 둘러싸려면 막대한 인원이 필요하다.
설혹 막대한 인원을 들여 포위를 하더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히려 전력이 분산되어 피해가 커질 뿐이다.
그러니 팽가가 그런 일에 대비할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이번 상대는 혈마회였다. 혈마회는 정말로 작정하고 무림맹을 죽이려 마음먹은 듯했다.
"뚫으려는 시도는 해봤소?"
독고운의 질문에 팽진평이 쓴웃음을 지었다.
"맹호대가 전멸했소. 대주인 만호만 간신히 살아서 도망쳤고, 그 와중에 하마터면 진이 박살날 뻔했소."
팽진평의 말은 좌중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맹호대가 어디인가. 팽가의 최정예 무사들만 모아 놓은 곳이다.
그런 맹호대가 전멸했다니, 대체 팽가를 포위한 자들의 무위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그렇게나 대단했소?"
"매호대가 전멸하는데 걸린 시간이 채 일 각이 안 됐다고 했소. 만호가 한 말이니 정확하오."
"그럴 수가......"
팽가의 맹호대에 속한 무사들의 수준은 무림맹 청룡단에 속한 무사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엄밀히 따지면 무림맹 쪽이 조금 위지만 수준을 논하자면 엇비슷했다.
그런 맹호대가 일각도 되지 않아 전멸했다면 적의 능력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뜻이다.
"아무래도 포위를 뚫기가 쉽지 않겠군요."
이들은 모르고 있지만 팽가를 포위한 포위망에는 강시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혈마회에 남은 모든 철강시와 독강시 두 구가 있었기에 맹호대가 당할 수밖에 없었다.
혈마회의 독강시는 살아생전에는 무황과 패룡이라 불리던 자들이다.
십대고수에서도 상위에 속하는 자들이 독강시로 다시 태어났으니 누가 그들을 막을 수 있겠는가.
이대로라면 무림맹이고 팽가고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다. 이들의 생각이 자연스럽게 하남표국 쪽으로 흘렀다.
현재 하남표국에서 온 사람들 중에 검왕과 검마가 있다. 그들을 이용하면 어찌어찌 해볼 수 있을 듯했다.
"일단 하남표국 사람들에게 말이라도 한 번 꺼내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취월의 말에 독고운이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보게. 자네가 조금 안면이 있으니 직접 해보는 것이 어떤가."
"그렇게 하겠습니다."
취월은 대답을 하자마자 밖으로 나갔다. 이런 일은 뜸을 들일 필요가 없었다. 아니, 지금은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무영은 느긋한 자세로 팽가를 지켜봤다. 아직 진은 해제되지 않았다.
그래서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다들 나오게 되어 있다. 굶어 죽지 않으려면 말이다.
"이렇게 간단한 임무를 받은 것이 정말 얼마만인지......"
무영은 지나간 나날들을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간 제대로 임무를 수행한 것이 드물 정도였다.
이 모든 것이 단형우가 나타난 이후부터였다. 혈마회의 계획이 꼬이기 시작한 것도 딱 그때부터였다.
아무튼 오늘은 기다리다가 밖으로 나오는 놈들만 잡아 족치면 되는 간단한 임무다. 더구나 이쪽에는 아주 강력한 패를 준비 중이다.
무영은 한쪽에 서 있는 두 사람을 쳐다봤다. 무황과 패룡, 살아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우러름을 받던 무인들이다.
하지만 지금은 독강시가 되어 충실히 자신의 명령을 따르는 수족이 되었다.
팽가를 포위한 후, 맨 처음 등장한 자들이 바로 맹호대였다.
그들은 단숨에 포위망을 뚫어버리려 몸을 날렸지만 바로 패룡과 무황에 의해 전멸 당했다.
살아 있을 때도 누구도 대적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던 두 사람이다.
독강시가 되어 그때보다 훨씬 강해졌으니 이젠 설혹 십대고수가 오더라도 어찌 할 수 없을 것이다. 무영은 그렇게 믿었다.
"자아, 이제 어떻게 할 것이냐. 팽가."
무영은 입가에 걸친 미소를 더욱 크게 그리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팽가 정문이 조용히 열리기 시작했다.
문이 열린다 해서 진이 해제되는 것은 아니다. 문이 활짝 열려도 진은 그대로다.
다만 문 부분에 연결된 진의 흐름을 잠시 끊으면 문으로 사람이 들락거릴 수 있었다.
오전에 나왔던 맹호대 역시 그런 식으로 나왔다.
덕분에 팽만호가 도망칠 때 철영대 몇이 따라 들어가 팽가 안을 잠시 휘저을 수 있었다. 물론 그들은 죽임을 당했다.
무영은 밀린 문틈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보며 눈을 빛냈다. 거물이 나왔다. 이건 예정에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저자들이......."
무영의 눈에 비친 사람은 검왕과 검마였다.
검왕과 검마는 취월의 부탁을 흔쾌히 수락했다. 일단 가만히 기다리기가 너무 지루했고, 팽가가 포위된 상황에서 밥까지 굶을 수는 없었기 떄문이다.
검왕과 검마 뒤에는 종칠이 못마땅한 얼굴로 따라 나오고 있었다.
"젠장. 내가 왜 마차를 몬다고 했을까. 그냥 표국에 남아 있었으면 아리따운 장 소저랑 이런 것도 하고 저런 것도 하고......에잇, 젠장."
"이놈아, 조용히 못하겠느냐!"
검왕의 호통에 종칠이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심통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북해빙궁과 싸운 것이 바로 얼마 전이다. 한데 또 그런 치열한 싸움을 해야 한다니 기가 막혔다. 그리고 그렇게 기가 막힐수록 장화영이 떠올랐다.
종칠은 검왕과 검마를 따라 한 걸음 더 앞으로 나가려 했다. 하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검왕의 손이 어느새 종칠의 가슴을 밀고 있었다.
"넌 거기 있어라."
검왕의 말에 종칠의 눈이 동그래졌다. 농담은 아니었다. 검왕과 검마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상황을 말해 주고 있었다.
"무슨 일인데......"
종칠의 눈이 밖으로 향했다. 그리고 화등잔만 해진 눈을 하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정문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은 분명 죽었던 사람들이다. 그들의 죽음은 종칠이 똑똑히 목격했다. 그렇다면 이유는 단 하나다.
"강시......"
"천하의 무황과 패룡을 강시로 만들다니. 혈마회인지 뭔지 보통 놈들이 아닌데?"
검왕이 섬뜩한 눈빛을 흘리며 말하자 무영이 앞으로 나섰다.
"그것이 하남표국이나 검왕만 하겠소이까. 하하하핫!"
검왕과 검마의 눈이 동시에 무영에게로 향했다. 진득한 살기가 사방에 흘러나갔다.
"입구를 막아라."
검왕의 말에 팽가 무사들이 끊어졌던 진의 흐름을 다시 이었다.
이제 그 누가 오더라도 팽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 사람이 단형우만 아니라면 말이다.
종칠은 긴장과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검왕과 검마를 쳐다봤다.
검왕과 검마가 얼마나 강한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상대는 무황과 패룡이다. 게다가 강시다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검왕과 검마는 피식 웃으며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상대가 무황이고 강시라도 상관없었다.
두 사람은 예전의 십대고수가 아니다. 단형우로 인해 훨씬 강해졌다. 그리고 천섬과 혈영검이 있다. 검왕과 검마의 눈에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자, 슬슬 시작해 볼까?"
검왕이 먼저 천섬을 뽑았다. 그와 동시에 천섬에서 벼락 다섯 줄기가 뻗어 나갔다.
빠지지직!
"크아아악!"
다섯 줄기 벼락은 무황 뒤에 서 있던 철영대 다섯을 새까맣게 구워 버렸다. 검왕은 만족한 눈으로 천섬을 이리저리 휘둘렀다.
"슬슬 오는 게 어때?"
검왕의 말에 무황과 패룡이 동시에 움직였다. 그리고 검마가 혈영검을 뽑았다. 진득한 살기가 핏빛 안개를 타고 무황과 패룡을 향해 흘러갔다.
순식간에 일 대 일 대결 구도가 만들어졌다. 무황은 자연스럽게 검왕과 부딪쳤고, 패룡은 검마와 대치했다.
사방에 핏빛 안개가 퍼져나갔고, 뇌전이 번득였다. 싸움이 점점 흉험해졌다.
누구도 그 싸움에 끼어들거나 관여할 수 없었다. 네 사람은 그들만의 공간에서 그들만의 싸움을 이어나갔다.
정천맹은 지금 일촉즉발의 분위기였다. 맹주인 천영은 분노 가득한 표정으로 검을 꽉 쥐었다.
"이대로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소. 지금 즉시 적들을 맞이하러 나갑니다."
천영의 말에 정천맹 수뇌부는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천마신교가 정천맹을 목표로 쳐들어왔는데 그냥 앉아서 당할 수는 없었다. 최대한 힘을 끌어 모아 적을 쳐부숴야 했다.
천영은 혈마회에서 준 모든 힘을 출정시키기로 했다.
현재 정천맹의 가장 큰 힘이 바로 그들이다. 천마신교의 기세가 너무 대단해 그들을 아낄 여력이 없다 판단했다.
"갑시다."
천영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정천맹 수뇌부가 그를 따라 나섰다. 정천맹 역시 무림맹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문파들이 모여 이루어진 곳이다.
그들은 원래 무림맹에 속해 있었지만 등을 돌리고 정천맹을 끌어안은 자들이다.
처음 그렇게 할 때만 해도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만일 정천맹이 천마신교와 싸우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무림맹에 등을 돌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무림맹도 잿더미로 변했지만 말이다.
정천맹과 천마신교의 수많은 무사들이 넓은 평원에서 마주쳤다.
천마신교의 마인들은 너무나 피가 그리웠다. 적이 눈앞에 보인 순간 명령도 계략도 필요 없었다. 그들은 별다른 탐색전도 없이 바로 싸움에 돌입했다.
이곳이 넓은 평원이었기에 계략을 쓸 수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물론 이런 상황을 의도적으로 만든 것이 바로 환마의 능력이었다.
그렇게 천마신교와 정천맹이 처절한 싸움을 시작했다.
쩡! 쩡!
꽈르릉!
연달아 벼락이 떨어지고 검광이 난무했다. 시꺼먼 독연이 피어올랐고, 그것이 불길에 휩싸였다.
네 명의 절대고수가 싸우는 광경은 정말로 놀라웠다.
이렇게 화려한 싸움은 아마 평생 가도 구경하기 어려울 것이다. 네 사람의 싸움을 지켜보는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검왕은 천섬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무황의 공격을 차단했다. 무황은 정말로 강했다.
비록 천마에게 지긴 했지만 그래도 천하 제일인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다.
게다가 독강시가 되면서 예전보다 훨씬 큰 힘을 가지게 되었다. 이래저래 검왕이 상대하기 너무나 까다로운 자였다.
무황의 몸에서 연방 시꺼먼 독연이 피어났다.
다행이 검왕이 가지고 있는 검이 천섬이었기 때문에 독연의 피해는 입지 않았다. 천섬의 뇌기가 독기를 깨끗이 태워버렸기 때문이다.
검왕과 무황은 그렇게 팽팽한 줄다리기를 이어갔다.
검마와 패룡의 대결 역시 비슷했다. 패룡이 비록 십대고수에 속했던 고수이고 독강시가 되어 더 강해지긴 했지만, 확실히 무황보다는 몇 수 아래였다.
그런 패룡이 혈영검을 든 검마에게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패룡에게는 독이 있었다.
검마는 패룡의 독을 해소시킬 방법이 별로 없었다. 천섬을 들고 있었다면 벌써 결판이 났겠지만 그렇지 않으니 싸움의 양상이 점점 답답해졌다.
물론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화려했지만.
검왕과 검마는 그런 식으로 계속 싸우다가 서로의 눈을 쳐다봤다.
그간 몇 번이나 함께 힘을 합했던 두 사람이다. 눈빛만 보고도 서로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 오는 듯했다.
파직! 파직! 파지지직!
천섬에서 뇌기가 마구 쏟아져 나왔다. 사방이 뇌기 천지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혈영검에서 흘러나오던 핏빛 안개가 모조리 검으로 흡수되었다. 혈영검이 요사스런 붉은 빛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검왕과 검마가 서로를 향해 뛰어들었다. 두 사람의 등은 완벽하게 무황과 패룡에게 드러났다.
그 기회를 놓칠 무황과 패룡이 아니다. 두 강시는 쏜살같이 상대의 등판에 거대한 힘을 작렬시켰다.
쩌저저저정!
뭔가가 깨지는 소리가 연달아 올렸다. 사방으로 강기의 파편이 튀어올랐다.
싸움을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은 검왕과 검마가 크게 다치거나 죽었을 거라 생각했다.
먼지와 강기가루가 너무 많아 제대로 확인하기가 어려웠지만 정황상 분명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이럴 수가......"
무영은 억눌린 신음을 흘렸다. 드러나 광경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검마가 무황의 공격을 거의 완벽하게 막아낸 채 한쪽 무릎을 굽히고 있었다.
그리고 검왕이 천섬의 뇌기를 이용해 패룡의 독을 모조리 태워 버리고 그대로 패룡의 정수리에 천섬을 박아 넣은 상태였다.
쩌저저적!
털썩.
패룡이 둘로 가라지며 바닥에 쓰러졌다. 갈라진 틈은 예전에 단형우에게 한 번 당했던 곳이었다. 검왕의 힘이 정수리에 몰리면서 막았던 상처가 벌어진 것이다.
패룡의 몸에서 시꺼먼 독연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천섬을 들고 있는 검왕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못했다.
빠지지직!
천섬에서 흘러나온 뇌기가 독연을 깨끗이 태워 버렸다. 더불어 둘로 갈라진 패룡이 뇌기에 휩싸였다.
검왕은 천천히 뒤로 돌며 천섬을 가볍게 휘둘렀다.
빠지직!
뇌기가 공간을 가르며 무황을 향해 날아갔다.
푸쉬쉬쉭!
무황과 검마 사이에 있던 독기들이 깨끗이 불 타 사라졌다. 검마는 슬쩍 미소 지으면 천천히 굽혔던 무릎을 폈다. 무황이 점점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이제 끝내 볼까?"
혈영검과 천섬이 동시에 움직였다. 사람들의 눈에는 핏빛 안개와 새하얀 뇌전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것들이 모두 사라진 자리엔 새까맣게 탄 시체 한 구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검왕과 검마는 싸움이 끝나기 무섭게 팽가 정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어느새 종칠이 진의 흐름을 끊고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이 문으로 들어서자 다시 진이 맹렬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무영은 그 모든 것을 멍한 눈으로 쳐다봤다. 독강시 두 구가 당한 사실이 너무 충격적이라 검왕과 검마를 뒤쫓으라는 명을 내리지도 못했다.
문득 이번 일은 어쩌면 거의 실패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형우는 하남표국에 들어온 후로 한동안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가만히 서서 최근 들어 생긴 자신의 변화를 천천히 관조했다. 몸의 변화가 아니라 마음의 변화였다. 단형우는 정말로 많이 변했다.
처음 지옥에서 세상으로 다시 나왔을 때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많은 것을 가졌다. 친구들이 생겼고, 가족이 생겼다. 그리고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그렇게 며칠 동안 마음을 정리한 단형우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저 며칠 마음을 정리한 것뿐인데 하늘이 달라보였다. 이 역시 마음이 일으킨 변화라 생각하니 왠지 웃음이 나왔다.
단형우의 얼굴에 맑은 미소가 어렸다.
갑자기 세 여인이 보고 싶어졌다. 이곳에 와서 얻은 친구와 가족들 중 가장 마음이 가는 사람들이다.
단형우의 걸음이 팽가 쪽으로 향했다.
팽가 정문 앞에 도착한 단형우는 주변에 늘어선 사람들을 슬쩍 확인한 후에 안으로 들어섰다.
취월의 진법이 워낙 촘촘하게 돌아가고 있어서 하남표국에서는 조설연과 우문혜의 위치를 정확하게 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문 앞에 도착하니 선명하게 위치를 알 수 있었다.
단형우의 모습이 우문혜와 조설연 앞에 나타났다. 두 여인은 단형우를 보고서 깜짝 놀랐다. 설마 이렇게 데리러 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가자."
단형우는 다짜고짜 두 여인의 손을 잡았다. 우문혜와 조설연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 순간, 세 사람은 다시 하남표국 단형우의 방에 있었다.
"아, 검왕과 검마 어르신은......"
하남표국에 도착하고 나서야 검왕과 검마가 떠올랐다. 그만큼 두 여인이 단형우 때문에 마음고생을 했다는 뜻이었다.
단형우를 본 순간 다른 어떤 것도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단형우는 두 여인의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제갈린이 있는 곳이었다.
단형우는 한자리에 모여 세 여인을 보며 다시 한 번 맑은 미소를 피워 올랐다. 세 여인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단형우와 세 여인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사이 무림의 싸움은 점점 막바지로 접어들고 있었다.
혈마자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혈마자는 무미건조한 얼굴로 보고하는 조영의 말을 들으며 점점 광포해지는 기세를 그대로 하늘로 올려 보냈다.
조영은 보고가 끝나기 무섭게 사라졌다. 이대로 있다가는 목숨이 위험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머저리 같은 놈들!"
혈마자는 이렇게 허무하게 이번 일이 실패할 줄은 몰랐다. 그리고 설마 천마신교가 그때 움직일 줄은 몰랐다.
천마신교는 스스로의 몸을 추스르기도 바쁠 시기인데 대체 왜 멀쩡한 정천맹을 공격한단 말인가.
게다가 서서히 구대문파가 움직이고 있었다. 구대문파는 명분이 서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다.
이번 무림맹과의 싸움에 동원된 강시들이 문제였다. 다른 것보다 패룡과 무황의 독강시가 문제가 되었다.
구대문파가 주목한 것은 십대고수가 강시로 화했다는 점이었다. 이것은 그들에게 있어서도 큰 위협이었다. 결국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취월은 가지고 있던 정보를 그때 풀었다.
취월이 가지고 있는 정보는 정천맹에 관련된 것이었다. 패룡과 무황이 어떻게 해서 독강시가 되었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천마신교와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던 정천맹에 이것은 치명적인 일격이 되었다.
구대문파뿐 아니라 무림 유수의 문파들이 정천맹에 칼을 들이댄 것이다.
"대체 어쩌다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단 말인가!"
혈마자의 외침이 대전을 흔들었다. 사실 일이 이렇게 꼬인 데에는 혈마자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었다.
취월을 얻기 위해 그의 무공을 빼앗은 것이 결국 이렇게 비수가 되어 날아온 것 아닌가.
취월이 무림맹에 있지 않고 혈마회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훨씬 더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하지만 혈마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혈마자는 일을 이렇게 만든 원흉으로 단형우를 지목했다.
단형우였다. 모든 일이 틀어지게 된 것은 단형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는 천기자의 전인, 혈마자가 지금 생각하기에 단형우는 천기자 그 자체였다.
"네놈만은 반드시 죽인가. 으드득."
혈마자는 이를 갈았다. 가지고 있는 모든 힘을 이용해 단형우를 세상에서 지워 버릴 것이다. 하남표국을 없애 버릴 것이다.
혈마자의 눈이 광기로 물들기 시작했다.
혈마자는 남아 있는 모든 것을 동원했다. 정천맹의 힘은 이제 더 바랄 수 없었다. 정천맹은 아마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철영대도 없다.
철영대는 무림맹을 이기지 못한다. 그곳에는 검왕과 검마라는 고수가 있으니까. 우내사존이라 불릴 정도로 강한 자들 아닌가.
그렇다면 남은 것은 정보를 다루는 조서단과 혈마자의 근거지를 지키는 화영대, 그리고 혈마자의 가장 큰 힘이 되어줄 혈마대가 있다.
혈마자는 그 모두를 동원했다. 그 밖에 자잘한 힘들이 몇 개 있긴 하지만 그런 것들은 그냥 무시했다.
어쩌면 나중에 그들이 뭔가 일을 벌일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은가.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혈마자를 중심으로 하는 수많은 무사들이 하남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혈마자는 분노와 광기에 몸을 맡기고 불나방처럼 하남표국을 향해 몸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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