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수필문학관 아카데미 6기-10차 습작품 종합(2017년 7월 3일 용)
1. 기적 / 김순동
세상은 신비로운 변화의 연속이다. 적자생존하면서 도태되기도 하고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환경에 적응하며 변이, 진화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자연의 법칙이요 생명영위에 불과하다. 생명의 근원에 관한 것은 모두가 신비요 기적이 아닌가 싶다.
나는 부모님의 끝없는 바람에 의해 태어났다. 딸 넷을 둔 어머니는 대를 이을 자식을 얻기 위해 조상의 영전에 수없이 빌고 정성을 드렸다. 이렇게 태어나서인지 기적 같은 일을 수차례나 겪었다.
어머니는 세 살 배기인 나를 여섯 살 된 누나에게 맡겨둔 채 삼백 미터나 족히 떨어진 방앗간에 곡식을 빻으려 가셨다. 대문을 열면 넓은 공지가 있고 그 끝자락에는 꾀 큰 물웅덩이가 있었다. 이곳은 이름 모를 야생초들이 벌과 나비를 불러 모았다. 개구리가 알을 낳고 방아깨비가 헤엄쳐 다니는 생명이 꿈틀대는 공간이었다.
아마도 어머니께서는 대문 밖으로는 나가지 말라고 누나에게 신신 당부를 했으리라. 그러나 나는 대문을 밀치고 나가 나비를 따라 물웅덩이 속으로 빨려 들었다. 뒤늦게 웅덩이에 빠진 나를 본 누나는 방앗간까지 달려가 이 사실을 알려 어머니는 맨발로 뛰어와 나를 건져내셨다. 어른 가슴팍까지 차오르는 물웅덩이에서 짧지 않은 시간동안 물속에 잠기지 않은 채 떠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분명 기적적인 일이었다.
내가 성장하는 동안 어머니께서는 그때의 기억을 되살리면서 너는 조상이 돌보고 하늘이 도우시니 매사에 감사하면서 살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초등학교 2학년 무렵인가 농토가 있는 수성들로 이사를 했다. 나는 친구들과 해어지는 것이 아쉬워 먼 길이지만 전학하지 않고 그냥 다녔었다. 학교를 갈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중동교는 나무로 만들어진 오래된 다리였다. 이사 온지 일 년이 채 못 되어 다리의 서쪽 편이 무너져 버렸다. 남은 반쪽 다리는 여름밤이면 마을사람들이 더위를 식히고 잠을 자는 공간이 되었다. 다리 밑에도 낮잠을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 찼고 물이 있는 곳은 물놀이와 고기를 잡는 곳이 되었다.
나는 다리 밑에서 친구들과 고기를 잡고 있었다. 대나무 소쿠리를 받쳐대고 위에서 고기를 몰면 크고 작은 미꾸라지와 붕어가 잡혔다. 우리는 고기 잡는 재미에 시간가는 줄을 몰랐다. 그러는 순간 폭탄이라도 터진 것 같은 굉음과 함께 흙먼지가 시야를 가렸다. 반쪽 남은 다리가 내 코를 스치며 무너진 것이다. 같이 고기를 잡던 친구도 사라져 버렸다. 50명이 넘는 사상자가 났으나 나는 기적적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5학년 때였다. 연탄도 없던 때라 사람들은 산에 있는 나무를 베어와 땔감으로 썼다. 벌거숭이가 된 산은 물을 수용할 능력을 잃어 비가 조금만 와도 방천은 황토물이 흘렀다. 다리가 무너지고 없는 터라 내겐 비가 오는 것이 가장 큰 걱정이었다.
여름방학을 앞둔 어느 날 온종일 비가 와 방천은 건너기 힘들 정도로 물이 불었다. 어머니는 물이 줄때까지 학교에 가지 말라고 한사코 말리셨다. 나는 잦은 결석으로 성적이 크게 떨어진 터라 더 이상 결석을 할 수가 없어 물을 건너기로 결심했다. 바지를 벗어 가방 속에 구겨 넣고 몇 발 내디뎠으나 순식간에 물에 휩쓸렸다. 어머니의 목멘 소리가 잠시 귓전에 들리는 듯 했으나 이내 정신을 잃은 채 끝없이 떠내려갔다.
정오가 넘었을 무렵 따가운 햇살을 느끼면서 눈을 떴다. 입으로 물이 왈칵 솟아져 나왔다. 두 다리는 물속에 잠긴 채 상체는 물가 자갈위로 걸쳐 스러져 있었다. 비틀거리면서 일어나 맨발로 방천 둑의 비포장 길을 따라 집으로 걸어 왔다.
우리 집은 초상집처럼 마을사람들이 들락거렸다. 아버지는 괴로운 표정으로 묵묵히 앉아계셨고 어머니는 강제로라도 물을 건너게 하지 못한 것을 한탄이라도 하듯 흐르는 눈물을 훔쳐내고 계셨다. 대문으로 들어서는 나를 본 어머니는 맨발로 뛰어나와 껴안으셨다. ‘살아 왔구나.’ 하고 감격스러워 하셨던 그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겨울, 최전방 관측소에서 근무할 때였다. 산 북쪽 팔부능선에 지은 벙커에서 적의 동태를 관찰하는 것이 일과였다. 늦은 밤이 되면 업무를 병사에게 인계하고 산 남쪽에 움을 파서 지은 한 평 남짓한 초가에서 새우잠을 자곤 했다. 적이 몰래 내려와 목을 베어간 일이 가끔 있었다. 나는 늘 군화를 신고 탄창을 채운 캘빈자동소총을 잡은 채 잠을 잤다.
진눈개비가 펑펑 쏟아져 평야가 온통 흰 눈으로 덮이는 꿈을 꿨다. 저 멀리서 검은 점하나가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붉은 치마를 입은 여자였다. 그러나 점점 다가와 방문을 덮쳤을 때는 얼굴도 팔다리도 없는 붉은 치마뿐이었다. 벌떡 일어나 총을 잡고 방문을 열었다. 밤새 눈이 내려 온천지가 새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다.
곧, 한 병사가 와서 제설작업을 인솔하라는 상관의 명령을 전했다. 지난번에도 관측소 병사들을 대동해서 제설작업을 했던 가파른 절벽이 붙어있는 산길이었다. 순간 악몽을 꾼 생각이 났다. 사실, 그곳의 제설작업은 나를 포함한 관측소 병력이 동원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았다. 관측업무를 순간이라도 비움으로서 오는 모든 책임은 내게 있었다.
병사는 ‘소대장님이 밤새 배가 아파 한숨도 자지 못하고 지금도 심하다‘고 전했다. 그 후 두어 시간이 지나자 제설작업을 갔던 인솔자와 병사가 탄 자동차가 절벽 아래로 미끄러져 모두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꿈이 나를 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이지 않는다고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닌 것처럼 이 세상 어딘가 엔 무한의 힘이 삶과 주검의 리스트를 작성하고 있는 것일까. 어머니께서 남긴 말씀처럼 매사에 감사하며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사는 것이 도리가 아닌가 싶다.
2. 옛 직장을 찾아 /심찬용
퇴직으로 인해 인생의 뒤안길로 물러났다. 무료하게 지내던 어느 날 퇴직을 한 달 앞둔 친구가 근무하는 학교를 찾았다. 이 학교는 내가 이삼십 대에 십 년간 청춘을 불사르던 곳이기도 하다. 내가 머문 직장에는 좀처럼 가지 않는데. 교장실로 들어서니 친구는 반갑게 맞아주며 차를 대접한다. 차 한 잔을 마시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학교요람에 있는 직원명부를 보니까 아는 교사가 눈에 들어왔다. 반가웠다. 지난날 함께 근무했던 동료교사를 좀 만나 볼 수 있느냐고 하니 친절하게 교실로 안내해 주었다.
6-3반 표지판 앞에 멈추어 노크를 했다. 마침, 쉬는 시간이라 아이들이 교실 복도로 나오고 있다. 장 선생님은 깜짝 놀라면서 급히 달려나왔다. 우리는 이산가족 만나듯이 서로 손을 잡고 한참을 서 있었다. 그는 친구 여동생이며 옛날에 같은 학년을 지도했었다. 장 선생님도 이젠 흰머리가 희끗희끗 내려앉았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수업시간이 되어 아쉬움을 뒤로하고 헤어졌다. 옛 교실 앞에 서 보니 교사시절로 돌아간 기분이다.
이 교실은 내가 이십 대 후반에 아이들을 가르치던 교실이다. 문득 아이들과 함께한 추억이 떠오른다. 가을 소풍 때였다. 육년의 학교생활 중 마지막 졸업 기념으로 ‘용문사’로 소풍을 갔다. 아이들 가방 속에는 김밥, 과자, 떡, 밤과 또 하룻밤을 보낼 쌀을 한 공기씩 준비하였다. 오전 아홉시 반경에 교문을 나섰다. 1반부터 7반까지 줄을 지어 걷기 시작했다.
시골길은 자갈과 먼지투성이였다. 그 당시에는 차가 귀해서 한 시간에 한두 대 구경하기가 쉽지 않았다. 소가 끄는 수레가 많았다. 도로 옆으로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고개를 돌려보면 보이는 것은 울긋불긋한 단풍이 내려앉은 산들뿐이었다. 선생님의 호루라기 소리에 아이들은 줄을 맞추어 마치 군인들이 행군하듯이 씩씩하게 걸었다. 물론 행렬을 이탈하거나 낙오자도 없었다. 덥지도 춥지도 않는 날씨가 한 몫 했다. 긴 행렬이 두 시간 반 정도를 걸으니 ‘초간정’이란 정자가 반기고 있었다.
초간정은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인 ‘대동운부군옥’을 저술한 초간선생이 지은 집이다. 그곳을 가자면 반드시 개울을 건너야 한다. 개울을 건너기 위해 외나무다리인 흔들다리를 이용했다. 흔들다리는 양쪽에 손잡이가 있지만 높이가 10m 정도이고 아래에는 깊은 웅덩이가 있어 무척 위험했다. 우리는 초간정에서 자리를 잡고 점심을 먹었다. 소풍 중에서도 가장 즐거운 것은 역시 점심시간이다. 삼삼오오 모여서 각자 가져 온 음식을 나누어 먹으면서 추억을 싹 틔웠다.
즐거운 점심시간을 끝내고 우리는 다시 걸었다. 한 시간 반을 걸어 도착한 곳이 용문사였다. 이곳에는 불교 경전을 넣은 책장에 축을 달아 돌릴 수 있게 만든 ‘윤장대’라는 보물을 소장하고 있는 곳으로 우리 고장에서는 가장 유명한 사찰이다. 아이들은 그곳에 들어서자 절 입구에 서 있는 칼과 창을 든 사천왕들에게 압도당했다. 대웅전 부처님 앞에서는 큰절을 하는 아이도 보였다. 또 통나무를 타고 흘러내린 산삼 섞인 물을 조롱박으로 마셔보고, 어른 키로 한 질이나 되는 부엌과 큰 가마솥을 구경하였다. 이렇게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아이들에게는 모든 게 신기하기만 했었다.
사찰에 어둠이 내렸다. 큰 법당에 전 아동들이 둘러앉았다. 위쪽은 남학생 아래쪽은 여학생으로 갈라졌다. 저녁식사로 산채비빔밥이 나왔다. 먼 길을 하루 종일 걸어서 시장해서인지 아니면 밥이 맛있어서인지 잘 먹었다. 저녁밥을 먹고 난 뒤 모두가 동그랗게 둘러앉아 오락시간을 가졌다. 각 반 대표들의 노래와 춤 등으로 장기자랑이 벌어졌다. 목탁소리와 염불소리가 은은하게 울리던 사찰에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산천을 울렸다.
교실을 나와 운동장을 둘러본다. 이곳은 예전의 모습 그대로이다. 운동장을 바라보니 운동회가 눈앞에 펼쳐진다. 학교에서 운동회는 가장 큰 행사이다. 운동회의 제일 인기 종목은 텀블링이었다. 우리는 텀블링 연습을 하기 위해서 오후시간에는 모래사장으로 갔었다. 운동장에서의 연습은 위험하기 때문에 모래사장이 최고의 장소였다. 앞 냇가 모래사장에서 연습을 할 때 먼저 정신훈련부터 시작했다. 방심하면 대형사고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매일 긴장 속에서 얼굴이 까맣게 타도록 연습을 했었다.
마침내 가을운동회 날이었다. 만국기가 펄럭이고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머리띠를 두른 아이들은 목이 터져라 응원을 했다. 텀블링 차례가 되었다. 검정 팬티에 흰 샤스를 입고 마치 국군 의장대 같이 대형을 맞춘다. 제일 먼저 ‘산 무너뜨리기’가 시작된다. 조별로 여섯 아이가 말처럼 꿇어 엎드린다. 그 등 위에 네 아이가 또 그 위에 두 아이가 마지막에 아이가 올라간다. 선생님의 호루라기 소리에 고개를 똑 같은 방향으로 돌린다. 좌로 우로 마지막에 길게 호루라기를 불면 “야!”하는 함성 소리와 동시에 팔 다리를 쭉 펴면서 산을 무너뜨린다.
다음은 ‘사층 탑’ 쌓기다. 가장 위험한 놀이였다. 제일 힘이 세고 키가 큰 아이들이 빙 둘러 어깨동무를 하여 일층을 만들어 앉는다. 일층 어깨 위로 아이들이 올라가서 이층을 만들고 또 그 위를 올라가 삼층을 만든다. 마지막으로 올라가는 아이가 사층을 꾸민다. 지도교사의 구령소리에 맞추어 큰 함성과 함께 천천히 일층부터 일어선다. 전봇대 높이만한 인간 탑 위에 혼자 앉아 있는 아이가 간들간들 거리며 일어설 때는 운동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숨죽이며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맨 꼭대기 아이가 일어서서 팔을 양쪽으로 폈다 위로 올리면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다보탑과 석가탑도 아닌 꿈나무들의 탑이 완성되는 순간이 아닌가. 그제야 지켜보던 교사들도 안도의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옛 직장을 찾아 잠시 둘러보고 나는 까맣게 잊고 지낸 그 때 그 시절이 어제 일처럼 떠오르며 가슴이 두근거린다. 요즈음은 대형 관광버스를 타고 수학여행과 체험학습을 간다. 그러나 먼 도보여행, 텀블링과 같은 위험한 체험은 생각지도 못하는 오늘날, 그 때 그 시절을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해진다.
친구의 바쁜 일정에 혹시 부담이 되지 않았을까 미안해하면서 교문을 나선다. 젊은 시절 함께한 수많은 제자들이 배웅해주는 것 같아 고개를 돌려보니, 텅 빈 운동장의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4층 탑을 쌓고 있다.
3. 밥 / 서민용
오늘도 떡밥이다. 어머니는 전기압력밥솥의 잡곡밥 짓는 메뉴를 사용할 줄 몰라, 당뇨에 좋다는 현미와 흑미 등을 섞은 잡곡밥을 지으려고 가마솥을 구했다. 크기만 작고 모양이나 재질이 옛날 아궁이에 걸려있던 가마솥과 똑같았다. 하지만 가스 불에 밥을 하니 매번 죽밥 아니면 떡밥이었다.
“이게 밥이가? 떡이가?” 라고 젓가락으로 밥을 뜯으면서 나도 모르게 불쑥 내뱉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내일부터는 네가 해봐라.” 라고 하시며 못마땅한 얼굴빛을 감추지 않고 “얼마나 잘하는지 보자.”라고 쐐기를 박았다.
어릴 적 겨울이면 어머니는 가마솥에 미리 한번 삶은 보리를 제일 밑에 안치고 그 위에 한줌의 쌀을 얹고 다시 고구마를 수북이 올려 장작불로 밥을 지었다. 쌀밥은 아버지와 나의 몫이고 보리밥은 누나와 여동생이 차지했으며 어머니는 고구마와 누룽지로 끼니를 때웠다.
당시 여수 바다건너 돌산에는 고구마 밭이 대부분이었다. 땅이 척박하고 바람이 드세 다른 작물은 못하고 고구마만 심었다. 가을이면 배를 타고 건너가 고구마 캐는 작업이 아낙네들의 놉이었는데 그 일의 품삯이 희한했다. 고구마를 캐내어 밭 한가운데 수북이 쌓아놓고 머리에 이거나 양손으로 들고 갈 수 있을 만큼 가져가는 것이 그날의 품삯이었다.
아낙네들은 미리 준비한 마대나 보자기에 고구마를 담아 머리에 이고 양손에 들고 밭둑까지 겨우겨우 옮겨 놓아 그 고구마의 주인이 되었다. 거기서부터는 리어카나 지게꾼을 사서 선착장까지 옮겨 배를 타고 건너오면, 각자 집에서 장정들이나 아이들이 나와 짐을 나누어 가지고 오곤 했다. 그렇게 얻은 고구마는 방 한편에 싸리로 발을 짜 울타리를 만들어 보관했다. 그것은 겨우내 우리들의 간식거리도 되고 어머니의 주식이 되었다.
어머니의 밥에 대한 한을 생각하면 절대로 어머니께 밥투정을 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양식이 없어 멀건 팥 칼국수나 호박범벅으로 저녁을 때운 적도 많았다. 쌀 한 두 되를 빌리러 옆 동네 친구네에 가서 막소주를 마시며 새 여자와 살림을 차린 아버지를 찾아갔으나 아버지는 없고, 윗목에 봉투째 말라가던 호떡 때문에, 그 여자 머리채도 잡지 못하고 호떡 봉투만 들고 나왔다며 무릎을 베고 잠든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신세한탄을 하던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쌀을 얻자 나를 등에 업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바람 찬 오동도 앞 자산공원으로 오르는 절벽을 기어오르던 기억이 난다. 아마 울고 계셨는지도 모른다. 어머니 등에 매달린 나는 얼마나 무서웠는지, 어린 마음에도 불안했었다. 술에 취한 어머니는 그때 일부러 절벽에서 미끄러지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머니에게 밥은 그냥 밥이 아니었다. 그것은 목숨 줄이었다. 자신의 목숨 줄이자 네 자식의 목숨 줄이었다. 네 자식을 키우기 위해서는 가장 필요한 것이 밥이었다. 밥 없이는 자식을 키울 수 없었기에 어머니는 밥줄에 매달렸던 것이다. 남편의 여자에게 비굴하게 보인 것도, 친구에게 구걸한 것도, 목이 부서질 것 같은 무거운 고구마자루를 인 것도 모두다 자식들의 목숨을 이어가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 처절하고도 끈질긴 목숨 줄이 밥이었다.
어머니세대는 ‘밥 안쳤다’ 또는 ‘밥 짓는다’라고 표현했다. 그때는 주로 가마솥에 밥을 했다. 부엌에 가마솥 하나 걸어놓으면 다양한 용도로 쓰였다. 밥도 하고, 고구마도 찌고, 닭도 삶았다. 장작불로 짓는 밥이기에 시간적으로도 길었을 테고, 정성이 필요했다. 온 식구의 생명을 이어주는 중요한 밥이기에 ‘쌀을 안쳐 밥을 짓는다.’라고 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아궁이 앞에 앉아 불 조절을 하며 그 밥을 먹을 사람들을 생각했다. 집안의 어른에서부터 들에 나간 머슴들까지 먹을 사람들에 맞춰서 밥을 안쳤다. 왜냐면 가마솥 밥은 한번 하고나면 다시 밥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준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밥은 늘 넉넉하게 안쳤다. 혹여 손님이 오거나 멀리 떠났던 형제나 옆 동네의 시동생이 불쑥 찾아올지도 몰랐으므로 밥은 늘 넉넉해야 했지만 쌀독은 화수분이 아니었다. 그래서 밥 안치는 어머니는 늘 밥에 한이 맺히었다.
또한 숭늉을 걷어낸 가마솥의 열기를 이용해 남은 밥을 묻어두었다. 밤늦게 찾아든 길손이라든가 멀리 객지를 떠돌던 피붙이가 찾아올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금방 해낼 수 없는 밥을 내놓기 위한 지혜였다.
그 후 도시로 이사 온 후에는 석유곤로나 연탄불에 밥을 지었다. 양은솥이나 냄비에 밥을 했는데, 이때도 밥을 지을 때는 냄비 주위를 떠나지 못했다. 밥이 끓어 냄비뚜껑이 들썩이며 쌀뜨물이 넘치기 시작하면 행주를 쥔 손으로 지그시 눌러줘야 제대로 된 밥을 지을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삼층밥이 되곤 했다. 그만큼 밥 짓는 일에 공을 들였고, 중요했다.
이제는 대부분 전자밥솥이 밥을 한다. 쌀도 씻어서 파는 것이 나와 그냥 밥통에 붓고 물만 부으면 알아서 밥을 해준다. 그것도 먹고 싶은 시간에 맞춰서 따끈따끈한 밥을 해주기도 하고 입맛에 맞춰 진밥, 고두밥, 잡곡밥 등등 다양한 메뉴가 있어서 밥하는 수고를 안 해도 되는 세상이 되었다. 그래서 ‘밥 짓는다’에서 ‘밥 한다’로 바뀌었다. 지을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오래 전 직장에 근무할 때 별명이 ‘밥통박사’였다. 그때 한창 개발 중이던 ‘IH밥솥’ 즉 인공지능밥솥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인공지능밥솥이란 물 조절 필요 없이 원하는 밥을 선택하기만 하면 알아서 특정상태의 밥을 해주는 밥솥이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cc밥솥’의 원형이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밥을 안 해도 되는 시대가 되었다. ‘포장밥’이 나와 언제든지 렌지에 2분만 덥히면 따끈하고 보슬보슬한 밥을 먹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애써 밥을 안치고 장작불 앞에서 부지깽이를 들썩이지 않아도 되고, 냄비뚜껑을 누르며 밥이 되는 냄새를 맡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밥은 여전히 삶을 지탱하는 주식이지만, 이제는 밥 굶는 사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밥의 중요성 또한 점점 얇아지고 있다. 어머니의 밥, 평생 목매여 매달렸던 밥, 이제는 놓아도 될 밥줄이건만 여전히 어머니의 밥은 나의 목줄로 남아있다.
내일은 밥통박사답게 ㅋㅋ전기압력밥솥에 부드럽고 보슬보슬한 잡곡밥을 해서 어머니께 드려야겠다.
“이게 잘된 밥이랍니다. 그동안 어머니께서 한 밥은 밥도 아니었답니다.”라고 말하면 어머니는 뭐라 하실까?
“에라이 밥통보다 못한 놈” 하시며 가마솥을 내동댕이치실지도 모르겠다.
4. 웃음 진 얼굴 /임성애
유월은 가곡‘비목’의 노래가 불리어 지는 보훈의 달이다.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이름 모를 골짜기에서 발견된 철모는 나라를 위한 고결한 죽음의 상징이었다.그 죽음의 상징을 함께 담고 있는 또 다른 희생들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이역만리 이름도 없는 작은 나라(6.25당시)에서 자유를 찾아주기 위해 국가의 부름에, 스스로 지원해서 희생된 그들 역시 어디에도 비교될 수 없는값진 죽음이다. 유월이면 더불어 생각나는 그들이다.
자유와 평화는 이런 희생 정신을 가진 사람들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20 여년 전 미국 뉴욕에 살고 있던 시댁조카의 주선으로 워싱턴을 시티투어 하게 되었다. 당시 내가 알고 있는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힘 있고 가장 민주주의적인 나라였으며 150나라의 인종이 모여 사는 다양한 민족을 가진나라로 알고 있었다. 그들은 어릴 적부터 철저하게 국가관을 심어주고 정의로운 일에 용기를 잃지 않고 남을 위한 봉사와 희생을 생활화 하고 있는 민족이었으며 투어 내내 보여지고 있던 성조기는 국가에 대한 충성심의 맹세가 저절로 나올 수 있는 나라로 여겨졌다. 투어 도중에 웰링턴 국립묘지는 나에게 많은 감동과 감흥을 일깨워 주었었다. 그 곳에는 남북전쟁, 세계1.2차 대전, 베트남전과 함께 우리의 6.25전쟁에서까지, 세계평화를 위해서 자유를 위해 자신의 나라를 위한 희생의 넋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푸른 잔디위에 수없이 늘어서 있는 하얀 비석들이 그토록 맑고 깨끗한 영혼들로 보여져 경건하고 엄숙한 마음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그 중에서도 무명용사들의 한 묶음 묘비는 더욱 애잔함을 안겨 주었고. 유명한 케네디가의 묘비에는 재클린의 이름과 함께 작은 횃불이 타고 있었다. 그것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민주주의 힘’이 아니었나 생각되었다.“아니?, 재클린오나시스가 어떻게 이곳에 이름(재클린케네디로)을? ” 우리와 비교되는 부분이어서 이해할 수 없었으나 다시 한 번 미국이라는 나라를 재인식 하는 계기도 되었었다. 추모의 마음을 계속 잃지 않으며 돌아보던 찰라 한쪽 옆으로 시선이 가는 곳에 다양한 모습의 군인들 동상이 눈에 들어 왔다. 그 앞에 새겨진 글에는 ’625 참전용사‘라는 팻말과 그 옆에 새겨진 또 하나의 글은' freedom is not free‘ (자유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라는 글귀였다.' 순간, 아! 그때 그 군인 아저씨 들이 구나. 얼마나 보고 싶고 그리웠던 세월이었던가.' 나는 걸음을 멈추고 잠시 45년 전 기억으로 되돌아갔다.
경북 포항의 어느 큰 길에서 나는 여섯 살 또래들과 말 타기 놀이에 정신이 없었다. 갑자기 군용차들이 도로 한가운데를 줄지어 가면서 차에 타고 있던 군인들이 우리를 향해 계속 무엇인가. 던져주며 천천히 그리고 느리게 지나가고 있었다. 얼굴이 하얗고 키가 크고 잘생긴 모습의 그들은 여유롭고 편안해 보였으며 웃음 진 얼굴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앞 다투어 주워온 것은 생전처음 보는 과자와 껌과 쵸코랫이었다. 달콤하면서 싸아한 맛은 최고였으며 허기진 배가 채워질 정도의 맛으로 느껴 졌었다. 다음 날 우리는 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그 장소로 또 가고 있었다. 다행히 그 시간에 또 그 맛있는 흥분의 시간을 맛볼 수 있었다. 그것이 그들을 볼 수 있었던 마지막이 될 줄이야. 그리고 45년의 세월, 차에 매달려 그토록 환한 미소와 친절한 모습을 가까이 볼 수 있었던 기억 잊을 수 없었다. 그 때 그 인자했던 아저씨들이 지금 내 앞에 서 있다. 영원히 볼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이곳에서 이렇게 만나다니, 감격스럽고 고맙고 자랑스러웠다.
큰바위 얼굴처럼 웃음 띤 얼굴은 내 인생의 이정표처럼 따라 다녔었다. 그래선지 나는 잘 웃는다. 너무 헤픈 것 아니냐고 사람들이 핀잔을 주지만 화난 얼굴보다는 낮지 않을까?. 그 두 웃음이 나를 이 자리에 있게 하고 만나게 해 주었다고 생각한다. ‘
살아 있는 모든 존재는 배풀기 위해 있다’는 부처의 말을 되새기면서 그들의 영령 앞에서 오랫동안 떠날 수 없었다. 남을 위한 삶. 아프리카사람들을 위해 희생한 슈바이처박사, 인도의 빈민가에서 그들과 함께 하며 헌신적 삶을 살아 온 테레사수녀. 모두가 세상의 등불이 되고 있다. 그 분들이 있었기에 오늘 을 사는 우리의 삶이 바르고 맑고 행복한 삶의 지표가 되고 있고 있지 않았을까. 보훈의 달을 맞아 ‘웃음 진 얼굴’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았다.
5. 이런 슬픔이 있었다 / 서인수
김영삼 시대가 물러갔을 때 전국적으로 국가경제가 어려운 시기에 봉착했다. 살기 힘들었지만 사무실을 정상적으로 운영하고 있었는데 평소에 왕래가 없던 중학교 동기동창생이 찾아왔다. 그는 영어를 전공한 동기생이지만 학원도 운영하고 있어 일반인에 알려져 있는 사람이다. 내 사무실 아래층에 영어학원이 있으니 업무 차 볼일 보러 온 김에 인사로 찾아온 것인가 보다 하고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요즘 건축경기가 안 좋은데 어떻게 지내느냐”하면서 물어왔다. “기사는 보내고 그런대로 독자적으로 운영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제자가 건축 일을 하고 있는데 같이 한번 해봐라”했다. “처음 보는 사람과 어떻게 일을 하느냐 못한다.”하니 “내 영어 제자니까 나를 믿고 시작하면 된다.”했다. 자기 학원 건물도 있고 아들 둘도 영어학원을 운영하는 중학교 동기동창생이었다.
학교를 졸업 후에는 서로가 바빠 사이좋게 만나면서 우정을 나누지도 못했지만 한 교실에서 같이 공부한 추억이 남아있어 믿어도 괜찮겠다고 보았다.
“이 자리는 구청 옆이라 찾아오는 손님으로 기반이 잡혀있는데 같이 하게 되면 평생을 함께 한다는 마음으로 해야 된다.”하니 “앞으로 그렇게 하자했다.” “그럼 이곳이 현재 재개발이 된다고 건축물 주인이 비워 달라고 하는 입장인데 재개발이 확정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확정이 되면 시작해보자”했다. “기다려주겠다.”했다. 그럼 좋다고 생각하고 사무실을 같이할 마음을 먹게 되었다. 그는 책장을 보고 “이전 준비하기 위해서는 사무실 비품을 모두 버리고 와야 된다.”했다.
“이십 년 이상 사용해온 건축설계 자료와 비품인데 그럴 수는 없다”하니 “시설이 낡아 새것으로 바꿔 설치해 주겠다.” “책상과 방도 새것으로 마련해주겠다. 상호도 새것으로 해야겠다.”라고 말했다. “새로 시작하려면 말로 하면 안 되니 보증하겠다고 보증서 작성해라”요청했다.
“영어 제자에게 보증서를 작성해서 내일 보내주겠다”했다. 반드시 보증인으로 작성해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튼 날 영어 제자가 보증서를 갖고 왔지만 약정서에 원장은 보증인으로 하지 않고 입회인으로 서명했고 제자만 보증인으로 서명되어 있었다. 왜 원장은 보증인으로 서명하지 않고 입회인으로 했느냐 이러면 안 된다 말하니 원장님은 “이렇게 서명해도 괜찮습니다.”했다.
영어 학원을 수십 년 동안 해온 원장이니 믿어도 괜찮지 않겠나 하는 마음에 “그럼 재개발이 확정되면 이사 나가야 되니까 그때 시작해보자.”했다. “법인등기에 필요한 등기를 법무사 사무실에 서류작성은 미리 해야 하고 아파트 설계로 바쁜 일정이 있어 빨리 준비를 해야 됩니다.”했다.
약정서를 받았지만 재개발이 시작되면 사무실을 옮기겠다고 분명히 말해 두었다. 그런데 법인 등록금은 원장이 은행에 예치해주고 법인 사무실 신고는 영어 제자가 나에게 말도 없이 북대구 세무서에 몰래 하고 법원에 법인체로 등록하고 말았다. 북대구 세무서는 본인 확인이나 사인도 없이 법인 도장만 보고 등록을 받아주고 말았으니 어이가 없어졌다. 현재 사무실을 운영하는 수성구와 이중으로 등록해 운영하면 건축사법 위반이다. “왜 이렇게 하느냐 이러면 안 된다.”말했다. 영어 제자는 몰랐다면서 시청에 벌금을 물어주어 어쩔 수 없이 옮기게 되었다.
사무실 기반시설을 모두 버리고 옮겨주었으나 내 책상과 자리를 마련해주지 않아 독촉하니 동업하는 인테리어 사람이 나가야 된다면서 잠시만 기다려 달라했다. 답답한 마음에 삼촌한테 의논하니 중학교 동기동창인 영어학원 원장인데 약속은 지키지 않겠느냐 기다려보라 했다. 몇 달 기다려주어 인테리어 업자가 나갔지만 내 책상과 자리를 마련해줄 마음이 보이지 않으니 고민이 되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원장한테도 보증인으로 꼭 서명을 받아두지 못한 실수가 자책이 되었다.
내 일거리가 발생하면 처리해야 되는 입장이라도 처리할 수 없어 외주로 용역을 줘가며 일하니 더 힘들어졌다. 영어 제자는 경리 경험 없는 처제를 경리로 채용해 세금이나 운영비 지출도 없이 운영해가 문제점이 계속 발생되고 있었다. 원장한테 약속대로 하지 않고 왜 이러느냐 약정금 제때 지불하라 말하니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했다. 기다려도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시간은 마냥 흘러갔다. 영어 제자는 괌도에 별장을 짓는다면서 해외로 출장을 자주 나갔고 원주에 아파트를 땄다면서 자랑했는데 사업자가 운영이 여의치 않아 포기를 하고 말아 더욱 어렵게 되었다.
자세히 조사해보니 이미 최**라는 건축사와 라이크 건축사라는 상호로 건축설계 사무실을 운영한 경험이 있었다. 그런 일이 있었으면 지난 일을 나에게 솔직하게 내용을 털어놓고 시작해야 되는데 숨기고 시작하고 있었다. 동기동창 원장은 아들 둘도 영어 학원을 운영해 잘살고 있음을 직접 안내해주면서 인사시켜주기도 했는데 왕래는 별로 없었다.
한 번은 제주도에 자기 땅이 이십만 평 이상 갖고 있는데 온천이 개발됐다면서 제주도 별장에 가보자 했다. 제주도 별장에 가보니 양어장도 있었지만 온천개발 현장은 보이지 않고 또 다른 별장에 거위를 사육하는 농장을 보여주기도 했다. 나 만나기 이전에 제주도에서 영어 수련관 신축하다 중단된 현장도 보게 되었다.
최** 건축사 사무실 상호로 제주시청에 수련관이 아닌 다가구주택 용도로 건축 허가받아 자기가 아는 건축업자에게 공사를 맡겼다. 집을 짓다가 태풍이 불어왔을 때 건축공사 중인 전면 대형 유리창과 천정이 모두 파손되어 있는 현장이었다. 공사는 태풍에 휘둘려 맞아 중도에 중단되었는지 천정도 떨어지고 내부는 폐허가 되어 방치되고 있었다.
이런 현장을 한마디 말도 없이 숨기고 나에게 찾아와 사무실을 도와주겠다면서 말한 동기동창생의 나쁜 심리상태가 훤히 내다보였다. 건축공사가 태풍으로 중단된 현장이 있다고 사실대로 말해주었으면 내가 그쪽으로 사무실을 옮겨갈 필요성도 없었을 것이다. 고통이 되면 어떻게 처리해야 해결되는지 자문해 주었을 것이다.
중증 청각장애로 힘들게 일하는 나의 입장을 이용해 오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실패한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 물려 실패의 길로 끌려갈 수 없으니 재기해야 했다. 내 사무실 비품을 모두 버리고 오라는 동기생 원장 말만 믿고 동기생 빌딩으로 온 입장이라 자기의 답답한 고통을 나누려고 데려왔는지 한심한 마음이 들게 되었다.
계약할 때 약정서에 보증인으로 서명 받아두지 못한 나의 실수가 새삼 떠올랐다. 멍든 마음을 달래기 위해 중구청에서 주최하는 정보화 교육을 받고 지내게 되었다. 답답한 심정에 인터넷 사이트에 블로그 방을 만들고 마음을 붙이니 위안이 되었다.
그런데 제주도 공사를 시공한 업자를 구속시켰다는 소문을 제자에게 듣게 되었다. 원장은 제주도 농장에 키우던 거위 수백 마리를 나를 유인해서 도살하기도 했다. 나를 이용한 원장의 심리가 밝혀지니 하루도 편한 날이 없어 신경이 피로해지게 되었다. 신경 쓰다 보니 이빨까지 빠져 6촌 동생 치과에 가 치료를 받게 되었다. 치료받아도 기분이 유쾌하지 않으니 참고 또 참으면서 좋은 쪽으로 생각하도록 마음을 고쳐먹으면서 견디어 냈다. 수많은 역경과 치욕이 있어도 정신과 마음을 잘 관리해 힘든 세상을 이겨왔는데 난관이 있다고 주저 않을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원장에게 계약한 약정금 지불을 요청하니 돈을 아직 못 받았다고 제자 재산을 압류하자면서 자기 거래처 변호사에게 함께 가자했다. 갔는데 사무장에게 자기도 돈 받을 것 있다면서 우선 자기 것부터 하고 뒤에 하자면서 기다려 달라했다. 영어 학원 운영보다 돈 버는데 이렇게 욕심이 많은 사람인 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사람을 믿지 말아야 하는데 믿고 들어가 허무해졌다는 느낌이 순식간에 들어왔다. 건설기술자 연수교육 수업 관계로 경기도 부천교육장에 일주일 출장 갔을 때는 사무실을 지하층으로 마음대로 옮겨버려 괴심 했지만 기다려도 아무런 기쁜 소식이 없었다. 세무서에서 세금 독촉 때문에 수시로 전화벨이 울리는 안 좋은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었다. 제자가 나타나지 않아도 인내하면서 몇 개월 지나니까 원장이 포항에 제자가 갖고 있는 종중 가족 산이 있다면서 이것이라도 압류를 하자 했다.
서류를 보니 이미 선순위로 근저당 설정이 되어 있는 것이라“여기에 해보았자 별 볼일이 없는 물건이다”하니 자기가 한다 했다. 하고 싶으면“네가 해라”했다.
원장은 제자에게 약정금을 받아주는 척만 했지 나를 이용해서 땅장사만 하려 했다. 그런데 업무상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이 사무실로 찾아와 제자는 원장부인 친구의 아들이라면서 귀 뜸을 해주었다. 부인도 영문과 출신으로 학원 운영을 같이하는 모양이었다. 법인체로는 법인세 납부도 여의치 않아 힘들어지니 시청에 폐업을 신고할 수밖에 없었다. 주식이라는 상호를 포기하고 개인으로 사무실을 바꾸었다. 몇 개월 지나니 부인이 인쇄업을 한다면서 월세를 주든지 나가 달라고 말했다. 받아야 할 미납금이 수천만 원인데 원장은 말 못 하고 부인이 나서 어이가 없었다.
3년 세월이 지나도 사무실은 정상적으로 해결되지 않고 좋아질 기미가 전혀 없어 가정생활마저 압박되니 평소 굴리던 그랜저 자가용도 팔게 되었다. 대학교 다니는 아들 둘은 아버지가 고생하는 것을 보고 공부가 안 된다 했다. 자기들이 돈 벌어 생활한다면서 휴학계를 냈고 일하다가 큰아들은 군에 입대하니 마음이 서글퍼졌다.
건축설계 사무실은 내가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라 월세 없이 한다고 원장과 사전에 약속을 하고 왔는데 약정금도 주지 않고 배짱을 내미는 동기생이 몹시 불쾌해 꼴도 보기 싫어지니 우울해져서 우울증에 걸릴 것 같은 심정이라 접촉을 피하게 되었다.
스트레스가 쌓여서 피부에 물집이 생기기 시작해 병원에 가니 대상포진이라 했다. 피부과 전문병원에 주사를 맞고 약을 먹으면서 지내니 대상포진은 치료가 되었다. 날마다 울고 싶었지만 답답한 마음에 대학교 시절 어울렸던 친한 친구한테 이러한 내용을 이야기하니 숨이 턱턱 막혔다. 말도 제대로 안 나왔지만 안 좋은 일은 모두 잊어버려라 했다. 즐거운 마음으로 생활해야 되는 이치는 알고 있지만 한마디라도 좋은 쪽으로 말을 해주니 가슴에 답답하던 슬픔은 빠져드는 기분이 들어 고마웠다.
마음을 잘 관리하니 슬픔에 휘둘리지 않아 건강하게 지내고 있다. 지금은 단독으로 하는 건축사 사무소지만 USB로 감리 일이라도 하면서 밥을 먹고 생활하게 되었다.
6. 어머니의 교육/ 곽해숙
우리어머니가 돌아 가신지가 10여년이 흘렀습니다. 1년간은 생각하면 어느새 눈물이 가득 고이고, 그 눈물 쭈르르 흘러 내리는 것이 싫어서 하늘을 쳐다 보고 걸었습니다. 최대한 눈물 흘리지 않으려 노력을 했었어도 조용한 시간에는 스스로 제어가 되지 않게 눈물이 가득 고이고, 흘러 내렸습니다.
돌아 가신 직후 한 달간 밤 10시경에 버스를 탔는데, 항상 버스 제일 앞자리에 앉았습니다. 세상 소풍길 마치고 5여년이 흘러가고 나니 눈물은 거두어 지고 어머니가 그리웠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는 부산에 살았는데, 어머니께서는 교회에 다니셨습니다. 마당에서 폴짝 폴짝 뛰어 놀다 일요일 어머니 흰색 코고무신이 눈에 들어 오면 그 시절은 수세미가 따로 없어서 채소단이 묶여 있던 짚을 모아 두었다 신발등을 씻는 수세미로 사용 했습니다.
놀다 고무신을 씻어서 툇마루에 엎어 두면 어머니께서 신발 씻는 것을 잊고 통치마에 흰색 저고리 입으시고 나오셨는데, 신발이 툇마루 턱에 씻어 엎어져 있으면 얼굴이 환~하게 웃으시면서 내딸아 고맙다 하셨지요.
어린 맘에도 평소 입던 옷이 아니고, 한복 그덜치마가 아니고 통치마에 흰색 저고리를 입으시고 화장을 하신 것도 아닌데도 20대 후반의 어머니가 그렇게 이쁘게 보였습니다. 그 당시는 어머니가 몇살이신지 몰랐고, 지금 계산을 해 보니 그렇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이 늘 기억했다 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 생각없이 나오셨는데, 신발이 씻겨져 있지 않으면, 한복통치마를 앞으로 오므고 엎드려서 후딱 씻어서 걸레로 닦으시면서 '내 손이 내 딸이다' 라 하셨지요.
그 시절이 1950년 나라가 극하게 궁핍하던 때 였습니다. 우리 엄니는 저를 참 엄하게 키우셨습니다. 제일 싫어 하는 것이 거짖말이고, 화 난다고 문 탁 닫고 나가는 것, 그 당시에도 자연공책이 위에는 그림 그리게 되어 있고, 아래는 글을 적게 줄 칸이 지어져 있었습니다.
숙제를 하는데 그림이 맘대로 잘 그려 지는 것은 아니고, 공책 종이질은 갱지 중에도 낮은 급이였고, 지우개도 지금처럼 쓱쓱 문대면 때처럼 밀리면서 잘 지워 지는 것도 아니였습니다. 그린 것이 맘에 들지 않아서 한번은 지우개로 지우고 싹 깨끗하게 지워진 것은 아니여도 두번째 그림을 그릴 수 있는습니다. 한 번 더 지우다 보면 약간 찢어지기도 하고, 두번이나 지웠으니 다시 그리지 못할 정도라 공책장을 찢어 버립니다. 성질이 나서 순간적으로 쓱 찢었지만, 찢고나면 후회가 되었습니다. 호랑이 만큼 무서운 어머니의 꾸중이 있을 것이니까요.
그렇게 엄하게 자랐고, 나 자신도 또한 비록 어머니가 시켜서 하는 일도 누가 시키면 하기 싫어지고, 그렇다고 감히 어머니나 어른들께서 시키는 일을 않하겠다고 하는 것은 꿈도 못 꾸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저가 먼저 해야 누가 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 않되니 집에서도, 방학이면 부산 이모님댁으로, 큰집으로 갔습니다. 설겆이, 청소를 시키지도 않는데, 하니 이모님께서는 숙이가 오면 집이 훤~하다. 모래 밭에 던져 두어도 살 아이다 하셨지요.
큰집에서는 사촌들이 5명이 있었는데, 부산이란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 살 위의 사촌 언니는 설겆이를 하고 자라지 않았고, 저가 가면 설겆이, 청소를 시키지 않아도 하니 큰어머니께서 좋아 하셨습니다. 친척 어느 집을 가도 반가운 아이였습니다. 같은 울산이어도 우리가 사는 곳은 면사무소가 있고, 외갓집은 울산군이 있는 곳이라 중학교를 좀더 나은 곳으로 간다고, 중학교 3년을 외갓집에서 다녔습니다.
외삼촌이 일본에서 학교를 나오신 분이시라 면사무소를 다니셨고, 농사는 외숙모님께서 하셨던터라 일하러 들에 가시면 어둠이 깔릴 때에 급하게 돌아 오셨습니다. 학교 갔다 와서 방청소하고 5살 외사촌 남자아이 불러와서 씻기고, 여름날은 고등학교 다니는 외사촌오빠와 밀가루 반죽해서, 손국수를 썰어 놓으면,들에서 오셔서 끓이기만 하면 먹을 수 있으니, 칭찬을 하셨지요. 마당에 백철 솥 걸어 둔 곳에서 끓이는데, 또 재빠르게 땔감 가져다 놓고 불을 때고 했습니다.
제 나이 60대 후반에 이모님께 엄마가 저를 잘 키워 주신 것 같다고 말씀드렸더니, 이모님은 자기 언니가 우리 엄니이니, 너가 그렇게 말 해 주면 내가 고맙다 하셨고, 친정 숙모님께서는 같은 말을 들으시고는 잘 키워 주어서 그런 것은 아니고, 너가 성씨를 잘 타고 나서 그렇다 하셨습니다.
자랑스런 이름 난 윗대가 계신 것도 아니고, 혼인 때 찾는 양반 성씨일 뿐인데 그리 말씀 하셨지요. 정직하게 키우신 것은 외할아버님께서 자식들에게 정직을 제일 우선으로 키우셨고, 그런 교육을 받은 우리 어머니께서 우리 형제들을 그렇게 키우셨고, 저도 우리 자식들을 그렇게 키웠습니다.
누가 시키는 일이 하기 싫어서 늘 시키기 전에 일을 해 왔기에 아직도 게으러지는 않습니다. 초등 고학년과 중학교 3년을 시골에서 자랐기에 형제와 이웃과 정도 나눌 줄 압니다. 식물들 가득한 옥상 정원에서 그 아름다움과 생명감을 느낄 줄 아는 정서감도 있습니다.
우리 어머니께서는 저를 참으로 잘 키워 주셨습니다. 그런데 저가 참 쪼잔 할 때가 있습니다. 상대가 거짖말을 하면 겉으로는 속아 주는데, 그 사람은 신용을 할 수가 없습니다. 최근 누구가 두번의 작은 거짖말을 제게 했습니다. 굳이 거짖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였습니다. 자기를 포장할려고 한 거짖말이였기에, 그 나이에 포장을 한다고 포장이 되어 지는 것도 아닌데 그러니 거짖말이 다반사인 사람이구나 싶었습니다. 그냥 이해해 주면 좋을 텐데, 쪼잔하구로 그 이해가 않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