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땅은 원래 우리 땅 !!!
상해 임시정부 시절,
장개석을 방문한 이시영 임정 요인에게
장개석은 이렇게 말 하였다.
"우리 중국 대륙이 원래 당신들 영토 였다는 사실을 아는가?
무슨 말씀 이신지..?
"독립운동도 좋지만 당신들 참역사를 먼저 알아야지...
참역사를 모르는 독립운동은
진정한 독립운동이 안되지 않겠나..? "
혹시 고구려 말씀을 하시는 건지요...?
" 중국역사 자체가 원래, 당신들 역사이었다니까.."
예 ? 그것이 사실입니까?
- 이시영박사 일기 -
상해임시정부에서 남한으로 돌아온 이시영박사는
후일 또 이렇게 말 하였습니다.
장개석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당시 상당히 충격적이라 무슨말을 하는지 몰랐다.
그런데 그러한 사실은 장개석뿐 아니라,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중국의 고대사가 동이족의 역
사임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어떻습니까?
- 당시 부통령이었던 이시영박사의 증언 - (출처)
그렇다면, 언제 한반도로 이주하였는가?
고조선 건국절이 '개천절'...
한국 고대사 제대로 알자
올해는 고조선 건국 4347주년이다. 그래서 개천절인 10월 3일 4346주년 경축식이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다. 이외에도 '개천절 대제'가 서울 종로구 사직동 단군성전에서 개최되며,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 및 상설공연장에서 '개천대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 8·15 광복절을 '광복절과 함께 건국절'로 하려는 법률안을 여당 의원들이 상정해 놓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우리나라를 세운 날을 1948년 8월 15일로 하려는 것이다.
국가는 국토와 국민, 주권(국권)이 있어야 하며, 국가를 이끌어가는 왕조(정부)의 국호(국명)가 있게 마련이다. 국호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조선(고조선)-고구려-백제-신라-고려 등의 명칭이 다를 수 있고, 주권 형태는 국가의 흥망성세에 따른다.
근대 우리나라 국호의 변천을 살펴보면, 1897년 10월 12일 광무황제는 어전회의 끝에 조선을 '대한(大韓)'이라 했다. 이후 1910년 8월 29일 주권을 일제에 빼앗기게 됐다. 그리고 1919년 3·1만세의거 이후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들이 그 해 4월 13일 중국 상하이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하는 망명정부를 수립한다. 종래의 '대한'을 시민이 세운 나라(민국)이니, 새로운 공화국이 탄생하여 일제와 투쟁을 벌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고, 국회는 정부수립에 앞서 1948년 7월 12일 헌법 제정을 하고, 그 전문(前文)에서 "유구(悠久)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민국은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승계하여, 이제 민주 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라고 하여 이승만 정부수립을 '독립국가의 재건'으로 규정했다. 또 '관보'의 연호를 '대한민국 30년'으로 하여 대한민국 정부의 기점을 임시정부가 출범한 날인 1919년 4월 13일로 했다. 게다가 그 해 9월 25일 대한민국 법률 제4호 '연호에 관한 법률'에서 "대한민국의 공용연호는 단군기원으로 한다"라고 하여, 우리나라의 뿌리를 고조선으로 하였다.
그러나 1961년 '5·16 군사정변' 후 그 해 12월 2일 법률 제775호 '연호에 관한 법률'에서 "대한민국의 공용연호는 서력기원으로 한다"고 하여, 단기는 사라지고, 서기가 우리나라 연호인양 사용되고 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후에는 난데없이 광복절이 아닌 '건국절' 운운하다가 학자는 물론, 많은 시민들의 반발에 부딪쳐서 그 뜻을 굽히기도 했다. 최근에는 그 망령이 되살아난 정도가 아니고 법률로 정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는 조선시대 '고조선' 조작, 일제 강점기 '단군신화' 조작에 이어, 대한민국 시대에 '대한민국' 조작에 들어간 것이니, 어처구니가 없다.
필자는 '고조선 역사 조작'과 '단군신화 조작과 처참한 현실'이란 제목으로 두 편의 글을 써 보았다.
고조선 역사 조작
<세종실록지리지>의 평안도 평양부 조에 실려 있는 <단군고기(檀君古記)>의 내용은 천제 환인(桓因)의 아들 환웅(桓雄)이 태백산 신단수(神檀樹)라는 성소(聖所)에 강림하여 홍익인간의 이념을 바탕으로 개국하였으며, 부여·고구려 등의 시조가 단군의 혈통임을 밝혔다.
고조선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 <단군고기>와 <신지비사>가 있고, 책 이름으로 보아 고조선 역사서로 추정할 수 있는 것으로는 <배달유기>, 안함로·원동중의 <삼성기>, 표훈(表訓)의 <삼성밀기>, <조대기> 등이 있다.
특히 『신지비사』와 『배달유기』는 고조선 건국사화와 관련이 깊은 내용이 담겨 있던 책으로 조선 초기까지 전승되어 오다가 서운관(書雲觀)에 보관하고 있었다.
조선은 개국 직후 『고려사』를 편찬했다가 다시 고쳐서 종래의 자주적인 내용을 제후국에 맞도록 편찬하고, 특히 충렬왕 이후 사적을 완전히 고쳤다.
본격적인 역사 조작은 세조 때 이루어졌다. 1457년 세조는 역사서를 편찬한다는 명목으로 고기류(古記類)를 수거하면서, 개인이나 사찰에서 소장해 오던 역사서를 모조리 수거하여 『삼국사절요』와 『동국통감』 편찬에 활용하거나 폐기하였다.
8도 관찰사에게 유시하기를,
"『조선비사』·『대변설』·『조대기』·『주남일사기』·『지공기』, 표훈(表訓)의 『삼성밀기』, 안함로(安含老)·원동중(元董仲)의 『삼성기』, 『도증기』·『지리성모』·『하사량훈』, 문태(文泰)·왕거인(王居人)·설업(薛業) 등이 쓴 『수찬기소』의 1백여 권, 『동천록』·『마슬록』·『통천록』·『호중록』·『지화록』·『도선한도참기』 등의 문서는 마땅히 사처(私處)에 간직해서는 안 되니, 만약 간직한 사람이 있으면 진상하도록 허가하라. (진상을) 자원하는 자는 서책을 회사(回賜)할 것이니, 그것을 관청·민간 및 사사(寺社)에 널리 효유하라."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세조 3년 5월 26일)
그 후 예종은 고서를 바친 자나 숨긴 것을 고발한 자에게 품계를 2등급 올려주거나 큰 상을 주겠다고 하면서, '고서를 숨긴 자는 참형에 처한다.'는 엄명을 내려 또 고서를 수거하였다. 조선판 '분서갱유(焚書坑儒)'가 있었다.
"『주남일사기』·『지공기』, 표훈의 『천사(天詞)』·『삼성밀기』, 『도증기』·『지리성모』·『하사량훈』, 문태·왕거인·설업 3인의 기록 1백여 권과 『호중록』·『지화록』·『명경수』 및 모든 천문·지리·음양에 관계되는 서적들을 집에 간수하고 있는 자는 경중(京中)에서는 10월 그믐날까지 한정하여 승정원에 바치고, 외방(外方)에서는 가까운 도는 11월 그믐날까지, 먼 도는 12월 그믐날까지 거주하는 고을에 바치라. 바친 자는 2품계를 높여 주되, 상 받기를 원하는 자 및 공사 천구(賤口)에게는 면포(綿布) 50필을 상주며, 숨기고 바치지 않는 자는 다른 사람의 진고(陳告)를 받아들여 진고한 자에게 위의 항목에 따라 논상하고, 숨긴 자는 참형에 처한다. 그것을 중외에 속히 유시하라." (『조선왕조실록』. 예종 원년 9월 18일)
이어 성종 15년(1484년)에 『동국통감』이 편찬되었는데, 고조선에 관한 것은 겨우 50여 자로 된 한문으로 불과 30여 년 전인 단종 2년(1454년)에 편찬한 『세종실록지리지』 내용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 내용도 단군의 건국과정과 역사를 엄청나게 축소, 조작하였다.
동방에는 처음에 군장(君長)이 없었다. 신인(神人)이 있어 단목(檀木) 아래에 내려오자, 나라 사람들이 세워 임금으로 삼으니 이분이 단군이다.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였으니 요임금 무진년이다. 처음에 평양에 도읍을 하였다가 나중에 백악(白岳)으로 천도하였다. 상(商) 무정 8년 을미년 아사달산(阿斯達山)으로 들어가 신(神)이 되었다.
『삼국유사』는 고려시대에 간행된 것은 발견되지 않고, 완본으로는 『삼국사』와 같이 조선 중종 7년(1512년) 경주부윤 이계복이 중간한 것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의 중간본보다 50여 년 앞서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단군고기』에서 인용했다고 명시했는데, 『삼국유사』 중간본에는 '고기(古記)'라고 하여 책 이름도 밝히지 않고 얼버무린 채 『위서(魏書)』의 내용을 그 첫머리에 수록하였다. 이는 『단군고기』와는 완전히 다르다. 단군 이름부터 지명까지 한자가 다른 것으로 바꾸었으니, 완전히 창작 수준이었다.
『단군고기(檀君古記)』
단종 2년(1454년) 『세종실록지리지』가 편찬되었는데, 여기에는 단군의 조선 건국사화(建國史話)가 실렸다. 시기적으로 『삼국유사』와 『제왕운기』가 고려 때 나왔기에 이들 책의 내용을 상당히 수용했을 것으로 예단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단군고기』에서 가져 왔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고조선과 부여·동부여, 고구려 건국사화가 함께 실려 있어 『삼국유사』나 『제왕운기』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분량이 많고, 구체적이다. 『단군고기』에 고조선 외 많은 국호가 함께 등장하는 것은 단군의 혈통이 이들 나라에 이어졌음을 밝힌 것이었다. 즉 단군의 자손인 해부루가 동부여를 세웠고, 부여 해모수의 아들 추모(주몽)이 고구려를 세워 나라를 이어갔음을 밝힌 것이었다.
『단군고기(檀君古記)』에 이르기를, "상제(上帝) 환인(桓因)이 서자(庶子)가 있었으니, 이름이 웅(雄)인데, 세상에 내려가서 사람이 되고자 하여 천부인 3개를 받아 가지고 태백산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강림하였으니, 이가 곧 단웅천왕(檀雄天王)이 되었다. 손녀로 하여금 약을 마시고 인신(人身)이 되게 하여, 단수(檀樹)의 신과 더불어 혼인해서 아들을 낳으니, 이름이 단군이다.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조선이라 하니, 조선, 시라(尸羅), 고례(高禮), 남·북옥저, 동·북부여, 예(濊)와 맥(貊)이 모두 단군의 다스림이 되었다.
단군이 비서갑(非西岬) 하백(河伯)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으니, 부루(夫婁)이다. 이를 곧 동부여 왕이라고 이른다. 단군이 당요(唐堯)와 더불어 같은 날에 임금이 되고, 우(禹)가 도산회의(塗山會議)를 할 때 태자(太子) 부루를 보내어 조회하게 하였다. 나라를 누린 지 1천38년 만인 상나라 무정 8년 을미에 아사달(阿斯達)에 들어가 신이 되었다. (이하 생략)
환인은 상제(上帝:천제)이고, 그의 아들 환웅은 단웅천왕이라 하였으며, 단군은 환웅의 아들이 아니라 환인의 손녀(단웅천왕의 딸)와 단수신이 혼인하여 탄생하였다고 하였다.
단군이 건국한 지 2천여 년 후 고조선은 위만의 쿠데타에 이어 내부 분열로 멸망하지만, 국호 '조선' 대신 크고 작은 70여 개국의 이름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부여, 고구려 등에 의해 한의 군현을 물리치면서 고대국가로 성장하여 오늘날 북경을 포함한 화북지방 동쪽으로부터 만주, 연해주 일대에 걸치는 고구려를 건설하게 되었으며, 요동지방과 한반도 압록강 하류에서부터 서남부 지역에 자리 잡은 마한과 그 뒤를 이은 백제, 한반도 동남부에 자리한 신라, 오늘날 경상도 중남부(전성기에는 전북지역 포함) 지역의 가야 등으로 발전해 오면서 외세에 맞서 왔다.
이처럼 명백한 역사적 진실이 『세종실록지리지』에 실려 있고, 『사기』, 『한서』 등 중국사서에 부여·고구려 등의 역사도 명백히 나타나 있다. 우리나라의 뿌리는 고조선이라는 것과 이미 고조선 건국절이 '개천절(開天節)'(우리나라 건국을 기념하는 국경일)이며, '역사적 진실은 법으로 창조할 수 없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자 한다.
글쓴이 이태룡은 (사단법인) 의병정신선양중앙회 부설 의병연구소장입니다.
(글 출처)
'귀신 이야기'로 전락한 단군 건국사화
'단군신화' 용어 창작
단군이 세운 조선은 『세종실록지리지』와 역사서, 중국의 사서에 기록되어 있는데도 이를 부정하려는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첫 시도는 경술국치 전부터 시작되었다.
1894년 도쿄 제국대학의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 교수가 「단군고(檀君考)」에서 『삼국유사』(1512년 개작된 것)에 나온 내용에 대하여 '단군사적(檀君史籍)은 한국 불교의 설화(說話)에 근거하여 가공(架空)의 선담(仙譚)'이라고 하였다. 단군과 단군이 세운 조선의 건국사화(建國史話)를 '설화에 바탕을 둔 불교 이야기'로 조작하기 시작하였으니, '단군설화(檀君說話)'로 만든 셈이었다.
이어 케이오 의숙(慶應義塾) 출신 나카 미치요(那珂通世)는 『삼국유사』에 나온 내용을 두고 "승도(僧徒)의 망설(妄說)을 역사상의 사실로 삼은 것"이라고 하여 단군의 건국사화를 허구(虛構)로 만들었고, 이어 1897년 「조선고사고(朝鮮古史考)」라는 논문에서 "단군왕검은 불교 승도의 망설이요, 날조된 신화(神話)"라고 하였으니, 이른바 '단군신화(檀君神話)'로 만들었다.
이들 외에도 우리나라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일본인은 하야시 다이스케(林泰輔), 요시다 도고(吉田東伍), 후쿠다 도쿠조(福田德三) 등이 있었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한국사 왜곡에 이어 1916년 1월에는 조선총독부 산하 중추원에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이는 일제 식민사학자 개인 차원이 아닌, 일제의 정부 차원에서 일본 민족의 우위성을 고취하고 역사교육을 통해 한국민의 민족의식을 배제하고자 설립하였다.
일제는 이 위원회에 미우라 히로유키(三浦周行), 이마니시 류(今西龍) 등 식민사학자들과 어윤적·유맹·이능화·정만조 등 부왜인(附倭人)들을 참여시켜 우리 역사를 왜곡·말살시키는 기초작업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1922년에는 이를 '조선사편찬위원회'로 확대 개편하였고, 1925년에는 '조선사편수회'를 조직하여 권중현·박영효·이완용·이진호 등 매국노들을 참여시켰으며, 2년 뒤에는 신석호·이병도·최남선 등 많은 부왜인들을 동원하여 식민사관에 입각한 본격적인 조선사 편찬 작업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이마니시 류는 1921년 「단군고(檀君考)」라는 논문에서 단군의 건국사화를 신화로 재창작하였는데, 이는 20여 년 전에 나카 미치요가 만든 '단군신화'를 논리적으로 체계화한 것으로 우리나라 역사를 왜곡하는 밑바탕이 되었고, 1937년에는 마침내 35권 2만 4천여 쪽에 이르는 이른바 『조선사』를 편찬하기에 이르렀다.
'단군신화' 등장
'단군신화'라는 말이 우리나라 잡지에 처음으로 등장하여 일반인에게 알려지게 된 것은 『개벽』 창간호(1920.6.25)에 필명(筆名) '일태(一態)'라는 자가 쓴 논설 「단군신화」이다. 그 내용은 '단군의 전설'이 곧 '단군신화'라는 의미를 갖게 하고, 민속과 관련된 것으로써 주술성이 가득한 것이어서 배달겨레가 국조(國祖)라고 인식해 오던 단군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아주 먼 것이었다.
그 후 신문이나 잡지 등에 논설 또는 논문 형태로 '단군신화'가 대대적으로 소개되었다. 최남선은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하면서 1928년 1월 1일부터 10일까지 『중외일보』에 「단군신전(壇君神典)에 들어있는 역사소(歷史素)」라는 제목으로 5차례 연재를 했다. 그는 『삼국유사』 속에 나오는 『고기(古記)』는 『단군기(壇君記)』이며, 이것은 '단군신(壇君神)의 이야기'로 신화(神話)임을 강조하여 단군의 건국사화를 '단군 귀신 이야기'로 만들어 버렸다. 김준은 1935년 12월 『조선중앙일보』에 「단군신화 연구」라는 제목으로 13차례나 연재를 했고, 이듬해 김태준은 『역사과학』에 「단군신화 연구」를 3차에 걸쳐 실었다.
청맹과니들의 행진
광복 후 이른바 '단군신화'에 대하여 신문과 잡지 등에 기사화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이를 제제로 한 논문과 단행본이 쏟아졌다.
그 중에서 주요한 것을 살펴보면, 강귀수의 「단군신화의 연구」, 김우종의 「단군신화의 시적 의미」, 김정학의 「단군신화와 토테미즘」, 김지용의 「단군신화의 민속학적 고」, 김태곤의 「무속상으로 본 단군신화」, 이병도의 「단군신화의 이해와 아사달 문제」, 장덕순의 「단군신화의 문학 시고」, 한상련의 「단군신화에 대한 고찰」, 황패강의 「단군신화의 연구」 등의 논문이 있다.
저서로는 김재원의 『단군신화의 신연구』, 이은봉의 『단군신화 연구』 등의 단행본이 나왔다. 특히 이은봉의 『단군신화 연구』 속에는 단군신화와 관련된 김두진·손진태·이병도 등 17명의 논문을 집대성한 것인데, 그 속에는 김두진의 「단군고기(檀君古記)의 이해 방향」이란 논문이 있다. 김두진의 논문 제목에 나타난 '단군고기'는 『세종실록지리지』에 실린 『단군고기』가 아니고, '단군신화 속에 나오는 이야기'의 의미로 사용된 '단군신화'이다.
이처럼 '단군신화'라는 이름으로 300여 논저가 나왔다. 특기할 것은 이를 문학·역사 측면에서 다루기도 하고, 심지어 종교·민속학 갈래에 넣어서 연구했던 사람들도 많았다.
그 뿐만 아니라 초·중학교 교과서와 고등학교 국사·국어·문학 교과서에 '단군신화'가 지금까지 실려 있다.
단군이 우리나라를 세운 후 대한(大韓)(1897~1910)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 동안 왕조사(실록)나 문집, 고전에 이르기까지 그 어디에 '단군신화(檀君神話)'라는 용어가 단 한 번이라도 나온 적이 있었던가?
전술한 바와 같이 단군신화라는 용어가 공식적으로 등장한 것은 일제 강점기 이후 탄생된 것으로 이 용어가 등장한 지 1백년이 가까워 오는데도 이를 보지 못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청맹과니들인가?
'아사달'이 평양이다, 하얼빈이다, 구월산이다 등으로, '단'은 檀이 맞다, 壇이 틀리다 등으로, 내용은 주술성이 있다, 없다 등으로 수많은 논저가 쏟아져 나왔다. 비유하자면, '단군신화'라는 용어에 대하여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은 채,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일본옷을 던져주면서 '조선옷이니, 잘잘못을 살펴보라.'고 하니, 우리나라 학자들은 '이 옷은 조선옷이 아니고 일본옷이다.' 라고 해야 하는데, 단추는 4개가 적당하다, 5개가 적당하다. 왼쪽 소매가 오른쪽보다 조금 길다, 짧다. 옷고름이 짧다, 길다는 식으로 연구를 한 셈이다.
처참한 현실
고려 중기 이후 유학자들은 "주 무왕은 기자가 조선(朝鮮)으로 도망가자 그곳에 봉(封)했다"라는 『사기』의 한 구절만 보고, '기자를 주 무왕이 조선에 봉했으면, 기자가 조선 임금이네. 그때부터는 기자조선, 후조선' 운운하였다. 『사기』에 나오는 '조선'이 주나라 땅의 이름인지, 단군이 세운 나라의 이름인지 따져 보지도 않은 채, 기자의 몸통을 만들고 옷을 입혔으며, 평양에 기자 무덤과 사당을 만들어 우러러 받들었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거기에다 '기자는 미남이고, 춤도 잘 추고, 노래도 잘하고, 임금이 되었고, 정전법을 시행하고, 성인이었다.'라고 하여 임금에다가 공맹(孔孟)을 보탠 초월적 존재로 만들어서 1천년 동안 갑론을박해 오지 않았던가?
서기전 1120년경 상(商:은殷) 나라의 종친인 자서여(子胥餘)는 오늘날 군소 읍 정도의 작은 나라였던 기국(箕國)의 자작(子爵)으로 있었다. 중국의 유학자들은 '기국의 자작'을 줄여서 "기자(箕子)"라고 일컬었다. 상나라가 망하자 '조선'(漢의 고을) 땅으로 들어가 살았다는 단순한 기록인데, 고려 유학자들은 기자가 우리나라 왕이었을 뿐만 아니라, 오랑캐인 우리 민족을 교화시킨 '성인'이었다고 추앙했고, 조선의 유학자들은 기자를 성현으로 만들어 '기자광풍'을 일으키면서 기자 숭배가 극에 달했으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과거사이다.
조선 세종 때는 『단군고기』라는 사서가 있어서 그 일부가 『세종실록지리지』에 나왔기에 당시 일부 유학자들은 단군을 국조로 보았다. 그러나 그 후 대부분의 유학자들이 『세종실록지리지』에 실려 있는 『단군고기』를 무시하고 멋대로 고친 후 기자를 성인으로 만들고 추앙하기에 급급하였으니, 윤두수가 『기자지(箕子志)』를 썼고, 이이는 『기자실기(箕子實紀)』를 편찬하여 '기자광풍'의 근원을 제공하였으며, 남인의 영수 허목과 서인·노론의 영수 송시열은 '예송(禮訟)'을 벌여 조선 천지를 기자광풍 속에 빠지게 하고는 마침내 겨레의 뿌리를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렸으니, 반성해야 할 부끄러운 과거사이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창조한 용어 '단군신화'를 가지고 300여 논저를 빚어낸 사람들이 이 땅의 유명한 학자로 있고,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단군신화'라고 조작하는 일에 적극 협력했던 부왜인 이병도가 서울대학교 대학원장, 문교부장관, 대한민국 학술원장을 지냈으니, 그 '단군신화'가 오늘날까지 초·중등 교과서에 실려 올 수 있었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 때 안확은 『조선문학사』를 쓴 바 있는데, 그 속에 나오는 "7.5조는 전통가락"이란 구절이 광복 후 중등 국어 교과서에 약 50여 년 동안 남아 있었다. 7.5조는 7세기부터 일본의 전통가락이었다. 일제 강점기 때 내놓은 책에 "우리의 전통가락"은 일본의 전통가락인데, 일본글을 한글로 바꾸었다고 해서 우리 것이 되는 것이 아님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삼국사』는 고려 인종 23년(1145년) 김부식(金富軾)의 주도도 11인의 편수관들이 편찬했다. 이 책은 50권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고, 시간적으로는 2천여 년 전부터의 장구한 역사 기록이었다. 필자가 연구해보니, 『삼국사』는 『고기(古記)』·『삼한고기』·『신라고기』·『신라고전』·『신라별기』, 김대문의 『고승전』·『화랑세기』·『계림잡전』 및 최치원의 『제왕연대력』 등과 『삼국지』·『한서』·『진서』·『위서』 등 중국의 20여 종 역사서를 참고하여 재구성한 것이었다. 그 판본은 현전하지 않고, 2차 판각은 13세기 후기로 추정되는데, 현전하는 판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것은 일본 궁내청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삼국사』를 일제 식민사학자 누군가 『삼국사기』라고 하니, 앵무새처럼 지금까지 따라 하고 있다. 책표지에 '삼국사(三國史)'라고 적혀 있는데도 불구하고 '삼국사기'라고 하니, 이보다 더한 청맹과니가 있을까? 이 얼마나 처참한 대한민국의 현실인가?
(글 출처: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