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시 후기] 딸기 우유와 소고기 장조림

[주황]

스물 네살, 그러니까 2005년을 인생에서 가장 암울했던 시기로 꼽을 수 있다. 왜냐하면 서울에 있는 대학원을 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서울살이를 허락하지 않으셨던 부모님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일주일에 4번을 기차로 통학을 하는 신세였다. 애초에 교사가 되기 위해 대학원에 들어갔으니 임용 준비도 입학 때부터 했다. 노량진에서 8시부터 16시 30분까지 수업을 듣고 바로 캠퍼스 중앙도서관으로 달려가 논문 주제를 잡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18시 30분부터 22시까지는 대학원 수업을 듣는다. 끝나면 인사조차 생략하고 22시 30분 열차를 타고 23시 30분에 대전역에 도착하는 것이다. 이것도 일 주일에 두 번은 그러하고, 나머지 2번은 재수생의 국어 과외를 하러 오류동으로 택시를 타고 갔다. 수업이 없는 평일 하루는 동네 도서관을 갔다. 동네 도서관에서 교육학 학원 교재를 펴놓고 눈에 불 켜고 읽었다. 그랬다고 생각하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조용히 좀 해 주세요...다 들려요."라고 항의하는 소리에 깨 보면 코를 골고 있다는 게 함정이었지만. 토요일은 논문 주제에 해당하는 문학 작품 1쇄, 2쇄, 3쇄, 4쇄를 찾아읽고 어렵게 서울 검정교과서 협회에서 구입한 교과서를 뒤적이다 보냈다. 일요일은 집에서 신성시하는 교회 가는 날이다. 공부한다고 빠질 수 있는 고3도 아닌 데다 나의 어머니는 "우리 경은이도 그거 할 수 있는데."라시며 성가대(헉!) 알토 자리와 교회 방송 송출부에 나를 넣으셨기 때문에 가면 하루 종일 교회에서 소임을 다했다.

서울과 대전을 무슨 옆 동네 대학 도서관 가듯 들락거렸던 그때 내가 먹었던 것은 딸기우유 2개뿐이었다. 학원 수업 시작 하기 전 한 개, 대학원 수업 끝나고 기차역 스토리웨이에서 또 한 개를 마신 것이다. 그때의 나는 이런 생각으로 머리를 가득 채웠다. "내가 돈도 못 벌고 펑펑 쓰면서 무슨 자격으로 근사한 밥을 먹어?"라는 생각으로 엄마가 차려놓은 아침밥을 넘기고, 기차역에 도착하면 풍기는 맛있는 가락국수 냄새도 포기해버렸다. 내게 음식은 "먹을 자격"이었다. 교원 임용 응시 예정자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과 돈이다. 둘 중에서도 시간이 더 중하다. 그러나 부모님은 내가 우수한 성적으로 학부를 졸업했으니 대학원에서 '빨리' 교원 자격증을 취득해서 '빨리' 교사가 되기를 바라셨다. 그런데 국어국문학과 역사학의 수업을 많이 듣고, 듣는 수업마다 '에이뿔'의 영광을 획득해, 졸업식 당일 금줄을 치렁치렁 목에 걸 수 있었던 것과 교사가 빨리 되어 돈을 버는 것은 다른 문제다. 내게는 학부 때 얻었던 모든 지식을 다시 '국어교육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으로 편입시킬 시간이 필요했고, 필수 과목 외에는 수강해 본 적 없는 교육학의 이론을 진지하게 공부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런데 이 시간이 간절히 필요하니 기다려 달라는 말을 부모님께 할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는 이미 막대한 등록금과 내 생활비를 전액 지원해주고 계셨기 때문이다. 평일에는 밤을 새워서라도 논문을 다 써서 조기 졸업을 해야 한다는 압박을 아슬아슬하게 견뎠다. 주말에는 평일동안 못 했던 임용고시 준비를 했다. 국어교육학과 교육학을 다시 동영상으로 들어가며 남들보다 모자란 공부량을 채우기 위해 노력했다. 밥 먹는 시간은 호사를 부리는 것에 가까웠다. 엄마가 "나와서 밥 먹어!"라고 말씀하실 때마다 "나와서 얼른 밥 먹고 얼른 교사 돼라!"라고 번역이 되었다. 부모님과 함께 밥을 먹기 싫었던 나는 또 편의점에 가서 딸기우유 한 개를 사서 빨대로 쪽쪽 빨며 스산한 철길을 왼쪽에 끼고 걷기만 했다. 그때의 편의점 딸기우유에는 내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 따윈 없었다. 그것의 분홍빛은 내 마음에 스스로 상처를 냈을 때 나는 핏빛을 닮았다. 나는 사회의 구성원으로 제 앞가림을 못하는 내가 싫었다. 그래서 음식을 거부하고 누구나 아무 생각 없이 마실 수 있는, 조리 과정 따윈 필요없는 것만을 골라 마신 것이다.

3월 14일, 은유 선생님께서 진행하시는 메타포라 10기의 수업을 망원동 책방에서 참여하고 왔다. 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원망만 하게 될 것 같고 그러기에는 내가 사랑하는 존재기 때문에 글에서 그렇게 드러나지 않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은유 선생님이 한 마디를 하셨다. "써 보신 거예요?" 써보지도 않고 이런 걱정을 하다니. 그래서 '나의 아버지'와 '나의 어머니'에 대한 글을 썼다. 나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학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나의 어머니'를 낭독하고 합평을 진행했다. 글이 길고 지루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학인들은 내 글에 감응하고 자신도 부모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해주어 기분이 좋았다. 부모님에 대해 분노하지 않고 그들을 아직도 내가 사랑하고 있음을, 어릴 적 사랑받았던 기억도 고스란히 갖고 있음을 글로 표현한 것 같아 즐겁기도 했다. 반면 이런 질문도 받았다. "왜 갑자기 엄마의 두부 조림과 된장 찌개가 먹고 싶다고 쓰신 건가요? '저그'는요? 이게 그립다는 건지, 어머니로부터 받은 억압이 해소되지 않았다는 건지 궁금해요."라는 질문이었다. 어떻게 대답하는 것이 좋을까? 나는 마흔이 되어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내 가정에 대한 주도권을 찾기 위해 부모님과 이별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렇지만 이 감정으로만 가득한 것은 아니어서 나를 사랑하시기에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을 해주셨던 어머니의 마음과 손자를 사랑해서 어머니가 사줬던 로봇들을 기억한다고 표현했던 것이다. 사랑과 주도권 찾기 사이에서 헤매는 내 마음이 전달되지 않았나?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대답하려고 노력했다. "저는 누군가에게 음식을 해 준다는 것, 그에게 의미있는 날을 기억해서 그가 좋아할 만한 것을 애써 파악해 선물을 한다는 것은 음식과 선물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해요. 그것 자체가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부모님이 제게 주셨던 사랑을 잊지 않는다고 표현한 것이고 그게 음식처럼 잘 드러나는 게 없다고 생각해요. 부모님의 사랑은 감사하지만 제 삶의 주도권을 얻기 위해 이런 방법을 썼어요."

메타포라 수업에 모든 힘을 쏟아 피곤한 오늘,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고기 장조림을 만들고 있다. 남의 살을 2시간 푹 삶고 간장과 고기 국물, 약간의 단맛을 첨가해서 또 1시간을 뭉근하게 끓여야 완성되는 지독한 요리다. 고기 피도 한 시간을 찬물에 담궈 뺐으니 나는 아침 9시 경부터 지금까지 책 읽고 글을 쓰며 장조림만 살펴보고 있는 것이다. 살펴보기만 하면 안 된다. 피를 빼도 올라오는 불순물은 거품을 이루는데 이것을 놔두면 요리가 맛없어진다. 거품을 건져내는 것도 지난하다. 네 번 정도 큰 스테인리스 보울이 가득 차도록 거품을 뺀다. 파 사이 사이, 양파의 겉껍질, 황태 대가리 입가 등 국자 대기 애매한 곳에 거품이 보글보글 올라오기 때문에 판화가가 칼을 조심스럽게 대서 음각하는 기분으로 국자를 대야 한다. 이게 끝나면 맑은 국물이 나오기 시작한다. 1시간이 좀 넘으면 맑은 국물을 2리터 따라내고 대파, 양파, 황태대가리 등을 걸러내 받아놓는다. 고기는 따로 냉장고에 옮겨 식혀둔다. 이게 요리 절반 끝난 것이다! 믿어지는가? 냉장고에 30분 정도 가둬둔 고기는 이제 손으로 찢을 만한데, 나는 칼을 쓴다. 왜냐하면 지방이 없는 우둔살로 장조림을 만들기 때문에 너무 퍽퍽하다. 심지어 근육이 나오면 손에서 미끄러지는데 그때 느끼는 허탈감은 끼니를 굶고 싶을 정도이다. 칼로 썬 장조림 700그램을 간장 한 컵, 황설탕 반 컵, 맛술 약간 넣고 또 1시간을 끓인다. 다 끓으면 참기름 둘러주고 통깨도 뿌려서 락앤락 두 통에 담아 뿌듯하게 냉장고에 넣는 것이다. 오늘 장조림을 다 만들고 나면 둘째가 어린이집에서 오는 4시 반이 될 것이다. 나 혼자 먹는다면 절대 장조림을 하지 않을 것이다. 은이와 완이가 맛있게 먹고, 남편이 혼자서도 맛있게 밥을 먹게 하려고 만든다. 15분 후루룩 먹으면 끝날 반찬을 4시간 걸려 만드는 이 정성이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일지 나는 생각할 수 없다. 시간 낭비라고 생각할 법한 이 요리과정이 뿌듯함으로 승화되는 이유다.

15년 전의 나보다 지금의 내가 훨씬 좋다. 비록 살이 더 붙고, 세련된 옷에 관심이 없어지긴 했다. 출근을 안 하니 트레이닝 복으로 하루를 산다. 화장법, 네일 케어에도 시들해졌다. 누가 봐도 나를 '아줌마'라고 부를 정도다. 그래도 지금의 내가 말할 수 없이 더 만족스러운 이유는 하나다. 다른 사람을 살리면서 내 삶을 단정히 꾸려나가게 됐기 때문이다. 15년 전의 나는 암막 커튼을 치고 밤낮 아무 때나 잠을 잤으며 해내야 하는 과제가 있으면 아무 때나 밤을 샜다. 딸기우유만 들고 온 몸에 힘이 빠진 채로 파이팅을 외쳤다. 지금의 나는 출근을 하지 않아도 일곱 시에 일어나 암막 커튼을 걷고 머리카락을 줍는다. 모닝빵을 굽고 사과를 깎는다. 아이들을 깨워 뽀뽀를 하고 걸어가도 되는 식탁까지 안아서 데려다준다. 이마를 쓰다듬으며 사과 한 입씩 입에 물린다. 애정을 담아 인사를 해서 애들을 밖으로 보내고 나면 햇살이 인자하게 나를 따뜻하게 비춰주는 것이 감사해서 산책을 한다. 어떤 날은 맘에 드는 문장을 문서로 만들기도 한다. 오늘같은 날, 완이가 어린이집 가기 싫어했던 날은 완이가 좋아하는 반찬을 한다. 그러면서 나를 위해 아보카도와 꿀을 섞어 만든 아보카도 우유를 만들어 마신다. 두 아이가 맑은 날씨에 환호하는 것을 보며 계절을 느끼는 감각이 더 예민해졌다. 학인들을 만나며 내 삶도 이야기로 전할 수 있다는 것, 하찮은 경험은 없었다는 것을 배운다. 학인에게 대답을 할 때에야 내 행위들이 사랑을 향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스물 넷에 비하했던 내 삶이 지금 더 빛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내가 챙기고 만나는 사람들 덕분이리라.

[팬 FAN]

아 놔
야근 하려고 밥 먹고 왔는데.
시간 아끼려고 카페도 안 들어 오려했는데.
스마트 폰으로 읽다가, 컴퓨터로 로그인하게 만드는 이분은 무슨 매력이심
1차 댓글 올림 - 왕팬

---
- 제가 오류동 부근 . 우신고 출신 이랍니다 ( 뭐랴도 엮어야 겠다 )
- 님이 그렇게 열심히 사시는 동안. 저는 그저 한우물 당구와 술만... (창피하네요)
- 기차역 '스토리웨이' → 구체화의 힘
- 수업마다 에이뿔 - 에이... (화가난다)
- 저는 글이 길어지면 정리가 안될까봐 되도록 문장을 짧게하려 노력하는데 주황님 문장은 때론 길어도 쏙쏙 들어오네요 왜 일까요?
- 잘 읽었습니다. 알죠..다음글도 계속 기대한다는걸.. 그리고 저도 좀 가르쳐 주세요. 착한 어린이가 될게요.
또 만나요 ~

[주황]

ㅋㅋㅋㅋㅋ 솔직히 말씀드리면 인생에 굴욕이 많아 그걸 풀자면 또 길게길게 써야합니다.ㅠㅠ 제 글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꾸벅

[우주진주]

주황님 글을 읽고 치열하게 보낸 20대를 저도 떠올려 봅니다. 이번 메타포라 수업을 통해 조금씩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어 덕분에 저를 깊게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게 되니 정말 좋아요.
딸기 우유로 버틴 그 시절을 통과하여 지금은 삶을 감사하고, 글로 쓸수있고, 아이들에게 먹을 음식을 만들고, 그렇게 사랑을 실천하는 주황님께 박수를 보냅니다.
앞으로 더욱 편안하게 삶을 바라보고 즐기시길 바랄게요. 충분히 애쓰시며 열심히 잘 살아오셨어요.

[주황]

감사합니다. 라고 인사하기엔 (오드리 로드의 표현을 빌리자면) 여성, 외모가 뛰어나지 않은 자, 중년, 자본이 풍요하지 않은 사람이 견뎌야하는 미세한 굴욕이 많아요ㅜ 메타포라에서 이 경험들을 안전하게 표현할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당신의 예측 불가능한 여정]

다시 한번 또 안아주고 싶어요 잘 버텨왔어요 😢

[주황]

여정^^ 다음 주에 또 만나요. 보고싶어요.

[당신의 예측 불가능한 여정]

넵!!!

[주황]

고맙습니다. ^^ 집이 결코 편안하지는 않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