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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도시
- 이원호
9권
---- 차 례 ----
1. 운명
2. 태풍상륙
3. 대탈출
4. 김상철의 선물
5. 혼돈
6. 싹트는 음모
7. 궁지에 몰리다
8. 끝없는 전쟁
1. 운명
그레고리 파트킨이 북한 대표부에 들어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금철, 최태호 등과는 몇 번 만난 적이 있지만, 대표부의 부책임자라는 장호성은 초면이었다. 그가 사무실에 들어서자 장호성은 얼굴에 웃음은 띄웠지만 긴장한 듯 행동이 부자연스러웠다.
「이제까지 말씀만 들었는데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소파에 마주보고 앉았을 때 장호성이 말했다. 그의 러시아어는 유창했다.
「사업이 잘 되신다고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레고리가 마주보며 웃었다. 업무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오전 10시경이었다. 사전 연락도 없이 북한 대표부를 방문한 그레고리가 대표와의 면담을 요청하자 대표부는 어수선해졌다.
그리고는 대기실에 그레고리를 앉혀두고 회의를 한 끝에 서일 대신 장호성이 만나기로 했던 것이다.
「미리 연락을 해주셨다면 대표님을 만날 수 있으셨을 텐데, 유감입니다.」
장호성이 직원이 가져온 차를 권하며 말했다.
「김상철 사장께서도 안녕하시지요?」
「예, 덕분에. 김사장께서 대표께 안부를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요즘은 바빠서 서로 적조했습니다.」
「그렇지요.」
장호성은 손끝으로 의자의 팔걸이를 가볍게 두드리고 있었다.
그는 그레고리가 어떤 인물인지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이다.
무장강도단 시절의 그레고리는 시베리아에 진출해 있는 북한의 벌목사업소를 피신처로 자주 이용할 만큼 좋은 관계였다. 그러나 지금은 김상철의 심복으로 거대한 운송회사를 거느린 사업가가 되어 있었다. 찻잔을 내려놓은 그레고리가 허리를 폈다.
「대표께 말씀을 드리려고 했는데 부대표라도 상관이 없겠지요.」
「예, 그럼요, 상관없습니다.」
「한국 정부가 제 보스의 부인을 억류시키고 있어요. 여권을 압류해 버려서 근대리아에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
「그것을 북한 측이 해결해 주셨으면 해서, 한국 정부는 당신들 말이라면 두말도 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런데 왜 그렇게 된 겁니까?」
「글쎄, 그건 복잡한 이야기라서.」
그레고리가 손바닥으로 턱수염을 문질렸다.
「생략합시다, 그 이유는.」
「이건 대표께 보고를 드려야, 저로서는 ….」
「당연하지요. 보고 드릴 때 만일 우리 보스 부인이 빠져나오지 못했을 때는 앞으로 한국 정부의 관리들은 근대리아가 무덤이 될 것이라는 말도 전해주시오. 오는 족족 죽여 없앨 테니까.」
「‥‥‥‥」
「장관이건 총리건 모조리 죽일 테니까. 회담인지 지랄인지를 한다면 회담장을 폭파해 버릴 겁니다.」
장호성이 입맛을 다셨다
「그렇게 전하지요, 그레고리 씨.」
「그리고 또 있습니다.」
상체를 숙인 그레고리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당신들한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우리는 남북 간의 비밀협상 내용을 알고 있어요. 합의서 사본을 갖고 있단 말입니다. 만일 사흘 안에 우리 보스의 부인이 근대리아에 도착하지 않는다면 그 사본을 일만 장쯤 복사해서 한국은 물론 세계의 모든 언론기관에 보낸다고 해주시오.」
「합의서 사본을 가지고 있다고 하셨소?」
얼굴을 굳힌 장호성이 묻자 그레고리가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소. 아마 한국 정부는 그것 때문에 이러는 모양이오.」
「부인을 보내준다면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합의서 문제는 잊는다고 해주시오. 교환이고 뭐고 지랄 같은 수작은 부리지 말라고도 해주시고.」
「김상철은 유장석의 생명을 구해 준 놈입니다. 이대각도 마찬가지이고, 그쪽에서 정보가 새었을 수도 있지요.」
이금철이 말하자 서일이 머리를 끄덕였다.
「강미현의 생각도 그런 모양이야. 어쨌든 안기부 세력을 근대리아에서 내몰려고 한 것뿐인데 심재택의 심문 과정에서 비밀합의 이야기가 나오자 한국 정부는 기절초풍을 했어.」
그는 앞에 앉아 있는 장호성과 박기환, 이금철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심재택은 합의서 사본을 김상철한테서 받았다는 거야. 김상철은 유장석한테서 얻었을 것이고.」
「이대각이 갖다 주었을 수도 있지요.」
장호성이 말하자 서일이 입맛을 다셨다.
「그나저나 우리도 골치 아프게 되었어. 김상철 이놈은 은근히 우리를 협박하고 있단 말이야. 합의서가 공개되면 한국 정권은 뒤집힐 가능성이 많아. 야당이 들고 일어날 것이고 여론을 배경으로 우파와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킬 가능성도 있어. 그렇게 되면 북남간의 합의는 물론 우리 체제도 위험해진다.」
서일은 대외정보 조사부장 출신으로 첩보활동의 베테랑이다.
그가 강미현에게 근대리아의 안기부 활동에 관한 정보를 주어서 한국 정부로 하여금 그들을 견제토록 한 것은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다. 안기부장의 목이 잘리고 근대리아의 실무책임자였던 심재택은 체포되었던 것이다. 더욱이 김상철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까지 밝혀졌다. 박기환이 머리를 들었다.
「그렇다면 김상철의 요구를 들어 주어야 할까요?」
「우선 남조선 정부의 진행상황을 알아봐야겠어.」
다시 입맛을 다신 서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평양에서도 김상철에게 합의내용이 알려졌다는 것에 긴장을 할 것이 틀림없어. 강미현도 자체 단속을 하겠지만 우리도 기밀누출에 대해서 각별하게 주의해야 될 거야.」
「우리는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어깨를 편 박기환이 똑바로 그를 바라보았다.
「정보는 근대리아에서 새었습니다.」
서일은 기밀사항에 관해서는 철저하게 관리하는 인물이다. 이번의 안기부 제거 공작도 대표부 안에서 알고 있었던 사람은 그 혼자뿐이었다.
서일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어쨌든 강미현과 김상철의 서로에 대한 불신감은 더욱 깊어졌다. 김상철은 강미현의 정보에 의해서 지원세력인 안기부가 제거된 것으로 믿을 것이고 강미현은 근대리아 정부 깊숙이 침투하여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히는 김상철의 존재를 재확인했을 테니까.」
눈을 뜬 심재택은 다시 자신이 깨어나기 전과 똑같은 상황에 있다는 것을 알자 절망했다. 이곳은 수원 근처의 개인주택으로 대검 공안부의 특수팀이 안가로 사용하는 장소일 것이다. 지하실 안에는 시계도 없었는데다 주위의 소음이 일절 차단되어 있었으므로 이제 며칠이 지났는지 알 수가 없다. 한 팔로 상체를 버티고는 겨우 침대에서 일어나자 머리가 저도 모르게 앞쪽으로 기울어졌다. 그 순간 그의 몸은 머리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앞쪽으로 넘어졌는데 다행히 침대의 끝에 몸이 걸렸다. 약 때문이다. 놈들이 사용하는 자백제는 이미 오래 전에 자취를 감춘 CAT3가 틀림없었다. 중동의 어느 과격단체가 마약과 합성해서 만든 이 약은 정신을 명료하게 하면서 의지를 무력하게 만드는 효력이 있었는데 그 대신으로 육체가 오래 견디어내지 못한다. 그는 십 년쯤 전에 이 약의 시험결과를 읽은 적이 있었다. 머릿속을 억누르고 있던 것일수록 먼저 풀려나온다는 것이다. 그는 다시 두 손을 짚고는 상반신을 일으켜 세웠다. 가슴이 무섭게 고동을 쳤고 눈에 보이는 사물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방은 다섯 평쯤으로 창문도 없고 오직 앞쪽에 나무문이 하나 있을 뿐이다. 방 안의 가구는 자신이 앉아 있는 침대와 플라스틱 의자 두 개뿐이었다. 벽에 등을 기대고 앉은 그는 한 번만 더 약을 맞았다가는 자신이 살아남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CAT3는 세 번 이상 주입하면 죽는다는 시험 결과가 나와 있었는데 자신은 벌써 네 번을 맞았던 것이다.
방문이 열리면서 이씨와 조씨가 들어섰으므로 그의 가슴이 다시 거칠게 뛰었다.
「일어날 기력이 아직 남은 모양이군.」
이씨가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의지력이 대단해. 덕분에 수사가 급진전되고 있지만 말이야.」
그가 빈손으로 들어선 것을 깨달은 순간부터 심재택은 안도감과 실망감이 뒤섞인 감정으로 혼란에 빠져들고 있었는데 그것은 CAT3의 중독성 때문이다. 설령 맞고 죽더라도 머릿속의 세포 하나하나가 빛나며 박동하는 강한 쾌락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플라스틱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일주일 후에 정식으로 기소할 예정이니까 이제 진술서를 써야겠어.」
이씨가 눈짓을 하자 조씨가 한 묶음의 서류를 꺼내어 심재택의 옆에 놓았다.
「당신은 곧 빼내 줄 테니 걱정 마라. 참고로 당신이 쓸 내용을 요약해 왔어.」
흔들거리는 머리를 애써 가누면서 심재택이 서류와 그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제 심문은 끝난 것이다.
자신의 자백으로 권부장은 물론 김상철과 십여 명의 요인이 정부전복의 음모를 계획한 것이 드러났다. 근대리아에서 다음 번 남북회담이 열릴 적에 김상철을 행동책으로 북한 대표단을 살해하여 남북관계를 경색시키는 것이 첫 번째 목표였다. 물론 이것은 그들이 조작한 것이다.
두 번째는 있지도 않은 남북한의 합의서를 조작하여 한국 정부가 비밀리에 북한에게 엄청난 양의 경제원조를 해주기로 했다는 것을 언론에 퍼뜨린다는 것이다. 그것으로 민심이 흉흉해졌을 때 극우파가 주도하는 정권을 세우는 것이 최종 목표라는 내용이었다. 서류를 든 심재택이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 쓰지. 하지만 부탁이 있어.」
이씨와 조씨가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들이 공안부의 수사관인지 아니면 경찰청의 조사관인지 아직 확실치는 않다. 이윽고 자신을 이씨라고 소개했던 사내가 머리를 끄덕였다.
「뭔데? 말해 봐.」
「약을 한 번만 더 맞을 수 없겠나?」
「이 자식, 중독이 되었군.」
이씨가 얼굴에 웃음을 띄웠다.
「그건 안 돼, 다른 건 몰라도. 오늘 저녁에는 맛있는 요리를 보내 주지.」
자리에서 일어선 그들이 방을 나가자 심재택은 다시 머리를 벽에 기대었다. 그들이 사건 그대로를 발표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지만 합의서를 조작하여 언론에 퍼뜨리기로 언론사 간부들과 공모했다는 내용은 만일의 경우에 대비한 복선이다. 설령 합의서가 노출되더라도 조작한 것으로 치부할 수가 있는 것이다.
심재택은 입가에 희미한 웃음을 띄웠다. CAT3의 약효를 알고 있던 터이라 주사를 맞기 전에 차 안의 장면을 눈앞에 떠올렸고 차에 들어와 자신에게 합의서 사본을 건네준 자가 김상철인 것으로 모습을 떠올렸다. 김상철이 사본을 건네주며 말했다. '합의서 사본이오, 심선생.' 마치 컴퓨터의 지난 그림을 지우고 새 그림을 그려넣듯이 자신의 말도 만들어 내었다. '중요한 것을 얻었습니다.'
박기환은 김상철뿐만 아니라 한국의 안보에도 크게 이용가치가 있는 거물이다. 그는 박기환 하나만은 지워야겠다고 생각했고 이제 그것은 이루었다.
아랫입술을 깨문 심재택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죽을 작정이었는데 이놈들이 CAT3의 치사한계는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안보수석 신형목은 넥타이의 매듭을 잡아당겨 느슨하게 풀었다.
「그것, 김상철이의 여자는 보냅시다. 지금 그놈이 터뜨리면 만사휴의오.」
그의 말투에는 짜증기가 배어져 있었다.
「근대리아에 있는 놈입니다. 여자를 잡고 있는다고 해도 우리 손이 닿기가 어려워요.」
「사건의 핵이 그놈이야. 그놈을 중심으로 안기부가, 다른 떨거지들이 붙어 있어.」
이태준이 충혈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심재택의 자백 내용을 듣고 난 후부터 그도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오늘 아침, 신형목은 강미현으로부터 김상철의 통첩을 전달받았다. 근대리아 북한 대표부의 서일이 강미현에게 한국 정부에 연락을 하도록 부탁을 한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숨 돌릴 사이도 없이 급박한 상황이 겹쳐오는 셈이었다.
「그렇다면 합의서 사본을 그놈이 갖고 있단 말인가?」
「사본은 복사만 하면 열 놈이 갖고 있을 수도 있지요. 어쨌든 그놈이 사본을 빼낸 놈이니 갖고 있을 확률이 많습니다.」
「도대체 북한 놈들은 뭘 하고 있는 거야? 그놈 하나 처치하지 못하고.」
그러자 신형목이 입맛을 다시고는 머리를 돌렸다. 당치 않은 푸념이었던 것이다. 근대리아의 북한 세력은 김상철을 치기에는 아직 역부족이다. 그것을 잘 알고 있을 이태준이었다.
「내보냅시다. 놈이 통고한 기간은 사흘입니다. 우리는 일주일이 지나야 사건을 맞추어 발표할 수가 있습니다.」
「‥‥‥‥」
「여자를 억류시킨다고 해도 김상철을 잡을 가능성도 적고, 사건이 발표되어서 언론이 여자를 추적하면 오히려 골치가 아파질 수도 있습니다.」
「각하께서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계셔.」
혼자소리처럼 이태준이 말했다.
「그 영웅심만 가득 찬 소인배놈들은 각하를 정권욕이 가득 찬 인물로 치부하는데 한반도의 평화에 기여한 공로는 꼭 후세에 평가받으실 거야.」
그러자 신형목이 소리 내어 한숨을 뱉었다.
「어제 저녁에 터너 대사도 그런 말을 하더군요. 이대현 씨가 자주 북한을 자극하는 발언을 하는 것이 걱정된다는 겁니다.」
「대안도 없이 선동만 하는 자야, 그자는.」
이태준이 정색을 했다.
「남북관계가 논리대로 진행되지 못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인기 위주의 발언만 하고 있단 말이야.」
「개인적인 문제라고 하셨는데 무슨 일입니까?」
이성훈이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는 시늉을 했다. 테헤란로에 있는 이성훈의 사무실 안이다. 벽시계는 오후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머리를 끄덕인 백근수가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더니 만년필로 휘갈기듯 써서 탁자 위로 밀어놓았다. 이성훈이 수첩을 집자 그는 입을 열었다.
「취직 부탁을 좀 하고 싶은데요. 실은 제 후배가 복직이 안 되어서.」
수첩을 들여다본 이성훈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러자 백근수가 다시 수첩을 집더니 몇 줄을 썼다.
「유능한 후배인데요,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글쎄요, 원체 난데없는 말씀이셔서.」
다시 수첩을 들여다본 이성훈의 얼굴은 굳어져 있었지만 말은 받는다. 20분쯤 후에 그들은 지하주차장의 옆쪽에 있는 보일러실에서 마주보고 서 있었다. 거대한 보일러실 안은 인적이 없었고 입구는 한 곳뿐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왔습니다. 지금 청와대 주도로 언론사의 간부들이 조사받고 있는 것을 아시지요?」
백근수가 서두르듯 묻자 이성훈이 머리를 저었다.
「금시초문이오. 그런데 백기자님이 이국장을 숨겨두고 있다는 건 정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이국장의 부탁으로 이선생을 뵈러 온 겁니다.」
「저를 왜.」
백근수가 주위를 돌아보았다.
「이국장께서 남북한의 비밀합의서 사본을 가지고 계시거든요.」
「‥‥‥‥」
「제가 복사해서 한 장을 가져 왔습니다. 보시겠습니까?」
이제는 이성훈이 나무토막처럼 굳어진 얼굴로 빈 보일러실을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머리를 끄덕였다.
「주십시오.」
쓴웃음을 지은 백근수가 주머니에서 서류 한 통을 꺼내어 그에게로 내밀었다. 전쟁터만 전문으로 돌아다녔던 바람에 대한일보의 람보라고 불리우는 백근수도 긴장하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성훈이 서류를 읽는 동안 그는 초조한 듯 담배를 피워 물었다.
「국제신문의 하주간, 한일신문의 조국장, 그리고 KNS방송의 강국장이 동조하기로 했는데 일이 틀어졌습니다.」
이성훈이 서류를 접자 백근수가 빠르게 말했다.
「주동자는 안기부장 권준규 씨와 그의 심복 과장인 심재택 씨, 그리고 대한일보의 이국장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권부장이 이총재님께 상황을 대충 보고드렸다고 들었습니다만.」
「탄로가 났으니 막막합니다. 지금 하주간이나 조국장 등은 회사에 출근을 하고 있지만 곧 어떤 조처가 내려지겠지요. 하지만 권준규 씨와 심재택 씨는 실종상태 입니다. 아마 안가에서 조사를 받고 있겠지요.」
이성훈이 서류를 접어 가슴 호주머니에 넣었다.
「제가 어떻게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그저 서류를 받으신 것으로 됐습니다.」
백근수가 입술을 비틀면서 웃었다.
「물론 저도 한 부 가지고 있습니다만 이런 상황에서 그런 서류가 부담이 될 수도 있을 테니까요. 총재님께 보여 드리고 태우든지 하십시오. 복사본은 많으니까요.」
「분하군요. 저는 자세한 진행사항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국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말할 것도 없고, 이국장은 미처 계획을 세우기도 전에 일이 터졌다고 하더군요.」
담배를 땅바닥에 비벼 끈 백근수가 그에게로 손을 내어밀었다.
「자, 이만, 만나서 반가됐습니다. 부디 조심하십시오.」
그는 재빠른 걸음으로 보일러실을 나가더니 곧 시야에서 사라졌다.
경찰청 외사과에서 나왔다는 두 명의 사내는 인상도 좋았을 뿐 아니라 태도도 공손해서 이여사는 금방 마음이 가벼워진 것 같았다. 사양하는 그들 앞에 오렌지 주스잔을 내려놓았다.
「여권을 다시 만들어 주신다니 고맙군요.」
「저희들 잘못이었습니다. 지난번 파리에서 납치당하셨을 적에 컴퓨터에 여권번호를 입력시켜 놓았던 것이 그만 …….」
선임자로 보이는 30대 후반쯤의 사내가 힐끗 박미정을 바라보았다.
「부랴부랴 확인을 하는 동안 담당자는 어설프게 다른 핑계를 대었던 모양입니다. 어쨌든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그 일 때문에 이렇게 찾아와 주셨다니 고맙군요.」
이여사가 말하자 사내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솔직히 상부로부터 꾸지람을 받았습니다. 근대리아의 김사장님께서 항의를 하셔서요.」
「‥‥‥‥」
「이틀 후에는 제가 직접 여권을 만들어서 가져오겠습니다. 지난 여권은 담당자가 무효 도장을 찍은 바람에 그만‥‥」
「어쨌든 오해가 풀렸다니 다행이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그러자 박미정이 머리를 들었다.
「그림 제가 근대리아로 전화해도 되겠군요. 이틀 후에 근대리아로 출발한다고 말예요.」
「사흘 후에 출발하시면 안 될까요? 이틀 후에 여권 가져오는 건 확실합니다만 시간이 ‥‥」
「그럼 그렇게 말씀드리겠어요.」
「예, 감사합니다.」
사내들은 주스에 입도 안 대고는 아파트를 나갔다. 둘이 남게 되자 이여사가 박미정을 바라보았다.
「사흘 후라니? 그게 정말이야?」
머리를 끄덕인 박미정이 수화기를 들었다. 다이얼을 누르는 그녀를 바라보던 이여사가 소리죽여 한숨을 뱉었다.
「실수를 했다면 당연히 와서 사과해야지, 집에 찾아와서라도 말이야.」
박미정의 이야기를 들은 김상철이 대뜸 말했다.
「여권이 나오는 대로 비행기를 타. 가능하다면 어머니를 모시고 와도 좋고.」
박미정이 이여사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제 임신 8개월의 몸이다. 근대리아에 훌륭한 시설을 갖춘 병원들이 많았지만 어머니가 옆에 있으면 든든할 것이었다.
「그렇게 할게요. 어머니도 가겠다고 하시니까.」
「배가 더 부르기 전에 식을 빨리 올려야 되겠는데.」
이제 김상철의 말투에는 웃음기가 섞여져 있었다.
「급한 것이 아니니까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박미정은 공항에서 출국금지 당한 것을 그들 말대로 오해나 실수라고 생각할 만큼 둔한 여자가 아니다. 김상철은 자신을 안심시키려고 그들 말대로 실수라고 했지만 그녀는 상황의 심각함을 눈치 채고 있었다. 경찰의 말대로 김상철은 어떤 경로를 통해서 한국 정부에 항의까지 한 것이다.
「저, 내일 아버님께 인사하러 내려갔다 오겠어요.」
박미정이 말하자 옆에 않아 있던 어머니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그럼 다시 연락해. 내가 아버님께도 말씀을 드릴 테니까.」
김상철의 목소리도 밝아져 있었으므로 박미정은 가벼운 마음으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넌 왜 집에 안 가?」
이한이 소리치자 세탁해 온 옷가지를 접던 동연교가 머리를 들었다. 그리고는 이한을 똑바로 바라보았는데 굳어진 표정이었다.
「아홉 시가 지났어, 집에 돌아가.」
동연교는 매일 아침 7시에 집에 찾아와서는 이한에게 아침을 차려 주었다. 그리고 저녁 7시면 어김없이 집에 돌아간다. 이곳은 스키장의 빌라로 버스 노선도 없는 곳이다. 그녀가 택시로 타운에서 70킬로미터나 떨어진 이곳까지 오고 갈 리가 없었으므로 이한은 부하 중의 누군가가 차량 편의를 제공해 준 줄로만 알았었다. 그래서 부하들을 무섭게 다그쳤다가 곧 그 제공자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김상철이었다. 김상철이 차와 운전사를 동연교에게 붙여준 것이다.
동연교가 옷가지를 추려 들고는 일어섰다.
「눈에 거슬린다면 옆방에 들어가 있겠어요. 며칠간 집에 안 가도 되니까요.」
퍼뜩 눈썹을 치켜 뜬 이한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날 가볍게 보지 마라. 네가 이 집 안에 있다는 것이 거슬린단 말이야.」
「어머니는 고향에 가셨어요, 이모 식구들을 데리러.」
「당신이 준 돈이면 큰 식당을 차릴 수가 있으니까요.」
「널더러 종노릇 하라고 준 돈이 아니야.」
「받은 사람의 입장은 달라요. 당신이 무시하지 말라고 했듯이 나에게도 기회를 줘요.」
「조그마한 중국년이 말은 잘하는군.」
그러자 아랫입술을 깨문 동연교가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들었다.
「갈보한테 가지 말고 저를 가져요. 그렇다고 당신하고 같이 살자고 안 할 테니까.」
「‥‥‥‥」
「아마, 그러면 내가 거슬리지 않게 될지도 몰라요.」
「넌 기술이 없어서 안 돼. 난 목석같은 계집은 딱 질색이다.」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요?」
입맛을 다신 이한은 머리를 돌렸다.
「이건 도대체.」
「술상 봐 드려요?」
「시끄러!」
이한은 눈을 부릅뜨고 다시 버럭 소리쳤지만 아까보다는 억양이 조금 낮아진 것처럼 느껴졌다. 세탁물을 내려놓은 동연교가 주방으로 들어갔다. 술상을 준비하려는 모양이었다.
다음 날 아침, 유장석은 비서실장 이남호의 집무실로 들어섰다. 총독 비서실장은 서열상으로는 행정청장 아래였지만 때로는 총독을 대리하여 업무를 지시하는 경우가 많은데다가 본래 근대그룹에 있을 때부터 상하관계에 익숙하게 배어있는 사이였다. 유장석은 지금도 이남호를 자연스럽게 상관으로 대하고 있었다. 직원이 날라온 녹차를 두어 모급씩 마시고 났을 때 이남호가 입을 열었다.
「아침부터 내가 보자고 한 건 그, 합의서 문제 때문인데.」
남북한 비밀협상의 합의문서가 누출되었다는 것은 이미 유장석도 알고 있었다. 총독이 주재하는 회의석상에서 강미현이 그것을 보고했던 것이다. 이남호가 유장석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유청장, 당신은 그것이 어디에서 누출되었다고 생각하나?」
「그걸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어두운 표정의 유장석이 입맛을 다셨다.
「김상철과 제가 인연이 있다고 해서 혹시 실장님은 이쪽에서 ……」
「이쪽과 북한 둘 중의 하나야.」
「이쪽은 제 금고에 넣어 두었기 때문에 저 외에 손을 댄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 한국에서는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고 있지만 분위기가 살벌해. 김상철의 부인이 출국금지 조처를 당하고 있어.」
「그것도 이대각이한테서 들었습니다. 나뿐 자식들 아닙니까? 여자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잡습니까?」
유장석이 입가를 비틀면서 웃었다.
「합의서가 어디서 누출되었건 간에 한국 정부의 행태를 보면 잘 되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제 우리야 근대리아 주민이지만 솔직히 한국 정부의 지도자들이 국민을 우롱하고 속이는 꼬락서니를 보십시오. 구역질이 나지 않습니까?」
「그리고 합의서가 누출되었다고 해서 근대리아에 아무런 영향도 오지 않습니다. 부담을 느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난 자네가 그랬다고는 생각지 않아.」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한 이남호가 찻잔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네 말도 맞아. 우리하고는 그 일이 별 상관이 없네. 하지만 총독께서 걱정을 하고 계셔.」
「총독이 아니라 강미현 씨가 그러는 것 아닙니까?」
유장석이 소파에 등을 붙이고는 팔짱을 꼈다.
「제가 알기로는 김상철의 세력을 약화시키려고 한국 정부에게 안기부의 활동상황을 고발했습니다. 그 와중에 합의서 문제가 터져 나왔지요.」
「‥‥‥‥」
「물론 강미현 씨는 북한과 호흡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들 공동의 적이 김상철이 되어 있으니까요.」
「이봐, 유청장. 그것은 모두‥‥」
「근대리아의 장래를 위해서라고 말씀하시려는 겁니까?」
평소와는 다른 유장석의 태도였으므로 이남호가 멍한 얼굴이 되었다.
「김상철은 근대리아의 적이 아닙니다. 그건 실장님도 잘 알고 계실 텐데요.」
「‥‥‥‥」
「주적(主敵)은 북한입니다. 두말 할 나위도 없는 일이지요. 그런데 북한과 연합해서 김상철을 치려고 하다니요?」
허리를 편 유장석이 이남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떤 소문이 돌고 있는지 아십니까? 강미현 씨는 질투에 눈이 멀어서 근대리아를 망쳐먹을 여자라고 한답니다.」
「이봐, 말조심해.」
안색이 변한 이남호가 꾸짖듯 말하자 유장석이 긴 한숨소리를 냈다.
「제동을 거실 분은 실장님뿐입니다. 그래서 말씀드린 겁니다. 처음에 총독님이 의도하신 대로 김상철은 북한의 견제세력으로 양성되어야 합니다.」
「북한은, 자체 이주민은 말할 것도 없고 조선족과 고려인을 적극적으로 포섭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대로 놔둔다면 근대리아는 곧 적화된단 말씀입니다.」
「유장석의 신경이 예민해졌군.」
창가에 선 총독이 화창한 햇살 아래 펼쳐진 근대시를 내려다보았다. 행정청을 중심으로 부챗살처럼 펼쳐진 도로 위를 갖가지 차량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활기 있는 도시의 모습이다.
「하나만 생각하고 둘은 모르고 있다. 내가 염려하고 있는 것은 김상철이지 김상철의 조직이 아니다. 그것은 미현이도 같은 생각이야.」
몸을 돌린 총독이 소파에 맞은 이남호를 바라보았다.
「김상철이 있어야만 그의 조직이 존재한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다. 이실장 자네까지 말이야. 김상철이 없더라도 그의 조직은 건재할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키울 테니까.」
총독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 조직을 유장석이나 이대각이 맡을 수도 있겠지. 아니면 보안국장으로 있는 장동택이 적격일지도 모른다.」
「총독 각하.」
이남호가 서두르듯 입을 열었다.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김상철이 하나만 제거해서 되는 일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그의 간부급 부하들은 모두 …….」
「김상철이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단 말이지?」
총독이 그의 말을 잘랐다.
「사업체까지 모두 나눠 주었다고 들었다. 대단한 놈이야. 나는 돈 욕심이 없는 놈이 제일 무섭다.」
다시 말을 하려던 이남호가 입을 벌린 채로 총독을 바라보았다. 그의 오랜 경험상 총독이 결심을 바꾼 적이 없다는 것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김상철을 제거대상으로 굳혀 놓은 것이다. 그리고 그의 조직을 친위조직으로 흡수할 계획인 것이다. 총독이 다가와 그의 앞자리에 앉았다.
「자고로 이 인자는 일인자의 견제 대상이었고 역사를 봐도 대업을 이룬 일인자가 이 인자를 키워준 예가 거의 없다. 그것은 부자 간에도 마찬가지였어.」
그는 이남호를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
「이 인자가 정상에 오르려면 두 가지 방법밖에 없다. 하나는 힘으로 일인자를 누르는 것이고 또 하나는 엎드려서 처분만 기다리는 것인데 그 동안의 인고의 세월은 말로 표현이 안 된다고 들었다.」
「너는 실질적으로 근대그룹에서부터 근대리아에 이르기까지 이 인자 역할을 해오면서 한 번도 외부에 이 인자로 나선 적이 없었다. 비서실장으로 만족하면서 내 그림자나 분신처럼 일을 해주었다. 너와 나 사이는 형제나 부자간 이상이야. 속속들이 서로를 잘 안다. 그래서 너와 나 사이는 이 인자 문제가 없을 것이다.」
「이젠 너도 밖으로 나갈 때가 된 것 같다. 행정청장을 네가 맡아라. 유장석이는 한국의 근대건설 회장으로 보낼 테다. 그쯤 하면 별 불만은 없을 게야.」
「총독 각하.」
피부가 팽팽해지도록 긴장한 이남호가 상체를 반듯이 세웠다.
두 눈을 한껏 치켜 뜬 얼굴이었다.
「죄송합니다만 저는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하시면 정부가 흔들립니다. 더욱이 유장석은 근대리아 창립의 일등공신입니다.」
「보다 강력한 리더십이 있는 행정가가 필요하다. 그리고 나와 손발이 맞는.」
「근대리아는 총독께서 세우셨지만 유장석은 뼈대를 만들고 살을 붙였습니다. 그를 해임시킬 이유가 없습니다.」
「이제 제2의 건국을 하는 거야. 너는 그 이유를 잘 알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선 총독이 다시 창가로 다가가더니 등을 보였다
이야기가 끝났다는 표시였다. 창밖을 바라본 채 그가 말했다.
「나도 팔을 잘라내는 것같이 아프다. 더 이상 입을 열지 말아라.」
「다음 달이 산월 아니냐?」
김영환 씨가 묻자 박미정이 얼굴에 웃음을 띄웠다.
「네, 한 달 남았어요.」
「지난달에 결혼식을 올리겠다더니 아직 연락이 없어. 준비를 해놓고 있었는데 말이야. 상철이가 바쁜 모양이지?」
「네, 조금.」
그들은 앞마당의 나무그늘 밑에 놓인 평상에 앉아 있었다. 7월 중순으로 한여름이었지만 능선을 넘어 불어오는 바람은 시원했고 풀냄새가 섞인 공기는 맑았다. 점심때가 지난 오후 3시경이어서 아래쪽의 축사도 조용해졌다. 두 명이 축사의 그늘에 앉아 무엇인가를 손보고 있었는데 한가한 모습이었다.
「그 동안에 내가 이름을 지어 놓았는데, 네 자식 말이다.」
김영환이 손에 들고 있던 장부를 내려놓았다.
「사내아이면 완이라고 짓고 딸이거든 은이라고 해라. 완전할 완(完)에 은혜 은(恩)이다.」
「네, 아버님.」
「외자 이름이여.」
「김 완, 완이, 좋은 이름이네요.」
그러자 김영환이 턱을 들고 웃었다.
「은이도 좋지 않느냐? 딸 생각도 해두거라.」
「네, 하겠어요.」
「네가 어머님하고 같이 간다니 안심이 된다.」
김영환의 얼굴은 밝았다.
「곧 애비가 될 상철이 그놈은 일에만 신경을 쓰는 것 같아서 말이다.」
안채에서 전화벨이 울렸으므로 박미정이 평상에서 일어섰다.
「제가 받겠어요, 아버님.」
마당을 가로질러 안채의 마루에 오른 박미정은 안방의 문앞에서 전화를 받았다. 서둘렀으므로 조금 숨이 찼다.
「여보세요.」
「미정아, 나다.」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네 여권을 가져왔어, 방금.」
「알았어요, 어머니. 내일 아침에 서울로 출발할 테니까 어머니도 준비하세요.」
「꼭 내일 비행기를 타야 하니? 하루쯤 쉬었다가 모레 가면 안 돼?」
「넉 달이나 쉬었는데 또 …….」
박미정이 짜증을 냈다.
「엄만 가기 싫으시면 그만두세요.」
「얘는 정말, 알았다 준비하고 있을게.」
수화기를 내려놓자 김영환이 이쪽을 바라보았다
「어디 전화냐?」
「서울 어머니한테서요, 아버님.」
그는 여권은 물론 아무것도 모른다. 다행히도 그가 무슨 전화냐고 묻지 않았으므로 박미정은 마음을 놓았다.
다음 날 아침식사를 마친 김영환 씨가 마당으로 내려섰을 때 농장 앞쪽의 샛길을 달려오는 한 대의 승용차를 보았다. 검정색의 대형 승용차는 농장의 열려진 정문으로 들어와 멈춰 섰다. 그리고는 근처의 농장 직원들과 차 안의 사람들이 이야기를 주고받더니 곧 직원 한 명이 손을 들어 이쪽을 가리켰다. 그러자 승용차가 엔진소리를 울리며 이쪽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때는 박미정도 마당으로 나와 그의 옆에 서 있었다.
「서울에서 사돈어른이 차를 보내셨나 보다.」
김영환이 말하자 박미정은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승용차가 마당 아래쪽에서 멈추면서 차에서 두 명의 사내가 내렸다.
「어머나.」
박미정이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앞장선 사내는 조태광이었던 것이다.
「허어, 저 사람.」
김영환 씨도 조태광을 알아보고는 얼굴에 웃음을 띄웠다. 지난번에 김상철과 함께 농장에서 묵고 간 사내인 것이다. 조태광이 그들을 향해 허리를 숙이고 절을 했다.
「그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어르신.」
「그래, 여긴 웬일로?」
「예, 사모님을 모시러 왔습니다.」
「잘 왔어. 식사들은 했나?」
「예, 했습니다.」
김영환이 박미정을 돌아보았다.
「그럼 준비하거라. 난 축사에 내려가 있을 테니.」
축사로 김영환이 내려가자 박미정이 조태광을 바라보았다.
「한국에는 언제 오셨어요?」
「며칠 되었습니다.」
조태광이 그녀에게로 한 걸음 다가와 섰다.
「준비 하시지요. 오후 세 시 비행기를 예약해 놓았습니다.」
「근대리아행은 네 시 반이던데요.」
「오사카 들르셨다가 가셔도 됩니다.」
힐끗 조태광을 바라본 박미정이 몸을 돌렸다. 온 지 며칠 되었다면 그 동안 주변을 돌고 있었을 것이다. 오사카부터 들른다는 것도 김상철의 지시일 테니 이유를 알 것도 없다.
김영환과 작별한 그들이 농장을 떠난 것은 그로부터 30분쯤 후인 9시 30분경이었다. 승용차는 렌터카였는데 조태광을 포함한 사내 세 명에 박미정까지 탑승자는 모두 넷이다. 농장을 벗어난 차는 왕복 이차선의 도로를 속력을 내어 달렸다. 아직 아침시간인 때문인지 국도에는 차량의 통행도 드물었다. 옆자리에 앉은 조태광이 입을 열었다.
「이제까지는 제가 나타날 수 없었습니다.」
그는 힐끗 운전사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모두 해결이 되었으니까요.」
「차가 두 대가 따라옵니다.」
백미러를 바라보던 운전사가 말했다.
「농장 근처에 있던 그 차들 같은데요.」
박미정이 뒤쪽 창문으로 머리를 돌렸다. 승용차 2대가 50미터쯤의 거리에서 나란히 달려오고 있었다. 조태광이 얼굴을 굳혔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한국 경찰일까요?」
박미정이 묻자 그는 머리를 끄덕였다.
「예, 사모님 그럴 겁니다.」
조태광이 손을 뻗어 운전사의 어깨를 쳤다.
「서둘 것 없다. 속력을 줄여, 놈들은 그냥 따라오는 것뿐일 테니까.」
수화기를 건네받은 김상철이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오전 10시 10분이었다.
「김상철입니다.」
「저, 이유미예요.」
「그래, 웬일이시오?」
이유미란 여자한테서 전화가 왔다는 부하의 전갈을 받았을 때부터 그는 약간 긴장하고 있었다. 근대시에 있는 사무실 안이다.
「말씀드릴 것이 있어서.」
이유미가 목소리를 높였는데 주위의 소음 때문인 모양이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시바다 겐지가 서울에 있어요.」
퍼뜩 고개를 든 김상철의 귀에 다시 그녀의 말소리가 울렸다.
「제가 요즘 시바다를 만나고 있어요. 그가 저를 찾아왔기 때문에.」
「언제 말입니까?」
「열흘이 넘었어요.」
「그 사람은 박미정 씨가 서울에 와 있는 것도 알고 집도 알아요. 부하들을 시켜 매일 돌아보고 있어요.」
「목적이 무엇인 것 같습니까?」
「그건 저도 모르겠어요.」
「그 사람은 한국 정부도 자신을 돕고 있다고 했어요. 그리고 강미현 씨도. 그 여자하고는 자주 연락을 하는 것 같아요.」
김상철이 어금니를 물었다가 떼었다.
「고맙습니다, 알려주셔서. 그럼 시바다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월슨 호텔 천오백십오 호실, 아니면 청담동 진주 아파트 팔 동 칠백삼 호실, 여긴 제 집이예요. 그는 매일 밤 제 아파트에 와요.」
이유미가 서두르듯 말을 이었다.
「시간이 없어서 이만 끊겠어요. 지금 비행기를 타야 하기 때문에. 전 당분간 한국을 떠나려고 해요. 이 소용돌이에서 빠지려고.」
「잘 생각했습니다.」
「그전에 말씀드려야 했는데 겁이 났어요. 그래서.」
「이해합니다.」
「해결되어야 돌아올 것 같아요. 그럼.」
이유미는 공항에서 전화를 한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선 김상철이 다시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10시 15분이었다. 지금쯤 박미정은 조태광과 함께 서울로 올라오고 있을 시간이었다.
「시바다 겐지의 서울 주소가 월슨 호텔 천오백십오 호실이라니.」
후가쿠 차장은 앞에 서 있는 동북아과장 노구치를 바라보았다.
그는 실종된 몬도의 후임이다.
「밤에는 청담동의 진주 아파트 팔 동 칠백삼 호로 간다는데 집주인이 도망쳤으니 오늘밤에는 눈치를 챌지 모르겠군.」
노구치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오전 10시 40분이다. 근대리아의 오다 센자부로한테서 연락을 받은 지 20분이 지났다.
「이즈모와 고바야시가 오후 두 시에는 현장에 도착할 겁니다, 차장님.」
노구치가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서울의 사사끼는 이미 호텔로 출발했습니다.」
「한국 정부의 보호를 받는다니 강미현이 영향력을 발휘한 모양인데.」
한국의 내부사정에 대해서는 환하게 알고 있는 후가쿠이다. 시바다가 한국에서 활보하는 이유는 그것밖에 없는 것이다. 후가쿠가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안기부의 음모를 알려준 것은 강미현이야. 한국 정부는 강미현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어.」
「강미현에게 정보를 전해 준 것은 북한일 것입니다. 안기부가 김상철의 조직을 구축해 주는 것에 북한은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강미현과 북한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것이지. 김상철은 그들의 공동의 적이다.」
「행정청장이 갈렸으니 다음 차례는 경비대가 되겠는데요.」
그러자 후가쿠가 길게 연기를 뱉어 내고는 입맛을 다셨다. 바로 어제, 근대리아 총독은 전격적으로 행정청장을 경질했다. 유장석이 한국 근대건설의 회장으로 발령을 받고 그 후임에 비서실장 이남호가 임명된 것이다. 이남호라면 유장석보다 비중이 무거운 거물이어서 행정청의 위상이 높아졌다고 볼 수가 있었지만 유장석은 근대리아의 창립공신이다. 유장석으로서는 좌천이었다
「아마 유장석은 이대각과는 다르게 한국으로 떠날 것이다. 그는 공개적으로 반발하는 성격이 아니야.」
「이대각은 반발할 것입니다. 그 귀추가 주목되는데요.」
그때 전화벨이 울렸으므로 그들은 긴장을 했다. 후가쿠가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후가쿠 차장입니다.」
「사사끼올습니다, 차장님.」
서울의 요원이다. 후가쿠가 힐끗 노구치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되었어?」
「시바다는 노무라라는 이름으로 투숙하고 있습니다. 지금 방은 비어 있습니다.」
「체크아웃했단 말이냐?」
「아닙니다. 아침 일찍 나갔습니다.」
「기회는 오늘뿐이다. 명심해라, 사사끼.」
후가쿠의 목소리가 딱딱해졌다.
「이즈모와 고바야시가 요원들을 데리고 떠났다. 이번에는 절대로 놓치면 안 된다, 사사끼.」
오전 10시 50분, 승용차는 영동고속도로를 달려가고 있었다.
원주 인터체인지를 지나 곧 여주가 20킬로 앞으로 다가오는 중이다. 뒤쪽의 승용차는 50미터쯤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꾸준히 따라오고 있었는데 운전사가 가끔 백미러를 바라볼 뿐 차 안의 긴장감은 어느 정도 풀어져 있었다.
「저, 알고 싶은 것이 있어요.」
문득 박미정이 조태광을 향해 말했으므로 차 안의 사내들이 모두 긴장을 했다. 조태광이 눈을 껌벅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예, 말씀하십시오, 사모님.」
일주일이 넘게 마음고생에다 육체적인 피로가 쌓인 그의 얼굴은 꺼칠해져 있었다. 오사카에서 서울로 날아온 이후 박미정의 아파트를 지켰으나 그것은 외곽 경계일 뿐이었다. 한국 기관원들이 24시간 감시하고 있었으므로 그들 주위만 맴돌고 있었던 것이다.
「제가 출국금지가 되었던 것은 행정착오가 아니었죠? 그이와 한국 정부와의 문제 때문이었죠?」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사모님.」
「안기부장이 사임한 일과도 관계가 있죠?」
「사모님, 저는‥‥」
「저기 뒤에서 따라오는 사람들, 안기부 요원들은 아녜요, 그렇죠?」
「아마 그런 것 같습니다. 아니, 그것도.」
조태광이 아차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박미정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절 걱정시키지 않으려고 하시는 것, 다 알아요. 하지만 윤곽은 알고 있어야 덜 걱정이 됩니다. 안기부 요원들이었다면 저에게 자신들의 신분을 밝혔겠지요. 그이와의 관계도 있고 하니까.」
「제가 이렇게 출국하게 된 것은 아마 그이가 어떤 협상을 했을 거예요, 한국 정부와. 그렇죠?」
「저는 잘 모릅니다, 사모님.」
조태광이 굳게 입을 다물었으므로 그 동안 그를 바라보던 박미정이 이윽고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녀는 부른 배 위에 두 손을 덮었다. 차는 완만한 경사길을 달려 올라가는 중이었다. 차량의 통행이 늘어나 있었으므로 운전사는 추월선으로 들어서서는 가속기를 밟아 차에 속력을 내었다. 오후 3시 출발의 비행기였으니 시간은 넉넉한 편이었다. 이곳에서 서울까지는 한 시간 반, 김포까지 한 시간 반을 잡아도 오후 2시에는 도착할 것이었다. 어머니는 공항에서 기다리기로 했으니 아마 아버지하고 같이 나와 있을 것이었다.
그 순간 박미정은 앞쪽에서 달려 내려오던 트럭이 일차선으로 방향을 바꾸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는 곧장 이쪽으로 덮쳐왔는데 놀란 그녀가 입을 딱 벌리는 순간에 엄청난 충격이 왔다. 소리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곧 그녀에게는 짙은 어둠이 덮여졌다.
「아앗.」
하고 소리친 것은 앞자리에 타고 있던 운전사와 조수사관이다.
그 다음 순간 차 안의 네 사내는 요란한 충돌음을 들었고 부숴진 자동차의 파편이 날아와 차체를 두들겼다. 운전사가 무의식중에 브레이크를 잔뜩 밟았으므로 차체가 앞으로 기울더니 곧 옆쪽으로 비틀려졌다. 그리고는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부숴진 앞쪽 승용차의 한 부분을 들이받으면서 멈췄다. 그 다음 순간 머리끝이 저절로 솟아오를 만큼 날카로운 브레이크 소음이 들리더니 차 안의 사내들은 충돌음과 함께 앞쪽으로 몸이 튕겨졌다. 뒤를 따르던 차가 부딪힌 것이다.
「아이구.」
뒤쪽 문이 찌그러져 열리지가 않았으므로 박영수 경정은 부숴진 유리창으로 상반신을 떼내면서 아우성치듯 소리쳤다. 유리 파편인지 무엇인지에 이마가 찢겨 피가 흐르고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지른 비명이 아니다.
「차 안의 사람을! 어서!」
앞좌석의 운전사와 조수사관이 거의 동시에 밖으로 나오는 중이었다. 박살이 난 차체 안에 사람의 형체가 보이고 있었지만 참혹했다. 모두 살아 있는 것 같지가 않다.
「아아, 이런.」
몸을 돌린 박영수가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트럭은 이미 보이지가 않았다. 그는 서둘러 휴대폰을 찾았지만 주머니는 비어 있었다. 차 안에 떨어뜨린 모양이었다.
「구해내라! 어서! 구조대에 연락을.」
악을 쓰듯 소리친 박영수는 가슴에 찬 권총집에서 권총을 뽑아들었다. 미친 듯한 형상이다. 그는 반대 차선으로 뛰어가 권총을 치켜들고는 다가오는 승용차 한 대를 가로막았다. 사고 때문에 차량들은 서행하는 중이어서 차가 멈춰 섰다. 젊은 남녀가 나란히 타고 있는 차였다.
「내려라! 어서! 차 좀 빌리자!」
운전석으로 다가간 그가 권총의 개머리판으로 유리창을 쳤다.
젊은 사내가 힐끗 그를 올려다보더니 불쑥 가속기를 밟았으므로 차는 그의 몸을 스치고는 앞쪽으로 달려 나갔다. 그러자 이를 악문 박영수가 승용차를 향해 권총을 겨누고는 2발을 쏘았다.
「탕! 탕!」
승용차는 요란한 브레이크소리를 내더니 휘익 돌면서 도로에 가로로 멈춰 섰다. 미친 사람처럼 달려간 박영수가 운전석의 문을 열어제쳤다. 어깨에 총상을 입은 모양으로 사내는 입을 쩍 벌린 채로 상처를 한 손으로 누르며 앉아 있었다. 여자는 찢어질 듯한 비명소리를 내며 운다. 박영수가 권총의 손잡이로 사내의 얼굴을 찍자 사내의 얼굴은 금방 피투성이가 되었다. 사내의 멱살을 잡아 길바닥에 내평개친 박영수는 운전석에 올랐다.
「너도 내려!」
그가 악을 쓰자 여자가 문을 열었다. 여자가 미처 두 발을 땅에 딛기도 전에 박영수는 차를 발진시켰으므로 여자는 길바닥에 나뒹굴었다.
「이런, 빌어먹을.」
가속기를 밟아 맹렬하게 경사길을 내려가면서 그가 소리쳤다.
트럭은 계획적으로 박미정이 탄 차와 충돌한 것이다. 놈들은 정확하게 이쪽의 진행 경로와 위치를 알고 있었다. 정신없이 달려 원주 인터체인지까지 왔지만 트럭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차에 더욱 속력을 내었다. 도주한 트럭과 같은 방향으로 달리던 차량들이 트럭을 물고 있을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뺑소니는 그렇게 잡혀 왔던 것이다.
이대각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을 때는 오후 2시가 되어갈 무렵이었다. 점심을 마치고 리조트 시티의 사무실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유장석의 해임으로 긴장하고 있었던 김상철이다.
「갑자기 웬일이십니까?」
그가 묻자 이대각은 잠시 입을 열지 않았다. 소파의 앞자리에 앉은 이한이 눈을 껌벅이며 김상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봐, 김사장 좋지 않은 소식인데, 마음 단단히 먹어.」
다른 사람 같은 이대각의 목소리였다. 얼굴을 굳힌 김상철이
수화기를 고쳐 쥐었다.
「무슨 소식 입니까? 말씀하세요.」
「조금 전에 한국에서 연락이 왔어.」
「‥‥‥‥」
「한국 경찰청장이 직접 나한테 연락을 해왔단 말이야. 박미정 씨가 사고를 당했다고 했네. 조태광이와 다른 두 명과 함께.」
「교통사고야. 영동고속도로에서 트럭과 정면충돌을 해서, 박미정 씨는 아직 의식이 없다는 거야. 다른 세 명은 죽었어.」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신음소리를 뱉은 김상철이 초점 없는 시선으로 앞쪽을 바라보았다. 이대각이 서두르듯 말했다.
「트럭은 도주했는데 뺑소니 사고라고 했어. 경찰청장은 전 수사기관을 총동원해서 ‥‥」
「병원이 어딥니까?」
「서울 강남의 성신병원이야.」
수화기를 내려놓은 김상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형님, 무슨 일입니까?」
따라 일어선 이한이 굳어진 표정으로 물었으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잠자코 사무실을 나서자 한동안 눈을 껌벅이며 서 있던 이한이 수화기를 들었다.
그로부터 1시간 후에 김상철은 근대공항의 대합실에 서 있었다. 그의 주위에는 이미 상황을 알게 된 그의 부하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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