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과의례
생로병사
by문두Jan 22. 2023
집에서 소박하게 치렀던 출생, 성년, 결혼, 사망 등의 일생 동안 새로운 상태로 넘어갈 때의 절차들이 어느 순간 당당하게 집 밖으로 걸어 나가 독립해 버렸다. 이 중에서 병원은 우리 삶의 시작부터 끝까지 거쳐야 하는 중요한 관문이 되었다. 그런데도 병원은 아직도 나에게 낯설고 멀리하고 싶은 두려운 곳이다. 어떻게 하면 가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연구 중이지만 아마도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직장에 다니면서 내가 충분히 일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해마다 건강검진을 받아야 한다. 엄살 부린다고 욕하는 이도 있겠지만 나 죽었네 하고 몸을 내맡겨야 하는 것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같은 심정이다. 시력과 청력을 확인하고 몸무게, 혈압을 재고 소변검사 하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러나 채혈부터 유방암, 위암, 자궁경부암, 검사는 빨리 해치우고 싶다. 특히 위내시경은 수면 마취로 해도 겁이 난다. 주먹을 쥐어라, 펴라, 옷을 벗어라, 누워라, 입을 열어라. 다리를 벌려라, 힘을 빼라. 몸속까지 쑤셔대고, 피를 뽑아 가고, 가슴을 잡아당기고, 아래를 들여다보고 하는 것이 평생 가도 적응이 안 될 것 같다. 하지만 검진 후 성적표를 받듯 쓸개에 돌이 있다거나 유방의 결절, 위장이나 아래의 염증이 확인되는 것은 오히려 다행한 일이다. 다음에는 관리를 잘해서 더 좋은 성적을 받아야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한다.
폐경 이후 노화가 급격히 진행되는 것을 느낀다. 뼈마디와 관절의 통증, 발등이나 발목에 혹이 생겨 커졌다, 가라앉았다 한다. 그리고 복부비만과 높은 혈압 등으로 대사증후군 주의 단계라는 통보를 받았다. 나는 노력 여하에 따라 좋아질 수도, 나빠질 수도 있는 경계에 서 있다. 멀리하고 싶은 병원에 붙잡히지 않으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시점이 되었다.
1. 생(生) 내가 처음으로 입원한 것은 첫 아이 출산 때였다. 노산에 초산이어서 검진을 꾸준히 받아왔는데, 산달에 태반이 노화되어 유도분만을 하게 되었다. 외래진료 때 만났던 낯익은 의료진이 아니라, 분만을 담당한 의료진이 따로 있어 낯설고 불안했다. 자궁이 얼마나 열렸는지 수시로 내진하는 것이 성가시고 고역이었다. 노산에 골반이 좋지 않아 힘들겠다고 했다. 무통 주사를 권하는데 아이나 나에게 좋지 않다는 얘기를 들은 바 있어 응하지 않았다. 기다리다 촉진제를 맞았더니 진통이 한꺼번에 몰려와 통증의 강도가 죽을 만큼 심해졌다. 그러나 물러서거나 돌아갈 수 있는 길은 없었다. 남편을 붙잡고 몸부림치는데 비위가 상해 남편의 담배 냄새에도 토할 것 같았다. 수술할 경우를 대비해 온종일 굶어 기운이 없고, 팔에는 주삿바늘을 꽂아 거추장스럽기 짝이 없었다. 드디어 자궁이 어느 정도 열려 분만실에 들어갔다. 남편은 들어올 수 없는 곳이었고 나는 차가운 침대에 반라로 누워 내 몫을 해내야 했다. 아이는 나올 준비를 착착 잘하고 있는데, 엄마가 힘을 못 준다고 야단을 맞았다. 의사는 아래를 메스로 찢은 후 간호사들에게 양쪽에서 옆구리를 강하게 누르게 하여 겸자 분만을 했다.
그들은 잡담 속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신성한 의식을 해치웠다. 식당에서 설거지할 때 입는 하얀 비닐 앞치마를 입고 싱크대에서 아이를 씻어 저쪽 침대에 옷을 입히기 위해 눕혔다. 그때 울고 있는 맨몸의 아이를 바라보는데, 서로가 같은 신세라는 생각에 서러웠다. 아이의 얼굴에 짠하게도 친정엄마의 얼굴이 들어있었다. 나는 갈비뼈에 금이 가 혼자 일어나 앉기도 힘이 들었다. 퇴원할 때 병원에서는 진통 주사를 공짜로 놓아주며 병원차로 집까지 태워다 주는 호사를 누리게 해 주었다. 물론 당부의 말도 빠뜨리지 않았다. 당신이 힘을 잘못 주어 도와주다가 생긴 일이니 의료사고 소송 같은 것은 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만드는 아들의 출생증과 발바닥 지문을 챙겨주었다.
출생증, 아기 이름 문두래 님의 아기, 성별 남자, 출생일시 2000년 ○월○일 14시 24분, 체중 3.2kg, 신장 57cm, 위 아이는 ○○산부인과에서 출생하였음을 증명함
2. 노(老) 병원과는 이웃사촌인 요양원에서 이 년 동안 일을 했다. 이제 많은 사람이 이곳에서 노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시설에 들어오는 이들은 끝까지 습관과 집을 붙들고 온다. 기억은 놓아버려도 먹는 습관, 말하는 습관, 감정의 습관 등 살아온 습관은 그대로 남아있다. 당신들이 기거하는 자리가 어디든 거기가 집이다.
기억의 조각 속에 말 안 듣는 만복이와 이쁜 딸 은실이를 데려왔다. 노름 좋아하고 호색한인 영감님도 따라와 시끄럽다. 노들강변, 아리랑, 얼씨구나 절씨구나 흥도 따라와 쿵작거린다. 고장 난 카세트에 테이프처럼 무한재생 반복되는 삶의 구간도 있다. 밥 냄새와 구린내가 갓난아이 때처럼 가까워져 구린내와 꽃냄새는 한 끗 차이가 된다.
일회용 장갑과 일회용 기저귀, 물티슈가 효자인 이곳은 구차스럽지만 먹고 싸는 일이 태어난 그 순간부터 죽는 그 순간까지 우리 삶의 가장 큰 숙제임을 알려 준다. 젖먹이의 먹고 자고 웅얼거리던 시간이 멈춘 듯 길게 느껴지듯, 노년에 누워 보내는 시간도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지루하다. 아이처럼 주는 대로 먹고, 싸고, 자고, 보채고, 손으로 물건들을 반복적으로 만지작거리고, 때로는 자신의 기저귀를 빼고 변을 손으로 만지거나 벽에 바르기도 한다. 자기 손으로 숟가락질을 못 하는, 씹고 삼키는 일도 힘든 이들의 떠먹이는 밥숟가락과 밥숟가락 사이의 순간은 너무 길어서 마치 진공상태인 것처럼 느껴진다.
3. 병(病) 남편을 따라서 오 년째 병원을 나들이처럼 다니고 있다. 몸이 어딘가 고장이나 병원에 몸을 맡기면 큰 병원일수록 자동화가 잘 되어 컨베이어 위에 올려진 기계부품처럼 착착 진행이 빠르고 빈틈이 없다. 예약시스템이 잘 되어 있고 도착 처리, 채혈, 약사의 복약 상담, 여러 가지 검사, 진료, 수납 등이 일사천리이다. 물론 가끔 응급상황이 생겨 대기시간이 길어질 때도 있지만 견딜 만하다. 또한, 병원에는 이제 오히려 동네가 찾아 들어와 은행, 식당, 빵집, 카페 등 부족한 것이 없다. 특히 빵 굽는 구수한 냄새와 커피 향이 진동하면 사람 사는 곳인 듯 정답다.
쉬지 않고 쭉 달려온 남편은 건강검진에서 혈압이 너무 높게 나와 부정맥임을 알게 되었다. 얼마 뒤 큰 병원에 입원해 손목 혈관을 통해 스텐트 시술과 심장박동을 규칙적으로 돌리기 위해 심장 충격을 받았다. 심장 충격기는 응급실에서나 쓰는, 멈춘 심장에 전기 자극을 가해 다시 뛰도록 만드는 기계인 줄 알았더니 사실은 그 반대였다. 심장은 뇌에서 신경 자극을 받아서 뛰는 것이 아니라 심장 자체가 만드는 신경 신호에 따라서 뛴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강한 전류를 흘려 심장의 박동을 완전히 멈추게 한 후, 다시 심장 스스로가 작동해 전류 신호를 정상화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심장 충격은 심장을 초기화시키는 일이었다. 잘못되어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동의서까지 쓰고 남편은 혼자서 시술실에 들어갔다.
나는 밖에서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는 사람의 두려움과 걱정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남편은 등과 가슴에 다리미로 데인 것 같은 멍이 들도록 고생을 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그 일을 무사히 넘긴 것만 해도 다행으로 여겨, 눈만 끔벅거릴 뿐 원망의 마음 한 점 품지 못했다. 그 후 더 나빠지지 않도록 약물로만 관리하게 되어 정기적으로 검사와 진료를 받고 있다. 남편의 든든한 보호자라기보다 늘 옆에 있어 주는 친구로서 병원 동행을 한다. 남편은 하루도 빠짐없이 평생 밥 먹듯이 먹어야 하는 약을 달력이라 얘기한다.
4. 사(死) 아버지는 마지막을 아주대 외상센터 중환자실에서 맞이했다. 수원에서 오가며 농사를 짓는 아들이 심은 벼를 살펴보러 논에 갔다가 트랙터 사고가 났다. 오전에 나가신 아버지가 점심때가 되도록 돌아오지 않아 허리 굽은 엄마가 지팡이를 짚고 삼십 분 거리를 걸어가 아버지를 발견했다. 그때 아버지는 트랙터 아래 깔린 상태로 지나가는 사람이 없어 발버둥 치고 계셨다 한다. 엄마가 바로 구급차를 불러 영광종합병원 응급실에 갔다가 상태가 위중해 조선대 병원으로 옮겼고, 다시 수원으로 모셔왔다.
아버지는 이렇게 심한 외상 앞에서도 처음에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병원에서 당신 몸에 취하는 조치들을 자유를 억압받는 것처럼 답답해하며 집으로 가겠다고 역정을 내셨다. 그러는 동안 남동생은 묵묵히 아버지 곁을 지켰다. 결국, 아버지는 밤까지 당신 곁에서 웅크리고 쪽잠을 자며 고생하는 아들을 보고 마음을 돌리게 되었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두 번째 6.25를 겪었다. 할아버지의 총상이 그랬듯 당신의 상처는 치명적이었다. 아버지는 걷지 못할까 봐 뼈만 걱정했지만 정말 심각한 것은 피부 손상이었다. 상처 부위에 염증이 생겨 종아리뼈가 하얗게 드러나도록 살을 다 긁어내고 꽁꽁 싸매놓았다. 그 뒤 열이 나고 폐렴까지 생겨 중환자실로 옮겼다. 거기서 조금 좋아지시는 것 같다가 곧 감염에 의한 전신성 염증반응인 패혈증으로 악화하였다.
아버지는 의식이 있고 말씀을 하실 수 있었던 마지막 면회에서 엄마를 따로 부르셨다. 엄마 노후대책으로 만들어 놓은 고향 집 비밀장소에 있는 적금통장과 현금에 대해 말씀하셨다 한다. 절대 그것만은 자식들에게 주지 말고 끝까지 들고 있으라고 당부하셨다 한다.
아버지가 유명을 달리하시던 그날 밤에는 하늘에 구멍이 난 듯 폭우가 쏟아졌다. 멀리 있었던 자식들은 깜깜한 빗길을 뚫고 달려갔다. 아버지는 영안실로 내려가기 전 안마의자와 같은 각도의 중환자실 침대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하루에 겨우 두 번 바닷길이 열리듯 잠깐 허락되던 길이 마침내 활짝 열렸다. 우리는 아직 따뜻하고 부드러운 아버지의 손을 잡아보고 얼굴을 만져볼 수 있었다. 사망 선고를 하던 의사는 우리를 모아놓고 아버지의 사망에 대해 어려운 의학용어와 약물의 이름과 숫자들을 사용하여 설명했다. 그것은 결론적으로 어떤 항생제도 듣지 않았다는 이야기였다. 드디어 아버지의 팔에 꽂혀있던 정맥 주삿바늘과 매달려있던 약물 봉지들과 기계장치와 인공호흡기 등의 거추장스러운 것들이 깨끗이 치워졌다. 아버지는 한 마리의 새처럼 작아 보였다. 삶의 마지막 관문을 통과한 아버지는 비로소 자유를 얻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