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현(李齊賢) 12
출생 - 사망 1287년(충렬왕 14) ~ 1367년(공민왕 16) 본관 경주(慶州)
성격 : 고려 후기의 문신, 학자, 문인
초명은 지공(之公) 자 중사(仲思), 호 익재(益齋), 역옹(?翁), 시호 문충(文忠)
시대 고려 관련사건 : 입성책동,
고려 건국 초의 삼한공신(三韓功臣) 금서(金書)의 후예로 아버지는 검교시중(檢校侍中) 진(瑱)이다. 아버지 진이 과거를 통해 크게 출세함으로써 비로소 가문의 이름이 높아졌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성숙했고 글을 짓는 데 있어서도 비범한 기운을 지니고 있었다. 1301년(충렬왕 27) 성균시(成均試: 일명 국자감시로 진사를 뽑던 시험)에 1등으로 합격하고 이어서 과거에 합격하였다.
이해에 당시 대학자이자 권세가였던 권보(權溥)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다. 1303년권무봉선고판관(權務奉先庫判官)과 연경궁녹사(延慶宮錄事)를 거쳐 1308년예문춘추관에 선발되고 다음해에 사헌규정(司憲糾正)에 발탁됨으로써 본격적인 관리생활을 시작하였다.
1311년(충선왕 3)에는 전교시승(典校寺丞)과 삼사판관(三司判官)에 나아가고, 다음해에 서해도안렴사(西海道按廉使)에 선발되었다. 1314년(충숙왕 1) 상왕(上王)인 충선왕(忠宣王)의 부름을 받아 원나라의 수도 연경(燕京)으로 가서 만권당(萬卷堂)에 머물게 됨으로써 그의 원나라 생활이 시작되었다.
충선왕은 왕위에서 물러난 다음에도 원나라에 있으면서 만권당을 짓고 서사(書史)를 즐겼다. 이때 원나라의 유명한 학자·문인들을 드나들게 했는데, 그들과 상대할 고려측의 인물로서 이제현을 지명했던 것이다. 이로부터 그는 만권당에 출입한 요수(姚燧)·염복(閻復)·원명선(元明善)·조맹부(趙孟頫) 등 한족(漢族) 출신 문인들과 접촉을 자주 갖고 학문과 식견을 넓힐 수 있었다.
그의 원나라 생활과 관련해 특기할 것은 세 번에 걸쳐 중국 내륙까지 먼 여행을 했다는 사실이다. 1316년에는 충선왕을 대신해 서촉(西蜀)의 명산 아미산(峨眉山)에 치제(致祭)하기 위해 3개월 동안 그곳을 다녀왔다. 1319년에는 충선왕이 절강(浙江)의 보타사(寶陀寺)로 강향(降香)하기 위해 행차할 때 시종하였다. 마지막으로 1323년(충숙왕 10) 유배된 충선왕을 만나 위로하기 위해 감숙성(甘肅省)의 타사마(朶思麻)에 다녀왔다. 이 세 번에 걸친 여행은 그의 견문을 넓히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1320년(충숙왕 7)은 그의 생애에 있어 또 하나의 분기점이었다. 주로 만권당에 머물며 활동하는 동안에도 때때로 고려에 와서 관리로 복무해, 성균좨주(成均祭酒)·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선부전서(選部典書)를 역임하였다. 이해에는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면서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의 호를 받았고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주재하였다. 그런데 겨울에 충선왕이 참소를 받아 유배됨으로써 자연히 그의 원나라 생활도 6년 만에 끝나게 되었다.
충선왕의 유배로 인한 정세변화는 고려의 정치상황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 고려의 국가적 독립성을 말살시키고 원나라의 내지와 같은 성(省)을 세우도록 주장하는 입성책동(立省策動)이 강력하게 일어났다. 충숙왕을 내몰고 왕위를 차지하려는 심왕 고(瀋王暠)와 그 일파의 준동도 격화되었다.
그는 1321년 아버지의 상을 치른 다음 1323년 원에 들어가 입성반대상소를 올렸는데, 그 내용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이어서 토번(吐蕃)으로 유배되어 있는 충선왕의 방환운동도 벌였다. 오래지 않아 입성책동이 저지되고 충선왕이 타사마로 옮겨진 데에는 그가 벌인 활동의 영향이 적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1324년밀직사를 거쳐 1325년첨의평리(僉議評理)·정당문학(政堂文學)에 전임됨으로써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그 뒤 충숙왕(忠肅王)과 충혜왕(忠惠王) 부자가 중조(重祚: 왕이 거듭하여 즉위하는 현상)하는 어지러운 때를 당했을 때는 그의 활동이 크게 드러나지 않았다. 1339년 조적(曺頔)의 난이 일어난 끝에 충혜왕이 원나라에 붙잡혀가자 그를 좇아 원나라에 가서 사태를 수습하고 왕이 복위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수년간 조적의 여당(餘黨)에 눌려 두문불출했는데, 이 기간 동안에 『역옹패설(櫟翁稗說)』을 저술하였다.
그가 다시 정치의 표면에 나타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1344년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한 직후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임명되면서부터이다. 이때 문란해진 정치기강을 바로잡고 새로운 시책을 펴는 데 참여해 여러 항목에 걸친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1348년 충목왕이 죽자 원에 가서 왕기(王祺: 훗날의 공민왕)를 왕에 추대하기 위한 운동을 벌였으나 실패하였다.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해 새로운 개혁정치를 추진하려 할 때 정승에 임명되어 국정을 총괄하였다. 이때부터 네 번에 걸쳐 수상이 되는 기록을 세웠다. 1353년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으로서 두 번째로 지공거가 되어 이색(李穡) 등 35인을 등과자(登科者)로 선발하였다.
1356년(공민왕 5) 기철(奇轍) 등을 죽이는 반원운동이 일어나자,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어 사태의 수습에 나섰다가 다음해에 치사(致仕)하였다.
그 뒤에도 국가의 중대사에 대해서는 자문에 응했으며, 홍건적이 침입해 개경이 함락되었을 때에도 남쪽으로 달려가 상주에서 왕을 배알하고 호종(扈從)하였다.
학문세계와 저술활동빼어난 유학지식과 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사학(史學)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민지(閔漬)의 『본조편년강목(本朝編年綱目)』을 중수(重修)하는 일을 맡았고, 충렬왕·충선왕·충숙왕의 실록을 편찬하는 일에도 참여하였다. 특히 만년에 『국사(國史)』를 편찬했는데, 기년전지(紀年傳志)의 기전체를 계획해 백문보(白文寶)·이달충(李達衷)과 함께 일을 진행시켰으나 완성시키지는 못하였다.
그의 저술로 현존하는 것은 『익재난고(益齋亂藁)』 10권과 『역옹패설』 2권이다. 흔히 이것을 합해 『익재집(益齋集)』이라 한다.
평가와 의의정치가로서의 그는 당시 고려가 원의 부마국(駙馬國)이라는 현실을 시인하고, 그 테두리 안에서 국가의 존립과 사회모순의 시정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급격한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았고 온건한 태도로 현실에 임하였다. 원과 고려를 넘나들며 복잡하고 미묘한 상황에 처하기도 했지만 화를 당하거나 유배된 적은 없었다.
문학부문에서도 큰 업적을 이루었는데 시는 전아하고 웅혼하다는 평을 받았고 많은 영사시(詠史詩: 역사적 사실이나 인물을 제재로 한 시)를 저술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사(詞)의 장르에서도 독보적 존재로 일컬어지고 있다. 고려의 한문학을 세련되면서도 한 단계 높게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한국문학사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제현은 뛰어난 유학자로 성리학의 수용·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우선 그는 고려에 성리학을 처음 들여온 백이정(白頤正)의 제자였고 『사서집주(四書集註)』를 간행해 성리학의 보급에 크게 노력한 권보의 문생이요 사위였다. 이색이 그의 묘지명에서 “도덕의 으뜸이요, 문학의 종장이다(道德之首 文章之宗).”라고 말한 바와 같이 후세에 커다란 추앙을 받았다. 또한 그의 제자가 이곡(李穀)·이색의 부자였다는 학통(學統)으로 볼 때도 성리학에 있어 그의 위치는 지대한 것이었다.
그가 만권당에서 교유한 중국의 문인·학자들이 성리학에 깊은 조예를 가진 사람들이었다는 점을 상기해 본다면 이제현은 중국의 성리학을 직접 접하면서 동시에 그것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충목왕 때 개혁안을 제시하면서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성의정심(誠意正心)의 도를 강조한 것은 성리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성리학에만 경도되지는 않았고, 그 때문에 뒷날 성리학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상훈과 추모경주의 구강서원(龜岡書院)과 금천(金川)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1376년공민왕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고려사회를 대표하는 정치가이자 학자이다. 문하시중(門下侍中)이라는 고려 최고의 관직까지 올랐으며, 그가 남긴 수많은 글과 더불어 해박한 식견은 현재는 물론이고, 당시 사회에서 이미 존경받고 있었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는 100여 년간에 걸친 무인(武人) 지배로 인한 후유증과 함께 원(元)의 정치적 간섭을 받던 시련의 시기였다. 이제현은 이러한 시기에 수차에 걸쳐서 원을 왕래하기도 하고, 표문(表文)을 올려 원의 부당한 내정간섭을 비판하면서 고려의 주권을 보전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한 인물이라 평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시험을 통해 관직에 진출하다 고려후기를 대표하는 문신관료 이제현의 자는 중사(仲思)이며 처음에는 이름을 지공(之公)이라 했다가 뒤에 제현으로 개명하였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목은 이색이 쓴 이제현 묘지명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 이진에 이르러 비로소 과거를 통해 벼슬길에 들어선 신흥사대부 집안이었다고 전한다. 조선시대는 벼슬길에 나가는 등용문이 과거(科擧)였지만, 고려시대는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부친에 이어 과거시험을 통해 관로(官路)에 나갔다는 사실은 그의 출신이 문벌귀족이 아님을 말해준다. 이제현은 어려서부터 의젓하여 마치 어른 같았고 글을 잘 지어서 작가의 기풍을 가졌다고 전한다. 학계에서는 부친인 이진에 이르기까지 한 명도 중앙 관로에 진출하지 못한 것을 두고 무인집권기에 그의 가문이 크게 퇴락한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그의 자질은 일찍부터 두드러졌다. 1301년(충렬왕 27) 나이 15세로 성균(成均) 시험에 합격하였고 이어서 문과시험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이제현이 이른 나이에 합격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거시험에 매달려 출세만을 염두에 둔 그런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과거시험이라는 것은 학문의 소소한 지엽(枝葉)에 불과하다.”하고 경서(經書) 공부에 더욱 열중하여 학문적 깊이를 갖추어 나갔다.
부친인 이진은 그러한 아들을 대견하게 생각하여 “하늘이 우리 가문을 더욱 번창 시키려나 보다.”라고 하였다. 이제현은 문과시험에 합격할 당시에 밀직사사 권영의 문하에 있었는데, 권영이 그의 학문과 뜻을 높이 평가하여 자신의 딸과 혼인하게 하였다. 장인인 권영의 가문은 이제현의 집안과 비교해 볼 때 세력이 막강했다. 이러한 처가의 배경은 앞으로의 정치행로 및 학문에 큰 배경이 되었다.
충선왕이 사랑한 고려의 지식인 1301년을 기점으로 발을 디딘 이제현의 관로 생활은 화려했다.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을 거쳐 규정(糾正)으로 발탁된 뒤, 그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성균악정(成均樂正)이 되었다. 일찍이 풍저감두곡(豐儲監斗斛)에 임명되었을 때, 두량(斗量)과 저울눈을 보는 데 전혀 서투르지 않아 다른 이들이 저마다 “정말 이공(李公)은 한계가 없는 사람 같다.”라고 하였다.
그의 관직 생활에서 하이라이트는 고려를 대표하여 원에 갔던 사행(使行)에 있다. 1313년(충선왕 5)에 당시 왕이었던 충선왕은 왕위를 충숙왕에게 전위하고는 연경(지금의 북경)으로 가 만권당(萬卷堂)이라 불리는 학술기관을 짓고 당시 원의 석학인 요수·염복·원명선·조맹부 등과 고전을 연구하며 교유하고 있었다. 충선왕은 세조 쿠빌라이의 외손자로 세자 시절부터 오랫동안 원나라에서 생활한 탓에 본국인 고려보다 원나라에 더 많은 지우들이 있었다. 충선왕은 본국의 이제현을 불러 원나라 거유(巨儒)들과 어울리게 하였다.
이제현이 연경에 처음 발을 디딘 것은 1314년 충숙왕 원년 정월로 이때 그의 나이 불과 29세였다. 1316년(충숙왕 3) 4월에는 서촉(西蜀)에 사신으로 갔는데, 이때 아미산을 돌아보면서 많은 시를 남기기도 했다. 충선왕은 이후 1319년 3월부터 몇 달 동안 이제현과 권한공 등을 데리고 절강 방면으로 함께 여행하였고, 이제현은 절강 지방과 보타산을 유람하면서 행록(行錄) 1권을 만들었다. 당시 충선왕은 이제현을 총애하여 원의 유명한 화가 진감여(익재집에는 오수산(吳壽山)이 그렸다고 전한다)를불러 그의 초상을 그리게 하고 북촌 탕(湯)에게 찬을 쓰게 하였다. 이제현은 30여년이 지난 후 연경에 갔다가 이때 당시 그린 자신의 초상을 보았다고 한다.
이제현은 원에 체류하는 동안 당대의 석학들과 교유하면서 학문적 깊이를 더하여 갔고, 또 유배된 충선왕을 수행하면서 견문을 넓혀 그의 학문적 안목은 더욱 정연되어 갔다. 이로써 그는 원에서도 존경받는 학자로 두각을 나타냈으며, 고려에서는 부동의 학문적 위치를 확보하였다. 특히 1320년 6월에 시험 고시관인 지공거가 되어 33명의 과거급제자를 선발하였는데, 이때 과거에 합격한 인물들 중에는 최용갑을 비롯하여 이곡·백문보·안보 등 고려시대 정치 및 학계에 이름을 빛낸 사람들이 많았다.
당시 충숙왕은 그의 공을 치하하여 은병 50개와 쌀 100석을 하사하였고 이를 학사연(學士宴) 경비에 쓰게 했다. 학사연은 고려시대 과거 고시관이 자기 문하에서 합격한 자들을 불러 축하해주는 잔치를 말한다.
56년간의 다사다난했던 관로 생활 1320년 12월에 연경에 있던 충선왕이 참소를 받아 토번(吐藩)으로 유배를 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고려출신 환관인 임백안독고사가 평소 충선왕을 미워하다가 황제 영종을 움직여 충선왕을 제거하려 한 것이다. 이후로 충선왕은 영종이 시해되고 태정제가 즉위한 1323년 9월까지 약 3년간 귀양살이를 했다. 충선왕이 유폐된 토번은 연경과는 1만 5천리나 떨어진 벽지였다. 이제현은 최성지와 더불어 충선왕의 무고함과 귀국을 호소하였고, 충선왕을 알현하기 위해 험한 길을 건너 유배지를 찾아갔다. 당시 이제현은 황토점이라는 곳에 이르러 시 3편을 지어 자신의 울분을 표현했다.
충선왕이 토번에 유폐될 무렵, 유청신·오잠 등이 원에다 고려에 정동성을 설치하여 고려를 원의 속령으로 편입시키자는 내용의 글을 올리는 사건이 있었다. 이제현은 “나라를 그들의 나라 그대로 두고 백성들은 그들 나라의 백성으로 내버려 두십시오”라며 원을 설득하였다.
이제현의 표면적인 벼슬 생활은 화려했지만, 그 이면은 국익과 민생을 위해 봉사한 시기였다. 수차에 걸쳐 정치 개혁의 선봉에 서서 충목왕 즉위 초의 정치개혁, 공민왕 원년의 정치개혁, 공민왕 5년 및 12년의 정치개혁을 지지하고 이끌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문장과 시문에도 능통하여 당대 제일의 문한(文翰)으로 존경을 받았고, 당시 그가 지은 문장과 시는 오늘날까지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성리학에 대한 그의 학문적 식견과 보급을 위한 노력은 조선시대 학자들의 존경의 대상이 되어 ‘도학의 창도자’로 칭송받았다.
말년의 은둔생활 고려왕실을 지키기 위한 그의 노력은 충선왕을 이어 계속되었다. 1339년에 충숙왕이 죽자 조적(曹頔)이 심왕(瀋王)과 결탁하여 난을 일으켰는데, 왕위에 오른 충혜왕이 정예기병을 거느리고 그를 죽이는 사건이 있었다. 이에 연경에 있는 부원세력(附元勢力)들이 충혜왕을 모함하여 급기야 원이 충혜왕을 소환하기에 이르렀다.
극단적인 일이 발생하자 모든 조정 대신과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이제현은 몸을 돌보지 않고 “나는 우리 왕의 신하일 뿐이다”라며 충혜왕을 호종하고 원에 가서 일을 무마시켰다. 이 일을 두고 충혜왕은 “산천이 변할지라도 그 공은 잊을 수 없다”며 감격해 했다. 그러나 조정에는 부원세력이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더 이상 뜻을 펼칠 수 없음을 느낀 이제현은 마침내 벼슬을 버리고 은둔생활을 했다. 그의 저작으로 유명한 [역옹패설櫟翁稗說]은 이 시기에 쓰여진 것이다.
이제현이 지은 역옹패설.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 및 최자(崔滋)의 [보한집(補閑集)]과 더불어 고려시대의 3대 비평문학서로 꼽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사기초사전>
이제현의 공식적인 은퇴 시기는 공민왕대이다. 1357년(공민왕 6) 당시 그는 늙은 몸으로 녹봉을 많이 받는 것은 의리에 어긋난다며 물러나기를 요청했다. 공민왕은 그를 공경하여 계림부원군으로 봉하여 예를 갖추었다.
이제현이 공민왕이 총애한 신돈을 비판한 것은 유명하다. 공민왕이 신돈을 중용하자 이제현은 “반드시 후환을 끼칠 자이니 가까이 하지 말기를 바랍니다.”하고 왕을 설득했다. 훗날 신돈이 실각하자 공민왕은 “익재의 선견지명은 따를 수가 없다. 일찍이 신돈은 마음이 올바른 사람이 아니라 하더니, 지금 과연 증험(證驗)되었다.”고 감탄했다 한다. 공민왕은 이제현을 일컬어 이름을 부르지 않고 늘 ‘익재’라고 호칭했는데, 왕을 비롯하여 동료들이 감히 이제현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고 반드시 익재라고 불렀다고 한다. 재상(宰相)이 되고나서는 귀한 사람이나 천한 사람을 막론하고 모두 익재라 블렀다. 익재(益齋)라는 호는 본인이 직접 지은 것이다.
1367년(공민왕 16)에 병으로 세상을 뜨니 향년 81세였다. 문충공(文忠公)이란 시호가 내려졌고 우봉현 도리촌 선영에 모셔졌다.
역옹패설의 집필과 이제현의 역사관 이제현이 살았던 시기에 고려 사람들은 사실 이중의 국가체제 속에 살았다. 예컨대 고려사람은 고려의 과거시험도 볼 수 있었고 원의 과거시험에도 응시할 수 있었다. 원나라 여행은 타국인이 아닌 국내인 자격으로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중의 국가개념은 대등한 것이 아니었다. 고려와 원은 상하 관계로 형성되어 고려의 국가기구와 왕실은 격하되었고, 원제국의 부마국(駙馬國)으로서 직접 간접으로 원의 내정간섭을 받았다.
당시 이제현을 비롯한 지식인들은 원과 고려의 관계를 천자국과 제후국의 관계로 파악했다. 상하의 신분개념에 익숙한 당대인들은 두 국가간의 상하관계를 무리없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1323년 원에서 고려왕조를 없애려 하자 이제현은 천자는 제후국을 존속시켜 줄 의미가 있음을 원칙으로 내세워 존속을 주장했다. 그는 장구한 역사를 가진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는 역사적 신념이 있었고, 왕실의 안정과 민생문제에 누구보다 관심을 기울였던 인물이었다. 그는 정치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민생이 어려워진다고 생각했다. 백성의 수를 불린 후에 부유하게 하고 부유하게 한 뒤에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원의 경제적 침탈이나 내정간섭에 대해서는 두드러지게 반대하는 노력을 기울이지는 않았다.
이제현은 1342년(충혜왕 3) 조적의 난으로 두문불출하고 있을 무렵에 [역옹패설]을 저술했다. 4권으로 되어 있는 이 책은 역사적 사실의 기술과 함께 평론을 실은 책이다. 이 책이 쓰여진 충혜왕 대는 원 간섭기의 어떤 군주보다도 파행적으로 정치운영이 이루어졌다. 원 지배기를 온몸으로 경험한 노학자의 역사인식은 정치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에서 출발했다. 그는 고려를 존속시키기 위해서는 국내 정치와 경제에서 근본적인 개혁을 단행하여 국가재정을 확립하고,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하는 것을 가장 시급한 것으로 파악했다. 이러한 그의 시대의식은 당시 지식인으로는 가장 진보적인 생각이었고, 훗날 조선을 건국한 신진사대부들의 시대의식과도 맞닿아 있다. 그의 시대의식이 담겨져있는 [역옹패설] [충헌왕세가忠憲王世家] [국사國史] [김공행군기金公行軍記] 등은 모두 당대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그는 왜 당대사만을 썼을까. 이는 역사서를 편찬한 목적이 다른 데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역사책을 쓴 것은 후대인들에게 교훈을 주려 한 것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현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이제현(李齊賢)1)은 자가 중사(仲思)며 처음 이름이 이지공(李之公)으로 검교정승(檢校政丞)을 지낸 이진(李瑱)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걸출해 마치 장성한 사람 같았고 글을 지으면 벌써 문장가로서의 기풍이 있었다.
충렬왕 27년(1301) 나이 열다섯에 성균시(成均試(國子試))에 장원급제한 후 다시 병과(丙科)에 올랐지만,2) “이것은 하찮은 재주일 뿐이다.” 하며 더욱 부지런히 경서를 탐구해 넓고도 정밀히 통달하자 이진이, “하늘이 우리 가문을 더욱 빛나게 하려는가보다.” 하며 기뻐했다. 34년(1308)에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에 뽑혀 들어갔으며 충선왕 원년(1309)에 규정(糾正)에 임명되었고 거듭 승진해 성균악정(成均樂正)이 되었다.
제거풍저창사(提擧豊儲倉事)·내부시부령(內府寺副令)을 지낼 때에는 곡식의 두(斗)와 곡(斛)을 살피고 아주 적은 양까지도 수월히 계산해내자 사람들이, “이공(李公)은 두루 쓸 수 있는 재주꾼이다.”라고 칭찬했다.
충선왕이 원나라 인종(仁宗)을 도와 내란을 평정하고 무종(武宗)을 옹립3)해 그 총애와 대우가 비길 데 없었다. 충숙왕에게 왕위를 물리겠다고 요청한 후 태위(太尉)로서 연경(燕京 : 지금의 중국 北京)의 사저에 머물면서 만권당(萬卷堂)4)을 짓고 서적과 역사 기록을 읽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았다. 그리고,
“원나라 수도의 글하는 선비는 모두 천하에서 뽑힌 사람들인데 내 부(府)에는 아직 그러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나의 수치다.”
라 하며 이제현을 원나라 수도로 불러왔다. 당시 요수(姚燧)·염복(閻復)·원명선(元明善)·조맹부(趙孟頫) 등이 모두 왕의 문하에 출입했는데 이제현이 그들을 따라 학문이 더욱 진보하니 요수 등이 칭찬을 마지않았다.
성균제주(成均祭酒)로 승진해 서촉(西蜀)에 사신으로 가는 길에 지은 시가 사람들에게 애송되었으며 그 후 선부전서(選部典書)로 뛰어 올랐다. 충선왕이 강남(江南)에 황제의 향을 하사하러 갔을 때 이제현이 권한공(權漢功)과 함께 호종했는데5) 왕은 누대(樓臺)의 아름다운 경치를 만날 때마다 흥취를 시로 적으면서, “이런 좋은 곳에 이생(李生)이 없을 수 없다.”라며 그를 추켰다. 충선왕이 한번은 이제현에게 물었다.
“태조 때 거란(契丹)이 낙타를 보내었는데, 다리 아래에 매어둔 채 먹이를 주지 않아 굶어 죽게 하였다. 낙타가 중국에서 생산되지는 않지만 중국에서도 그것을 기르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군왕이 수십 두의 낙타를 가지고 있다한들 그 폐해가 백성을 고통스럽게 만들 정도는 아닐 것이다. 그것을 물리치면 그만이지 어찌하여 굶겨 죽이게까지 하셨는가?”
이에 이제현이 대답했다.
“나라를 세워 자손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군왕의 원대한 식견과 깊은 생각은 후대 왕이 따라갈 수 없는 법입니다. 옛날 송나라 태조(太祖)가 돼지를 궁중에서 길렀는데 인종(仁宗)이 그것을 놓아주게 하였습니다. 뒤에 요망한 자를 만났으나 그를 정벌하기 위한 맹세에 쓸 피를 얻을 곳이 없자 비로소 태조의 깊은 생각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도 정설은 아니지만 송 태조가 돼지를 길렀던 뜻은 피를 얻는 것보다 큰 이유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 태조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오랑캐들의 간악한 잔꾀를 꺾어버리려 한 것인지 아니면 후세의 사치스러운 마음을 막으려 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반드시 여기에는 깊은 뜻이 있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공경하는 마음으로 그 뜻을 깊이 헤아리시고 힘써 행하시어 본받도록 하소서.”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문물이 중국과 같다고 하였는데, 지금 공부하는 자들이 모두 불교를 좇아 문장의 구절이나 익히는 것은 어찌된 것인가?” 하고 묻자 이제현이 이렇게 대답했다.
“예전 태조께서 초창기에 나라를 다스리실 때 하루도 여유가 넉넉하지 못한데도 먼저 학교를 세우고 인재를 기르셨습니다. 일단 서도(西都 : 지금의 평양특별시)에 옮기신 후에는 수재(秀才) 정악(廷鶚)6)을 박사로 삼아 육부(六部)7)의 생도들을 가르치게 하였으며 채색비단을 내려주시어 학업을 권장하고 녹봉을 나누어주어 인재를 길렀으니 마음 씀씀이가 간절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광종 이후로는 더욱 교육을 정비하여 도성에는 국학을 높이 세우고 지방에는 향교(鄕校)8)를 설치하여 온 나라의 학교9)마다 글 읽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니 문물이 중국과 같다고 한 것이 지나친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의종 말년에 무인의 변란이 일어나 선악을 가림 없이 모조리 참살을 당했으며 요행히 범의 아가리를 벗어난 사람들은 깊은 산으로 달아나 관복을 벗고 가리(伽梨)10)를 입은 채 여생을 마쳤으니 신준(神駿)11)과 오생(悟生)12)의 무리가 이러한 사람들입니다. 그 후 나라에서 차츰 문치(文治)를 회복하였으나 비록 학문에 뜻을 둔 선비는 있어도 배울 곳이 없자 모두 이 무리들을 따르며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공부하는 자들이 승려들을 좇아 학문을 배우게 된 것은 바로 이런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학교를 확충하고 지방의 교육 기관을 돌보며 육예(六藝)13)를 존중하고 오륜(五倫)14)을 밝힘으로써 선왕의 도를 천명하시면 누가 참된 유가에 등을 돌리고 승려를 따르겠습니까?”
충선왕이 기꺼이 그 말을 받아들여 그를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 승진시키고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의 칭호를 내려주었다. 또 토지와 노비를 하사해 연오(燕吳 : 중국 강남지역)에서 호종했던 공을 포상하였으며 황제에게 주청해 고려 왕부단사관(王府斷事官)으로 임명하게 했다. 뒤에 다시 원나라에 갔는데, 유청신(柳淸臣)과 오잠(吳潛)이 원나라의 도성(都省)에 글을 올려 우리나라에 성(省)을 설치해 원나라에 합병할 것을 건의했다.15) 이에 이제현이 반대하는 글을 지어 도당(都堂)에 올렸다.
“『중용(中庸)』에 ‘천하의 국가를 다스리는 데는 아홉 가지 원칙16)이 있으나 행하는 목적은 하나다. 끊어진 왕업을 이어주고 망하는 나라를 일으켜주며, 어지러운 것을 다스려주고 위태로운 것을 버텨주며, 넉넉히 하사품을 보내는 반면 공물을 적게 받는 것은 제후들을 따르게 하기 위함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를 두고 주석가는 ‘후사가 없는 나라의 적통을 이어주고 이미 멸망한 제후들을 봉해 주어 위아래가 서로 평화롭게 지내고 크고 작은 나라가 서로 돕게 되면, 천하가 모두 그 충성과 힘을 다해 왕실을 지켜준다는 말이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예전 제나라의 환공(桓公)이 형후(邢候)를 이주시켜 고국으로 돌아간 것처럼 평안히 만들어 주고 위후(衛候)로 하여금 망국의 한을 잊게 했으니, 이것이 제후들을 규합해 어지러운 천하를 바로잡아 오패(五覇)17)의 우두머리가 된 까닭입니다. 작은 나라의 왕이라도 이런 이치를 알아 노력했는데, 하물며 세상에서 가장 큰 나라를 차지하고 천하를 한 집으로 만든 분은 어떻겠습니까?
생각해보면 우리나라는 시조 왕씨가 나라를 세운 이래 모두 4백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원나라에 신하로서 복종하여 해마다 공물을 바친 것도 1백 년이 넘었습니다. 백성들에게 끼친 공덕이 깊지 않은 것이 아니며 원나라 조정에 세운 공로도 두텁지 않다고 할 수 없습니다.
무인년(戊寅年 : 고종 5년, 1218)에 요나라 왕의 서자인 금산왕자(金山王子)라는 자가 중국 백성들을 노략질하다가 본국의 섬 지방으로 들어와18) 제멋대로 날뛰었습니다. 태조성무(太祖聖武) 황제께서 카치운[哈眞]·차라[札刺] 두 원수를 보내어 토벌하도록 하였는데, 때마침 큰 눈이 내려 보급선이 끊겨 버렸습니다. 이에 우리 충헌왕(忠憲王 : 고종)이 조충(趙冲)과 김취려(金就礪)를 시켜 군량을 공급하고 무기를 원조하도록 하니 아군은 파죽지세로 날뛰는 적을 사로잡고 죽여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에 두 원수는 조충 등과 형제를 맺고 서로 영원히 잊지 말자고 맹세하였습니다.
또한 세조황제(世祖皇帝)께서 강남(江南)에서 회군하시매 우리 충경왕(忠敬王 : 원종)은 천명을 받고 인심을 복속시킬 분을 미리 알아 5천여 리를 가서 양초(梁楚)의 교외에서 영접했습니다. 충렬왕도 몸소 조정에 찾아뵙는 일을 조금도 게을리 한 적이 없었고, 일본을 정벌19)할 때도 모든 보급품을 대며 선봉에 섰으며, 카다안[哈丹]을 추격해 토벌20)할 때는 상국의 군대를 도와 괴수를 섬멸하는 등 황제에게 바친 노력은 일일이 들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공주를 시집보내시어 대대로 인척으로서의 우호를 돈독히 하고 옛 관습을 고치지 않게 함으로써 종묘사직을 보전하게 한 것은 세조황제께서 내린 조서21)에 힘입은 것입니다.
지금 들으니, 조정에서는 저희 나라에 행성을 세워 중국의 다른 지방과 같은 행정 구역으로 만든다고 합니다. 정말 그러하다면 저희 나라의 공은 제쳐두고라도 세조(世祖)의 조서는 어떻게 할 것입니까? 몇 년 전 11월에 새로 내려온 조서의 조목을 읽어보건대, ‘옳지 못한 것과 옳은 것에 대해 각각 달리 대처함으로써 천하를 안정시켜 세조 당시의 덕치를 회복시키고자 한다.’고 했으니 황제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진실로 온 천하의 복인데 어찌 저희 나라의 일에만 세조의 조서를 적용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중용(中庸)』의 글은 공자(孔子)의 문하에서 후세에 교훈을 전하는 것으로 결코 헛된 말이 아닙니다. 거기에서 말한 것을 살펴보면, ‘왕통을 이어준 나라는 내가 다스려 줄 것이고 망한 나라는 내가 일으켜 줄 것이며, 어지러운 것은 다스리고 위태로운 것은 안정시켜준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아무 이유도 없이 조그만 나라의 4백 년 왕업을 하루아침에 단절시켜, 사직에 주인이 없게 하고 종묘에 바치는 제사조차 없어지게 하는 것은 이치로 따져도 절대 합당하지 않습니다.
또한 생각해보면, 저희 나라는 국토가 1천 리를 넘지 못하는데다가 산림과 냇물과 습지 등 쓸 수 없는 땅이 십분의 칠 정도나 됩니다. 그 땅에서 세를 거둬도 운반하는 비용에도 미치지 못하고 백성들에게 조세를 부과해도 녹봉을 지급하지도 못 할 처지이니 상국 조정의 재정에 견준다면 구우일모(九牛一毛)격일 뿐입니다. 더구나 땅이 멀고 백성이 어리석은데다 언어가 상국과 같지 않고 행동 양식이 중국과는 판이하기 때문에, 만약 그들이 이 소문을 들으면 필시 의구심을 품게 되어 아무리 개개인마다 알아듣게 설명해 주어도 안심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왜의 백성들과 바다를 두고 마주보고 있는 터라, 만일 왜가 이 소문을 듣게 되면 우리의 일을 경계로 삼아 자기들이 잘 대처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집사각하(執事閣下)께서는 세조께서 우리의 공을 생각한 뜻을 돌이켜보시고 『중용』의 교훈을 기억하시어 나라는 그 나라대로 사람은 그 사람대로 각자 정치와 재정에 힘써, 중국의 울타리로서의 우리의 무궁한 기쁨을 지속하도록 해주십시오. 그러면 어찌 삼한(三韓 : 고려)의 백성들만 집집마다 경축하고 황제의 성덕을 노래할 뿐이겠습니까? 종묘사직의 영혼들도 지하에서 감읍할 것입니다.”
이에 따라 결국 그 의논은 가라앉았다. 충선왕이 참소를 당해 토번(吐藩 : 지금의 중국 티베트지역)으로 유배22)되자 이제현이 다시 최성지(崔誠之)와 함께 원나라의 낭중(郞中)23)에게 글을 올렸다.
“바닷가 먼 나라에서 족하의 명성을 흠모하며 아래에서 존경해 온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고고한 모습24)을 뵙고 고담준론25)을 들으려 했지만 뵈올 기회를 얻지 못한 채로 세월만 보내면서 소원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갑자기 제 속마음을 그대로 족하 앞에서 털어 놓으려 하지만, 교분이 얕은 터에 할 말은 심각한지라 들으시는 분의 마음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족하의 고국[恭桑]26)으로, 비록 새가 깊은 골짜기를 떠나 큰 나무로 둥지를 옮기고 용이 진흙 속에 서려 있다가 구름 속으로 날아오르듯이 지금은 중국에서 살며 원나라에 벼슬하고 있으나 선영과 친척은 그대로 우리나라에 있으니, 저희들이 말하려 하는 것에 어찌 냉정하게 대하시겠습니까?
지금 황제께서 심혈을 기울여 정치에 힘쓰시고 또 대승상(大丞相)은 재주와 지략이 다시없는 분으로, 그 분이 올리는 말과 계책을 황제께서 다 허락하고 따라주시니 조정에는 전혀 실책이 없습니다. 만약 한 사람이라도 제 살 곳을 찾지 못하고 하나의 사물이라도 안정을 얻지 못하면, 반드시 구제하여 제대로 평안히 만든 후에야 그만 둡니다. 또한 족하는 바르고 성실하며 웅대하고 깊은 자질을 예악(禮樂)과 시서(詩書)로 빛내셨으며, 멋들어진 관복차림으로 동각(東閣)에서 한가로이 지내면서 이윤(伊尹)27)이나 주공(周公)28)과 같은 훌륭한 재상들을 더욱 빛나게 하고, 방현령(房玄齡)29)과 두여회(杜如晦)30)처럼 뛰어난 관리들을 잘 돕고 있으니 참으로 청운(靑雲)의 지기(知己)를 얻어 자신의 길을 제대로 걸어가는 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나라가 원나라를 섬긴지 백여 년 동안 해마다 공물을 성실히 바치며 조금이라도 게을리 한 적이 없었습니다. 지난날 요나라 왕족의 서자인 유민 금산왕자(金山王子)라는 자가 중국 백성들을 노략질하고 바닷섬을 침구하자 상국 조정에서는 카치운[哈眞]과 차라[札刺]를 보내어 군사를 동원해 토벌하게 하였습니다. 날씨는 춥고 눈은 깊이 쌓여 보급로가 끊어지자 아군은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도리어 흉악한 무리들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이 때 우리 충헌왕(忠憲王 : 고종)이 신하 조충(趙冲)과 김취려(金就礪)를 시켜 군량을 수송하고 군사를 보충하도록 한 다음 협격하여 그들을 몰살시켰습니다. 두 나라의 장수가 서로 형제가 되자고 약속하고 영원히 서로 잊지 말자고 맹세하였으니 이것이야말로 우리나라가 태조(太祖) 황제 때 충성을 다한 증거입니다.
세조(世祖) 황제가 남쪽을 정벌하고 군사를 되돌려 제위를 이으려 할 때 그 동생이 북변에서 변란을 선동하는 바람에 제후들이 우려하고 의심했으며 길도 심하게 막혔습니다. 그 때 우리 충경왕(忠敬王 : 원종)이 세자의 신분으로 신하들을 거느리고 양초(梁楚)의 교외에서 예를 올려 맞이하자, 그제서야 천하 사람들이 먼 나라조차도 흔쾌히 복종하는 것을 보고 천명이 세조께 돌아갈 것을 알았으니, 이것은 바로 우리나라가 세조황제에게 충성을 다한 증거입니다. 충경왕이 왕위를 이어받아 귀국한 후 충렬왕이 다시 세자의 신분으로서 황제께 입시하니 세조께서는 그 공을 생각하고 그 의로움을 가상히 여겨 공주에게 장가들게 함으로써 특별한 은혜를 보여주셨습니다. 또 여러 번 조서를 반포하여 옛 관습을 유지하게 하니 온 세상에서 그 덕을 칭송하였습니다.
우리 연로한 심왕(瀋王 : 충선왕)은 바로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의 아들이며 세조(世祖)의 외손자인지라 세조 때부터 지금의 황제에 이르기까지 다섯 황제를 두루 섬겼으므로 왕실과는 오래된 인척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공을 이루고 물러서지 않았다가 방심한데서 변고가 생겨 수척한 모습으로 죄인의 의복으로 바꿔 입은 후 멀리 토번(吐蕃 : 지금의 중국 티베트) 지방으로 유배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고국에서 1만여 리나 떨어진 곳으로 높이 솟은 벼랑이 몹시 험하여 열 걸음에 아홉 구비가 졌으며 겹겹이 쌓인 눈과 얼음이 일년 내내 녹지 않는데다가 안개같이 피어오르는 독기가 찌는 듯 덥고 도적들은 어느 틈엔지 출몰했습니다. 가죽 배로 강을 건너고 외양간에서 노숙을 하며 험한 길을 겨우겨우 걸은 지 반 년만에야 그 지역에 이르렀습니다. 보릿가루를 먹고 토담집에 거처하니 모진 고통이 하도 많아 이루 다 적을 수조차 없습니다. 길 가던 사람들도 듣고 슬퍼서 기가 막혀 하는데, 하물며 신하로서 벼슬하는 자야 오죽하겠습니까?
대궐 문에서는 천자께 하소연하는 부르짖음31)을 막고 궁전에서는 동쪽 고려에서[蟠木32)] 온 사신들을 거절해버리니, 비록 근심을 머금고 통분한 울음을 울거나 큰 소리로 부르짖은들 누가 들어줄 것이며 누가 가련하게 여기겠습니까? 제가 음식 맛을 잊어버리고, 누웠다가는 다시 일어나 우왕좌왕 불안해하며, 눈물이 다해 이어 피가 흘러내리는 까닭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대개 먼 지방을 편안하게 하고 친족을 돈독하게 대하는 것이 선왕의 정치였으며, 공로를 인정하여 허물을 덮어주는 것은 춘추(春秋)의 법입니다. 족하께서는 어찌하여 승상에게 넌지시 말씀을 올려 우리 왕이 과거에 딴 마음을 먹은 적이 없었던 것과 지금 스스로 뉘우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주지 않습니까? 여러 황제를 부지런히 섬긴 충성은 저버릴 수 없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를 사모하는 것은 막을 수 없으며, 그가 세조의 인척이라는 사실도 적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아! 이 말을 황제께 보고 드려서 사면33)의 은택을 크게 내려 죄를 용서하게해 주시고[賜環34)] 그를 귀국시켜 다시 하늘의 해를 볼 수 있게 하심으로써 성스러운 천자의 치세에 외롭게 우는 자가 없게 해주십시오. 그리되면 대승상의 아름다운 덕이 천하에 더욱 빛날 것이며, 족하께서 근본을 잊지 아니하는 의로움과 만물을 잘 구원하는 어진 마음을 천하 사람들이 칭송할 것입니다. 어찌 우리나라 임금과 신하들만 마음 속에 깊이 새겨 잊지 않고 그 만 분의 일이라도 갚으려고 할 따름이겠습니까?”
또 이제현은 승상 바이주[拜住35)]에게도 글을 올렸다.
“작은 나라의 보잘 것 없는 관리가 감히 비루한 말로 존귀하신 분의 귀를 더럽히니 그 경솔하고 외람되기가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큰 강은 그 폭이 넓어 모든 물을 다 받아들이며 하찮은 나무꾼의 말도 반드시 취할 만한 것이 있는 법이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이 절박한 마음을 애련히 여기사 먼저 그 죄를 너그러이 용서해주시고 적으나마 가련한 마음으로 살펴주십시오.
『맹자(孟子)』에는, ‘우(禹) 임금은 천하에 물에 빠진 사람이 있으면 마치 자기가 빠진 것처럼 안타까워했고, 직(稷)36)은 천하에 굶주린 사람들이 있으면 자기가 굶주린 것처럼 불쌍히 여겼다.’라고 하였습니다. 우 임금이 손으로 밀어 물에 빠뜨렸거나 직이 그들이 먹는 것을 막아 굶주리게 한 것도 아닌데 어찌하여 두 분은 단연코 그것을 스스로의 책임으로 여기며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았겠습니까?
하늘이 군주에게 임무를 내린 것은 본디 그를 시켜 이런 곤궁한 사람들을 구제하게 하려는 뜻입니다. 곤궁한 처지에서 하소연 할 데도 없는 사람을 보고도 태연히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어찌 하늘이 임무를 내린 뜻이겠습니까? 우 임금이 손발에 못이 박히는 고통을 잊고 중국 천하[九土37)]에 살 곳을 마련해 주고, 직이 친히 파종하는 수고로 백성[蒸民]들을 먹임으로써 요(堯) 임금과 순(舜) 임금을 도와 은택이 후세에 미치도록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불행하게 소용돌이치는 여울에 빠지거나 구렁텅이에 굴러 떨어진다면 우 임금과 직이 그것을 보고 그 순간만 그를 살리려 했겠습니까? 반드시 그들을 위한 항구적인 계책을 세워 다시는 굶주림을 걱정하거나 물에 빠지는 것을 근심하지 않도록 만든 뒤에야 그만둘 것을 저는 압니다.
생각해보건대, 승상 집사(丞相執事)께서는 천자를 보좌하시면서 목소리나 얼굴빛을 변하지 않고도 천하를 태산과 같이 안정시켰습니다. 게다가 기후는 청명하고 해마다 곡식은 풍년이 들어 백발의 노인들이 다시 중통(中統 : 원나라 세조의 연호)과 지원(至元 : 원나라 세조의 연호) 때의 정치를 보게 되었다고 여기니 사람들이 이때에 태어난 것도 행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때에 어떤 한 사람의 곤궁한 형세가 굶주림과 물에 빠진 것보다 심하다면 집사께서는 그를 어떻게 처리하실 것입니까?
지난해에 우리 연로하신 심왕(瀋王 : 충선왕)이 천자의 진노를 만나 몸 둘 곳을 몰라 할 때, 집사께서 그것을 애처롭고 가련하게 여긴 나머지 천자의 엄한 명령 아래에서 죽은 사람을 살려내시는 큰 은혜를 베푸시어 가벼운 벌을 적용해 먼 곳으로 유배보내게 배려하셨으니 다시 살려 주신 은혜는 부모를 넘어섭니다. 그러나 그 땅이 너무나 멀고 또한 궁벽해 말이 통하지 않고 풍토와 기후도 전혀 다릅니다. 그리고 도적이 불시에 튀어나오고 굶주림과 목마름이 번갈아 닥쳐오니 몸은 파리하게 수척해지고 머리털은 모두 희어져 그 고통스럽게 지내는 모습은 말만 해도 눈물이 흐를 정도입니다. 인척관계를 두고 말하면 그는 세조(世祖)의 외손자이며, 그 공로로 말하면 선제(先帝)의 공신입니다. 또한 그 조부는 성무(聖武) 황제가 나라를 세울 때부터 의로움을 사모하여 먼저 복속하고 대대로 충성을 다하는 공을 세웠으니 전(傳)에서 말하는 것처럼 십 대에 걸쳐서라도 용서할 경우에 해당됩니다. 유배된 이래로 이미 4년이나 되었으니 마음을 고치고 허물을 뉘우친 것도 또한 많습니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집사께서는 처음에 힘써 구해주신 적이 있었으니 끝까지 돌보아주셔서 천자께 아뢰어 두터운 은혜를 베풀 수 있도록 주선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본국으로 돌아가서 천수를 마치도록 해주신다면 그 감동과 행복이 어찌 소용돌이치는 여울에 빠진 자가 탄탄한 땅을 디디게 되고 구렁텅이에 굴러 떨어진 자가 좋은 음식을 먹는 기쁨에 그치겠습니까? 만약 때가 좋지 못하다고 하시면서 일을 미루고 날을 끌다가 현명하고 힘 있는 사람이 먼저 그를 구하게 된다면 천하의 선비들은 집사의 일처리가 더디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백성들은 집사께서 덕을 베푸셨으나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했다고 말하며 은근히 집사를 위해 애석해 할 것입니다.”
그 얼마 후 황제가 충선왕을 가까운 도스마[朶思麻(지금의 중국 간쑤성[甘肅省] 임조(臨洮) 부근)]지역으로 옮기게 했는데, 이는 바이주[拜住]의 건의를 받아들인 결과38)였다. 이제현이 충선왕을 만나러 가는 길에 시를 읊었는데 그 내용이 충성과 울분으로 가득 찬 것이었다. 이후 밀직사사(密直司使)로 승진하고 추성양절공신(推誠亮節功臣)의 칭호를 받았으며, 다시 첨의평리(僉議評理)·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전임되고 또 김해군(金海君)으로 봉해졌다.
충숙왕이 죽은 후 조적(曹頔)이 반란39)을 일으키자 충혜왕이 그를 격살했으나 원나라 수도에 많이 와있던 그의 잔당들이 기필코 왕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 했다. 원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왕을 소환하자 사람들이 의구심에 가득 차 장차 어떤 재앙이 닥칠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때 이제현이 거리낌 없이 분연히 일어나 “나는 내가 왕의 자식인 것을 알 뿐이다.”라고 하며 왕을 호종해 원나라 수도로 가서40) 일을 명백하게 밝혀 그 공로로 일등공신이 되고 철권(鐵券)41)을 하사받았다. 그러나 귀국한 후에도 소인배42)들이 더욱 날뛰자 이제현은 은거해 두문불출하며 『역옹패설(櫟翁稗說)』43)을 지었다.
충혜왕이 원나라로 잡혀가자44) 재상과 나라의 원로들이 민천사(旻天寺)45)에 모여서 왕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주청하는 글을 올리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제현이 다음과 같이 글을 기초했다.
“고려국의 원로 관리들은 삼가 목욕재계하고 정동성(征東省)의 상공 집사(相公執事)들께 글을 올립니다. 상국 조정의 사신 도치[朶赤] 등이 황제께서 하늘에 제사지낸 후 대사령을 내린다는 조서를 받들고 앞서 우리 수도로 왔습니다. 우리 부다시리왕[寶塔實憐王·寶塔實里王 : 충혜왕]이 관료들을 이끌고 의장(儀仗)을 갖추어 성 밖으로 출영한 후 본성(本省)으로 들어와 조서를 들었는데, 그 절차가 끝나자마자 사신 등이 바로 왕을 잡아 말에 태우고 돌아가 버렸습니다. 일이 너무나 급작스럽게 일어나는 바람에 모든 신하들이 어찌할 바를 몰랐으니 무슨 말을 다시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생각하건대 왕은 연소해 경험이 적은 관계로 마음만 가지고 서둘러 일을 행했기 때문에 이런 지경에 이른 것이지, 그 본마음을 살펴보면 다른 마음이 없었던 줄은 하늘의 해가 밝게 비추는데 어찌 속일 수 있겠습니까? 또한 생각하건대, 저희 나라는 시조 왕씨(王氏)가 바다 귀퉁이에서 개국한지 426년이고 자손이 서로 이어 온 것이 28세이며, 송나라·요나라·금나라와 두루 사신이 왕래하였으나 견제를 받아 어쩔 수 없어 그랬던 것뿐입니다.
원나라 태조성무(太祖聖武) 황제께서 나라를 일으키실 때 금산왕자(金山王子)라는 자가 중국의 백성들을 노략질하며 망한 요나라의 왕업을 회복하려고 도모하다가 힘이 다하여 동쪽으로 달아나 이 섬 저 섬에서 창궐하였습니다. 태조께서 카치운[哈眞]과 차라[札刺] 두 장군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적들을 토벌하게 하였는데, 날씨는 춥고 눈이 깊이 쌓여 보급로가 끊기자 우리 충헌왕(忠憲王 : 고종)이 조충(趙冲)과 김취려(金就礪) 등을 보내어 병기와 군량을 지원한 결과 단번에 적을 격파했습니다. 그 당시 두 나라가 자손만대에 이르기까지 이 날을 잊지 말자고 맹세한 후 포로를 나누어 신표로 삼았는데, 지금 우리나라에 있는 거란장(契丹場)46)이 바로 그 것입니다.
원나라 세조문무(世祖文武) 황제께서 양양(襄陽)에서 군대를 사열할 때 아릭부케[阿里孛哥]47)가 막북(漠北)에서 변란을 일으키자 제후들이 앞날을 우려해 각자 거취를 고심했습니다. 그 때 우리 충경왕(忠敬王 : 원종)은 당시 세자로서 서리와 이슬을 무릅쓰고 바로 변량(汴梁 : 지금의 중국 하남성 개봉)으로 가서 도중에 세조를 영접했습니다. 세조께서 보시고 놀라면서 ‘고려는 변방의 먼 나라인데도 지금 내가 북쪽으로 돌아가 대통을 이으려고 하는 차에 그 세자가 스스로 귀부하니 이는 하늘이 나를 도우시는 것이다.’라고 기뻐했습니다.
충경왕이 즉위한 후 그 신하인 임유무(林維茂) 부자가 원나라에 복속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나머지 마음대로 국왕을 갈아치우고48) 강화도(江華島 : 지금의 인천광역시 강화군)로 들어가 전쟁에 대비했습니다. 세자 충렬왕이 급히 원나라로 가 알리자 세조(世祖)께서 크게 노해 조서를 내려 왕을 복위케 한 다음 역마 편으로 달려와 입조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왕과 세자가 원나라 군사를 이끌고 귀국해 반역 도당들을 사로잡거나 죽인 후49) 강화도를 떠나 개경으로 돌아와 오직 한 마음으로 직무에 충실했습니다.
충렬왕대 들어 세조께서 두 번에 걸쳐 일본을 정벌하였는데, 왕이 김방경(金方慶) 등을 보내어 전함을 건조했으며 늘 선봉으로 참전했습니다. 또한 나얀대왕[乃顔大王]50)의 일당인 카다안[哈丹]이 수달달(水達達(達靼))과 여진(女眞)의 땅을 공격해 함락시킨 후 우리 강토까지 침범해 천자의 권위에 항거하려고 하자 왕이 출병해 맞아 격파함으로써 수레 하나도 돌아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대덕(大德 : 원나라 성종의 연호) 말에는 이즈르부카왕[益知禮不花王 : 충선왕]이 인종(仁宗) 황제를 도와 역적을 소탕하고, 무종 황제를 모신 공로로 일등 공신이 되었으니 이것 또한 왕씨가 원나라에 오랫동안 충성을 바친 하나의 예입니다.
또한 생각하건대 세조황제가 쿠투르게리미쉬공주[忽篤迷思公主·忽篤烈迷實公主·忽都魯揭里迷失公主 : 제국대장공주]를 우리나라에 시집보내어, 이 분이 이즈르부카왕[益知禮不花王]을 낳았고 이즈르부카왕[益知禮不花王]이 아라트나시리왕[阿納忒室利王·阿剌訥忒失里王 : 충숙왕]을 낳고 아라트나시리왕[阿納忒室利王]이 부다시리왕[寶塔實里王·寶塔實憐王 : 충혜왕]을 낳았으니 부다시리왕[寶塔實里王]은 비록 멀기는 하나 세조에게는 진짜 인척이 됩니다. 또 황후 기씨(奇氏)51)는 우리나라에서 태어나서 황제의 배필이 되어 황태자를 낳으심으로써 천하 사람들의 기쁨이자 의지가 되게 했으니 원나라에서는 마땅히 우리나라를 여러 다른 번국들과 동격으로 대우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나라는 일본과 바다를 사이로 이웃하고 있으니 우리가 원나라의 복록을 입으면 저들은 귀화가 늦어진 것을 부끄러워할 것이며, 우리나라가 원나라로부터 죄를 받으면 저들은 귀화하지 않고 버틴 것을 다행으로 여길 것이 여러 정황으로 보아 분명합니다. 옛날 주나라에서 위후(衛侯) 간(衎)을 잡았다가 뒤에 복위시킨 일과, 한나라에서 양왕(梁王) 무(武)를 불러들였다가 다시 양나라로 돌려보낸 일은 군주로서의 큰 법도를 보인 좋은 예입니다. 하물며 원나라는 역대 황제께서 생명을 아끼는 덕이 주나라나 한나라보다 훨씬 더합니다. 이번에는 친히 남쪽 교외에서 선조를 하늘에 배향하는 제사를 지내시고 대례가 끝난 후 덕음을 천하에 두루 선포하시니 온 세상 사람들이 춤추며 환호하였습니다. 만약 한 개의 물건이라도 그 어진 은택을 입지 못하는 사례가 있다면 진실로 마음 아파해야 할 것입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천자께서는 더없이 인자하신 마음으로 모든 허물을 용서하시니, 이제 한 번 마음을 돌리시어 우리 부다시리왕[寶塔實里王 : 충혜왕]으로 하여금 죄의 그물에서 벗어나 은혜의 바다에서 헤엄치게 하시고, 왕씨(王氏)의 군신과 사직으로 하여금 그 이름을 보존하도록 하시며, 의관과 풍속의 제도도 그대로 두어 세상의 어리석은 백성들이 생업에 편안히 종사할 수 있게 해주신다면, 태조와 세조께서 우리나라를 애틋이 여기신 뜻이 어찌 더욱 명백해지지 않겠습니까?
또 세조께서 공주를 시집보내 자손을 낳아서 먼 나라와 굳은 우호를 맺으려 한 그 계획이 어찌 더욱 원대해지지 않겠습니까? 황후가 황태자를 낳으시어 천하 사람들이 기뻐하고 의지하는 마음이 어찌 더욱 커지지 않겠습니까? 우리나라가 황제에게 충성하고 적을 미워하는 마음이 어찌 더욱 굳어지지 아니하겠습니까?
아직 복속하지 않고 있는 일본의 백성들이 자신들의 고집을 버리고 즐겨 귀화하려는 결심이 어찌 더욱 돈독해지지 않겠습니까? 426년을 내려온 28대의 고려 선왕들이 어찌 더욱 감동하지 않겠습니까? 원나라에서 생명을 아껴 허물을 용서해 주시는 그 큰 덕이 어찌 더욱 천하 후세에 전파되지 않겠습니까? 엎드려 생각하건대 집사께서는 저의 하잘 것 없는 말씀을 굽어 살피시어 천자께 아뢰어주십시오.”
작성이 끝난 뒤 서명하여 성(省)에 올리려고 하였으나 나라의 원로 가운데 오지 않은 자들이 많아 일이 끝내 성사되지 못했다. 충목왕이 왕위를 이어받자 이제현은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승진52)하고 부원군(府院君)으로 봉해졌는데, 이때 도당(都堂)에 글53)을 올렸다.
“지금 우리 국왕 전하께서는 옛날 원자(元子)로서 갓 공부를 시작하던 어린 나이에 천자의 명을 받들어 조종의 중대한 왕업을 잇고서 실패한 앞 왕의 뒷처리를 감당하게 되었으니, 마땅히 언행을 조심하여 삼가고 근신해야 할 것입니다. 삼가고 근신하기 위해서는 덕을 닦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덕을 닦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열심히 공부하는 일입니다.
지금 좨주(祭酒) 전숙몽(田淑蒙)이 이미 스승으로 이름이 올라 있으니 다시 현명한 선비 두 명을 택하여 전숙몽과 함께 『효경(孝經)』·『논어(論語)』·『맹자(孟子)』·『대학(大學)』·『중용(中庸)』을 강의하게 하여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성의정심(誠意正心)의 도를 익히시고 벼슬아치의 자제들 가운데 정직·신중·중후하고 학문을 좋아하며 예를 아끼는 사람 열 명을 뽑아 시학(侍學)으로 삼아 측근에서 보좌하고 이끌게 하십시오. 사서(四書)에 익숙하게 되면 다음으로 육경(六經)54)을 강의하여 교만과 사치, 음란과 안일, 음악과 여색, 개와 말 따위가 눈과 귀에 닿지 못하게 하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습성이 되고 덕이 이루어지니, 이것이 당면한 일 가운데 가장 급한 것입니다.
임금과 신하는 의리상 한 몸이니 머리와 지체가 서로 가깝지 않다면 그것이 옳은 일이겠습니까? 지금 재상들은 잔치 자리가 아니면 임금과 만날 수 없으며 특별히 부르지 않으면 임금께 나아가지 못하니 이것이 어찌된 까닭입니까? 마땅히 임금께 청하여 날마다 편전(便殿)에 나와 늘 재상들과 함께 정사를 논의하시게 해야 하며, 때로 날을 잡아 직접 면대할 것이며 별 일이 없더라도 이러한 예를 지켜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대신들은 임금과 나날이 멀어지고 환관들은 나날이 가까워져서 백성들의 기쁨과 근심, 국가의 안위를 보고드릴 수 없게 될까 우려됩니다.
정방(政房)55)이란 명칭은 신하들이 권세를 부리던 시절에 생겨난 것으로 옛 제도가 아니니 정방을 혁파하여 전리사(典理司)와 군부사(軍簿司)로 업무를 돌려주어야 합니다. 고공사(考功司)56)를 설치하여 관리의 공과를 드러내고 재능 여부를 따지게 하여 매년 6월과 12월에 도목(都目)57)을 받아서 정안(政案)58)을 고과해 인사를 행하는 것을 항구적인 법규로 삼는다면 청탁하는 무리들을 근절하고 이권을 구하는 작태를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만약 미적거리면서 옛 제도를 회복하지 못하면 장래에 양장(梁將)59)·조륜(祖倫)60)·박인수(朴仁壽)61)·고겸(高謙)62)같은 무리들이 날뛰면서 제멋대로 인사 서류를 조작해 낼 터인 즉, 이에 대한 비방[黑冊之謗63)]을 막을 수 없을 것이 우려됩니다. 응방(鷹坊)64)과 내승(內乘)65)이 백성들에게 끼치는 해가 우심하기 때문에 앞서 이미 혁파하라는 명을 내렸지만, 뒤에 다시 지체되는 바람에 온 나라가 실망하였습니다.
고용보(高龍普)가 달려와서 책망하는 지경까지 이르렀으니 어찌 마음속 깊이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덕녕창(德寧倉)·보흥창(寶興倉) 등의 창고처럼 옛 제도가 아닌 것은 모두 혁파함으로써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는 황제의 뜻에 어긋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자사(刺史)와 수령(守令)에 적합한 사람을 임명하면 백성은 복을 누리게 되며, 적합한 사람을 임명하지 못하면 백성들은 피해를 당하게 되는 법입니다. 높은 관직에 잇다가 좌천된 자는 교만하여 법을 따르지 않으며, 나이가 많이 들어 관직을 얻은 사람들은 정신이 흐릿하고 게을러 제대로 임무를 수행할 수 없습니다. 가끔가다 촌구석에서 청탁으로 벼슬하여 금어(金魚)66)를 차고 다니는 자들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옛 제도처럼, 조정의 관리로서 아직 참직(叅職)67)에 나아가지 못한 사람들은 반드시 감무(監務)와 현령(縣令)을 거친 후 4품을 주어 목사(牧使)와 태수(太守)로 삼는 것을 관례로 하고, 감찰사(監察司)와 안렴사(安廉使)가 반드시 평가를 하여 상과 벌을 줄 수 있도록 하십시오. 소위 관직이 높은 사람, 나이가 많은 사람, 청탁으로 촌구석에서 벼슬한 사람을 부득이 기용해야 한다면 차라리 중앙 관직을 줄지언정 목민관으로는 임명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식으로 20년 동안 인사를 하고도 유랑하는 백성이 돌아오지 않거나 공물이나 조세가 부족했던 적은 아직까지 없었습니다.
금은과 비단은 우리나라에서 생산되지 않기 때문에 선배 고관들도 흰 포목과 명주만 써서 옷을 지어 입었고 그릇은 놋쇠와 질그릇만 썼습니다. 충선왕이 옷 한 벌을 지으려고 값을 물었다가 너무 비싸서 포기하고 짓지 않은 적도 있습니다. 충숙왕도 충혜왕에게 금실로 수놓은 옷과 새 깃으로 장식한 갓은 우리 조상의 옛 법도가 아니라고 꾸짖은 적이 있습니다. 이로 보아 나라가 4백여 년 동안 사직을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은 다만 검소함을 미덕으로 여겨온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래의 풍속이 지극히 사치해졌으니, 민생이 곤궁하고 국가 재정이 궁핍해진 것은 오직 이것 때문입니다. 재상들은 금후 비단으로 옷을 짓거나 금과 옥으로 그릇을 만들지 말아야 하며, 화려한 차림새의 기마병을 뒤따르게 하는 일을 금해야 합니다. 각자 검소한 생활을 하도록 노력하는 한편, 임금께 건의하고 백성들을 교화하면 풍속을 좋은 방향으로 돌릴 수 있을 것입니다. 과거 수탈했던 베는 즉시 바친 사람에게 돌려줘야 합니다. 그러나 관리가 이를 틈타 이익을 챙길 경우 빈천한 백성들이 실제로 혜택을 받지 못할까봐 우려되니 관청들에 분부하여 다음 해에 납부해야 할 각종 공물로 충당케함으로써, 백성들로부터 먼저 받거나 서로 차대(借貸)하는 폐단에서 벗어나게 해주십시오. 행성(行省)에서 이미 문서를 보냈으니 빨리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삼식읍(三食邑)이 설치된 뒤에 모든 관료들의 녹봉을 제대로 지급하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한 나라의 군주로서 신하들의 생활 비용을 취해서 자기 창고를 채운다면 어찌 후세에 비난거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식읍(食邑)68)을 폐지하고 그것을 광흥창(廣興倉)69)으로 귀속시켜 녹봉으로 충당하도록 양궁(兩宮)에 건의해 주십시오.
경기(京畿)의 토지 가운데 조업전(祖業田)70)과 구분전(口分田)71)을 제외한 나머지는 녹과전(祿科田)72)으로 나누어 지급해온지 거의 50년이 경과했습니다. 그러나 근자에 권세 있는 가문에서 거의 모두를 점탈해 버렸기 때문에 그 사이 누차 개선 방안을 논의했으나 그 때마다 협박조로 임금을 속이는 바람에 끝내 실행할 수 없었으니 이것은 대신들이 끝까지 버티지 못한 결과입니다. 정말 개혁을 시행한다면 기뻐할 사람은 너무나 많고 기뻐하지 않을 사람은 권세가 수십 명뿐일 텐데, 무엇을 꺼려 시행하지 않는 것입니까? 주(州)·군(郡)에서 오랫동안 포탈했던 공물과 조세를 해당 관청에서 온갖 방법을 동원해 강제로 징수했으나 그 십 분의 일도 거두지 못하고 원망만 받았습니다.
바라건대 지정(至正 : 원나라 순제의 연호) 3년(1343) 이전에 포탈했던 공물과 조세는 일체 면제해 주십시오. 그리고 이 몇 년 동안 궁핍한 백성들로부터 마구 조세를 거두어들인 결과 사람을 전당 잡히거나 팔아넘기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바라건대 각 도(道)의 존무사(存撫使)와 안무사(安撫使)로 하여금 그들이 수도로 와서 신고하는 것을 허락한다는 방을 붙이게 한 후 관청의 비용으로 속전을 지급해 원래의 신분을 회복하도록 해주십시오. 그리고 사람을 사들인 자들도 자수를 명한 다음, 만약 자수하지 않고 뒤에야 신고하는 경우 속전을 지급하지 않고서 강제로 그들의 부모에게 돌려주도록 하고, 심한 자는 죄를 다스리십시오.”
뒤에 이제현은 안축(安軸)·이곡(李穀)·안진(安震)73)·이인복(李仁復)과 함께 민지(閔漬)가 편찬했던 『본조편년강목(本朝編年綱目)』을 증수74)하였고 『충렬왕실록』·『충선왕실록』·『충숙왕실록』 등 삼대의 실록을 수찬75)하였다.
공민왕이 즉위하고도 미처 귀국하지 못했을 때 이제현으로 하여금 정승을 대리하게 하고 정동성(政東省)의 일을 임시로 처리하게 하자 이제현이 왕에게 글을 올렸다.
“엎드려 듣자온대, 전하께서 황제로부터 국왕과 승상으로 한꺼번에 임명받았다고 하니 덕경부(德慶府)76)로부터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용약환희하는 것을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전하의 교지에, 한 나라에 있어서 가장 긴요한 국리민복에 관한 일을 맡아서 모두 실행하라고 지시하셨으니, 보고 듣는 사람들은 모두 갱생의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다만 저의 재주가 보잘 것 없고 연로하여 만사가 다른 사람에 못미치는데도 갑자기 엄명을 받들어 권성정승(權省政丞)이 되니, 감격하는 마음이야 위로 하늘의 해를 차지한 듯하지만 임무를 제대로 감당할지 두려워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임명하는 인보(印寶)가 이미 왔으므로 현명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잘 선발하여 관리의 고선에 대비할 예정이오니 빠른 시일 안으로 새로운 명령을 내려주소서.”
곧이어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으로 임명되자 이제현은 정동행성의 이문(理問)77) 배전(裴佺)과 박수명(朴守命)78)을 행성에 하옥하고, 직성군(直城君) 노영서(盧英瑞)를 가덕도(可德島 : 지금의 부산광역시 강서구 천성동)79)에, 찬성사(贊成事) 윤시우(尹時遇)80)를 각산(角山)으로 유배보냈으며 찬성사(贊成事) 정천기(鄭天起)81)를 제주목사(濟州牧使)로,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 한대순(韓大淳)82)을 기장감무(機張監務)로 좌천시켰다. 당시 왕이 원나라에 있어서 왕좌가 비어 있었으나 이제현이 적절한 조치를 취했으므로 사람들이 그 덕분에 안정을 찾았다.
일찍이 원나라에 표문을 올리면서 계단 위에 올라가서 예를 행했는데 그 의장과 경호가 왕과 다를 바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비난하였다. 조일신(趙日新)이 왕을 호종한 공을 내세워 교만 방자하게 횡포를 부리면서 이제현이 자기보다 높은 자리에 있는 것을 크게 시기한 나머지 헐뜯자 이제현은 왕에게, 자신은 남들이 우러러 보는 지위에 감히 있을 수 없다며 굳이 사직하려 했으나 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뒤에 말에서 떨어져 다리를 다치자 다시 글을 올려 사직을 청했으나 왕은 허락하지 않고 추성양절동덕협의찬화공신(推誠亮節同德協義贊化功臣)의 칭호를 내려주었다. 이제현이 다시 세 번이나 글을 올려 계속 고사하자 그제야 사직을 허락했다.
조일신이 불량배들을 규합해 밤중에 궁궐로 난입해 미워하던 사람들을 해치고83) 군사를 풀어 많은 사람을 살해했으나 이제현은 관직에서 물러나 있었으므로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조일신이 처형당한 후 왕은 이제현을 다시 기용하여 우정승(右政丞)으로 삼고 순성직절동덕찬화공신(純誠直節同德贊化功臣)의 칭호를 내려주었다. 이듬해에 우정승을 사임한 후 부원군(府院君)으로서 지공거가 되어 이색(李穡) 등을 선발하였다. 다시 우정승으로 임명했으나 고사하자 김해후(金海侯)로 봉하고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바꿔 임명했다. 이재현은 재차 사양했지만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6년(1357)에 본직으로서 은퇴하겠다고 간청하자 그제서야 허락하였다. 국가 제도상 군(君)으로 봉해져 은퇴하면 본직으로 은퇴하는 것보다 녹봉에 차이가 있었다. 늙어서도 많은 녹봉을 받는 것이 의리상 옳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에 이런 요청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본직으로 벼슬을 마치게 하는 것은 대신을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는 논의가 있어 다시 계림부원군(雞林府院君)으로 봉하였다.
기철(奇轍) 등이 처형당한 후 왕은 기철 등의 의복과 좋은 비단을 환시(宦寺)84) 및 양부(兩府)85)에 내려주었으나 이제현은 공이 없다고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다시 글을 올려 늙었으니 물러가겠다고 요청하자 벼슬을 마치게 하였다.
『국사(國史)』를 그의 집에서 편찬86)하게 되자 사관(史官) 및 삼관(三館)87)이 다 모였다. 왕이 이제현으로 하여금 소목(昭穆)88)의 차례를 의논하여 정하게 하였는데 그 내용은 「예지(禮志)」에 나온다. 왕이 개경의 성곽을 수축하는 일에 대해 대신과 원로들에게 자문을 구하자, 이제현이 이렇게 건의했다.
“하·은·주나라 이전의 일은 알 수 없지만 그 아래의 나라치고 도읍을 세우고도 성곽이 없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우리 태조께서 사방을 정벌하시고 참람하게 소란을 피우는 자들을 평정해 삼국을 통일한 뒤 7년 만에 돌아가셨습니다. 당시 온갖 질고를 겪은 백성들을 동원하여 토목공사를 일으키는 일을 차마 할 수 없었기에 송경(松京 : 개경)에 성을 쌓지 않았던 것이니 일부러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형편상 할 수 없었을 뿐입니다. 그 후로 그냥 지내오다가 현종 초에 이르러 거란이 수도를 유린하고 궁실을 불태우자 현종께서는 허둥지둥 남쪽으로 피난89)하였습니다. 당시에 만약 성곽이 견고했더라면 거란이 그렇게 쉽사리 도성을 처참하게 유린하고 불태워버리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현종 20년(1029)에 비로소 이가도(李可道)를 시켜 개경(開京)의 성곽을 쌓게 했는데, 뒤에 금산왕자(金山王子)가 군사를 이끌고 와서 서해도(西海道)와 충청도(忠淸道) 사평진(沙平津)의 북쪽까지 디 짓밟았지만 수도에는 입성하지 못했습니다. 또 여고(餘古)와 차라대(車羅大)90)가 황교(黃橋)91)에 진을 쳤지만 수도에는 침범하지 못했던 것도 성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곽이 당연히 수축되어야 한다는 것은 지혜 있는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모두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수축할 경우 농번기를 피해야 하며 양식과 건자재도 준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단 일을 시작하면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모일 터이니 궁성과 성문은 반드시 수비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결정이 내려졌다면 음양술상 기피하는 요소가 있다고 하더라도 절대 변경하지 않아야 공사를 완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홍건적의 난 때 왕이 남쪽으로 피난하던 도중 이제현이 상주(尙州 :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시)에서 알현하면서 “오늘의 피난이 당나라 현종(玄宗) 때 안록산(安祿山)의 반란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하며 눈물을 흘리고 탄식했다. 적이 물러가자 또한 홍언박(洪彦博)에게,
“옛 사람이 ‘장하구나! 산과 물이여. 이것이 바로 위나라의 보물이로다.’라고 말한 일이 있다. 애초 험한 곳에 요새를 설치해 수비했더라면 반드시 승리했을 터인데 진작 그런 계획을 세우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적이 만약 들판에서 싸웠으면 우리 군사들이 반드시 패했을 것인데, 비와 눈으로 적이 뜻밖의 재난을 입은 틈을 타 이긴 것이니 이것은 종묘사직과 험준한 국토의 덕분이다.”
라고 말했다.
16년(1367)에 죽으니 나이 여든하나였으며 시호를 문충(文忠)이라 하였다. 타고난 자질이 중후한데다 학문으로 보충하였기 때문에 그가 제시한 정책과 행정상의 모든 조치는 모두 탁월했다. 역사서를 읽다가 「측천기(則天紀 : 측천무후기)」에 이르자 “어찌 주나라의 잔손(殘孫)으로 당나라의 왕업을 이을 수 있었으리?”라고 했는데 뒤에 『주자강목(朱子綱目)』92)을 보고 스스로 자신의 판단이 정확했음을 알았다. 다른 사람에게 작은 장점이라도 있으면 칭송을 하며 그 사실이 알려지지 못할까 걱정하였고, 선배가 남긴 업적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자신이 미치기 어렵다고 여겼다. 또 평생 한 번이라도 성급히 말하거나 얼굴빛이 갑자기 변한 적이 없었으며, 또한 거친 말을 하지 않았다. 만년에 한가하게 지낼 때 술상을 차려두고 손님들을 대접하면서 고금의 일들을 평가하는 일에 열성을 보였다. 이를 본 최해(崔瀣)가 “선비는 헤어진 지 사흘 만에 눈을 닦고 그를 다시 평가한다고 했는데 나는 익재(益齋 : 이제현)에게서 그것을 보았다.”고 탄복하기도 했다.
이제현은 힘써 옛 법을 준수하고, 제도를 뜯어 고치는 일을 좋아하지 않으면서 “나의 뜻이 어찌 옛 사람만 못하랴만 다만 나의 재주가 오늘날 사람에게 미치지 못할 뿐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자기 손자들이 잇달아 기씨(奇氏)와 인척관계93)를 맺자 이제현은 그들이 분수에 넘치게 행동하는 것을 꺼렸다. 평장사(平章事)로 임명되자 공민왕이 양제(兩制)94)에 명해 축하의 시를 짓게 하고 아울러 이제현으로 하여금 그 전말을 기록하도록 했으나 이제현은 쓰기를 사양했다.
공민왕이 신돈(辛旽)을 총애하자 이제현이 왕에게,
“제가 전에 신돈을 한 번 본적이 있는데 그 골격이 옛날 흉악한 자들처럼 생겨 반드시 후환을 끼칠 것이니 가까이 하지 마십시오.”
라고 충고했다. 신돈이 깊이 원한을 품고 있으면서 갖가지 방법으로 그를 헐뜯었지만 이미 연로했기에 해를 끼칠 수 없었다. 그래서 왕에게,
“유생들이 서로 좌주(座主)95)니 문생(門生)이니 하면서 온 나라에 깔려 청탁을 일삼으며 마음대로 욕심을 채우니 이제현의 문생 같은 자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 문하에서 벼슬한 문생들이 지금은 온 나라에서 도적질을 하고 있으니 유생들의 해악이 이와 같습니다.”
라고 참소했다. 결국 신돈이 패망하자 왕은, 익재의 선견지명은 따를 수가 없다고 감탄했다. 젊을 때부터 동년배들이 감히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반드시 익재라고 불렀으며 재상이 되고 나서는 귀천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익재라고 불렀으니 그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추증을 받았던 것이 이와 같았다.
그러나 성리학(性理學)을 즐겨 공부하지 않아 그 방면에 조예가 없었기에 공자와 맹자에 관해 이야기할 때도 공론만 늘어놓았다. 또 마음 씀씀이가 정확하지 못하여 일의 기획이 그다지 합리적이지 못했기 때문에 식자들은 그것을 단점96)으로 여겼다. 뒤에 공민왕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그가 지은 『익재난고(益齋亂藁)』97) 10권이 세상에 전한다. 이제현은 일찍이 『국사(國史)』가 갖춰지지 못한 것을 걱정해 백문보(白文寶)·이달충(李達忠)과 함께 기년(紀年)과 전(傳)·지(志)를 지었다. 이제현이 태조 때부터 숙종까지, 백문보와 이달충은 예종 이하를 편찬하였다. 백문보는 겨우 예종·인종의 두 대를 기초하였고 이달충은 그때까지 착수조차 못했는데, 그 원고마저 남쪽으로 피난할 때 모두 산실되어버렸고, 현재 이제현의 「태조 기년」만 남아 있다. 아들98)은 셋이니 이서종(李瑞種)99)·이달존(李達尊)·이창로(李彰路)100)이었으며 이서종의 아들은 이보림(李寶林)이다.
2019. 12.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