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江寒 第18章
<18-1>
한 시진 가량이 지나자 현령궁(玄灵宫) 문하 모든 사람들은 당몽주에 의해 중독의 경중(轻重)을 판정 받은 뒤, 각자 반 잔 또는 한 잔의 해독약수(解毒药水)를 복용했다.
맥여란(麦如兰)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결국 궁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정함영(程涵英)에게 암산을 받은 셈인가요?"
당몽주(唐梦周)가 고개를 저었다.
"정함영을 따르는 사람들은 중독되지 않았소. 그리고 방금 죽은 중년도인은 정함영의 동조자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현령궁에 충성하는 사람도 아니었소."
맥여란은 안색이 살짝 변했다.
"그 말씀을 들으니 현령궁이 누란지위(累卵之危=쌓아 올린 계란이 언제 깨질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위기)에 처해 있음이 분명하군요. 공자께선 어떻게 그간의 사정을 다 파악하신 거예요?"
당몽주가 미소를 지었다.
"숨겨진 것은 반드시 밖으로 드러나기 마련으로, 사람의 말과 표정을 제대로 살피면 속셈을 알아내기 어렵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요. 그나저나 오늘 밤에 요사스런 무리가 반드시 침입할 것이니, 경계를 더욱 강화하라고 하시오."
두 사람은 계속하여 헤어진 이후의 얘기를 주고받으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저녁이 다가오며 창 밖이 점점 어두워지며 방안에는 붉은 촛불이 높게 타오르자, 맥여란은 정인(情人)을 마주보며 곧 다가올 이별에 말로 다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
갑자기--
처마 앞에서 희미한 발소리가 들렸다.
맥여란이 놀라 금세 안색이 변하자 당몽주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가만히 있어요."
돌연 음산한 냉소가 들려왔다.
"당몽주, 어서 나와서 얘기를 나누자!"
목소리는 낮았지만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당몽주가 낭랑한 웃음소리를 발하며,
"친구가 이곳 현령궁을 무인지경(无人之境)처럼 드나드는 것을 보면 예사로운 인물이 아님을 알 수 있으니, 소생이 당연히 뵙고 가르침을 청해야 마땅하겠소이다."
라고 말하며 표연히 밖으로 걸어 나갔고, 맥여란도 당몽주의 뒤를 바짝 따랐다.
처마 밖 잔디밭에는 아홉 사람이 있었는데, 한 사람이 앞에 서고 나머지 여덟은 뒤에 있었다.
앞에 선 사람은 외눈박이 노인으로, 코가 함몰되고 입술이 말려 올라가 누렇고 검은 판자 같은 이를 드러내고 있었으며, 수염은 하얗고 생김새가 흉악했는데, 진홍색 장삼을 걸치고 왼쪽 어깨에 장검을, 오른쪽 어깨에는 귀지점혈궐(鬼指点穴镢)을 메고 있었다.
뒤에 선 여덟 사람은 모두 회색 적삼 차림에 표정이 얼음처럼 차갑고 눈빛이 날카로워 사람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독목노자(独目老者)는 당몽주가 모습을 나타내자마자 냉소를 터뜨렸다.
"젊은이는 아직 이 늙은이를 친구라고 부를 자격이 없다네!"
당몽주가 하하 웃으며 응수했다.
"당신을 친구라고 불러준 것만도 이미 대단한 일인데, 그럼 어떻게 불러야 할까? 아무튼 이깟 일로 말싸움할 시간은 없으니 어서 원하는 바나 얘기해 보시구려."
독목노자가 침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네가 바로 정함영을 다치게 한 사람이냐?"
"그렇소!"
당몽주가 곧바로 되물었다.
"그대는 정함영과 어떤 관계요?"
"그는 나의 동문이며 또한 수하이기도 하다."
당몽주는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보기에 정함영의 지위가 당신보다 낮더라도 큰 차이는 없어 보이는데, 그대는 정함영보다 무공이 높다고 자신할 수 있소?"
독목노자가 냉소를 터뜨렸다.
"정함영은 잠시 방심하여 너에게 부상을 당했을 뿐, 만약 진정한 무공으로 겨루었다면 누가 이겼을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말을 잠시 멈춘 독목노자가 얼굴에 한 겹의 음산한 기운을 드리우며 거칠은 음성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당몽주, 때를 아는 자가 준걸이라 하였으니, 너희 둘은 얌전히 나를 따라 문주(门主)를 만나러 가자. 그렇지 않으면 현령궁은 멸문(灭门)의 참화를 피하지 못한다."
당몽주가,
"귀문주라면, 자의신룡(紫衣神龙) 탁천기(卓天奇)를 말하는 거요?"
하고는 쉬지 않고 질문을 이어갔다.
"그렇다면 현령궁과 탁천기는 도대체 어떤 관계인지 말해 주겠소?"
독목노자가 놀란 듯 얼굴색이 급변했다.
"아무런 관계가 없다. 다만 현령궁은 '우리를 따르는 자는 창성하고, 거스르는 자는 망할 뿐이다'라는 말을 따를 뿐이다!"
당몽주는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 역시 당신들에게 같은 말을 해 주고 싶소이다."
독목노자가 코웃음을 쳤다.
"큰소리 치는 것도 좋지만, 아쉽게도 한발 늦었음도 깨달아야 하느리라."
"늦었다니 무슨 얘기요?"
독목노자가 대꾸했다.
"현령궁의 위아래 할 것 없이 모두 이미 노부의 통제하에 있단 말이다."
당몽주가 웃으며 말했다.
"기독에 의한 통제는 나도 이미 알고 있소이다."
"그것뿐이 아니다!"
독목노자가 냉소하며 말을 이었다.
"무림 중 패도암기(霸道暗器)로 소문난 자모음뢰(子母阴雷)를 알고 있겠지? 지금 현령궁에는 모두 네 개의 자모음뢰가 설치되어 있어, 내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현령궁은 즉시 가루가 될 것이다."
당몽주는 마음속으로 놀랐지만 내색 않고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당신도 틀렸소. 현령궁은 나와 아무 관계가 없으니 가루가 나든 말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오. 보아하니 당신이 온 이유는 내게서 정함영 일행에 대한 혈채를 받으려는 것 아니었소? 여란(如兰), 일단 뒤편의 여덟 명 졸개들을 없애 버리시오!"
당몽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맥여란의 장검이 이미 검기를 뿌려대며 여덟 명의 회의인(灰衣人)들을 덮쳐갔는데, 검법의 전개가 그야말로 비할 데 없는 쾌검이라 할 수 있었다.
회의인들도 무공은 매우 높았지만, 놀랄 정도로 빠른 맥여란 검세에 손과 발이 어지러워짐을 면할 수 없었지만,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제각기 도(刀), 검(剑), 장(掌)으로 반격에 나섰다.
독목노자는 맥여란이 펼치는 검초가 현령궁의 독문검법이 아님을 깨닫고는 놀라 속으로 중얼거렸다.
'무언가 이상하다...'
그가 멍하니 있는 찰나의 순간 가슴 뒤쪽에 기이한 통증을 느끼며 한 자루의 칼날이 이미 자신의 명문혈(命门穴)에 닿아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도대체 어느 틈에 당몽주가 자신의 등 뒤로 몸을 움직였는지 알 수 없어 그로서는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틈을 타서 암산하다니, 이 늙은이는 결코 심복할 수 없다!"
당몽주가 냉소를 날렸다.
"적을 기만하는 것이 병법의 기본 중 하나란 것을 모르는가!"
독목노자는 기가 막혀 자신도 모르게 피식 하고 웃었지만, 마음속에는 원망과 증오가 가득했다.
그때 차가운 빛이 빠르게 번쩍이는 가운데 한 회의인이 처참한 비명 소리를 내며 허리가 베여 두 동강이 나고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맥여란은 여전히 회의인들이 선기를 잡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있었고, 그녀의 검기는 더욱 거세져 우레 같은 소리를 발하며 산을 무너뜨리고 바다를 뒤집는 기세로 회의인들을 허둥대게 만들고 있었다.
처절한 울부짖음이 연이어 들리며 두 사람이 더 목숨을 잃었다.
나머지 다섯 회의인은 독목노자가 이미 당몽주에게 제압당한 것을 발견하고는 간담이 서늘해져 서로 눈짓을 교환하더니, 전력을 다해 각기 일 초씩 반격하는 척하더니 갑자기 몸을 돌려 도주하기 시작했다.
맥여란이 호통을 쳤다.
"쥐새끼들아, 어딜 도망가느냐!"
그녀는 긴 무지개 빛 검광을 뿌리며 허공을 뚫고 회의인들을 추격하기 시작했고, 뜰에는 독목노자와 당몽주 둘만 남게 되었다.
당몽주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자, 우리 둘뿐인데 이제 어쩔 생각이시오?"
독목노자가 핏기 없는 얼굴로 흉물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네가 이 늙은이를 죽인다 해도 현령궁의 생명들을 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정말 그럴까?"
당몽주가 말했다.
"믿기지 않은데!"
그 순간 독목노자는 눈앞에 인영이 번쩍이더니 한 줄기 기이한 한기가 간맥(肝脉)에서 치밀어 올라와 순식간에 온몸에 퍼지는 것을 느끼며, 자신의 몸이 마치 빙천설지(冰天雪地)에 같힌 것처럼 얼어붙고 이빨이 덜덜 떨리며, 얼굴은 창백해지고 기혈이 응고되어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당몽주가 이미 그의 앞으로 다가와 손을 쓰고 만 뒤였던 것이다.
당몽주가 웃으며,
"잠시 억울해도 참으시오!"
하고 말을 남기더니 바람처럼 사라졌다.
독목노자는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지금 그의 몸이 겪는 고통조차 해결할 방법이 없어, 당몽주의 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두 눈을 부릅뜨고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현령궁(玄灵宫) 뒤편에는 평소 연무장으로 쓰이는 넓은 풀밭이 있다.
차가운 달빛 아래 현령성모(玄灵圣母)가 굳은 표정으로 수십 명의 문인들을 이끌고 우뚝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풀밭 네 귀퉁이에는 각각 회색 옷을 입고 칼을 찬 사람들이 하나씩 서 있었는데, 왼손은 허공에 들고 손가락으로 오리알만한 자모음뢰(子母阴雷)를 꽉 쥐고 있었다.
네 명의 회의인들은 얼음처럼 차가운 얼굴로 현령궁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즉시 자모음뢰를 던질 태세였다.
갑자기--
한 회의인의 얼굴색이 흙빛이 되며 몸을 뒤집고 자빠졌다.
그의 뒤편에서 당몽주가 모습을 나타내더니 다섯 손가락을 신속하게 놀려 자모음뢰를 낚아챘다.
현령성모는 눈에서 일순 희색을 발했지만, 다른 세 회의인들이 즉시 자모음뢰를 던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다시 표정이 굳어버렸다.
하지만 세 회의인들 역시 눈에는 광채가 사라지고 몸을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고, 그들이 이미 당몽주에게 제압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몽주가 빠른 걸음으로 세 회의인들 앞으로 다가가 하나하나 손에 든 자모음뢰를 빼앗았다.
풀밭 반대 편에서 날씬한 신형 하나가 매처럼 빠르게 날아와 내려앉았는데, 다름 아닌 손에 검을 든 맥여란이었다.
그녀가 당몽주에게 말했다.
"그들은 이미 멀리 도망쳐서 더이상 쫓지 않았어요."
당몽주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잘 했소. 나의 원래 의도는 그들이 도망쳐 소식을 전함으로써 자의신룡 탁천기가 경각심을 가지고 경거망동하지 못하게 하려는 데 있었소."
그때 별안간 멀리서 음침한 냉소가 들려왔다.
"어린 놈이 악랄하기가 짝이 없구나! 이 혈채(血债)는 나중에 반드시 청산해야 할 것이다."
당몽주가 안색이 다소 변하며 소리쳤다.
"존가는 누구신지, 어찌하여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시오!"
하지만 밤하늘은 고요하기만 했고 아무 대답도 더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문득 전각 모서리 처마 위에서 한 아리따운 자태의 신형이 날렵한 신법으로 당몽주 앞으로 떨어졌는데, 얼굴을 검은 망사로 가리고 있었지만 당몽주는 그녀가 엄미미(严薇薇)임을 즉시 알아봤고, 무우곡(无忧谷)에 무슨 일이 발생한 게 아닌가 하여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검은 망사를 쓴 엄미미가 말했다.
"방금 그자는 떠났어요. 외눈박이 노인을 데리고요."
당몽주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사람이 누구란 말인가? 당신은 그의 생김새를 잘 보았소?"
엄비비가 대답했다.
"몸에는 자색 도포(紫袍)를 입고 있었고, 오관(五官)이 청수했으며, 나이는 마흔 살쯤 되어 보였어요."
당몽주는 그 말을 듣고 마음속에 의심이 생겼다.
"그라면 왜 싸워 보지도 않고 도망갔을까?"
"현령궁 밖에서 강한 적이 그를 추격하고 있었어요!"
"강한 적이라니, 그건 또 누구지?"
"백의흉사(白衣凶邪)!"
당몽주가 갑자기 낭랑한 목소리로 현령궁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각자 방으로 돌아가 일찍 쉬도록 하시오!"
현령궁 문하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오직 현령성모와 맥여란만 남았는데, 맥여란(麦如兰)은 맑고 투명한 두 눈동자를 엄미미의 전신에 집중한 채 눈도 깜짝이지 않고 서 있었다.
당몽주가 현령성모에게 고개를 돌렸다.
"성모께선 어찌하다가 회의인들의 위협하에 놓이셨습니까?"
현령궁주가 말했다.
"공자께서 모르시는 것이 있는데, 폐궁(敝宫) 안에 탁천기 문하가 적지 않게 잠입해 있으면서도 충성을 의심받지 않게 위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노신(老身)은 여러 해 동안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노신에게 공자의 전언이라면서 공자가 이곳에 제자들을 모아 오늘 밤 예상되는 강적의 습격에 대처할 방비책을 상의하려 한다고 보고해서, 노신은 깊이 믿고 의심하지 않았는데, 독목노자가 자모뇌주(子母雷珠)로 위협하며 복종을 강요할 줄이야......"
당몽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해가 되었으니 성모께서는 일단 돌아가십시오. 제가 잠시 후 찾아 뵙겠습니다."
"노신은 공자의 왕림을 기다리겠습니다."
그녀는 합장 후 몸을 돌려 떠났다.
맥여란이 여전히 엄미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그녀는 누구죠?"
당몽주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엄미미(严薇薇) 낭자로, 그대와 마찬가지로 이성지기(异性知己)요."
엄미미가 검은 망사를 벗으며 환하게 웃어 보이자, 맥여란은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감탄했다.
'인간세상의 절색으로 하늘의 선녀 못지 않다 해도 과언이 아니구나!'
엄미미가 벗은 망사를 내려 놓으며 당몽주에게 말했다.
"무우곡에 변고가 생겼습니다."
당몽주는 가슴이 진탕되었다.
"무슨 변고가 발생했단 말이오?"
엄미미가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하매(霞妹)가 이유 없이 실종됐는데, 흉사(凶邪)에게 납치된 것이 분명합니다. 무우곡 사람들은 모두 위기감을 느끼고 있으며, 부마마(傅嬷嬷)와 부로(符老) 등은 이미 하산하여 흩어진 채 하매의 행방을 찾고 있습니다."
"설마 아무런 단서도 남아 있지 않았단 말이오?"
엄미미가 고개를 저었다.
"찾지 못했어요."
당몽주가 물었다.
"그럼 안홍경(颜鸿庆)은 어찌하고 있소?"
엄미미가 말했다.
"소매(小妹)는 안홍경이 한 짓이라고 의심하여 몇 차례 얘기를 걸어 봤는데, 그도 잘 모르는 것 같더라고요. 안홍경도 지금 곡을 나가 하매의 행방을 찾고 있어요."
당몽주는 굳은 표정으로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윽고 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하매의 실종으로 기존의 계획은 더이상 실행할 수 없게 되었으니 다른 방도를 찾아야겠지만, 지금 내 마음이 혼란스러워 제대로 된 계책을 생각해 내기 어렵구려. 일단 임기응변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며 방법을 찾도록 합시다."
그리고 맥여란에게 한참 동안 귓속말을 했고, 맥여란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럼 저는 바로 가겠습니다."
라고 말한 뒤 엄미미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몸을 날려 빠르게 사라졌다.
당몽주가 엄미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한숨을 토했다.
그러자 엄미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근심은 사람을 상하게 할 수 있으니, 몽 오라버니는 마음을 어지럽히지 마세요."
당몽주가 다시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미매(薇妹), 우리 현령성모님을 뵈러 갑시다."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음을 옮겼다.
현령성모와 맥여란은 누대 위에 지은 한 칸 정실 안에 마주 앉아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갑자기 중년의 도고(道姑)가 들어와 품고했다.
"당 공자와 여성 시주 한 분이 오셨습니다."
현령성모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들어오시라 하게."
당몽주와 엄미미가 들어오자 주인과 손님의 자리로 나눠 앉은 후, 현령성모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두 차례의 위기를 모두 공자의 도움으로 해결할 수 있었으니, 베풀어 주신 은혜와 덕을 어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당몽주가 말했다.
"별로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니니 마음에 두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부탁드릴 일이 있는데 들어주실 수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당몽주는 말하는 도중 무심코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현령성모가 대답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응당 따르겠습니다."
당몽주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자전검(紫电剑)이 귀궁에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제게 잠시 빌려주실 수 있으신지요. 일이 끝나면 즉시 돌려드리겠습니다."
특히 자전검 세 글자를 언급할 때 목소리가 높아졌다.
현령성모는 대경실색했다.
"공자께서는 어떻게 소식을 들으셨는지요? 자전검은 확실히 폐궁에 있습니다만, 저희 소유가 아니라 보관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당몽주가 물었다.
"맡긴 사람이 누구입니까?"
"마운신조(摩云神爪) 손도원(孙道元)!"
당몽주는 맥여란에게 시선을 돌렸다.
"손 노선배께서 언제 검을 가지러 온다고 하셨소?"
맥여란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내일입니다."
당몽주는 눈썹을 찌푸린 채 중얼거렸다.
"결국 그 노인네와 얘기해 봐야 한단 말인가?"
이어서 정색을 하고 말을 이었다.
"소생은 그와 일면식이 있으니 이렇게 된 이상 손 노선배와 상의해서 빌려야겠군요. 성모께 일단 여쭙는데, 자전검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현령성모가 대답했다.
"현무전(玄武殿)에 보관되어 있고, 전내에는 금제(禁制)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손 노선배의 요청으로 그가 자전검을 되찾아 가기 전에는, 우리는 절대 현무전에 들어가지 않을 거라고 약속했습니다."
당몽주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며 말했다.
"저는 이만 물러갈까 합니다!"
현령성모는 일어나 정실 밖까지 배웅하였고, 엄, 맥 두 여인은 객사(宾舍)로 향하는 당몽주의 뒤를 따랐다.
당몽주가 머물 객사는 넓고 고아했고, 객사 앞 정원은 나뭇잎 그림자가 부드러운 밤바람에 어른거리는 가운데 은은한 향기가 가득했고 정경은 맑고 그윽했다.
갑자기 두 줄기 유령 같은 신형이 뜰 안으로 떨어지더니 즉시 꽃나무 숲에 몸을 숨겼다.
뜨거운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났을 무렵, 꽃나무 숲 사이로 한 줄기 그림자가 빠르게 모습을 나타내더니 마치 옅은 연기가 어른거리는 듯 창문 밖으로 다가갔다.
창틈 사이로 보이는 방안에는 두 여인이 마주 앉아 바둑을 두고 있고 책상 위에는 은홍색의 뜨거운 찻주전자가 놓여 있었다.
주위는 물처럼 고요했고 간혹 바둑알 떨어지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여전히 검은 망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엄미미(严薇薇)가 웃으며 말했다.
"내실의 당 공자께서는 지금쯤 깊이 잠들어 계실 테니, 우리 둘이 날이 밝을 때까지 곁에서 지켜야 합니다. 밤중에 바깥에 무슨 동정이라도 있으면 즉시 대처해 공자에게 화가 미치지 않게 하자고요."
맥여란(麦如兰)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자의신룡 탁천기 문하들이 간담이 서늘해져 도주했으니, 별다른 필승의 확신이 없다면 오늘 밤에는 감히 습격해 오지 못할 것이에요."
엄미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는 말이지만 그래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네요."
하며 손을 뻗어 바둑알을 놓았다.
훔쳐보던 왜소한 인영은 몸을 돌려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가더니 동료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속삭였다.
"당가 놈은 이미 내실에서 깊이 잠들어 있으니, 우리가 현무전(玄武殿)으로 잠입하기에 절호의 기회요."
다른 한 사람이 음침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오늘 밤 자전검(紫电剑)을 훔치려는 사람이 우리 외에도 여럿 있을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하오."
"그건 나도 알지만, 군사를 움직임에 있어서 신속함이 생명이라 했고, 우리가 먼저 자전검을 손에 넣으면 더이상 두려워할 게 어디 있겠소? 하물며 다른 자들은 자세한 내막을 모르고, 우리만 엿들어 알고 있으니 그야말로 절호의 기회요."
"맞소, 서두릅시다!"
두 인영은 유령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방안에서 맥여란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내실로 뛰어들었다.
그녀는 당몽주가 이미 마운신조(摩云神爪) 손도원(孙道元)의 모습으로 역용한 것을 보고는 예쁘게 웃으며 벽에 있는 숨겨진 단추를 누르자 벽에서 문이 나타났다.
"천첩이 말씀드린 대로 이 통로를 이용해 현무전으로 가세요. 어서 빨리 다녀오세요!"
당몽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소."
라고 말한 뒤 몸을 돌려 통로 안으로 들어갔다.
맥여란이 내실을 나와 엄미미에게 눈짓을 하자 엄미미가 촛불을 껐고, 방안은 즉시 캄캄한 어둠에 잠겨 손을 뻗으면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18-1 마침)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