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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한 인내(2)
2006년 12월 17일 / 대예배 / 누가복음 22:47-51
▶ 신약성경은 인내에 대한 단어들이 나옵니다. ‘길이 참으라, 기다리라, 오래 참음, 견딤, 용납’ 등은 인내의 사상이나 인내의 뜻을 지닌 단어들입니다.
헬라어 ‘후포메노’는 ‘ - 밑에’라는 뜻의 ‘후포’와 ‘거한다’는 뜻의 ‘메노’와 합쳐져서 ‘인내’라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종합해보면 성경에서 ‘인내’라고 말할 때에 좌절이나 압력, 알력, 스트레스, 압박감등을 견디면서 조용히 기다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인내의 의미입니다.
■ 초대교회 당시였습니다. 어떤 어머니와 그녀의 어린 아들이 기독교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로마의 원형극장에 던져졌습니다. 잠시 뒤에 사자 굴의 문이 열렸습니다. 굶주린 사자들은 으르렁거리면서 달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어린 아들은 무섭게 달려드는 사자를 보고서 어머니의 품에 꼭 안기면서 울부짖었습니다. “엄마! 무서워요!” 어머니는 아들의 몸을 꼭 안아 주면서 조용히 위로해 주었습니다. “얘야! 눈을 꼭 감고 조금만 참아라. 그러면 곧 눈앞이 환하게 밝아 올 것이란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핍박을 받아 감옥에 끌려가면서도, 또 매를 맞으면서도, 심지어는 사자굴 속으로 던져지면서도 기뻐하고 또 기뻐했습니다. 저들의 마음속에 천국에 대한 소망이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던 네로 황제는, 기독교인들을 무참히 죽이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째서... 저들은 죽어가면서도 찬송을 부르고, 입가에 미소를 띠고 웃어가면서 죽느냐?’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었던 네로 황제로서는, 도저히 그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만약,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당신은 어째서 이렇게 심한 고통을 당하고, 고난을 겪으면서도, 항상 웃으면서 살 수 있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이에 대한 분명한 답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성도는,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고난조차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고난을 이긴 자는, 그 고난이 고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고난과는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커다란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현대는 물질문명이 극도로 발달되어 있습니다.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땅의 삶에만 너무 치중하고 있지 않나 우려됩니다. 이 세상에 대한 집착 때문에 우리의 복된 영적 시야가 가리어져서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이 식어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누가 인생을 길가는 나그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은 잠시 거쳐 가는 곳이요, 우리에게는 영원한 본향이 있습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는 주를 인하여 당하는 핍박과 환난이 있더라도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해 주신 영원한 하늘나라가 있음을 생각하고 하늘나라의 복된 소망 중에 인내합시다.
■ 외국의 잡지에 이런 실화가 있었습니다. 전쟁에 나갔던 약혼자를 잃은 여인이 전사 통지서를 쥐고 비오는 날 저녁 동리 강에 있는 큰 다리를 실의 속에 거닐게 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끝내 약혼자를 잃은 슬픔을 극복하지 못하고 투신자살을 결심하고 막 다리에서 뛰어 내리려는 순간 한 중년남자가 나타나 팔을 급히 잡더니 “여기는 추우니 우리 다리 지키는 조그만 사무실에 가서 이야기 합시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이 난로가 있는 그 사무실로 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며 통곡하는데 그 사람이 아무 말하지 않고 두 손을 잡더니 “하나님, 이 여인에게 실의를 딛고 일어설 평화와 소망과 용기를 주옵소서.”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이 여인은 말할 수 없는 평화와 삶의 소망과 의욕을 느꼈습니다. 조금 후 이 사람이 인자하게 웃으며 “하나님께서는 자매님을 사랑하십니다. 이 사랑을 깨닫고 새 출발하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집에 돌아온 여인은 자기에게 삶의 용기를 준 그 다리지기가 너무 고마워 인사하러 그 곳에 갔더니 사무실도 그 사람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여인은 비로소 그 다리지기가 하나님께서 보낸 천사였다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새 출발했다고 합니다. 누구든지 복된 소망 되신 예수님을 바라며 살아 갈 때 복된 인생을 살며 주님 오실 때 영광의 자리에 함께 할 줄로 믿습니다.
■ 어느 집사님의 간증입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저녁에 연탄을 피워놓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밤중에 너무 추워 부엌에 나가보았더니 그토록 잘 피던 연탄이 없어졌습니다. 그 다음 날도 또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는 분명히 세를 든 사람의 소행이라 생각했지만 교회 다니는 집사가 싸울 수도 없고 하여 참고는 다음날 저녁에 잠을 자는 척 하고 나가보니 건넌방 부인이 연탄을 살짝 빼내 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뛰어나가 잡을 까도 했으나 큰 싸움이 벌어질 것 같아 간신히 자신을 진정하여 참았습니다. 이런 일이 두 주일간이나 계속되었는데 어느 날 부인이 찾아와 “제가 연탄을 가져간 줄 알고 계셨죠?” 하면서 사실은 남편이 사업에 실패하여 점쟁이한테 물었더니 누구와 실컷 싸우면 액운이 물러가고 행운이 온다고 하여 싸움을 하려고 연탄을 고의로 빼내 갔습니다. 그런데도 도저히 싸움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이제 이해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집사님은 그녀에게 점쟁이의 잘못됨을 깨우쳐 주고 전도하여 그 가정을 구원시켰다고 합니다.
◆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이마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떨어지도록 간절히 기도하신 후 동산에서 내려오고 계셨습니다. 그때 대제사장의 하속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검과 몽치를 들고 왔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 볼에 키스하면서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유다야! 네가 내 볼에 키스하므로 나를 파느냐? 빨리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무리들이 달려들어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할 때에 베드로가 예수님의 잡히심에 분노해서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칼로 쳐서 떨어뜨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귀를 만져 낫게 하시고 “칼을 집에 꽂으라. 칼을 든 자는 칼로 망한다.”라고 교훈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이것까지 참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까지 참으라.’는 말은 ‘그들의 행동을 그냥 내버려두어 하게 하라.’ 그런 뜻입니다.
히 12:2-3 /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예수님을 ‘참으신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참고 사셨습니다. 참고 죽으셨습니다. 그는 참으심으로 일생을 일관되게 나아갔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볼 때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 마음속에 느껴지는 감동은 예수님의 인내입니다.
‘너희들이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라는 말은 ‘너희들이 세상 살기 힘들어 낙심될 때 하나님 바라보라.’ 다시 말하면 ‘가난할 때 하나님을 바라보면 참을 수 있다. 억울한 일을 당할 때 하나님을 바라보면 참을 수 있다. 원수를 만났을 때 예수님을 바라보면 참음으로 이길 수 있다. 실패하고, 낙심하고, 답답한 일을 당해도 하나님을 바라보면 능히 참을 수 있다.’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인내를 통하여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영광의 인내
예수님은 참으셨습니다. 왜 참았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참았습니다. 마태복음의 기록은 “내가 열두 영도 더 되는 천사를 보내어 능히 이런 것을 막을 수 없는 줄 아느냐 내가 얼마든지 이런 것을 제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하지 아니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을 어떻게 이루겠느냐?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참아야 한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위기에 직면할 때 무슨 생각을 먼저 하셨을까요? ‘내가 살아야 한다.’는 생각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을 먼저 했습니다. 그래서 ‘가만 두어라. 죽고 사는 것이 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된다.’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만날 때 나를 먼저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 이 생각을 먼저 해야 됩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시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환난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고백이었습니다. ‘내가 저들에게 잡혀야 되느냐? 살아야 되느냐?’ 그 생각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인류를 향한 구원 계획이 무엇이냐?’ 이런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을 보신 것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참을 때 안 참는 것보다는 참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나 참는 목적이 분명해야 됩니다. 그 목적이 언제나 하나님을 향하여 또는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만일 너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이룰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일을 어떻게 실천할까 고민하면서 그분을 생활의 중심에 모시고 살면 그분은 너희에게 이 모든 것을 더불어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너희의 내일 일도 돌보아주실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의 것으로 족하다.)에 있어야 합니다.
벧전 2:19-20 /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우리는 어떤 때 애매하게 고난당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때도 하나님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선을 행하고도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참는 목적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으리이다.’ 슬픔이나 고난도 하나님을 생각하고 참는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됩니다. 내 잘못으로 인하여 고난을 받는다면 그 고난을 통하여 죄를 멀리하게 되며 보다 성숙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전 생애는 하나님의 말씀을 응하고 있습니다. 참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 어떤 때 우리는 참기 어려운 때가 있습니다. 그때 참기만 하면 병이 됩니다. 참는 목적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극복해야 합니다.
■ 한 자매님이 목사님에게 친구를 데리고 왔는데, 시어머니가 얼마나 학대하는지 얼굴에 기미가 끼고 체중이 줄었습니다. “목사님, 이 자매를 살려야 되겠습니다.” 그 자매에게 ‘예수를 믿으라’ 권면하면서 “자매여, 시어머니를 생각하고 참다가 이 상처가 독이 되면 죽습니다. 자식도 있으니 살아야 하는데, 사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 믿고 이 고난을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기회로 삼으면 됩니다.”, “어떻게 은혜를 받습니까?”,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시어머니의 학대를 ‘주 안에서 네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말씀으로 받으면 그것이 독이 되거나, 상처가 되거나, 억울함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여전히 악과 부조리가 있고 납득할 수 없는 애매한 고난이 우리 인생행로에 무자비하게 휘몰아쳐 올 때가 많습니다. 그때 우리는 잠잠히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인내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됩니다. 인내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됩니다. 고난을 참는다고 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반드시 말씀에 근거하고 있어야 합니다.
약 1:12 / 유혹을 당할 때 거기에 빠지지 않고 이겨낸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상으로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옳다 인정을 받는다’ 누가 참는 자에게 옳다고 하십니까? 물론 잘 참았다고 옆에 있는 사람이 “옳다, 잘 했다.”고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옳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옳다고 인정을 받을 때 그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로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사랑의 인내
예수님의 참으심은 곧 사랑의 실천이요, 예수님의 참으심을 통해서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은 예수님의 인격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수치와 고난을 참을 수 있었던 것은 죄인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예수님을 닮습니다. 닮는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미워하면 나쁜 것을 닮아서 나쁜 사람이 됩니다. 사랑하면 닮습니다. 반면 사랑하면 좋은 것을 닮아서 좋은 사람이 됩니다. 사랑하면 예수님을 닮게 됩니다. 인내하는 삶의 표본은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따르므로 예수님의 인격을 닮게 됩니다.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죄인들이 예수님을 거역하고, 학대하고, 미워하고, 괴롭혔는데도 참으신 사랑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例 : 길 잃은 한 마리의 양) 예수님은 죄인을 참으셨습니다. 악한 자를 참으셨습니다. 거역한 자를 참으시고 원수를 참으셨습니다. 불의하고 악한 자들이 예수님을 욕하고, 침 뱉고, 조롱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런 죄인들까지도 참아주셨습니다. 참아주실 때 의인으로서 죄인을 참으셨습니다. 선하신 분으로서 악한 자를 참으셨습니다.
▶ 이 세상은 약한 자가 참습니다. 지금까지 한국 관례를 보면 약한 자가 참습니다. 아내가 남편을 참습니다.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참습니다. 아이들이 어른을 참습니다. 학교 가면 선생님은 때리고 아이는 참습니다. 군대 가면 상관은 때리고 졸병은 맞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강하신 분이 약한 자들의 학대를 참고 있습니다. 성난 파도를 잠잠케 하신 권능의 주님께서 악한 자의 학대를 참고 있습니다. 약한 자가 참는 것은 비굴한 것입니다. 그러나 강한 자가 참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것입니다. 성도들은 시어머니에게서 학대받을 때 ‘내가 며느리이기 때문에 참아야 한다.’ 그게 아닙니다. ‘내가 예수님을 닮아서 큰 사람이기 때문에 사랑으로 참아야지!’ 그래야 스트레스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 동작동에 까다로운 목사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장로님 한 분이 어찌나 덕스러운지 수많은 사람들이 존경했습니다. 한번은 물었습니다. “장로님, 어떻게 그렇게 괴팍한 목사님을 잘 받들고 사십니까?”, “좋은 목사 받드는 거야 누가 못하겠소! 그런 분 받들어야 재미가 있지.”, “무슨 재미가 있어요?”, “예수님의 마음을 닮지 않습니까!”, “장로님은 성자입니다.”
크리소스톰이라는 유명한 교부가 남긴 말이 있습니다. “남에게 욕을 당하거나 손해를 본 사람이 보복할 힘이 있으면서도 보복하지 않는 것은 하늘이 준 사랑의 힘으로 참는 것이다.” 참아야 합니다. 참는 것은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 우리가 참는다고 할 때 3가지가 있습니다. 환난과 역경을 견디는 것이 있고, 악한 자를 참는 것이 있고, 미래에 대한 기다림이 있습니다.
참는 것은 인간관계가 앞서 있습니다. 환난에 대한 얘기가 아니고 원수를 끝까지 용서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학대하고 미워하는 자를 끝까지 사랑으로 용납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고생을 참는 것,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고 기다리는 것은 어느 정도 참아낼 수 있지만 인간관계에서 수치를 당한다든지, 모욕을 당한다든지,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이것을 참는 것은 엄청난 것입니다. 환난을 참는 것은 끈기입니다. 그러나 인간관계에서 참는 것은 예수님의 인격을 닮는 것입니다.
■ 에브라함 링컨을 온갖 나쁜 말로 비난하고 무시했던 스텐톤이라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링컨은 그를 끝까지 참았습니다. 나중에는 그를 국방장관에 채용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악한 자를 절대로 가까이 두면 안 된다고 만류했습니다. 그래도 그는 스텐톤을 장관으로 채용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링컨이 암살당했습니다. 스텐톤은 관 곁에서 울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찍이 보지 못했던 세계 역사에 가장 위대한 통치자가 여기 누워있다.” 사랑으로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을 이긴 것입니다. 에브라함 링컨의 위대함은 참는데 있었습니다. 그는 얼마나 수모를 많이 겪었는지 모릅니다. 집권하는 기간 동안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습니다. 그의 전기를 읽어보면 노무현 대통령이 당한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링컨과 같은 인물이 되려면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꾸 인간의 생각과 혈기로 대처하지 말고 말입니다.
▶ 이런 글이 있습니다.
나무는 한번 자리를 정하면 절대로 움직이지 않아 / 차라리 말라 죽을지라도 말이야 / 나도 그런 나무가 되고 싶다. / 나무는 사시사철 변한다. / 철따라 옷을 갈아입는다. / 힘없이 바람에 흔들리고 눈비에 시달린다. / 그러나 결코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 나무 같은 사람 나무 같은 사랑이 그립다.
산에 가면 두 종류의 나무가 있습니다. 활엽수(闊葉樹)수가 있고 상록수(常綠樹)가 있습니다. 상록수는 춘풍추우 비바람이 불고 백설이 휘몰아쳐도 든든히 푸른 상록을 유지합니다. 활엽수는 봄이 오면 잎이 피고 여름이 오면 잎이 무성하다가 가을이 오면 시들기 시작해서 찬바람 불면 우수수 다 떨어집니다. 그래서 활엽수에게는 재목감이 없습니다. 수백 년 뿌리를 내리고 자란 상록수들이 결국 재목감이요 역사의 자랑거리입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세 가지를 후회한다고 합니다.
첫째는 ‘좀 더 즐겁게 살 것을’ 하고 후회한답니다. 많은 사람들이 웃고 즐겁게 살아도 될 것을 짜증내고 불평하다가 세월을 허송합니다. 기왕에 주어진 생 즐겁게 살 것을 제 아내에게 한번 웃어주지 못하는 남편, 기왕에 일하는 것 웃으면서 일하지 못하고 짜증내는 사람, 자식을 보고도 한번 웃어주지 못하는 아버지는 참으로 불쌍합니다.
둘째는 ‘좀 더 베풀며 살 것을’ 하고 후회한답니다. 어차피 없어질 물질 남에게 인심이나 쓰면서 살면 얼마나 좋습니까? 다 사라진 다음에야 후히 쓰고 나누며 살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합니다. 살아있는 동안에 후히 쓰고 살 수 있는 사람이 복 받은 사람입니다. 쥐고 살아도 나중에 죽을 때는 제 것이 아닙니다.
세 번째는 ‘좀 더 참고 살 것을’ 하고 후회한답니다. 순간을 참지 못하여 일생 가슴을 치며 후회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교부 터툴리안은 “참는 것은 여자를 아름답게 하고, 남자를 가치 있게 만든다. 소년의 인내는 사랑을 받고, 청년의 인내는 칭찬을 받고, 노년의 인내는 존경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살림의 인내
참는 것은 나도 살고 남도 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즐거움이 뭡니까? 부활의 영광을 위해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주님은 참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참음으로 내 인격이 살고 내 생명도 살 뿐만 아니라, 가정이 살고, 나라가 삽니다.
어느 날 장자가 공자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 몸을 닦는 요점을 한마디로 말씀해 주십시오.”, “백 가지 모든 행동에 참는 것이 제일이다. 왕이 참으면 국가가 편할 것이요, 제후가 참으면 지경이 넓을 것이며, 관리가 참으면 지위가 높아질 것이요, 형제간에 참으면 그 집이 부귀를 누릴 것이요, 부부가 참으면 일생 해로할 것이요, 친구가 참으면 우정을 유지할 것이요, 자신이 참으면 후회가 없을 것이다”
오늘날 가정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1년에 18만 쌍이 결혼하면 9만 쌍이 이혼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참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참지 못해서 가정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옛날 우리 어머니들은 참고 살았습니다. 남편이 별 볼 일 없어도 참고 살았습니다. 참고 살았기에 오늘의 이 나라, 이 역사를 이어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이들이 참는 것은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 때문이요, 주님께 받는 상급 때문입니다. (눅 21:19)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히 10: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성도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마 10:22)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카네기는 “승부내기는 인내의 두 글자가 제일이다. 조급하면 눈이 흐려지고 화를 내면 눈이 보이지 않는다. 참고 기다리는 중에 기회가 온다. 인내는 믿음의 보호자, 화평의 유지자, 사랑의 육성자, 겸손을 가르치는 교사, 승리의 저력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말을 참음으로 상대의 인격을 살려내야 합니다. 마음을 참음으로 내게서 예수님의 인격을 살려내야 합니다. 행동을 참음으로 역사 속에서 사회를 건설해가야 됩니다. 참는 사람이 있는 곳에 반드시 살아나는 역사가 있습니다.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됩니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가정이 상처가 나고 파탄 납니다. 그러나 말을 참으면 교회가 살아나고, 가정이 살아납니다.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참는 인내를 통해서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참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말씀을 이루어 놓아야 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야 되며, 나를 살려내고, 이웃을 살려내고, 사회와 가정을 살려내야 됩니다. 참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지녀야 됩니다.
(갈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성령께서 내 안에서 역사하시면 오래 참을 수 있습니다. 오래 참음은 그리스도의 성품을 내 안에 이루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참는 것은 힘듭니다. 그러나 기도하면 됩니다. 베드로도 성급한 사람이요, 요한도 성급한 사람이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이후에 오래 참는 위대한 인물로 변화되었습니다. 못 참는다고 낙심할 것 없습니다. 기도하십시오. 성령께서 능력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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