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교회가 믿는 것, 그래서 우리가 하는 것! / 누가복음 12장 8-9절
8.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9.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 지난 변화산 때의 일입니다. 어떤 권사님이 감격스럽게 처음으로 남편이 변화산을 완주했다고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감격의 이유는 이렇습니다. 그렇게 술을 좋아하는 남편이 변화산을 완주했다는 것입니다. 변화산에 오르기로 결심한 남편은 그렇게 좋아하는 술을 저녁에 먹지 않았답니다. 혹시라도 새벽에 일어나지 못할까봐 염려해서. 그래서 남편이 생각한 것이, 변화산에 오르는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낮술’을 먹기로 했답니다. 같이 일하는 직원들까지 데리고 말입니다. 이런 질문을 던져 보겠습니다. 이런 남편의 모습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셨을까요? 이런 대답이 가능하겠죠. 첫째, 어떻게 변화산에 오르는 사람이 술을 먹으면서 새벽에 교회에 올 수 있냐고 말이죠. 너무나 경건하지 못한 모습이니 말입니다. 둘째, 술을 먹으면서도 변화산에 오르는 것이 얼마나 대견합니까? 게다가 앞으로 행하실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한다면 말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옳고 그름이라는 것이 이렇게 불완전한 것 같습니다. 어떤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그렇게 달라질 수 있으니 말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전을 찾아 나오는 사람의 영혼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실 지를 생각해보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늘 그러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은 흠 없는 사람을 찾아가 부르신 분이 아니라, 앞으로 변화될 영혼들을 부르셨으니 말입니다.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던 때도 그렇게 온전한 모습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면 변화된 인생인데, 우리는 옛적 일을 잊어버리고 살 때가 참 많다는 생각을 합니다. 오늘은 우리가 믿는 개인적인 신앙의 고백과 더불어 신앙생활을 하는 만나교회 공동체가 믿어야 하는 것에 대한 신앙적 합의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늘 하는 이야기이지만 교리는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 진리를 찾아가는 하나의 방법에 동의하는, 암묵적 혹은 명시적 ‘합의’와 같은 것입니다.
- 2 - C. S. 루이스는 그의 책 『순전한 기독교』에서 신학 혹은 교리의 필요성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경험적 신앙이 중요합니다. 체험이 교리를 만나면 그 교리라는 것이 어떤 면에서 현학적이면서 실제적이지 못한 것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신학이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대서양을 직접 보는 것은 ‘신앙적 체험’, 그 대서양을 지도로 그려 놓은 것을 ‘신학’이라고 생각할 때) (p. 240-241) “첫째는, 그 지도가 수백 수천 명의 사람들이 진짜 대서양을 향해하면서 발견한 것을 토대로 두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그 지도의 이면에는 해변에서 바다를 본 당신의 경험 못지않게 생생한 경험의 덩어리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또한 당신의 경험은 바다를 고작 한 번 흘낏 본 것이 전부지만, 지도는 서로 다른 경험들이 한데 모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둘째로, 여러분이 어딘가 가고자 할 때는 지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해변을 거니는 데 만족한다면 지도를 보느니 해변에서 직접 바다를 보는 편이 훨씬 재미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 가고 싶다면 해변을 거니는 것보다는 지도를 보는 편이 훨씬 유용할 것입니다. 신학은 지도와 같습니다. 단순히 기독교 교리를 배우고 거기에 대해 생각하는 데서만 멈춘다면, 그 장교의 사막 경험보다 생생하지도 않고 흥미롭지도 못할 것입니다. 교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일종의 지도일 뿐입니다.” 내가 믿는 개인적 체험은 무엇이고, 우리가 믿는 신학적 교리는 무엇인가요? 교회는 개인적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공동체적 고백을 가지고 모일 때, 주어진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리고 우리가 믿는 그 주님을 어떻게 시인하느냐는 것이죠. 먼저는 믿는 바를 분명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한 바를 분명하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지난 2천 년의 기독교 역사 가운데 ‘사도신경’이 있어 교회의 공동체성을 확인했고, 교회를 허는 이단들로부터 교회를 보호해 왔습니다. 우리 교회는 그러한 신앙의 고백 위에 ‘만나교회 사명 선언문’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예배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훈련된 제자가 되어 성령의 능력으로 지역과 세상을 섬긴다.” 우리가 만나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경험하는 모든 것들은 이러한 신앙의 고백과 사명 선언문에 기초해서 이루어지는 것들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신앙의 고백과 사명의 기초를 세우는 이유는 ‘우리가 믿는 바’를 분명히 시인하고 ‘우리가 믿는 것’을 행하기 위함입니다. 사실은 이 기본 진리를 함께 고백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정통성’과 ‘이단성’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얼마 전입니다. 우리 교회 부목사님 중 한 분이 어떤 교회에 담임 목사로 청빙 받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청빙위원회와 교회 임원회를 통해 결정된 상태에서 마지막 교인들 투표를 남겨두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모든 절차를 마친 상태에서 형식적인 단계를 남겨 놓았다고 생각했는데, 우리 교회 부목사님이 오는 것을 반대하는 어떤 분이 만나교회에 대한 비방을 적은 문서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대충 생각나는 것이 이런 내용이었죠.
- 3 - 만나교회에는 흡연실이 있는데, 이 사람이 오면 흡연실을 만들지도 모른다. 만나교회 김병삼 목사가 동성연애자들을 사랑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아마도 동성연애를 찬성하는 사람인 것 같다. 만나교회는 토요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아마도 이단인 제칠일안식교인 것 같다. 만나교회 김병삼 목사는 아버지의 목회를 이어서 세습했는데 잘못된 것 같다. . .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는데 ‘호 好 ’, ‘불호 不好 ’는 있을 수 있지만, 우리는 그것이 진리인지 아닌지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교회의 스타일과 신앙 방식이 누군가와 다를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고 이단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저는 ‘교리’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 교회를 이단으로부터 지켜내는 것, 다른 하나는 이 땅의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다면 우리와 다름에도 불구하고 형제자매임을 고백하며 서로 돌보고 사랑해야 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이죠. ‘우리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해야 우리의 정체성이 분명해 집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믿는 것이 분명한 신앙적 기초에 서있을 때, 우리는 배타성이 아닌 동질성을 가진 형제자매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우리가 사명을 이루는 방식이 달라도 동일한 신앙고백을 하는 교회들에 대하여 형제자매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것에 대한 대답인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가 교회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고백을 하나님께서 듣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누가복음 12장 8-9절 말씀을 보세요. 8.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9.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 신기하죠? 신앙생활을 하면서 충실하게 헌신하는 사람들이 주님과 멀어지고 주님을 부인할 수 있다는 것이 말입니다. 더 무서운 사실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그리스도인들로 인해, 하나님을 떠나간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2022년 8월, 사귐과섬김의 코디 연구소와 국민일보가 의뢰해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현재 교회의 부정적인 모습이 나타나는 이유’에 대해서 물었을 때, 대부분의 연령대에서 60% 이상이 ‘교회의 부정적인 모습’ 때문이라고 답을 했습니다. 또, ‘이러한 교회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개선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모든 연령대에서 60% 중후반대 이상이 ‘가능하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실추된 ‘교회의 이미지를 회복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하여는 50~60%가 ‘신앙생활의 본질 회복’이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 4 - 가장 중요한 질문 중의 하나는 ‘기독교가 세상 속에서 하는 활동 중 어느 것이 가장 기독교의 이미지에 부합한가?’라는 질문에 대하여는, 단연 ‘윤리 회복과 실천’이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선에 갇힌 인간, 선 밖의 예수』라는 책에 나오는, 여론조사 전문가 조지 바나가 조사했던 결과와도 유사합니다. 그는 이런 저런 이유로 교회를 떠나갔던 사람들을 ‘혁명가’라고 불렀습니다. “혁명가들에 관한 흔한 오해 중 하나는 그들이 교회를 떠났다고 해서 하나님도 떠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조사한 바로, 교회를 떠나면서 하나님과 완전히 멀어진 사람들도 있지만, 오히려 하나님을 ‘더 많이’ 원하지만 교회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어서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그들은 더 건강한 신앙 경험들을 짜깁기해서 진지한 신앙을 추구하기로 결심했다.”(p.76) 조지 바나의 분석에 의하면 교회를 떠나간 사람들이 ‘반항’보다는 ‘좌절감’으로 그랬다는 것입니다. 최소한 이들은 교회 공동체에 적응하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한 이들이라는 말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교회를 떠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 진정으로 알고 싶어서, 진정한 하나님을 경험하기 위해서 교회를 떠났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어떻게 진정성 있게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느냐는 것, 그리고 그러한 모습을 통해 교회와 연을 끊으려는 크리스천들과 아직 세상에 속한 사람들을 교회 공동체로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만나교회 창립 41주년을 맞이하는 날이요, 기념하는 예배를 드리는 날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창립기념일마다 ‘교회의 본질’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어 왔습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고, 교회의 담장을 넘고, 모이는 것이 아니라 흩어지는 교회, 그리고 깍두기 같은 교회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이 세상 속에서 교회가 회복해야 할 모습 가운데 하나로 ‘돈’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돈이야말로 그것을 가진 사람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는 도구이니 말입니다. 누가복음 12장 15-2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돈’에 대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15.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16.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 5 - 성경을 유심히 보면 참 물질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그 이야기는 우리 삶에서 ‘물질’이 차지하는 영향력이 그렇게 크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필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에서 때론 ‘악함’과 ‘죄’와 연관 짓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쩌면 ‘사랑’과 ‘사용’을 구분하지 못하는데서 기인하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는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나와 ‘유산’에 대하여 질문한 것에 대한 대답입니다. 오늘 읽지는 않았지만 누가복음 12장 13절에 보니, 13.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문맥으로 보아하니, 어떤 사람의 형이 아버지의 유산을 독차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억울하다는 생각에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말입니다. 가만히 보세요. ‘유산’이 악한 것은 아닌데, 그 유산을 독차지한 형 때문에 유산이 이 가정에 분란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아니, 조금 더 생각의 폭을 넓혀 본다면, 꼭 형이 불의했다고 하기 보다는 동생이 생각하는 감정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유산을 가지고 다툼을 하는 이유가 ‘공평하지 않다’는 생각에 기인한다는 것이죠. 오늘 본문 누가복음 12장 15절 말씀이 흥미롭습니다. 15.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예수님께서 답을 하시는데, ‘유산을 물리쳐라’ 하지 않으시고 ‘탐심을 물리쳐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답을 이야기한다면, 그 아버지가 남겨준 유산의 문제가 아니라, 그 유산을 가지고 탐심을 버리지 못하는 형제들의 문제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에 아주 중요한 포인트는 탐심을 물리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탐심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는 것이죠. 생명은 소유보다 더 귀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자신이 소유한 것을 사랑할 것이 아니라 그 소유를 사용하는 방법을 잘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하는 말씀이 무엇일까요? 물질이 우리 인생에서 복된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질이 우리 인생에 꼭 필요한 것이라면 그것을 잘 사용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잘 사용하기 위해서는 ‘탐심’을 물리쳐야 한다는 것이죠.
- 6 - 본문의 내용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어떤 부자가 있습니다. 농사에 큰 성공을 거두면서 갑부가 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많은 소출을 얻었는지, 그것을 두기에는 현재 창고가 부족해서 더 큰 창고를 짓고 흡족한 마음으로 자신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누가복음 12장 19절 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크게 잘못된 것이 없어 보이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부자를 가리켜 ‘어리석은 자’라고 규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2장 20절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 부자를 보시며 ‘어리석다’고 말씀하신 이유를 찾는 것입니다. 말씀에 근거할 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 부자가 ‘생명의 유한성’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생명을 거두어 가시는 순간 우리가 쌓아놓은 부귀영화는 아무 쓸모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7장 31절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31.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물질에 대한 성경적 메시지는 ‘청지기 정신’입니다. 청지기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재능과 물질과 시간을 주셨고, 이것을 받은 사람들은 잘 관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청지기란, 하나님께서 잠시 자신에게 맡겨주신 동안 ‘주인의식’을 가지고 사용하고 관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물질을 소유하는 것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소유가 탐심으로 인한 것이 아닌지를 경계하는 것입니다. 사실 한국 사회의 복지 분야 활동에서 60%이상의 돈은 교회 혹은 교회 관련 단체들이라는 통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죽음과 관계된 ‘유산 기부’는 이직 풀지 못한 숙제입니다. 사실 유산 기부란, 죽어서 어떻게 재산을 쓸 것이냐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회로 주신 ‘삶의 시간’동안 주어진 물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진정한 청지기 정신이란,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허락하신 재능과 물질을 살아서 잘 활용하는 것입니다.
- 7 - 넘어야 할 산 그러나 이러한 신앙적 성찰에도 불구하고 실제 유산을 기부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잘 알려진 사건입니다. 2002년 180억 상당의 회사 주식 90%와 현금 15억 원을 기부했던 ‘수원교차로’ 창업주 고 황필상 씨가 남긴 말입니다. “대한민국이 싫습니다. 호주나 영국에서 태어나지 못해 훈장은커녕 고액 체납자란 오명만 쓰고 있습니다.” 아주대는 황필상 씨가 기부한 돈으로 2003년 구원장학재단을 설립해 학생 수백 명에게 장학금을 전달했습니다. 그런데 2008년 황 씨에게 돌아온 것은 140억 원이 넘는 증여세였습니다. 이유는 부자들의 편법상속을 막기 위해 제정한 상속세 및 증여세법 48조 조항이었습니다. 이 법령의 근거는 장학재단과 같은 공익법인이 출연자와 특수 관계에 있는 기업의 의결권 있는 주식을 5%이상 보유하면 초과분에 대해 증여세를 부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2022년 7월 22일 국민일보) 법이 기부를 통해 나눔을 실천하고자 했던 황 씨에게 세금 폭탄이라는 철퇴를 가한 것입니다. 재단은 소송을 제기했고 재판이 길어지면서 황 씨가 떠안아야 하는 금액은 225억 원까지 늘었습니다. 급기야 황 씨는 20억 원의 재산을 강제집행 당하기도 했습니다. 대법원은 2017년이 되어서야 황 씨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이것이 기부 후진국 대한민국의 현주소입니다. 현행 상속증여세법은 공익 법인이 기업의 주식을 일정 배율 이상 기부(5% 혹은 10%) 받으면 최대 50%까지 증여세를 물리고 있습니다. 공익 법인의 기업 주식 보유 비율 50%까지는 세금을 부과하지 않는 일본이나, 관련 규제가 아예 없는 영국, 호주, 독일 등보다 규정이 훨씬 엄격합니다. 자산가들의 편법 상속을 막아 상속세 및 증여세의 공정한 과세, 납세 의무의 적정한 이행 확보, 재정 수입을 원활하게 조달하기 위해 만든 법이 오히려 기부 의지를 꺾는 역효과를 내는 셈 이죠. 부동산을 기부할 때도 문제가 발생합니다. 기부하려는 사람이 부동산을 매도해서 기부금을 마련하려고 해도, 부동산을 파는 즉시 소득세법에 따라 엄청난 액수의 양도 소득세를 떠안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부동산을 팔지 않고 통째로 기부를 해도, 공익 법인이 기부 받은 부동산을 자유롭게 처분하거나 수익 사업에 활용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과도한 세금이 기부 문화를 위축시킨다고 합니다. 숭실대 사회복지학부의 허준수 교수의 말입니다. “금전적 이득을 위한 거래 행위가 아닌 기부 행위에도 세금을 부과하는 건 잠재적 기부자들의 기부 의사를 완전히 꺾어버리는 행위이며, 정부는 기부 행위를 제한하는 모든 법안을 면밀히 검토해 기부자 중심의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현재 국회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20년 국회 입법조사처는 ‘공익 기부 과세에 대한 입법 과제 보고서’를 낸 적이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세금 회피 목적이 없는 공익 기부에 상속세나 증여세를 물리는 것은 ‘위헌적 과세 처분’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 8 - 상속 재산의 10% 이상을 기부할 시에는 상속세 10%를 낮춰주는 영국의 캠페인 ‘레거시 10’은 참고할 만한 좋은 사례가 될 것입니다. 2011년 시작한 이 캠페인을 통해, 2017년 영국에서 유산 기부를 통해 쌓인 기부금은 22억 4000만 파운드(약 3조 3000억 원)에 달합니다. 이는 영국 전체 기부금의 33%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영국 정부는 당시 캠페인으로 상속세 세수가 줄어들 것으로 예상했지만 입법을 주저하지 않았다. 기부금이 노숙자, 이민자, 빈곤 계층 등의 지원에 쓰이면 장기적으로 정부의 복지 부담을 낮출 수 있다고 판단해서다.” 이 문제는 실제로 제가 정부 당국자들을 만날 때마다 주장하는 것입니다. 복지국가가 되고, 나라가 복지를 책임지는 것이 아주 선진국형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정부가 모든 복지를 책임지게 되면 국민들의 ‘사회적 책임’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가장 좋은 것은 사람들 스스로 자신의 자원을 누군가를 위해 쓰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월드휴먼브리지가 ‘자선 교육’에 대한 교재를 만든 이유입니다. (교재 보기)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물질에 대하여 청지기 의식을 가지고 제대로 사용하고 참여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삶의 책임은, 자신의 삶에 대한 보람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종종 사전에 유언장을 작성하는 것으로, ‘유산 기부’ 운동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2003년 11월 5일, 세상을 떠난 김 씨는 은행에 예치금 123억이 있었고, 대여금고에서 발견된 자필 유언장에는 전 재산을 연세대에 기부한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김 씨의 형제와 조카 등 유족 7명은 2003년 12월 은행을 상대로 예금 반환소송을 냈고, 결국 유산은 가족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중요한 것은 맑은 정신에 좋은 의도로 유언장을 작성할 뿐 아니라, 법적 효력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자필 유언은 분실, 은닉, 위변조의 위험이 있고 법원 검인 절차도 까다롭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죽어서 유산을 남기는 것보다 살아생전에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물질을 잘 사용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고 유용한 일이라는 것이죠. 저와 함께 이러한 일에 참여하는 김동호 목사님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모든 유산을 다 어떤 단체나 교회에 기부하는 것보다, 각자 돌아가야 할 몫을 정하고 사용하는 것이 좋다고 말입니다. 가족이 몇이냐에 따라 잘 나눠주고, 하나님의 몫을 구별하고, 사회에 환원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이라는 말이죠. 우리는 주변에서 유산 문제로 다투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이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탐욕에 기인하는 것이죠. 물질에 대한 욕심이 생기면 관계들이 깨어집니다. 그러니 물질을 잘 사용하는 것을 늘 염두에 두고 살아가는 것은 삶에서 중요한 것입니다.
- 9 - 저에 대한 이야기를 좀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이러한 예는 성직자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에게 동일하게 적용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여러분에게 작은 삶의 모범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제가 종종 돌아가신 저희 아버님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이 이야기는 저희 형제들이 모이면 가끔 하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우리에게 남겨주신 가장 큰 유산은 유산을 남겨주지 않은 것이다!?” 얼마 전 형제들과 밥을 먹다 제가 찬 시계를 보여주었습니다. 아버지가 남겨주신 유물 중에 유일하게 갖고 있는 것이 ‘이 시계’라고 말이죠. 이제는 줄이 다 삭아서 바꿔야 하는 시계. 아무리 생각해도 저희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눈에 보이는 유산을 남겨준 것은 없습니다. 만나교회를 은퇴하시면서 교회가 마련해 준 집을 바로 교회에 내놓으시고 전셋집에서 살다 돌아가신 것 말고는 말입니다. 은퇴하실 무렵, 저희 형제들이 모여서 아버지께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버지가 마지막에 유산으로 남겨야 되는 것은 보이는 돈이 아니라,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가치이니 재산을 소유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이죠. 그래서 집을 교회에 내놓았습니다. 아! 생각해보니, 아버지가 남겨주신 유산이 하나 있습니다. 월남참전을 마치고 제대할 무렵, 퇴직금을 모아 사놓으셨던 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땅은 진입로가 없어 팔리지도 않는 땅이었습니다. 돌아가신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땅을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 땅은 사실 제가 받은 유일한 재산이었죠. 그런데 이 땅을 가지고 무엇을 해야 돌아가신 아버님이 기뻐하실지 생각하며 아내와 의논을 했습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이, 그 돈으로 전교인에게 기념이 될 만한 십자가를 만들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지금 여러분들 집에 가면 걸려있는 그 십자가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저희 어머니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신 아버지로 인해 자녀들 걱정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제가 받은 유산은, 종신보험에 들어놓은 1억 원을 승계 받은 것이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들어온 부의금을 다 모아, 장학금을 만들어 교회에 다 헌금한 것 역시 우리 가족들이 참 잘한 결정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너무 유난스러운 것 같지만, 조의금을 받지 않고 굳이 다른 분들에게 알리지 않고 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작은 일이지만 만나교회 목사로, 혹은 공인으로서 장례문화를 바꾸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물론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고, 저는 지금도 장례가 있는 곳에 해야 할 조문과 인사를 합니다. 제 생각이 하나의 기준은 아니니까요? 아들과 딸이 결혼할 때도, 축의금을 받지 않았고 아이들도 다행히 돈을 들이지 않아도 되는
- 10 - 결혼식을 했습니다. 그 또한 기뻐야할 결혼식이 혹 어떤 사람들에게 부담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죠. 제가 조금 유난스럽게 사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삶의 가치가 있는 일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러한 삶의 이유는 딱 한 가지입니다. 제가 목회를 하는 동안 ‘물질’이 탐욕이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탐욕에 물들지 않는 방법은 물질에 가치를 두고 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려면 돈을 모으는 것보다, 돈을 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종종 당혹스러운 일이 있습니다. 저에게 돈을 꿔달라는 사람들 때문에 말입니다. 만나교회 목사쯤 되니 그 정도 돈은 있지 않겠냐고 말이죠. 그래서 돈이 없다고 거짓말하는 것이 아니라, 돈이 없는 삶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저는 교회에서 많은 것들을 해줍니다. 많은 혜택을 받고 삽니다. 그러니, 그 혜택을 누리고 더 다른 욕심을 갖지 말자는 생각을 합니다. 그것이 사례비와 주례비, 출판 인세 등을 다 헌금하고 사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마음속에서 은퇴 후에는 제 삶을 교회에서 책임져 주겠지 라는 생각을 하죠. 그런데 그것 또한 욕심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요즘 아내하고는 그런 이야기를 자주합니다. “내가 이렇게 살았으니, 은퇴할 때 교회가 이 정도 해주겠지”라는 생각을 갖지 말자. “은퇴할 때, 물질로 인해 서운한 생각이 든다면 내 인생을 잘못 산 것이다. . .” 교회에서는 기획위원회를 통해 제가 은퇴할 때 살 집을 마련해 주시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저희 교회 장로님들은 저에게 무엇이든지 잘 해주려고 하는 분들이죠. 제가 오늘 설교를 하기 전 아내와 의논을 하고 결정을 했습니다. 지금까지 목사로서 집 없이 살았는데, 은퇴 후에도 그런 모습으로 남으면 우리 아이들도 교인들도 참 좋겠다! 그래서 아직 받지 않았지만, 제가 받을 집도 잘 사용하려고 결심을 했습니다. 교회는 저에게 집을 주고, 저는 다시 교회와 사회를 위해 그 집을 내놓으면 좋겠다는 생각 말이죠. 제가 죽어서 집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그 집이 어떻게 사용되면 좋을지 교회에 일임하겠다고 말입니다. 어떤 장로님이 저를 걱정하시더군요. 장애를 가진 딸에게는 뭔가를 남겨주셔야 하지 않나요? 그런 생각도 합니다. 제가 내놓은 집에서 일부는 우리 딸의 노후를 위해 가도록 하는 것도 부모로서의 책임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 11 - 혹, 우리가 재산을 좋은데 쓴다는 생각만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을 도외시하는 것은 옳은 일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도 합니다. 사실 물질이 우리에게 좋은 것이고, 그 물질을 소유하므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기쁨과 할 수 있는 일이 참 많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물질을 소유하지 않으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도 참 많습니다. 아들이 결혼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아 며느리가 저에게 그런 말을 했습니다. “아버님, 제 친구들이 저희 사는 것을 보고 굉장히 좋아해요!” 이유는 만나교회 목사 아들이면 집 하나는 해줄 줄 알았는데, 원룸 오피스텔에서 그것도 전세금 대출을 받아 사는 우리를 보고 좋아한다고 말이죠. 저는 아들에게도 물질을 재산으로 남기지 않고, 가치를 유산으로 남기는 것이 참 잘한 일 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돈을 정리해서 미국으로 공부하러 간 아들을 제가 도와줍니다. 난생 처음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어서 아들의 학비를 도와주고 있습니다. 한 번은 아들이 저에게 그런 말을 하더군요. “아버지 고맙고 미안합니다~~” 돈을 모아 아들에게 남겨준 것이 아니라, 그렇게 힘들게 공부하는 삶의 가치와 미래의 비전을 남겨준 것이 제 인생에서 결코 실패가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돈이 참 좋은 것이고 필요한 것인데, 돈의 노예가 되어 탐욕스러워지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인 것 같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께서 언제 거두어가실지 모르는데, 주어진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리가 죽음 이후에 심판을 받는 것은 죽기 전에 살았던 삶으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남겨줄 유산은, 사실 죽어서 남겨주는 것이 아니라 죽기 전에 살았던 삶이 유산이 되지 않을까요? 우리들에게 맡겨주신 자녀에 대한 책임, 가정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지만 그 책임이 지극히 이기적인 것이 되지 않도록, 하나님을 생각하고 이웃을 돌아보며 살아야 합니다. 그 사람의 가치는 물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을 때가 참 많습니다. 우리 교회가 시작한 월드휴먼브리지를 통해 지난 2년 간 아이들을 위한 ‘자선 실천’ 성경 공부 교재가 만들어 졌습니다. 그리고 목사님들이 모여 ‘자선 설교집’을 만들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일들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신앙고백을 삶으로 만들어 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