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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후
신외숙
오르막길을 지나 우이동 계곡에 접어들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녹색 향연과 물소리가 마음을 평온하게 한다. 얼마만의 산행인가. 산은 봄의 서곡을 알리듯 화려한 유채색으로 마음을 한껏 업그레이드 하고 있다. 새하양 벚꽃 무리와 샛노랑 개나리 진분홍 진달래가 동심으로 돌아간 듯 들뜨게 한다.
북한산은 대학 졸업하고 처음이다. 벌써 30년도 훨씬 넘는 세월이 발 앞을 스쳐 지나갔다. 자연은 힐링이다. 계절의 변화를 색채로 알려주는 산은 마음에 안식과 순수를 일깨우게 한다.
어릴 때 물가에서 다슬기도 잡고 물장구치며 놀던 추억이 떠오른다. 바로 어제 일 같은데 벌써 세월이 저만큼 달아나버렸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일상 속에 어느덧 노년이 성큼 다가와 있다. 언제 설치해 놓았을까. 임산금지란 팻말과 함께 물가나 산에 올라가지 못하도록 칸막이가 되어 있다.
그냥 눈으로만 귀로만 자연을 즐기라는 표시다. 그것만으로도 힐링이다. 서울 하늘 아래 이런 자연공간이 있다니 감격스럽기까지 하다.
“참 좋은 세상이에요, 우리나라처럼 살기 좋은 나라도 드믈 거예요.”
“그러게요, 100년 전에만 태어났어도 이런 세상 구경할 수 있었을까요? 아마도 장작불 때서 밥하고 농사일 하느라 정신 없었겠죠.”
“그러게나 말이에요, 하지만 현대라고 해도 다르진 않죠, 저 중동 땅에 태어났어 봐요, 집 문밖에도 못 나가고 얼굴도 가린 채 살아가는 여자도 많다잖아요, 북한 땅에 안 태어난 것도 감사죠.”
‘맞아요, 자유로운 이 땅에 태어난 것도 신의 축복이에요.“
오늘은 만나자마자 출신에 대한 이야기가 먼저 나온다. 미세먼지도 가시고 등반하기에 딱 좋은 날씨다. 둘레길 입구에 버스킹 공연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대부분이 중장년층으로 관객보다 출연진이 더 많아 보인다. 색소폰 소리가 산야와 행인들의 마음을 흔들고 있다.
드디어 연주가 끝나자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전자 기타를 들고 나와 노래를 한다. 그는 싱어송 라이터 같다.
선글라스에 청바지 차림으로 한껏 모양을 냈다. 한쪽 다리를 흔들며 노래하는 그는 무아지경에 빠진 표정이다. 그가 목청껏 부르는 노래는 당연히 7080 가요다. 길을 지나는 행인들도 다가와 노래를 경청한다. 노래 실력은 수준급이다. 파머 머리를 염색한 그는 관객들이 몰려들자 신이 난 모양이다.
온몸을 흔들며 이번에는 댄스곡을 열창한다. 관객들도 무대로 뛰어나가 합류한다. 모두 회한에 젖은 듯한 표정이다. 노래는 특히 유행가는 당 시대를 대변하는 아이콘과 같다. 동시대를 살아온 세대를 아우르는 동질감을 한꺼번에 표출한다.
관객들은 어깨를 들썩이며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다. 그러고 보면 노래만큼 공감대를 형성하는 강력한 매체는 없는 것 같다. 남자 가수는 앙코르를 두 번이나 받고 나서야 노래를 끝냈다. 다음에 무대에 오른 사람은 여자 가수였다.
관객석에 앉아 있다 무대로 나간 여자는 중년티가 확 나는 뚱뚱한 몸집이었지만 가창력 하나는 뛰어났다. 그녀가 부르는 노래는 일대를 꽝꽝 울리며 행인들을 관객으로 끌어들였다. 가사와 곡조가 뭉클한 감동을 일으키며 가슴을 적셨다. 관객 중에 젊은 세대는 보이지 않았다.
관객도 출연진에 따라 결정되는 모양이었다. 세영과 혜민은 맨 앞자리에 앉아 음률에 젖어 들었다. 노랫말 가사가 젊은 시절을 회상하며 눈물이 나왔다. 그들은 군사정권 시절을 거쳐 격랑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참으로 많은 아픔을 경험했다.
역사의 주요 장면을 목격하면서 이념 갈등을 겪었고 엄청난 상처도 직면했다. 현재와 같은 인터넷 유투브 세상이 도래하리라곤 꿈도 꾸지 못했다. 아날로그 시대를 살면서 오로지 성실이란 단어에만 집중했었다. 막중한 책임의식 속에 역할에만 충실했었다.
디지털 시대로 접어들면서 쉰세대 꼰대로 전락하면서 또한번 아픔을 겪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 희생을 업으로 알고 살면서 죄라곤 범생이로 살아온 성실밖에 없었다. 오죽하면 낀 세대라고 했겠는가.
여자 가수의 노래가 끝나자 마지막으로 검은 베레모를 쓴 초로의 남자가 나와 색소폰을 연주했다. 그가 연주하는 곡은 30년 전 태풍처럼 몰아쳤던 인기 주말 드라마 모래시계의 주제곡이었다. 중후한 러시아 남자 가수가 불렀던 노래 백학이었다.
얼마 전 그에 관한 인터넷 기사를 읽은 기억이 났다.
{인기드라마 ‘모래시계’ 주제곡 ‘백학’을 부른 우크라이나 출신 러시아 원로 가수 이오시프 카브존(77)이 모국인 우크라이나 정부와 척을 지게 됐다.
러시아 여당인 ‘통합 러시아당’ 의원으로 모스크바에 거주 중인 카브존이 26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정부에서 받은 인민예술가 칭호를 반납한다고 밝혔다고 이타르타스 통신이 보도했다. 그는 “내게는 진정한 의미의 모국만이 있을 뿐이며 미국의 꼭두각시 포로셴코(페트로 포로셴코 우크라이나 대통령)가 통치하는 모국은 필요 없다”고 설명했다.
카브존은 현재 친러 분리주의 반군이 장악한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주의 도시 차소프 야르 출신이다. 그가 친서방 성향인 현 우크라이나 정권을 비판하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사태 개입을 지지하면서 갈등이 번지는 모양새다.
카브존과 우크라이나 정부의 갈등의 발단은 지난 3월 러시아의 크림 병합이다. 당시 카브존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지지하는 러시아 문화계 인사들의 서명운동에 참여해 친서방 우크라이나 정권에 밉보였다. 이후에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사태 개입을 지지하는 발언을 이어왔다.
앞서 우크라이나 드네프로페트롭스크시는 1995년 카브존에게 수여했던 명예시민 칭호를 지난 9월 박탈했다. 다른 2개 우크라이나 도시도 같은 조치를 취했다. 카브존은 이에 아랑곳 않고 분리주의 반군이 장악한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주와 루간스크주에서 공연하는가 하면, 현지 병원에 의약품을 전달하는 등 우크라이나 정부에 정면으로 맞섰다.
이에 우크라이나 당국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사태 개입 정책을 지지한 다른 13명의 러시아 문화계 인사와 함께 카브존을 입국금지 대상자 명단에 포함시켰다.
카브존은 SBS 인기드라마 ‘모래시계’의 타이틀 곡 ‘백학’으로 국내에 널리 알려졌다. (인터넷에서 발췌)
관객들은 모두 30년 전으로 돌아간 듯 눈을 감고 음악을 감상했다. 웅장하고중후한 백학 연주는 마음을 고요하고 침잠하게 했다. 애잔하고 슬픔에 젖은 곡조는 지난 세월을 추억하며 하늘을 날아가는 학을 연상시켰다. 세월을 덧없음을 삶과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는 듯 숙연했다.
무대 정중앙에 영상 자막이 떠올랐다.
나는 가끔 병사들을 생각하지
피로 물든 들녘에서 돌아오지 않는 병사들이
잠시 고향 땅에 누워보지도 못하고
학으로 변해버린 듯하여
그들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날아만 갔어
그리고 우리를 불렀지
왜, 우리는 자주 슬픔에 잠긴 채
하늘을 바라보며 말을 잃어야 하는가
날아가네, 날아가네 저 하늘의 지친 학의 무리들
날아가네 저무는 하루의 안개 속을
무리 지은 대오의 그 조그만 틈새
그 자리가 혹 내 자리는 아닐는지
그날이 오면 학들과 함께
나는 회청색의 어스름 속을 끝없이 날아가리
대지에 남겨둔 그대들의 이름자를
천상 아래 새처럼 목 놓아 부르면서
가사와 곡조에 눈물이 났다. 세상은 평온한 듯 보여도 누군가의 희생에 의해 움직여진다. 크게는 정치 위정자들과 나라를 지키는 군경들의 노고와 희생으로 안전과 평화가 유지된다. 그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게 이상할 뿐이다. 이념갈등으로 안전불감증에 걸린 현상이다.
삼국지에는 군주의 욕심으로 치러진 전쟁으로 수십만의 군사의 피가 강을 이루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에 대해 가슴 아파했다는 군주의 고백은 한 대목도 없다. 몽골의 징기스칸이나 스파르타 제국에서는 전쟁에서 진 장수들을 참혹하게 처형했다고 한다.
전쟁으로 인한 대량 살상으로 권력은 유지되는 듯했으나 얼마 안 가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군주에 대한 충성심을 명목으로 군인의 생명이 소홀히 취급된 건 아닌가 가슴 아픈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악인에게 맡겨진 권력은 재앙 그 자체이다. 혜민의 조부는 일제 강점기 때 대지주였다.
동경대를 나온 수재에다 엄청난 재력으로 축첩도 했다. 그 당시로선 당연지사로 여겼지만 자손들에겐 엄청난 불씨로 남았다. 일경에게 뇌물을 써 아들들은 징집 대상에서 제외됐다. 그들은 그 험악한 왜정시대에도 치외법권 지대에 살고 있었다. 자손들은 번창해 아들만 스무 명이 넘었다.
운명도 그들을 거스르지 못하는 듯했다. 해방이 되자 혜민의 조부는 일본으로 도망쳤다. 자손들은 숨겨둔 재산을 증식해 호가호위(狐假虎威)하며 살았다. 혜민의 아버지는 한때 권력의 측근으로 행세하다 어느날 된서리를 맞았다. 정권이 바뀌면서 축출 대상이 된 것이다.
색소폰 연주가 끝나자 관객들은 삼삼오오 흩어졌다. 공연팀도 자리를 정리하면서 허무와 아쉬움도 사라졌다.
“참 편리한 세상이에요, 너무 편리해지다 못해 인공지능이란 괴물이 나타나서 제가 오히려 사람을 조종하고 왕 노릇 하려 든다니까요.”
세영은 숲향기가 느껴진다며 약간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두고 보세요, 그 AI라는 놈이 결국은 사람들을 망가뜨리는 일등공신이 될 테니.”
혜민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오버한 건 아닌가 세영은 순간 의심이 들었다. 부정적인 시각으로 돌출된 오버센스로 너무 확 나가버린 것 같다. 시대는 컴퓨터라는 과학문명과 함께 세월을 훨씬 단축시켜 놓았다. 인터넷이라는 거대한 통신망을 구축하더니 인간관계의 단절현상마저 나타냈다.
그런가 하면 자동화 시스템으로 일자리를 대폭 축소 시킴으로 비혼을 부추기는 계기를 만들었다. 인성(人性)마저 변화시켜 책임지지 않으려는 발상으로 출생인구마저 감소시켜 놓았다. 가치관이 변하면서 비혼 무자녀가 대세인 세상처럼 되어버렸다. 삶은 편리해진 반면 인심은 더 팍팍하고 각박해졌다.
나아가 쳇 GPT라는 계기가 나타나 생각하는 기능마저 축소시키는 양상이다.
사상과 이념은 더 극단으로 치닫고 선과 의의 개념마저 퇴락시켜 버렸다.
“우리 세대가 가장 불쌍한 낀세대라고 하잖아요, 산업화 시대로 접어들면서 가족을 위해 희생당한 베이비 붐 세대로 부모 노릇 자식 노릇으로 한 평생을 보낸 세대잖아요, 남자는 가장 노릇 하느라 허리가 휘고 여자는 동생들 공부시키느라 마중물 역할하다 시부모 봉양에 뼈가 휘도록 봉사하다 버림당하는, 어찌 보면 가장 억울한 세대인 것 같아요, 그래도 우리 부모 세대는 우리가 끝까지 책임지고 돌보잖아요,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으니 서글픈 세상이에요.”
세영은 숲향기가 온몸에 전해지는 것다면서도 말투는 격앙돼 있었다.
“그래도 혜민씨는 특별한 축복을 받은 거예요, 우리 나이에 대학 나오는 일은 흔치 않았고 더구나 유복한 집안에 많은 혜택을 받으며 살았잖아요, 부모 사랑받고 공주님 대접 받으면서요.”
“그렇긴 하지만 뭐 다 그런 거 아닌가요? 우리 엄마는 자식들 중에서 유독 나만 귀중하게 여기고 사랑해 주셨지만 뭐 다 그렇죠, 자식 사랑 안하는 부모도 있나요?”
“그렇지 않아요, 혜민씨가 몰라서 그렇지 우리 세대만 해도 불우한 환경 속에서 역경 드라마처럼 산 사람도 많아요.”
“그런가요? 난 엄마가 손에 물 한방울 안 묻히게 하고 최상급으로 키워서인지 다른 집도 다 그런 줄 알았는데.”
“그러니까 혜민씨는 항상 당당하고 마음의 여유가 있는 거예요.”
“그럼 세영씨는 힘든 환경 속에서 살았다는 이야기가 되는 건가요?”
“암튼 혜민씨는 특별한 축복을 받은 거예요, 오랜만에 만났으니 북한산 구경하고 자연을 만끽합시다.”
세영과 혜민은 동갑내기지만 서로 존댓말을 사용한다. 20대에 직장 동료로 만나 친분을 쌓아온 지도 어느덧 30년이 넘었다. 둘 사이엔 예의와 보이지 않는 법칙이 있었다. 금기 사항도 있었다. 그 또한 예의였다. 자존심과 배려를 위한 마지노선이었다.
상대에 대한 존중감이 없다면 그건 언제든 깨질 수밖에 없다. 다만 시간문제일 뿐이다. 인간관계에 왕도는 없다. 자라온 환경이나 품성이 올바르다 해서 인간관계가 항상 좋은 건 아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예외는 항상 존재하는 법이니까.
세영과 혜민은 자라온 환경은 천양지차로 다르지만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했다. 상처에 대한 공감대는 많지 않았지만 책임 따위를 거론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심성이 약한 것도 아니었다. 마음은 항상 강골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그랬다. 그건 어찌 보면 삶에 대한 노하우였다.
세영의 조부는 일제 강점기 때 호남 곡창지대 대지주의 머슴이었다. 무학 출신에 건강한 체력으로 시대를 살아낸 산 증인이었다. 주인으로부터 땅을 증여 받았지만 글을 몰라 사기꾼에게 몽땅 빼앗기고 말았다. 그로 인해 화병이 발발 끝내 눈을 감고 말았다.
그는 자손들에게 꼭 글을 가르칠 것을 당부했고 손주가 대학에 입학한 것을 일생의 보람으로 느끼며 기뻐했다. 평생 한맺힌 조부의 아픔은 자손들에게 고스란히 대물림 됐다. 가난도 불안도 피해의식도 삶속에서 재연(再演)되는 결과로 나타났다.
형통 대신 불통의 날이 더 많았고 그때마다 불평 불만과 함께 팔자타령을 했다. 그렇다고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었다. 울분과 탄식만 늘어날 뿐이었다. 불가항력적인 힘을 끊는 건 없을까? 어느날 서점에 들렀을 때 눈에 띄는 책자가 있었다.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라. 그와 함께 긍정적인 말과 사고를 강조하는 책자도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백번 양보해도 부정적 사고는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생각이 경험이 과거의 상처에 너무나 깊숙이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어느날은 말했다.
말조심 해라. 말이 씨된다.
세영에겐 불투명한 미래도 경험이라는 지식으로 잘 헤쳐나갈 것 같은 이상한 자신감이 있었다. 그건 바로 신적능력인 영적 힘이었다. 세상에 안전지대가 없는 것처럼 중간지대도 없다. 그건 영적 세계도 마찬가지다. 영적 힘은 내적으로 약화 돼 있을 때 더 강한 힘을 발휘한다.
세영과 달리 혜민에겐 미래에 대한 포석(布石)이 항상 준비돼 있는 것처럼 보였다. 현재에 충실하며 항상 안전지대에 머물러 있는 듯 보였다. 건강 또한 열심히 챙기면서 빈틈없는 노후를 준비했다. 불가측(不可測)한 미래도 손안에 있는 것처럼 항상 당당했다. 한마디로 멘탈갑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그녀가 청천벽력 같은 말을 했다.
“사실 나는 어릴 때부터 연예인이 되는 게 꿈이었어요, 그것도 싱어가 되고 싶었어요.”
“네에 혜민씨가요?”
세영은 놀란 나머지 입을 벌리고 말았다. 금시초문이었다. 그녀가 가수라니?
“사실 부모님이 엄격한 편이었어요, 가수라는 말을 꺼냈다가 얼마나 혼이 났는지 몰라요, 대학을 갈 때도 전공을 정할 때도 나는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했어요, 결혼도요.”
처음 듣는 이야기에 세영은 가슴이 팔딱거렸다. 그녀는 단 한번도 자신의 힘들었던 이야기는 한 적이 없었다. 항상 완벽 스타일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한동안은 시골 벽촌에 가서 숨어 살고 싶었던 적도 있었어요, 남편이 너무 꼴보기 싫어서요.”
이 또한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언젠가 그녀는 남편이 말실수조차 않는 완벽 스타일이라 했다. 부부가 똑같았다. 남편은 고위 공직자로 행동거지에 있어 말실수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출세가도를 달릴수록 아내를 닦달했고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는 처음부터 처갓집 재산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그 사실을 혜민은 30년 세월을 살고 나서 알았다. 처음으로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한 그녀는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언젠가부터 난 나 자신에게 진실해야 한다고 믿었어요, 하지만 평생 철가면을 쓰고 살다 보니 그게 너무 힘든 거예요, 난 체면을 목숨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거든요. 어릴 때부터 쭉 그렇게 살았어요.”
“자신에게 진실한 게 중요하죠, 말은 쉬운 것 같아도 그렇지 않아요, 나도 정직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하면서도 안으로는 곪고 썩으면서 나 자신을 포장하며 살아왔더라고요.”
“이젠 나 자신한테 좀더 솔직해지고 싶어요, 어젠 남편하고 대판 싸웠어요,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하면서 위선과 독선이 가득한.”
“그래도 능력있는 남편 만나 한평생 남부럽지 않게 살아왔잖아요, 아들 딸도 모두 수재로 키우면서.”
“그게 다 내조 잘한 아내 덕 아니겠어요.”
그녀는 스스로 자화자찬했다. 그렇다면 남편 공은 없다는 말인가.
겉으로 강골 이미지인 혜민과 달리 세영은 어릴 때부터 범불안증 환자였다. 늘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했다. 침착하지 못해 자주 흥분하고 성급하게 말하고 행동한 뒤 오랫동안 후회와 자책에 시달렸다. 시도 때도 없이 불안증에 시달리다 공황장애로 이어진 적도 있었다.
원인은 다양했다. 무의식층에 깔린 트라우마와 상처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불안하면 말이 많아지게 되고 쉽게 짜증과 분노에 노출된다. 의학적인 판단으로는 뇌신경 전달 물질인 세로토닌의 연관성을 꼽았다. 그러나 가장 큰 원인은 자신감의 결여였다.
그녀는 도무지 자신을 믿지 못했다. 그 이유로 자신의 낮은 두뇌와 인지능력의 결여로 해석했다. 스스로를 믿지 못하다 보니 늘 불안에 떨었고 자포자기 하기 일쑤였다. 조금만 긴장해도 지나치게 땀을 많이 흘리며 흉통을 호소했다.
그 증상을 의사는 chest pain으로 기록했다. 원인 불명의 흉통이었다.
자신을 믿지 못하다 보니 늘 주변사람의 의견을 묻거나 도움을 요청하곤 했다. 안면은 늘 홍조를 띄우며 불안과 두려움을 나타냈다. 후회와 가책은 일상이었다. 두려움 속에 하루종일 방안에 틀어박혀 지낸 적도 많았다. 가정은 극빈했고 가족은 모두 그녀를 외면했고 방관했다.
불안과 무기력에다 추가로 우울감과 절망감이 몰려왔다. 오랜 세월동안 상태를 지켜본 가족은 그녀에게 어떤 기대도 하지 않았다. 불쌍하다 생각하면서도 상태가 악화되면 또다시 진처리 치고 외면했다. 집중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만큼 힘들어지면서 조현병 증세마저 나타났다.
너무도 산만해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누군가 전문가를 찾아가 치료를 받아 보라고 했다. 신앙을 권유하거나 음악치료나 미술치료를 권한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집안 친척 중에 목회를 하는 여전도사가 있었다. 그녀가 다가와 말했다.
“세영아 위로 받고 싶지? 누군가가 우리 세영이 마음을 알아주면 좋겠지?”
바로 그거야, 그녀를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도사는 가족들에게 말했다. 세영에게 가장 필요한 건 관심과 사랑이라고. 그러자 가족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옆에서 쟤 상태를 지켜보고 나서 말해라. 복장 터져 죽는다. 여전도사는 결심한 듯 세영을 데리고 기도원 순례를 했다.
어떤 자신감이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다 어느날 자신의 목회 일정을 핑계대더니 슬그머니 물러서고 말았다. 가족들은 또 말했다. 내 그럴 줄 알았다. 그동안 여러 가지 방법이 제시됐다. 상담치료와 인지행동 치료도 받았고 운동요법도 실시했다.
혼자 있는 걸 좋아하고 움직이기를 죽기보다 더 싫어하는 성격이었지만 운동은 확실하게 효과가 있었다. 경쾌한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다 보면 어느사이엔가 웃음이 나오고 마음에 힘이 솟았다. 열심히 하다 보니 자신감도 생겼다. 상담기법 보다 운동 요법이 낫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오랫동안 방치됐던 무능감도 개선되었고 취업하라는 조언을 받아들여 난생 처음으로 직장에 출근했다. 자신감을 키우기 위해 가장 낮은 직종부터 시작했다. 그곳은 백화점에 납품할 종이봉투나 박스를 만드는 곳이었다. 발달장애를 겪는 청소년들이 열심히 작업하고 있었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보다 집중력이 뛰어났다. 한눈 안 팔고 열심히 봉투를 붙이고 박스를 접었다. 일하면서도 연신 웃었고 식사 시간이면 불편한 몸놀림으로 맛있게 먹었다. 퇴근 시간이면 가족들이 데리러 와 함께 퇴근했다. 한편으론 부럽기도 했고 눈물이 나기도 했다.
한달이 지나 월급이 통장으로 이체되었다. 세영은 그 돈을 몽땅 어머니에게 갖다 바쳤다. 어떤 시위하는 마음에서였다. 가족들로부터 냉대받고 투명인간처럼 취급받았던 상처에 대한 보수(報讎) 심리였다.
어머니는 애써 눈물을 참는 눈치였다. 다음부터는 니가 번돈 너를 위해 써라, 엄마는 돈 많다. 세영은 일이 끝나면 헬스장으로 달려가 열심히 운동했고 검정고시로 교과 과정도 마쳤다. 점차 어둠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사람을 대할 때마다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고 항상 긴장했다.
한편으론 장애인 선교회에 나가 봉사활동 하면서 신앙적 저력을 키우기도 했다. 기도와 영성훈련으로 내적치유에 힘쓰며 긍정적인 사고에도 눈을 떴다. 특히 말의 힘에 대해서도 배웠는데 그건 곧 기도의 능력과도 직결됐다. 직장도 단순노동에서 복합적인 일을 하는 곳으로 옮겼다.
실수도 잦았지만 죽을 힘을 다해 버텼다. 그러는 사이 겉으로는 일상적인 생활을 잘 이어가는 듯 보였다. 하지만 마음 저변에는 불안과 슬픔 분노가 항상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마치 시한폭탄처럼 불발 일보 직전까지 간 적도 있었다. 겨우 겨우 숨을 쉬고 연명하는 것 같았다.
정신적 경제적 자립을 위해 가장 힘든 게 인간관계였다. 인간관계의 기본 원리가 상부상조라 했다. 그러나 개성이 다른 사람들을 상대로 포괄적으로 적용하다 보면 정반대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비일비재했다. 인간관계에는 어떤 기법도 없었고 돌발상황이나 예외가 항상 등장했다. 인가 본성이 악하고 교만하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했다. 배려하는 척하면서 상대를 멸시했고 남의 처지를 깔봤다. 세영이 자신감이 없어 주저주저할 때면 닦달하고 채근하며 독려가 이어졌고 그럴 때면 세영은 침잠하며 멘붕에 빠지는 것 같았다. 인간관계만큼 힘들고 괴로운 건 없었다.
그럼에도 세월은 쏜살같이 흘러갔고 안정된 기조가 찾아왔다. 세영과 혜민은 20대 중반 때 장애인 봉사단체에서 만났다. 세영은 생계를 위해 직원으로 근무한 반면 혜민은 후원자를 끌어모으며 단체를 유지해 나가는 중추 역할을 했다. 좋은 환경 속에서 자란 혜민은 멘탈이 강했다.
한없이 너그럽진 않았지만 말이나 행동에 절제할 줄 아는 지혜가 있었다. 대학에서 상담학을 공부한 그녀는 세영의 아픔을 공감해 주는 척했다. 일종의 스킬이었다. 봉사하는 마음으로 배려하고 친절하게 대했을 뿐인데도 세영은 감동하고 위로를 받았다. 위로를 느끼는 것은 치유의 첫 단계다.
혜민의 도움으로 세영은 대학에 진학했다. 산만했던 정신이 집중력이 생기면서 소망도 넘쳐났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 겪는 일이었다. 전공을 정할 때도 혜민은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인간관계의 신뢰성에 대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는 순간이었다. 대학 4년 내내 장애인 센터에서 프리랜서로 근무하며 학업을 마쳤다. 몇 번이나 결혼할 기회가 있었지만 자신이 없어 포기했다. 사랑하고 사랑받을 자신이 도무지 생기지 않아서였다.
마음 근저에 자리잡은 자신감의 결여가 중요한 순간마다 고개를 내밀었다. 신앙으로도 잘 극복이 되지 않아 애를 먹었다. 세월 따라 직업도 여러번 바뀌었고 노력한 만큼 성과도 있었다. 가끔 혜민과 세영은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가정을 가진 혜민을 위해 당일치기 여행이었지만 기뻤다.
둘은 서로에게 상담자 역할을 했다. 공감을 못하더라도 이해는 해주었다. 하지만 깊은 속내는 드러내지 않았다. 서로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어린 시절 풍파를 많이 겪었던 세영은 마음이 안정기조에 있다고도 돌발상황이 발생하면 순식간에 불안기조로 바뀌었다.
그건 때에 따라 뇌관 노릇을 했고 상황과 맞물리면서 전혀 딴 사람처럼 행동했다. 상처가 과거로 회귀하면서 마구잡이처럼 행동하기도 했다. 잠재의식이란 언제 어느 순간에 튀어나올지 모르는 괴물 같은 것이었다. 아무리 이성(理性)을 앞세워도 감정을 추스르기 힘들었다.
그때마다 세영은 절대자에게 다가가 눈물로 호소하며 기도했다. 초월적인 신적능력으로만 해결이 가능할 것 같았다. 세월은 연륜을 딛고서 조금씩 이성이 감정을 추스르면서 평안과 불안이 빗금치듯 지나갔다. 상황도 처지도 변하면서 치츰 안정기조를 유지해 갔다.
어느날 세영에게 기적같은 일이 벌어졌다. 그건 전혀 생각지도 않은 뜻밖의 일이었는데 경기도 근방의 상담교사로 발령받은 것이다. 별다른 준비도 없이 느닷없이 벌어진 일이었는데 세영에게 있어서 아주 획기적인 일이었다.
단 2년밖에 머물지 않았지만 그건 세영의 인생에 엄청난 변화의 바람을 일으켰다. 살다 보니 내게도 이런 일이 있구나 싶었다. 온 산야가 유채색으로 물드는 봄꽃이 만개한 봄날이었다. 그녀가 시외버스를 타고 떠나는데 음악이 들려왔다. 러시아 가수 이오시프 카브존이 부른 백학이었다.
애잔한 슬픔이 배어 있는 노래를 듣자니 어린 시절의 아픔이 생각나 고개를 묻고 울었다. 아직도 마음의 상처와 슬픔이 남아 있는데 어떻게 어린 학생들을 상담할 수 있을까 내심 걱정되었다.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몰려왔지만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닥치면 닥치리라. 그녀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세영의 청소년 시절은 상처와 분노로 찌들어 있었다. 집안은 폭력과 비명이 난무했고 원망과 탄식으로 난장판이었다. 그때부터 세영의 정신구조에 불안구조가 깔렸던 것 같다. 할아버지 때부터 이어졌던 잘못된 천민의식과 낮은 자존감은 학대를 통해 전수되었다.
할아버지의 뿌리 깊은 피해의식은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할만큼 고착화 되었고 사고(思考) 자체가 비뚤어져 있었다. 한순간 동정과 연민이 들다가도 얼마 안 가 원상태로 복귀했다. 한번 울분이 발동하면 사사건건 트집 잡고 사방에서 불씨가 터져 나왔다.
언제 어느 때 불씨가 터져 나올지 몰라 긴장하다 보니 아무 일에도 신경 쓸 수가 없었다. 정신이 산만해져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았다. 불안에 길들여지다 보니 툭하면 짜증이 나고 허둥지둥 당황하기 일쑤였다. 또 항상 마음이 조급하고 부정적인 악감정만 몰려왔다.
어머니는 툭하면 팔자타령을 늘어놓았다. 가족을 향해 저주하는 말도 서슴지 않고 내뱉었다. 내가 왜 이렇게 불안하지? 왜 갑자기 짜증이 나지? 왜 이리도 힘들고 슬플까? 생각해 보니 잘못된 유전인자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모든 원인이 그곳에 귀결돼 있었다.
극심한 정서불안에 시달리던 어느날 한줄기 빛줄기가 찾아왔다. 친구의 권유로 우연히 동네 개척교회에 발길을 내딛던 날이었다. 망연자실 앉아 있던 세영의 귓가에 음성이 들려왔다. 하나님은 넘어지는 자를 붙드시며 비굴한 자를 일으키신다.
상한 갈대도 꺽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아니하신다. 어두운 마음속에 불이 환하게 켜지는 순간이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어린 마음에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친구가 말했다. 우리의 피난처는 절대 권능주 한분뿐이란다. 바로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
그때 한사람이 나타났다.
“세영아, 내년에는 대학 들어가야지?”
그는 세영보다 한 학년 위인 민형기였다. 아버지가 장로인 그는 성품이 온유하고 겸손하여 누구나 공인하는 목회자감이었다. 하지만 본인은 장차 법조인이 되어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자 하는 원대한 꿈을 품고 있었다. 물론 공부도 전교에서 수위를 다툴만큼 잘했다.
“그런데 왜요?”
“인생에 있어 대학은 특히 전공은 중요한 거란다. 하나님이 주신 공평한 기회는 자주 찾아오지 않는 거란다. 열심히 노력해서 꼭 합격하길 바래.”
마음속에서 울컥 눈물이 나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전공은 정했니?”
“아직.”
“세영이가 가장 잘하는 게 뭐지?”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가장 하고 싶은 거, 마음에 소원 같은 거?”
“있긴 하지만 자신이 없어요.”
“그럼 기도해 봐, 기도하면 하나님이 힘 주시고 인도해 주실 거야.”
있긴 있어요, 저처럼 힘들고 아픈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어요. 하지만 속으로만 말하고 발설하지 못했다. 자신감도 없고 부끄러웠다. 말하는 순간 비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이성으로부터 처음 받아보는 관심이었다. 뜨거운 감정이 솟구쳤다. 슬픔과 연모의 정이 가슴 속 깊이 내려앉는 순간이었다.
입시를 앞둔 어느날 민형기의 집안에 대환란이 몰아닥쳤다. 그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회사가 부도를 맞아 공중분해 된 것이다. 평생 형통의 삶을 살았던 그의 집안에 파멸이라는 쓰나미가 덮친 것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충격에 자리에 몸져 누웠고 집안은 풍비박산 났다.
입시를 앞둔 그는 진로를 바꾸었다. 일반대학에서 사관학교로 진로를 변경했다. 학비 무료. 기숙사 생활비 무료가 그가 택한 조건이었다. 그후 그의 모습은 교회에서 보기 힘들었고 장교로 임관됐다는 소식과 함께 그의 결혼소식도 들려왔다.
그리고 몇 년 후 그는 항공사고로 순직했다. 구체적인 사고 경위는 밝혀지지 않았다. 군 기밀사항이라 했다. 천지가 무너지는 듯한 충격속에 정신이 몽롱해졌다. 멘붕이 온 것이다. 때마침 TV에서 주말드라마 모래시계가 방영될 때였다. 드라마 중간 중간 백학 노래가 나왔다.
슬픔으로 가슴이 저미듯 아파왔다. 온통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어리석은 그리움에 혼재된 부끄러움이 또다시 멍 때린 듯 세월이 흘러갔다.
어느날 세영은 혜민에게 말했다. 둘이서 동해 바닷가 모래사장을 걷고 있을 때였다.
“여행만큼 값진 체험은 없는 것 같아요, 가장 만족도가 높아요. 눈 호강 마음 호강은 여행이 으뜸이죠, 여행이란 한번 떠나면 다시 못 올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라고 조물주가 주신 축복이래요, 또 여행이란 미지의 그리움을 향해 달려가는 코스 같아요, 행복도 만족도 일위에요”
“또 한가지 추가되는 게 있다면 평강이에요,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 맨 처음 하신 말씀이 평강하뇨였어요, 십자가에서 몸소 사랑을 실천해 주심으로 평강도 보내 주셨죠, 바로 성령님을 통해서요.”
혜민은 여느때보다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때 세영은 알았다. 여행도 마음의 불안기조를 잠재우는 일환이라는 것을.
주거지인 서울을 떠나 지방 소도시 학교에 근무하자 딴 세상이 펼쳐진 것 같았다. 매일 대하는 상대라 어린 학생들이라 조심스럽기도 하고 나름 재미도 있었다. 상담하러 오는 아이들은 가족관계에서 오는 상처가 많았다.
모친 가출로 인한 상처와 친부의 학대도 많았고 어린 나이에 동생을 돌봐야 하는 이중고도 겪고 있었다. 청소년 시기인만큼 성적인 문제도 많았다. 좋아하는 남학생이 있는데 자꾸만 동침을 원한다는 기막힌 고민도 있었다. 더 기가 막힌 건 임신과 중절수술에 관해 묻는 질문도 많았다.
아이들은 기상천외한 질문도 서슴지 않고 했다. 놀란 나머지 입이 떡 벌어져 할 말을 잊는 순간도 있었다. 주로 성경험에 대한 질문이었는데 대놓고 묻는 아이들도 있었다. 남친을 몇 번이나 사귀었느냐 언제 첫경험을 했느냐 언제가 가장 좋았느냐 듣다 보면 속에서 분노가 치솟았다.
반면에 성추행 당한 일을 고백하면서 엉엉 우는 아이도 있었다. 주로 친족간에 일어나는 성추행이나 성폭력 사건이었다. 경찰과 긴밀히 연계해 추진해야 할 만큼 중대한 사안도 있었다. 심각한 자살충동에 시달리는 아이를 전문적인 상담자에게 연계해 케어한 적이 있었다.
병원 임상치료도 병행했는데 위급한 상황이었다. 아이는 이미 여러번 자살시도를 했던 만큼 요주의 인물이었다. 공부도 잘하고 친구들과의 관계도 좋았다. 원인은 가정에 있었다. 친모가 자살로 죽고 새엄마가 들어왔는데 가정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부부 사이가 나쁠수록 화살이 아이에게 집중되었다. 전문적인 상담사는 아이에게 치료와 병행하여 기도와 성경공부도 하게 했다. 그 아이가 바로 희영이었다. 아이는 교회 생활에 열심을 내더니 새엄마를 교회로 인도했다. 사실 새엄마도 어린 시절 엄청난 상처가 있었다. 그녀는 가슴을 찢어내는 회개를 통해 상처를 치유 받았다.
희영이는 점차 안정기조를 이루더니 전교 수석으로 졸업했다.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도 직장에 복귀해 가정 평화가 이루어졌다. 기적이란 바로 그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라고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가끔 마약이나 중독에 관해 상담해 오는 아이도 있었다. 세태가 변한만큼 사안도 다양했다.
인명경시 사상도 팽배해 있었다. 상담이 해결보다는 치유가 목적이었기에 보람된 일들도 많았다. 때묻지 않은 동심이라 조금만 상처를 보듬어 주고 관심 가져 주면 아이들은 회복이 빨랐다. 진로를 놓고 고민하는 아이들에게서 희망이 보이는 경우도 많았다.
세상에 정의와 선을 실천하겠다는 천사들도 많았다. 상처로 힘들어하는 친구들을 돕겠다며 어느 전공과목을 택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상담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바탕이 악한 아이도 있었다. 집안으로부터 따돌림 당하고 상처로 왜곡진 사고를 지닌 아이들은 어떤 위로나 상담기법도 통하지 않았다.
가끔씩 이웃 학교 학생들끼리 패싸움이 발생해 경찰이 출동하는 일도 발생했다. 요즘은 중학교 2학년생들이 가장 무섭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물불 안 가리고 악에 담대하기 때문이다. 인터넷이나 영화 게임에서 본 온갖 끔찍한 악의 행태를 동년배에게 그대로 행함으로 악의 본보기가 된 것이다.
요즘 청소년들은 너무 많은 사회악에 노출돼 있다. 악과 선에 대한 개념마저불분명한 세상에 살다 보니 오직 이기심과 개인적인 취향에만 몰두해 있다. 쾌락과 중독현상은 이미 보편화 된 상식이다. 사상과 이념의 혼란은 매번 인터넷을 달구고 있다.
도덕 교육과 인성교육이 시급한 실정임에도 이를 강조하는 기사는 찾아보기 힘들다. 청소년들의 폭력과 욕설은 어떤 교육도 통하지 않을만큼 백약이 무효다는 보고도 있다. 교권이 추락한 건 이미 고전에 속한 이야기다. 수많은 교사들이 이직을 생각하고 있고 학생들의 폭력에 충격을 받아 입원한 기사도 종종 나오고 있다.
왕따 폭력사태가 가장 심각한 곳이 초등학교다. 뿐이랴, 어린 생명을 다루는 어린이집 유치원마저 폭력에 취약한 가운데 있다. 그보다 더 심각한 건 가정폭력이다.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아이들은 학교에서도 동일한 사태에 노출되기 쉽고 심지어 결혼 이후에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흔하다.
통계에 의하면 어릴 때 가정폭력에 시달린 여자들은 결혼 후에도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경우가 70퍼센트에 달한다. 혹시나 사랑받을까 싶어 결혼했다가 똑같이 폭력사태에 시달리는 것이다. 또 그 화는 어린 자녀에게까지 이어져 상처가 대를 이어 반복된다.
어린 날의 상처는 평생을 따라다니며 트라우마가 된다. 그 연결의 고리를 끊기 위한 조치가 필요하다. 사랑과 관심이다. 교육과 상담기조도 필요하지만 영적 힘도 능력을 발휘한다.
영적 기류가 형성되면서 생각속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그래 어차피 한번 살다가는 인생 상처와 싸우다 피투성이가 되느니 마음 편하게 살자. 세영은 아이들과 상담하며 충분한 공감대를 이루었다. 그래 나도 너희들과 똑같은 상처를 겪었어, 그래서 네 마음을 충분히 이해해.
정말요? 아이들은 울다가도 재차 확인하며 물었다. 상처라는 공감대가 아이들에게 힐링이 되었던 모양이다.
아이들은 밝게 웃으며 앞날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자기처럼 상처받은 영혼들을 도우며 살겠다고 했다. 그 말에 세영은 아이를 붙잡고 한참동안 울었다. 진심은 반드시 통한다. 세영이 터득한 상담기법이었다.
그녀는 어린 학생들을 상대로 2년 동안 근무하면서 엄청난 보람과 희열을 경험했다. 그곳을 떠나올 때는 어떤 자신감으로 충만해 있었다. 아이들은 성인이 된 후에도 세영에게 계속 연락을 취하며 서로를 위로했다. 아이들은 각자의 재능대로 진로를 선택했고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의의 군사가 되었다.
그들은 올바른 인성을 위해 스스로 노력했고 반복되는 상처와의 싸움에서 승리했다. 상처와 배반이 잇따르는 인간관계 속에서도 꿋꿋이 잘 버텨냈다. 언젠가 본 책 제목이 생각난다.
미움 받을 각오.
당당히 두려움과 맞서 싸우고 내적 저력을 강화했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냉정하게 이성적으로 대처하는 방법도 터득했다. 힘들었던 지난날은 어떤 어려움을 만나도 견딜 수 있는 힘을 공급해 주었다. 온실 속에서 자란 화초보다 잡초같은 인생이 오히려 멘탈에 있어 강한 법이었다.
중년에 들어선 세영은 혜민과 함께 여행도 자주 떠났다. 여행은 희열과 힐링을 선사해 주었고 낭만심리로 들뜨게 했다. 낭만심리는 자체로도 행복이었다. 인생에 있어 낭만이 빠진다면 그건 너무나 허무한 일이었다. 그리움 또한 마찬가지였다. 과거에서 벗어날수록 마음은 새로워졌고 평안해졌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것이 되었도다. ’
그녀는 항상 마음 속으로 다짐했다.
어차피 한번 살다 가는 인생, 이왕이면 기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다 가자. 이 또한 자유로운 이 땅에 태어난 축복의 결과가 아니던가. 감사의 조건을 찾자면 한이 없을 것 같았다. 현재의 축복에 감사하며 하늘의 상급을 쌓으며 살아가자.
“이왕 한번 살다 가는 인생, 후회함이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살다 갑시다.”
세영의 말에 혜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응수했다.
“그래요, 앞으로 세영씨 앞날에 좋은 일만 생길 거예요.”
“그동안 살아오면서 혜민씨 도움이 컸어요, 혜민씨의 격려가 아니었더라면 난 정말 힘들었을 거예요, 앞으로도 이 고마움 잊지 않을께요.”
“그동안 많은 사람들을 도왔는데 대부분 원수로 갚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런데 세영씨는 내게 믿음을 주었어요, 나 또한 감사해요, 앞으로 서로 도우며 살아가요.”
짙은 단풍이 북한산을 뒤덮던 날이었다. 북한산 둘레길을 걷고 있는데 저쪽에서 누군가 손짓하며 달려오고 있었다. 짧은 커트 머리와 청바지 차림에 흰 운동화를 신은 젊은 여자였다. 가까이 다가올수록 낯익은 인상이었다. 산새가 떼를 지어 하늘로 날아가고 있었다.
여자는 세영에게 다가오더니 덥석 안기며 말했다.
“선생님 저 희영이에요, 기억나시죠?”
아! 그때 그 아이. 상담교사할 때 자살충동에 시달리는 아이를 전문적인 상담자와 연계해 케어하던. 하마터면 말이 나올 뻔했다. 세영은 희영이를 안고서 반가움에 눈물을 흘렸다. 아이는 자라서 성인이 되었고 청소년 상담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가정도 이루어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었다.
남편의 직업을 묻자 희영이 주저하다 말했다.
“전에는 군수업체에 근무했는제 지금은 정부의 요직에 근무하고 있어요.”
“그래, 우리 희영이 장하구나. 남편도 잘 만나고 아이들도 낳고.”
“시부모님이 목회자세요, 아이들은 시부모님이 키워 주시고 저는 제 직업에 충실하고 있어요.”
“저런 결혼도 아주 잘하고 복이 터졌구나.”
“네, 선생님께서 그때 저를 잘 케어해 주신 덕분이에요.”
“그래 새어머닌 잘 지내시고?”
“네, 지난번에 전도사 위임 받고 사역하고 계세요.”
“저런 축복을 팩키지로 받았구나, 그래 우리 희영이 앞으로도 계속 형통하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능력짱이 되거라.”
“감사합니다.”
옆에서 보고 있던 혜민은 부러워 눈물을 글썽였다. 둘레길을 걷는데 계곡 물소리가 마음을 당기며 다가왔다.
“물소리만 들어도 힐링 되는 느낌이에요.”
“그렇죠, 자연은 힐링이에요.”
세영과 혜민이 근처 커피숍에 들어설 때였다. 낯익은 음악이 들려왔다. 러시아 원로 가수 이오시프 카브존이 부른 백학이었다. 갑자기 세영의 마음속에 눈물이 고였다. 민형기가 생각났다. 어린 날 그녀에게 소망을 주었던 말도 생각났다. 슬픈 곡조에 따라 눈시울이 적셔졌다.
그리움도 행복이었다. 둘은 커피를 마시며 오랫동안 만남과 신의 섭리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삶의 이유와 소망을 주신 신에 대해 감사했다. 북한산에 어둠이 짙어지면서 계곡 물소리가 더 힘차게 들려왔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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