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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스크랩 사람들은 왜 자연으로 가는가 [허연의 비블리오필리]
차태현 추천 1 조회 12 13.01.23 12:5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허연의 비블리오필리]

 

사람들은 왜 자연으로 가는가

 

271351 기사의  이미지

 

 

“앞으로 다가올 밤이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편안했다. 모든 일이 그저 당연하기만 했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일이 아닌가.”

오스트리아 태생의 산악인 헤르만 불은 1953년 히말라야의 낭가파르바트 정상 단독 등정에 나선다. 그는 바람을 막을 장비와 추락을 예방해주는 자일도 없이 빙벽에 매달려 밤을 맞이하게 된다.

눈앞에 다가온 죽음 앞에서 29세의 한 산악인은 의연했다. 그리고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일’이라며 산을 선택한 자신의 의지를 후회하지 않는다.

서두에서 직접 인용한 글은 천신만고 끝에 살아 돌아온 헤르만 불이 쓴 <8000미터 위와 아래>라는 수기에 나오는 구절이다.
극한의 상황을 겪은 산악인들의 경험담은 손끝으로는 흉내낼 수 없는 중량감을 지니고 있다.

죽음의 공포와 외로움 앞에서 자기 자신을 들여다본 인간만이 말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누가 감히 그들의 경험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있으랴.

산은 그 자체로 위대하다

이노우에 야스시의 산악소설 <빙벽>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친구와 함께 등반을 갔던 주인공이 혼자 살아서 돌아온다. 자일이 끊어졌던 것이다. 사람들은 실연한 친구 고사카가 자살하기 위해 스스로 자일을 끊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주인공은 이것을 단호하게 부정한다.

“고사카는 산악인이다. 그가 암벽을 오르면서 자살할 이유는 없다. 그것은 산의 신성을 모독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산악인은 산이 원하면 생명을 바치지만, 속세를 청산하려고 산에서 일부러 목숨을 끊는 그런 짓은 결코 하지 않는다.”

산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산서(山書)에는 신변잡기의 소설이나 처세술로 가득 찬 책에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인간정신의 가장 높은 성취가 담겨 있다. 그 책들 역시 결국 산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고 잠시라도 자연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한곳에서 오래 참을 줄 알아야 하고 주의해서 지켜보고 듣는 법을 배워야 한다.”

언뜻 보기에 도를 닦는 법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아니다. 좋은 낚시꾼이 되는 법을 이야기한 말이다. 인간이 오랫동안 즐겨온 취미는 모두 인생과 닮아 있다.

낚시 역시 마찬가지다.

미국의 유명한 심리학자 폴 퀸네트는 이름난 낚시광이다. 그는 자신의 장례식장에 이렇게 써붙여 달라고 주문한다. ‘나 때문에 슬퍼하지 마시오. 신나게 낚시했으니.’ 그에게 낚시는 단순한 어로 행위가 아닌 철학이고 즐거움이다.

그가 쓴 산문집 <인생의 어느 순간에는 반드시 낚시를 해야 할 때가 온다>는 반짝이는 수면에서 낚싯대로 건져 올린 인생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다. 퀸네트의 말에 의하면 낚시는 낡은 일상에서의 일탈이자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일을 함께 하는 것이다.

낚시… 자연의 일부가 되는 법

 

“돌아가신 아버지를 기억해야 하는 특별한 날에는 자신만이 아는 호수로 낚시를 떠나라.

혼자서 낚싯대를 챙겨들고 지도도 없이 해와 별을 지표 삼아 떠나라.

인생에 필요한 세 가지 필수품이 음식, 물 그리고 물고기 미끼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인생을 아는 낚시꾼이다.”

 

이 대목에서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영화가 <흐르는 강물처럼>이다.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플라이낚시를 가르친다. 아버지가 강조하는 건 정통성과 절제, 도덕과 관습이다. 장로교 목사인 완고한 아버지는 네 박자에 맞춰 10시와 2시의 시침 사이 방향으로 정확하게 미끼 던지는 걸 가르친다.
박자를 벗어나거나 방향이 틀리면 호되게 혼이 난다. 형은 아버지의 가르침에 충실하게 따르지만 동생은 낚싯대를 왼손으로 잡는다. 아버지가 아무리 고치려고 해도 소용이 없다.

 

동생은 아버지가 정해 놓은 틀을 벗어났다. 세월이 흘러 대학 교수가 된 형과 한량기 있는 지방 신문 기자가 된 동생이 오랜만에 낚시를 간다.

형은 동생의 낚시 기술을 보고 깜짝 놀란다. 아버지가 가르쳐준 네 박자가 아니라 자신만의 기법을 터득한 것이다.

 

“아우는 강물 위에 서 있지 않았다. 그는 낚싯대와 더불어 강과 함께 흐르고 있었다. 그가 보여준 건 낚시가 아니라 차라리 예술이었다.”

 

그로부터 시간이 흘러 일탈을 일삼던 동생은 어느 날 총상을 입은 시신으로 발견된다. 왼쪽 손이 으스러진 채…. 관습을 거부하지 않은 형은 평범하고 행복한 삶을 살았지만 거부한 동생은 불행하게 인생을 마친 것이다. 그러나 동생은 일탈의 대가로 아름다움을 완성한다.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에는 이처럼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이 영화에서 서로 너무나 다른 형제의 낚시 스타일은 곧 인생관의 차이를 의미한다.

낚시란 단어는 하나지만 낚시 스타일은 낚시꾼의 숫자만큼 많다. 낚시는 곧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퀸네트는 낚시가 깨달음의 과정이라는 진리를 이렇게 설파한다.

 

‘중년의 즐거움 가운데 하나는 멋진 물고기를 놓쳐도 화가 나지 않는 것이다.’

낚시에서 고기를 잡고 못 잡는 것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다. 내가 인생의 어느 한 시기에 흐르는 물을 잠자코 지켜봤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이다.

 

 

 

 

[허연의 비블리오필리]

 

시간과 싸우지 말아야 하는 몇 가지 이유

 

 

189280 기사의  이미지

마천루에서의 점심시간. 록펠러센터에 있는 RCA빌딩 건설현장에서 점심식사를 하는 노동자들. 1932년 작

 

 

국어사전이나 백과사전, 아니면 웹스터 영어사전에서 ‘시간(時間·time)’이라는 단어를 찾아본 적이 있는 사람은 깜짝 놀라게 된다. 그 오지랖이 엄청나기 때문이다. ‘시간’이라는 단어는 ‘신’이나 ‘사랑’같이 딱 잘라서 말하기 힘든 그 어떤 명사나 형용사보다도 훨씬 장황하고 복잡하게 설명되어 있다.

이를테면 이렇다.

“어떤 시각에서 어떤 시각까지의 사이”라는 간단한 사전적 설명에서부터 “지구의 자전 주기를 재서 얻은 단위”라는 물리적 설명을 지나 “사물의 현상이나 운동, 발전의 계기성과 지속성을 규정하는 객관적인 존재 형식”이라는 철학적 설명에 이르기까지 시간은 한마디로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근원적이고 복합적인 단어다.

‘시간’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감당하기조차 버거운 엄청난 의미 영역과 파장을 지닌 단어다. 그리고 인간의 역사는 시간과의 싸움이었다고 할 만큼 인간은 시간을 탐구하고 지배하기 위해 오랜 세월을 소비해왔다.

시간에 대한 개념은 또 동양과 서양, 고대와 현대에 따라 다르다. 노인이 느끼는 시간과 어린아이가 느끼는 시간도 다르다.

시간을 탐구하는 책들이 흥미를 끄는 건 ‘시간’이 가진 그 엄청난 스토리텔링의 가능성 때문이기도 하다.

미국 콜게이트 대학의 천문학·인류학 교수인 앤서니 애브니가 쓴 <시간의 문화사>는 비교문화적 관점에서 시간의 역사를 정리한다. 달력이나 시계의 역사를 통해 인간이 시간을 개념화한 역사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서양력은 예수와 밀접하고 동양력은 농사와 밀접하다.

올해는 그레고리력으로는 2012년이지만 고대 로마 달력으로는 2765년, 유대력으로는 5772년, 이집트력으로는 6248년이며, 단기로는 4345년이기도 하다. 이처럼 달력상의 시간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불완전한 존재다. 그러나 이 달력 속에는 인간이 ‘시간’이라는 거대한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 온 오랜 시행착오의 역사가 담겨 있다. 시간의 궤적을 따라가기 위해 인간이 고안한 모든 기계장치의 중심에는 자연이 들어 있다. 시계의 시침이 가리키는 방향은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의 위치와 일치한다. 그리고 시계의 기본원리인 진자는 매달린 모든 물체가 운동하는 패턴과 일치한다.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이지만 인간의 몸 역시 시계다. 인간의 몸 안에서는 매일 100가지 이상의 진자운동이 일어난다. 10분의 1초 단위로 일어나는 뇌파의 진자운동, 1초 단위의 기본 심장박동, 6초 단위의 호흡주기 등이 그 증거다. 이 같은 생체적 시간 척도는 결국 여성들의 월경주기로 이어진다.

사실 365일이라는 개념도 과거 인류의 동면주기의 흔적이다. 결국 인간이 개념화한 시계와 달력은 몸과 자연의 주기를 찾아내고 그것에 맞는 약속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미 우리 몸에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는 타고난 기능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유명한 과학 저널리스트인 슈테판 클라인의 <시간의 놀라운 발견>은 이 같은 생체적 시간에다가 심리적 인자를 추가한다. 심리적 측면에서 시간과 인간의 관계를 분석한 책이다. 누구나 느끼듯이 흥겹게 놀 때는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고, 지루한 회의시간은 길기만 하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 이 책은 명쾌한 답을 내려준다. 모든 사람은 시간의 흐름을 느끼는 생체적 도구를 가지고 있다. 사람들이 같은 시간을 보내더라도 벗어나고 싶은 시간을 길게 인식하는 이유는 시간의 흐름을 느끼는 모든 생체신호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즐거운 일을 할 때는 생체신호에 집중하지 않는다. 어느새 시간이 지나가 버리는 것이다. 아침형 인간과 저녁형 인간은 세포 속에 들어 있는 시계유전자에 의해 좌우된다. 이 시계유전자는 단백질의 합성과 분해를 조절하는 ‘시교차상핵’에 의해 통제된다. 이 통제 시스템에 의해 아침형과 저녁형이 나뉘는 것이다.

결국 자신의 시계유전자에 맞는 일을 찾아서 종사하는 사람일수록 삶이 행복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가 심리적 시간을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집중력 조절’밖에 없다. 저자인 슈테판 클라인은 어떻게 집중하고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인간은 시간의 노예일 수도 있고, 시간의 창조자일 수도 있다고 조언한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건 시간에 대한 마음가짐이다. 똑같이 하루를 살더라도 억지로 남이 만들어놓은 일정에 따라 움직인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내가 짜놓은 일정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 이 같은 생각이 습관화되면 스트레스가 현저히 줄어들고 하루가 상큼하게 지나간다는 게 슈테판 클라인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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