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2년, 오늘날의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는 과거 동슬라브 민족이 모여 살았던 키이우루스라는 국가에서 시작된다.
1240년, 칭기즈칸이 이끄는 몽골 군대가 아시아와 유럽을 휩쓸었고
키이우루스는 몽골제국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이후 모스크바를 주축으로 하여 모스크바 공국(러시아)이 만들어지고
1480년에 모스크바 공국은 몽골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독립을 하게 된다.
리트아니아에 합병 당한 우크라이나
폴란드에 합병 당한 우크라이나
키이우(우크라이나)는 지리적 이점 때문에 주변 국가들에게 자주 침략을 당했다.
14세기에는 리투아니아에게 강제합병을 당하고
16세기에는 리투아니아와 함께 세트로 폴란드에게 강제합병 당한다.
키이우는 그야말로 주변국들의 샌드백이었다고 보면 된다.
모스크바 공국(러시아)은 거대해지며 루스차르국이라 국명을 변경하였다.
키이우(우크라이나)에서는 폴란드로부터 독립을 원하는 세력(코사크)가 생격났으며
코사크들은 루스차르국(러시아)에 도움을 요청하고 루스차르국과 코사크는 1654년에 "페레야슬라프 조약"을 맺는다.
페레야슬라프 조약의 내용은 "루스차르국이 코사크에게 군사력을 원조 해주고 코사크는 루스차르국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는 내용"
이 조약이 바로 지금까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분쟁을 하고 있는 근본적인 원인 중 하나이다.
러시아는 페레야슬라프조약으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합병 되었다고 주장을 한다.
우크라이나는 일시적인 양자적 군사 보호조약이라고 주장한다.
루스차르국은 키이우를 되찾기 위해 1654년부터 폴란드와 전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생각과 달리 전쟁이 장기화 되자 루스차르국과 폴란드는 서로 지쳐갔다.
결국 1667년 루스차르국과 폴란드는 종전을 선언하며 "안드루소보 조약"을 맺는다.
이로인해 키이우의 서쪽은 폴란드에 합병 되고 동쪽은 루스차르국(러시아)에 합병된다.
키이우는 폴란드로 부터 독립을 하기 위해 루스차르국을 끌어 들였는데
독립은 커녕 나라가 두쪽으로 갈라지며 두 나라에 지배를 받게 된 셈이다.
이후 폴란드는 점점 약해졌고 러시아 제국은 점점 강해졌다.
1795년 러시아 제국은 폴란드로 부터 키이우의 서부지역을 빼았는 것에 성공하였다.
1917년 레닌이 이끄는 사회주의 혁명세력이 "2월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을 무너뜨리고
소련이라는 사회주의 국가를 설립한다.
이때 키이우에서는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독립운동이 일어났으며
1917년 11월 역사상 처음으로 우크라이나라는 이름이 역사에 나타나게 된다.
하지만 소련은 민족주의 세력이 이끄는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원하지 않았고
1918년 우크라이나는 독립을 위해서 오스트리아와 독일을 끌어 들이게 된다.
유럽은 1차 세계대전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고 소련은 오스트리아, 독일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다.
이 시기, 민족주의 정당이 우크라이나를 이끌고 있었고 유대인을 포함한 타민족에 대한 학살이 일어났다.
그러나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고 우크라이나의 짧았던 독립을 물 건너 가게 되었다.
1919년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탄생하고 이후 소련에 가입하게 된다.
레닌은 수많은 공화국과 민족으로 구성된 소련의 국론화합을 위해 민족자결권을 인정했으며
우크라이나를 포용하기 위해 우크라이나 영토를 늘려주고 우크라이나의 언어, 종교, 문화를 존중 했다.
우크라이나 영토는 소련에 속해 있으면서 3번의 변화를 맞게 되는데
레닌은 루한스크와 오데사를 우크라이나에 붙여 버리고
스탈린은 행정구역 편의를 위해 르비우를 우크라이나에 붙여 버리고
흐루쇼프도 행정구역 편의를 위해 중요 군사적 전략지인 크름반도를 우크라이나에 붙여 버린다.
당시에는 같은 나라였기 때문에 이것이 큰 분쟁을 불러 일으킬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후 레닌이 사망하고 스탈린이 소련을 이끌게 되었다.
이로인해 소련은 암흑기에 돌입하고 우크라이나에서는 큰 사건이 벌어진다.
1931년 홀로도모르 사건
당시 산업화를 서두르던 스탈린은 식량을 해외로 수출하며 얻은 모든 돈을 공업에 투자하였고
우크라이나에서 자연재해가 발생하며 대기근이 발생한다.
어른들은 길거리에서 아이들을 사냥해서 인육을 먹으며 버텼고
자신의 아이를 다른 집 아이와 교환하여 죽이고 먹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인육을 파는 시장까지 등장했으며
현지 치안당국은 이 사실을 알고도 넘어가 주었다고 한다.
이때 우크라이나에서는 1000만명의 사람이 잡아 먹히거나 굶어서 죽었고
이 사건으로 인해 아직도 러시아를 증오하는 우크라이나인이 많다.
일각에서는 스탈린이 의도적으로 일으킨 사건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시간이 흘러 또 다시 우크라이나에게는 독립의 기회가 찾아 온다.
1941년 독일이 소련과의 불가침 조약을 깨고 소련을 침공하며 독소전쟁이 시작 되었다.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우크라이나를 이끌던 민족주의 정당의 "스테판 반데라"는 나치와 협력을 하게 된다.
1943년 볼린학살
우크라이나를 이끌던 독립 세력들은 우크라이나에 있는 유대인, 폴란드인, 고려인, 중앙아시아인 등 소수민족들을 학살했다.
폴란드는 이 때 우크라이나에서 학살 당한 폴란드인이 약 10만명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하게 되고
독일은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에 의해 분할통치가 된다.
이후 유럽은 서쪽과 동쪽으로 나뉘며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세력이 대립하게 되었고
1949년 4월에는 미국을 필두로 소련에 대항하는 NATO가 설립 되었다.
그리고 1953년 스탈린이 죽게 되고 소련 내에서는 개혁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소련의 권력자들은 서방과 긴장관계를 풀고 농업과 산업에 집중을 해서 진정한 사회주의 낙원을 만들고 싶어했다.
1953년 4월, 소련은 정치범 수용소인 굴라크에 수감된 정치범들을 석방하였고
1953년 7월, 소련은 중국과 북한을 압박하여 한국전쟁을 휴전 시켰다.
1954년 3월, 소련은 NATO에 가입신청을 하였으나 NATO 회원국들의 상의 끝에 소련은 NATO 가입을 거절 당했다.
1955년 5월 9일 NATO는 서독을 NATO가 가입시켰고
1955년 5월 14일 소련은 이에 항의하며 동유럽 국가들과 함께
바르샤바 조약기구(군사동맹)를 창설한다.
이후 미국과 소련은 냉전시대에 돌입하며 군사력 경쟁을 하게 된다.
미국이 강한 핵미사일을 만들면
소련은 더 강한 핵미사일을 만들었고
소련이 강한 핵미사일을 만들면
미국은 더 강한 핵미사일을 만들었다.
많은 국가에서 미국과 소련의 대리전쟁이 일어났다.
1957년 10월 4일 소련은 인류역사상 첫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 1호 발사에 성공하였고 미국은 큰 충격을 받게 된다.
이는 소련의 본토에서 쏜 핵미사일이 언제든지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며
소련이 미국과의 경쟁에서 앞지른 순간이었던 것이다.
이에 대항하여 미국은 NASA(미국 항공우주국)을 만들어 우주경쟁에 뛰어 들게 되고
1958년 1월 31일 익스플로어 1호의 발사에 성공하고
1969년 7월 20일 소련을 제치고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하게 된다.
1959년 1월 1일, 쿠바에서는 "피델 카스트로"의 주도하에 혁명이 일어나고
친미 세력인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반미 세력의 독재정권이 세워진다.
1961년 4월, 미국은 CIA를 쿠바로 파견해 카스트로의 암살을 명령하지만 여러번 실패하게 된다.
그러는 사이 터키에는 NATO가 소련의 수도를 겨냥하여 핵미사일이 배치한다.
드디어 소련의 수도가 미국의 핵미사일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1961년 10월 30일
소련은 북극 노바야제믈랴 제도에서 비밀리에 핵실험을 하는데
소련 당국은 예상보다 훨씬 큰 차르봄바의 위력에 큰 충격에 빠진다.
소련이 터트린 핵미사일 차르봄바는 비밀리에 진행된 것과는 달리
위력이 너무 강해서 터지자마자 전세계가 차르봄바의 존재를 알아 차리게 된다.
미국의 암살에 위기를 느낀 카스트로는 소련의 흐루쇼프를 찾아갔고
1962년 7월 7일, 미국에 대항하기 위해 쿠바에 핵미사일 기지 건설을 합의한다.
1962년 10월 14일, 미국의 U-2 정찰기에 의해
쿠바에 핵미사일 기지가 건설 되고 있는 것이 발각 되었다.
미국은 깜짝 놀라게 되고 미국의 해군의 전력을 이용해서 쿠바 해상을 봉쇄하게 된다.
1962년 10월 22일 케네디 전세계 연설
지난주에 쿠바에서 공격용 미사일 기지 다수가 건설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를 발견했습니다.
미국은 쿠바에서 발사된 핵미사일이 서반구에 있는 어떤 나라를 공격하더라도
미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고 전면적인 보복 대응에 나설 것입니다.
소련은 NATO가 먼저 소련 본토에 핵미사일을 겨냥하고 있다는 것에 반발하며 미국의 최후통첩을 거절한다.
미국 내부의 우파세력은 핵전쟁을 통해서 소련을 확실하게 박살내야 한다고 케네디를 압박하는 상황이었다.
이로인해 미국은 전병력을 모집하여 전면전 준비를 하게 되고 소련도 전병력을 모집하여 핵전쟁을 준비한다.
유럽에서는 NATO군과 바르샤바군이 비상사태에 들어가며 3차 세계대전 발생 직전까지 오게 된다.
1962년 10월 27일 쿠바 상공에 침투하여 정찰을 하던 미군 U-2 정찰기가 격추되었고
몇 시간 후, 카리브해에 잠복해 있던 소련의 핵잠수함이 미국의 공격을 받게 된다.
이 때 소련의 핵잠수함은 소련 당국과 통신이 끊어져 있었던 상황이었다.
공격을 받자 당황한 함장은 핵전쟁이 시작된 것으로 판단하고
미국의 항공모함(랜돌프)를 향해 핵어뢰를 발사하기로 결정한다.
당시 부함장이었던 "바실리 아르히포프"는 핵전쟁이 시작 됐다는 정확한 증거가 없다며 극구 반대했고 결국 핵전쟁을 막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흐르쇼프는 급하게 라디오와 TV를 통해서 전세계 연설을 하게 된다.
미국이 터키에서 핵미사일을 철수 시키면 소련이 쿠바에서 핵미사일을 철수 시키겠다는 제안을 했다.
케네디는 이를 받아 들이고 미국과 소련은 터키와 쿠바에서 핵미사일을 철수 시키게 된다.
1963년 핵 실험 금지 조약을 통해서
미국, 소련, 영국이 대기권 내에서 핵실험을 하지 않겠다는 조약을 맺으며
3차 세계대전의 위기가 가라앉게 된다.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에서 정권을 잡으며 소련에서는 또 다시 개혁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고르바초프는 언론의 자유와 시민들의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기 시작했고
스탈린 시대에 수백만명이 숙청을 당한 사실을 공표 하였으며
공산당 독재가 아닌 여러 정당을 만들어 개혁을 위한 토론을 장려했다.
고르바초프가 정권을 잡았을 때는 이미 소련의 경제가 많이 무너진 상태였다.
1987년 6월 12일 레이건 대통령은 서베를린 브라덴부르크 문 앞에서 연설을 한다.
고르바초프 서기장, 평화를 원한다면
소련과 동유럽의 번영을 원한다면
자유화를 원한다면 이 문으로 오십시오!
고르바초프 씨, 이 문을 여십시오!
고르바초프 씨, 이 장벽을 허무시오!
독일통일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이다.
1988년 12월 7일 고르바초프는 UN에 방문하여 연설을 하였다.
세계가 바뀌었으므로 국제 정치에서 국가 관계의 본질 또한 변화를 요구합니다.
워싱턴과 모스크바의 관계가 증진되어 세계에 안도의 숨을 쉬게 합니다
나는 우리 국민들과 세계에 책임감을 느낍니다.
새해(1989년)에는 우리 모두가 많은 것을 기대해도 좋을 것입니다.
라고 말하며 독일통일에 대해 긍정적인 연설을 하였다.
1989년 5월 22일 고르바초프는 협상을 제안하였다.
NATO와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같이 해체하자는 제안이다.
그러나 이러한 제안은 거절 당하였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며 독일은 통일을 하였다.
고르바초프의 연설 이후 1년이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고르바초프는 NATO와 바르샤바기구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미국 및 유럽과 여러번의 협상의 자리를 가졌다.
1990년 1월 서독의 외무장관은 공개연설에서 "동유럽과 독일이 소련의 안보를 해치지 않을 것이며 NATO가 동진을 하지 않을 것이다"고 연설했다.
1990년 2월 미국 국무장관은 고르바초프에게 "NATO가 동진 하는 일은 없을 것이며 이는 미국 대통령이 보장한다"고 주장했다.
1990년 4월 11일 영국 외교장관은 고르바초프에게 "영국은 소련의 존엄을 해치는 어떠한 일도 하지 않을 것이다."고 주장했다.
1990년 5월 18일 미국 국무장관은 고르바초프에게 "소련과 동유럽을 분리 시키지 않을 것이다"고 주장했다.
1990년 5월 25일 프랑스 대통령은 고르바초프에게 "NATO와 바르샤바조약기구가 점진적으로 해체되도록 노력하겠다."고 주장했다.
1991년 7월 1일 고르바초프의 주도하에 바르샤바 조약기구(소련 및 동유럽 군사조약)가 해체되었다.
옐친은 소련이 동유럽과 함께 NATO에 가입하여 미국, 소련, 유럽이 협력하여 평화를 이루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NATO는 현재 신규회원을 받아 들이지 않는다는 주장을 하며 소련과 동유럽의 NATO 가입을 거절한다.
https://youtu.be/JUoZqAGqhzI
1991년 12월 25일 냉전시대가 막을 내리고 소련은 해체하게 된다.
이 시기에 푸틴은 KGB 요원의 임무를 맡고 동독에 있었으며
소련붕괴에 대해 크게 현타를 느꼈다고 한다.
소련이 해체되며 우크라이나는 그토록 염원 하던 독립을 하고 자치국가의 주권을 얻게 된다.
문제는 소련이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에 막대한 자원을 투자하여 원자력, 수력, 화력, 핵발전소, 군사기지, 산업화 공장 등을 건설하며 공업지대를 설립했었고
러시아의 영토였던 루한스크, 크름반도, 오데사, 르비우와 많은 러시아 국영 기업들을 우크라이나가 가지고 독립을 한 것이었다.
우크라이나는 엄청난 경제력과 군사력을 가지고 독립을 하였으나 부정부패로 인해서 경제가 박살나게 되었고
세계 3위 핵무기 보유국가임에도 불구하고 핵미사일을 관리할 경제력이 없었던 우크라이나는
핵미사일을 북한을 포함한 타국가들에게 판매를 하려고 했다.
1994년 미국과 러시아는 냉전시대에 대한 트라우마와 핵확산을 막기 위해서 우크라이나와 협상을 하였다.
우크라이나는 미국과 러시아에게 경제적 지원을 받고 핵폐기를 하며 "부다페스트 각서"를 작성함
부다페스트 각서의 대표적인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우크라이나가 핵확산금지조약에 가입할 것
2.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는 우크라이나의 독립과 국경선을 존중할 것
3.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력 사용을 하지 않을 것
4.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핵공격을 하지 않을 것
1999년 대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폴란드, 헝가리, 체코가 NATO에 가입한 것이다.
NATO가 동쪽으로 전진을 하지 않겠다던 말을 번복한 것이다.
NATO가 신규국가 가입을 받지 않겠다는 말을 번복한 것이다.
러시아 내에서 엄청나게 이슈가 되었고 온건파였던 옐친정권 지지율은 박살나게 된다.
평화를 위해 개혁을 하고 노력을 한 고르바초프는 러시아에서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급 매국노가 되었고
옐친 밑에 있던 강경파 푸틴이 체첸전쟁에서 승리를 하며 지지율이 급상승 하게 되고
1999년 12월 31일 옐친은 푸틴에게 대통령직을 주고 물러나게 된다.
(소련이 해체될 때 NATO와 러시아)
현재의 NATO와 러시아의 상황
시간이 흐르고 NATO는 점점 러시아를 향해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NATO에게 끊임 없이 항의를 하고 있는 상황이며
NATO는 세 가지의 반박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구두로 말한 거는 아무 효력이 없다."
"NATO 가입을 원하는 자주 국가의 주권을 침해할 수 없다."
"베를린 장벽을 기준으로 해서 동쪽으로 가지 않겠다고 주장한 거지 러시아쪽으로 안 가겠다고 말한 적은 없다."
소련 해체 이후 NATO 가입국
1999년 폴란드, 헝가리, 체코
2004년 불가리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2009년 크로아티아, 알바니아
2017년 몬테네그로
2020년 북마케도니아
우크라이나에서는 내전이 일어나고 있었다.
1994년에는 러시아 영토였던 동남부 지역을 기반으로 친러 대통령이 당선 되었고
2004년에는 반러 성향의 대통령이 당선되며 우크라이나는 서부와 동남부로 정치성향이 갈라지게 된다.
2014년에는 우크라이나 동남부에서 독립을 주장하는 반정부 단체가 만들어 졌고
반정부 단체는 독립을 요구하며 시위를 했고 시위는 확산 되었다.
이후 반정부 단체는 "도네츠크 인민 공화국 건국"을 선포하였고
우크라이나는 정부군을 투입해 시위대를 진압 하였다.
시위대는 러시아에게 지원을 받아 정부군에 대항하며 내전이 발생했고
러시아가 군대까지 파견하면서 러시아가 크름반도를 장악한다.
당시 일베에도 난리가 났었던 사건이다.
당시에는 크림반도라고 불렀기 때문에 일베에 "크림반도"라고 검색하면 관련 게시글이 나올 것임
이때부터 지금까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계속 충돌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2019년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 대통령은 헌법에 NATO 가입을 명시하는 문항을 넣는다.
2021년 6월에는 NATO랑 합동 군사훈련을 하며 러시아의 크름반도를 압박한다.
이에 대해 푸틴은 서방세력에게 경고 연설을 한다.
2022년 2월 7일 푸틴 대통령 연설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거나 크름반도를 되찾으려고 한다면 핵전쟁도 불사하겠다는 발언을 함
2022년 2월 24일 푸틴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고 과거 러시아 영토를 탈환하고 있다.
현재 미국과 유럽, NATO는 우크라이나에서 손을 뗄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아무리 강한 국가라도 핵전쟁에 휘말리면 피해가 클 수밖에 없다.
미국이라도 핵전쟁까지 감수하며 다른 나라를 지켜주지는 못할 것이다.
결국 푸틴이 원하는 것은 3가지라고 볼 수 있다.
1. 크름반도, 돈바스 지역 반환(러시아 제국 영토)
2. 우크라이나를 포함한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의 NATO가입 저지
3. 우크라이나의 반러 성향의 나치 추종세력 제거(민족주의자단)
- 잘 모르는 게이들도 많겠지만 러시아는 동양인도 많은 다민족 국가이다. 우크라이나에는 민족주의단(나치)을 추종하는 세력이 아직도 있으며 우크라이나 내에서 반러감정, 반이민자 감정을 부추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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