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악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깨달음의 순간은 1965년 1월 10일에 있었는데
무엇 덕분에 일어난 순간이었든지 간에
저는 이후로 수년간 생각없이 멍때리게 되었습니다.
무엇 덕분이었는지 알아보기가 겁날 정도였는데
최근에 호기심이 나서 측정해보았습니다.
의식수준 50만의 존재 덕분이었다,
저항하세요. (팔 버팀)
의식수준 50만의 존재가 보낸 생각 덕분이었다, 저항하세요 (팔 버팀)
하나의 생각. 대단히 강력한 기도를 통해
대천사가 생각 하나를 보냅니다. 슈~욱.
일순간에 사람들이 현실이라고 하는 것으로부터 곧장
또 다른 전체적 현실로 옮겨 갑니다.
빛에 비유하자면, 의식 지도 꼭대기의 1,000 수준이란 것은 세포 속의 원형질이 구워지지 않고
간신히 버틸만한 정도의 빛과 같습니다.
하긴 그 수준에서도 원형질이 구워지긴 합니다.. (청중 웃음)
빛이 아주 강렬하면 보통의 원형질은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아래로 내려가면 눈금이 200인 곳에 이르는데
그때 사랑에서 ‘비非 사랑’으로 넘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이 질적으로 바뀔 뿐입니다.
이와 같이 순서에 따라
어떤 것이 이전 것과 뭐가 다른지 비교해나갈 때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해 역사상의 모든 위대한 사상가들도 잘못된 논리에 걸려듭니다.
최초 원인을 찾다 보면..
이를테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이 존재한다고 논한 것이 최초 원인을 논한 고전적인 사례인데요,
오늘 강의에서는 이 ‘원인’이란 것을 없애버릴 참입니다.
원인은 커다란 걸림돌일 뿐입니다.
누가 ‘원인’이라고 좀 적어 놓으세요.
오늘 ‘원인’을 제거해야한다는 걸 잊지 맙시다.
원인을 생각하다 보면 최초 원인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하는 생각에는
어떤 것에 다음 것이 잇따를 때 질적으로 바뀌는 경우가 많으며
그것도 미처 헤아리지 못한 식으로 바뀐다는 점을
알지 못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질이 바뀝니다!
사람들은 원인이라고 하는 것들을 차례로 들여다보면서 최초 원인하고 똑닮은 뭔가를 발견할 거라 예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최초 원인은 질적으로 다릅니다. 아시겠습니까?
이 얘기를 더 들으면 바로 이해가 될 겁니다.
온도계를 예로 들어,
1,000도를 넘으면 물이 수증기로 바뀐다고 칩시다.
200 눈금까지 온도가 내려가면 물이 얼음으로 바뀌는 겁니다.
그래도 여전히 H2O(물)일 뿐이죠.
그렇지만, 와우~ 질적으로는 엄청나게 바뀌었습니다.
즉 200 수준에 ‘물’ 대 ‘물 아닌 것’이라는
이원성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위쪽 끝에는 뜨거운 물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 크리슈나 같은 분들이죠.
그러다 200 수준에서는 물이 얼음으로 바뀌지만
그래도 여전히 물은 물입니다.
‘물’ 대 ‘물 아닌 것’이라는 이원성은 없습니다. 아시겠죠?
이렇게 설명하면 이해할 분이 많을 겁니다.
입장성(위치성)이 만들어낸 이원성에 걸려 들었을 때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려면 이원성을 만들어내는 입장성을 찾아내서 없애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이원성이 무너져버려서 더이상 보이지 않게 됩니다.
점차 바뀌는 것으로만 보입니다.
‘선’과 ‘악’의 경우를 봅시다.
우선 꼭대기에 있는 ‘선’에서 출발해야겠죠?
이제 점점 더 ‘선’을 줄여 나가다 보면
어떤 입장성을 갖고 있는가에 따라 각자 다른 지점에서 “이런, 그건 ‘악’이야“ 하는 소리가 나올 겁니다.
사람마다 그 지점이 다릅니다.
길거리 아이들은... 저는 길거리 아이들과 많이 상담했습니다.
<소녀의 집>에 청소년이 아주 많았습니다.
해도 되고 안되는 일을 그 아이들이 판단하는 기준은
하버드에서 하는 식하고는 심하게 다릅니다.
뉴욕의 밑바닥에서 하는 식이죠. 아시겠습니까?
암튼 우리한테는 사악하게 느껴질 짓거리가
그 아이들한테는 기분 째지는 일에 불과합니다.
게다가 ‘당한 사람이 자초했다’는 신조까지 있습니다.
남의 가방을 훔쳐 놓고는
“그 여자가 자초한 거죠. 의자에 놓고 갔더라구요.
그럼 어떻게 될지 뻔한 거 아니에요?”
이러는 게 그네들의 입장입니다.
선악의 개념이 그런 식입니다.
“가방을 거기 놓고 간 사람 잘못이죠.“
그렇게 믿습니다. 정말 그래요.
“내가 거기 얼쩡거리다 훔친 게 아니에요.
떡 하니 거기다 가방을 놓고 갔더라구요.”
“그년이 콧방귀를 뀌길래 갈겨 버렸죠.
면상에다 제대로 한방 먹였죠.
그년은 맞아도 싸요. 때려달라고 한 셈이에요.”
이게 그네들이 생각하는 식입니다.
빈 라덴 식이죠.
“미국 인간들은 다 돈 많고 잘 나가.
그러니까 폭탄을 맞아 싼 거잖아. 뭐가 문제라는 거야?”
남들은 똥줄 빠지게 일하고, 없는 살림살이까지 내다 팔고, 밤새도록 택시 운전까지 해서 학교에 다닙니다.
저는 돈벌이를 네가지나 해서 겨우 대학을 마쳤습니다.
여러분이 이제 의대를 나오고
여타 과정을 다 거쳐서 잘 나간다 소리 듣게 되었더니,
그렇게 똥줄 빠지게 고생했다는 이유로 미워하는 자들이 있는 겁니다.
중동에는 글 읽을 줄 아는 사람이 25만명 뿐입니다.
요는 그만 뭉기적대고 일어나, 읽기라도 떼고 나서
뭘 따지든지 하라는 거죠.
암튼 중동 사람들은 미국 사람 욕하느라 너무 바쁩니다.
선과 악은 예수가 말했듯이
“보는 이의 눈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선과 악은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점을 밝히고 싶었습니다.
의식 지도 상에 이원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의식이 질적으로 바뀔 뿐입니다.
의도가 있든 없든 1,000 수준의 의식은 온 세상을 북돋워 줍니다.
위대한 화신들이 일으키는 에너지 장은 지금 이 순간에도 이 세상을 고무하고 지속시킵니다.
이 강연장에 있는 모든 분의 에너지 장은 지금 이 순간에도 이 세상을 유지시킵니다.
지금 어떤 존재인가에 따라 그대로 이 세상을 유지시키고 고무합니다. 아시겠습니까?
이 얘기는 과대망상일까요, 사실일까요?
이 얘기는 과대망상인가? (팔 내려감) 좋습니다.
방금 진술한 것은 사실이다. 저항하세요. (팔 버팀)
사실이군요. 좋습니다.
이렇게 주기적으로 근육 테스트를 해서
에고가 의심 가질만한 건의 진위를 가리기도 합니다.
저는 의식 지도를 통해
선과 악이라는 이원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대신에, 사랑은 점진적으로 달라진다는 얘기를 하고자합니다.
악이라 하는 것은
‘전혀 안 사랑함’을 의미할 뿐입니다.
‘안 사랑함‘의 의식 수준을 연구하는 일..
사람들한테 연구해보라고 권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다른 분은 염려 놓으셔도 됩니다. 하하하~
저는 ‘안 사랑함’을 연구해서 책을 쓰고 있습니다.
『나』라는 책을 마쳐 가는데요,
(※ 제목이 '나'이면『호모 스피리투스』인데
아래 말씀을 보면『진실 대 거짓』이 되어 나온 것같기도 합니다)
그 책에서는 우주가 창조된 뒤 거기에 의식이 처음 나타났을 시점까지 의식의 진화를 추적합니다.
또 그 이후로 의식이 영겁의 세월에 걸쳐
크기와 종류가 다른 온갖 생명체로 진화하여
최상의 것에 이르는 과정을 추적합니다.
그 과정에서 생명은 서로 다른 두가지 노선을 따라 생겨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중 한 노선은 어떤 개체가 살기 위해서는 다른 개체의 생명을 빼앗아야 했던 공룡 시대에 이르러 완성되었습니다.
거대한 파충류와 공룡들은 남을 죽여서 살아갔습니다.
세상에는 남을 죽여야 자기가 사는 종류의 에너지가 있는 것입니다.
그건 극도의 자기애, 나르시시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악’은 정의하자면 극도의 이기심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난 살아야겠으니 넌 죽어줘야겠다.“
빈 라덴 선생은 “난 감정을 표출해야겠으니..”
빈 라덴은 아랍판의 ‘자유주의자 집합소’에서 성장한 게 분명합니다.
기억하십니까? 60년대인가에 유행했죠.
“너 자신을 표출하라. 감정을 억누르지 마라.”
즉 자기 만족의 극치였습니다, 자기 감정 표출하려고 3천명의 목숨을 빼앗는 남의 생명은 하찮게 보는 겁니다.
의식 척도의 맨 밑바닥에는 유독류(有毒類)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독류에 대해 한 장을 할애해서 쓰고 있습니다.
유독류한테는 한번만 물려도 죽습니다.
현존하는 예로 코모도 왕도마뱀이 있는데
원시 본능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정말 강한 유독류는 그보다 훨씬 단순합니다.
상자 해파리한테는 26가지의 치명적인 효소,
즉 26가지의 치명적인 독이 있습니다.
상자 해파리는 한번만 죽이지 않습니다.
26가지 방법으로 26번 죽입니다.
후와~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한가지 독만 있어도 되는데 말이죠.
‘블랙 맴버’라는 의식 수준이 35 정도로 측정되는 아프리카 독사한테도 그런 신경독(毒)이 잔뜩 있습니다.
그렇지만 궁극의 흉악범은 바다 밑바닥에 사는 작은 연체 동물입니다.
기다란 라틴어 이름인데 기억이 안 나네요.
이 녀석은 먹잇감의 껍질을 뚫고,40가지 효소로 된 엄청난 독 칵테일을 찔러 넣는다고 합니다.
한가지로도 충분히 죽일 수 있는데 이 놈들은 독을 쏘고 또 쏩니다.
게다가 매번 다른 효소계(系)의 독을 쏩니다.
이런 생물이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다고 할 수는 없겠죠. 그냥 되는대로 진화가 일어나다 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이면에는 어떤 지성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됩니다.
궁극의 독은 치사량을 40배나 초과합니다.
각기 다른 효소가 40가지나 됩니다.
지구 상에서 최고로 포악한 생명체로 ‘깔대기 그물 거미’라는 것도 있는데 이 녀석들은 군대 전체를 몰살시킬만한 양의 독을 품고 있습니다.
이런 지나친 살기는 무엇때문일까요?
왜 이리 지나칠까요? 왜 그렇게 극단적일까요?
그런 쪽으로 진화하는 노선이 있는 것이고
앞서 이야기했듯이 그런 노선은 이미 공룡 시대에 완성되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공룡은 싹 없어졌습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아무도 이 자리에 없겠죠.
오래 전에 잡아먹혔을테니까요. 하하하~
유독류만 아니라 온순류도 있습니다.
포유류가 있고 가축이 있죠.
사슴은 아무 것도 죽이지 않습니다.
사슴은 꽃부리 밭과 산소, 태양 에너지만 있으면 살 수 있고 아무 것도 죽이지 않습니다.
사슴은 풀을 뜯어먹고 삽니다.
뜯어 먹어도 풀뿌리는 남아 있구요.
사슴은 돌아다니면서 배설을 해서 풀에다 비료를 줍니다. 그래서 풀이 더 많이 자라고, 비도 더 오고, 산소가 더 생기고, 꽃부리 밭이 늘어납니다.
즉 초식 동물은 생명에 도움을 줍니다.
노새가 살기 위해 대신 죽어야하는 것은 없습니다.
소와 양이 살기 위해 대신 죽어야하는 것은 없습니다.
이렇게 진화는 마치 서로 다른 두가지 노선으로 진행되는 듯합니다.
데이비드 호킨스
의식 지도는 이원성을 초래하는가
- 2002년 1월 강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