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잠깐 동안의 행복. ---> 그 새끼 고양이의 정체는? [8]
투기장의 돼지에게 내 볼일을 다 본 나는 뒷일은 신경도 쓰지 않고 밖으로 나왔다.
아아.. 상쾌해.... 한 10분 정도 후면 그 돼지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지겠군. 그런데 저 사람들은 뭐지?
투기장을 천천히 걸어 나오면서 물러서려고 애쓰는 사람들과 구경하려고 몰려드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이거.. 내가 너무 유명해진 것 같은데? 후훗... 역시 사람(?)이 너무 잘 생겨도 탈이라니깐....
그렇게 서서 우월감에 취해 있던 나는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다시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리오스, 그렇게 서서 고개만 쳐들고 있지 말고 얼른 좀 가요. 사람들이 자꾸만 쳐다봐서 창피하다고요."
".....알았어."
가이나의 목소리를 들은 난 줄을 잡아 당겼지만 베히모스는 내게 다가오려고 하지 않았다. 이거 역시 동물 우리에 넣어갈 껄 그랬나. 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끌고 가지, 뭐.
나는 다시 한번 베히모스를 매달아 놓은 줄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네 발로 선 키가 2미터 정도나 되는 베히모스는 반항(?)을 했다.
나를 적개심에 찬 눈으로 쳐다보는 베히모스. 어린 아이가 너무 건방진데, 이거.... 확 그냥!! 아냐... 참자... 참는 게 이기는 거야.. 음음...
"좋은 말로 할 때 따라오는 게 좋을 걸, 베히모스."
난 드래곤 피어를 은근히 실어 그렇게 말했다. 뒤에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소녀 부대(?)와 우리를 재밌다는 듯이 쳐다보던 행인들이 무언가를 느낀 듯 했지만 일단은 이 어리디 어린 새끼 베히모스를 이동시키는 것이 먼저였다. 뭐, 덩치로 봐서는 아직 어린 새끼(?)라는 생각이 들진 않았지만....
순간 움찔한 베히모스. 잠시 동안 나를 놀랍다는 듯이 바라보았지만 이윽고 다시 그 눈은 적개심을 가득 찼다. 그리고 베히모스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살기. 내게 반항(?) 하려는 듯이 천천히 일어섰다.
"애들은 패면서 가르치라던가......"
그렇게 중얼거리던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런 나를 바라보곤 또다시 움찔하는 베히모스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너 오늘 잘못 걸린 줄 알아!
우웨억.........
인간들이 펼쳐놓은 마법진에 꼼짝없이 누워있는 척하던 베히모스는 언젠가부터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주위의 인간들의 수가 아까 전부터 몇 배로 늘어나 있었지만 별 신경은 쓰지 않았다.
지금 인간들이 무슨 짓을 한다고 해도 강철보다도 단단한 자신의 몸에는 아무런 상처도 낼 수 없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새끼의 목소리가, 아니 정확히는 비명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꾸우웨엑.....
또 다시 들려오는 목소리. 하지만 너무나도 미약했다.
'내가 어떻게 된 건가. 아님 진짜로 들리는 건가.....?....'
잠시 동안 자신에게 이상이 생겼는지 의심하던 베히모스는 인간들의 부산한 움직임과 그들이 나누는 말에 지금 자신에게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사실에 안심했다.
베히모스가 자신들의 대화를 듣고 있는지도 모르고 열심히 대화를 나누는 경비병들.
"이봐, 뭐하고 서있는 거야. 별동 1, 2, 4부대를 제외한 모든 부대는 지금 빨리 집합하란 소리 못 들었어?!"
"그게 무슨 소리야?"
"너....!! 입에 흐르는 침이나 닦어!"
"흘, 흘렀어?"
그렇게 대답하며 입에 흐른 침을 닦는 경비병 A. 그를 바라보던 경비병 B가 말했다.
"지금 빨리 가야하니까 얼른 따라와."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냐니까."
"으이구, 답답한 놈. 좋아, 잘 들어. 마을에 있는 투기장은 너도 알지?"
"빌어먹을 인간이 갖고 있는 그 악명 높은 투기장 말이야? 거긴 왜?"
"악명 높은 투기장에서 수십 명의 소녀가 나왔어. 그것도........"
그렇게 말하던 남자는 흘낏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어둠만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남자는 그 쪽이 의심스러운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왜 아무런 말도 안해? 궁금하잖아."
경비병 A가 말이 끊긴 친구를 재촉했지만 친구는 더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경비병 B는 자신이 달려왔던 길로 다시 뛰어 가며 말했다.
"더 듣고 싶으면 따라와. 난 지금 얼른 가야겠어! 소집 명령도 명령이지만 며칠 전에 행방불명된 우리 딸이 투기장에서 나온 소녀들 속에 있을지 누가 아는가!"
경비병 B가 가고 나자 뒷말이 궁금해진 경비병 A는 결국 친구의 뒤를 따라 달렸다.
소집 명령이 거짓 같았지만 자신의 호기심을 주체하기는 힘들었기에.
경비병이 사라진지 5분 정도 지났을까... 경비병 B가 바라보던 어둠 속에서 중년의 남자가 걸어 나왔다.
약간은 중후해 보이는 중년의 남자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이 한 곳을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그 때, 그의 모습을 보던 베히모스가 그에게 마음으로 말을 걸었다.
중년인이 자신이 기다리던 말을 했을 때, 흥분하지 않도록 '인내'란 말을 속으로 되뇌이며.
[인간이여.... 그대는 무엇때문에 아까부터 내 주위를 맴도는가?]
중년인은 자신의 마음에 직접적으로 들린 소리에 놀란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곧 평정을 되찾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 이름은 레일이라고 합니다. 베히모스. 곧 이곳에...."
레일이 뒷말을 잇기도 전에 공간이 뒤틀리면서 마나가 응축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슈웅......
공간의 문이 열리면서 한 명의 인간과 한 은빛의 짐승이 떨어졌다.
후아.... 이제야 도착인가...... 갑자기 몰려든 인간들 땜시 깜짝 놀랐잖아....
휴우.. 뭐, 우리 일행이야 내가 미리 연락을 해두었지만.......
돼지를 협박해서 베히모스와 소녀들이 갇혀 있는 곳을 알아낸 나는 곧 그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그 와중에 잠깐 동안의 불상사가 있었지만, 내 능력하에서 해결되는 일이라 용케 해결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많은 수의 소녀들은 도저히 내 능력 밖의 일이었다. 인간으로 몰리모프 중인 내가 그 많은 소녀들의 집을 수소문하고 찾아줄 수는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엄청나게, 정말로, 대단하게, 아주 아주 퍼펙트하게 영리한 나는........ 험험....
하여튼 나는 우리 일행 중에 '공주'라는 직책을 가진 소녀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 낸 것이다. 너무나도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여튼 나는 통신 마법 [커뮤니케이션]으로 우리 일행에게 그곳으로 오도록 했던 것이다.
으음... 이렇게 논리 정연하게 말을 하기도 힘이 드는군.. 어쨌든지 간에 거기 일은 일행이 알아서 할 테니 신경은 안써도 될 테고....
쿠쿵....
뭐, 뭐야? 태산이 무너지는 듯한 이 소리는? 놀란 내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어미 베히모스가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결계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벌떡 일어나서 새끼를 살피고 있네.
어미 베히모스가 새끼 베히모스의 몸을 여기저기 살펴보고 있었다. 대충 6미터 정도나 되는 신장이 서있어서 바라보려면 고개를 높이 들고 바라봐야 했다.
새끼 베히모스는 여기저기 멍이 든 얼굴로 어미가 핥아주는 것을 기분 좋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부럽군.... 그런데 저 녀석.. 갑자기 왜 나를 저렇게 쳐다보는 거야?
저게 아직 맛을 덜 봤나?
[고맙네, 리오스.]
어미 베히모스의 목소리가 내 머릿속에 들렸다. 그 말속에는 감사한 마음이 가득 들어 있었다. 아무래도 마음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라서 이런 건가?
[아니, 드래곤이라고 불러야겠는 걸?]
엑? 어떻게 안거지? 마음속에 울리는 베히모스의 목소리에 놀란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베히모스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베히모스는 이미 새끼에게 모든 것을 전해들은 듯이 나를 바라보고 웃고만 있었다.
하지만 저 커다란 베히모스가 웃는 것을 보니.. 좀 그렇다는 생각이 드는 건......
아무튼 저 베히모스의 입을 막아놓는 게 급선무겠지?
"베히모스. 그 일에 대해서는....."
[아, 알았네. 비밀을 지켜달라는 말이겠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는군. 하긴 괜히 나이먹고 살아왔겠어? 아차, 그리고 또 한 가지 할 말이 있었지. 어미 베히모스에게 감사의 뜻으로 목례를 하고 나서 새끼 베히모스에게 물었다.
"네게 물어볼 말이 있어, 베히모스 리틀."
그냥 새끼 베히모스라고 말하는 것이 좀 어색해서 베히모스 리틀이라고 불렀다.
녀석은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푸훗........ 눈 주위가....... 퍼래.....
키킥......
"쿡.. 키킥........"
내가 웃는 것을 보고는 베히모스 리틀은 화가 났는지 살기를 내뿜으며 나를 바라 보았다. 하지만 곧 고개를 내리고 말았다. 짜식이 말이야... 나랑 눈싸움해서 이길 생각을 하다니. 확 손을 더 봐줄까? .......
이럴 때가 아니지, 얼른 물어봐야지.
베히모스 리틀에게 궁금한 것을 몇 개 묻고 그에 대한 대답을 들었다. 잠깐 반항을 하려는 것 같았던 것이 없지만은 않았지만 그래도 꾸욱 참으며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성질 참 많이 죽었다..... 그 때 멀리서 어떤 소리가 들렸다.
와글........... 와글...... 우두두두...
"저기 베히모스의 머리가 보인다!!!!"
"어서 가서 모험가 일행을 불러!!!"
인간들이 온갖 난리를 피우는 소리가 들렸다. 여지껏 모르다가 이제서야 알아채다니 참 대단한 경비병들이야.......
[우린 이만 가봐야겠네, 리오스. 아, 그렇지.]
헤어질 인사를 하던 베히모스는 잊을 뻔 했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곤 고개를 숙였다.
갑, 갑자기 왜 저러는거지? 깜짝 놀랐지만 잠시 후, 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똑, 또르르르르.......
구슬 같은 것이 베히모스의 눈에서 흘러내렸다. 그것은 눈물이 아니지만 인간들은 '베히모스의 눈물'이라고 부르는, '대지의 구슬'이었다.
대지의 상급 정령까지 소환이 가능하게 해주고, 임의로 반경 20미터 이내의 땅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전설 속에서나 나올만한 구슬.
이건 구하기도 힘든 건데..... 워낙 베히모스가 다른 존재에게 도움을 받는 경우가 거의 없었기에 그런 것이었다. 물론 우리 드래곤이야 마법도 있고, 정령 마법도 쉽게 배울 수 있는 터라 없어도 됐지만......
[그건 내 감사의 표시이니 그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그럼 이만....]
그렇게 말한 베히모스는 새끼와 함께 순식간에 사라져갔다. 히야.... 빠르다. 저 정도라면 우리 드래곤이 평소 때 날아다니는 거랑 별 차이가 없겠는 걸. 어쨌거나...
이런 것이 당장 필요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다다익선이라고,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구슬을 집어 챙긴 후, 난 레일과 함께 숙소로 워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