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0일. 월요일
[발렌시아-그라나다]
7시가 되었음에도 이곳은 해가 늦게 뜨는 탓에 밖은 아직 깜깜하다. 말이 그렇지 해가 어찌 늦게 뜰 수 있겠는가, 표준시와 썸머타임으로 시각을 앞으로 당겨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해 뜨는 시각을 늦췄다고 해야 맞겠다. 우리나라가 그렇듯이 스페인도 자국보다 동쪽인 프랑스와 같은 표준시를 쓰고 하절기에는 썸머타임을 실시하는데, 표준시를 그리 정한 것에서부터 그를 변경하려는 논의에도 정치적인 여러 요소가 작용하여서 쉽지 않다니, 어느 나라나 그놈의 정치는 사람들의 머리를 아프게 하는가 보다. 골치 아픈 것을 풀기 위한 것이 정치가 아닌가? 어제에 이어 오늘도 새벽 3시에 어슴푸레 깬 잠에서 뒤척이느라 내 머리도 개운치 못하다. 다행히 그것은 정치 탓이 아니라 시차 탓이다.
그라나다로 가는 길은 어제 왔었던 길과 별다름 없이 고온에 건조한 지형이다. 몇 시간을 달려왔음에도 물기조차도 없어 그저 황량하기만 할 뿐인 붉고 메마른 땅만 펼쳐있다. 그나마 올리브나무와 오렌지나무를 심어놓은 농장들이 있어 이곳이 사람의 손이 닿은 땅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어제도 그러했듯이 사람이라고는 그림자도 볼 수 없었고, 물 구경 할 작은 하천 하나 만나지 못했다. 그렇게 사막과도 같은 경관인지라 이곳에서 많은 서부영화가 촬영되었다고 한다. ‘아니, 미국 서부에 그 넓고 많은 사막을 두고서 하필 먼 여기까지 와서..... 아하~ 마카로니 웨스턴!’
휴게소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어차피 오랜 이동시간 도중에 필수인 휴식 시간을 점심식사 시간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하기는 휴게소 말고는 식당은커녕 앉아 쉴 곳이라고는 없으니..... 얇게 썬 하몽 몇 장과 큰 멸치처럼 생긴 것이 아마도 새끼정어리가 아닐까 짐작되는 한 뼘가량 크기의 튀긴 생선 두 마리가 점심 식사로 나왔다. 하몽은 여러 차례 여행 프로에서 접한 덕에 구면인 듯 낯설지 않았고, 대가리와 뼈를 통째 튀긴 생선의 짭짜름함에 내 나름의 호기심을 더하여 먹었다.
올리브와 오렌지가 심겨있으니 농장임이 분명하겠지만 메마르고 황량함에는 다름이 없다. 멀리 보이는 시에라네바다산맥의 정상에는 아직 채 녹지 않은 눈이 남아있다. 미국의 시에라네바다산맥이 이곳에서 이주해 간 사람들이 고향을 그리워하여 이름을 붙인 것이라 한다. 고향..... 이름이라도 그리 지어서 그리움을 달랠 수만 있다면야. ‘그라나다’가 ‘석류’라는 말에 중국 시안(西安) 여행이 떠올랐다. 시안의 외곽에는서역에서 실크로드를 따라 이주해온 것이라는 석류 농장들이 즐비했고, 회족(回族)거리의 상점에는 그 석류가 수북이 쌓여있었었다. 석류의 고향- 그 서역이 바로 이곳 안달루시아지방을 뜻하는 것일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잠자고 있던 실크로드의 그리움이 슬며시 고개를 내밀었다. 여행길에서 여행을 그리워하다니.....
내가 그라나다라는 단어를 처음 만난 것은 현대자동차에서 만들었던 대형승용차 이름이었다. 그때는 그것이 이곳 도시 이름이라는 것도 알지 못했다. 당시만 해도 자가용이라는 것이 나와는 무관한 물건에 불과했고 더구나 그라나다라는 차는 그 자가용 중에서도 최고급 차에 붙여진 이름일 뿐이었으니 그 이름이 무슨 뜻인지도 관심 밖의 것이었다. 하기는 그라나다가 이렇게 먼 스페인의 어느 도시 이름이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그나마 그 차마저도 더 멀게 느껴졌을지 모를 일이기는 하다.그런데 차 이름에는 왜 지명을 즐겨 붙이는 것일까?
발렌시아에서 5시간 반을 달려서 드디어 그라나다에 들어섰다. 메마른 풀마저 듬성듬성한 낮고 헐벗은 산비탈의 흙이 무너져 내린 절벽의 이곳저곳을 뚫어 만든 집시들의 거주 토굴이 우리 일행을 맞았다. 그 모습이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하늘과 너무나 대조적이다. 이곳 안달루시아의 메마르고 척박하고 황량하다는 땅의 이미지만이 그들의 몫이던가?
알함브라라는 이름은 ‘붉은 성’이라는 뜻으로, 철 성분이 섞인 성곽의 흙빛 때문이라고 한다. 그 이름에 걸맞게 알함브라는 언덕 위의 붉은 성벽으로 내게 나타났다. 성벽은 군데군데 표면이 떨어져 나가 속살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흙인지 사암인지 모를 벽돌을 쌓아 올리고 그 외면을 흙으로 매끈하게 치장한 성벽은, 온전한 곳이나 드러난 속살이나 모두가 붉은 흙빛임에는 다르지 않았다.
그 성벽 아래를 돌아서 다다른 입구는 아무런 치장도 없이 그저 벽을 뚫고 기둥처럼 돌을 쌓아서 구멍을 만들어 놓은 형태였다. 입구 한쪽 옆, 머리 위에는 문패가 붙어있었다. 문패- 그 말이 적당하다. 레스토랑 웨이터의 가슴에 달고 있는 이름표를 그대로 닮은, 흰색 작은 크기의 문패에는 ‘ALHAMBRA’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물론 그 문패야 근래에 안내표지판 정도로 달아 놓은 것이겠지만, 전혀 나의 예상 밖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문의 안과 밖을 나누는 별다른 구별이 없었다. 너무 뜻밖이지 않은가. 알함브라궁이 어떤 곳인가. 당연히 그 대단한 이름에 걸맞은 거대한 문루나 화려한 파사드가 버티고 있어야 하는 것이 내가 아는 상식이었다. 우리나라의 궁궐이나 이름있는 건축물들은 물론이고, 내가 본 몇 안 되는 외국의 유명 건축물들도 예외 없이 모두가 입구의 치장에 공을 들여놓았었다. 그들에 비하여 알함브라의 입구는 너무나도 싱거웠다. 오해 마시라. ‘싱겁다’는 나의 말이 볼품없다거나 허접하다거나 기대에 못 미친다거나 하는 그런 의미가 절대 아니다. 앞서 말한, 내 머리에 각인되어있는 출입구에 대한 관념을 벗어나서, 권위적이지 않고 거만하게 힘주어 부풀리지 않아서 소박한 이웃과도 같은 자태로 나를 맞아 준 덕분에, 나도 모르게 긴장하며 대비했었을 내 마음이 싱겁게 풀어진 듯하다는 의미에서 쓴 말이다. 사실은, 내세우지 않고 겸손한 듯한 그 입구에 찬사를 바치고 싶은 것이 솔직한 내 마음이었다. 하지만 더 말할 것 없이, 출입구에 대한 나의 이야기가 단지 내가 본 출입구에 관한 생각에 불과하다. 내가 간 곳 말고 거대하고 화려한 다른 출입구를 따로 갖추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또 궁의 성격과 건축물의 형식이 우리의 궁전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보면 출입구의 의미 자체가 전혀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저 내가 들어갔었던 알함브라의 출입구의 느낌에 대한 장황한 이야기이다.
내게 ‘알함브라’라는 말을 처음 들려준 사람은 고향 친구이다. 여름방학 어느 날 우연히 그의 오묘한 기타 연주를 듣고 놀라는 나에게 ‘알함브라궁의 추억’이라는 곡이라고 했다. 궁인지 추억인지 하는 제목은 무슨 소리인지 알 바도 없고, 그저 귀신같이 현란한 손가락 놀림과 잔잔한 물 위에 부서지는 달빛과도 같이 영롱하게 쏟아지는 기타 소리에 넋을 빼앗겼더랬다. 세월이 한참 지나고서야 그 알함브라라는 궁전이 환상의 궁전이 아니라 지구 저쪽 어느 나라에 실존하는 궁전이라는 것을 알고서, 내 가슴속에 막연한 그리움의 씨앗 하나가 더 심어졌었던 듯하다. 하지만 그 씨앗은 싹틈은 고사하고 싹틀 꿈조차도 꾸지 못하고 잊힌 듯 어둠 속에서 잠들어 있었다. 그러고는 잠에서 깨어나 보니 부자가 되어있더라는 말처럼, 복권에 당첨이라도 된 듯 내가 지금 그 알함브라 앞에 서 있다.
기독교에 정복당한 많은 이슬람 모스크의 운명들이 그러하듯이알함브라궁도 이곳을 빼앗은 기독교 왕조가 그 안에 자신들의 궁전을 짓기도 하는 등 궁궐이 이질적으로 개축되고 훼손되기를 거듭하며 차츰 퇴락을 거듭해 갔다. 이후 전쟁과 지진으로 인한 피해 등이 더하여지며 완전히 방치하는 바람에 궁전은 집시와 강도들의 무단거주지로까지 전락하는 등모두의 관심에서 멀어지기만 했다. 그렇게 잊혀 지내던 궁전은 19세기 중반이 가까워질 무렵 한 미국인의 노력으로 다시 주목받기 시작하여 보호와 복원이 시작되었으며, 지금도 원형 회복을 위한 공사가 이어지고 있다. 입구를 들어서서 처음 만난 카를로스5세 궁전이 바로 이 성의 애초의 주인이었던 무어인들을 몰아내고 기독교가 점령한 다음에 지은 건축물이다. 대부분의 다른 건물들이 벽돌에 흙을 바르거나 돌과 흙을 섞어 쌓은 평면의 외관을 하고 있음에도, 이 궁전만은 크게 자른 사암을 앞면이 돌출되도록 다듬어 쌓은 요철 형태의 벽을 가진 점이 확연히 달랐다. 그러함에도 색조만은 같은 붉은 황토색이어서 내 눈에 크게 이질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 문을 들어서면 내부는 텅 빈 원형광장이 자리하고 있다. 네모난 건물 안에 원형광장이 있어서, 굳이 비유하자면 우리 돌솥의 받침틀 모양이랄 수 있겠다. 광장의 2층 난간 아래위로 촘촘히 세워진 기둥의 주춧돌도 네모 위에 원형으로 조각되어있다. 마치 우리나라 궁전 기둥의 주춧돌을 옮겨놓기라도 한 듯 너무도 흡사했다. 우리 궁전 주춧돌의 그 네모와 원형이 천원지방(天圓地方)*을 뜻하는 것이라는데, 그것이 여기에서 간 것일까? 아니면 거기에서 이리로 온 것일까? 아무려나, 우리나라 종묘의 나무로 된 열주들이 장엄하듯이 역암으로 만든 이 궁전의 늘어선 기둥들 또한 아름다웠다. 반복되는 것에서는 어딘지 모르게 엄숙하고 위압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거기에는 깊은 아름다움이 함께할 때도 적잖이 있는 듯하다. 특히 반복되는 그것이 단순할 때 그 효과는 더 클 수 있다는 것이 내 짧은 생각이다.
애초에는 망루였었다는 벨라의 탑 꼭대기에는 기독교가 그라나다를 정복한 기념으로 설치했다는 종이 홀로 외로웠다. 이곳을지키는 요새였다는 알카사바에 올라서면 그라나다의 사방을 한눈에 내려 볼 수 있다. 한쪽으로는 서러움을 불러올 만큼이나 끝없는 허허로움을 맛볼 수 있고, 돌아서면 구릉 크기의 벌거벗은 산들이 늘어선 골짜기의 정겨움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 어느 곳이든 그 땅을 차지하고 있는 집들이 붉은 지붕과 흰 벽을 가졌다는 점에서는 별반 다르지 않다.
그 집들은 크기와 높고 낮음과 창문의 넓고 좁음과 많고 적음 등으로 천차만별임에도 불구하고, 형태와 색상의 일관성 덕분인지 어느 것 하나 두드러지지 않아서 모두가 고만고만하다는 동질성이 느껴지도록 했다. 마치 파스텔톤의 타일로 모자이크해 놓은 듯한 일체감을 주는 그 집들의 틈바구니를 뚫고 나온 듯 군데군데에는 뾰족한 싸이프러스 나무들이 파수꾼처럼 늠름하게 서 있다. 모든 산과 집들이 궁전과 이질적이지 않아 궁전을 호위하고 받쳐주고 있기라도 하는 듯이 하나로 어울렸다. 벌거벗은 붉은 산을 두고도 아름답다니..... 아무래도 내 눈에 콩깍지가 씌지 않고서야.
헤네랄리페 정원의 회랑을 따라 걸으며 창을 통하여 바라보는 그라나다 시가지의 모습은 앞서 알카사바에서 보았던 모습과는 또 다른 맛을 안겼다. 아치형 창틀 안으로 보이는 풍경은 액자 속의 그림이었다. 풍경에 취해 무심코 걸음을 옮기는 중에 지금껏 보지 못했던, 화려한 벽돌 기둥과 반복하여 새겨놓은 기하학적인 무늬가 현란한 곳이 갑자기 나타났다. 벽면 높은 곳에는 아치형의 작은 창을 사방으로 뚫어놓았고, 구운 벽돌로 만든 것으로 보이는 퍼져나가는 꽃문양의 창살을 통하여 들어오는 빛이 그깟 바깥 경치 따위는 잊어버리라는 듯이 눈을 홀렸다. 여인의 귀에서 대롱거리는 귀고리랄까 한복의 노리개랄까. 비록 크지 않고 넓지 못해 아쉬웠지만, 그래서 그 화려함은 더 돋보이는 듯했다.
알함브라는 지금까지 달려왔던 척박한 땅들과는 달리 오래된 나무들로 이루어진 숲과 적당한 바람과 함께 피부에 느껴지는 촉촉한 습기가 상쾌함을 안겨주었다.
궁전의 이곳저곳을 돌아나가는 물은 멀리 시에라네바다산맥에서 흘러내린 것을 끌어온 것이라 한다. 지중해 주변 곳곳에서 하늘을 찌를 듯이 뾰족이 자라고 있는 싸이프러스 나무가 이곳 정원에서는 모습을 바꾸어 어떤 것은 둥글게 개선문의 모양을 하고서 분수와 어울리고, 또 어떤 것들은 각지게 다듬어져 수로를 따라서 담벼락을 이루듯 도열해있었다. 궁 안에 자리 잡은 건물들은 위압적일 정도로 치솟은 건물이 없고, 과하게 장식하려고 애쓴 곳 또한 없는 듯했다. 그 원인 중 하나가 사암과 흙이라는 소재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지만, 그 연유가 어디에 있건 정원들과 숲 사이에 자리 잡은 각각의 건물들은 내가 궁의 입구에서 느꼈던 감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나치게 높지 않아 마음이 편안하였고, 지나치게 화려함을 피한 듯하여서 친근하였다. 풀어낸 그리움보다 더 많은 미련을 새로이 품고서 알함브라를 뒤로했다.
그라나다가 그리스도교도에게 함락된 후 이슬람교도들의 집단 거주지였다는 알바이신 지구는 온통 흰빛으로 칠해진 좁은 골목길에 주택가와 기념품 가게와 갖가지 상점과 레스토랑이 조밀하게 자리하고 있다. 골목길의 바닥은 모두 타일과 다듬은 돌과 자갈로 모자이크하듯이 빈틈없이 깔아놓았다. 옛 왕국의 화려함과 부유함이 느껴졌다. 구석지고 손바닥만 한 크기의 빈터는 물론이고 골목길 옆의 비좁은 공간에도 영락없이 노천 테이블이 펼쳐있고, 테이블마다 타파스와 맥주 등을 즐기는 친구와 가족들로 붐비고 흥겨웠다. 그런 길을 따라 돌아서 알함브라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언덕에 올랐다.
멀리 숲속 장엄한 궁전의 모습이 서쪽으로 기우는 햇살을 받아 더욱 두드러졌다. 알함브라는 13세기 초 이베리아반도의 무어인들이 그리스도 교도에 의해 모두 쫓겨나고 유일하게 이곳 그라나다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마지막 이슬람왕조가 건설하기 시작하여 100년에 걸쳐 완공한 것이라니, 궁전은 시작부터 이미 그들의 황혼을 안고서 건축된 셈이다. 이곳을 빼앗기고 북아프리카로 가야만 했던 그라나다 나스르 왕조의 마지막 왕은 “영토를 빼앗기는 것 보다 이 궁전을 떠나는 게 슬프구나.”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쫓겨온 사람들의 궁전이래서 인가..... 붉은 흙빛 때문인가..... 기울어 가는 햇살 탓인가..... 궁전은 거대한 덩치를 하고서도 외로웠고, 아름다우면서도 서러웠다. 촌수도 먼 남의 이야기에 내 마음이 아려오다니 이 무슨 나이 먹은 남자의 주책인가! 저물어가는 해를 따라 언덕을 내려왔다.
이슬람사원이 있던 자리에 세웠다는 그라나다 대성당과 왕실 예배당을 눈으로 인사 나누고, 우리도 카페 한쪽에 자리를 얻어 맥주 한잔과 타파스 한 조각으로 오늘을 기념했다. 9시가 다 되어서야 어둠이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곳 사람들은 이제부터 저녁이 시작된다고 한다.
인도의 공항에 있다는, 내 친구가 여행기에 적어놓은 글을 다시 옮겨 적는다. ‘Well done, your good karma brings you here! -잘했어, 당신의 착한 업(業)이 당신을 이곳으로 오게 했어!’ 나는 나를 이곳으로 오게 해준 그 모든 것에 감사한다.
【아~ 이럴 수가! 여행기를 쓰면서야 알게 된 사실이다. 여행기 전체와 관련된 내용이라 여기서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어 적어넣는다.
알함브라궁에는 아라베스크 양식의 꽃이라 일컬어지며 이슬람 건축 문화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나스르 궁전’이라는 곳이 있었음에도, 구경은커녕 나는 알지도 못하고 지나쳐 왔다. 여행기를 쓰는 지금에서야 인터넷에서 만나본 나스르 궁전의 화려함은 내가 앞에서 알함브라의 건축물들의 담박(淡泊)함을 찬양한 글을 모두 지워버려야만 할 만큼이나 화려했다. 인터넷에 소개된 글 한 구절을 옮겨본다. 『나스르 궁전(Palacios Nazaríes): 알함브라 궁전에서 가장 아름답고 유명한 곳이다. 사자의 정원(Patio de los Leones) 등 유명한 알함브라의 장소는 거의 다 이곳에 있다.』 기가 막히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를 그곳으로 데려갔던 여행사는 어떤 더 중요한 일이 있었기에 궁전의 백미라고 할 그 나스르궁전을 우리의 관람 대상에서 제외했을까? 안타깝고 울화통 터질 일이지만 그것이 여행사를 통한 단체관광의 현실이요 한계라고 스스로 달래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미 알함브라는 내게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니 내가 써놓은 알함브라의 많은 이야기는 바탕부터 잘못되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때 내가 보았던 알함브라궁에 대하여 적을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더하여, 뒤에 또 쓰게 될지도 모를 알함브라를 떠올리거나 비유하는 이야기들도 그때 내가 보고 느낀 알함브라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내가 더듬어서 만져 보며 느꼈던 것이 코끼리의 한쪽 옆구리에 불과해서 전체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음에도, 내가 보았던 그것이 마치 전부인 양 이야기를 써내려 가야 함이 답답할 뿐이다.
지금 여행사의 스케줄표를 보면 계획부터 알함브라에서 나스르 궁전은 외부 관람으로 되어있다. 앞서 적었듯이 백미라고 할 그곳을 일부러 제외했을 리는 없을 터이고, 내가 해볼 수 있는 추측으로는 그날 관람 인원 한도에 걸려서 우리는 예약을 못 한 탓일 것으로 짐작한다. 알함브라나 나스르나 또 카를로스5세 궁전이나 모두 궁(Palace)이라고 부르지만, 우리나라 궁궐로 비교하자면 알함브라가 창덕궁(宮)이라면 나스르 궁과 카를로스5세 궁전은 그 창덕궁 안에 있는 인정전(殿)이나 낙선재(齋) 등과 같은, 궁궐 내부에 있는 전각(殿閣)쯤으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그런데 그 궁 즉, 전각 중에서 어떤 곳은 유료 입장으로 하루 관람 인원을 제한하는 곳이고 또 어떤 곳은 무료이며 제한 없이 입장이 가능한 곳이었다. 알함브라 궁궐의 입장은 무료로 아무 제한이 없지만, 나스르 등 몇 곳은 유료로 인원 제한이 있고 카를로스5세 궁전 등은 무료인 곳이다. 내가 지나가며 보았던 화려하고 현란하다고 했던 곳이 바로 나스르궁전 외부의 일부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나스르를 모르고 갔었던 것이 차라리 다행이었다. 가기 전에 알게 되었더라도 이미 관람할 방법은 없었을 것이고, 그랬으면 나머지 알함브라가 제대로 눈에 들어오기나 했겠는가. 안타까움만 내내 달고 다녀서 여행을 잡쳤을 터이니, 뒤늦게 안 것이 오히려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다.】
*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남을 이르는 말. 중국 진(秦)나라 때의 여씨춘추전(呂氏春秋傳)에 나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