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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18일 오늘의 역사
2022년 러시아 수호이(SU)-34 전투기 이륙직후 아파트 단지 추락
러시아의 수호이(SU)-34 전투기가 우크라이나 주변 국경 지대에서 이륙 직후 1개 엔진에 불이 나 에이스크 시내의 한 아파트 단지를 덮쳤다. 전투기 조종사는 추락 전 탈출했으나 사고로 인한 대형 화재로 사상자가 다수 발생했다.
9층 아파트에서 화재 신고가 접수됐으며, 현재까지 4명이 숨지고 6명이 실종됐다고 밝혔다. 또한 25명이 다쳐 병원에 입원했으며, 또한 아파트 1층부터 5개 층 2000㎡, 17개 이상 가구가 불에 탔다.
사고가 난 SU-34는 대당 가격이 3600만 달러(약 517억 원)에 달하는 러시아 공군의 최신형 전폭기다. 러시아는 지난 3월 기준 SU-34 120여 대를 보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2021년 흑인 최초로 미국 합참의장과 국무장관을 지낸 콜린파월 사망
2021년 서울 한 회사에서 생수 마신 직원 3명 사상
2011년 산악인 박영석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남벽에 코리안루트 개척 중 목숨 잃음
2007년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최초 여성대통령 당선
2006년 장진호전투영웅 로런스 미 해병대 준장 별세
2005년 대구 지하철 2호선 개통
8년9개월 동안의 대역사(大役事) 끝에 대구지하철 2호선이 18일 오후 2시 개통됐다.
1997년 1월 착공됐다. 당초 개통을 2002년으로 잡았으나 IMF사태로 사업기간이 3년 연장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총사업비는 2조3330억원.
총길이는 29㎞다. 달성군 다사읍 문양역에서 수성구 고산동 사월역까지 정거장은 모두 26개. 이중 7곳은 상행과 하행을 별도로 이용해야 하는 ‘상대식’이고, 나머지 19개는 승강장 가운데서 상·하행 동시에 이용이 가능한 ‘섬식’이다. 1호선은 안심역만 섬식 정거장이었다. 또 반월당역은 1호선과 환승이 가능한 중심역이 된다.
주행시간은 문양에서 사월까지 49분. 50분 30초 걸리는 1호선(길이 28.3㎞)과 함께 시내 교통망을 빠르게 할 전망이다.
2호선에는 장애인이나 노약자를 위한 시설이 1호선에 비해 크게 보강됐다. 26개 전 승강장에는 엘리베이터가 모두 69대나 설치돼 있다. 장애인 전용 화장실도 43곳. 에스컬레이터도 208대 설치돼 이동성과 편의성을 크게 높였다.
전동차에는 휠체어 장애인 전용 공간이 3곳 있고, 전동차의 출입문 턱도 휠체어 통행을 위해 거의 없앴다.
여성화장실의 경우 변기 수를 남성화장실의 변기 수와 동일하거나 많게 설치했다. 유아용 변기가 설치된 화장실이 별도로 갖추어져 있고, 그 안에는 기저귀를 갈아줄 수 있는 기저귀 교환대까지 있다. 버튼을 누르면 물이 흐르는 소리가 나는 에티켓벨을 유용하게 사용할 수도 있다. 응급상황에 대비한 비상호출기도 설치됐다.
오전 5시30분부터 밤 12시까지 운행된다. 오전 7시20분부터 8시40분까지, 오후 6시10분부터 8시40분까지의 출퇴근 시간은 5분 간격이며, 그 외의 시간은 7~10분 간격이다. 이용요금은 10㎞까지는 800원, 10㎞를 초과하는 구간은 900원, 13세 미만 어린이는 절반 할인된다. 장애인, 국가유공자, 65세 이상 경로우대자는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또 부모와 같이 이용하는 만 6세 미만의 어린이는 2명까지, 장애인(장애등급 1~3급)의 동반자 1인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2005년 한국·루마니아 확대정상회담(서울)
2005년 2005 광주 디자인비엔날레 개막(김대중 컨벤션센터)
2005년 `만인의 연인` 심은하 결혼식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의 감미로운 멜로디가 울려 퍼지자, 그녀의 어깨가 살짝 들먹였다. ‘만인의 연인’은 이제 한 남자의 아내임을 수줍게 맹세했다.
‘영화배우 심은하(33)가 18일 오후 3시 서울 쉐라톤 워커힐 호텔에서 연세대 국제대학원 지상욱(40) 연구교수와 결혼식을 올렸다. 초대장을 받은 150명의 하객을 제외한 기자·팬 등 외부인의 식장 출입은 허락되지 않았다.
예식은 별도의 사회자 없이 기독교 예배로 진행됐고, 주례를 맡은 온누리교회 하용조 목사는 “신랑이 신부의 미소에 녹았나 보다”며 두 사람을 축복했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SBS 윤세영 회장, 정세호 PD와 동료 배우 안성기, 한석규, 이미연 등이 자리를 함께했고, 200여명의 취재진은 별도로 마련된 프레스룸에서 녹화 중계로 지켜봤다. 어깨를 드러낸 순백색 웨딩드레스 안에서, 심은하는 아름다웠다.
2004년 인도판 ‘로빈후드’ 쿠스 무니스 와미 비라판 사살
2003년 노무현 대통령 이라크파병 전격발표
2002년 약대 6년제로 전환하다. 2007년까지 단계적으로 도입키로 결정.
1997년 코카콜라 로베르토 고이주에타 회장 사망
1996년 유엔국제해양법 재판소 발족.
국제법해양재판소가 1996년 10월 18일 발족됐다. 1996년 8월 1일 유엔본부에서 해양법 협약에 가입한 1백2개국 대표들의 투표로 재판관 21명이 선출됐고 이들 중 가나출신의 토마스 멘사 재판관이 초대 재판소장으로 선출됐다.
한국에서는 고려대 박춘호 교수가 재판관에 선출됐다. 국제해양법재판소는 지난 1994년 발효된 유엔 해양법 협약의 해석과 운영증에 관한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설립된 사법기구이며 유엔은 지난 1982년 점증하는 해양분쟁의 틀을 잡기 위해 15년간의 작업끝에 전문과 부칙 4백50개조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바다에 관한 세계법`인 해양법을 만들었다.
해양법재판소는 이 법률을 만든 뒤 협약 가입국들이 법을 지키지 않을 경우를 상정해 강제수단으로 창설케 됐다.
1991년 소련-이스라엘 단교 24년 만에 복교
1990년 첫 남북통일음악제가 평양에서 개최
1990년 강영훈 국무총리, 김일성 북한주석에게 남북정상회담 촉구
1989년 호네커 동독 공산당 서기장 퇴진, 에곤 크렌츠, 동독 공산당 서기장에 선출
1989년 헝가리 41년 만에 헌법 개정안 통과. 국호를 `헝가리 인민공화국`에서
`헝가리공화국`으로 개명
1989년 미국 목성탐사선 갈릴레오 호 발사(1995.12.7 목성 도착 2003.9.21. 14년 만에 마감)
1988년 노태우 대통령 유엔연설, 6자회담 제안
1985년 서울지하철 3~4호선 준공하다.
1985년 국내최대의 충주다목적댐(발전용량 41만㎾) 준공
충주다목적댐(忠州多目的댐)은 4대강 유역 종합개발계획의 일환으로 한반도의 중심부를 꿰뚫는 충주시 동북방 남한강 수계에 건설된 대한민국 최대의 콘크리트 중력식 댐이다. 이 댐은 높이 97.5m, 길이 447m, 체적 90만 2천m3, 저수용량 27억 5천만m3으로 41만 2천kW에 이르는 발전시설 용량을 가지며, 6억 1천 6백만m3의 홍수조절 능력을 갖추고 있다. 남한강 유역의 수자원을 개발하여 홍수피해를 경감, 첨두발전, 하류지역에 각종 용수를 공급할 목적으로 건설되었다. 1978년 착공하여 이날 준공되었다
1984년 진도대교 개통(첫 사장교)
전남 진도와 해남을 잇는 연륙교가 4년 만에 완공돼 1984년 10월 18일 개통됐다. 국내최초의 사장교(탑에서 비스듬히 친 케이블로 거더(girder·대들보)를 매단 다리)로 건설된 이 다리는 광주권지역개발사업의 하나로 지난 1980년 12월 착공, 내외자 1백19억3백만원의 사업비가 투입됐다.
다리 길이는 해상부분 344m와 양쪽 육상부문 각 70m씩을 합쳐 총 484m이며 교량 폭은 11.7m로서 당시 사장교로선 세계에서 5번째 길이였다. 다리 건설엔 4천t의 강재와 케이블 2천4백m, 2만4천5백대의 중장비가 투입됐고 연인원 25만명이 동원됐다.
이날 개통식에 참석한 전두환 대통령은 “88올림픽 고속도로 개통이후 영-호남간의 교류증대를 통해 촉진되고 있는 광주권개발 바람이 이 대교를 건너 진도에 직결됨으로써 이 섬 뿐만 아니라, 다도해지방의 개발에까지 커다란 활력소가 될 것이며, 따라서 이 대교는 장차 지역발전의 상징이자 번영의 기념비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1984년 시인 앙리 미쇼 사망
1981년 그리스총선, 사회운동당 승리
1980년 박희봉 윈드서핑으로 대한해협 횡단
1980년 육군 참모총장·5.16후 내각수반 지낸 송요찬 세상 떠남
1979년 부마사태로 인해 비상계엄을 선포
9월 8일 김영삼에 대한 총재직 정지 가처분 결정, 10월 4일 김영삼의 의원직 박탈 등 일련의 사건이 발생함으로써 유신체제에 대한 야당과 국민의 불만이 크게 고조되었다.
이에 김영삼의 정치적 본거지인 부산에서는 10월 15일 부산대, 동아대 등의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16~17일 양일간 정권타도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고 파출소, 도청, 신문사, 방송국 등이 파손됐다. 부산에 이어 18일과 19일에 마산에서도 시위가 발생, 마산-창원 일대에 위수령이 발동했다.
학생-시민들의 시위가 격렬해지자 정부가 최규하 총리 주재로 임시국무회의를 열어 1979년 10월 18일 0시를 기해 부산 일원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이날의 계엄령은 10.26사건 후 선포된 전국비상계엄령에 흡수됐다.
1978년 카터 미국 대통령, 중성자탄 생산명령
1977년 서독 특공대가 인질구출작전을 성공하다.
1977년 박정희 대통령 평화통일 3대원칙(불가침 협정·경계선 개방·자유선거) 북한에 제시
1972년 미국-소련, 통상협정 조인
1970년 장훈, 일본 프로야구 사상 최고 타율 기록
1959년 4월 10일, 일본 프로야구 ‘도에이 플라이어즈’(현 니혼햄 파이터스)의 장훈(1940~)이 타석에 들어섰다. 장훈으로서는 프로야구단에 입단한 후 처음 치르는 데뷔전이었다. 가난과 차별, 신체적인 어려움을 참아가며 손꼽아온 감격의 순간이기도 했다.
일본에서 태어나 ‘하리모토 이사오(張本勲)’란 이름으로 불리던 장훈은 어려서부터 장애자였다. 네 살 때인 1944년 오른손에 화상을 입어 오른손 엄지와 검지를 제외한 세 손가락이 모두 하나로 붙어버렸다.
오른손을 쓰지 못하면서도 장훈은 어려서부터 몸집이 커 자주 싸움에 휘말렸다. 이런 장훈을 구해준 것은 야구였다. 힘을 쓰지 못하는 오른손을 단련하기 위해 중학시절부터 손에 피가 나도록 타이어를 두들겼다. 학창시절 장훈의 꿈은 고시엔(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 출전이었다.
1958년 고교 3학년이 된 그에게 프로야구팀으로부터 입단 제의가 들어왔다. 파격적인 600만 엔의 계약금을 제시하며 적극적으로 나선 팀은 주니치 드래건스였다. 그러나 장훈은 200만 엔의 계약금을 제시한 도쿄의 ‘도에이 플라이어즈’ 팀에 입단했다.
창훈이 아무리 고교 최고의 강타자였다지만 프로야구의 벽은 역시 높았다. 1959년 4월 10일 프로야구 데뷔전 첫 타석에서 상대투수가 던진 단 3개의 공에 삼진을 당한 것이다. 수비에서도 날아오르는 타구를 잡지 못하고 머리 위로 넘기는 결정적인 실책까지 범했다. 장훈은 두 번째 타석에 들어서지도 못한 채 교체되었다. 4월 11일의 상대는 전년도 성적 14승 4패를 자랑하는 발군의 투수였다. 그러나 데뷔 두 번째 타석에 나선 장훈의 눈에 공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좌중간 2루타였다. 데뷔 첫 안타이자 일본 프로야구 최다안타 기록인 3,085안타의 시작이었다. 다음 타석에서는 우측 담장을 넘기는 데뷔 첫 홈런을 기록했다.
점차 프로야구에 익숙해진 장훈은 맹타를 휘둘렀고 6월 13일 4번 타자가 되었다. 일본 프로야구 사상 최연소 4번 타자가 탄생한 것이다. 대뷔 첫해 장훈은 13개의 홈런과 57타점, 0.275의 타율로 신인왕을 수상했다.
순풍에 돛을 단 듯 1960년 올스타전에 뽑히고 1961년 0.336의 타율로 수위타자가 되었다. 1962년엔 0.333의 타율에 31개의 홈런으로 퍼시픽리그 최우수선수(MVP)에 뽑혔다. 1967년부터 4년 연속 수위타자가 되는 등 장훈 앞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1970년은 장훈에게 생애 최고의 해였다. 시즌 초반부터 3할대를 유지하며 톱타자의 위치를 놓치지 않더니 마침내 일본 프로야구 사상 전인미답의 최고타율을 기록한 것이다. 10월 18일 장훈은 더블헤더 첫 경기에서 5타수 4안타를 터뜨려 타율을 0.3834로 끌어올렸다. 그 전까지 일본 프로야구의 최고타율은 19년 전 기록된 0.3831이었다. 좀처럼 깨질 것 같지 않던 장훈의 기록은 1985년 센트럴리그 한신팀의 미국 선수 랜디 바스에 의해 15년 만에 깨졌다. 장훈이 소속된 퍼시픽리그에서는 1994년 스즈키 이치로가 기록을 경신할 때까지 24년 동안 철옹성이었다.
1980년 1월 롯데 오리온즈로 이적했다가 그해 5월 28일 대망의 3,000안타를 기록한 뒤 1981년 10월 31일 23년간의 선수생활을 뒤로한 채 그라운드를 떠났다.
1967년 소련 인공위성 비너스4호, 최초로 금성에 착륙
소련이 1967년 10월 18일 역사상 최초로 금성탐색위성 비너스4호를 금성표면에 연착륙시키는데 성공했다. 비너스4호는 이날 오후 1시34분 매초 11km의 속도로 금성에 진입, 과학실험실은 90분뒤에 낙하산으로 착륙했다.
비너스4호는 금성의 대기권에서 자력대나 방사능대 혹은 질소성분은 전혀 포착하지 못했으며 단지 엷은 수소층을 포착했다. 금성의 대기층은 거의 대부분 탄산가스로 구성되어있으며 산소와 수중기는 단 1∼0.5%에 불과하다. 지구대기권의 산소성분은 전체의 21%에 달하며 수중기는 전체용적의 0∼4%에 이르고 있다. 금성 대기권의 온도는 비너스4호의 금성진입진도에 따라 섭씨 40도에서 2백80도의 분표를 나타냈다. 기압도 1내지 15기압의 차이를 보였다.
1961년 금성탐험에 착수한 소련은 그동안 비너스1, 2호의 실패에 뒤이어 1966년 3월 1일 비너스3호를 금성에 명중 충돌에 성공한 적이 있다.
1962년 케네디, 그로마코 소련외상과 독일문제해결방안 토의
1962년 알제리아와 쿠바 수교 합의
1961년 라오스왕국, 푸마를 임시정부 수상에 임명
1950년 고당 조만식 선생이 별세
고당 조만식 선생이 6.25의 기습남침으로 밀렸다가 반격에 나선 국군과 유엔군에 쫒겨 인민군이 패주하고 있던 수라장속에서, 1950년 10월 어느날 그를 감시하던 한 인민군의 총탄에 타계했다. 10월 18일은 정확한 기일이 아니고 추정일이다.
고당 선생은 1883년 2월 평양에서 출생했다. 7세에서 15세까지는 엄한 부친 밑에서 한학을 배웠고, 17세에서 23세까지는 영세 포목상으로 생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24세때 처자를 거느린 가장으로써 숭실중학교에 입학했고, 졸업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명치대학 법학과에 진학하여 32세때 졸업했다. 선생의 이러한 만학은 신구문명이 교착하고 있던 당시의 한국청년으로서는 극히 정상적인 코스였다. 대학을 나온후 선생은 오산고보 교사-교장, 평양YMCA 총무, 숭인학교장, 신간회 조직, 조선일보 사장 등의 다양한 활동을 통하여 민족운동에 투신했다. 3.1운동때는 옥고도 치렀다.
선생은 고결한 인격자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진보적 민족주의자로 `조선의 간디`라는 추앙도 받았다. 해방직후 고당은 조선건국평남준비위원회를 창립하고 위원장에 취임했다. 그러나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이것을 공산주의자와 동수로 개편하여 평남인민정치위원회란 연립정부를 수립했고 선생은 위원장에 취임했다. 이것이 고당의 비극의 단초였다. 한편 자유민주주의적인 조선민주당을 창립, 당수로 선출됐다.
1950년 무공훈장령 제정
우리나라 훈장은 1899년 ‘표훈원관제’와 1900년 ‘훈장조례’가 제정되면서 시작되었다당시 금척대훈장, 이화대훈장, 태극장, 자웅장이 있었으며 자웅장이 무공이 뛰어난 무관에게 주는 일종의 무공훈장이었다
1949년 4월27일 ‘건국공로훈장령’이 제정되었으며 육군에서는 공비토벌과 38선의 전투에서 공을 세운 유공자에게 정공장, 특별상이군인장, 육군훈기장을 제정하였고
1950년 인천상륙작정의 성공으로 전세를 역전시킨 장병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10월18일 대통령령 제385호로 ‘무공훈장령’을 제정했다
이 당시에는 태극, 을지, 충무 화랑 등 4등급으로 제정되었으며 1964년 12월14일 인헌무공훈장이 제정 되었다
보국훈장은 1961년 7월26일 ‘근무공로훈장령’을 제정 공포함으로 신설되어 최초 7등급 이였으나 5등급으로 조정되어 1967년 2월28일 근무공로훈장에서 보국훈장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1970년 11월17일 현재의 명칭으로 바뀌었으며 국가 안전보장에 뚜렷한 공을 세운 자에게 수여하며 통일장, 국선장, 천수장, 삼일장, 광복장으로 구분한다
무공훈장 다음으로 무공포장은 1949년 6월 방위포장으로 신설하였으나 1967년 1월 무공포장과 보국포장으로 나누어서 무공포장은 전투에 참여하여 공을 세운 자에게만 수여하고 보국포장은 국가안전보장에 기여한 자에게 수여한다
1950년 국군7사단 북한군전선사령부 김일성대학 옥상에 태극기 게양
1948년 소련군, 점령체제 끝내고 북한철수 개시
1947년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무기휴회
1946년 1시간반 길이의 정규방송 시작
1945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시작, 1년 동안 진행된 재판에서 교수형 12 종신형 3 4명은 10-20년 징역형
1941년 일본 도조(東條) 히데키 내각 성립. 이 내각이 태평양전쟁 개시
1941년 세기의 스파이 리하르트 조르게(Richard Sorge) 체포
1941년 10월 18일 밤, 독일의 적국 소련을 위해 스파이로 활약한 독일인 기자 리하르트 조르게가 일본에서 체포됐다. 일본에서 1년 동안 정을 나누었던 무희의 집에서였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고교를 중퇴하고 독일군으로 참전한 조르게는 3번이나 부상을 당할 정도로 용감하게 싸운 독일의 군인이었다. 그러나 병원에서 만난 의사를 통해 공산주의 사상에 빠졌고, 이내 그는 소련을 찬양하는 골수 공산주의자가 됐다.
할리우드와 중국에서 첩보활동을 벌이던 조르게는 1933년, 독일의 유력지 기자 신분으로 일본에 입성했다. 그는 일본에서의 첩보활동을 통해 세기의 스파이로 불릴 만큼 정확하고 전쟁상황에 유리한 정보들을 소련에 제공했다.
비록 스탈린이 무시해서 대비하지 못했지만 독일의 소련침공 일자를 알린 것도 조르게였고, 일본 관동군이 시베리아를 칠 계획이 없다는 사실을 알려 소련이 시베리아 병력을 유럽으로 전격 이동시켜 독일전에 집중할 수 있게 한 것도 조르게였다.
1941년 일본 경찰이 조르게의 조직원들을 속속 잡아가는 등 포위망이 좁혀왔지만 조르게는 끝내 일본을 벗어나지 못하고 붙잡힌 것이다. 결국 그는 소련의 혁명기념일이었던 1944년 11월 7일, 49세의 나이로 사형에 처해져 도쿄에 묻혔다.
1931년 미국 발명가 T.A.에디슨 별세하다(1847.2.11.∼).
“천재란 1%의 영감과 99%의 땀이다” 라는 신조로 일생을 발명에 몰두한 토마스 에디슨이 1931년 10월 18일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에디슨은 1847년 2월 11일 캐나다 국경에서 멀지 않은 오하이오주 밀란에서 제재소를 경영하던 아버지 새뮤얼의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7세때 미시간주 포트 휴런으로 이사해 8세때 국민학교에 들어갔으나 엉뚱한 질문을 퍼붓다 지진아라는 판정을 받고 석달만에 학교를 그만두게 되어 교사였던 어머니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에디슨은 16세부터 84세로 타계하기 전까지 평생동안 1천92건의 발명특허를 얻음으로써 한달에 1건꼴로 발명을 해내는 불후의 기록을 세웠다. 에디슨의 첫 발명품은 21세때 만든 전신기를 응용한 자동투표기록기이다. 그러나 의회에서의 투표지연은 하나의 전략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무용지물이 됐다. 그래서 그 이후에는 실용성이 있는 발명에 나섰다. 그는 얼마후 주식상장표시기(체커)를 발명했다. 그가 발명한 것중에서 가장 독창성 있는 발명은 1877년에 만든 축음기이고, 세계적으로 가장 중요한 발명은 1879년에 이룩한 실용 백열등 개발이다.
에디슨이 전기조명시스템을 최초로 발명한 것은 아니다. 그 몇년 전 파리에서는 가두조명용으로 아크등이 이미 실용화돼 있었다. 그러나 에디슨의 발명은 송전시스템과 일체가 돼 일반가정에서도 쓸수 있도록 된 ‘에디슨전구’ 였다. 그는 백열등의 보급을 위해 끊임없는 연구와 실험을 거쳐 소켓·스위치·안전퓨즈·적산전력계·배전방식등을 고안하고 효율높은 발전기와 배전반의 설계 등 배전·송전·발전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체계를 개발했다.
1882년 세계최초의 화력발전소인 ‘중앙발전소’와 ‘에디슨전등회사’가 뉴욕에 설립됐고 그 이후 전기의 가정이용은 세계곳곳으로 확산되어 산업계의 전력이용을 자극, 공업발전의 토대를 이루었다. 1891년에 영화 촬영기와 영사기, 1891~1900년에 자기선광법(磁氣選鑛法), 1900~1910년에 에디슨 축전기 등을 계속 발명했다.
그가 태어난 밀란의 생가는 사적(史蹟)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미시간주 디어본으로 옮겨진 멘로파크의 연구소와 웨스트오렌지의 연구소는 각각 박물관으로 남아 있다.
1923년 전국산업대회 열림
1922년 윤덕병 등 조선노동연맹회 결성
1920년 천주교 조선교구 설정
1920년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가 벌어지다(10.18∼10.22)
김좌진․나중소․이범석 장군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2,500여 명의 독립군은 5만 여 명의 일본군을 맞아 만주 허룽현(和龍縣 : 三道溝) 청산리 백운평(白雲坪)․천수평(泉水坪)․마록구(馬鹿溝) 등지의 3차에 걸친 전투에서 일본군 연대 병력을 격파하고 3,300여 명을 사살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청산리 3차의 싸움은 한국 무장독립운동 사상 가장 빛나는 전과를 올린 대첩(大捷)으로 독립전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 싸움에서 치욕적인 참패를 당한 일본은 그 보복으로 만주, 간도 전역의 우리 동포에게 무자비한 학살과 만행을 자행하였다.
이후 10월 21(또는 26일)일까지 전투를 통해
왜군에게 큰 타격을 안기면서 독립운동사상 최대의 전과가 작성되었다.
1918년 체코 독립선언
1912년 제1차 발칸전쟁 발발
1912년 10월 18일, 오스만 제국을 몰락의 길로 이끈 제1차 발칸전쟁이 발발했다. 오스만의 약화를 틈타서 세르비아, 불가리아, 그리스 그리고 몬테네그로 네 나라가 발칸동맹을 맺고, 과거 자신들의 신민 종주국이었던 오스만의 영토를 넘본 것이다.
14세기부터 19세기말까지 발칸반도를 지배했던 600년 역사의 오스만 제국은 1832년 그리스가 독립하고 1877년에는 대 러시아 전쟁 패배로 루마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불가리아가 차례로 독립하면서 발칸반도 내 오스만의 영토는 남부 알바니아, 마케도니아 정도로 줄어들었다.
당시 이미 약화되어 사기가 엉망인 다민족, 다종교 혼성 군대와 변변치 못한 무기를 가지고 있었던 오스만은 전쟁에서 패해 발칸반도 내 영토의 83%와 인구의 69%를 빼았겼다. 승리한 발칸동맹은 영토확장은 물론 생활 깊숙히 배인 식민지 잔재를 지우게 됐으며, 이슬람교도를 몰아낼 수 있었다.
전성기에는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발칸반도, 흑해 북부, 코카서스 남부를 아우르고, 1453년에는 콘스탄티노플의 동로마까지 함락했던 오스만의 대제국은 결국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으로 해체됐다.
1912년 이탈리아-터키, 로잔느조약 조인(트리폴리전쟁 종결)
1908년 서양화가 양달석(梁達錫) 태어나다.
1907년 국제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헤이그협약` 채택
1906년 정부, 최초의 기념우표 ‘어극 40년’ 우표 발행발행
1893년 프랑스 작곡가 구노 사망
1868(조선 고종 5) 전국 서원 철폐령
1867년 미국,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 매입
1867년 10월 18일 미국이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720만달러에 매입했다. 1ha당 5센트로 환산한 금액이었다. 러시아가 알래스카를 판 이유는 영국이 알래스카를 강점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알래스카는 1741년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에게 고용된 덴마크인 베링이 발견한 뒤, 러시아 모피 상인이 서서히 이주해 왔으며, 18세기 말에는 러시아-아메리카 회사가 모피무역을 독점하고 싯카를 건설하여 19세기 초에 번영을 누렸다. 미국인들은 이 거래를 가장 어리석은 거래라고 비난하며 매매를 성사시킨 `스워드(국무장관)의 어리석은 행위`(Seward Folly)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후 발견된 금광과 유전은 미국에 상당한 부를 안겨 주었다. 알래스카는 금, 석유, 천연 가스 등이 생산되고, 삼림 자원과 수산 자원도 풍부한 땅이었던 것이다. 알래스카는 1959년 1월 3일 미국의 49번째 주(州)로 편입됐다.
1859년 프랑스 철학자 H.베르그송 태어나다(∼1941).1927년 노벨 문학상 수상
1831년 천주교 조선교구 설정
1799년 독일 화학자 C.F.쉰바인 태어나다(∼1868)
1775년 수도회 설립자 파울루스 사망
1685년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낭트칙령을 폐지했다.
신ㆍ구교간의 갈등으로 36년동안 프랑스를 피로 물들인 ‘위그노 전쟁’이 한창일 무렵 프랑스 변방의 신교(新敎) 국가 나바르에 젊은 왕이 있었다. 그는 1572년 프랑스 왕의 딸과 결혼하기 위해 파리로 갔다가 1만명의 신교도가 죽음을 당한 바르톨로메오 대학살을 겪고 그곳에 3년반동안 볼모로 잡힌다. 그 또한 ‘위그노’라 불린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였기 때문이었다. 그가 프랑스 왕위 계승자가 되자 교황이 그를 파문하면서까지 왕위계승을 막았지만 그는 1598년 앙리3세의 뒤를 이어 프랑스 국왕 자리에 오른다. 그가 바로 프랑스 역사상 가장 사랑받았던 앙리4세였다.
그는 위그노였지만 즉위하자마자 지긋지긋한 종교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4월13일에는 낭트칙령을 발표한다. 칙령에 따라 위그노에게는 광범위한 종교의 자유가 주어졌고 파리만 빼놓고는 어떤 지역에서든 예배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신교도는 지역을 제한받은 것이 못내 불만이었고 가톨릭은 신교를 인정한 것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종교통합이 효과가 있었는지 종교전쟁은 서서히 끝이 나고 프랑스는 유럽의 강국으로 부상했다.
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난 1685년 10월18일, 태양왕 루이14세가 낭트칙령을 폐지했다. 위그노가 누려온 모든 종교적ㆍ시민적 자유가 박탈돼 다시 종교혼란에 휩싸이자 40만명 위그노들의 엑소더스가 시작됐다. 그들은 영국ㆍ네덜란드ㆍ프로이센 등지로 발길을 돌렸다. 가톨릭은 속이 시원했는지는 몰라도 주로 상인ㆍ공예인ㆍ군인들로 구성된 위그노가 떠난 공백은 프랑스에 너무나 컸다.
1503년 교황 피우스 3세 사망
1453(조선 단종 1) 안평대군 세상 떠남
1130년 주자학을 집대성한 중국의 유학자 주희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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