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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19일 오늘의 역사
2022년 미얀마 교도소 소포로 위장한 폭발물 폭발로 8명 사망
2021년 북한 ‘신형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발사
2014년 백규정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하나외환 챔피언십 우승
2007년 파키스탄에 부토 전 총리 귀국축하행렬 겨냥한 폭탄테러 사망 140여명
2005년 1987년 착공한 평화의댐 준공식
북한이 임남댐(일명 금강산댐)을 건설하고 유사시 이 댐을 방류하면 서울 여의도 63빌딩 중간까지 물이 차오른 다는 북한의 수공을 막기위해 1987년 공사를 시작하여 18년만에 공사를 완공하여 2005년 10월19일 준공식을 가졌다
최초에는 수공과 홍수발생시 하류댐 피해를 예방하고 수도권에 안정된 상수원를 공급하기 위해 총 사업비 1666억원(국민성금639억원 포함)을 들여 1989년 80m 높이의 1단계공사를 완공하였으며 1995년과 1996년 집중호우시 홍수조절기증이 입증되자 2002년부터 2329억원을 들여 125m 높이의 2단계 공사가 시작되어 2005년 10월19일 완공되었다
이댐은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 동촌리와 양구군 방산면 천미리를 걸치는 곳에 위치하며 댐의 높이는 125m, 길이 601m, 저수용량 26억3000만톤이다
총 공사비는 3995억원이 투입되었다
주변에 비목공원·상설야외공연장·수하리낚시터·비수구미계곡 등 관광지가 많이 있으며, 철의 삼각지, 양구 펀치볼 전적비, 고성 통일전망대 등을 잇는 통일 안보관광지의 요충지로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이 댐의 완공으로 임남댐의 바류는 물론 북한강 상류지역의 집중호우에 따른 피해도 막을 수 있다.
2005년 사담 후세인 전(前) 이라크 대통령 첫 재판
이라크를 23년간 통치했던 사담 후세인(68세) 전 이라크 대통령이 법정에 섰다.
‘세기의 재판’으로 기록될 후세인의 재판은 19일(현지 시각) 정오 수도 바그다드 중심부에 마련된 특별 법정에서 처음 열렸다. 그가 2003년 12월 고향인 티크리트 농가의 지하 토굴에서 미군에 체포된 지 거의 2년 만이다.
후세인은 1982년 7월 시아파 거주지인 두자일 마을의 주민 143명을 집단 학살한 혐의로 이번 법정에 섰다.
후세인은 판사가 이름을 묻자 “당신은 이라크인고 내가 누구인지 안다. 당신들이야말로 도대체 누구냐? 나는 이라크 대통령으로서 헌법상의 권한을 갖고 있다.”고 단호하게 외쳤다. 5명으로 구성된 특별재판부를 인정하지 않고 재판을 거부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독재자 후세인을 바라보는 이라크인들은 동정론과 처벌론으로 갈라져 있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한편 재판부는 후세인 변호인측의 연기 신청을 받아들여 11월 28일까지 법정을 열지 않기로 했다.
2004년 골프여제 애니카 소렌스탐 2004년 ‘올해의 여자 스포츠 선수’ 선정
‘골프 여제’ 애니카 소렌스탐(스웨덴)이 올해의 여자스포츠 선수로 뽑혔다. 여성스포츠재단(WSF)은 19일(한국시각) 미국 뉴욕의 워도프 아스토리아호텔에서 여성 스포츠 기금 행사를 진행하면서 올해의 여자스포츠 선수 개인 부문에 소렌스탐, 팀 부문에 아테네올림픽 비치발리볼 금메달리스트 미스티 메이·케리 월시(미국) 조를 선정했다.
‘WSF’는 체육을 통한 여성 권익신장을 목표로 1974년 설립된 자선교육단체. 윔블던 타이틀만 20개를 보유하고 있는 ‘여자테니스의 전설’ 빌리 진 킹(미국)의 주도로 만들어졌다.
소렌스탐은 18일 끝난 미 LPGA투어 삼성월드챔피언십 최종라운드에서 정상에 오르며 올시즌 6승, 통산 54승을 거둔 선수. 올시즌 4년 연속 시즌 상금 200만달러를 돌파했다.
2000년 2억5천만년 동안 가사(假死)상태에 있던 미생물이 회생됐다는 논문, `네이처`지에 게재
2억5천만년 동안 가사(假死)상태에 있던 미생물을 미국 웨스트 체스터대 연구팀(D. 벨스키 외 10명)이 되살리는데 성공했다. 이 연구팀은 1998년 10월 뉴멕시코 칼스배드의 쓰레기처리장 터파기 공사중 발견한 암염(岩鹽 소금결정)에서 살아있는 미생물을 추출, 회생시킨 결과를 과학잡지 `네이처`誌 2000년 10월 19일자에 게재했다.
이번에 연구팀이 복원한 미생물은 방사성 분석과 유전자 서열분석 결과 2억5천만년 전 `후기 이첩기(二疊紀)`에 산채로 갇힌 포자(胞子)를 형성하는 바칠루스속(屬) 미생물의 조상으로 나타났다. 이 미생물은 이미 사해의 퇴적층에서도 발견된 적이 있는 `바칠루스 마리스모르투이`와 같은 계열이다. 연구팀은 처음 이 미생물의 이름을 `2-9-3`이라고 명명했으나, 네이처지는 구약성경 창세기에 969년간 살았다고 기록된 유대인 족장 이름을 따서 `므두셀라`라는 별명을 붙였다.
이번 연구결과는 가장 오래된 고대 생물을 회생시킨 것으로 그동안 지구 생명체의 역사가 수억년간 가사 상태로 우주를 떠돌던 `생명의 씨앗`이 지구에 정착하면서 비롯됐다는 과학계의 가설을 뒷받침하는데 크게 기여할 전망이라고 AFP통신은 전했다. 이번 연구결과가 입증된다면 미생물의 생존 능력이 그동안 알려진 것보다 훨씬 길어질 것으로 알려졌다.
1999년 인도네시아 동티모르 독립 공식승인
1995년 박계동 의원,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노태우 전대통령의 비자금 4,000억원을 주장
1991년 소설가 정비석 사망
원로작가 정비석씨가 숙환으로 1991년 10월 19일 별세했다. 향년 80세였다. 작가 정비석씨는 `자유부인` `소설 손자병법` 등 22편의 장편소설을 신문에 연재할 만큼 `재미있는 소설`을 추구해온 전문 대중작가였다. 정씨는 남녀간의 애정문제를 대담하게 묘사하는 등 `읽히는 소설을 써야 한다`는 신념을 굽히지 않고 55년 동안 소설쓰기에만 몰두해온 타고난 이야기꾼이었다.
1936년 단편 `졸곡제`와 이듬해 단편 `성황당`이 각각 동아일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본격적 작품활동을 시작한 정씨는 해방 전까지 1백여 편의 단편을 발표했다. 초기의 작품들이 보여준 토속세계에 바탕을 둔 건강한 원시주의로 문단의 주목을 받았던 정씨는 1941년 발표한 장편 `청춘의 윤리`에서부터 애정문제를 중심으로 한 세태소설을 쓰기 시작, 본격적인 대중작가로 변신했다.
특히 빈약한 독서시장에도 불구, 7만권이라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부수가 팔린 `자유부인`은 사회적인 `성도덕 논쟁`을 불러일으키면서 정씨를 인기 있는 대중작가로 확고히 자리잡게 해주었다. 이후 각 일간지에 연재한 `비정의 곡` `여성의 적` `여인백경` 등의 작품을 통해 여성과 성의 문제를 주로 다뤄 대중 연애소설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91년 인도 뉴델리 진도 7.0 지진 사망실종 2천명 가옥 1만8천채 파괴
1991년 서울 여의도광장서 승용차가 시속 100㎞ 질주 사망 2명 부상 21명
1989년 황산덕 문교부장관·법무장관·성균관대 총장 세상 떠남
1988년 인도항공 보잉 737 여객기 추락 사망 130명
1987년 뉴욕주가 1929년 대공황 이후 최대폭락(블랙먼데이)
1984년 부산 수영만 간첩선 격침사건
해안레이더가 수영만 동쪽 1마일 해상에서 의아 선박을 포착, 해군 PK편대가 출동 교전 끝에 격침. 5명 사살 추정
1981년 소련, 중국에 중소국경회담 재개를 제의
1980년 송요찬 전 내각 수반 사망
6·25전쟁 때 수도사단장으로 명성을 떨친 송요찬 장군이 1980년 10월 19일 타계했다. 1918년 충남 청양에서 태어난 그는 1946년 5월 육군 소위로 임관, 6·25전쟁 발발 후 낙동강 전선을 사수했으며 수도사단장으로 7차례에 걸친 북한군의 전면공세를 막아내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기여했다.
북진작전 때는 최선봉으로 38선을 돌파, 신고산 일대에서 전차와 야포 등 적군 장비를 노획하는 큰 전과를 올렸고, 휴전 직전에는 수도고지와 지형능선 전투, 철의 삼각지 전투 등에서 큰 전공을 세웠다.
송 장군은 휴전 후 3군단장, 1군사령관, 육군참모총장 등을 역임하고 1960년 5월 육군 중장으로 예편했다. 1961년 내각 수반 겸 국방부 장관을 지냈다. 전쟁기념관은 송요찬 장군을 2000년 12월의 호국인물로 선정했다.
1980년 그리이스,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에 복귀
1977년 서양화가 도상봉 사망
1973년 최종길 교수 의문사
서울법대 최종길 교수가 인권 탄압이 극에 달했던 유신 초기에 북한 공작원으로 의심되는 사람과 중학교 동창이라는 이유로 중앙정보부에서 참고인으로 조사를 받던 중 1973년 10월 19일 사망했다.
최종길 교수는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인천 제물포 고등학교와 서울대 법대, 스위스 취리히 대학, 독일 쾰른 대학에서 공부하고 1962년부터 서울대 법대에서 가르쳤다.
최 교수를 조사한 중앙정보부는 “대규모 간첩단 사건으로 구속 수사 받던 서울법대 최종길 교수가 간첩 혐의를 자백하고 7층 화장실 창문을 통해 투신자살했다”고 발표했다.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온 고인을 보며 유가족과 주위 사람들은 ‘고문으로 죽었을 것’이라는 암묵적 동의속에 소리소문없이 장례식을 가졌다.
유족들은 “투신자살했다는 시간은 중앙정보부의 모든 창문이 잠겨져 있을 시간이며, 투신현장이 공개되지 않았고, 부검조차 거부됐으며, 거듭된 협박에 급히 장례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는 점 등으로 유신정권의 고문에 의한 타살 가능성을 주장했다.
유신반대가 한창 심할때 서울법대 학생과장을 지냈던 고인은 ‘신성한 캠퍼스가 경찰에 짓밟힌다’며 학생들을 감쌌고 결국 정권의 눈 밖에 났었다. 최 교수의 죽음은 유신체제가 빚어낸 대표적인 의문사 사건이었다.
1972년 서울 자유시장에 화재. 120점포 소실
1970년 멕시코의 대통령(1934-40) 카르데나스 사망
1963년 한국신문발행인협회 이사장에 조선일보사 방일영 대표 선임
1963년 고재봉 도끼살인사건 발생
한 가족 6명을 무참히 살해한 도끼살인사건이 1963년 10월 19일 강원도 인제군 남면 어론리에서 발생했다. 살해된 이득주 중령집에 침입한 범인은 이중령과 부인 그리고 두 자녀와 가정부 등 6명을 도끼로 차례로 살해한 후 귀금속을 훔쳐 달아났다.
군과 경찰은 즉각 합동수사본부를 설치, 과거 이중령 집에서 구두를 훔쳐 복역한 사람이 있고 이중령집에서 잃어버린 다이아몬드가 홍천읍내 한 보석상에서 발견된 점을 근거로 추적에 들어가 범인이 고재봉인 것을 확인해 수사망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범인 고재봉은 수사망을 피해 서울로 달아났으나 1963년 11월 12일 범행 24일 만에 한 땅콩장수의 신고로 서울 청계천5가에서 검거됐다. 고재봉은 12월 12일 사형을 구형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1962년 중국군 인도국경 전면공격
1962년 한국-세네갈 국교 수립
1962년 예멘 왕당파, 바드르공을 왕으로 핫산공을 수상으로 임시정부 조직
1961년 정치깡패 이정재 사형 집행
1960년 대한일보 창간
1959년 유엔 사회인도문화위원회, 아동복리에 관한 선언문 채택(어린이인권선언)
1957년 서독, 유고와의 국교단절 선언
1956년 일본-소련, 국교회복공동선언 및 통상항해의정서 조인
1955년 중국-북한, 무역협정 체결
1954년 영국-이집트, 수에즈운하협정 조인
1953년 공산측, 한국통일문제의 판문점 정치회담 예비회담 동의
1950년 한국전쟁 중 국군 평양시에 들어감, 중국군 25만 명 압록강 건넘
1950년 중국 티베트 요충지 참도 점령
1949년 정부, 남로당 등 133개 정당-사회단체 등록 취소
1948년 일본, 제2차 요시다 시게루 내각 성립
1948년 여수 14연대 반란 사건
1948년 10월 19일 밤 8시. 전남 여수 주둔 제14연대 연병장에 2500여명의 장병들이 집결했다. 이윽고 “경찰을 타도하자”는 구호소리가 밤하늘에 울려퍼지자 장병들은 “옳소”라며 호응했고 반대한 3명의 하사관은 현장에서 사살됐다.
5개월 전 향토경비대로 창설된 14연대는 이튿날 제주 4·3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출동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평소 경찰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장병들은 이미 침투해 있는 공산당 지하조직의 선동으로 반란 분위기에 휩쓸렸다. 당시의 군은 미군정의 남로당 해산령을 피해 군에 입대한 좌익들에 의해 적화돼 있었고, 남로당은 군을 정치투쟁의 공간으로 활용하려 했다.
무장한 장병들이 여수시내로 뛰쳐나간 시각은 20일 오전 1시20분쯤이었다. 오전에 이미 여수경찰서를 포함, 관공서·은행까지도 이들 손에 넘어갔고 거리는 온통 인공기로 물결쳤다. 오전 8시 반란군은 열차를 타고 순천까지 북상, 그날 밤 순천도 장악했다. 뒤이어 광양, 곡성, 구례, 고흥 등도 반란군이 장악했다. 정부는 22일 계엄령을 선포, 가까스로 순천을 탈환했지만 여수는 강력하게 저항했다.
두 차례의 진압이 모두 실패하자 26일에는 바닷가 경비정에서 대대적인 포격을 가하며 상륙을 시도했다. 27일에야 9일 동안의 반란사건이 겨우 진압됐으나 2,300여 명이 사망했고, 2.800여 명이 군사재판에 회부됐다.
이 사건으로 국가보안법이 제정되고 주한미군의 철수가 연기됐으며 군내 좌익들도 척결됐다. 도망친 반란군은 산으로 들어가 빨치산 투쟁을 전개하며 6.25를 맞았다. 한국전쟁의 서곡이었다
1948년 이승만 대통령, 맥아더 사령관 초청으로 일본 방문
1948년 대한식량공사 발족
1939년 터키, 영국 프랑스와 상호원조조약에 조인
1938년 비운의 혁명가 김산, 중국공산당에게 처형
비운의 혁명가 김산(본명 장지락)이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반혁명 간첩 혐의로 몰려 1938년 10월 19일 처형됐다. 33세의 젊은 나이였다. 사실 10월 19일은 그의 정확한 사망일자는 아니지만, 이날은 김산의 경력을 심사한 중국 공산당 측에서 "완전히 조사할 수 없는 형편에서 `일본간첩`으로 처형한다"는 결정이 난 날이다. 그리고 그는 전선으로 가는 도중 갑작스럽게 처형됐다.
김산은 혁명가였고 시인이었으며 사상가였고 마르크스주의자였다. 1905년 평양 근교 용천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던 그는 더 많은 지식을 획득하기 위해 일본으로 갔으나 일제의 만행을 확인하고 1921년 만주의 군사학교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주변에서 활동하던 수많은 젊은 항일 급진주의자와 접촉하면서 무정부주의, 공산주의, 민족주의 등에 영향을 받으며 지하 혁명운동에 가담했다.
1925년 말 그는 광주에 있는 황포군관학교에서 훈련을 받는 한편, 후에 손문대학으로 바뀐 학교에서 경제학과 사회발전 역사를 공부했다. 1927년 12월 김산은 광동코뮌에 참가했으며, 공산당이 패배한 뒤에는 테러가 난무하는 와중에서 빠져나왔다. 1928년 9월 천신만고 끝에 홍콩을 거쳐 상하이로 돌아온 김산은 곧 북경(베이징)으로 가 북경의 북평시 지구당 조직부장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1930년 11월 장제스의 비밀경찰에 체포돼 일본 영사관으로 압송됐다가 이듬해 4월 풀려나 북경으로 돌아왔고, 1933년 다시 체포돼 신의주로 압송됐다가 역시 이듬해 석방됐다. 그러나 구금기간이 예상보다 짧아 공산당 간부들은 그를 일본 간첩으로 의심하기 시작했고 그의 당적복권은 보류됐다. 결국 김산은 트로츠키파 축출을 위한 이른바 '서간공작'에 연류돼 죽임을 당해야했다.
그 후 1983년 중국공산당이 "김산에게 덮어씌운 누명을 벗기고 명예와 당적을 회복시킨다"고 선포함으로써 45년 만에 `일본의 간첩`이라는 누명을 벗고 복권됐다.
잊혀질 뻔한 전설적인 항일영웅 김산의 행적은 김산이 1937년에 `중국의 붉은 별`로 유명한 에드가 스노의 부인으로 신문기자였던 님 웨일즈를 만나 3개월 간 20회의 구술을 통해 신비와 고뇌에 찬 자신의 짧은 생애를 밝혔기 때문이다. 이후 님 웨일즈는 당시의 구술 내용을 1941년 `아리랑 Song of Arirang`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뉴욕에서 출간했다.
1937년 원자 물리학의 기초 확립자 어니스트 러더퍼드 사망
1936년 중국 작가 루쉰(魯迅) 사망
1936년 10월 19일 유교적 봉건제도를 부정하고 새로운 민족문화 창출을 위해 일생을 바친 소설가 루쉰(魯迅)이 사망했다. 그는 중국 신문학의 선구자이자 문예운동가였고, 격동기의 중국에서 삶과 문학을 일치시키며 혁명적 지식인의 본보기를 보여준 사상가이자 혁명가였다.
1918년 발표한 `광인일기`는 중국 현대문학의 문을 처음 연 작품으로 평가받았으며, `아큐정전(阿Q正傳)`은 중국인들에게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맞먹는 명작으로 인기를 끌었다. 그의 작품집 `외침`은 1999년 홍콩의 `아주주간`지가 의뢰하고 문학평론가가 선정한 20세기 중국문학의 최고봉으로 손꼽힐 정도로 그의 작품은 문학적으로도 높이 평가받았다.
루쉰이 살았던 1880년대에서 1930년대까지는 그의 조국 중국이 제국주의와 봉건 잔재, 그리고 국내 파시즘의 발톱에 할퀴어 만신창이가 된 시기였다. 이 암울한 중국의 현실에서 루쉰의 선택은 싸움뿐이었다. 파시즘과 국민당 정권 그리고 패배주의와의 싸움이었다. 정치적 목적에의 복무를 표방하며 발표한 작품은 단편소설, 역사소설, 산문, 시 등 여려 형태로 표현됐지만 그의 문학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잡문`이라는 독특한 장르였다.
짧은 에세이 형식의 글인 잡문은 루쉰 이전부터 현대 중국문학에서 널리 사용되어 왔지만 루쉰의 등장으로 잡문은 비로소 문학의 성격을 띠었으며 갈고 닦여졌다. 잡문을 통해 그가 표현하고자 한 것은 언제나 `진보에의 열망`이었다.
1933년 조선어학회 한글맞춤법통일안 마련
1917년 전국에 홍수 인명피해 259명 가옥피해 6,730호
1913년 역둔토(驛屯土)특별처분령 공포(일본이민의 토지대여에 우선권 부여)
1909년 이탈리아의 정신의학자 체자레 롬브로조 사망
1906년 경향신문 창간
1894년 한글학자 외솔 최현배 출생
외솔 최현배는 주시경의 뒤를 이어 김윤경ㆍ이희승ㆍ정인승 등과 함께 일제하 및 해방후 국가건설기에 우리말과 글을 연구하고 보급 발전시키는데 온 생애를 바친 학자이다. 그가 지은 `우리말본`(1937), `한글갈`(1940) 등 20여종이 넘는 한글에 대한 저술과 4백여편에 이르는 각종 논문과 논설,수필 등은 한글학자로서 그의 뛰어난 공헌을 보여준다.
경남 울산에서 시골 선비 최병도의 장남으로 1894년 10월 19일 태어난 그는 13세까지 한학을 공부하다 상경, 한성고보(경기고의 전신)에 진학해 신학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일본의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그는 잠시 국내에 있다 다시 도일해 경도제대 문학부와 대학원을 수료하고 귀국, 1926년 연희전문학교 교수가 됐다.
연세대 교수로 취임하면서 일제의 우리 민족문화 말살정책에 거슬러 한글을 연구하면서 민족얼을 가누기에 힘썼다. 특히 한글학회운동을 주축삼아 그가 펼친 민족독립에의 레지스탕스는 삼얼운동으로 집약된다. ‘말-글-얼’을 삼위일체로 지키면서 키워간다’는 그의 지론이었다. 자그마하고 깡마른 체구에 경상도의 특유의 액센트를 구사했던 그는 6·25동란 중에도 한글대사전의 원고와 자료분실을 걱정하여 한글학회 지하실에 숨어 이를 고스란히 지키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1963년 건국공로훈장, 1970년 작고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받았다.
1859년 프랑스의 장교 드레퓌스 출생
1812년 나폴레옹1세의 러시아 원정 실패
1781년 영국군 요크타운 전투서 조지 워싱턴에게 항복, 미국 독립전쟁 종식
1745년 `걸리버 여행기`의 작가 스위프트 사망
1739년 영국, 에스파냐와 식민지 전쟁 시작
1405년 창덕궁 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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